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의 버퍼(Buffer)
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의 버퍼(Buffer)
근대 정치철학이 정치적 자유를 그 자체로 지고선(至高善)인 궁극적 목적으로 상정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가 선험적으로 유용하며 총량이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도그마적 전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본질주의적 전제를 과감히 걷어내고, 자유를 가치중립적인 기능적 체계의 일부로 재규정한다면 정치 체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완전히 전환된다.
컴퓨터 시스템 아키텍처에서 '버퍼(Buffer)'는 초고속 연산 장치인 CPU와 상대적으로 데이터 전송 속도가 느린 메인 메모리 혹은 저장장치 사이에서, 하드웨어 간 클럭 주파수의 현격한 격차로 인해 발생하는 병목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개입하는 임시 데이터 완충 공간이다. 버퍼는 그 자체로 영속적인 데이터 보존을 목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이질적인 두 물리 체계가 맞물릴 때 발생하는 데이터 손실과 제어 흐름의 붕괴를 방지하여 시스템 자원의 전체 최적화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모듈에 불과하다.
이러한 컴퓨터공학적 메커니즘을 대입하면, 정치적 자유 역시 영원불멸의 천부인권이 아니라 체제 변동이나 권력 이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급격한 정치적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고안된 가변적인 임시 충격 완화 장치로 재해석할 수 있다. 즉, 자유는 도덕적 지향점이 아니라 통치 공학적 필요에 따라 탈부착이 가능한 하나의 '소프트웨어 모듈'이며, 전이(Transition) 과정이 완료되어 물리적 정당성의 버퍼가 비워지거나 체제의 안정성이 확립되는 순간, 시스템의 효율성을 위해 언제든 중앙 권력으로 다시 회수(Flush)될 수 있는 한시적 자원이 된다.
자유를 한시적 완충재로 규정하는 순간, 존 로크와 공리주의로 이어지는 영미식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 전통과의 단절은 필연적이 된다. 영미식 전통에서 자유는 국가나 법률에 의해 사후적으로 승인되는 권리가 아니라, 국가 성립 이전부터 인간에게 내재하는 양도 불가능한 천부적 자연권(Natural Rights)이자, 주권 권력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선험적인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의 방어벽이기 때문이다. 이 가치 체계 내에서는 자유의 정당성이 국가에 선행하며, 정치 권력은 오직 그 자유를 외적의 침입과 침해로부터 보존한다는 신탁 계약의 한도 내에서만 한시적인 정당성을 획득한다.
반면, 자유를 시스템의 안정화를 위한 버퍼로 파악하는 도구적 시각은 체제 이행이라는 예외적 과도기에만 자유의 효용을 인정하므로, 전이 과정이 종결되면 자유의 도구적 수명도 함께 소멸한다고 본다. 이러한 유한한 자유관은 근대 자유주의보다는 오히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기계론적 주권론에 수렴한다. 홉스적 문맥에서 원초적 자유란 주권적 질서가 부재한 상태, 즉 공포와 폭력이 지배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라는 야만적 자연상태에서 각자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휘두르던 무제한적이고 파괴적인 물리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연상태의 항시적 죽음의 공포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인간들은 사회계약을 체결하고 자신들이 가졌던 원초적 권리와 자유를 절대주권자인 '리바이어던(Leviathan)'에게 전면 양도하였으며, 그 대가로 실정법적 질서가 확립된 이후의 자유는 주권자가 통치 편의상 묵인하거나 허용한 여백 내에서만 제약적으로 존속한다. 결과적으로 이 관점은 자유가 선행하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질서(정부)가 구성된다는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을 정면으로 뒤집어, 질서의 확립과 공고화가 비로소 자유의 허용 한계와 총량을 규정한다는 '존재론적 순서의 역전'을 단행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이론적 파격성을 지닌다.
