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센티브 구조인가
왜 인센티브 구조인가
정치라는 복잡계의 작동 방식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추적하다 보면, 행위자의 내재적 규범을 뜻하는 '도덕'이라는 단어가 분석적 효용을 상실하는 임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대중은 흔히 정치인의 예측 불가능하거나 기만적인 행동을 목격할 때, 그 인과관계를 설명할 가장 직관적이고 손쉬운 해답을 행위자 개인의 윤리적 결함에서 찾으려 한다. 특정 정치인이 사익을 추구하여 부패했다거나, 특정 정당이 정파적 이익을 은폐하기 위해 위선적인 행태를 보인다는 식의 인성론(人性論)적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주의적 접근법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단 몇 차례만 검증해 보아도 이내 이론적 정당성과 설명력을 잃고 만다. 인적 쇄신을 통해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물을 배제하고 새로운 인물로 갈아치우더라도 시스템 내부의 부패 메커니즘은 완강하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중의 엄격한 심판을 받아 위선적인 정당이 해체되거나 몰락하더라도, 그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차기 정당 역시 동일한 제도적 환경과 지위 속에서 이전 세대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위선적 행동 양식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이처럼 행위자라는 변수는 끊임없이 교체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산출해 내는 정치적 결과물이 지속해서 동일한 궤적을 그리며 수렴된다면, 우리는 문제의 근원적 원인이 인적 구성원에 있지 않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분석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문제의 본질이 행위자의 도덕성이 아니라 그 행위자가 점유하고 있는 '직위(職位)' 그 자체에 있으며, 그 자리가 부과하는 제도적 유인 구조와 제약 조건이 합리적 개인에게 특정 행동을 강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 말이다.
국제정치라는 냉혹한 각자도생의 무대에서 피원조국에게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일방적인 시혜를 베푸는 강대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국가 이익의 극대화라는 본연의 목적을 망각한 채 대가 없는 원조(援助)를 남발하는 국가 체제는 엄중한 자원 제약 속에서 패권이나 생존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 국제사회에서 원조라는 메커니즘이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제도로 정착하려면, 지원을 받는 수혜국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경제적·전략적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만약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되어 상호 호혜성이 결여된 관계가 지속된다면, 그 협력체계는 결국 동력을 잃고 쇠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특정 패권국이 본질적으로 인색하거나 이기적이어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원조를 받는 국가가 도덕적으로 배은망덕해서 나타나는 현상도 아니다. 주권국가라는 합리적 행위자에게 있어 '선의'나 '인도주의'는 독립된 예산 항목으로 영구히 존재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라, 투입할 때마다 고갈되는 유한한 소모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모품은 자국의 안보와 경제적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 상황이 오면 가장 먼저 바닥나기 마련이다. 외교적 수사(修辭)나 도덕의 언어로 이 관계를 포장하면 '혈맹', '전략적 우정', '인류애적 의리' 같은 감상적인 어휘들이 등장하지만, 내포된 이념적 장막을 걷어내고 남는 냉정한 본질은 단 하나, 즉 '무엇을 투입하여 어떤 가치를 회수하는가'라는 기회비용과 편익의 함수뿐이다.
