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세트, 역사적 수준의 상승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역》


제2장: 역사적 수준의 상승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중대한 사실이다. 그 거친 실상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근대 문명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다.


근대 문명이 전개되는 동안 이와 비슷한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비슷한 사례를 찾으려면 근대의 역사를 벗어나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삶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고대 세계, 그중에서도 쇠퇴기에 접어든 로마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로마 제국의 역사는 곧 대중의 제국이 등장한 역사이기도 하다. 대중은 사회를 이끌던 소수의 지도층을 흡수하고 무력화한 뒤,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때에도 인파가 한곳에 밀려드는 현상, 다시 말해 모든 것이 가득 차는 현상이 나타났다.


슈펭글러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바로 그런 이유로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건축물을 세워야 했다. 대중의 시대는 곧 거대한 규모의 시대다.[1]


우리는 지금 대중의 거칠고 압도적인 지배 아래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 나는 이미 두 차례나 이 지배를 '거칠다'고 표현했다. 이는 통속적 표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셈이다. 이제 입장권도 손에 넣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무대 안쪽에서 이 광경을 살펴볼 차례다.


혹시 내가 방금의 묘사, 아무리 정확하다 해도 결국은 겉모습만 포착한 설명에 만족하리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 거대한 현상의 외형적 모습에 불과하다.


만약 여기서 논의를 끝내고 이 글을 마무리한다면, 독자는 충분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역사의 전면으로 치솟은 이 놀라운 대중의 등장이 내게는 그저 몇 마디 짜증과 경멸, 약간의 증오와 혐오만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말이다. 더욱이 나는 역사를 철저히 귀족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니, 그런 오해는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내가 '철저히'라고 말하는 이유는, 인간 사회가 귀족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말해온 것,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굳게 확신하게 된 것은 인간 사회는 의지와 무관하게 그 본질상 언제나 귀족적이라는 사실이다. 사회는 귀족적일 때 비로소 사회로 존재하며, 그 성격을 잃는 순간 더 이상 사회일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사회다.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 거대한 대중의 격동을 마주하고도 거드름을 피우며 비웃는 것이 귀족적 태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베르사유의 귀족들이 보였던 잘난 체하는 몸짓은 결코 귀족주의를 상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위대한 귀족 사회가 죽어가고 무너지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아 있던 귀족적 품위는 단 하나뿐이었다. 단두대 앞에서도 의연하게 목을 내맡긴 태도 말이다. 그것은 마치 종양이 외과의의 칼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과도 같았다.


아니다. 귀족이 맡아야 할 진정한 사명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대중이라는 존재를 보며 결코 냉소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조각가가 다듬지 않은 대리석을 바라볼 때처럼 강한 자극과 열정을 느낀다.


사회적 귀족은 스스로만을 '사교계'라 부르며, 서로를 초대하거나 배제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작은 집단과는 전혀 다르다. 세상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역할과 가치가 있듯이, 이 좁은 사교계 역시 나름의 기능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역할일 뿐이며, 진정한 귀족이 짊어져야 할 거대한 역사적 사명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이 사교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따져보는 일도 흥미로울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루려는 문제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중대한 것이다.


물론 이런 사교계 역시 시대의 흐름을 피해 갈 수는 없다. 한때 마드리드 사교계에서 가장 화려한 인물로 꼽히던, 젊음과 현대적 감각이 넘치는 한 젊은 여성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초대받은 사람이 800명도 안 되는 무도회라면 난 도저히 갈 수 없어요.”


나는 이 한마디에서 많은 것을 읽어냈다. 이 말은 대중의 취향과 생활양식이 현대 사회 전반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한때는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곳마저 이제는 대중의 기준과 감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우리 시대를 해석하는 두 가지 태도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는 대중 지배라는 현실 속에 숨겨진 긍정적 의미를 보지 못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이를 마냥 반기는 태도다.


모든 시대의 운명은 본질적으로 극적이며,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비극적이다. 우리 시대에 깃든 위험을 손끝으로 느낄 만큼 절실하게 체감하지 못한 사람은 시대의 운명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그저 겉면만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우리 시대의 운명이 두려운 까닭은 대중이 일으키는 압도적이고 격렬한 도덕적 격변 때문이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을 만큼 강력하며, 운명이 늘 그렇듯 예측하기 어렵고 위험을 품고 있다.


이 거대한 흐름은 과연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절대적인 악으로 향하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선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품고 있는가.


