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7편

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7편


종교, 정치, 그리고 기생의 구조


1. 시작하며: 종교관과 정치관의 교차점


이 에세이는 6편에 걸쳐 종교라는 시스템을 해부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종교가 이렇게 구조적으로 폭력과 억압을 만들어낸다면 — 그 종교를 비판하는 이념들은 어떤가. 무신론은 그 비판에서 자유로운가. 그리고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 편은 앞선 분석을 토대로, 종교 비판이 향해야 할 더 정확한 표적을 겨냥한다. 좌파 종교인도, 우파 종교인도, 그리고 진보주의적 무신론자도 — 모두 같은 구조 안에 있다는 것.


2. 종교란 무엇인가: 진화적 적응 기제로서


종교를 신의 계시나 영원한 진리의 체계로 해석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것을 먼저 생물학적·진화적 현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인류가 직면한 가장 오래된 문제들(죽음, 고통, 자연의 무자비함, 그리고 불확실성)을 해결하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서 종교는 수십만 년에 걸쳐 다듬어졌다.


선사시대 인류는 번개가 왜 치는지, 왜 아이가 죽는지, 사냥감이 사라지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신 토테미즘, 애니미즘, 샤머니즘이라는 원시적 신앙 체계를 발전시켰다. 숲 속의 나무와 강, 죽은 조상의 영혼, 그리고 동물의 정령이 모두 살아 숨 쉬고 의식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이 믿음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극한의 공포와 불안을 줄이고,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며, 생존 확률을 높이는 강력한 심리적·사회적 적응 기제였다. 이러한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종교적 경향은 문화적 학습을 넘어 유전자 수준에 부분적으로 각인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관찰하는 ‘신앙의 본능’은 바로 그 오랜 진화의 유산이다.


신경신학(Neurotheology)과 진화심리학 연구들은 이 점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한다. 전두엽의 특정 영역(특히 내측 전전두피질)과 측두엽(측두엽 간질과 관련된 회로), 그리고 변연계의 편도체·해마가 종교적·신비적 경험에 깊이 관여한다. fMRI 연구에서 신앙적 몰입이나 기도, 명상 시 이 영역들의 활동이 현저히 증가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반대로, 이 회로의 반응성이 선천적으로 낮은 사람들은 강렬한 종교적 체험이나 ‘신의 존재’에 대한 직관적 확신을 느끼기 어렵다.


극단적인 경우, 측두엽 간질이나 특정 뇌 손상으로 이 회로가 과활성화되면 과잉종교성(Hyperreligiosity)이 나타난다. 한때 무신론자였던 사람이 갑자기 강렬한 종교적 계시를 경험하거나, 신과의 직접적 교감을 주장하는 사례들이 임상적으로 보고된다. 이는 종교적 감수성이 결코 ‘영적 선택’이나 도덕적 우월성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하드웨어적 특성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관점에서 종교는 초월적 진리의 반영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산물이다. 두려움을 위안으로 바꾸고, 무질서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을 협력적 집단으로 묶는 진화적 ‘해킹’이었다. 그러나 이 적응 기제가 대규모 집단에서 제도화되고, 정치·경제적 권력과 결합하는 순간, 그 본질은 변질된다. 교리와 성전, 이단 심판과 성전(聖戰)이 등장하고, 앞서 논의된 수많은 폭력과 억압의 역사가 시작된다. 종교는 더 이상 개인의 심리적 지지대가 아니라, 집단을 통제하고 이익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사회적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종교적 회로의 민감도가 낮게 태어난 사람들—이른바 ‘선천적 비종교인’—에게 종교는 결코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종교는 외부에서 강요되는 규범과 금기, 죄책감과 두려움의 체계로만 다가온다. ‘신의 은혜’나 ‘영적 각성’이 아니라, 자유를 억압하고 사고를 통제하는 기구로 느껴진다. 이는 그들의 도덕적 결함이나 영적 무지 때문이 아니다. 단지 신경학적·유전적 스펙트럼의 자연스러운 차이일 뿐이다.


종교를 진화적 적응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더 냉철하고 인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신성한 것에서 벗어나 인간의 것이 된 종교는, 그만큼 더 솔직하게 비판하고, 더 건강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3. 무신론도 종교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자해적 조롱


“무신론도 종교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무신론자들을 비웃을 때 가장 즐겨 꺼내는 말이다. 이 한마디에는 ‘너도 결국 우리와 똑같은 신앙의 노예일 뿐’이라는 조소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조롱은 의도와 정반대로 작동한다. 그것은 무신론자를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근본주의자 자신의 종교적 우월감을 자해하는 부메랑이 된다.


만약 무신론이 종교의 구조를 반복한다면, 현대 무신론은 어떤 종교와 가장 닮았는가? 이슬람의 율법주의도, 불교의 무아(無我) 철학도, 힌두교의 순환적 세계관도 아니다. 현대 서구 무신론(특히 신앙비판적·계몽주의적 무신론)은 구조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기독교와 가장 깊이 닮아 있다. 정확히 말하면, 계몽주의 이후 세속화·합리화된 기독교, 즉 기독교의 신학적 DNA를 물려받아 신(God)만 빼고 재포장한 버전이다.


