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5편
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5편
종교라는 유전병과 낙관적 허무주의
1. 시작하며: 인식의 저주
4편까지 긴 여정이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을 각각 해부하고, 그 공통 기원인 아브라함과 야훼라는 아이디어의 구조를 추적했다. 이제 남은 질문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인식한 이후, 무엇이 달라지는가.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종교는 모든 것을 독살한다(Religion poisons everything)"고 했다. 선명한 문장이다. 그런데 이 에세이가 추적해온 논지는 히친스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문제는 종교가 독을 탄다는 것이 아니라 — 인류의 상당수가 그 독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방향으로 형성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독이 영양분이 되어버린 상태. 그리고 그 상태를 인식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그 소수마저도 이 구조 안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이것이 인식의 저주다. 알게 되면 되돌아갈 수 없지만,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
2. 참호 속의 무신론자: 역설의 해부
"참호 속에 무신론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전장에서 군종사제들이 가장 애용하는, 거의 주술처럼 반복되는 문장이다. 포탄이 머리 위를 스치고, 동료의 내장이 참호 바닥에 흩어져 있을 때, 인간은 결국 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주장. 극한의 공포 앞에서 종교가 인간 본성의 마지막 보루이자, 보편적 진리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한 겹만 벗겨내면, 역설의 날카로운 칼날이 드러난다.
먼저, 그 참호 자체를 누가 만들었는가. 인류가 지금까지 파헤친 가장 깊고 긴 참호들의 상당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의 이름으로, 혹은 종교가 제공한 강력한 정당화 아래에서 파였다.
십자군 전쟁은 "신의 뜻"이라는 구호 아래 예루살렘의 거리를 피로 물들였고, 30년 전쟁은 가톨릭과 개신교라는 신앙의 깃발 아래 유럽을 초토화시켰다. 오스만 제국의 지하드, 스페인의 레콘키스타, 인도의 무굴-힌두 충돌, 심지어 현대에 이르러서도 발칸 반도의 정교회-이슬람 갈등,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개신교 폭력, 미얀마 라카인 주에서 불교 승려들이 부추긴 로힝야족 학살, 인도에서 힌두 민족주의가 부채질한 이슬람 공동체에 대한 폭력, 일본 제국주의 시대 신토(神道)가 '천황은 현인신'이라는 신성한 서사로 정당화한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까지.
종교는 전쟁의 불씨를 지피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을 '성스러운 의무'로 승화시킴으로써,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살인에 대한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효과적으로 마비시켰다. 불을 지른 장본인이 연기를 피해 달려온 사람들에게 "내가 너를 구하겠다"며 소방관 복장을 입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더 섬뜩한 역설은 참호 안에서 벌어진다.
신의 이름, 성전(聖戰), 지하드, 크루세이드, 천황폐하 만세, 아미타불의 이름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세속적인 동기만으로 싸우는 병사들보다 오히려 더 잔인하고, 더 기꺼이, 더 효율적으로 죽였다. 죽음 이후에 천국이 약속되어 있다는 확신, 혹은 신성한 이념을 위한 희생이라는 숭고한 서사는, 인간의 살인 본능에 도덕적 면죄부를 제공했다.
종교는 죽음의 공포를 줄여주는 대신, 그 공포를 '초월'하게 함으로써 죽음을 더욱 손쉽고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계로 작동했다. 생명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는 종교가, 역설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대량살상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되어온 것이다.
생명의 존엄을 설파하는 설교가 가장 많이 울려 퍼지는 곳이, 생명이 가장 값싸게 버려지는 참호 위라는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신을 팔아 공포를 진정시키고, 그 진정된 공포 위에서 더 많은 죽음을 정당화한다.
이것이야말로 종교가 가진 가장 날카롭고, 가장 오래된 역설이다.
참호 속에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은, 결국 이렇게 들린다. "우리가 판 참호 속에서, 우리가 지핀 불 속에서, 너는 결국 우리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아는 순간, 그 문장은 더 이상 신앙의 승리가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 만든 가장 교묘한 덫에 대한 자백처럼 들린다.
3. 동물의 공동체와 인간의 차이
벌집을 보라. 수만 마리의 벌이 하나의 거대한 초유기체(超有機體, Superorganism)처럼 움직인다. 여왕벌을 중심으로 노동벌은 꿀을 모으고 유충을 돌보고 집을 보수하며, 병정벌은 침입자를 향해 망설임 없이 독침을 내리꽂는다. 그 사회에는 신학도, 교리도, 이단 심문도, 성스러운 전쟁도 없다. 오직 진화가 새겨놓은 본능과 화학 신호만이 완벽한 조화를 이룰 뿐이다.
늑대 무리도 마찬가지다. 강한 알파메일(Alpha Male)을 정점으로 명확한 서열이 자리 잡고, 협력 사냥을 통해 생존하며, 새끼를 공동으로 키운다. 이웃 무리와의 영역 분쟁에서 피가 튀고 죽음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싸움에는 어떤 형이상학적 정당화도 붙지 않는다. 적을 '타락한 존재'나 '신의 적'으로 규정하고 전멸을 명령하는 초월적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생존을 위한 날것의 충돌일 뿐이다.
코끼리 무리는 죽은 동료의 시체 앞에서 오래 머문다. 코로 뼈를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먼지를 뿌리며, 가족 전체가 조용히 서서 슬픔을 나눈다. 때로는 수 년이 지난 뒤에도 익숙한 해골을 찾아 다시 돌아오곤 한다. 그 애도에 사후 세계의 약속도, 영혼의 구원도, 천국과 지옥의 판결도 필요하지 않다. 죽음 앞에서 공동체가 느끼는 감정은 종교라는 장치 없이도 충분히 깊고 진실되다.
원숭이 사회에서는 도덕적 직관의 싹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같은 노동을 했는데 한쪽은 달콤한 과일을 받고 다른 한쪽은 메마른 채소만 받는 실험에서, 보상을 제대로 받은 원숭이조차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동료를 보고 음식을 거부하거나 화를 내며 항의한다. 공정성에 대한 감각, 연대 의식, 그리고 '정의'에 대한 원초적 직관이 이미 종교 없이도 그들 안에 존재한다는 증거다.
그런데 인간만이 이 동물적 토대 위에 거대한 형이상학적 구조물을 쌓아 올렸다.