그것은 지금 우리 시대 한가운데 거인처럼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물음표다. 그 형상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한편으로는 단두대와 교수대를 떠올리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선문으로 변모하려는 가능성 또한 품고 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오늘날 대중은 사회생활에서 과거에는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맡겨졌다고 여겨졌던 역할을 직접 수행하고 있다.


둘째, 대중은 동시에 그 소수 집단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는다. 그들의 지도를 따르거나 권위를 인정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문제부터 살펴보자. 내가 말하려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과거에는 선택된 소수만 누릴 수 있었던 생활의 즐거움과 그들이 만들어낸 여러 수단을 이제는 직접 향유하고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한때는 소수만의 특권이었던 것들은 세련된 생활양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대중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누리며, 같은 욕구와 필요를 갖게 되었다.


사소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1820년 당시 파리의 개인 주택 가운데 욕실을 갖춘 집은 열 채도 되지 않았다(보아뉴 백작부인의 『회고록』 참조). 그러나 오늘날 대중은 과거에는 전문가들에게만 허용되었던 다양한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상당한 수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물질적 기술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법과 사회를 다루는 기술에서도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18세기에 일부 소수 집단은 인간은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특별한 자격도 없이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를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른바 인간과 시민의 권리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이러한 권리만이 진정한 권리라고 보았다.


특별한 재능이나 자격에 따라 주어지는 모든 권리는 특권으로 규정되었고, 정당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이것이 소수의 사상가들이 제시한 하나의 이론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 이념을 현실에 옮기기 시작했고, 사회에 이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며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19세기 내내 대중은 이러한 권리를 이상으로는 점차 열렬히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자신의 실제 권리로 체감하지는 못했다. 스스로 그 권리를 행사하거나 실현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민주적 법 제도 아래에서도 실제 삶의 방식은 구체제 아래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던 '인민'은 자신이 주권자라는 말을 배웠지만, 정작 그것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 이상은 현실이 되었다. 그것은 단지 법률이라는 공적 제도의 틀 속에서만 실현된 것이 아니다. 어떤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든, 심지어 반동적 사상을 품고 그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를 공격하는 사람조차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보기에 대중에게 나타난 이 독특한 도덕적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자격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주권을 가진다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법적 개념이나 이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심리적 상태가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이상이 현실의 일부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이상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이상이 지니던 권위와 매력은 사라진다. 민주주의의 고귀한 정신이 품었던 평등에 대한 요구는 이제 더 이상 지향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본능적인 욕구이자 의심조차 하지 않는 당연한 전제가 되어 버렸다.


인권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을 내면의 예속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스스로를 삶의 주인이자 존엄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애초에 사람들이 바랐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리는 주인이자 지배자라고 느끼게 하는 것 말이다.


이제 그 목표는 실현되었다. 그렇다면 30년 전의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진보주의자들은 왜 이제 와서 불평하는가. 어린아이처럼 원하는 것은 있었지만,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원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평범한 사람이 주인이 되기를 바랐다면, 그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온갖 즐거움을 누리려 하고, 자신의 의지를 단호하게 관철하며, 누구에게도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과 여가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옷차림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주인이라는 의식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특징들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러한 의식은 더 이상 소수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 곧 대중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의 상황은 이렇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이제 과거에는 뛰어난 소수만이 누리던 삶의 조건과 생활양식을 자연스럽게 갖추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은 언제나 한 시대의 역사가 펼쳐지는 기준선이다. 역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지리학에서 해수면이 기준이 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 기준선이 과거에는 귀족적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높이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역사의 수준 자체가 높아졌다는 뜻이다. 물론 그 변화는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준비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한 세대 만에 갑작스럽게 눈앞에 드러날 만큼 뚜렷하게 역사적 수준이 상승한 것이다.


인류의 삶 전체는 이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올라섰다.


이를 비유하자면, 오늘날의 병사는 예전의 장교에 가까운 역량을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제 인류라는 군대는 장교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된 셈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을 보라. 누구나 활력과 결단력을 갖추고 삶을 거침없이 살아간다. 눈앞에 나타난 즐거움을 망설임 없이 붙잡고, 자신의 의지를 거리낌 없이 관철하려 한다.