다만 이러한 홉스적 자유관이 현실 정치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적대적 경합이 종국적인 종착지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특수한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진영 간의 승패가 확정되지 않은 권력의 공백기이자 과도기 체제 내에서만 자유는 비로소 완충재로서의 정당성을 획득하는데, 이는 우파 진영이 좌파 진영의 기존 지배 체제에 균열을 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정치적 자유라는 상징 권력을 전술적 무기로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식의 헤게모니 투쟁 관점에서 볼 때, 제도권 내에 공고화된 좌파의 이데올로기적 성채에 맞서는 우파에게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대항 헤게모니(Counter-Hegemony)를 구축하기 위해 긴급히 징발된 정치적 자원에 가깝다. 그러나 이 진지전(War of Position)이 끝나고 우파가 전면적인 기동전(War of Movement)에서 승리하여 국가를 장악하게 되면, 체제의 지속성과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유의 허용 범위를 대폭 유보하는 대신, 국가 안보와 사유 재산권의 절대적 수호를 최우선시하는 권위주의적 질서로 통치 패러다임의 전면적인 성격 전환이 발생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자유는 기존의 전술적 도구라는 유용성을 상실하고 오히려 체제 안정을 교란하는 내재적 위협 요인으로 전락하며, 바로 여기에 도구적 자유주의의 숨겨진 불문율이 부상한다.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치적 현실주의가 지적하듯, 이 관점에서의 자유란 영구적인 권리가 아니라 적대 세력이 완전히 해체되고 주권자가 필요에 따라 법적 유보나 독재적 단행을 감행할 수 있는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의 전적인 권력을 손에 넣을 때 비로소 그 도구적 소명을 다하고 폐기되는 한시적 유예에 불과하다. 결국 현재 우파가 자유의 가치를 역설하는 표면적 현상은 자유 그 자체에 대한 가치론적 지향 때문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 자유를 제도적으로 완전히 회수하고 일방적 질서를 강제할 만한 절대적 물리력과 통치 결단력을 아직 완전히 구축하지 못했다는 방증일 뿐이다.
이러한 통치 공학적 불문율은 근현대 경제학의 핵심적인 방법론적 연역 규칙인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 즉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가설적 통제 전제와 깊은 구조적 연관성을 지닌다.
경제학은 ceteris paribus(세테리스 파리부스), 즉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전제 위에서 작동한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 한계효용 이론, 가격탄력성 등 거의 모든 경제 이론은 관심 변수 외의 외생 변수들을 고정시킨 채 분석을 진행한다. 앨프리드 마셜이 이 방법론을 체계화한 이래, 경제학은 이 인위적이고 고립된 조건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학문이 되었다.
현대 우파 담론 역시 유사한 구조적 전제를 갖고 있다. '사회는 이래야 한다', '사람은 이래야 한다', '정책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모든 규범적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보편 명제처럼 제시되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조건절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그 조건은 바로 '좌파적 헤게모니가 해체되고 우익 정부의 권력이 강력하게 행사되는 상황이라면'이다. 달리 말하면, 우익 독재라는 가정이 현대 우파 담론의 ceteris paribus로 기능한다.
이 전제가 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현대 서구 및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좌파적 가치 체계가 사실상 준헌법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우파의 현실 인식 때문이다. PC(정치적 올바름)주의, 워키즘(wokeism, 인종·성별·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에 경각심을 갖고 깨어있으려는 신념 및 행동주의) 등은 더 이상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제도·미디어·교육·기업·법원·국제기구 전반을 관통하는 지배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이 상황에서 우파는 정치를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평범한 민주주의적 절차' 안에서는 이민 제한, 반LGBT, 전통적 가부장제 강화, 재정보수주의 등 우파적 정책이 실질적으로 통과될 수 없다. 설령 선거에서 승리하더라도, 사법부·관료제·미디어·기업·시민사회가 총동원되어 해당 정책을 무력화시킨다.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 헝가리 오르반 정권의 반LGBT 정책, 폴란드 법과정의(PiS) 정부의 사법개혁 등이 겪은 저항이 그 사례다.