결국 대외 원조의 본질은 도덕적 시혜가 아니라, 명문화되거나 묵시적으로 체결된 국가 간의 '전략적 계약'이다. 이 계약이 파기되지 않고 유지되려면 거래에 참여한 양당사자 모두에게 계약을 이행하고 지속할 제도적 인센티브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원조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하나의 순환 루프가 형성된다. 원조를 제공받는 수혜국이 UN 등 국제기구에서의 외교적 표결 지지, 자국 영토 내 군사기지 제공, 혹은 특정 부문의 시장 개방 같은 형태로 반대급부를 지불하면, 원조국은 이 반대급부를 명분 삼아 자국 내부의 납세자와 의회에 다음 단계의 지원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 정당화된 지원은 다시 수혜국에게 또 다른 형태의 기여와 대가를 요구하는 연쇄적 반응으로 이어진다. 만약 이 상호 호혜적 유인의 순환 고리가 어느 한쪽에서라도 끊어지는 순간, 양국의 협력 관계 자체가 완전히 와해된다. 도덕의 언어는 이 관계의 종말을 '배신'이나 '동맹의 파기'라며 감정적으로 비난하지만, 제도의 언어로 바라본 본질은 그저 서로를 붙잡아두던 전략적 유인이 모두 소진되어 균형점이 붕괴되었을 뿐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인센티브와 구조의 문법은 국제정치라는 무대를 넘어, 국내 정당 정치라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도 완벽히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변주되며 반복된다. 일례로 대한민국의 보수 정당을 관찰하는 대중과 평론가들은 "왜 저 정당은 확고한 유기적 이념과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는가?"라는 비판적 의문을 자주 제기한다. 선거철만 되면 중도층의 표심을 공략하기 위해 복지 확대를 외치며 정책적 '좌클릭'을 감행하고, 지지율 폭락이나 당내 정당성 위기가 도래하면 기존의 핵심 보수 원칙을 과감히 폐기하며, 다가오는 차기 선거 패러다임에 맞춰 끊임없이 당의 간판과 정강정책을 리브랜딩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정당의 이러한 가변적 행태를 '기회주의적 처신'이나 '철학적 무능'이라는 도덕적 낙인으로 규정하지만, 그러한 규범적 명명은 정당의 행동 양식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아무런 유효한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당의 본질은 공익의 실현이기 이전에, 선거라는 시장에서 유권자의 표를 획득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전략적 합리성을 지닌 결사체'다. 그리고 유권자의 표심이라는 자원은 정당의 신념이 아니라, 시대적 환경과 대중의 물질적·정신적 선호 체계의 변화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한다. 이때 정당이 마주하는 선거 지형은 일종의 진화론적 생존 환경으로 기능한다. 자신이 고수하던 정체성과 교조적 원칙을 타협 없이 지키다가 선거에서 참패하여 소멸하는 정당과, 생존을 위해 전통적 신념을 과감히 수정·타협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는 정당 중 차세대 정치 지형을 지배하고 후속 모델을 생산하는 쪽은 언제나 후자다.
결국 정당의 빈번한 노선 수정은 규범적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선거 제도가 내포한 구조적 비대칭성에 적응하기 위한 처절한 생존 투쟁의 결과물이다. 흔히 민주정하에서 이념의 선명성은 지지층을 결집하는 강력한 자산이 되지만, 그 효용은 좌우 진영에 평등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1인 1표'라는 민주적 평등주의 체제 내에서, 중간소득 유권자의 위치는 사회 전체의 평균 소득보다 언제나 낮게 형성된다(멜처-리차드 모델(Meltzer-Richard Model)). 이로 인해 다수의 유권자는 본능적으로 정부 지출 확대와 부의 재분배를 지향하는 좌파적 노선에 구조적으로 경사될 수밖에 없다. 좌파 정당은 평등과 복지라는 이념적 선명성을 충실히 내세울수록 직관적인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대수 유권자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반면, 우파 정당은 자유와 경쟁, 효율이라는 고유의 선명성을 내세울수록 대중에게 냉혹한 기득권의 언어로 비치며 선거 시장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여기에 인간이 이익보다 손실에 두 배 이상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손실 회피 성향'까지 결합되면 우파의 지형은 더욱 척박해진다. 좌파가 확장해 놓은 국가 시혜적 복지 혜택은 유권자들에게 당연한 권리로 내재화되며, 우파가 선명한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이를 재조정하려 드는 순간 대중은 이를 심각한 권리 침해이자 '손실'로 인지해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즉, 민주정의 운동장 자체가 복지 팽창과 재분배라는 좌파적 가치에 유리하도록 비대칭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이 우파 정당의 정체성 상실을 두고 기회주의적 무능이라 비판하는 것은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구조를 간과한 표피적 평가에 불과하다. 선명성을 자랑하던 과거의 우파 정당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진짜 이유는 단순히 신념을 배반했기 때문이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 자체가 가진 설계적 한계, 즉 좌파적 의제에 관대하고 우파적 가치에는 가혹하게 작용하는 선택압을 이기지 못하고, 유권자 시장의 냉혹한 수요 변화 앞에서 생존의 임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우파의 좌클릭은 선택이 아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에 가깝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대외 원조를 둘러싼 강대국의 대외 전략과 국내 보수 정당의 선거 노선 수정이라는 두 가지 사례는 미시적 주제나 분석 대상 면에서 전혀 상호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전자는 아나키(Anarchy·무정부 상태)적 국제정치 체제에서의 국가 간 계약을 다루고, 후자는 국내 헌정 질서 내부에서 전개되는 정당사 및 선거 공학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의 기저에 깔린 근원적인 질문과 분석 궤적은 완벽히 수렴한다. 그것은 바로 '이 행위자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에 의해 추동되고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본질적인 해답은 행위자 개인의 규범적 '선의'나 도덕적 '신념'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외재적 '인센티브(유인구조)'와 체제 내에서의 '생존 조건'에 있다.
