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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번역] 닉 랜드, 암흑계몽주의 제2부: 역사의 궤적은 길지만, 결국 좀비 아포칼립스로 흘러간다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2부: 역사의 궤적은 길지만, 결국 좀비 아포칼립스로 흘러간다 닉 랜드(Nick Land), 2012년 3월 9일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 이 논의를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지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리나 시트린(Marina Sitrin):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민주주의가 존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 (존 J. 밀러(John J. Miller)의 기록 에서 인용) “역사의 문제는 늘 여기에 있다. 마치 모든 상황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 ( 멘시우스 몰드버그 (Mencius Moldbug)) ‘민주주의’와 ‘자유’를 함께 검색해 보면 어두운 의미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적어도 사이버 공간에서는 두 개념이 긍정적으로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명백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글 검색엔진이 긁어모은 방대한 데이터로 여론을 판단해 보면, 두 단어는 서로 결합하기보다 대립하고 충돌하는 관계로 나타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민주주의가 자유를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인 위협이며, 결국에는 자유를 완전히 말살하고 말 것이라는 보수주의적 통찰과 궤를 같이한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계는 마치 '엄청난 식성과 거대한 체구를 가진 가르강튀아(Gargantua)'와 파이의 관계와 같다. “우리가 자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가. 속이 출출해 침이 고일 지경이다.” 스티브 행크(Steve H. Hanke)는 짧은 에세이 <민주주의 대 자유> 에서 미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대다수 미국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1776년 독립선언서나 1789년 미국 헌법에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랄 것...

브라이스 랄리베르테, 이데올로기의 개념

서론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는 곧 가톨릭의 역사다. 원한다면 이를 신학적 명제로 받아들여도 좋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장은 다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역사에는 본래부터 존재하는 거대한 서사 따위는 없다. 모든 서사는 외부에서 부여된 것일 뿐이다. 만약 인류 역사에 그와 같은 거대 서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신만이 집필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가 곧 가톨릭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하나의 서사를 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뚜렷한 주제가 있고 주인공과 악당이 등장하며, 특정 미덕은 찬양받고 특정 악덕은 비난받는다. 이 서사는 특정한 렌즈를 통해 투영된 결과다. 이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심지어 일종의 음모론처럼 보일 수도 있는 역사관이다. 나는 독자들에게 이 렌즈, 즉 이데올로기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서술하는 역사가 어떻게 '신반동주의', 다른 말로 '암흑 계몽주의'라 불리는 이데올로기와 지적 사건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목격하게 될 것이다. 내 어조를 보고 지레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내 표현이 지나치게 타협적이고 상대주의적이며, 심지어 포스트모던하게 보일 수도 있다.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주관성에 몸을 맡기는 것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데올로기란 주체가 내면화하여 일체화되는 몸이 아니라, 그저 필요에 따라 걸치는 의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반동주의의 관점을 이해하려면 지적인 모험을 함께 떠나야 하며, 스스로 인지조차 못 했던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전제들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들이 그저 하나의 가설이나 추측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을 뿐이다. 이 글의 성격은 논문과 선언문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다. 신반동주의에 포함된 지적 흐름을 상당 ...

마이클 아니시모프, 리더십의 역사와 과학

제2장 리더십의 역사와 과학 다수가 지배하는 민주주의와 달리, 독재나 과두제는 소수가 권력을 쥐는 체제다. 이번 장에서는 영장류 사회에서 리더십이 어떻게 진화해 왔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형태로 변화했는지 살펴본다. 영장류는 서열이 엄격한 계층 구조, 즉 '지배 서열' 안에서 서로 협력하며 진화했다. 초기 인류의 지배 서열을 보여주는 오늘날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의 '빅맨(Big Man)' 제도를 들 수 있다. 이 사회에서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남성들이 핵심 역할을 맡으며, 때로는 우두머리 자리를 두고 서로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지배 서열이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구성원의 순위가 일렬로 엄격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다. 수십, 수백 명의 구성원이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며 여러 사회적 계층을 형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하나의 집단이나 공동체에는 그들을 이끄는 단 한 명의 리더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리더십과 팔로워십은 진화론적으로 어떤 목적을 지닐까? 크게 보면 집단의 협동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사냥할 때만 해도 언제 멈추고 언제 공격할지, 사냥감을 쫓아 어디로 이동할지 등을 누군가는 결정해야 한다. 두 전사가 격렬하게 싸울 때도 권위를 가진 누군가 사이에 끼어들어 말려주면 큰 도움이 된다.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 1996)은 네덜란드 아른험 동물원에 격리된 침팬지 집단의 행동을 연구하던 중 흥미로운 사례를 하나 관찰했다. "마마와 스핀의 말다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결국 물고 뜯는 싸움으로 번졌다. 수많은 침팬지가 싸움판으로 달려들어 두 암컷의 싸움에 가세했다. 비명을 지르며 엉겨 붙어 싸우는 침팬지 무리가 모래바닥을 뒹굴자, 우두머리 수컷인 루이트가 뛰어들어 이들을 사정없이 때려놓으며 떼어냈다. 루이트는 다른 침팬지들처럼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았다. 그저 싸움을 멈추지 않는 침팬지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주먹을 날렸을 뿐이다." 이 침팬...

