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13편

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13편


종교라는 유전병의 기원: 진화, 유물론, 그리고 전통의 재해석


1. 침팬지의 비 춤: 유사종교의 씨앗


2006년 제인 구달 연구소가 공개한 영상이 있다. 탄자니아 곰베 국립공원의 수컷 침팬지들이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 나뭇가지를 격렬하게 흔들고, 리드미컬하게 발을 구르며, 집단적 흥분 상태에 빠져드는 장면이다. 구달은 이것을 “비 춤(Rain Dance)”이라고 명명했다. 이 행동에는 명확한 기능적 목적이 없다. 먹이를 구하는 것도, 포식자를 쫓아내는 것도, 영역을 방어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거대한 자연 현상 앞에서, 아무런 실용적 보상이 없는 집단적 의례적 행동을 수행할 뿐이다.


이것이 종교인가. 아니다. 그러나 종교의 가장 원시적인 씨앗처럼 보인다. 예측 불가능하고 압도적인 자연의 힘을 마주했을 때,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적·집단적 행동을 통해 긴장과 흥분을 해소하고, 집단의 일체감을 확인하는 패턴. 수백만 년에 걸쳐 인간이 발전시킬 종교적 의례의 원형이 여기서 이미 희미하게 드러난다.


비슷한 씨앗들은 다른 지능 동물들에게도 존재한다. 코끼리는 죽은 동료의 뼈를 수년 동안 반복적으로 찾아가 오랫동안 만지고, 코를 감고,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자기 무리가 아닌 낯선 코끼리의 유골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애도’나 ‘기억’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까마귀와 까치 같은 지능형 조류는 죽은 동료 주변에 모여들어 특정한 소리를 내고, 행동 패턴을 반복한다. 연구자들이 “까마귀 장례식”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와 죽음에 대한 어떤 집단적 반응으로 보인다.


오랑우탄은 도구를 제작·사용하고, 개체마다 뚜렷한 성격과 문제 해결 스타일을 보이며, 때로는 거울을 인지하는 수준의 자기 인식을 드러낸다. 문어는 척추동물과 완전히 독립적인 진화 경로를 거쳐 놀라운 지능을 발달시켰다. 피부로 색과 질감을 순간적으로 바꾸는 위장 능력, 단기 기억을 넘어 장기 학습과 계획적 행동을 보이는 능력, 심지어 탈출과 문제 해결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사례까지 관찰된다.


씨앗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죽음에 대한 반응, 집단적 리추얼, 추상적 패턴 인식, 높은 지능 — 종교가 피어나기 위한 여러 요소들이 비인간 동물들 사이에도 흩어져 있다. 그런데 왜 이 씨앗들은 인간 외의 어떤 종에서도 본격적인 종교로 발화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캐물으려면, 단순히 “지능이 부족해서”라는 안이한 답으로는 부족하다. 문제는 지능의 양이 아니라, 특정 인지·사회·전달 구조의 동시 충족에 있다. 침팬지의 비 춤은 그 자리에서 끝난다. 다음 세대에게 “우리 조상이 폭풍 앞에서 이렇게 했고, 그것은 이런 의미였다”고 서사로 전달되지 않는다. 코끼리의 애도 행동은 강력하지만, 그것을 체계적인 조상 숭배나 내세관으로 발전시킬 언어적·문화적 메커니즘이 없다. 문어의 놀라운 지능은 개인적·단기적 문제 해결에 특화되어 있을 뿐, 세대를 넘어 축적되는 집단적 신념 체계를 만들어내기에는 사회 구조 자체가 너무 고독하다.


이 씨앗들이 인간에게서만 종교라는 강력한 바이러스로 증식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에 가까운 인지적·사회적 조건의 결과였다. 다음에서 그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종교가 생길 유인: 네 가지 조건의 동시 충족


종교가 종교로서 폭발적으로 증식하려면, 단순히 한두 가지 요소가 아니라 네 가지 조건이 동시에, 그리고 충분한 수준으로 갖춰져야 한다. 이 조건들이 인간에게서만 완벽하게 정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적 선택압이 만들어낸, 치밀하고도 불가피한 결과물이었다.


첫째, 언어다. 구체적 경험을 추상적 서사로 전환하고, 그 서사를 공유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개념화할 수 있는 강력한 언어가 필요하다. 침팬지의 비 춤은 그 자리에서 끝난다. 아무리 강렬한 집단적 환희를 느꼈다 해도, “우리 조상이 폭풍 앞에서 이런 의례를 행했고, 그로써 신의 노여움을 달랬으며, 다음 폭풍에도 이 의례를 반복해야 한다”는 서사로 전달되지 못한다. 언어가 없으면 의례는 일회성 사건으로 소멸한다. 반면 인간은 언어를 통해 죽은 자의 이야기를 살아 있는 자들에게 영원히 되살리고,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와의 ‘계약’을 세대 전체가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라, 종교라는 바이러스의 가장 강력한 복제·전파 메커니즘이다.


둘째, 마음 이론(Theory of Mind)의 깊이다. 타자의 마음을 읽는 능력, 죽은 타자의 마음을 상상하는 능력, 그리고 결국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 존재의 마음까지 추론하는 능력. 침팬지도 기초적인 마음 이론을 가지고 있다. 동료가 숨기고 있는 먹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죽은 동료의 ‘영혼’을 상상하거나, 보이지 않는 신이 ‘분노하고 있다’고 추론하는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 이론은 다층적이다. 1단계(타자가 나를 보고 있다), 2단계(타자가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4~5단계까지 올라가며 “신이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또 내가 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안다”는 식의 고차원적 귀인을 가능하게 한다. 이 능력이 없었다면 종교는 결코 탄생할 수 없었다.


셋째, 집단 규모다. 로빈 던바(Robin Dunbar)가 밝힌 바와 같이, 영장류가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의 한계는 뇌 크기, 특히 신피질 크기와 강하게 비례한다. 침팬지는 대략 50마리 정도, 인간은 약 150명(던바 숫자) 수준이다. 그런데 종교는 이 한계를 극복하는 강력한 스케일업 도구였다. 하나의 추상적 믿음, 하나의 신화, 하나의 의례 체계는 수천, 수만, 심지어 수백만 명을 ‘상상된 공동체’로 묶을 수 있게 만들었다. 혈연도, 직접적 호혜성도 필요 없는 낯선 타인들 사이에 ‘우리는 같은 신을 믿는다’는 믿음 하나로 충성심과 협력을 유발하는 것이다. 다른 동물은 그런 규모의 집단을 유지할 뇌 용량 자체가 없었고, 따라서 종교가 발달할 사회적 토대조차 갖추지 못했다.