결국 우파 입장에서 보면, 현 체제 하에서 자신들의 규범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든 우파 담론은 무의식적으로 '좌파의 반발·법적 저지·매스미디어의 린치·기업 보이콧·국제 제재 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가정한 채 전개된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의 ceteris paribus가 하는 역할과 비슷하다. 인과관계를 순수하게 고립시켜 분석하기 위해, 방해 요소들을 모두 '고정'시키는 것이다.
경제학의 ceteris paribus는 이론적 유용성을 갖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충족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가정 자체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파 담론의 전제 조건 역시 현실에서는 거의 충족되지 않는다.
좌파 헤게모니가 해체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파적 규범을 주장하면 '비현실적', '낭만주의', '위선'으로 비쳐진다. 반대로 그 조건을 명시적으로 전제하면 '우익 독재 찬양', '반민주주의', '파시즘 미화'로 공격받는다. 우파 담론은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재적 모순이다. '우리가 원하는 질서를 실현하려면 먼저 좌파적 질서를 해체해야 하는데, 그 해체 자체가 (대안우파를 제외한)주류 우파의 규범적 이상(자유, 도덕, 질서 등)과 충돌한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좌파 미디어를 억압해야 하고, 법치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좌파 사법부를 무력화해야 한다. 주류 우파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거나 모순을 대놓고 직면하고 직진하지 않는 이상, 우파 담론은 영원히 케케묵은 이론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파 담론이 진지하게 논의를 이어가려면, 단순히 '우파적 가치'를 외치는 것을 넘어 'ceteris paribus 조건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좌파 카르텔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우익 주권(主權)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안착시킬 것인가? 앞서 말했듯, 이 시스템 전환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현대 우파 담론은 영원히 조건 속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조건을 현실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주류 우파의 규범적 이상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딜레마는 여전히 남는다. 그래서 현대 주류 우파 담론은 구조적으로 공허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공허함은 ceteris paribus라는 방법론적 전제의 불가피한 귀결이다. 경제학이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이론적 정합성을 유지하듯, 주류 우파 담론 역시 현실을 바꾸지 못하면서도 규범적 일관성을 유지하려 한다. 그것이 암묵적 전제 위에서 작동하는 담론의 숙명이다.
이처럼 우익 현실주의가 마주한 궁극적인 비극은 규범적 지향과 실천적 수단 사이의 구조적 불일치에 있다. 기존의 지배 구조라는 제약 조건을 무력화하고 권력 구도를 재편하려는 실천적 요구 앞에서, 그들이 수호하려던 초월적 지위의 '정치적 자유'는 철저히 파괴용 도구의 지위로 격하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자유는 수동적 권리를 누리는 안온함이 아니다. 오히려 강고한 지배 체제의 장벽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현실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주체적인 행동력, 즉 실천적이고 능동적인 파괴력을 내부로부터 전면 촉발하여 투쟁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한시적 자원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적대적(좌파적) 성채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유라는 칼날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나면, 우파의 새로운 질서가 안착하는 종국적 국면에서 자유는 목적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가차 없이 최적화 시스템의 통제 범주 안으로 수렴하며 도구적 소멸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현실을 바꾸지 못하면서 규범적 일관성만 유지하려는 주류 우파의 공허함"을 탈피하려는 순간, 자유는 투쟁의 과도기에만 켜지는 휘발성 버퍼라는 이 글의 냉혹한 대전제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통치 공학적 불문율이 내포한 냉소주의는 현대 정치행태학(Political Behaviorism)이 포착한 유권자들의 실증적 행태를 통해 강력하게 지지된다. 