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 제1·제2의 자연법과 계약에 대하여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제14장. 제1·제2의 자연법과 계약에 대하여


자연권의 정의


흔히 학자들이 '유스 나투랄레(Jus Naturale)'라고 부르는 '자연권'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본성, 즉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원하듯이 자기가 가진 힘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한다. 따라서 이성적 판단에 따라 생명 보존에 가장 알맞은 수단이라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자유의 정의


자유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외부의 방해가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방해는 인간이 원하는 바를 행하는 데 필요한 힘을 일부 빼앗아 갈 수는 있다. 하지만 이성과 판단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자신에게 남은 힘을 사용하는 것까지 가로막지는 못한다.


자연법의 정의


'자연법(Lex Naturalis)'이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거나 이를 보존할 수단을 없애는 행위를 금지하고, 생명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빼놓지 않고 실천하도록 명령하는 이성의 규범이자 일반 원칙이다. 이 주제를 다루는 사람들은 흔히 권리(Jus)와 법(Lex)을 혼동하곤 하지만, 둘은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권리는 행하거나 멈출 수 있는 자유에 있지만, 법은 둘 중 어느 하나를 행하도록 결정하고 구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과 권리는 의무와 자유만큼이나 서로 다르며, 같은 문제에서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


앞 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의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다. 이 시기에는 누구나 스스로의 이성에 따라 지배를 받으며, 적들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물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상태에서는 모든 인간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심지어 타인의 신체에 대해서까지 권리를 갖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만물이 모두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이 자연적 권리가 유지되는 한, 그 누구도 자연이 허락한 수명을 다 채울 때까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다. 아무리 힘이 세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예외는 없다.


근본적인 자연법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평화를 얻을 희망이 있는 한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평화를 얻을 수 없을 때는 전쟁의 모든 수단과 이점을 찾아 이용해야 한다"라는 이성의 규범이자 일반 원칙이 도출된다. 이 원칙의 첫 번째 내용은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따르라"라는 제1의 근본적인 자연법이다. 두 번째 내용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우리 자신을 방어하라"라는 자연권의 핵심 요약이다.


제2의 자연법


인간에게 평화를 위해 노력하라고 명령하는 이 근본적인 자연법에서 다음과 같은 제2의 법칙이 도출된다. "타인들 역시 기꺼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인간은 평화와 자기방어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타인에게 허용할 수 있는 만큼의 자유만을 타인에 대해 누리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모든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를 고수하는 한, 인류는 언제까지나 전쟁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인들은 권리를 내려놓지 않는데 자신만 권리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를 먹잇감으로 내던지는 짓에 불과하므로 그 누구도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바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는 복음서의 법칙이며, "네가 대접받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라는 인류 공통의 법칙이다.


권리를 내려놓는다는 것의 의미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타인이 그 물건에 대해 가진 본연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할 자유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권리를 포기하거나 양도한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전에는 없던 새로운 권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본래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리를 내려놓는 행동은 그저 상대방의 길에서 비켜서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본래 가졌던 고유한 권리를 '자신의 방해 없이' 누리도록 해줄 뿐이지, '타인의 방해까지' 막아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누군가가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얻는 이득은,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권리를 행사할 때 겪어야 했던 방해물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뿐이다.


권리의 포기와 양도, 그리고 의무와 불의


인간은 권리를 단순히 포기하거나, 타인에게 양도함으로써 권리를 내려놓는다. 그 이득이 누구에게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을 때는 '단순 포기'가 되며, 특정 사람에게 이득을 주고자 할 때는 '양도'가 된다. 이처럼 권리를 완전히 버리거나 넘겨준 사람은, 그 권리를 받은 이가 이득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해서는 안 되는 '의무'나 '구속'을 지게 된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행한 약속을 스스로 무효로 만들지 않는 것이 그의 '책무'다. 만약 이를 방해한다면 그것은 이미 권리를 포기하거나 넘겨준 상태에서 행한 일이므로, 법적 정당성이 없는 '불의'이자 '침해'가 된다. 세속의 논쟁에서 말하는 침해나 불의는, 학자들의 토론에서 말하는 '모순'과 비슷하다. 처음에 스스로 주장했던 바를 나중에 뒤집는 것을 모순이라 하듯, 처음에 자발적으로 맺은 계약을 나중에 자발적으로 파기하는 것을 불의이자 침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권리를 포기하거나 양도하는 정식 절차는, 자신이 그러한 의사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자발적이고 명확한 몸짓이나 신호로 표현된다. 이러한 신호는 말이나 행동, 혹은 두 가지 모두를 통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묶어주는 '계약의 끈'이다. 이 끈은 말이나 글 자체에 대단한 힘이 있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말은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쉽다. 계약을 깨뜨렸을 때 닥쳐올 끔찍한 결과에 대한 공포가 이 끈을 지탱해 줄 뿐이다.