넷째, 세대 간 전달 체계다. 의례와 서사, 금기와 신화가 정확하게 다음 세대로 복제·전수되어야 축적되고 제도화될 수 있다. 독거 생활을 하는 동물에게는 이 조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이라 해도 언어와 안정적인 문화 전달 메커니즘이 없다면, 고작 1~2세대 만에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언어, 의례, 신화, 금기, 성스러운 물건, 예술, 건축 등 다층적인 전달 시스템을 통해 종교를 ‘영속하는 바이러스’로 만들었다.


이 네 가지 조건이 동시에 갖춰진 것은 지구 역사상 인간뿐이었다. 그리고 그 조건들이 갖춰지는 과정 자체가 — 어떤 설계자의 의도가 아니라 — 순수한 진화적 선택압의 산물이었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파스칼 보이어(Pascal Boyer)가 체계적으로 분석한 인지적 종교 이론이다. 보이어는 단순히 과잉능동적 행위자 탐지(Hyperactive Agency Detection, HADD)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HADD — 바람 소리에서 포식자의 의도를 읽거나, 우연한 재난에서 ‘의도된 벌’을 읽는 인지적 오류 — 는 분명 중요한 씨앗이다. 틀려도 비용이 적지만, 맞으면 생존에 결정적이기 때문에 자연선택이 강하게 밀어준 능력이다.


그러나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최소한으로 반직관적인 개념(minimally counterintuitive concepts)과 전략적 정보(strategic information)가 결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죽은 조상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은 직관(죽은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과 반직관(그래도 지켜본다)을 적절히 섞어 기억에 잘 남고 전파되기 쉽다. 또한 신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속 비밀까지 꿰뚫는다”는 식의 전략적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도덕적 감시자로 기능하게 된다. 이러한 인지적 장치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종교적 사고는 인간의 뇌 하드웨어에 최적화된 ‘감염력 높은 아이디어’가 되었다.


결국 종교적 사고의 씨앗은 생존에 유리한 인지적 오류와, 그것을 증폭·전파하는 문화적 메커니즘의 만남에서 태어났다. 이 만남이 가능했던 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적 루비콘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였다.


3. 벌과 개미, 그리고 인간의 어정쩡한 위치


벌집을 보면 종교가 왜 생겼는지가 역설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수만 마리의 벌이 하나의 거대한 초유기체(superorganism)처럼 움직인다. 노동벌은 먹이를 채집하고, 유충을 돌보고, 집을 청소하며, 병정벌은 침입자를 공격하고, 여왕벌은 오로지 알을 낳는다. 이 체계에는 설득도, 협상도, 명분도, 교리도, 이단 심문도 필요 없다. 그저 DNA의 명령대로 각 개체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실수나 배신의 여지가 거의 없다. 


윌리엄 해밀턴(William D. Hamilton)의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 이론이 이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일벌은 자신의 번식을 거의 완전히 포기하고 여왕벌(자매)을 위해 일한다. 유전자 관점에서 보면 이는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일벌과 여왕벌은 높은 확률로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에, 여왕벌의 번식을 돕는 것이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간접적으로 퍼뜨리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다. DNA가 공동체 행동을 거의 완벽하게 하드코딩(hard-coding)한 것이다. 개미 사회, 흰개미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들 진사회성(eusocial) 곤충들은 혈연 선택(kin selection)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개인의 이기심을 집단의 초월적 조화로 승화시켰다.


인간은 이 구조를 갖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150명 정도의 소규모 무리까지는 혈연 관계와 직접적 호혜성(reciprocal altruism)으로 충분히 강력한 결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업혁명 이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도시와 문명이 등장하면서 수천, 수만, 수십만 명 규모의 협력이 필요해졌다. 낯선 타인, 심지어 적대적일 수도 있는 타인들과 대규모로 협력해야 하는 상황에서 DNA의 명령만으로는 명백히 부족했다. 유전자 공유율이 낮은 타인에게 “너를 위해 내 자원을 희생하라”고 설득할 메커니즘이 필요했다.


그 간극을 메운 것이 바로 종교였다.


종교는 DNA가 미처 하드코딩하지 못한 영역을 문화적 소프트웨어로 채워넣는 강력한 메커니즘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종교를 단순한 ‘임시방편 보철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문화적 집단 선택(cultural group selection)과 다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의 관점에서 매우 성공적인 적응(adaptation)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유전적 진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초사회성(ultra-sociality), 즉 혈연을 넘어선 대규모 비혈연 협력을 진화시켰다. 동일한 환경에서 여러 집단이 경쟁할 때, 내부 결속력이 강하고 협력 수준이 높은 집단(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을 압도하는 사례가 반복되었다. 공동의 신, 공동의 신화, 공동의 금기, 공동의 의례는 집단 내 신뢰를 비약적으로 높이고, 이탈 비용을 극대화하며, 집단 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제공했다. 벌과 개미가 유전자로 해결한 문제를 인간은 문화적 바이러스, 즉 종교로 해결한 것이다.


결국 인간은 진화적 스펙트럼에서 매우 어정쩡한 위치에 놓였다. 벌이나 개미처럼 DNA로 공동체 행동이 완벽하게 하드코딩되지도 않았고, 문어처럼 극도로 낮은 사회성을 가진 채 거의 독립적으로 사는 종도 아니었다. 우리는 충분히 사회적이면서도, 동시에 충분히 개체적이었다. 그 중간 지대(mezzo-sociality)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종교라는 인공적이고도 강력한 문화적 장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장치는 원래의 목적 — 대규모 협력의 스케일업 — 을 넘어, 때로는 원래 메우려던 틈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1~7편에서 추적한 피와 학살과 억압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종교는 분명히 적응이었으나, 동시에 강력한 부작용을 동반한 적응이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비극이자, 우리 시대까지 이어지는 근본적 긴장이다.