그 구조물은 때로 눈부신 문명을 탄생시켰다. 철학과 예술, 복잡한 윤리 체계와 법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동시에, 특히 종교라는 형태를 띤 그 구조물은 다른 어떤 동물도 결코 범하지 않는, 체계적이고 이념적이며 대량적인 폭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신의 직접적인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우주의 도덕적 질서라는 이름으로, 신성한 혈통이나 선택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타 집단을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지워버리는 행위를 '의무'로 승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 폭력은 단순한 영토 다툼이나 자원 경쟁을 넘어선다. 그것은 우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음으로써, 가해자에게 도덕적 우월감과 면죄부를 동시에 선사한다. 늑대는 적 무리를 물어뜯지만, 그 행위에 '신의 뜻'을 덧붙이지 않는다. 침팬지는 경쟁 집단을 공격하지만, 그 공격을 '영적 정화'나 '역사의 필연'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코끼리는 슬퍼할 뿐, 죽은 자를 '지옥으로 떨어진 이단'으로 저주하지 않는다.
오직 관념의 힘, 즉 종교적·형이상학적 서사를 가진 인간만이 동물적 폭력을 '성스러운 희생'으로, '우주적 정의의 실현'으로 탈바꿈시킨다. 아브라함계 종교가 그 규모와 강렬함에서 두드러질 뿐, 본질적인 메커니즘(공동체를 강화하는 동시에 '타자'를 절대적 적으로 규정하는 메커니즘)은 종교를 가진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동물들은 종교 없이도 공동체를 이루고, 협력하고, 애도하고, 공정성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종교를 더함으로써 더 크고 복잡한 공동체를 건설했지만, 그 대가로 다른 어떤 생물도 상상하지 못한 수준의 조직적이고 이념적인 잔인함을 발명해 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 놓인, 가장 아이러니하고도 가장 섬뜩한 차이일 것이다.
4. 도덕이란 무엇인가: 집단 이기주의의 세련된 포장
도덕의 기원을 파헤쳐 보면, 우리는 결국 어디로 도달하는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도덕은, 집단의 생존과 번영을 높이는 행동 규범들의 집합이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금기들은 공동체 내부의 신뢰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실용적 장치일 뿐이다. 그것은 신의 계시이기 이전에, 오랜 진화와 문화적 선택을 거쳐 정착된 집단 생존 전략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도덕은 본래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뿌리에서 자라났다. 강자, 귀족, 생명의 긍정을 외치는 자들은 '좋음(good)'을 자신들의 힘, 고귀함, 창조적 의지와 동일시했다. 그들에게 '나쁨(bad)'은 단순히 약하고 천한 것, 가치 없는 것이었다. 반면, 약자, 억압받는 자, 복수할 수 없는 자들은 깊은 원한(ressentiment) 속에서 가치를 전도시켰다. 그들은 강자의 힘과 자부심을 '악(evil)'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약함(겸손, 연민, 복종, 평등)을 '선(good)'으로 재창조했다. 이것이 노예 도덕, 곧 기독교가 완성한 무리 도덕(herd morality) 의 본질이다.
이것을 우리는 집단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표면적으로 도덕은 개인의 이기심을 억제하는 고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실체는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본능과 욕망을 조율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이다. 내 집단 안에서는 살인하지 말라. 그러나 외부 집단에 대해서는?
아브라함계 종교, 특히 기독교는 이 문제에 명확하고 잔인한 답을 제시했다. 이교도는 다르다. 신의 적은 다르다. 그들에 대한 폭력은 더 이상 야만이 아니라, 신성한 정의의 실현이며, 때로는 구원의 의무가 된다. 노예 도덕은 내부에서는 평등과 사랑을 설파하면서도, 외부나 '타락한 자'에게는 무자비한 적대감을 정당화하는 이중 구조를 갖고 있다. 원한에서 비롯된 도덕이기에, 그것은 언제나 '악'을 먼저 상정하고 그 악을 짓밟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
종교적 도덕, 특히 기독교적 노예 도덕은 이 집단 이기주의를 신의 절대적 명령이라는 초월적 권위로 포장함으로써, 내집단-외집단의 구분을 더욱 단단하게 벽돌로 쌓아 올렸다. 동시에 외집단에 대한 폭력을 '선'의 이름으로, '신의 뜻'으로 승화시켰다.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가 경고했듯이, 유럽의 도덕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무리 동물의 도덕이 되어 버렸다. 강자와 고귀한 자를 '악'으로 몰아세우고, 평범함과 안전과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생명의 상승을 가로막는 도덕.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일부 종교적 도덕이 인간을 진보시키기는커녕 퇴보와 왜소화의 방향으로 이끈다는 점이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을 '오만'으로 규정하고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를 심판했던 바로 그 도덕, 남성의 육체적 욕망을 죄악으로 낙인찍는 도덕, 다른 문화와의 만남을 '영혼의 오염'으로 보는 배타적 도덕 기타 등등.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좁히고, 창조적 본능을 억압하며, 삶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왔다.
니체가 보았듯이, 노예 도덕의 승리는 인류에게 '마지막 인간'의 시대를 열어주었다. 위험을 두려워하고, 강한 의지를 의심하며, 평범함 속에서 안주하는 무리의 시대. 생명의 의지,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찬양하기보다, 그것을 죄책감과 연민과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거세하는 시대.
도덕의 계보를 끝까지 추적하면 우리는 결국 이렇게 마주친다. 도덕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 집단이 생존과 지배를 위해 만들어 낸 가장 교묘하고 가장 오래된 포장지다. 그리고 종교는 그 포장지를 가장 화려하고, 가장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인간이 자신의 동물성을 넘어설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면서 동시에, 그 동물성을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폭발시키는 도구가 되어왔다.
진정한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여전히 이 노예 도덕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선악의 저편으로, 새로운 가치 창조를 향해 나아갈 용기를 가질 수 있는가.
5. 공산주의: 껍데기를 바꾼 종교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가장 아이러니한 사실은,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철저한 종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를 비판한다는 명분으로 출발한 사상이, 결국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뼈대를 그대로 복제해 버린 것이다.
구조를 비교해 보면 그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다.