양도할 수 없는 권리


인간이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거나 포기할 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되돌려 받거나, 그 행위를 통해 다른 이득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철저히 자발적인 행위이며, 모든 자발적인 행위의 최종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어떤 말이나 행동을 동원하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양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없는 고유한 권리들이 존재한다.


가장 먼저, 무력을 행사해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자들에게 저항할 권리는 결코 내려놓을 수 없다. 목숨을 포기하는 행위가 자기 자신에게 이로움을 준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거나 구속당하고 투옥될 위기에 처했을 때 저항할 권리 역시 마찬가지다. 타인이 상처 입거나 갇히는 것을 인내할 때는 어떤 이득이 따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이 그런 고초를 겪을 때는 참아내 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다. 게다가 누군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그가 단지 상처만 입히려는 것인지 아니면 목숨까지 빼앗으려는 것인지 인간은 결코 알 수 없다.


결국 권리를 포기하고 양도하는 모든 행위의 근본적인 동기와 목적은 오직 하나, 인간이 자신의 신체와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고, 살아가는 동안 삶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생명 보존의 수단을 확보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말이나 행동으로 이러한 최종 목적 자체를 저버리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진심으로 원해서 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이 초래할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저지른 어리석음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계약의 정의


이처럼 권리를 서로 주고받는 상호 양도 행위를 가리켜 인간은 '계약'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물건에 대한 권리를 넘겨주는 것과, 물건 그 자체를 실제로 건네주는 인도 행위는 구별해야 한다. 물건은 권리가 넘어가는 그 순간 동시에 인도될 수도 있다. 현금으로 물건을 사고팔거나, 상품과 토지를 그 자리에서 맞바꾸는 경우가 그렇다. 반면, 권리는 지금 넘어가더라도 물건 자체는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건네질 수도 있다.


신의 계약(信義 契約)의 정의


또한 계약 당사자 중 한쪽이 자신의 몫에 해당하는 물건을 먼저 건네고, 상대방은 신뢰를 얻은 상태에서 정해진 미래의 어느 시점에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남겨둘 수 있다. 이 경우, 아직 의무가 남아 있는 쪽의 계약을 '협약' 또는 '신의 계약(Covenant)'이라고 부른다. 혹은 양측이 지금 계약을 맺고 이행은 둘 다 나중에 하기로 약속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래에 이행 의무를 진 사람이 신뢰를 바탕으로 약속을 지키는 것을 '약속 이행' 또는 '신의(Faith)'라 하고, 자발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신의 위반'이라 한다.


무상 증여의 정의


권리의 양도가 상호 간에 이루어지지 않고 한쪽만 일방적으로 넘겨주는 경우가 있다. 이때 권리를 넘겨주는 사람은 이를 통해 상대방이나 그 친구들로부터 우정이나 대가를 얻기를 바라거나, 자선과 관용이라는 명성을 얻기를 기대한다. 혹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나, 하늘의 보답을 바라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계약이 아니라 '선물(膳物)', '무상 증여(Free-gift)', 또는 '은혜'라고 부르며, 이 단어들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닌다.


명시적 계약의 표시


계약의 표시는 명시적인 것과 추론적인 것으로 나뉜다. 명시적 표시는 그 의미를 분명히 알고 말하는 언어적 표현을 뜻한다. 이러한 표현은 '준다', '승인한다' 같은 현재형이나 '주었다', '승인했다', '이것이 네 것이 되기를 바란다' 같은 과거형이 있다. 반면 '주겠다', '승인하겠다'와 같은 미래형 표현도 있는데, 이처럼 미래를 나타내는 말은 약속이라고 부른다.


추론적 계약의 표시


추론적 표시는 말이나 침묵, 행동, 혹은 특정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추론적 표시란 계약자의 의사를 충분히 증명하는 모든 정황을 뜻한다.