4. 만약 다른 동물이 종교를 발전시킨다면


이것은 순수한 사고실험이다. 그러나 결코 헛된 공상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종교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드러내는 거울이다.


가정해보자. 침팬지가 언어를 발전시키고, 마음 이론의 깊이가 인간 수준에 도달하며, 집단 규모가 수백에서 수천으로 확대되고, 세대 간 문화 전달 체계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러면 그들의 “비 춤(Rain Dance)”은 단순한 집단적 흥분 상태를 넘어, 체계적인 신학으로 발전할 것이다. 폭풍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늘의 분노’ 또는 ‘신의 시험’으로 재해석될 것이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행위는 ‘신에게 바치는 의례’로 승화될 것이다.


코끼리의 경우, 죽은 동료의 유골을 반복적으로 방문하고 애도하는 행동은 자연스럽게 내세관과 조상 숭배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죽은 자의 영혼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그들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 생겨날 것이다. 까마귀의 ‘장례식’ 행동 역시, 죽음에 대한 집단적 반응에서 출발해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의식’,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신화로 발전할 것이다.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이미 인간 역사가 잔인할 정도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기 무리의 의례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순간, 다른 무리의 의례는 자동적으로 ‘이단’ 또는 ‘불경한 것’이 된다. 자기 신을 ‘절대적 진리’이자 ‘유일한 신’으로 선언하는 순간, 다른 신을 섬기는 무리는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신의 적’,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다. 


단순한 영역 다툼이나 먹이 경쟁, 짝짓기 경쟁은 직접적으로 마주쳐야만 전쟁으로 번진다. 따라서 규모와 지속성이 제한적이다. 그러나 종교적 명분이 개입하는 순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 없는, 심지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무리조차 ‘우리 신의 적’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대규모 동원이 가능해지고, 전사의 희생을 ‘신성한 순교’로 미화할 수 있으며, 전쟁을 중단해야 할 합리적 이유를 찾기 어려워진다. 적을 완전히 섬멸하거나 개종시켜야만 ‘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동물 무리 간의 전쟁 원인이 하나 증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하나의 원인이 전쟁의 규모와 잔인성, 지속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킨다. 종교적 명분을 가진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신성한 의무’이자 ‘우주적 선악의 대결’이 되기 때문이다. 승리하면 신의 축복, 패배하면 신의 벌이라는 프레임이 전쟁을 영속화한다.


여기서 페르미 역설(Fermi Paradox)이 떠오른다. 우주가 이토록 넓은데, 왜 우리는 외계 문명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는가. 가능한 설명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충분히 지능이 발달하고, 대규모 사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된 문명은 거의 필연적으로 ‘종교적’ 또는 ‘이념적’ 초월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서사는 집단 간 갈등을 절대화하고, 결국 자기 파괴적 전쟁으로 이어진다. 우주적 스케일에서 보면, 고도로 발달한 문명은 스스로를 불태우는 경향이 강할지도 모른다. 인간 문명이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오히려 기적에 가까운 예외일 가능성도 있다.


극도로 사회성이 낮은 단독 생활 종(solitary species), 예를 들어 문어와 같은 종이 종교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지 모른다. 그들은 대규모 집단을 형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종교적 광기와 이념적 학살의 유혹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보호받고 있다. 반대로 인간은 바로 그 ‘사회성’과 ‘지능’ 때문에, 종교라는 강력하면서도 위험한 문화적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쉬운 존재가 되었다.


이 사고실험은 결국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종교는 인간이 진화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했던 대가였는가. 아니면 성공을 넘어,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인 부작용이었는가.


5. 진화의 매몰비용과 트레이드오프: 루비콘 강을 건넌 인류


우리는 이미 벌이나 개미처럼 DNA만으로 공동체가 완벽하게 작동하는 상태로는 절대 되돌아갈 수 없다. 이것이 가장 냉혹한 진실이다.


그 방향으로 다시 진화하려면 인간의 큰 뇌와 강렬한 개체성, 복잡한 감정과 추상적 사고 능력 자체를 대폭 포기해야 한다. 그런 진화적 경로는 이론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수백만 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지금의 인간’이라는 종은 사실상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여기에는 심각한 매몰비용(sunk cost) 문제가 존재한다. 인간의 큰 뇌, 특히 전전두엽 피질의 발달은 종교적 사고를 가능하게 만든 핵심 하드웨어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뇌는 예술, 과학, 철학, 기술, 장기 계획 능력, 복잡한 사회 제도의 토대이기도 했다. 종교라는 ‘부작용’을 제거하기 위해 뇌 크기를 줄이거나 과잉능동적 행위자 탐지 능력을 약화시키려 한다면, 인류가 이룩한 거의 모든 고차원적 성취도 함께 사라질 위험이 크다. 진화는 모듈식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패키지 딜이다. 원하는 기능만 골라서 제거하거나 다운그레이드할 수 없다. 우리는 종교라는 바이러스를 얻는 대가로 문명 전체를 손에 넣었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되돌릴 방법이 없다.


더욱 근본적인 트레이드오프도 존재한다. 과잉능동적 행위자 탐지(HADD) — 존재하지 않는 패턴에서도 의도와 주체성을 과잉으로 읽어내는 인지적 오류 — 는 종교적 사고의 핵심 기반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잘못된 패턴을 과잉으로 읽어내는 능력이 인간 창의성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다.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오류가 거의 없는 패턴 탐지기라면, 과학적 가설도, 예술적 비약도, 철학적 통찰도 나오기 어렵다. 약간의 오류와 미스파이어가 있어야 새로운 연결이 만들어지고, 기존 프레임을 뛰어넘는 생각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종교를 뿌리째 뽑으려는 시도는 동시에 인간의 창의성과 상상력 자체를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 있다.