기독교에 원죄가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에는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원죄가 있다. 인류는 태생적으로 계급에 의한 착취라는 타락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 원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구원이 필요하다. 기독교에 구원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에는 혁명이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적 혁명을 통해 착취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종말론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에는 역사의 필연적 발전 법칙이 있다. 자본주의는 모순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붕괴하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라는 지상낙원이 도래한다는 확신이다. 기독교에 천국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에는 계급 없는 사회라는 유토피아가 있다.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국가와 계급이 소멸한 완전한 인간 해방의 상태.
기독교에 이단 심문이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에는 숙청과 인민재판이 있다. 교리에 대한 작은 이견조차 용납되지 않았으며, '수정주의자', '반혁명분자', '계급적 배신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이 제거되었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 등의 공산권 지도자들은 무신론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음에도, 실질적으로는 거의 신격화되었다. 그들의 말은 교리 그 자체였고, 그들의 초상은 성상처럼 숭배되었다. 당원은 신앙심에 가까운 헌신으로 체제에 복종해야 했으며, 의심이나 비판은 곧 영혼의 타락으로 간주되었다.
이 구조는 우연이 아니다. 공산주의는 종교의 초월적 권위를 세속화한 형태다. 하늘에 있던 신을 지상에 내려놓고, '역사의 필연'과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권위의 본질(절대적 진리, 구원의 서사, 이단에 대한 배척, 신앙적 헌신)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세속 종교'가 현실에서 드러낸 결과다. 이념의 순수성을 추구할수록, 실제 인간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계획 경제는 인간의 창의성과 동기를 무시한 채 중앙의 계산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고, 그 결과는 대규모 기근과 비효율의 참사로 이어졌다. '새로운 인간'을 만들겠다는 야심은, 오히려 기존 인간을 대량으로 파괴하는 기계로 작동했다. 소련의 대숙청, 중국의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북한의 주체사상 체제 — 이 모든 것은 공산주의가 '과학'을 표방하면서도, 종교적 광신에 가까운 확신과 배타성을 드러낸 사례들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정작 종교의 가장 위험한 구조를 그대로 답습했다.
인간은 종교적 사고 패턴(절대적 진리의 소유, 구원의 서사, 선악의 이원론, 이단에 대한 적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을 비판한다고 선언하는 순간조차, 그 패턴은 새로운 껍데기를 입고 재생산된다. 신의 자리를 '역사'나 '과학'이나 '프롤레타리아'가 대신 차지할 뿐, 본질적인 권위 구조와 폭력의 메커니즘은 살아남는다.
종교를 버린다고 해서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껍데기만 바꿀 뿐, 구조는 깊이 뿌리내린 채로 계속해서 인간을 지배한다.
공산주의는 그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20세기의 가장 거대한 실험이었다.
6. 종교라는 유전병: 진화론적 설명
왜 인류 역사상 거의 모든 사회에서, 거의 모든 시대에 종교가 존재해 왔는가. 이것을 단순히 무지나 세뇌, 혹은 권력자의 조작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보편성과 집요함이 너무 강렬하다. 인류학과 진화심리학, 인지과학의 연구들은 더 깊고 불편한 진실을 가리킨다. 종교적 성향은 인간 뇌의 하드웨어 구조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지적 편향과 유전적 소인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패턴을 찾도록 진화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패턴까지도 과도하게 찾아낸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에서 포식자의 발소리를, 우연한 재난에서 누군가의 의도를, 밤하늘의 별자리에서 신의 메시지를 읽어낸다. 이것을 과잉능동적 행위자 탐지(Hyperactive Agency Detection Device, HADD) 라고 부른다. 진화적으로 보자면 이는 매우 합리적인 적응이었다. 실제로 사자가 풀숲에 숨어 있다면 놓치는 대가는 즉사였지만, 바람 소리를 사자로 착각하는 대가는 그저 헛된 경계심일 뿐이다. "틀려도 비용이 적고, 맞으면 생존에 결정적"인 이 비대칭적 오류 편향은 우리 조상들의 생존율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그 부작용은 현대까지 이어진다. 자연 현상과 우연한 사건 속에서 초자연적 행위자의 의도를 읽어내는 경향. 바로 이것이 신, 영혼, 조상신, 천사, 악마 개념의 인지적 토대가 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메커니즘은 마음 이론(Theory of Mind) 이다. 인간은 타인이 자신과 다른 믿음, 욕망, 의도를 가진 독립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진화했다. 이 능력은 사회적 협력과 생존에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이 능력이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이상하게 작동한다. 죽은 자의 몸은 움직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 이론 모듈은 여전히 "그의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라고 묻는다. 꿈속에서 죽은 부모가 나타나고,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는 아직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영혼, 사후 세계, 환생,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들이다. 죽음의 공포를 완화하고 공동체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유용했지만, 동시에 비물질적 실재에 대한 믿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러한 인지적 편향들은 유전적 기반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쌍둥이 연구들은 종교성(religiosity)의 유전율을 30~50% 정도로 추정한다. 일란성 쌍둥이(MZ)와 이란성 쌍둥이(DZ)의 비교에서, 신에 대한 믿음, 기도 빈도, 종교적 경험의 강도 등 개인적 종교성은 유전적 요인의 영향이 상당히 크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특정 종교의 교리를 믿는 것은 문화적 학습의 결과지만, 종교적 경험에 친화적인 뇌 구조(초자연적 행위자를 쉽게 탐지하고, 초월적 의미를 갈망하는 경향)은 상당 부분 유전적으로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가 "기독교를 믿어라"고 직접 명령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인지적·감정적 소인을 물려줄 수는 있다.
여기에 문화적 전파 메커니즘인 밈(meme) 이론이 더해진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제안한 개념처럼, 종교는 자기복제에 탁월하게 적합한 밈들의 복합체(meme complex)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주입되고, "의심은 죄악"이라는 교리로 의심 자체를 차단하며, 공동체의 찬양과 처벌을 통해 강화되고, "자녀에게 반드시 전수하라"는 명령을 내장하고 있다. 천국이라는 보상과 지옥이라는 처벌은 순응을 극대화하고, 성전이나 순교라는 서사는 희생을 미화한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종교적 밈들은 문화적 자연선택 과정에서 다른 이념들보다 더 잘 살아남았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복제와 확산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종교에 취약한 뇌 하드웨어를 물려주고, 환경(가족, 공동체, 의례)은 그 소인을 소프트웨어로 발현시킨다. 일단 발현되면 강력한 집단 강화 메커니즘을 통해 주변으로 전염된다. 당사자에게는 "가장 자연스럽고 진실된 것"으로 느껴지지만, 외부에서 관찰하면 명백한 기능 장애를 동반한다. 현실 인식의 왜곡, 집단 간 폭력의 정당화, 과학적 탐구의 억제, 개인적 자율성의 희생 — 이전 에세이들에서 살펴본 수많은 역설들이 여기서 비롯된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유전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유전적 소인(Genetic Predisposition)이 있고, 특정 환경에서 발현되며, 한 번 감염되면 개인을 넘어 집단 전체로 빠르게 퍼지고, 감염자에게는 정상적인 상태로 느껴지며, 장기적으로는 숙주(宿主, 인간 사회)의 건강에 다양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가로막고, 불필요한 고통과 폭력을 증폭시켜 온 만성 질환.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다. 그 진화가 우리에게 준 인지적 선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초자연적 환상을 가장 설득력 있게 만들어 냈다. 종교는 따라서 우연한 부산물이자, 생존에 유리했던 적응의 어두운 그림자다.
