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번햄, 마키아벨리의 명성
제임스 번햄, 『마키아벨리주의자들: 자유의 수호자들』
제2부 마키아벨리: 권력의 과학
V 마키아벨리의 명성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믿는다. 당장은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세상에 진실과 깨달음을 가져온 이들에게 마땅한 평가를 돌려준다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그의 이름과 업적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때로 조르다노 브루노를 화형에 처하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감옥에 가두며, 찰스 다윈을 비난하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망명길에 내몰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역사는 결국 올바른 판단을 되찾고, 새로운 세대는 무지와 미신, 그리고 허위의 어둠을 뚫고 나아간 정신의 선구자들을 알아본다고 믿는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역시 분명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사용한 무기와 방법, 곧 진실과 과학의 방법은 갈릴레오, 다윈, 아인슈타인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맞서 싸운 대상은 인간에게 훨씬 더 중대한 문제였다. 그는 별이나 원자에 대해 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 말하려 했다. 그의 구체적인 결론 가운데 일부는 틀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이 늘 그러하듯, 그의 방법 자체는 그 오류를 바로잡을 길을 열어준다. 증거가 자신의 견해를 반박한다면,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기꺼이 수정하자고 말했을 사람도 바로 마키아벨리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키아벨리의 이름은 이처럼 위대한 인물들과 나란히 놓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은 비난과 불명예를 뜻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의 이미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토퍼 말로가 희곡 《몰타의 유대인(The Jew of Malta)》의 서문에서 마키아벨리의 입을 빌려 스스로를 이렇게 말하게 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이들에게는 내 이름이 혐오스럽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아끼는 이들은 그런 비난으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내가 바로 마키아벨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라.
나는 사람을 믿지 않으니, 사람의 말 또한 믿지 않는다.
나를 가장 증오하는 자들이야말로 오히려 나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
내 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이들도, 결국은 그것을 읽고
그 덕에 베드로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리고 나를 내쫓고 난 뒤에는
내 뒤를 따르는 자들에게 도리어 독을 먹는다.
내게 종교란 어린아이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죄란 무지 말고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새들이 지나간 살인을 고발한다니!
그런 허튼소리를 들으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많은 이들이 왕관을 차지할 권리를 떠들어댄다.
그러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제국을 차지할 무슨 권리가 있었던가?
처음 왕을 만든 것은 힘이었다. 그리고 법은 피로 쓰였을 때 가장 확실한 힘을 가졌다. 드라코(Draco)의 법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평가가 내려졌을까? 마키아벨리가 실제로 품었던 생각, 그리고 그의 저작에서 분명하고도 솔직하게 밝힌 견해만 놓고 본다면, 세간의 평판에는 사실과 맞는 부분이 거의 없다.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런 오해가 이어졌다는 것을 단순한 착오로 돌리기는 어렵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이토록 꾸준히 왜곡되어 온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실제로 수많은 폭군과 독재자들이 마키아벨리에게서 권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법을 배웠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세간의 비난도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시대부터 폭군들의 스승 노릇을 해왔다. 이를테면 토머스 크롬웰은 낮은 신분 출신이었지만, 헨리 8세가 양심을 권력의 도구로 삼기를 거부한 토머스 모어를 대신해 재상으로 발탁한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마키아벨리의 책을 품에 넣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현대에 와서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대학 졸업논문을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썼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식은 본래 선악을 가리지 않는 중립성을 지닌다. 살인범이 독극물에 관한 연구를 악용했다고 해서 그 독의 화학적 성질을 밝혀낸 연구자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금고털이가 합금에 관한 공식을 이용했다고 해서 금속을 연구한 학자를 탓하지도 않는다. 폭탄이 바르샤바 혹은 충칭에 떨어져 폭발한다고 해서 화학자나 물리학자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는다.
물론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창세기》가 암시하듯 모든 지식은 본질적으로 위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분명하게 드러낸 지식이 악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리고 그것이 모든 지식이 맞이할 수 있는 운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유독 그만 특별히 악명 높은 인물로 낙인찍힌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혹독한 평가는 유럽 대륙 국가들보다 영국과 미국에서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미권 정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언제나 위선이었고, 위선은 본성상 진실을 마주하기보다 외면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키아벨리에 대한 평가는 대개 《군주론》만 읽고 내린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의 의도를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다른 저작들과의 맥락을 떼어놓고 읽으면 충분히 잘못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개별적인 사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쟁점이 그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내 생각에, 그리고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명성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사실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단테 알리기에리 식의 사고방식에 이끌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Metaphysics)》 첫머리에서 말한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앎을 갈망한다"는 명제를 너무도 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지식은 언제나 환영받는 것이라고 자명한 사실처럼 믿는다.
하지만 추상적인 형이상학의 원리에서 출발하지 않고,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살펴보면 의문이 생긴다. 자연세계를 대상으로 한 지식조차 세상에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오랜 시간 끈질기게 문을 두드려야 한다. 하물며 그 대상이 인간 자신일 때는, 사람들은 더욱 완강하게 문을 걸어 잠근다.
어쩌면 그런 저항이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의 본모습과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완전히 드러난다면, 그것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한 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다수 사람이 무엇을 원하든, 정치적 행위의 진실이 알려지는 것은 권력자들의 이해관계에 분명히 어긋난다. 마키아벨리가 제시했거나 적어도 근접하게 포착했던 정치의 진실이 널리 알려진다면, 폭정과 그 밖의 억압적인 정치 체제가 성공할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사회는 마키아벨리 자신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지배와 특권의 작동 원리를 마키아벨리만큼 이해하게 된다면, 더 이상 그 지배와 특권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권력자들과 그들의 대변인들, 곧 이른바 ‘공인된’ 사상가들, 법률가와 철학자, 설교자와 선동가, 도덕주의자와 언론인들은 마키아벨리를 끊임없이 비방할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자는 거짓말을 하고 약속을 어긴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말한다. 그는 인간 본성을 모욕하고 있다고.
마키아벨리는 야심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말한다. 그는 반대 세력, 우리의 적을 두둔하면서, 여러분을 위해 선의와 복지를 추구하는 우리에 대해 혼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공직자를 엄격히 감시하고 법 아래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말한다. 그는 체제를 흔들고 국가의 통합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권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말한다. 그의 진짜 목적은 여러분이 품고 있는 모든 신뢰와 이상을 산산이 부수는 데 있다고.
권력자들이 공개적으로 마키아벨리를 비난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적을 가려내는 일에 익숙했고, 그만큼 뛰어난 감각도 갖추고 있다. 설령 그 적이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처럼 추상적인 존재일지라도, 결코 타협하지 않을 상대라면 곧바로 알아본다.
James Burnham, The Machiavellians: Defenders of Freedom (Endeavour Media Ltd, 2019), pp. 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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