진화는 극도로 느리다. 반면 문명과 기술, 사회 구조의 변화 속도는 기하급수적이다. 이 속도의 불일치가 인류의 근본적 조건이자, 현대 문명이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의 기원이다. DNA는 여전히 수만 년 전 사바나 환경에 최적화된 채로 남아 있는데, 우리는 불과 수천 년 만에 농업, 도시, 국가, 글로벌 자본주의, 디지털 문명을 만들어냈다. DNA가 따라잡지 못하는 속도로 환경이 변하면서 발생하는 진화적 부조화가 곳곳에서 폭발하고 있다. 종교 역시 이 부조화의 산물이자, 동시에 그 부조화를 더욱 증폭시키는 피드백 루프이기도 하다.


인류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


종교라는 문화적 보철물 없이 150명을 넘어서는 대규모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해본 역사적 경험이 거의 없다. 그 보철물을 갑자기 제거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에 대한 신뢰할 만한 실험 데이터도 충분하지 않다. 20세기 소련의 실험은 하나의 중요한 사례일 뿐이다. 그들은 전통 종교를 철저히 억압했지만, 결국 종교를 없앤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종교적 이념 — 절대적 진리, 이단 심판, 순교자 숭배, 미래 낙원 약속 — 으로 대체했을 뿐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우리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넌 상태에서, 종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냉정한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가. 제거한다면 그 대가는 무엇인가. 아니면 선택적으로 관리하고 업데이트하면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가. 진화론적 현실주의는 후자의 방향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러나 그 길 역시 결코 만만치 않다.


6. 종교라는 유전병적 저주


종교는 인간에게 유전병적 저주와 같다. 그것이 우연한 진화적 산물이든, 의도된 설계이든, 결론은 인간에게 잔인하다.


신이 없다면 — 상황은 이미 충분히 비참하다. 종교는 누구의 의도도 없이, 어떤 설계자도 없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감옥이다. 자연선택의 부작용으로 태어난 인지적 바이러스. 우리는 충분히 똑똑해져서 이 바이러스가 초래하는 전쟁, 학살, 억압, 반지성주의, 그리고 수많은 개인적 비극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우리 존재 조건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그것은 대규모 협력을 가능케 했던 문화적 적응이었고, 동시에 그 적응의 필연적 부작용이었다. HADD, 최소 반직관적 개념, 전략적 정보, 집단적 신성시 — 이 모든 인지적 장치가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기여해왔다. 이제 우리는 그 장치들이 만들어낸 감옥 안에 살고 있다. 뇌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완전히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종종 새로운 형태의 종교(이념, 컬트, 세속적 구원 서사)로 귀결된다. 불운한 진화적 트랩. 빠져나오려 할수록 더 깊이 빠지는 늪. 이것이 무신론적 유물론자가 직면한 가장 냉정한 현실이다.


신이 있다면 — 상황은 더욱 암울해진다.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존재가 인간의 인지 구조를 설계하면서, 의도적으로 “종교 없이는 대규모 사회를 유지할 수 없는” 취약점을 심어놓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종교가 수천 년 동안 수억 명의 피를 부르고, 끝없는 전쟁과 학살과 억압의 시스템으로 작동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이는 단순한 방임이 아니라 적극적인 구조적 저주에 가깝다. 4편에서 다룬 “인신공양으로서의 역사” — 수많은 세대가 신의 이름 아래 제물로 바쳐진 그 끔찍한 기록 — 이 우연이 아니라 설계의 일부였다면, 그 신은 인간에게 담보를 지운 채로 도망갈 수 없는 미로를 만든 장본인이다.


물론 이는 신학적 가정에 대한 철학적 반격일 뿐이다. 하지만 유물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만약 초월적 존재가 존재한다면 그는 적어도 방관자 이상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느 쪽을 가정하든, 인간에게 명확하게 유리한 시나리오는 없다. 종교는 우리를 살게 한 동시에 우리를 갉아먹는 기생충이다. 제거하려 하면 숙주도 함께 죽을 위험이 크고, 그대로 두면 서서히 피를 빨아먹는다.


그럼에도 에피쿠로스가 날카롭게 지적했듯, 신들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 저주 역시 집행자가 없는 저주다. 설계된 감옥이든, 우연히 만들어진 감옥이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구조를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완전한 탈출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적어도 맹목적으로 갇혀 있지는 않게 된다. 


가느다란 줄 하나. 그것이 이 에세이 시리즈가 끝까지 붙잡고자 했던 유일한 희망이다. 종교를 신성시하지도, 완전히 제거하려 들지도 않고, 냉정하게 진화론적 현실로 바라보는 태도. 그 인식 자체가, 우리가 가진 가장 날카로운 무기이자 가장 가느다란 탈출구다.


7. 필자의 유물론: 전통과 관습도 물질적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필자는 철저한 무신론자다. 그리고 철저한 유물론자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외치며 혁명을 설파하는 사람들, 혹은 “진보”라는 이름 아래 전통을 ‘낡은 관념’으로 단죄하는 현대 진보주의자들이 말하는 유물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결론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냉정하고도 보수적인 현실주의로 귀결된다.


인간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뇌의 수조 개 뉴런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신호의 복잡한 패턴일 뿐이다. 의식, 감정, 도덕적 판단, 심지어 신에 대한 경외심까지도 — 모두 물질적 과정의 산물이다. 환원주의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현재까지 우리가 가진 가장 견고한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다. fMRI, 뇌손상 연구, 신경과학의 축적된 증거들은 의식이 비물질적 영혼이나 초월적 실체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점점 더 설 자리를 잃게 만든다.


인간의 행동양식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DNA라는 물질적 코드가 수십만 년에 걸쳐 새겨온 프로그램의 결과물이다. 생존, 번식, 공포, 욕망, 집단에 대한 충성 — 이 모든 것이 유전자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물질적 전략들이다.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신’, ‘영혼’, ‘성스러운 계시’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것들은 결국 특정한 뇌 상태, 즉 특정한 전기신호 패턴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이 시리즈에서 ‘야훼라는 이름의 바이러스’라고 부른 종교적 믿음 체계는, 비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물질적 뇌에서 복제·전파·변이되는 문화적 유전자, 즉 밈(meme)의 한 형태다. 그것은 유전병처럼 세대를 거쳐 감염되고, 숙주를 조작하며, 때로는 숙주를 파괴하면서도 자신의 복제를 우선시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쌓아온 전통과 관습, 선입견, 도덕 규범, 사회적 금기들 역시 마찬가지로 물질적이다.