한층 냉정하고 불친절한 코스미시즘(cosmicism)

한층 냉정하고 불친절한 코스미시즘(cosmicism) 위선이 왜 나쁜가. 이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시 멈춘다. 그리고 이내 "당연히 나쁘다"라고 답한다. 그 당연함 안에 이미 전제가 묻혀 있다. 어딘가에 도덕의 절대 근거가 있고, 그 근거에 비추어 위선은 나쁘다는 것. 신이든, 이성이든, 보편 인권이든 그 이름은 달라도 구조는 같다. 위에서 내려오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인간 행동을 평가한다. 나는 그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위선이 나쁜 이유는 간단하다. 공동체의 장기적 안정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착취가 문제인 이유도 같다. 인센티브 구조를 망가뜨리고, 협력의 기반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도덕처럼 보이는 대부분의 판단은 사실 효율성에 대한 판단이다. 포장이 다를 뿐이다. 이것을 "도덕이 아니라 효율"이라고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틀렸다. 그 구분 자체가 도덕의 초월적 근거를 전제할 때만 의미가 있다. 도덕의 근거가 공동체 구조의 유지와 적응이라면, 효율과 도덕은 애초에 같은 층위에서 작동한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 협력이 일어나는 이유는 인간이 이기심을 극복해서가 아니다. 협력이 이기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집단이 유지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협력의 이익이 배신의 이익을 일정 기간 동안 초과하기 때문이다. 그 균형이 깨지면 집단은 흔들린다. 여기서 종교가 등장한다. 종교는 이 이기심을 숨기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활용한다. 보상 구조를 내세(來世)로 연장하고, 공동체 규범을 신의 명령으로 코딩하고, 이탈자에게 사회적 비용을 부과한다. 효율적인 것처럼 보이는 설계다. 수천 년을 살아남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 설계가 오작동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가. 신의 뜻으로 포장된 무상 노동 요구. 달란트를 부여받았으니 결과로 보답하라는 논리. 자발성이라는 언어로 감춰진 열정 페이(Passion Tax). 이것들은 신학의 왜곡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 제도라는 장치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생산하는 부산물이다. 달란트 비유...

한층 차분한 코스미시즘

한층 차분한 코스미시즘 코스미시즘(cosmicism)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의 작품과 철학에서 주로 정립된 세계관으로, 인간이 우주의 중심적 존재라는 믿음을 부정하는 사상에 가깝다. 이 세계관에서 우주는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무관심하다. 인간의 도덕과 종교와 문명은 우주적 규모에서는 국지적 현상에 불과하며, 인간은 존재 전체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보장받지 않는다. 코스미시즘은 우주를 악의적인 공간으로 묘사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적 가치와 감정에 무심한 거대한 구조로 바라본다. 러브크래프트는 인간이 우주의 진정한 규모와 구조를 완전히 이해할 경우,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붕괴하면서 정신적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의 작품들에서 공포는 단순히 크툴루와 같은 괴물의 위협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의 미미함을 자각하는 순간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코스미시즘은 반드시 단순한 허무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리는 시선이며, 인간 문명과 도덕과 의미를 보다 비인간적 규모 위에서 다시 바라보려는 태도에 가깝다. 인간은 자신이 중심이라고 느끼도록 진화했다. 이것은 오만(傲慢)이라기보다 생존 전략에 가깝다. 자신의 부족, 자신의 도시, 자신의 국가, 자신의 문명이 세계의 중심처럼 느껴져야 협력하고 싸우고 번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명 규모의 부족 사회에서 형성된 정신 구조는 거대한 우주를 상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주변을 세계의 중심으로 축소한다. 그러나 우주는 인간의 본능을 고려하지 않는다. 관측 가능한 우주의 지름은 약 930억 광년이다. 그 안에는 약 2조 개의 은하가 있다. 우리 은하에만 수천억 개의 별이 있고, 그 별들 대부분은 행성을 거느린다. 인간은 그 중 하나의 별 주변을 도는 작은 암석 행성 표면에 얇게 붙어 사는 유기체 집단이다. 인류 문명 전체는 우주적 규모에서 보면 먼지보다도 작은 사건이다. 인간은 천 년을 길다고 느낀다. 그러나 빙하기는 인간 문명보다 오래 지속...