먼저 신앙의 구조를 보자. 전통 기독교는 ‘원죄 → 구원자(그리스도) → 구원 →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서사적 구원론을 가진다. 현대 세속 무신론 역시 유사한 서사를 반복한다. ‘무지와 미신(원죄) → 과학과 이성(구원자) → 진보와 해방(구원) → 완전한 인본주의 사회(지상낙원)’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둘 다 강한 전체주의적 보편주의를 지닌다. 기독교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외쳤다면, 현대 무신론은 “모든 사회에 과학적 합리성과 인권”을 전파하려 한다. 둘 다 ‘진리’를 독점하며, 이단을 용납하지 않는 배타성을 보인다. 기독교가 이단재판소를 뒀다면, 일부 급진 무신론자들은 ‘반과학’ ‘반합리’ ‘혐오’라는 이름으로 도덕적·사회적 파문을 내린다.


역사적으로도 연결고리는 명확하다. 서구의 인본주의, 자유주의, 심지어 일부 사회주의 사상은 기독교 신학의 직접적 후예들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신학적 명제는 신을 제거한 뒤 “모든 인간은 권리 앞에서 평등하다”는 세속 선언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다. 진보주의의 선형적 역사관(인류는 계속 좋아진다) 역시 기독교의 구원사적 시간관의 세속화된 형태다. 리처드 도킨스나 샘 해리스 같은 신(新)무신론자들이 제시하는 ‘도덕적 진보’와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은, 신앙의 열정만큼이나 종교적이다.


따라서 근본주의자가 “무신론도 종교다”라고 외치는 순간, 그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1) 무신론은 종교적 구조를 가진다.  

(2) 그 구조는 기독교와 본질적으로 동일하거나, 기독교에서 파생된 것이다.  

(3) 그러므로 나의 기독교는 보편적·초월적 진리가 아니라, 특정 문화·역사적 조건 속에서 나온 ‘하나의 이념 체계’에 불과하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근본주의의 핵심 주장은 “우리만이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신론을 종교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종교를 ‘특별한 계시’의 지위에서 끌어내리고, 수많은 이념 중 하나로 평준화시켜 버린다. 마치 “너도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나와 동급이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래서 내 신앙은 특별하지 않다”는 결론을 스스로 도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가 사생아를 발견하고 “저 애도 내 피가 섞였으니 가족이다!”라고 외치며, 동시에 “그래서 우리 가문의 순수 혈통은 개소리다”라고 선언하는 자해 행위와 다르지 않다. 조롱하려던 대상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 얼굴에 침을 뱉는 순간, 침은 결국 자신의 얼굴로 떨어진다.


결국 “무신론도 종교다”라는 말은 근본주의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진술이다. 그것은 무신론을 깎아내리는 데 실패할 뿐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세속적 이념의 수준으로 낮추는 철학적 자살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을 가장 열심히 외치는 사람들이야말로 기독교의 ‘신성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체하고 있는 셈이다.



4. 진보주의적 무신론: 신을 제거한 청교도주의


현대 무신론의 절대다수는 진보주의적 무신론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나치게 기독교를 닮아 있다.


기독교와 현대 무신론적 진보주의(리버럴리즘과 사회주의)는 놀랍도록 유사한 구조를 공유한다.


구속과 해방의 서사 구조가 양측 모두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원죄에 빠졌고, 회개를 통해 구원에 이른다. 무신론적 진보주의는 인간이 사회적·역사적 억압 속에 있으며, 계몽과 혁명을 통해 해방된다는 서사를 중심에 둔다.


윤리 체계의 절대성도 공통점이다. 기독교는 신의 계율을 절대적 도덕 기준으로 삼는다. 무신론적 진보주의는 인권, 평등, 정의 같은 보편 윤리를 절대화하며, 마찬가지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도덕적 기준으로 삼는다.


선민 의식도 유사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한다. 현대 좌익 이데올로기는 계몽된 시민, 깨어 있는 사람들, 해방된 노동자 계층을 의식적으로 더 진보된 인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관도 구조적으로 같다. 기독교는 인류의 역사를 타락에서 구속, 종말에 이르는 직선적 서사로 이해하며 천국과 지옥이라는 심판의 이중 구조가 있다. 무신론적 진보주의는 이성과 과학과 정의를 통해 나아가는 진보의 과정을 상정하며, 완전한 평등과 해방이 실현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대한다. 신은 사라졌지만 — 이에 반하는 자들에게는 캔슬 컬처와 콜아웃 컬처라는 비공식적 지옥이 부과된다. 심판의 기능은 다른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신념의 확산 방식도 유사하다. 기독교는 복음을 전파하며 이웃을 전도하려는 강한 선교적 충동을 가진다. 무신론적 진보주의자들도 교육, 캠페인, 사회운동, 정치적 개입을 통해 계몽과 의식화를 시도한다.


이단 심판의 메커니즘도 동일하다. 기독교는 배교자에게 지옥을 예고한다. 무신론적 진보주의는 극우, 혐오주의자, 반지성주의자로 낙인찍힌 이들을 직업적 기회, 사회적 평판, 공동체 내 입지에서 철저히 배제하려 든다. 신이 죽은 사회에서도 이단자에 대한 제명과 추방은 작동한다.