이것들이야말로 가장 방대하고도 구체적인 ‘물질적 데이터’다. 수억 명의 인간들이 생존하고 번식하고 경쟁하며 남긴, 뇌와 행동에 각인된 패턴들의 총합이다. 한 세대의 경험은 다음 세대로 언어, 의례, 이야기, 건축, 법률, 예술, 심지어 몸짓과 억양을 통해 물질적으로 전승된다. 이것은 단순한 ‘아이디어’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뇌의 신경 연결망을 물리적으로 재구성하고, 호르몬 반응 패턴을 바꾸고, 유전자 발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물질적 현실이다. 최근 문화유전학(cultural evolution) 연구들이 보여주듯, 전통은 단순한 추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확장된 표현형이다.


유물론을 여기까지 철저하게 밀어붙이면, 역설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전통과 관습을 함부로 폐기하거나 경시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물질적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수천 세대에 걸쳐 축적된, 수없이 많은 생존·번식·실패 실험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낡은 관념”이라며 관념론적으로 지워버리는 행위는, 유물론을 표방하면서도 가장 비유물론적인 태도다. 마치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한다고 하면서 하드웨어와 수십 년간 쌓인 데이터를 모조리 포맷하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이 데이터는 완벽하지 않다. 노이즈도 많고, 시대착오적 요소도 있으며, 권력에 의해 오염되고 왜곡된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인류가 가진 가장 거대한 빅데이터다. 무작정 폐기하고 ‘이성’이나 ‘평등’ 같은 추상적 원리로 새로 쓰려는 시도는, 수천 년 동안 실전에서 버그를 잡아가며 살아남은, 수없이 많은 엣지 케이스와 실패 패턴을 거쳐 안정화된 거대한 레거시 시스템 전체를, ‘이성’이라는 이론적 설계 원칙 하나만으로 완전히 새로 소스코드를 재작성한 뒤, 충분한 테스트 없이 바로 운영 환경에 배포하는 행위와 같다. 그 결과가 어떤 참사를 낳을지는 20세기 여러 이념 실험들이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필자는 전통을 신성시하지 않는다. 그것을 초월적 권위나 신의 명령으로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다만 냉정하게 말한다. 그것은 물질적이다. 따라서 무시하거나 파괴할 때도 물질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 유물론자라면 마땅히 그 대가를 계산해야 한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유물론이다. 신도, 영혼도, 진보의 필연적 도래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수천 년의 물질적 축적을 함부로 짓밟지 않는 현실주의. 종교를 바이러스로 보지만, 그 바이러스가 인간이라는 숙주를 여기까지 데려온 핵심 적응 중 하나였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 않는, 철저하면서도 냉철한 관점이다.


이 유물론은 좌우익 종교인 모두에게 불편할 것이다. 좌익에게는 전통을 함부로 부수는 행위가 유물론이 아니라 관념론적 폭력임을 지적하기 때문이고, 우익에게는 전통을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라 진화적으로 검증된(그러나 여전히 업데이트 가능한) 데이터로 본다는 점에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불편함 속에, 우리가 종교라는 유전병을 조금이라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 있다.


8. 변증법적 유물론과 진보주의의 역설: 유물론을 표방하며 유물론을 배반하다


여기서 가장 극명한 역설이 드러난다.


변증법적 유물론자들과 현대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철저한 유물론자라고 자처한다. 그들은 “의식은 존재의 반영일 뿐”이며, “물질적 조건이 사회와 인간을 결정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하는 행동은 유물론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정면으로 배반한다.


그들은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의 뇌와 행동, 호르몬 체계와 신경 연결망에 물질적으로 각인된 패턴들 — 전통, 관습, 도덕적 선입견, 가족 구조, 성 역할, 공동체 규범, 생존 전략 — 을 “낡은 관념”, “구시대의 잔재”, “내면화된 억압”이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치워버린다. 마치 그것들이 공중에 떠 있는 추상적 아이디어인 양, “이성(理性)”과 “진보”, “평등”이라는 더 높은 관념으로 덮어쓸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노골적인 관념론이다. 


진정한 유물론자라면 수천 세대에 걸쳐 수억 명의 인간이 생존하고 번식하고 실패하며 축적해온 이 거대한 물질적 데이터를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뇌 구조를 물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유전자 발현 패턴에 영향을 주고, 행동의 비용-편익 계산을 형성해온 물질적 현실 그 자체다. 최근 문화유전학 연구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듯, 이러한 문화적 패턴들은 세대를 거치며 선택압을 받아온 결과물이며, 무작정 삭제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패치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진보”라는 추상적 이념을 최고의 진리로 삼아, 수천 년 동안 검증된 레거시 시스템을 통째로 리라이팅하려 든다. 이것은 유물론을 표방하는 자들이 가장 비유물론적으로 행동하는 순간이다. 그들이 믿는 “이성”과 “역사의 필연적 방향”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초월적·형이상학적 실체가 되어버렸다. 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진보”라는 새로운 신을 앉힌 것이다.


이 구조는 기독교가 토착 신앙을 정복할 때와 놀라울 정도로 동일하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의 조상 숭배, 자연신 숭배, 토속 의례를 “미신”이자 “악마 숭배”로 규정하고, 그것을 철저히 파괴한 뒤 성경이라는 새로운 절대 진리로 덮어썼다. 수천 년 동안 그 사회의 생존과 결속을 지탱해온 물질적·문화적 데이터를 “사탄의 속임수”라는 이름으로 무효화한 것이다. 


현대 진보주의도 정확히 같은 메커니즘을 반복한다. 그들은 전통적 가족관, 성별 인식, 공동체 내 계층과 역할 분담, 외집단에 대한 경계심, 심지어 생물학적 현실에 기반한 일부 선입견들까지 “혐오”, “차별”, “내면화된 억압”이라는 새로운 신학적 카테고리로 규정한다. 그리고 “포용”, “다양성”, “평등”이라는 더 높은 도덕률로 그것들을 대체하려 한다. 


둘 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인지적·문화적 폭력이다. “내가 가진 절대적 진리가 이전의 모든 경험적 데이터를 무효화한다”는 오만함. 축적된 물질적 증거보다 관념적 당위성을 우선시하는 태도. 이전 세대들이 피와 실패와 생존으로 쌓아올린 빅데이터를, 자신이 계시받은 듯한 새로운 이념으로 포맷하는 파괴 행위.