이러한 구조론적 관점을 수용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라는 거대한 역학 관계의 영역 전체를 완전히 새로운 프레임으로 재해석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대중 매체와 통속적 정치 비평이 즐겨 사용해 온 '선한 지도자와 악한 지도자', 혹은 '정의로운 세력과 불의한 세력'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도덕주의적 서사는 대중의 감정적 흥미를 유발할 뿐,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거나 미래를 전망하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과학적 예측력'도 제공하지 못한다.
반면 행위자의 내면이 아닌, '특정 직위와 구조가 행위자에게 어떤 행동 양식을 강제하고 있는가'라는 구조적 유인 체계를 질문의 중심에 놓는 순간, 불투명해 보이던 정치적 역학 관계는 놀랍도록 명징한 예측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이 관점을 견지한다면, 민주주의 선거라는 비대칭적 운동장에 놓인 우파 정당은 다가오는 선거에서도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정책적 좌클릭을 감행할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원 제약과 자국 우선주의에 직면한 강대국은 다음 외교 협상에서도 수혜국에게 확실한 지정학적·경제적 반대급부를 요구할 것임을 명확히 견지할 수 있다. 요컨대 도덕의 언어는 사태가 종결된 이후에나 개입하여 당위적인 귀인 오류를 범하는 '사후적 변명'에 불과하지만, 구조의 언어는 행위자의 움직임을 사전에 내다보고 통제하는 '사전적 예측'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방법론적 전제를 수용할 때, 정치를 대하는 분석가로서의 근본적인 관점과 태도가 확립된다. 그것은 정치를 논할 때 행위자 개인을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으로 이분법화하여 도덕적 주체를 추적하던 해묵은 관성을 과감히 탈피하는 것이다. 그 대신, 행위자가 위치한 제도적 직위와 그 직위가 구조적으로 부과하는 '인센티브(보상 체계)' 및 '패널티(처벌과 제재 메커니즘)'의 종합적인 유인 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에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주의나 허무주의와는 궤를 달리한다. 냉소주의가 인간의 도덕적 잠재력에 실망하여 기대를 저버리는 심리적 포기 상태를 의미한다면, 구조주의적 태도는 인간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주관적 윤리의 영역이 아닌 객관적 시스템의 영역에 탁치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도덕적으로 완벽한 메시아적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감상주의에서 벗어나, 어떤 인물이 진입하더라도 공익에 부합하도록 강제하는 '최적의 구조'를 능동적으로 설계하는 방향으로 분석과 실천의 지평을 옮기는 일이다.
실제로 아무리 윤리적으로 고결하고 선한 의지를 지닌 개인이라 할지라도, 역기능적이고 왜곡된 보상 구조를 가진 자리에 위치하게 되면 결국 체제가 가하는 유인 압력과 생존 조건에 굴복하여 동화되기 마련이다. 반대로 도덕적 결함이 있거나 사익을 추구하는 합리적 행위자일지라도, 투명한 감시 체계와 엄격한 처벌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건전한 거버넌스 구조 내에 놓이게 된다면 시스템이 부과하는 제약 조건이 그의 행동 양식을 공익적 방향으로 유도하고 교정해 낸다. 따라서 사회과학적 분석과 제도 설계의 핵심 대상은 가변적이고 불확실한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체계화된 '제도'여야만 한다.