무상 증여의 효력과 시제


미래를 뜻하는 말만으로는 순수한 약속에 불과하여 무상 증여의 증거가 될 수 없고, 법적 구속력도 없다. "내일 주겠다"처럼 미래 표현을 쓰면 아직 주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권리는 이전되지 않고, 다른 행위로 권리를 넘기기 전까지는 본인에게 그대로 남는다. 반면 "이미 주었거나 지금 주니 내일 인도(引渡)하겠다"와 같이 현재나 과거 표현을 쓴다면, 내일 생길 권리는 오늘 이미 넘어간 셈이다. 다른 명확한 의사 표시가 없더라도 말 자체에 그런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내일 이것이 네 것이 되기를 바란다"와 "내일 이것을 주겠다"라는 말은 언뜻 비슷해 보여도 그 의미가 크게 다르다. 앞의 표현은 현재의 의지를 나타내지만, 뒤의 표현은 미래에 행동하겠다는 약속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재를 나타내는 앞의 말은 미래의 권리를 넘겨주는 힘이 있지만, 미래를 나타내는 뒤의 말은 아무것도 넘겨주지 못한다. 다만 말 외에 권리를 넘기겠다는 다른 증거가 있다면, 대가 없는 증여라도 미래 표현을 통해 권리가 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달리기 시합에서 1등 한 사람에게 상품을 주겠다고 공표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 증여는 대가가 없으며 말 자체도 미래형이지만, 권리는 실제로 넘어간다. 만약 그런 뜻이 아니었다면 시합을 시작하게 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약에서는 현재나 과거를 나타내는 표현뿐만 아니라 미래 표현을 쓸 때도 권리가 넘어간다. 모든 계약은 권리를 서로 교환하고 이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의 행동을 약속한 사람은 이미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았으므로, 권리를 넘겨주겠다는 의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약속한 사람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면, 상대방이 먼저 자신의 의무를 이행했을 리가 없다. 이런 이유로 매매를 비롯한 온갖 계약 행위에서 약속은 법적 서약과 다름없으며 똑같이 구속력을 갖는다.


‘공적(功績)’의 의미와 가치


계약에서 어느 한쪽이 먼저 의무를 이행하면, 상대방의 이행을 통해 받게 될 대가에 대해 ‘공적’이 있다고 말하며, 이를 당연한 권리로 요구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만 주는 상품을 걸고 경쟁을 붙이거나 여러 사람에게 돈을 뿌려 잡는 사람이 갖게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는 비록 대가 없는 증여일지라도, 경쟁에서 이기거나 돈을 잡는 행위 자체는 공적이 되며 이를 당연한 권리로 취득한다. 상품을 걸거나 돈을 뿌리는 순간 이미 권리는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누구에게 갈지가 경쟁의 결과에 따라 나중에 결정될 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공적에는 차이가 있다. 계약에서의 공적은 나의 능력과 상대방의 필요 덕분에 생기지만, 무상 증여에서의 공적은 오직 주는 이의 너그러움 덕분에 성립한다. 또한 계약에서는 상대방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요구할 공적이 내게 있지만, 증여에서는 주는 이에게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할 공적은 없다. 다만 그가 권리를 포기했을 때,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그것을 받아야 마당하다는 공적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신학에서 말하는 ‘합당한 공적(Meritum Congrui)’과 ‘당연한 공적(Meritum Condigni)’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전능한 신은 세속적 욕망에 눈먼 인간이 자신이 정한 계율과 한계에 따라 세상을 살아간다면 낙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신학자들은 이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합당한 공적’에 따라 낙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의로움이나 능력만으로는 낙원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오직 신의 거저 주는 은혜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낙원을 ‘당연한 공적’으로 얻을 수는 없다고 한다. 이것이 그 구분의 본뜻이라고 보지만, 논쟁을 즐기는 이들은 자신들의 전문 용어를 필요할 때만 유리하게 바꾸어 쓰므로 그 의미를 단정 짓지는 않겠다. 다만 분명한 점은, 경쟁을 통해 얻는 상품처럼 대상을 한정하지 않고 주는 선물이라도 이긴 사람은 공적을 쌓은 것이므로 이를 당연한 권리로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계약의 무효 사유


양쪽 모두 당장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서로를 믿기로 한 계약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인 자연 상태에서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순간 무효가 된다. 하지만 양측에 이행을 강제할 충분한 권리와 힘을 가진 공동 권력이 존재한다면 계약은 유효하다. 강제력을 지닌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말이라는 끈은 인간의 야망과 탐욕, 분노와 같은 감정을 붙잡아두기에 너무나 약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각자 자신의 두려움이 정당한지 스스로 판단하는 자연 상태에서는 이러한 강제력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 먼저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적에게 넘겨주는 꼴이 되며, 이는 자신의 생명과 생존 수단을 지키겠다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권리에도 어긋난다.