5. 야빈의 계보학: 청교도에서 워키즘까지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필명: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은 이 구조적 유사성을 단순한 비유 수준을 넘어, 철저하고 급진적인 역사적·분지학적(cladistic) 계보학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현대 무신론자들을 “청교도 무신론자(Puritan atheist)”라고 불렀다. 이들의 사상은 17세기 영국 내전기의 극단적 비국교도(Dissenter)들—레벨러, 디거, 퀘이커, 제5왕국주의자 등—의 구조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야빈은 특히 《도킨스는 어떻게 몰락했는가(How Dawkins Got Pwned)》 시리즈(2007)에서 이 계보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나는 도킨스 교수가 단순한 기독교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는 개신교 무신론자다. 단순한 개신교 무신론자도 아니다. 그는 칼뱅주의 무신론자다. 단순한 칼뱅주의 무신론자도 아니다. 그는 앵글로칼뱅주의 무신론자다. 즉, 청교도 무신론자, 비국교도 무신론자, 비순응주의 무신론자, 복음주의 무신론자 등으로도 불릴 수 있다.(My belief is that Professor Dawkins is not just a Christian atheist. He is a Protestant atheist. And he is not just a Protestant atheist. He is a Calvinist atheist. And he is not just a Calvinist atheist. He is an AngloCalvinist atheist. In other words, he can be also be described as a Puritan atheist, a Dissenter atheist, a Nonconformist atheist, an Evangelical atheist, etc, etc.)” 

 

- How Dawkins Got Pwned, Part 2, October 4, 2007 [링크: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07/10/how-dawkins-got-pwned-part-2/]


그는 이어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 분지학적 분류는 도킨스의 지적 계보를 약 400년 전 영국 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무신론 테마를 제외하면 그의 사상 핵심은 랜터(Ranter)[1], 레벨러(Leveller)[2], 디거(Digger)[3], 퀘이커(Quaker)[4], 제5왕국주의자(Fifth Monarchist)[5] 등 크롬웰 시대 극단적 영국 비국교도 전통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솔직히 말해, 그 작자들은 괴짜들이었다. 광적인 광신도들. (This cladistic taxonomy traces Professor Dawkins’ intellectual ancestry back about 400 years, to the era of the English Civil War. Except of course for the atheism theme, Professor Dawkins’ kernel is a remarkable match for the Ranter, Leveller, Digger, Quaker, Fifth Monarchist, or any of the more extreme English Dissenter traditions that flourished during the Cromwellian interregnum. Frankly, these dudes were freaks. Maniacal fanatics.)”  


- How Dawkins Got Pwned, Part 2, October 4, 2007


야빈에 따르면, 이 청교도적 충동은 대서양을 건너 신정(神政) 식민지를 세웠고, 미국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며 힘을 키웠으며, 제1·2차 세계대전과 냉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지구적 패권 이데올로기로 완성되었다.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정당하고 주류인 사상은 미국 청교도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영국 비국교도들로부터 유래했다. […] 제1차·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에서의 승리는 그 패권을 확정지었다. (All legitimate mainstream thought on Earth today is descended from the American Puritans, and through them the English Dissenters. [...] Its victories in World War I, World War II, and the Cold War confirmed its global hegemony.)”  


- How Dawkins Got Pwned, Part 2, October 4, 2007


'도킨스는 어떻게 몰락했는가 제3부'에서는 이 ‘진보’의 철학적 본질을 더 깊이 파고든다. 도킨스가 자주 말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이 사실상 청교도적 섭리의 세속 버전이라는 것이다.


“사실 도킨스 교수의 ‘시대정신(Zeitgeist)’는 애덤스(Adams) 가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숙했을 앵글로칼뱅주의자나 청교도의 ‘섭리(Providence)’ 개념과 구분하기 어렵다. […] 시대정신의 다른 이름은 진보(Progress)다. (In fact, Professor Dawkins’ Zeitgeist is so nice that it’s indistinguishable from a concept that would have been quite familiar to any member of the Adams family—the old AngloCalvinist or Puritan concept of Providence. [...] Another word for Zeitgeist is Progress.)”  


- How Dawkins Got Pwned, Part 3, October 11, 2007 [링크: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07/10/how-dawkins-got-pwned-part-3/]


'도킨스는 어떻게 몰락했는가 제4부'에서는 이 모든 흐름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으로 결론짓는다.


“그러나 내 의견으로는, 보편주의(Universalism)는 칼뱅주의 계열의 현대 지배적 기독교 분파이며, 영국 비국교도 또는 청교도 전통에서 유니테리언주의, 초월주의, 진보주의 운동을 거쳐 진화한 것이다. (In my opinion, however, Universalism is the dominant modern branch of Christianity on the Calvinist line, evolving from the English Dissenter or Puritan tradition through the Unitarian, Transcendentalist, and Progressive movements.)”  