이러한 구조 중심의 분석적 태도를 한 걸음 더 밀고 나아가면,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을 바라보는 인식의 지평 자체가 근본적으로 전회한다. 국가, 정당, 관료, 기업, 그리고 개별 인간에 이르기까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주체를 규범적 가치를 좇는 도덕적 존재가 아니라, 고도의 '전략적 행위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즉, 이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제약 조건 속에서 오직 주체 고유의 생존 확률을 높이고 영향력의 확장을 극대화하려는 합리적 행동 단위로 상정하기 시작하면, 전혀 이질적인 영역에서 발흥하는 것처럼 보이던 복잡다단한 사회 현상들이 마침내 하나의 통일된 거시적 문법으로 수렴하게 된다.
이 관점 하에서 강대국 간의 복잡한 국제 협력이나 동맹 체제는 도덕적 유대감이 아닌, 철저히 상호 간의 '비용 분담과 국익 극대화'라는 교환 함수로 환원된다. 마찬가지로 국내 정당의 역동적인 정책 노선 변화 역시 민주적 당위성이 아니라, 유권자 시장의 '표심 획득과 정치인의 재선'이라는 정치적 효용 함수로 환원된다. 두 함수는 표면적으로는 '지정학적 자산'과 '표'라는 서로 다른 독립변수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수학적 구조와 연산의 형식은 완벽히 일치한다. 외부적 환경 변화라는 '입력(Input)'이 주어지면, 행위자는 자신의 생존 극대화 메커니즘에 따라 '반응(Output)'하고, 그 반응의 결과가 피드백을 통해 다시 다음 단계의 환경적 입력을 재결정하는 유기적인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쇄적 동학을 게임 이론(Game Theory)에서 말하는 '게임(Game)'이라 명명하든, 사회학에서 말하는 '시스템(System)'이라 부르든 본질은 다르지 않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가 매일 뉴스를 통해 접하는 수많은 정치·경제적 현상들이 예측 불가능한 일회적 사건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정형화된 인센티브 구조 속에서 행위자들이 합리적으로 반응하며 끝없이 재생산해 내는 '반복되는 구조적 균형'의 발현일 뿐이다.
더불어 이 구조적 분석 모델에는 정적인 시스템을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시간(Time)'이라는 축이 추가로 개입한다. 제도가 설계한 모든 유인 구조는 결코 진공 상태가 아니라, 행위자가 지닌 특정한 '시간 선호(Time Preference)' 메커니즘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만약 행위자에게 단기적인 이익 전략과 장기적인 생존 대안이 완벽히 일치한다면 시스템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만, 두 가치가 충돌하는 순간 행위자는 현재의 이익을 위해 미래의 가치를 얼마나 희생할 것인가라는 전략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 제도는 행위자의 주관적 결단에 의존하는 대신, 제도의 설계 자체를 통해 이 시간 선호의 수준을 사전에 기계적으로 결정해 놓는다.
가장 대표적인 제약 조건이 바로 '임기'의 존재다. 주기적인 선거를 거쳐야 하거나 임기가 엄격히 제한된 직위에 놓인 행위자는, 미래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높은 시간 선호(High Time Preference)'를 갖도록 구조적으로 강제된다. 반면 임기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거나 영속성을 지닌 조직은, 현재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미래의 더 큰 구조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낮은 시간 선호'의 여유를 향유한다. 제도적으로 주어지는 이러한 시간 선호 성향의 비대칭성이야말로 행위자의 전략적 정체성과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이러한 시간의 동학은 국제정치의 원조 메커니즘에서도 고스란히 투영된다. 원조를 제공하는 공여국(供與國)이 4~5년마다 주기적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민주주의 체제라면, 대외 원조 정책 역시 집권당의 재선 유인과 유권자의 높은 시간 선호에 휘둘려 일관성을 잃고 가변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반대로 원조를 받는 수혜국이 다세대에 걸쳐 안정적인 통치 집단을 유지하는 가문 정치나 권위주의 체제라면, 그 정권은 낮은 시간 선호를 바탕으로 외교적 계약을 장기적으로 이행할 수 있으므로 국제사회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전략적 신용과 경로 의존적 신뢰'를 축적하게 된다. 이처럼 제도가 규정한 시간 선호의 문법이 어떻게 행위자의 행동을 지배하는가는, 본 에세이의 이후 글들에서 현상을 해부할 때마다 끊임없이 되돌아와 논리를 뒷받침할 핵심 주제다.