헌법적·이론적으로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가장 광범위하게 보장받는 진영의 지지층을 분석해 보더라도, 정작 자신들이 추앙하는 당파적 권력이 독단적 행보를 보일 때 이에 실질적인 상호견제나 제동(브레이크)을 작동시키는 사례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는 강력한 정당 정체성(Party Identification)과 진영 논리에 매몰된 유권자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모순된 정책적 결단에 직면했을 때, 비판적 자유를 행사하기보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해결하기 위해 권력의 독주를 맹목적으로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내부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고자 이성적 이견을 개진하는 진영 내 온건파의 소수 의견은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Elisabeth Noelle-Neumann)의 '침묵의 나선 이론(Spiral of Silence)'이 설명하듯, 주류 집단으로부터 고립되거나 배신자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급격히 소외되며 중심 권력의 의사결정 궤적에 어떠한 유의미한 충격도 주지 못한다. 이처럼 자정 능력을 상실한 내부 견제 메커니즘의 붕괴는, 개별 주체들이 명목상 소유한 자유의 총량과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자유의 크기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존재함을 증명하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자유란 헌법적 제도로서 법전에만 박제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통치 현실 속에서는 실천적 유용성을 상실한 채 휴면 상태로 방치되어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실증적 관찰이 도출하는 결론은 지극히 냉소적인 현실에 닿아 있다. 원자화된 개별 유권자의 관점에서 자유란 상시적으로 유통되는 화폐가 아니라 권력의 예외적 변동기에만 잠시 허용되는 추상적 권리이며, 거시적인 평시 상태에서는 실질적인 효용 가치를 실현하지 못한 채 장부상으로만 기록되어 있는 동결된 신용 잔액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환상이 걷힌 이 냉소적 진단은 정교하게 기획된 이데올로기적 귀결이며, 자유의 본질을 영구불변의 가치가 아닌 시스템의 과부하를 일시적으로 제어하는 통치 공학적 '버퍼'이자 '휘발성 모듈'로 파악하는 기능주의적 자유관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논리적 종착점이다.
이 시점에서 오랫동안 파편화된 형태로 오용되어 온 에릭 폰 퀴넬트-레딘(Erik von Kuehnelt-Leddihn)의 텍스트적 맥락을 엄밀히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흔히 세간에 유통되는 "우파는 옳고 좌파는 그르다"는 명제는 단순히 정치적 당파성을 드러내는 선동적 구호로 소비되지만, 실제 액턴 연구소(Acton Institute) 인터뷰 원문에서 그가 기획한 논증은 정치적 개념의 계보학적 변천사와 고도의 기호학적 수사체계를 복합적으로 포괄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담론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증언한다.
"정치적 함의를 지닌 '리버럴(Liberal)'이라는 용어는 스페인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스페인은 자유를 과도할 정도로 가장 높게 평가해 온 민족이었기에, 지난 150년 동안 수많은 아나키스트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침략에 저항하던 스페인은 해방된 남부 카디스에서 자유주의 헌법을 선포했고, 그 지지자들은 '로스 리베랄레스(los liberales)'라 불렸습니다. (그들은 반대파를 '로스 세르빌레스[los serviles, 노예 같은 자들]'라고 비난했죠.) 1816년 사우디(Southey)가 영국에서 처음 이 표현을 썼을 때는 여전히 스페인어 형태인 '리베랄레스'였습니다. 월터 스코트 경(卿)이 프랑스어 형태인 '리베로(libéraux)'를 채택했고, 1832년 대규모 의회 개혁과 맞물려 휘그당이 리버럴이라는 라벨을, 토리당이 보수주의라는 라벨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기이하게도 자신의 신문을 '보수주의자(Le conservateur)'라고 부르며 그 단어를 발명한 이는 리버럴 성향의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이었지만, 그 초기 단계에서 리버럴과 보수주의자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나는 '리버럴'이라는 용어의 왜곡을 목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진짜 리버럴들은 스스로를 '리버테리언(libertarians)'이라 부르게 되었죠. 자유주의라는 크고 환대적인 집은 모든 창문과 문을 열어두었고, 그리하여 외부의 바람이 건물 전체에 스며들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리버럴로서 인간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고 '시대의 징후'를 존중해야 했는데, 불행히도 그 징후들은 좌파적이고 집단주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리버럴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독재적(illiberal)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당시 유진 라이언스(Eugene Lyons)가 편집장으로 있던 <아메리칸 머큐리(The American Mercury)>는 일련의 '신조(Creeds)'들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보수주의자의 신조', '반동주의자의 신조', '사회주의자의 신조', 그리고 별도로 '구식 리버럴의 신조'와 '신식 리버럴의 신조'를 실었죠. 