- How Dawkins Got Pwned, Part 4, OCTOBER 18, 2007 [링크: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07/10/how-dawkins-got-pwned-part-4/]


이 계보학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진보주의를 기독교의 ‘반대’로 보는 모든 논의가 범주 오류임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워키즘 진보주의자는 서로를 격렬히 적대하지만, 사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서로 다른 분파일 뿐이다. 한쪽은 신을 유지한 채, 다른 한쪽은 신을 제거한 채로 같은 구원 서사, 같은 보편주의, 같은 이단 심판 메커니즘을 반복한다.


현대의 ‘대성당(Cathedral)’은 바로 이 청교도적 충동이 세속화된 형태다. 신은 사라졌지만, 평등, 폭력의 무익함, 사회 정의, 완전한 관리 사회라는 핵심 원칙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워키즘 문화는 17세기 청교도들의 광신이 21세기 언어로 재포장된 최신 버전에 불과하다.


야빈의 통찰은 불편하다. 그것은 좌우 대립이라는 편리한 프레임을 해체하고, 서구 근현대사를 하나의 긴 청교도 혁명의 연속으로 재구성한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정치적 의견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진화해 온 세속 종교의 현세 버전이다.


이 계보학을 이해하는 순간, “무신론도 종교다”라는 근본주의자의 조롱은 완전히 역전된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종교가 이미 오래전에 세속화되어 승리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6. 종교에 좌파가 기생하는 구조


왜 종교계에는 좌파적 사상이 그렇게 쉽게 침투하고, 때로는 지배적으로 군림하는가. 이는 단순한 ‘좌파의 음모’나 개인적 야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종교라는 시스템 자체가 가진 구조적 취약점이자, 진화적으로 다듬어진 약한 고리다. 종교는 본래부터 좌파적 이념이 기생하기에 최적화된 토양을 제공한다.


먼저 교리적 겹침이 결정적이다. 기독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산상수훈부터 시작해, 사회적 소외자·약자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적 연대를 강하게 강조한다. 많은 종교 전통에서 발견되는 ‘공정한 분배’, ‘형제애’, ‘약자 보호’라는 테마는, 세속화된 형태로 좌파의 사회정의 담론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여기서 핵심은 니체가 예리하게 지적한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감정)와 노예도덕이다. 


기독교는 강자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약자의 도덕적 우위를 체계적으로 정당화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식의 서사는, 약자의 열등감을 도덕적 우월감으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심리 기제다.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은 이 점을 극단적으로 활용한 사례다. 남미의 가톨릭 사제들은 기독교 교리를 마르크스주의와 결합시켜, 예수를 최초의 혁명가로 재해석하고, 계급투쟁을 ‘하나님의 편’으로 프레임화했다. 신의 정의를 빌려 강자에 대한 원한을 조직화하고, 그것을 ‘구원’의 이름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두 번째 취약점은 종교의 집단적·조직적 특성이다. 종교는 개인의 신앙을 넘어 공동체를 전제하며, 강한 충성심과 동일시를 요구한다. 이미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결속된 집단을 장악하면, 그 구성원들을 이념적으로 일사불란하게 동원할 수 있다. 좌파에게 종교 공동체는 ‘이미 준비된 군대’나 다름없다. 교회·사찰·모스크의 조직망은 좌파 운동이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를 통해 구축해야 할 인프라를 처음부터 제공한다. 충성의 대상만 ‘하나님’에서 ‘역사’나 ‘인민’, ‘정의’로 교체하면 된다.


역사적·문화적 맥락도 이 기생을 촉진한다.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지배, 자본주의적 수탈의 역사를 겪은 사회에서 종교는 종종 ‘저항의 언어’로 재해석된다. 강자(서구·자본·지배층)에 대한 원한이 종교 교리의 약자 보호 정신과 결합하면,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나 민족주의적 좌파와의 융합이 쉽게 일어난다. 국민성 자체가 집단주의적·공동체 지향적일수록,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보다 ‘연대’와 ‘분배’를 강조하는 좌파적 해석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여기에 국가 권력의 전략적 개입까지 더해진다. 좌익 정권은 종교의 대중적 영향력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이용하려 한다. 소련이 러시아정교회를 완전히 탄압하지 않고 ‘국가와 조화로운’ 형태로 관리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신앙 활동 자체는 묵인하되, 교리를 ‘평등’과 ‘반제국주의’ 방향으로 은근히 유도한다. 결과적으로 종교는 좌익 정권의 폭력과 정책을 ‘신의 뜻’이라는 도덕적 포장으로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 “가난한 자를 위한 혁명”이라는 프레임은 권력의 세속적 야심을 성스러운 것으로 탈바꿈시킨다.


결국 종교에 좌파가 기생하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에 가깝다. 종교가 가진 약자 중심의 도덕 서사, 강한 집단 결속력, 초월적 정당성 부여 능력은 좌파 이념이 가장 탐내는 자원들이다. 좌파는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그 구조를 교묘하게 차용하고 변형한다. 


종교가 스스로를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 한, 이 기생 관계는 계속될 것이다. 신의 이름을 빌린 정치적 야심은, 결국 종교를 가장 강력하게 타락시키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7. 기성 종교계의 무능: 돈과 영향력의 문제


종교 내부에 좌파가 침투해 교리를 왜곡하고 정치 운동으로 전환한다면, 가장 먼저 대응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당연히 기성 종교계 그 자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기성 종교계는 이 문제를 단호하게 처리하기는커녕, 오히려 방관하고 회피하며 때로는 은근히 포용하기까지 한다. 