반면 신의를 저버리려는 자들을 억제할 권력이 존재하는 시민 사회에서는 그러한 두려움이 더 이상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계약에 따라 먼저 이행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은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


계약을 무효로 만드는 두려움의 원인은 반드시 계약을 체결한 뒤에 일어난 일이어야 한다. 상대방이 이행하지 않으려 한다는 새로운 사실이나 징후가 나타나야지, 그렇지 않다면 계약을 무효로 돌릴 수 없다. 계약을 약속할 때 걸림돌이 되지 않았던 문제를, 약속을 이행할 때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목적에 대한 권리는 수단에 대한 권리를 포함한다


어떤 권리를 넘겨주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그 권리를 누리는 데 필요한 수단도 함께 넘겨주는 셈이다. 땅을 파는 사람이 그 땅에서 자라는 풀과 모든 식물까지 함께 넘겨주는 것으로 보는 이치와 같다. 방앗간을 판 사람이 그 방앗간을 돌리는 물줄기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주권자에게 통치권을 부여하는 행위는 군대를 유지할 세금을 거둘 권리와 사법 정의를 실현할 행정관을 임명할 권리까지 함께 부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짐승과의 계약 불가


짐승과 계약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짐승은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권리의 이전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자신의 권리를 타인에게 넘겨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호 간의 수용이 없다면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다.


특별한 계시 없는 신(神)과의 계약 불가


신과 직접 계약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이 초자연적인 계시로 직접 부르거나, 신의 이름으로 지상을 통치하는 대리인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과 계약을 맺을 수 없다. 통로가 없다면 우리의 계약을 신이 받아들였는지조차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법에 어긋나는 내용을 신에게 서약하는 행위는 헛될 뿐이다. 그런 서약을 지키는 것 자체가 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서약한 내용이 자연법이 명하는 바라면, 인간을 구속하는 것은 서약이 아니라 자연법 자체이다.


가능하고 미래에 속한 일에 대해서만 맺는 계약


계약의 대상이나 목적은 언제나 심사숙고를 거쳐 결정된다. 계약을 맺는 것은 의지의 행위, 즉 심사숙고의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약은 언제나 미래에 일어날 일이며, 계약 당사자가 이행할 수 있다고 판단한 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일을 약속하는 것은 계약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처음에는 가능하다고 믿었던 일이 나중에 불가능해진 경우라면 계약은 유효하다. 이때는 원래의 약속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보상해야 하며, 그마저도 불가능하다면 가능한 만큼이라도 이행하려는 진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그 이상의 의무를 강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계약의 해제 조건


계약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이행하거나, 면제받는 것이다.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계약의 자연스러운 종결이며, 면제받는 것은 자유를 되찾는 일이다. 면제란 계약으로 묶여 있던 권리를 원래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공포로 맺어진 계약의 유효성


자연 상태에서 공포로 인해 맺은 계약은 구속력을 갖는다. 예컨대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대가로 몸값이나 노동을 제공하기로 계약했다면, 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한쪽은 생명이라는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은 돈이나 노동을 받기로 한 명백한 계약이며, 자연 상태처럼 이행을 금지하는 다른 법이 없는 곳에서는 이러한 계약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뢰를 바탕으로 풀려난 전쟁포로는 약속한 몸값을 지불해야 하며, 약소국의 군주가 두려움 때문에 강대국과 불리한 평화 협정을 맺었더라도 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쟁을 다시 일으킬 만한 정당하고 새로운 두려움이 발생하지 않는 한 그렇다. 시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강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면, 시민법이 그 의무를 면제해주기 전까지는 돈을 줄 의무가 있다. 의무가 없는 상태에서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 역시 합법적이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맺은 계약은 법적으로 깨뜨릴 수 없다.


선행 계약의 우선성과 후행 계약의 무효


먼저 맺은 계약은 나중에 맺은 계약을 무효로 만든다. 오늘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권리를 넘겨준 사람은 내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권리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중에 한 약속은 아무런 권리도 이전하지 못하며 그 자체로 무효이다.