차이점이 있다면, 기독교는 적어도 “신”이라는 초월적 권위를 명시적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반면 현대 진보주의는 자신들이 여전히 유물론자라고,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같은 짓을 한다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적 기만이자 자기모순이다.


철저한 유물론을 밀어붙이면, 오히려 보수적 결론에 가까워진다. 전통을 무조건적으로 숭배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낡은 관념”이라는 관념론적 프레임으로 가볍게 폐기하는 행위만큼은, 유물론의 이름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전통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이다. 그것을 무시하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유물론자가 아니다. 관념의 포로가 된다.


9. 전통과 선입견: 진화론적 빅데이터로서의 재해석


전통과 선입견을 이제 다르게 읽어야 한다. 그것들을 단순한 “구시대의 편견”이나 “비합리적 미신”으로 치부하지 말고, 진화론적 빅데이터로 재해석해야 한다.


인간이 수천 세대에 걸쳐, 수억 명의 생존과 번식, 실패와 성공의 결과를 통해 축적해온 거대한 데이터셋. 그것이 바로 전통과 선입견의 본질이다. 이 데이터는 무작위로 쌓인 것이 아니라, 극도로 혹독한 현실 세계라는 학습 환경에서 반복적인 선택압을 받아온 결과물이다. 한 세대의 경험은 다음 세대로 언어, 이야기, 의례, 금기, 속담, 관습의 형태로 물질적으로 전승되며, 살아남은 패턴은 강화되고, 실패한 패턴은 점차 도태된다.


물론 이 빅데이터는 완벽하지 않다. 100% 정확할 수도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대다수 케이스에서 충분히 잘 작동하는 휴리스틱이라는 점이다. 선입견(prejudice)의 본질적인 기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예외 케이스까지 모두 고려하다가 판단 속도가 늦어져 생존에 불리해지는 것”보다, “대체로 맞는 일반화로 빠르게 판단하고, 드문 예외는 트레이드오프(trade-off)로 감수하는 것”이 진화적으로 유리했다. 


예를 들어 “낯선 집단 출신의 사람은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선입견은, 실제로 그 집단이 적대적이었던 환경에서는 생존율을 높여주었다. 모든 낯선 사람을 일일이 검증하다가 한 번만 실수하면 죽을 수 있는 환경에서, 이런 빠른 패턴 인식은 강력한 적응 전략이었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차별’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수만 년 동안 인류를 사바나와 빙하기를 거쳐 여기까지 데려온 실전 검증된 알고리즘이다.


문명권마다 선입견과 전통이 약간씩, 때로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이 관점에서 명확해진다. 각 문명은 처한 지리적·기후적·역사적 조건이 달랐다. 지중해 연안의 무역 중심 사회와 고산지대의 폐쇄적 농경 사회, 혹한의 유목민 사회와 열대 우림의 정주 사회가 최적화해야 할 생존 전략은 당연히 달랐다. 따라서 그들이 축적한 ‘빅데이터’ — 즉 문화적 선입견 — 도 지역적으로 특화된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독립적으로 발달한 문화들 사이에서도 수렴진화(convergent evolution)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살인 금지, 혈연에 대한 우선적 보호, 공동체 내부에서의 협력 장려, 부모의 자식 양육 의무, 배신자에 대한 처벌 규범 등은 거의 모든 장기 생존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규범들이 강력한 생존·번식 이점을 제공한다는 진화적 증거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선입견일수록, 그만큼 강력하게 검증된 데이터라는 의미다.


근현대에 들어서면서 이 빅데이터와 현실 사이에 심각한 불일치(mismatch)가 발생했다. 


산업혁명, 현대 의학, 피임 기술, 복지국가, 도시화, 글로벌화 등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냈다. 과거에는 후손 번식에 불리했던 유전적·행동적 특성(예: 낮은 충동조절 능력, 과도한 위험 선호, 장기적인 계획 능력 부족 등)을 가진 개체들도 이제 쉽게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선택의 압력이 급격히 약화된 것이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 기존 전통과 선입견 중 어떤 것이 여전히 유효하고, 어떤 것이 구시대의 잔재가 되었는지 — 솔직히 아직 충분한 데이터가 없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규모의 자연실험(natural experiment)을 진행 중이다. 불과 수십 년, 길어야 2~3세대라는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전례 없는 사회적·기술적 변화를 겪고 있다. 이 실험의 최종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현대 진보주의는 마치 실험의 결론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전통은 모두 억압이다”, “선입견은 모두 혐오다”, “가족·성(性)·국가 개념은 모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수십 년 단위의 이념적 확신으로 수천 년 단위의 진화론적 빅데이터를 통째로 덮어쓰려 한다.


이것은 데이터 과학적으로 극도로 무모한 짓이다. 


진화론적 유물론은 여기서 냉정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로 수천 년의 데이터를 폐기할 만큼 강력한 새로운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관념적 당위성과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실험을 인류 전체에게 강제하고 있는가?


전통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가진 가장 방대하고, 가장 오래 검증된 데이터베이스다. 그것을 경시하거나 파괴할 때는, 적어도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 대가를 각오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유물론자의 태도다.


10. 커티스 야빈의 전통 분류학: 진화론적 렌즈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a.k.a Mencius Moldbug)은 자신의 에세이 「도킨스는 어떻게 몰락했는가 제2부(How Dawkins Got Pwned, Chapter 2)」에서 전통을 바라보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한다. 그는 도킨스의 밈(meme) 개념을 빌려오면서도, 그것을 더 정교하고 가치중립적인 언어로 재정의한다.


그는 먼저 용어를 정리한다.


“세대를 넘어 전파될 만큼 안정적인 밈플렉스를 전통이라고 부르자. 이 단어는 실제 영어 단어일 뿐 아니라, 가치중립적이라는 미덕도 있다. 어떤 성향을 가졌든 입에 거품을 무는 광신도가 아닌 이상, 세상에 좋은 전통과 나쁜 전통이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Let's call a memeplex stable enough to propagate across generations a tradition. Not only is this an actual word in the actual English language, it also has the virtue of being nonjudgmental. Surely anyone who is not a complete, foaming-at-the-mouth fanatic, of whatever persuasion, can admit that the world contains both good traditions and bad traditions.)”