답은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이다. 돈과 영향력 때문이다.


많은 종교에서 좌파 성향의 신도들은 열성적 헌금자이자 활동가다. 그들은 시간과 노동, 그리고 상당한 재정을 아낌없이 바친다. 교회·사찰·모임의 운영비, 선교 활동, 사회사업 자금 중 상당 부분이 이들로부터 나온다. 성직자와 교단 지도자들이 이런 ‘충성스러운 고객’을 섣불리 적대시하기란 쉽지 않다. 교리를 명백히 왜곡하는 강경 좌파 운동을 벌이는 집단이 있어도, 교단은 쉽게 제명이나 이단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겨우 이단으로 규정하더라도 “저들은 진정한 신자가 아니다”라는 식의 꼬리 자르기로 끝낸다. 표면적으로는 거리를 두는 듯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이 초래하는 신학적·사회적 오염을 방치한다. 교단 입장에서는 ‘극단 세력’을 잘라내는 순간, 신도 수와 헌금, 사회적 영향력이 줄어들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나약함이 아니라, 기성 종교계의 본질적 우선순위가 드러난 결과다. 그들은 교리의 순수성보다 조직의 생존과 규모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영향력 있는 인사, 대형 교회, 국제적 네트워크, 미디어 노출, 사회적 발언권 등 이것들이 바로 현대 종교 지도자들이 진심으로 지키려는 것들이다. 교리가 훼손되어도 조직이 유지된다면, 그들은 ‘전략적 침묵’을 선택한다. 


결과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은 기묘하기 짝이 없다. 종교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를 종교적 우파가 아닌, 세속적 우파가 대신 막아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기독교 근본주의를 비판하던 세속 보수주의자들이, 정작 교회를 ‘좌경화’로부터 지키는 최전선에 서게 되는 아이러니. 종교계는 자기 집 안의 먼지를 치우지 않고, 문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 안에 좀 치워주세요”라고 외치는 셈이다.


이 무능은 치명적이다. 종교가 스스로를 정화하지 못하면, 외부의 비판과 공격은 더욱 정당성을 얻는다. “종교가 좌파에게 장악당했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기성 종교계가 그 장악을 막을 의지와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과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교리를 팔아넘기는 순간, 종교는 이미 그 본질을 잃어버린다. 성스러운 기관이 아니라, 생존을 우선시하는 평범한 이익 집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락을 가장 비참하게 목도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종교를 진심으로 믿는 신도들이다.


8. 우파 종교인도 예외가 아니다


좌파 종교인이 문제라고 해서, 우파 종교인이 자동적으로 대안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양쪽은 같은 종교적 구조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 대칭적인 왜곡일 뿐이다.


앞선 분석에서 이미 보았듯이, 기독교 우파(특히 미국 중심의 복음주의, 네오콘, 팔레오콘 진영)도 기독교의 내재적 요소를 정치적으로 극대화한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 속 ‘권위’, ‘위계’, ‘선민의식’,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을 끌어와 전쟁을 정당화하고, 정치에 적극 개입하며, 자신의 도덕 규범을 사회 전체에 강제하려 한다.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이 먼 과거의 유물이라면, 현대판으로는 복음주의가 뒷받침한 중동 개입 전쟁들, 반동성애·반낙태 운동을 통한 문화 강제,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국을 선택했다”는 식의 국가적 메시아니즘을 들 수 있다. 좌파가 기독교의 평등주의와 약자 보호 정신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사회주의·해방신학으로 나아간다면, 우파는 기독교의 권위주의적·전투적 요소를 극대화해 정복과 문화적 지배로 나아간다. 


결국 둘 다 같은 성경에서 각자 편리한 구절을 골라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신성시하는 행위다. 좌파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우파는 구약의 정복 서사와 계시록의 심판 이미지를 강조한다. 본질적으로 같은 메커니즘, 다른 방향성일 뿐이다.


특히 우파 종교인들이 자주 내뱉는 말(“무신론자는 진정한 우파가 될 수 없다”, “보수주의는 기독교 없이는 불가능하다”)은 심각한 오만이다. 이는 종교적 정체성과 정치적 우파를 독점하려는 시도이며, 역사적·철학적으로도 충분히 반박 가능한 주장이다. 