자기방어 포기 계약의 무효성


무력을 무력으로 막아내지 않겠다고 맺은 계약은 언제나 무효다. 앞서 밝혔듯 죽음과 부상, 투옥을 피하는 것이 권리를 포기하는 유일한 목적이므로, 그 누구도 이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권리를 넘기거나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력에 저항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계약으로서 아무런 권리도 이전하지 못하며, 구속력도 없다. 인간은 "내가 약속을 어기면 나를 죽여도 좋다"라고 계약할 수는 있어도, "내가 약속을 어기면 나를 죽이러 올 때 저항하지 않겠다"라고 계약할 수는 없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저항하지 않아 마주할 확실하고 당장 닥쳐올 죽음이라는 큰 악(惡)보다, 저항하다가 겪을지도 모를 죽음의 위험이라는 작은 악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사형수들이 자신을 처벌하는 법에 동의했음에도, 그들을 형장이나 감옥으로 끌고 갈 때 무장한 군인을 동행시키는 사실만 보아도 모든 이가 이 원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고발 의무의 부당함과 계약 무효


사면을 보장받지 않은 채 자신을 고발하겠다는 계약 역시 무효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재판관이 되는 자연 상태에서는 고발이라는 행위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반면 시민 사회에서 고발은 처벌로 이어지는데, 처벌은 곧 물리적인 강제력이므로 인간에게는 이에 저항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갈 부모나 배우자, 은인을 고발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발적으로 원해서 한 고발이 아니라면, 그러한 증언은 본성에 의해 왜곡된 것으로 보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신뢰할 수 없는 증언이라면 애초에 진술할 의무도 없다.


또한 고문으로 얻어낸 고발은 증언으로 인정할 수 없다. 고문은 진실을 찾아가는 추가 조사 과정에서 단서나 실마리를 얻는 수단일 뿐이다. 고문당하는 이가 털어놓는 자백은 고문관에게 정보를 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를 확실한 증언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 자백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고발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행위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정당한 권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선서의 목적과 형식


앞서 언급했듯이 말의 힘만으로는 인간이 계약을 지키도록 구속하기에 너무나 약하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에서 이 말의 힘을 보완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약속을 어겼을 때 닥쳐올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약속을 어길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는 데서 오는 명예심이나 자부심이다. 하지만 후자는 부나 권력, 혹은 육체적 쾌락을 좇는 대다수 인간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매우 드문 고결함이다. 결국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감정은 두려움뿐이다. 이 두려움의 대상은 크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권력과, 자신이 피해를 입힐 인간의 권력 두 가지로 나뉜다. 비록 영적인 권력이 더 거대할지라도, 인간은 대개 눈앞에 있는 다른 인간의 힘을 더 무서워하기 마련이다. 전자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 각자의 종교로 이어지며, 이는 시민 사회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인간의 본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반면 다른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을 구속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자연 상태에서는 오직 직접 싸워 이겨야만 힘의 우열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 사회가 형성되기 전이나 전쟁으로 시민 사회가 마비되었을 때, 탐욕과 야망, 정욕 같은 강렬한 욕망에 맞서 평화 계약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자신이 신으로 섬기며 배신에 대한 복수자로서 두려워하는 그 보이지 않는 권력에 대한 외포심(畏怖心)[1]이다. 결국 시민 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서로가 두려워하는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게 하는 것뿐이다. 이처럼 선서, 즉 맹세란 약속에 덧붙이는 일종의 언어적 형식이다. 이를 통해 약속하는 사람은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신의 자비를 포기하거나 신이 자신에게 벌을 내릴 것임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내가 이 짐승을 죽이듯, 약속을 어기면 유피테르가 나를 죽이게 하소서"라는 이교도의 선서나, "신이시여 도우소서, 제가 이 일을 꼭 행하겠나이다"라는 우리의 선서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각자의 종교에 따른 의식과 절차를 더하는 것도 신의를 저버렸을 때의 두려움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신(神)만을 대상으로 하는 선서


이로 미루어 볼 때, 맹세하는 이가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의 형식이나 의식에 따른 선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진정한 선서라고 할 수도 없다. 자신이 신으로 여기지 않는 대상을 두고 맹세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 두려움이나 아첨 때문에 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왕에게 신에 준하는 명예를 돌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것은 그 이름을 모독하는 짓에 불과하다. 일상 대화에서 흔히 하듯 다른 사물의 이름을 빌려 맹세하는 행위 역시 진정한 선서가 아니라, 말을 지나치게 격하게 하는 과정에서 굳어진 불경한 버릇일 뿐이다.


선서와 의무의 효력


선서가 계약 자체의 구속력을 더 높여주지는 못한다. 합법적인 계약이라면 선서를 하든 하지 않든 신의 눈앞에서 똑같은 구속력을 갖기 때문이다. 반대로 불법적인 계약이라면 아무리 엄숙한 선서로 이를 확인했을지라도 결코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


- 주석 -

[1] 외포심(畏怖心): 공포심을 느껴 의사결정이나 실행의 자유가 방해된 심적 상태.


출처: https://www.gutenberg.org/cache/epub/3207/pg3207-images.html#link2HCH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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