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는 사회주의와 전능한 국가 권력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내가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호주, 유럽에서 연설할 때는 나 자신을 리버럴이라고 정체화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랜 전통을 지닌 표현들이 이토록 쉽게 혼동되는 미국에서는 매번 설명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날 유럽에서 우리는 더 이상 보수주의자와 리버럴을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유럽적 의미의 리버럴, 더 정확히는 '네오-리버럴(Neo-Liberal, 신자유주의자)'이라 생각하며, 결코 나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문예지 <크로니클스(Chronicles)>는 '보수주의자인가, 우파인가?'라는 제목의 내 칼럼을 수락한 바 있습니다. 나는 '우파(Rightist)'라는 단어를 지지합니다. 아시다시피 우파는 옳고 좌파는 그릅니다(Right is right and left is wrong). 그리고 모든 언어에서 '오른쪽'은 긍정적인 의미를, '왼쪽'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어에서 '왼쪽(la sinistra)'은 '불행이나 재앙(il sinistro)'을 뜻하며, 일본어는 악(惡)을 '왼쪽 앞(左前(ひだりまえ))'으로 표현합니다. 성경의 전도서에도 '지혜한 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한 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퀴넬트-레딘의 이 방대한 진술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식의 비판적 계보학(Genealogy)적 관점에서 볼 때 권력과 언어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차 사료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고대 언어들의 어원을 추적하며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 개념이 본래 강자와 약자의 위계적 권력 관계에서 비롯된 언어적 가공물임을 폭로했듯, 퀴넬트-레딘 역시 '자유'나 '리버럴'이라는 순결한 기표가 시공간적 변천 속에서 어떻게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전유되고 왜곡되었는지를 계보학적으로 추적한다. 특히 미국적 맥락에서 리버럴이 집단주의와 국가 권력의 전능함을 옹호하는 기만적 수사로 오염되는 과정을 비판하면서, 그는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단칼에 정리할 대안으로 역사적 가변성에 휘둘리지 않는 인류학적 무의식의 언어 구조 체계를 소환한다.
가치론적 시시비비를 이성적으로 논증하는 사후적 변론 대신, 이탈리아어, 일본어, 고대 히브리어 성경의 구조 속에 이미 우파의 정당성과 좌파의 부정성이 선험적으로 예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병치하는 그의 화법은 고도의 수사학적 전치(Displacement)다. 주관적 견해를 언어 구조 자체가 보장하는 객관적 진리인 것처럼 환원시키는 이 도발적인 텍스트를 차용하면서도, 본고의 서술 주체는 이를 격정적인 선동의 구호로 비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용의 인용'이라는 메타적 거리를 유지한 채 담론 분석의 객관적 대상(Objet)으로 철저히 통제하고 배치하는 지적 여유를 선보인다.
결국, 이 글이 도달한 최종적인 기획은 자유주의의 두 진영이 공유하는 '동상이몽의 시제(時制)'를 드러내는 것에 있다. 자유를 영원히 지속될 선험적 목적으로 신봉하며 모든 문과 창문을 열어두었다가 좌파적 집단주의에 성채를 내어준 '고전적·유토피아적 자유주의자'들의 시간선은 과거와 현재의 오염 속에서 파산했다. 반면, 자유를 체제 이행기의 충격을 제어할 계산된 '버퍼'이자 '통치 공학(Governance Engineering)적 수단'로 파악하는 현실주의자들의 시간선은 철저히 통제된 질서의 안착이라는 종말론적 미래를 향해 수렴한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기존의 환상을 해체하며 가장 차가운 결론에 도달하는 이 화법은, 텍스트 전체를 지배하는 문체적 승리이자, 자유라는 버퍼가 마침내 중앙 권력으로 회수(Flush)되는 순간을 응시하는 통치 공학적 비판 담론의 지극히 냉정하고도 완벽한 종착점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글에서 해부한 정치적 자유의 진정한 초상은 선험적 정당성을 상실한 통치 공학적 매개체에 불과하다. 자유는 유권자가 마땅히 수호해야 할 목적론적 권리가 아니라 체제 이행기의 충격을 제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허용된 기능적 수단이며, 당대 체제 내에서 자유의 현상학적 외양이 정당성을 획득하는 근거는 규범적 당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진영 간의 적대적 경합이 종국적인 종착지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정세적 미완결성에 기인한다.