이 유전병을 정확히 진단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완전한 치유는, 아마도 인류가 자신의 진화적 유산을 직시하고 새로운 가치와 사고 방식을 의식적으로 창조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7. 축의 시대 이전: 다른 인류의 가능성
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명명한 기원전 800년에서 200년 사이, 인류 정신사는 근본적인 변혁을 겪었다. 공자가 중국에서 예(禮)와 인(仁)을 설파하고, 붓다가 고통의 근원을 파헤치며 해탈의 길을 제시하고, 조로아스터교가 선과 악의 우주적 대결을 선언하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거리에서 무지(無知)를 자각하라 외치고, 유대 예언자들이 유일신의 계시를 전파하던 그 시기. 거의 동시에, 서로 다른 대륙에서 등장한 사상가들은 인류에게 '보편적 진리'와 '초월적 질서'라는 새로운 정신적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렇다면 축의 시대 이전의 인류는 어떠한 정신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을까.
수렵채집 사회의 종교(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영성(靈性))은 축의 시대 이후에 등장한 보편 종교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대개 애니미즘의 세계관 속에 살았다. 모든 산, 강, 나무, 동물, 바람 속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이 영들은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신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와 사물에 얽힌 존재들이었다. 그들에게 신앙은 보편적 진리를 소유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실용적이고 유연한 관계 맺음이었다.
그 세계에는 '유일한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다. 한 부족의 영이 다른 부족에게도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신앙의 이름으로 이웃 부족을 정복하거나, 이단을 색출하거나, 성전을 선포할 논리적 근거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폭력은 있었지만, 그것은 주로 자원과 영역을 둘러싼 실질적 충돌이었지, 이념적·신학적 정당화를 받은 조직적 학살은 아니었다.
축의 시대 이후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보편 종교들은 공통적으로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보편성의 주장은 곧 선교와 개종의 논리를 낳았고, 개종이 거부될 경우 강제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구호 아래 제국을 건설했다. 유대교에서 파생된 이 두 종교는 특히 배타적 일신교의 논리를 통해 '선택된 백성'과 '이방인'의 구분을 날카롭게 세웠다. 불교 역시 상대적으로 온화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역사 속에서 그 온화함은 종종 깨졌다. 스리랑카에서 불교 승려들이 타밀족에 대한 민족주의적 탄압을 정당화했고, 미얀마에서는 불교 민족주의가 로힝야 무슬림에 대한 인종청소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힌두 민족주의 역시 '힌두트바'라는 이름 아래 종교적·민족적 순수성을 내세우며 폭력을 정당화한다.
축의 시대 이전 인류의 폭력은 지역적이고 제한적이었다. 수렵채집 집단 간 충돌은 있었으나, 수십만, 수백만 명을 동원해 '신의 이름'으로 벌이는 대규모 성전(聖戰)이나, 이단 심문, 종교 전쟁은 문명화된 종교 사회가 발명한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었다. 조직적 폭력은 종교가 제공한 초월적 정당화와 결합하면서 비로소 산업적 규모로 확대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축의 시대 이전의 뇌'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단순히 교회에 가지 않는 무종교인, 개인적 상처로 신앙을 잃은 무신론자, 혹은 마르크스주의 저서를 읽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봉하는 사람은 여전히 종교적 개념 틀 안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죄책감, 구원, 악, 성스러움, 희생이라는 언어를 벗어나지 못한다. 불교 문화권에서 태어난 사람은 업(業), 윤회, 해탈, 자비라는 개념 없이 세상을 해석하기 어렵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도덕적 직관,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프레임 대부분이 이미 축의 시대 이후 종교에 의해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에 사는 물고기가 물의 존재를 인식하기 어려운 것처럼, 종교적 사고의 틀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간은 그 틀을 벗어나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극도로 어렵다.
우리는 "신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선과 악, 구원과 타락, 성스러움과 속됨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 속에서 생각하고 느낀다. 철저하고 전적인 무신론적 뇌(초자연적 절대자에게 삶의 방향을 맡기지 않고, 우연과 물질, 진화의 산물로서 존재를 받아들이는 뇌)를 가진 현대인은 생각보다 극히 드물다.
축의 시대 이전 인류는 아마도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절대적 진리를 소유하려 하지 않았고, 삶을 초월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았으며, 자연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된 채 살아갔다.
그 가능성은 지금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종교적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류 정신사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특정 역사적 전환점에서 선택된 하나의 경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 경로를 벗어나, 다른 인류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을까.
8. 유전병의 아이러니: 적응한 자들의 세계
이 유전병, 즉 종교적 성향은 진화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오히려 그 병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들이, 생존과 번식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종교적 공동체는 내부에서 강한 협력과 상호 부조를 이끌어냈다. 신앙이라는 공통의 서사는 구성원들 사이에 신뢰를 빠르게 형성하고, 자원 공유를 용이하게 만들었으며, 도덕적 규범을 통해 이기적 행동을 효과적으로 억제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출산율이었다. 종교를 강하게 믿는 집단은 대체로 가족 중심적 가치관을 강조하고, 피임을 죄악으로 여기거나 다산을 신의 축복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 무신론적·세속적 성향이 강한 집단은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낮아, 세대 교체에서 점차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여기서 다윈주의적(Darwinian) 아이러니가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종교라는 유전병의 메커니즘을 꿰뚫어 보고, 그 형이상학적 환상을 벗겨낼 수 있는 인지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오히려 생존 경쟁에서 체계적으로 도태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중세 유럽에서 자유사상가나 이단으로 의심받은 자들은 화형대 위에서 재가 되었다.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는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산 채로 불태워졌다. 계몽주의 시대에도 공개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한 철학자들은 사회적 배척과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도 무신론은 여전히 위험한 낙인이었다.