중국 실용주의의 종언과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부상

중국 실용주의의 종언과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부상 서구와 한국에서 중국을 “실용주의”로 평가했던 시기가 있었다. 대체로 2000년대, 장쩌민(江泽民)의 상하이방(上海帮)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후진타오(胡錦濤)의 공청단파(共靑團派)와 권력 균형을 이루던 시기였다. 두 파벌은 출신 배경과 정책 기조에서 차이를 보였지만, 이념적 순수성보다는 경제 성과와 안정적 통치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실용주의 노선을 공유했다. 상하이방(핵심 집권 기간은 1989년 ~ 2004년)은 덩샤오핑 사후 중국 공산당 내에서 가장 강력한 파벌 중 하나였다. 장쩌민이 상하이 시장과 당서기를 거치며 구축한 인맥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기술 관료·기업 엘리트 중심의 실용주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장쩌민 본인은 상하이에서 기반을 다졌고, 그의 심복들(쩡칭훙, 우방궈 등)이 핵심 요직을 차지하며 상하이방의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후진타오는 공청단파의 대표 주자였다. 지방 최말단에서부터 올라온 자수성가형 관료들로 구성된 이 파벌은 내륙 지역과 서민층 기반이 강했으며, ‘과학적 발전관’과 ‘조화로운 사회’를 기치로 빈부격차 완화와 내륙 개발을 상대적으로 강조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이어진 후진타오 시대는 명목상 공청단파가 주도하는 시기였으나, 실제로는 상하이방의 강력한 견제와 영향력이 지속됐다. 장쩌민이 퇴임 후에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2년간 유지하고, 정치국 상무위원 다수를 자신의 상하이방 인맥으로 채우면서 후진타오의 권한을 상당 부분 제한했다. 이 때문에 당시 중국 정치는 상하이방과 공청단파의 일당 양파(兩派) 체제로 특징지어졌다. 두 파벌은 출신 배경과 정책 강조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였지만, 근본적으로 이념적 순수성보다는 경제 성과와 체제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는 점에서 실용주의 노선을 공유했다. 정치 영역은 철저히 당의 독점을 유지하면서, 경제 영역에서는 상당한 자유를 허용하는 ‘정치는 닫고 경제는 푼다’는 암묵적 거래가 이 시대의 핵심 원리였다....

중공의 신권위주의와 천민자본주의 전격 해부

중공의 신권위주의와 천민자본주의 전격 해부 중국 공산당의 신권위주의(新權威主義, Neo-authoritarianism)는 서구 학계에서 종종 ‘우익’으로 분류된다. 평등주의에 강하게 저항하고, 엄격한 위계적 질서를 옹호하며, 강한 중앙집권 국가와 사회적 안정을 최고 가치로 삼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전통적 보수주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껍질을 한 겹 벗겨 들여다보면, 서구 우익이 수세기 동안 다듬어온 보수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갑고 실용적인 권력 기제가 드러난다. 신이 없다. 자연법이 없다. 원죄론도 없다. 강한 국가가 ‘옳은’ 이유는 초월적 도덕 질서나 신성한 섭리 때문이 아니라, 오직 경제 발전과 체제 안정에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결과가 정당성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 러셀 커크(Russell Kirk)가 평생토록 가장 혐오했던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극단적이고, 때로는 잔인한 변종이다. 신권위주의는 1980년대 후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사상 조류다.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변화하는 사회의 정치 질서(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에서 영향을 받아, 자유시장 개혁개방과 민주화가 동시에 진행될 경우 발생하는 혼란과 불안정을 경계하며, 먼저 강력한 권위로 시장 개혁을 추진한 뒤 점진적으로 정치 개혁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북방파(급진 개혁론)와 남방파(점진적·전통 문화 강조)로 나뉘지만, 공통적으로 강한 중앙 권위 아래 시장화 선행, 정치 안정 최우선, 엘리트 주도 개혁을 강조한다. 우자샹(吴稼祥), 천이쯔(陈一谘), 왕후닝(王沪宁) 등과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학계에서 이를 ‘우익’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평등주의적 급진 개혁을 거부하고, 위계와 권위를 중시하며, 강한 국가가 사회를 ‘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서구 보수주의와 기능적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서구적 의미의 보수주의와 근본적으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