더욱이 이러한 전술적 도구로서의 자유마저도 거시적인 평시 상태에서는 대다수 유권자에게 실현되지 않은 채 동결된 신용 잔액으로 방치될 뿐이다. 이 현실주의적 진단이 민주주의적 지배 체제에 길들여진 유권자들에게 심각한 실존적 불안을 야기하는 이유는, 자유를 항구적인 소유물로 오인하는 맹목적 낙관론 속에서는 권력의 은밀한 자유 유보 메커니즘을 결코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유의 본질이 전이 과정의 병목을 완화하는 휘발성 버퍼에 불과하다면, 시스템의 최적화와 질서 공고화가 완료되는 순간 버퍼 내부의 데이터는 가차 없이 비워지며(Flush), 이 기능주의적 회수의 공정은 체제 내부의 어떠한 마찰이나 가시적인 파열음도 없이 극도로 고요하고도 전격적으로 단행될 수 있다.
따라서 자유를 형이상학적 목적으로 숭배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와 자유를 통제 가능한 버퍼로 파악하는 통치공학적 현실주의자는 외견상 동일한 언어를 공유하는 듯하지만, 실존적으로는 결코 교차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론적 시제(時制)' 위에 서 있다. 전자의 시간선이 역사적 공간의 전방위에 걸쳐 자유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무한성에 저당 잡혀 있다면,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의 미래 시제를 공유하는 후자의 시간선은 시스템의 안정을 위해 자유라는 버퍼가 전면적으로 회수되고 유보되어야 할 종말론적 임계점을 이미 철저히 계산된 정무적 판단 속에 산입(算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냉혹한 현실주의가 도달한 종착점은, 역설적이게도 우파 담론이 스스로를 향해 가해야 할 가장 치열한 내부적 경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자유를 체제 이행기의 한시적 완충재로만 취급하고 질서의 확립과 동시에 이를 권력 내부로 회수하려는 시한부적 관점은, 과거 전대미문의 파괴를 낳았던 극좌 권위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이 전체주의적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했던 도구주의(Instrumentalism)적 전술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파가 적대 세력의 성채를 무너뜨린 이후에도 도구로 전락한 자유를 다시 초월적 '목적'의 자리로 구출해내지 못한다면, 그들이 그토록 혐오했던 전체주의의 괴물과 스스로 닮아가는 가치론적 파산을 맞이하게 될 뿐이다.
우파 권력이 승리 이후에도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는 이유는 낭만적인 민주주의의 수호나 도덕적 결벽증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질서의 영속성과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철저한 정무적 이익에 기반한다. 내부 견제와 비판의 자유라는 버퍼를 완전히 제거한 절대적 독재 체제는, 겉보기에는 완벽한 질서 같지만 내부의 부패를 거르지 못하고 작은 외부 충격에도 한순간에 전면 붕괴하는 극도의 '취약성'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파는 권력의 정점에서 내부 소신파의 이견이나 반대 세력의 최소한의 저항 줄기조차 전면 말살하고 싶은 유혹에 직면할 때, 체제의 경직으로 인한 파멸을 막기 위해 스스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결국 우파가 직면한 진정한 과제는 승리 이후에 자유를 회수하는 눈앞의 결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장기적 생존을 위해 권력의 자제력을 증명함으로써 그 가변적 버퍼를 결코 부러지지 않는 '유연하고 강인한 질서'의 영원한 주춧돌로 전환해내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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