전통, 질서, 공동체, 계층, 책임, 미덕을 중시하되, 초자연적 권위나 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우익 사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로마 공화정의 미덕, 동아시아의 유교(공자 및 맹자 시절 구(舊) 유교)적 보수주의, 그리고 근대 유럽의 세속 보수 사상가들의 철학, 즉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급진적 귀족주의, 오스발트 슈팽글러(Oswald Spengler)의 세속적 문명 비관주의,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회의적 전통주의,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와 가에타노 모스카(Gaetano Mosca)의 엘리트 이론, 베르트랑 드 주브넬(Bertrand de Jouvenel)이 《권력에 대하여(On Power: The Natural History of Its Growth)》에서 세속적 관점에서 근대 국가의 권력 팽창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자유와 전통, 질서 수호에 대한 주장, 에릭 호퍼(Eric Hoffer)의 대중운동 비판, 아인 랜드(Ayn Rand)의 객관주의, 한스 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와 머레이 로스바드(Murray Rothbard)의 아나코-자본주의, 리콴유(Lee Kuan Yew)의 실용적 권위주의 등이 그 증거다. 기독교적 프레임 없이도 인간 사회의 불평등, 전통의 가치, 도덕적 규율을 논증할 수 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앞서 야빈의 계보학이 보여주듯 기독교적 우파 보수주의 자체가 진보주의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둘 다 청교도칼뱅주의적 DNA를 공유한다. 한쪽은 평등과 진보를, 다른 한쪽은 위계와 전통을 강조할 뿐, 근본적인 구조(구원 서사, 도덕적 절대주의, 정치에 대한 메시아적 개입 욕망)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파 종교인들의 “종교 독점”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잃는다. 그들은 자신이 비판하는 좌파 진보주의와 사실상 같은 종교적정치적 유전자를 공유하면서, 단지 다른 알레르기를 발현하고 있을 뿐이다.


진정한 대안은 좌파 종교인도, 우파 종교인도 아닌, 종교를 정치적 도구로 삼지 않고 그 본연의 영역으로 되돌리는 태도다. 아니면 아예 종교적 프레임 자체를 넘어서는, 더 냉철하고 성숙한 보수주의를 세우는 것이다. 


종교를 등에 업은 우파가 좌파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더 솔직한 지적 지형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9. 정치가 종교에 기생하고 종교가 정치에 기생하는 구조


결국 종교와 정치는 단순히 한쪽이 다른 쪽을 이용하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다. 둘은 서로에게 기생하는 공생 관계이며, 때로는 서로를 숙주로 삼아 더 강력한 괴물로 진화한다.


종교는 정치적 권력을 필요로 한다. 순수한 설득과 신앙만으로는 교리를 사회 전체에 관철하기 어렵다. 법적 강제력, 교육 시스템, 문화 규범의 통제가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나 ‘이상적 공동체’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종교는 세속 권력과 결탁하거나, 스스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했다. 


반대로 정치는 종교적 정당성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순수한 권력 논리, 즉 “힘이 정의다”라는 냉혹한 진실만으로는 대중의 자발적 복종과 희생을 끌어내기 힘들다. 사람들은 ‘이것이 옳다’는 도덕적·초월적 보증을 요구한다. 왕권신수설, 천명사상, 하나님의 선택, 역사적 필연성 — 정치 권력은 언제나 이러한 종교적(또는 준종교적) 서사를 빌려 자신의 지배를 성스러운 것으로 포장한다.


이 상호 기생 구조는 이념과 결합할 때 더욱 강력해진다. 


- 좌파와 결합하면 해방신학이 된다. 신을 ‘약자의 편’으로 규정하고, 혁명을 구원의 행위로 재해석한다. 

- 우파와 결합하면 기독교 민족주의나 기독교 제국주의가 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민족이 다른 민족을 ‘개화’시키거나 정복하는 서사가 만들어진다. 

- 이슬람과 결합하면 칼리프 국가나 이슬람주의 정치가 되고, 

- 신토와 결합하면 천황 중심의 국가신토가 된다. 


형태는 문화마다 다르지만, 정치가 종교를 동원하고 종교가 정치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


가장 아이러니한 지점은 정교분리(政敎分離)의 문제다. 근대에 들어 정교분리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해 온 것은 세속적 리버럴리즘이다. 그런데 이 리버럴리즘 자체가 앞서 야빈이 지적한 대로, 기독교(특히 청교도유니테리언 전통)의 세속화된 버전이라는 데에 역설이 있다. 


종교를 정치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조차 종교적 충동의 산물인 것이다. 리버럴리즘은 기독교의 평등, 보편주의, 구원 서사를 유지한 채 신만 제거했다. 따라서 정교분리를 외치는 목소리 속에는, 여전히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는 준종교적 메시아니즘이 숨어 있다. 


이 공생 관계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종교는 정치 없이 무력하고, 정치는 종교 없이 정당성을 잃는다. 좌파가 종교를 이용하든, 우파가 종교를 이용하든, 본질은 같다. 둘 다 권력과 의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 만들어낸, 서로를 먹고 살리는 기생 구조일 뿐이다.


진정한 독립은 이 공생 관계 자체를 해체하는 데서 시작된다. 종교가 정치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정치가 종교적 정당성에 기대기를 포기할 때, 비로소 자유로운 영역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은 아직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종교와 정치는 여전히, 서로의 목을 끌어안은 채 춤을 추고 있다.


10. 고대 회의주의로의 복귀: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데모크리토스


이 에세이 전체를 통해 우리는 종교를 하나의 생물학적·진화적·사회적 시스템으로 추적해왔다. 그 구조적 문제들(두려움의 이용, 집단 통제, 권력과의 공생,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에 의한 왜곡)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또 다른 집단적 이념, 또 다른 ‘구원 서사’를 제시하는 것은 결국 새로운 종교의 씨앗을 뿌리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탈출구는 이념의 교체가 아니라, 이념화 자체에 대한 근본적 거리두기다.