현대에 들어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파키스탄 등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공개적으로 무신론을 선언하는 것 자체가 사형 선고나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가 된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소말리아 같은 지역에서는 '신을 부정했다'는 소문만으로도 린치나 살해를 당할 수 있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조차 예외는 아니다. 미국에서 실시된 다수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무신론자는 여전히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집단 중 하나로 꼽힌다. Gallup의 장기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정당에서 지명된 잘 자격 있는 대통령 후보가 무신론자라면 투표하겠는가?”라는 질문에, 2012년에는 54%, 2020년에는 60%만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이는 같은 시기 무슬림(58~66%)보다도 낮거나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동성애자나 흑인 후보에 대한 수용도(80~90% 이상)보다 현저히 낮았다. 정치인들은 공개적으로 무신론을 선언하기를 극도로 꺼리며, 연설 끝에 “God bless America” 같은 종교적 수사를 거의 의무적으로 사용한다. 이는 무신론자가 도덕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오랜 종교적 편견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것이야말로 진화의 잔인한 역설이다. 진실을 더 명확하게 꿰뚫어 보는 자들이, 역사적으로 린치당하고, 화형당하고,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번식 기회를 박탈당해 왔다. 반대로, 종교적 환상에 더 깊이 빠져든 자들, 즉 유전병에 잘 적응한 자들이 더 많은 후손을 남기고, 그 후손들은 다시금 같은 집단적 망상을 강화하고 전파했다.
오류를 인식하고 수정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오류를 더욱 공고히 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인류의 문화적·유전적 진화가 치우쳐 버린 것이다. 종교라는 유전병은 숙주를 당장 죽이지는 않지만, 숙주의 인지 능력을 일정 부분 마비시키면서도 그 병에 감염된 숙주를 더 많이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 구조를 지적하는 무신론자나 자유사상가에게 자주 돌아오는 반박이 있다. "무신론도 결국 일종의 종교다."
이 말은 교묘한 범주 혼동이자, 방어 기제의 전형이다. 종교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적극적 믿음과, 그 믿음을 중심으로 한 의례, 공동체, 교리, 도덕 체계, 사후 세계관을 포괄한다. 무신론은 그저 그러한 믿음의 부재일 뿐이다. 금식(禁食)을 하나의 식단으로 부르는 것처럼, 신을 믿지 않는 태도를 '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부적절하다.
이 반박이 특히 교묘한 이유는, 그것이 종교인들 사이에 평소에는 서로를 이단이라 규정하며 싸우던 집단들이, 공통의 적(신앙을 거부하는 자)이 나타나자마자 순간적으로 연대하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가톨릭과 개신교, 수니파와 시아파, 힌두교와 불교는 서로를 오랫동안 적대해 왔지만, 무신론이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단결한다. 종교라는 유전병이 가진 또 하나의 영리한 생존 전략이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묻게 된다. 인류는 정말로 진실을 향해 진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실을 외면한 채 더 잘 적응하고 더 잘 번식하는 방향으로만 진화하고 있는가.
종교라는 유전병에 가장 잘 적응한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후손을 남기는 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불편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9. 무신론자 공동체 실험: DNA냐 밈이냐
만약 철저한 무신론자들만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완전히 격리된 환경에서 몇 세대에 걸쳐 유지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순수한 사고실험이다. 그러나 종교성의 기원이 유전적인 것인지, 문화적 밈적인 것인지, 혹은 둘의 복합적인 결과인지를 가르는 가장 날카로운 실험이 될 수 있다. 종교라는 유전병이 인간에게서 완전히 제거될 수 있는지, 아니면 인간이라는 숙주 자체가 그 병을 키울 수밖에 없는 구조로 진화했는지를 판별하는 결정적 테스트인 셈이다.
역사에는 이 실험에 근접한, 그러나 불완전한 시도들이 있었다.
20세기 소련은 국가적 규모로 가장 야심찬 무신론 실험을 감행했다. 교회를 파괴하고, 성직자를 처형하거나 수용소로 보냈으며, 학교에서는 철저한 무신론 교육을 실시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교리가 국가 이념의 핵심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이 억압한 것은 종교 기관과 공개적 의례였을 뿐, 인간의 머릿속에 이미 깊이 새겨진 종교적 밈까지 완전히 차단한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몰래 전하는 기도, 지하로 숨어든 신앙 공동체, 그리고 문화적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기독교적·이슬람적 서사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한 직후, 러시아와 구소련 국가들에서 종교가 급격하게 부활한 현상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수십 년간의 체계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모스크는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찼고, 오래된 성상과 의례가 부활했다. 이는 단순한 '억압된 문화적 정체성의 회복'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정말 문화적 밈의 일시적 복원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더 깊고 억누를 수 없는 인간의 내재적 성향이 폭발한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여기서 떠오른다.
특정 종교의 교리와 신화(예를 들어 기독교의 원죄와 구원 서사, 이슬람의 지하드 개념, 불교의 업과 해탈)는 분명 문화적으로 전파되는 강력한 밈이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는 것, 즉 초월적 의미에 대한 갈망, 우연 속에서 의도를 찾는 경향, 죽음 이후의 존속에 대한 직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을 추구하는 충동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들은 특정 종교가 사라진 뒤에도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날 수 있는, 더 근원적인 인지적·감정적 소인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완전히 격리된 무신론자 공동체를 수 세대에 걸쳐 운영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그 공동체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어떤 초자연적 가르침도, 어떤 종교적 의례도 접하지 않은 채 성장할 것이다. 그들은 과학적 세계관과 합리적 사고만을 교육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후손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유사종교적 구조가 나타난다면(예를 들어, 세속적이지만 강력한 이념적 숭배, 카리스마틱한 지도자에 대한 신격화, '역사의 필연'이나 '인류 진보' 같은 새로운 종말론, 특정 인물을 성인처럼 추앙하는 의례,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에 대한 배척) 이는 매우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것은 종교가 단순히 외부에서 주입된 문화적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깊은 층위(인지 구조, 감정적 욕구, 진화적 적응의 부산물)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특정 바이러스(기독교, 이슬람, 불교 등)를 제거해도, 그 바이러스가 쉽게 감염될 수 있는 숙주의 조건 자체가 인간의 DNA와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면, 종교라는 현상은 결코 완전히 뿌리 뽑힐 수 없다.