이러한 분석적 관점을 완전하게 수용할 때, 사회과학적 대상을 바라보는 거시적이고 통합적인 패러다임이 마침내 완성된다. 이는 개별 행위자의 주관적 선악을 감별하던 구태의연한 관성을 버리고, 그들이 점유한 제도적 지위와 그 지위가 규정하는 유인 구조를 추적하는 태도다. 이 태도를 견지하면 파편화되어 보이던 사회적 현상들이 하나의 정교한 설계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국가, 정당, 기업과 같은 구체적인 조직체는 물론, 군주제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정치 체제 자체도 결국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된 '거버넌스(Governance)의 하위 스펙트럼'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 프레임워크 안에서 모든 행위자는 환경 압력에 대응해 생존을 도모하는 전략적 조직이며, 이들의 거동을 지배하는 최종 심급은 행위자의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체제가 부과하는 '거버넌스 구조와 인센티브 체계'다.
신제도주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좋은 거버넌스'란 도덕적 선의의 실현이 아니라, 주인-대리인 간의 정보 비대칭성을 해소하여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하고, 행위자가 낮은 시간 선호를 유지하며 장기적 가치에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구성원들의 사익 추구 행위가 공익적 결과로 수렴하도록 '유인 부합적 인센티브'를 정밀하게 설계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석적 틀을 적용하면, 인류가 고안해 온 거대한 제도적 장치들이 단 하나의 통합 방정식 위로 수렴한다. 이 틀 안에서 민주주의는 주기적인 선거 메커니즘을 통해 대리인의 대리 비용을 통제하고 정치인을 선출하는 거버넌스의 한 형태이며, 군주제는 권력의 사유화를 통해 오히려 책임의 소재를 한곳에 집중시키고 통치자의 시간 선호를 극단적으로 낮추는 거버넌스의 변종이다. 마찬가지로 외교는 무정부 상태의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의 거래비용을 최소화하고 장기 계약을 관리하는 거버넌스이며, 대외 원조는 상호 호혜적 인센티브를 통해 지정학적 협력의 유인을 설계하는 거버넌스 공학이다. 이처럼 현상적으로는 무관해 보이던 영역들이, 구조라는 렌즈를 통과하는 순간 비로소 하나의 방정식 아래 완벽히 통합된다.
그러나 세상을 이처럼 명징하게 바라보는 관점에는 필연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인지적 기회비용(대가)'이 수반된다. 일단 현상의 이면에 도사린 제도적 구조를 해부하기 시작하면, 그 이전의 도덕주의적이고 감상적인 세계관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정치인의 유려한 수사학적 연설을 들을 때도, 혹은 어떤 주권국가의 엄숙한 대외 성명을 접할 때도, 이제는 발화된 텍스트의 표면적 내용보다 그 발화자가 처한 제도적 직위와 구조적 압박이 먼저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적 선의로 가득 찬 정치적 발언을 마주하면, 그 선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행위자가 지불해야 할 정치적·경제적 한계비용을 먼저 계산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항구적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단호한 선언을 들을 때면, 민주주의 선거라는 비대칭적 선택 압력 앞에서 그 신념의 유효기한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를 냉정하게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세상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는 지적 개안(開眼)의 과정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세상을 그 어떤 수식어도 없이 가장 건조하고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분석가의 형벌이기도 하다. 행위자 개인에게 걸었던 주관적 기대를 객관적 구조의 영역으로 온전히 이관하고 나면, 가변적인 인간 본성에 실망하거나 분노할 일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간의 숭고한 결단이나 이타적 행위가 만들어내는 가슴 벅찬 감동을 순수하게 향유할 기회 또한 상실된다. 세상의 모든 선의와 결단조차 인센티브와 생존의 함수로 환원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의 전편을 관통하는 서사는 바로 그러한 지적 대가를 고스란히 감수하더라도, 구조론적 렌즈를 통해 세상의 끝에 무엇이 남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던 치열한 추적의 기록이다. 즉,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하는 전략적 행위자이며 제도가 행동을 결정한다"라는 단 하나의 엄격한 분석적 전제 위에서, 이 프레임워크가 복잡다단한 인간 사회의 거버넌스를 어디까지 일관되게 설명하고 예측해 낼 수 있는지 그 한계 효용을 시험해 보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도정(道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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