이 지점에서 유용하게 돌아볼 수 있는 지적 계보가 있다. 아브라함계 종교가 지배하기 이전, 사회주의와 리버럴리즘, 그리고 그 모든 세속 종교가 탄생하기 이전의 고대 지중해 사유 전통, 특히 회의주의적·원자론적 철학자들이다.


기원전 5세기 아브데라 출신의 데모크리토스는 서구 철학사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사상가 중 하나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원자(atomos, 쪼갤 수 없는 것)’와 ‘공허(void)’로 설명했다. 우주는 목적도, 신의 설계도 없이, 무작위적이고 영원한 원자들의 운동과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원자론은 단순한 물리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목적론과 신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었다. 자연현상(번개, 지진, 질병)을 신의 분노나 섭리로 해석하는 모든 미신을 철저히 해체했다.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웃음이었다. 그는 ‘웃는 철학자’로 불렸는데, 인간의 어리석음, 권력자의 위선, 종교적 광신, 죽음에 대한 과도한 공포를 냉소적으로 비웃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엄숙하게 탄식하지 않고, 오히려 웃음으로 초월하는 태도. 이는 종교적 엄숙주의와 이념적 광신주의를 해체하는 가장 효과적인 지적 무기 중 하나다.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계승·발전시켰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신의 무관심: 신들은 존재하지만, 완전한 행복 속에 살기 때문에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기도, 희생, 종교적 의식은 신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신을 두려워하거나, 신의 벌을 걱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공포다.

- 죽음에 대한 태도: “우리가 있을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없다.” 죽음은 감각의 완전한 소멸일 뿐, 고통도 보상도 없다. 사후 심판의 공포는 종교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환상이다.

- 쾌락주의: 삶의 최고 목적은 쾌락(hedone)이다. 그러나 이는 방종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와 마음의 평정(ataraxia)이다. 단순한 삶, 우정, 지적 탐구, 자연스러운 욕구의 절제가 진정한 쾌락을 가져온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지만, 그것은 세속적이고 평등한 우정 공동체였다. 그들은 노예와 여성을 포함한 열린 모임을 운영했으며, 어떤 교조적 교리도 강요하지 않았다. 종교적 권위와 초월적 도덕을 철저히 거부한, 고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자유로운 철학 공동체였다.


로마 시대의 루크레티우스(기원전 99–55)는 에피쿠로스 철학을 위대한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De Rerum Natura)로 승화시켰다. 이 작품은 고대 철학 텍스트 중 가장 아름답고 급진적인 작품 중 하나다.


그는 원자들의 무작위적 운동(swerve, clinamen)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했다. 신의 섭리는 없으며, 종교는 공포에서 비롯된 환상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특히 유명한 구절에서 그는 종교를 이렇게 비판한다. “종교는 그토록 많은 악을 저지를 수 있었다.(Tantum religio potuit suadere malorum)”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미신과 공포, 권력자의 조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그의 시는 과학적·철학적 통찰과 문학적 아름다움이 결합된, 고대 회의주의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이 고대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 절대적 진리나 초월적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 집단적 구원 서사나 구원자를 만들지 않았다.

- 이단을 규정하고 처벌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지 않았다.

- 자신의 사상을 타인에게 강제하려 하지 않았다.

- 인간의 삶을 ‘이 땅에서’ 의미 있게 만들려 했다.


그들은 철학을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자유와 평정, 그리고 지적 성숙을 위한 개인적 수단으로 삼았다.


물론 우리는 고대 세계로 완전히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 — 자연에 대한 냉정한 관찰, 공포와 미신으로부터의 해방, 절대주의에 대한 근본적 회의, 그리고 삶의 부조리를 웃음으로 대하는 여유 — 는 오늘날 종교와 정치 이념의 끝없는 공생 관계에 지친 우리에게 강력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한다.


종교도, 그 세속화된 버전인 현대 정치 이념도 아닌, 더 오래되고 더 차가운 사유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오랜 종교정치 공생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솔직하고, 가장 자유로운 출발점일 수 있다.



11. 결론: 종교도, 그 사생아도 아닌


이 에세이 7편에 걸쳐 추적해온 것을 최종 정리한다.


종교는 진화적 적응 기제로 탄생했다. 그것이 조직화되고 권력과 결합했을 때 전쟁, 학살, 억압, 이단 처벌, 삶의 주체성 박탈이라는 구조적 패턴을 반복했다. 이것은 아브라함계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라는 시스템 전반의 문제다.


그리고 그 종교를 비판하는 이념들(진보주의, 영미권 리버럴리즘, 사회주의)도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신을 제거한 청교도주의로서. 이들은 종교의 대안이 아니라 종교의 세속화 버전이다.


우파 종교인도 예외가 아니다. 좌파 종교인과 같은 텍스트에서 다른 구절을 뽑아 사용할 뿐이다.