- <How Dawkins Got Pwned, Chapter 2>, Mencius Moldbug · OCTOBER 4, 2007 [링크: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07/10/how-dawkins-got-pwned-part-2/]


이 재정의는 단순한 용어 바꾸기가 아니다. 종교, 관습, 도덕 규범, 정치 이념, 사회적 선입견을 모두 동일한 분석 단위 — ‘전통’이라는 하나의 범주 — 안에 넣는다는 점에서 매우 강력하다. 종교는 더 이상 특별한 초월적 현상이 아니라, 세대 간에 안정적으로 복제되는 문화적 복합체, 즉 밈플렉스의 한 형태일 뿐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도, 유교도, 현대 진보주의도, 심지어 과학적 합리주의조차도 모두 ‘전통’이라는 렌즈로 비교·평가할 수 있게 된다.


야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통을 평가하는 실질적인 분류 체계를 제시한다. 그는 두 가지 축 — 미제스주의와 다윈주의 — 을 기준으로 전통이 숙주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전통이 숙주로 하여금 개인적 목표를 해치는 오판을 하게 만든다면, 그 전통은 미제스적 병적 상태를 보이는 것이다. 전통이 숙주로 하여금 자신의 유전자 번식 이익을 해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면, 그 전통은 다윈주의적 병적 상태를 보이는 것이다. 전통을 따르는 것이 개인적으로 유리하거나 중립적이지만(이탈자가 보상받거나 최소한 처벌받지 않는) 집단적으로 해롭다면, 그 전통은 기생적이다. 전통을 따르는 것이 개인적으로 불리하지만 집단적으로 유익하다면, 그 전통은 이타적이다.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유익하다면 공생적이다.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해롭다면 악성이다. (If a tradition causes its hosts to make miscalculations that compromise their personal goals, it exhibits Misesian morbidity. If it causes its hosts to act in ways that compromise their genes' reproductive interests, it exhibits Darwinian morbidity. If subscribing to the tradition is individually advantageous or neutral (defectors are rewarded, or at least unpunished) but collectively harmful, the tradition is parasitic. If subscribing is individually disadvantageous but collectively beneficial, the tradition is altruistic. If it is both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benign, it is symbiotic. If it is both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harmful, it is malignant.)”


- <How Dawkins Got Pwned, Chapter 2>, Mencius Moldbug · OCTOBER 4, 2007 


이 분류는 냉정하면서도 실용적이다. 전통을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오직 숙주(개인)와 집단에 미치는 실제 비용-편익으로 평가한다. 미제스적 측면은 개인의 합리적 판단과 목표 달성을, 다윈주의적 측면은 유전자 번식 성공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 분류 체계를 종교에 적용하면 매우 흥미로운 동역학이 드러난다.


인류 초기의 원시 종교들은 대체로 이타적(altruistic) 성격이 강했을 가능성이 크다. 개인에게는 상당한 비용(희생, 금욕, 자원 헌납)을 요구하지만, 집단의 내부 결속력과 협력 수준을 극적으로 높여 생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해주었다. 전쟁, 기근, 자연재해가 빈번했던 환경에서 공동의 신화와 의례는 집단을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소프트웨어였다.


그러나 종교가 제도화되고, 권력과 결합하면서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성직자 계급과 종교적 지배층에게 종교는 공생적(symbiotic)으로 작동했다. 그들은 종교를 통해 지위, 부,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일반 신도들에게는 점차 기생적(parasitic)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십일조, 면죄부, 순교 강요, 세속적 쾌락의 억압 등은 개인에게는 명백한 비용이었지만, 지배층에게는 이익이었다.


더 나아가 종교 간 경쟁과 전쟁이 반복되면서, 전체 문명 수준에서는 악성(malignant) 국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우리 신만이 진리”라는 믿음은 집단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동시에, 외부 집단에 대한 무한한 적대와 정복 의지를 정당화했다.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막대한 비용을 초래하는 파괴적 순환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야빈의 언어로 재구성한, 필자의 에세이 시리즈가 추구하는 핵심 논점이다. 


종교는 진화적으로 성공한 동시에 심각한 부작용을 지닌 문화적 적응이다. 초기에는 집단 생존에 크게 기여했던 이타적·공생적 전통이, 권력과 제도와 결합하면서 기생적·악성 요소를 축적해온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미제스적/다윈적 병적 상태 — 개인적·유전적 비용 — 를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야빈의 프레임은 우리에게 중요한 도구를 준다. 전통을 감정적으로 숭배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진화론적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진단하고, 필요하다면 선택적으로 업데이트할 수 있는 분석적 렌즈를 제공한다. 종교를 포함한 모든 전통은 이 렌즈 앞에서 그 진정한 성격 — 공생인가, 기생인가, 악성인가 — 을 드러내야 한다.


11. 닉 랜드의 논평: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찰스 다윈의 연대


닉 랜드(Nick Land)는 「암흑계몽주의 제3부(The Dark Enlightenment, Part 3)」에서 커티스 야빈의 미제스주의/다윈주의 분류 체계에 대해 날카로운 논평을 덧붙인다. 야빈이 전통을 개인적 합리성과 유전자 번식이라는 두 축으로 평가한 데 대해, 랜드는 이 두 축이 겉으로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근본적으로 ‘이기적’ 인센티브의 연합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랜드는 이렇게 논평한다.