이 실험의 결과가 긍정적(종교적 성향의 재등장)이라면, 인류에 대한 절망은 한층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순히 잘못된 아이디어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잘못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마음의 구조를 물려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DNA냐, 밈이냐. 아니면 둘 다가 뒤엉켜 인간이라는 존재를 영원히 종교적 동물로 규정짓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아직 없다. 그러나 그 답이 무엇이든, 종교라는 유전병을 단순히 '교육'이나 '계몽'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류 대다수는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의 성스러운 환상 속에서 살아갈 운명인지도 모른다.
10. 유사종교의 재발생 가능성
인간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순수한 세속성' 속에서 오래 지속된 적이 적다. 어떤 집단이든 함께 살아가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집단적 의미 체계와 성스러운 서사를 만들어 낸다. 신화, 의례, 금기,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숭배, 희생과 구원의 이야기들은 특정 종교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는 보편적이고 거의 본능에 가까운 방식처럼 보인다.
마르크스주의가 종교의 구조를 거의 완벽하게 복제했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만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민족주의는 가장 성공적인 유사종교 중 하나다. 국기는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 신성한 상징이 되고, 그 앞에서 경례하는 행위는 종교적 예배로 변모한다. 국가 영웅들은 성인으로 승격되고, 그들의 죽음은 '조국을 위한 순교'라는 서사로 재구성된다. 국경은 물리적 선이 아니라 거의 종교적 경계선이 되어, 그 선을 넘는 행위는 배신이나 더러움으로 여겨진다. 국가 기념일은 세속화된 축일이며, 애국 교육은 교리 교육이다. "조국을 사랑하라"는 구호는 "신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스포츠 팬덤 역시 놀라울 정도로 종교적 구조를 닮았다. 팀 컬러는 부족의 전쟁 페인트가 되고, 경기장은 현대의 성전(聖殿)이 된다. 스타 선수는 일시적인 성인(聖人)이며, 그의 위대한 플레이는 기적에 가깝게 숭배된다. 라이벌 팀과의 경기는 선과 악의 대결로 재편되고, 챔피언십 우승은 지상에서 실현되는 작은 구원의 순간이 된다. 패배 후의 절망과 승리 후의 황홀경, 그리고 "우리는 하나다"라는 집단적 환호와 같은 이 모든 것은 고대 종교 의식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외에도 현대 사회에는 수많은 유사종교적 현상이 넘쳐난다. 좌익 자유주의 진영의 '정치적 올바름'과 '사회 정의' 운동은 강한 도덕적 절대주의와 이단 심판 메커니즘을 보여주며, 환경 운동의 일부 극단적 형태는 '지구라는 신성한 어머니'에 대한 숭배와 종말론적 경고를 담고 있다. 심지어 과학주의나 합리주의 커뮤니티조차 때로는 카리스마적 지식인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 내부 순결성 검증이라는 종교적 패턴을 드러내곤 한다. (그렇다고 과학적 방법론 자체를 종교 의식으로 매도하는 실수는 범하지 말라.)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완전히 세속화된, 철저한 무신론자들로만 구성된 공동체를 수 세대에 걸쳐 유지한다면, 그들은 정말로 종교적 구조를 초월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 공동체 역시 자신들만의 성스러운 서사를 창조할 것이다. 과학적 진리를 절대적 가치로 삼고, 특정 철학자나 과학자를 준-성인(準聖人)으로 추앙하며, 공동체의 기념일을 만들고, 내부 규범을 강화하기 위한 도덕적 금기를 설정할 것이다. 이탈자나 '반과학적' 생각을 가진 사람은 '계몽의 적'이나 '이성의 배신자'라는 이름으로 배척당할 수 있다.
그 구조가 기존 종교와 얼마나 다를 것인가. 이름과 외피는 다를지 모르나, 본질(집단적 동일시, 성스러운 서사, 내부 결속을 위한 도덕적 절대주의, 외부나 이탈자에 대한 적대감, 의미와 목적에 대한 갈망)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야말로 종교 문제를 바라보는 가장 냉철한 관점이다. 종교라는 특정 형태의 집단적 망상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문제의 근원은 특정 종교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의미를 구성하며 정체성을 유지하는 근본적인 방식에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 갈망은 공동체 속에서 필연적으로 '성스러운 것'을 만들어 낸다. 하늘이 비워지면, 지상의 무언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신이 물러나면 이념이, 민족이, 이데올로기가, 혹은 새로운 신성(神聖)이 그 빈자리를 메운다.
종교를 단순히 '없애는 것'이 해결책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 이 에세이 시리즈가 결국 도달하는 가장 불편한 결론 중 하나다.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오늘날의 종교를 버린 뒤, 우리는 어떤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환상 속에서 살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 새로운 환상이, 이전 종교보다 더 나은 것일까, 아니면 더 위험한 것일까.
어쩌면 문제는 환상 자체가 아니라, 환상을 생성하는 뇌의 구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정한 해결책은 더 나은 믿음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인간 자체를 재설계하는 것일 수 있다. 가령 기존의 종교적 영성이 작동하는 뇌를 전혀 다른 기계적 인지 구조로 대체하는 것 말이다. 즉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에서 나올법한 그 반인본주의적 도약이 주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틀려서라기보다는 너무 정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1. 사후세계라는 도구: 이승을 희생시키는 구조
종교가 인류에게 행사해 온 가장 강력하고도 교묘한 통제 도구 중 하나는, 단연 사후세계 개념이다. 이 도구는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브라함계 종교뿐만 아니라, 동양의 전통 속에서도 같은 논리가 정교하게 작동해 왔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명확한 천국과 지옥의 이원론을 제시한다. 올바른 신앙과 순종, 혹은 성전을 통해 순교하면 영원한 낙원이 기다린다는 약속. 반대로 불신과 죄악은 영원한 고통으로 이어진다. 힌두교의 윤회와 카르마, 불교의 윤회와 업(業) 개념도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이승에서의 고통과 불평등은 전생의 업보로 설명되며, 현세의 순응과 고행은 다음 생, 혹은 궁극적 해탈을 위한 필수 과정으로 재해석된다. 인도 카스트 제도의 가장 강력한 정당화 논리 역시 바로 여기에 있었다. "네가 지금 낮은 카스트에 태어난 것은 전생의 죄 때문이다. 그러니 이 고통을 참고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다음 생에서는 더 나은 위치를 얻을 수 있다."