현재와 가까운 미래에 나타날 모든 긍정적·부정적 현상은 결국 역사적 수준의 전반적인 상승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수준이 과거 소수 엘리트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유럽에서는 새로운 현상이지만,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법 앞의 평등에 대한 의식을 떠올려 보면 된다. 유럽에서는 오직 뛰어난 소수만이 스스로를 자신의 주인이며 누구와도 동등한 존재라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18세기부터, 다시 말해 사실상 처음부터, 이러한 심리적 태도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우연도 있다. 유럽의 평범한 사람들이 이러한 심리 상태를 갖게 되고 삶의 수준이 높아지자, 유럽 사회의 분위기와 생활방식은 모든 계층에서 갑자기 새로운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유럽이 미국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사람들은 그 현상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를 단지 생활양식이나 유행의 작은 변화 정도로 여겼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미국이 유럽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쉽게 결론지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해석은 훨씬 더 미묘하고 깊은 의미를 지닌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물론 예의를 앞세운다면 대서양 건너 우리의 형제들에게 유럽이 미국화되었으며, 그것은 미국이 유럽에 영향을 준 결과라고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예의보다 앞선다.


유럽은 미국화된 것이 아니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런 변화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을 낳은 최근의 변화는 결코 그것 때문이 아니다.


지금 미국인과 유럽인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수많은 오해가 떠돌고 있다.


대중의 승리와 그에 뒤따른 삶의 수준의 눈부신 향상은 유럽 내부의 힘으로 이루어진 결과다. 그것은 200년에 걸친 대중 교육의 확산과 사회 전반의 경제적 발전이 함께 축적된 끝에 나타난 결실이다.


다만 그 결과가 미국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과 우연히 일치했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처럼 유럽과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비슷한 심리적 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유럽인은 비로소 이전까지는 수수께끼처럼만 여겨졌던 미국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미국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설령 영향을 말한다 해도, 그것은 오히려 방향이 뒤바뀐 영향이라고 해야 할 만큼 어색한 설명이다. 여기서 진정 주목해야 할 것은 영향이 아니라 평준화라는 현상이다.


유럽인들은 오래전부터 미국의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구대륙보다 높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비록 이를 명확히 분석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직관은 매우 강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직관이 '미래는 미국의 것이다'라는 널리 받아들여진 믿음을 낳았다. 그 믿음은 누구도 진지하게 의심하지 않았다.


이처럼 깊이 뿌리내린 생각은 결코 근거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공중에서 뿌리도 없이 자란다고 하는 난초처럼 우연히 떠내려온 것도 아니다.


그 믿음의 바탕에는 미국의 평균적인 삶의 수준이 유럽보다 높다는 인식이 있었다. 반면 미국의 뛰어난 소수 엘리트는 유럽의 엘리트에 비해 오히려 수준이 낮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역사는 농사와 마찬가지다. 높은 산봉우리가 아니라 낮은 골짜기에서 양분을 얻는다. 다시 말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몇몇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평균적인 수준이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평준화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재산의 격차가 줄어들고, 사회 계층 간 문화 수준의 차이도 좁혀지고 있으며, 남녀 사이의 차이 또한 점차 완화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륙 사이에서도 평준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생명력이라는 측면에서 과거의 유럽은 미국보다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평준화는 오히려 유럽에 이득이 되었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보면 대중의 등장은 유럽의 생명력을 놀라울 정도로 크게 확장한 사건이다. 이는 흔히 말하는 '유럽의 쇠퇴'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사실 '유럽의 쇠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모호하고 부정확하다. 그것이 유럽의 국가들을 말하는 것인지, 유럽 문화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반인 유럽의 생명력 자체를 뜻하는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의 국가와 문화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생명력의 측면에서만큼은, 처음부터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유럽이 쇠퇴하고 있다는 통념은 명백한 착각이다.


같은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보겠다.


오늘날 평균적인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독일인은 30년 전보다 북아메리카인이나 아르헨티나인과 훨씬 더 비슷한 생명력과 생활 감각을 지니게 되었다. 그만큼 양쪽의 격차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 사실만큼은 아메리카의 사람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주석 -


[1] 이 과정에서 비극적인 점은, 도시로 인구가 몰려들기 시작한 바로 그때 농촌은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농촌의 황폐화는 결국 로마 제국 전체의 인구 감소로 이어졌다.


José Ortega y Gasset, The Revolt of the Masses, Routledge, 2022, pp. 15–21.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주권(主權), 책임, 소유: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 일치의 방법론에 관하여

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의 버퍼(Buffer)

일본천황 황위 계승권 개정안 통과, 여성 천황 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