종교와 그 사생아들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인 절대적 진리의 주장, 초월적 권위에 의한 정당화, 이단 처벌, 삶의 주체성 박탈. 이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 이 에세이 전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리고 그 구조 밖에서 어떤 집단적 답도 없이, 각자의 판단으로, 지금 이 삶을 사는 것. 2천 년 전 에피쿠로스가 말한 것처럼 신도 없고, 구원도 없고, 심판도 없이 그냥 살다 죽는 것. 이것이 종교가 인류에게서 오랫동안 빼앗아온 가장 단순한 자유다.


8편은 잠시 쉬었다 가는 시간일 것이다. 1편부터 7편까지 무엇을 해부했는지, 그리고 이제 어디로 향하는지를 짚는다. 칼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겨누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 각주 -


[1] Ranter(랜터): 17세기 영국 내전기 극단적 반종교주의 집단. 모든 외적 종교 의식과 도덕 규범을 부정하고, 내적 영감과 육체적 쾌락을 중시했다. 사회적 관습과 권위를 철저히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2] Leveller(레벨러): 영국 내전 당시 크롬웰군 내 급진파. 정치적 평등(보통선거권 확대), 종교적 관용, 법 앞의 평등을 주장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급진적 자연권 사상을 설파했다.

[3] Digger(디거): 제라드 윈스탠리(Gerrard Winstanley)가 이끈 농민 급진파. “진정한 평등”을 주장하며 공유 토지(commons)를 공동 경작하려 했다. 초기 공산주의적 실천으로 평가되며, 사유재산 제도를 신학적으로 비판했다.

[4] Quaker(퀘이커): 조지 폭스(George Fox)가 창시한 ‘친구회’. 내적 빛(Inner Light)을 강조하며, 모든 외적 의식·성직자·전쟁을 거부했다. 평화주의, 평등주의, 사회개혁 운동의 선구적 집단으로 이후 큰 영향을 미쳤다.

[5] Fifth Monarchist(제5왕국주의자): 성경 다니엘서의 예언에 근거해 “그리스도의 제5왕국”이 임박했다고 믿은 밀레니얼리스트 급진파. 크롬웰 정권조차 불충분하다고 보고, 성도들의 직접 통치를 추구했다. 극단적 혁명적 신정주의를 대표한다.


- 참고문헌 -


커티스 야빈(Mencius Moldbug), 『How Dawkins Got Pwned』 — 현대 무신론적 진보주의가 17세기 영국 청교도 비국교도 전통의 세속화된 후손이라는 계보학적 분석. 리버럴리즘의 종교적 기원을 급진적으로 추적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 기독교적 도덕이 어떻게 르상티망(원한감정)과 노예도덕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해부. 그 도덕 구조가 세속화된 이념들 안에서도 반복된다는 분석의 토대를 제공한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 — 우주가 신의 섭리 없이 원자의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죽음은 감각의 소멸일 뿐이라는 논지. 종교적 공포와 사후세계 개념을 해체하는 고대 유물론 철학의 정수.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Epistula ad Menoeceum)』 — 신들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으며,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없고, 쾌락(고통의 부재와 마음의 평정)이 삶의 목적이라는 논지. 초월적 권위 없이 삶을 구성하는 가장 오래된 철학적 시도 중 하나.


Pascal Boyer, 《Religion Explained》 (2001) - 종교를 진화심리학·인지과학적으로 분석한 고전. 종교적 믿음이 인간의 인지 장치(역설 탐지기, 과잉 귀인 등)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는 설명. 종교를 ‘초월적 진리’가 아닌 ‘인지적 부산물’로 보는 관점 제공.


Scott Atran, 《In Gods We Trust》 (2002) - 종교를 진화적 적응 기제이자 집단 결속 도구로 분석. 종교적 신념이 왜 강력한 사회적·정치적 동원력을 가지는지, 그리고 왜 폭력과 결합하기 쉬운지를 심층적으로 다룸.


David Hume,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1779) - 종교적 설계론·기적·섭리를 철저히 비판한 고전.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 전통을 근대적으로 계승한 회의주의의 정수.


Eric Voegelin, 《Political Religions》 (1938) 또는 《The New Science of Politics》 - 현대 정치 이념(특히 진보주의·공산주의)을 ‘세속 종교(political religion)’로 규정한 정치철학. Moldbug의 ‘Universalism’ 분석과 잘 연결됨.


Reinhold Niebuh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932) - 기독교 현실주의 입장에서 좌파·우파 양쪽의 도덕적 오만을 비판. 종교적 이상이 정치에서 어떻게 타락하고 왜곡되는지를 날카롭게 분석.


Robert Jay Lifton, 《Thought Reform and the Psychology of Totalism》 (1961) - 종교적·이념적 광신주의의 심리 메커니즘(사상개조, 이단 심판, 순수성 추구)을 임상적으로 분석. 현대 woke 문화나 극단 종교 운동 이해에 유용.


William James,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1902) - 종교적 경험을 신경학적·심리학적으로 분석한 고전. 개인적 종교 경험과 제도화된 종교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


Pyrrho of Elis (피론주의) 관련 저작 또는 Sextus Empiricus, 《피론주의 개요(Outlines of Pyrrhonism)》 - 절대적 진리를 유보하고 판단중지를 주장한 고대 회의주의.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와 함께 ‘이념화 거부’의 철학적 전통을 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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