이 논리는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현재의 빈곤, 착취, 억압, 부당한 고통을 참아내게 만드는 데, 사후 보상만큼 강력한 마취제는 없었다. 지배 계층은 피지배층에게 현실의 불의를 개혁하려는 대신, 죽은 뒤에 보상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팔았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찔렀다. 종교는 현실의 고통을 치유하지 않고, 그 고통을 견디게 만드는 마약을 제공했다.
그러나 사후세계 개념의 가장 위험한 기능은 순응을 넘어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있다.
"이교도를 죽이면 천국에 간다."
"신을 위해 순교하면 즉시 낙원으로 간다."
"고통받을수록, 죽음이 가까울수록, 더 큰 상이 기다린다."
이런 논리는 종교적 폭력의 가장 강력한 연료가 되어왔다. 십자군 전사들은 예루살렘을 피로 물들이며 "Deus vult"를 외쳤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자살폭탄을 몸에 두르고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기꺼이 던졌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옥쇄' 정신 역시 천황이라는 살아있는 신을 위한 희생을 미화했다.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생명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뒤바꾼다. 이 세상의 삶은 영원한 삶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퍼지면, 자신의 생명도, 타인의 생명도 쉽게 경시하게 된다. 현재의 고통과 희생이 클수록, 사후의 보상이 크다는 계산이 작동한다. 이승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저승으로 가는 통로이자 시험장으로 전락한다.
여기서 가장 냉정하고도 파괴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만약 사후세계가 없다면? 만약 종교가 약속한 그 모든 천국, 낙원, 해탈, 극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수천 년 동안 종교의 이름으로 감수한 모든 고통, 모든 희생, 모든 폭력, 모든 순종이 결국 아무것도 없는 허무 속으로 사라지는 길이었다면?
더욱 섬뜩한 모순은 종교 내부에 이미 존재한다. 서로 다른 종교들이 서로 모순되는 사후세계를 약속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는 무슬림이 지옥에 간다고 믿고, 무슬림은 알라를 부정하는 기독교인이 지옥에 간다고 믿는다.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설 역시 서로 다른 해탈의 경로를 제시한다. 그중 하나만이 맞을 수 있고, 어쩌면 모두가 틀렸을 수도 있다.
자신이 죽인 타종교 신자의 신이, 하필 진짜 신이었다면? 그 순간 살인자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종교적 논리 안에서도 이 모순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향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근거로 작용할 뿐이다.
야생의 동물은 이런 계산을 하지 않는다. 사자도, 늑대도, 새도 사후의 보상을 기대하며 현재의 삶을 희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DNA에 새겨진 본능에 따라 먹고, 싸우고, 번식하고, 죽는다. 그 삶은 종교적 인간이 보기에는 '야만적'이고 '의미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사후세계라는 환상 때문에 이승의 유일한 삶을 도구화하고, 폭력과 순응의 올가미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 진정 더 '의미 있는' 삶인가. 아니면, 주어진 유일한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정직하고, 더 솔직한 태도인가.
사후세계는 종교가 인간에게 준 가장 강력한 마취제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무기였다. 그것은 이승을 희생시키는 구조를 완성함으로써, 수많은 인간을 현실의 고통 속에 가두고, 폭력의 순환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약속이 허구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직시하는 순간, 종교가 빚어낸 가장 거대한 기만 중 하나가 서서히 드러난다.
12. 낙관적 허무주의: 빈 캔버스의 가능성
그렇다면, 지금까지 탐구해 온 이 모든 역설과 구조를 냉정하게 직시한 후,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의미의 부재를 발견한 순간, 허무주의는 두 갈래 길로 갈린다. 하나는 비관적 허무주의다. 삶에 본래적인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며,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무기력과 냉소 속으로 빠져든다. 또 하나는 낙관적 허무주의다. 의미가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깊은 자유와 가능성을 발견한다.
낙관적 허무주의는 가장 과감한 정신적 전환이다. 신이 죽었다는 선언은, 동시에 인간에게서 강제된 목적과 필연적 서사의 굴레가 사라졌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더 이상 우주가 나를 지켜보고 있지 않고, 죽음 이후에 어떤 심판도, 보상도, 벌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애당초 부여된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 신이 지정해 준 삶의 목적이 없다면, 그 목적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사후세계를 위해 이승을 희생할 필요가 사라진다면, 지금 이 유일하고 찰나적인 삶 자체를 최대한 치열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 도덕이 신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 집단이 만든 실용적 규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죄책감이라는 감옥에 갇히지 않고, 보다 성숙하고 자율적인 윤리를 스스로 세울 수 있다.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스 신화》에서 보여준 이미지가 바로 이 낙관적 허무주의의 정수다. 신들의 벌을 받아 영원히 거대한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 그러나 바위는 정상에 다다르는 순간마다 다시 굴러 떨어진다. 끝없는 반복과 부조리. 카뮈는 말한다. 우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그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노동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들이 부여한 형벌이 아니라,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반항하며 살아가는 태도. 바로 그것이 부조리 속에서의 자유다.
종교는 이 부조리를 견디지 못해 만들어낸 정교한 의미의 체계였다. 원죄와 구원, 업과 해탈, 천국과 지옥, 신의 계획과 역사적 필연이라는 거대한 서사들은 인간에게 삶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견디게 해주는 마취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마취제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수많은 전쟁과 학살, 이단 심문과 숙청, 개인의 자율성과 지성의 희생, 현실의 삶을 도구화하는 구조 등과 같이 인류는 의미를 얻는 대신 너무 많은 피와 자유를 지불했다.
낙관적 허무주의는 이 거래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부조리를 직면하되 절망하지 않는다. 우주가 침묵한다는 사실을 공포가 아니라 해방으로 읽는다. 의미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의미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신, 타인의 이념, 타인의 교리에 삶을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된다.
