서구권에 PC문화를 퍼뜨린 프랑크푸르트학파

마르크스는 유럽서 전쟁이 일어나면 각국의 노동자가 합심해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 예언하였으나, 1차 대전 발발 이후 전 유럽에서 노동자가 공산 혁명을 벌이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러시아에서 레닌이 공산혁명을 일으키긴 했으나 노동자들이 혁명의 주체는 아니었다. 1차 대전 종전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들 중심의 혁명을 일으키려면 서구 문명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독일에도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곡물무역을 하는 백만장자의 아들 필릭스 바일이다. 그는 모스크바의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를 본 따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연구할 공공정책 연구소를 설립했는데,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와 제휴를 맺고 있던 이 연구소는 결국 프랑크푸르트 학교로 불리게 된다. 이 학교는 1924년에 개교했지만 이미 1923년부터 20여명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여 마르크스 연구 세미나를 일주일에 한 번 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자 게오르기 루카치였다. 해당 세미나에서는 문화에 대한 루카치의 글이 바탕이 되었다.




한편, 루카치에 알아보자면 약간 맛이 간 사람이고,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돌아버린 사람이다.




그는 당대의 문화적 모순을 해결하려면 혁명으로 사회를 파괴해야하며 전세계적으로 가치체계를 전복시키려면 기존의 가치를 붕괴시키고 혁명가들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루카치는 헝가리 볼셰비키 정부인 벨라 쿤 정권 하에서 문화담당관이 되어 문화테러리즘 정책의 일환으로 급진적 성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해 헝가리 사회의 도덕적 가치관을 파괴하는 데 착수한다. 루카치는 아동들의 성적 윤리관을 훼손시키면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교회에 큰 타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 가히 변태적인 성교육을 실시한다. 루카치는 학교에 자유연애(성적 문란)와 성관계에 대한 강의를 만들고 성행위를 생생하게 묘사한 안내책자를 배포했으며 학생들에게 기독교의 도덕윤리관가 일부일처제와 부모와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고 조롱하라며 부추겼다.




허나 정작 헝가리의 노동자계층은 헝가리 정부에 “주먹을 꺼내기 전에 좀 조용히 했으면 좋겠어”라고 분노한 터라 정권은 팍 꼬라박고 말았다.




다시 프랑크푸르트 학교 얘기로 돌아오자면, 학교의 개교 이후 마르크스 연구 세미나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프랑크푸르트 학교에 소속되게 되었고 루카치의 지도 하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경제 용어에서 문화 용어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프랑크푸르트 학교의 초대 총장은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경제학자인 오스트리아인 칼 그륀버그다. 그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연구했으나, 1930년대에 총장으로 취임한 마르크스주의자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노동자계급 혁명의 대체 방안으로 문화적 상부구조에 주목한다. 호르크하이머는 “우리는 총으로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차츰차츰, 한 해 두 해,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진적으로 교육기관, 공공조직에 침투해 그들을 마르크스주의자로 만들어 보편적인 평등주의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라고 했다.




프랑크푸르트 학교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접목하는 데 집중했다. 전통적 경제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억압을 받는다고 본 반면 프랑크푸르트 학교는 서구문명에서는 모두가 끊임없이 사시나무 떨 듯이 와들와들 심리적 억압을 받고 있는데 이를 해결하고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면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비판이론을 미국 사회에 적용했고 연구가 붙는 각종 학문 분야와 편견에 대한 연구를 양산해냈다. 이러한 연구들은 1950년에 절정에 달했는데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책 《권위주의적 성격》이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서 그는 미국인들은 파시스트적인 기질이 다분하고(?) 미국 전통문화를 지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 대해 느끼는 애착, 가족에 대한 자부심, 기독교, 전통적인 성역할과 성에 대한 태도, 애국심을 병리현상(!?)이라고 낙인찍었다.



오늘날 신좌익이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사람들을 나치, 극우, 파시스트, 일베, 토착왜구라고 낙인찍고 감수성 훈련,편견퇴치 훈련, 무의식적 편견 교정, 다양성 훈련과 같은 정신치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으로 돌아갔지만 마르쿠제는 미국에 남았다.



마르쿠제는 브랜다이스대학과 UC 샌디에이고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1930년대에 시작한 지적인(?) 작업을 완성해는데 매진했고 1950년대와 60년대에 프로이트의 이론과 마르크스 이론을 통합하는 작업을 이어나가면서 신좌익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호르크하이머가 30년대에 제기한 의문(혁명의 주체로 노동자계급을 대체할 집단은 누구인가에 답을 한 사람은 매우 능수능란한 마르크스주의자인 마르쿠제였다. PC 연대 세력을 구성하는 억압받는(?) 피해자 집단(학식충, 기열계집, 앰흑, 똥꼬충·보빔충 등)을 탄생시킨 사람이 마르쿠제다. 60년대 학생운동에 주입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 가운데 핵심은 프랑스 성해방운동의 부활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1950년대에 파산해 혁명을 일으킬 노동자계급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역사상 그 어떤 체제보다 물질적 풍요를 많은 이들에게 누리게 해준 자본주의에 만족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새로운 혁명의 원천을 발굴해야 했고 그 가운데 하나를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삼고 이를 학문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론을 개발했다.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성적 행동에 대한 제약을 비판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도착’을 내세우며 인간에게는 이성애적 성적 취향이라는 제한된 개념을 초월하는 성적 표현이나 성적 쾌락을 발현할 잠재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생물학적인 번식과 무관한 다양한 형태의 성과 나르시시즘을 바탕으로 한 계몽적이고 행복한 사회 구현이 유토피아로 가는 열쇠라고 주장했다.



1960년대 말 마르쿠제가 제시한 “억압적 관용”이라는 개념은 좌익의 이념 외에는 그 어떤 이념도 허용하지 않는 PC 문화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마르쿠제는 《순수관용비판》이라는 에세이집에 수록된 “억압적 관용”이라는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억압을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구성원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억압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복종한다. 자유로운 사회가 소수에게 관용을 베푸는 이유는 그들의 투쟁의식을 약화시키려는 기만이다.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면 오류가 전파되므로 표현의 자유는 그 자체로서 선이 아니다. 진실을 소유한 혁명적 소수는 다수를 재교육시켜 오류에서 해방시켜야 하므로 해로운 의견을 억압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좌익, 체제전복, 혁명적 폭력은 허용하되 우익, 기존의 사회제도, 반사회주의 정서를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억압적 관용이야말로 진정한 관용, 즉 해방적 관용이며 억압적 관용을 통해서만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개념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 사고를 낳는다.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을 전파하는 주요 통로 역할을 했고 그를 통해서 신좌익은 나머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만나게 되었다. 1960년대에 학생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을 학생운동의 정신적 원천으로 삼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은 학계의 급진적인 다문화주의와 이를 실천하는 PC문화의 산파 역할을 했고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 홍지수 저 《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 참고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ightwingpolitics&no=176&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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