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것은 죄악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약한 건 죄악."
이 얼마나 스파르타 군대 느낌의 문장인가. 귀에 철제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금속 냄새, 피 냄새, 군기 냄새까지 한 문장 안에 다 들어 있다. 처음 들으면 묘하게 멋있다. 강자의 슬로건이란 건 원래 그렇다.
문제는 이걸 외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 원칙을 지키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는 거다. 패배가 자기 차례로 돌아오면, ‘약한 건 죄악’이라는 말은 증발한다. 기가 막히게 빨리 증발한다.
패배한 자의 행동 레퍼토리는 간단하다.
옵션 1: 귀족 모드. "네 따위가 감히?"
옵션 2: 피해자 모드. "내가 패배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 탓이야!"
둘 다 똑같다. 책임을 남탓으로 던진다. 그 과정에서 교리와 원칙은 잘게 부서져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이게 웃긴 건, 역사 속에서 이런 태도는 종종 ‘자기 집을 불태우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거다. 여기서 네로 칙령이 등장한다. 하지만 로마 황제 네로 얘기가 아니다. 이름만 네로일 뿐, 주인공은 20세기의 또 다른 제국 황제—아돌프 히틀러다.
1945년 3월, 제2차세계대전이 끝장나기 직전, 히틀러는 ‘네로 칙령’을 내린다. 원래 이름은 Befehl betreffend Zerstörungsmaßnahmen im Reichsgebiet. 한마디로, “독일 땅에 있는 산업, 운송, 통신, 군수 시설—연합군 손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전부 파괴하라.” 강철 다리든, 철도든, 공장이든, 심지어 수도와 전기도 전부 끊어버리라는 명령이었다. 그 논리는 단순했다. 내가 이걸 지키지 못할 거면, 아무도 못 가지게 하겠다.
이건 패배의 ‘깔끔한 승복’이 아니다. 이건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가, 자기 나라를 인질로 잡고 함께 자결하겠다고 선언하는 거다. “약한 건 죄악”이라는 구호가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하면 나오는 결론이 바로 이거다. 나는 약자가 될 수 없으니, 내가 사라지는 순간 세상도 불타야 한다.
물론, 이 명령은 100% 이행되지 않았다. 히틀러의 군수전쟁생산 장관이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를 무시하고 방해했다. 각 지방 행정관들에게 “그 명령은 그냥 안 지키는 게 좋다”고 은밀히 설득했다. 그래서 독일은 폐허로 남긴 했지만, 완전한 붕괴는 면했다. 하지만 네로 칙령 자체는 중요한 상징이다. 권력을 쥔 자가 자기 몰락을 외부 탓으로 돌릴 때, 그 다음 단계는 종종 이렇게 자기 기반을 파괴하는 쪽으로 간다.
힘은 늙는다. 근육도, 금속도, 심지어 제국도 늙는다. 로마, 청나라, 원나라, 오스만 제국, 프랑스 제국도, 소련 기타 등등. 쇠락은 정치가 아니라 물리 법칙이다. 문제는, ‘약한 건 죄악’이라 외치는 자들이 정작 자신들에게 이 법칙이 (안 좋은 방향으로)적용될 때는 이 법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거다. 자기들이 늙어가고 약해지는 순간, 그 교리가 자기 목을 조른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등장하는 게, 바로 이런 네로 칙령적 사고다.
“나는 약자가 될 수 없다 → 나는 약하지 않다 → 약하다는 건 외부의 음모 때문이다 → 그러므로 외부의 손에 들어갈 내 기반은 다 부숴야 한다.”
이건 정치판의 고전적인 자기파괴적 피드백 루프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제국 군부가 전쟁 패배의 원인을 내부 배신자 탓으로 돌리는 배후중상설을 펼친 것도, 1990년대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지역이 소련의 몰락을 ‘CIA의 음모’로 포장한 것도, 다 같은 패턴이다. 내리막길에 들어선 순간, 원인은 정치권이 아니라 내부의 배신자 혹은 외부라는 결론을 강제한다. 그리고 그 결론이 내려진 순간, 이들은 ‘패배의 피해 최소화’가 아니라 ‘패배의 최대 파괴화’를 선택한다.
결국, ‘약한 건 죄악’이라는 구호는 강자가 자기 자신에게 거는 마법이다. 마법은 강할 때는 멋있다. 약해지면, 부메랑이 돼서 돌아온다. 그리고 그 부메랑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을 같이 불태우는 것이다. 히틀러의 네로 칙령은 그 극단적인 버전일 뿐이다.
패배 자체는 비극이 아니다. 진짜 비극은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불태우며, 다른 모두를 재 속에 묻어버리는 그 광경이다. 역사는 이런 장면을 질리지 않게 반복 상영한다. 그리고 관객석은 언제나 만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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