빈 캔버스는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종교라는 거대한 프레임이 사라진 자리에, 우리는 스스로 색을 칠하고, 형태를 만들고, 이야기를 쓸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영원하지 않아도 된다. 오직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고,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이면 충분하다. 사랑, 창조, 탐구, 우정, 아름다움, 반항, 연대 등 이 모든 것은 신의 허락 없이도 충분히 빛날 수 있다.
낙관적 허무주의는 따라서 게으른 방종이 아니라, 가장 높은 형태의 책임감이다. 의미를 외부에서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 창조하는 책임. 죽음 이후의 환상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용기.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당당히 서서 "그래도 나는 살아간다"고 선언하는 반항의 태도.
우리는 결국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영원한 의미를 약속하는 대신 현실의 고통과 폭력을 요구했던 오래된 거래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의미의 부재를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그 빈 공간 위에 우리만의 자유롭고 성숙한 삶을 그려나갈 것인가.
빈 캔버스는 두렵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그 위에 무엇을 그릴지는, 이제 오직 우리에게 달려 있다.
13. 그럼에도 남는 질문들
이 에세이는 구체적인 답을 주장하기보다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썼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답보다 질문이 남는다.
종교적 성향이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억압은 소련이 보여주었듯 효과가 없다. 교육은 가능성이 있지만 느리고, 종교 공동체는 자신들만의 교육 체계를 가지고 있다. 무신론자 공동체는 결국 유사종교적 구조를 재생산할 가능성이 있다.
종교가 제공하는 기능들(죽음의 공포에 관한 관리, 공동체 결속, 의미 부여, 도덕적 규범)을 종교 없이 제공할 수 있는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안이 무엇이든 그것이 집단적 이념의 형태를 취하는 순간 종교의 구조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이 에세이가 어떤 집단적 대안을 섣불리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 이 모든 것을 인식한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 그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종교라는 유전병을 가진 대다수 속에서, 그 구조를 인식하는 소수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 것인가.
아마도 그것이 종교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스스로 답해야 할 질문이다.
14. 종교라는 이름의 바이러스
5편에 걸쳐 긴 여정이었다.
아브라함계 종교를 중심 소재로 삼았지만, 이 에세이가 도달한 결론은 아브라함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이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극단적인 사례였을 뿐이다. 불교 민족주의의 학살, 힌두 민족주의의 폭력, 신도의 제국주의적 동원 — 종교라는 시스템은 그 형태와 무관하게 반복적으로 같은 패턴을 만들어낸다.
야훼는 가나안의 한 부족신에서 시작하여 인류 절반의 정신적 지형을 지배하는 보편신이 되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자비를 설했지만 그 이름 아래 학살이 이루어졌다. 힌두교의 우주적 질서는 카스트라는 억압 구조를 정당화했다. 신도는 천황이라는 인간 신을 내세워 제국의 침략을 성전으로 포장했다. 종교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 배타적 진리 주장, 내집단과 외집단의 구분, 신성한 권위에 의한 폭력 정당화라는 구조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한다.
그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것들 — 문명, 예술, 도덕, 법 — 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대가로 지불된 것들 — 수억 명의 생명, 무수한 문화의 파괴,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의 억압 — 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이 에세이는 특정 신자를 향한 적대감으로 쓴 것이 아니다. 신자들도 대부분 그 구조의 산물이며, 그 구조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비판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구조다. 종교라는 집단적 망상이 인류에게 무엇을 해왔는지를 직시하는 것 — 그것이 이 사고실험의 목적이다.
종교가 없어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처음으로 온전히 각자의 문제가 된다.
6편에서는 해부 대상을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너머로 확장한다. 불교, 힌두교, 신토 등 어떤 종교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같은 냉정함으로 추적한다.
- 참고문헌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 종교적 신앙이 합리적 근거가 없는 망상이며, 종교 자체가 밈으로서 자기복제하는 구조를 가진다는 논지. 종교의 진화적 기원과 사회적 폐해를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God Is Not Great)』 — "종교는 모든 것을 독살한다"는 명제 하에 세계 주요 종교들의 역사적 해악을 직접적이고 신랄하게 추적한 저작.
대니얼 데닛, 『주문을 깨다(Breaking the Spell)』 — 종교를 자연현상으로서 과학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주장. 종교가 어떻게 진화적으로 발생하고 문화적으로 전파되는지를 인지과학과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탐구한다.
파스칼 보이어,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Religion Explained)』 — 종교적 개념들이 왜 인간의 인지 구조에 잘 달라붙는지를 인지과학적으로 설명. 과잉능동적 행위자 탐지(HADD) 개념을 통해 종교적 사고의 신경학적 기원을 추적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On the Genealogy of Morals)』 — 기독교적 노예 도덕(slave morality)의 기원을 원한(ressentiment)에서 찾고, 주인 도덕과 대비하며 종교적 도덕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왜소화하는지를 철학적으로 해부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Beyond Good and Evil)』 — 전통적 도덕과 종교적 가치의 기원을 비판하며,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무리 도덕(herd morality)과 노예 도덕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샘 해리스, 『신앙의 종말(The End of Faith)』 — 종교적 신앙이 이성과 과학, 도덕적 진보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특히 종교 극단주의와 폭력의 연결고리를 분석한다.
스콧 아트란, 『신을 믿는 우리는(In Gods We Trust: The Evolutionary Landscape of Religion)』 — 종교가 인간의 진화적 심리와 인지 편향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강화되는지를 인지인류학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탐구한 저작.
로버트 N. 벨라, 『인간 진화 속의 종교(Religion in Human Evolution: From the Paleolithic to the Axial Age)』 — 수렵채집 시대부터 축의 시대까지 종교의 진화 과정을 거시적으로 다루며, 보편 종교 등장 이전의 애니미즘적 세계관과 그 이후의 변화를 비교 분석한다.
칼 야스퍼스, 『역사의 기원과 목표(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 — 축의 시대(Axial Age) 개념을 처음 제시한 고전. 기원전 800~200년 사이에 동서양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난 정신적·철학적 혁명을 분석하며, 현대 인류 정신의 기원을 탐색한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스 신화(The Myth of Sisyphus)』 — 부조리(absurd)와 허무를 직시한 뒤에도 삶을 긍정하는 낙관적 허무주의의 전형을 제시. 의미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유와 행복을 창조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빅터 스텐저, 『신은 실패한 가설이다(God: The Failed Hypothesis)』 —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신의 존재를 검증하고, 종교적 주장들이 경험적 증거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체계적으로 반박한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