“행동적 관점에서 보면, 미제스주의 체계와 다윈주의 체계는 각각 재산 축적과 유전자 번식을 지향하는 ‘이기적’ 인센티브의 집합체다. 다윈주의자들은 ‘미제스주의적’ 영역을 유전적 자기 이익 동기의 특수 사례로 파악하는 반면, 신칸트주의적 반자연주의에 뿌리를 둔 오스트리아 전통은 이러한 환원주의에 저항하는 성향이 있다. 이 논쟁의 궁극적 함의는 상당하지만, 현재 조건 하에서는 시급성이 낮은 사소한 다툼에 불과한데 — 두 진영 모두 ‘혐오’, 즉 부적응자를 처벌하는 인센티브 구조에 대한 반동적 관용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Behaviorally considered, the Misesian and Darwinian systems are clusters of ‘selfish’ incentives, oriented respectively to property accumulation and gene propagation. Whilst the Darwinians conceive the ‘Misesian’ sphere as a special case of genetically self-interested motivation, the Austrian tradition, rooted in highly rationalized neo-kantian anti-naturalism, is pre-disposed to resist such reductionism. Whilst the ultimate implications of this contest are considerable, under current conditions it is a squabble of minor urgency, since both formations are united in ‘hate’, which is to say, in their reactionary tolerance for incentive structures that punish the maladapted.)”


- <The Dark Enlightenment (Part 3)>, 19 March, 2012 by Nick Land [보관된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120723151556/http://www.thatsmags.com/shanghai/article/1920/the-dark-enlightenment-part-3]


랜드가 말하는 ‘혐오(hate)’는 현대 좌파가 즐겨 사용하는 도덕적 낙인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 부적응자를 처벌하는 인센티브 구조를 인정하고 용인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시장에서 실패한 사람은 손실을 보고, 번식 시장에서 실패한 사람은 후손을 적게 남긴다. 미제스주의(자유지상주의 경제학)는 재산과 계약의 실패를, 다윈주의(진화생물학)는 유전적·행동적 부적응의 대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둘 다 “현실이 현실답게 작동하도록” 허용한다는 점에서 연대한다.


이 지점에서 현대 진보주의의 근본적 적대성이 드러난다.


진보주의는 바로 이 “부적응자를 처벌하는 인센티브 구조” 자체를 해체하려 한다. 시장에서 실패한 이들을 복지로 보호하고, 진화적으로 불리한 특성을 사회적으로 수용하며, 자연선택의 압력을 이념적·제도적 힘으로 무력화하려 한다. “모두가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정책, “혐오 발언” 규제, 긍정적 차별 등은 모두 자연적·경제적 피드백 루프를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시도다.


이것이 진보주의가 자유주의자와 다윈주의자 모두에게 근본적으로 수용 불가능한 이유다. 


자유지상주의자(특히 고전적 자유주의·오스트리아학파)에게 진보주의는 재산권과 개인적 책임이라는 미제스주의적 원칙을 파괴한다. 다윈주의자에게는 유전자 번식과 적합도(fitness)에 대한 현실 인식을 거부하는 반자연주의적 환상이다. 랜드가 지적하듯, 미제스와 다윈은 서로를 완전히 환원하지는 않지만, “부적응자를 처벌하는 구조”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실질적 동맹이다. 진보주의는 이 동맹의 공통 기반을 공격함으로써, 현실의 물질적 선택압 자체를 거부한다.


결국 이것은 진보주의가 유물론을 표방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관념론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다. 그들은 현실의 물질적 구조(시장의 실패, 생물학적 차이, 진화적 비용)보다 “평등”·“포용”·“정의”라는 추상적 이념적 당위를 우선시한다. 수천 년의 진화론적 빅데이터와 실전 검증된 인센티브 구조를, 아직 검증되지 않은 사회공학 실험으로 대체하려는 태도는 — 앞서 말한 대로 — 기존의 레거시 시스템을 테스트 코드와 디버깅없이 무작정 리팩토링한 다음, 이를 운영 서버에 배포하는 것과 같다.


랜드와 야빈의 관점은 우리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로 자연과 시장이 부적응자를 처벌하는 메커니즘을 영원히 해체할 수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그 메커니즘을 약화시킬수록, 결국 더 큰 규모의 붕괴(인구 절벽, 경제 정체, 삶의 의미 상실, 사회적 해체)가 찾아올 것이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가?


이 논의는 단순한 이념 논쟁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 사회를 운영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인센티브 — 보상과 처벌, 적합과 부적합 — 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진보주의가 이 질문을 철저히 거부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과학적·유물론적 입장이 아니라 새로운 세속 종교가 된다.


12. 철저한 유물론이 도달하는 보수적 결론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하면 하나의 날카로운 역설적 결론에 도달한다.


유물론을 가장 철저하고 일관되게 밀어붙이면, 오히려 보수적 결론에 이른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결론과 정반대다. 보통 유물론이라고 하면 종교와 전통을 해체하고, 이성과 진보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새로 쓸 수 있다는 급진적 태도가 따라올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물질적 현실을 끝까지 직시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인간의 뇌와 행동, 호르몬과 신경계에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각인된 전통과 관습은 단순한 ‘문화’나 ‘관념’이 아니다. 그것들은 진화론적 빅데이터이며, 물질적 현실 그 자체다. 선입견은 대다수 경우에 잘 작동하도록 최적화된 휴리스틱이며, 부적응자를 처벌하는 인센티브 구조(시장의 실패, 사회적 배제, 번식 경쟁에서의 패배)는 집단의 장기적 생존과 적합도를 유지해온 강력한 물질적 메커니즘이다. 


이것들을 “낡은 것”, “억압”, “혐오”라는 이름으로 추상적 이념 — 이성, 평등, 포용, 진보 — 으로 무효화하고 덮어쓰려는 시도는, 유물론이 아니라 가장 노골적인 관념론이다. 현실의 물질적 증거보다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적 당위성을 우선시하는 태도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생긴다.


필자가 생각하는 바는 종교적 보수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종교적 보수주의는 전통을 신성한 것으로, 신이 명령한 불가침의 영역으로, 초월적 권위에 의해 정당화된 것으로 본다. 그들에게 전통은 ‘거룩함’의 문제다. 반면 우리가 도달한 입장은 철저히 세속적이고 냉정하다. 전통을 신성시하지 않는다.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나 ‘조상의 영혼’으로 미화하지도 않는다. 다만 진화적으로 오랜 기간 검증된 데이터라는 이유로, 냉철하게 존중한다. 그것이 수억 명의 생존과 번식 실험을 거쳐 남은, 현재로서는 대체 불가능한 물질적 축적이라는 점에서 인정한다.


결국 필자의 입장은 이렇다. 


전통이 현대 사회와 불일치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 환경이 급변한 현대 사회에서 일부 관습과 선입견은 더 이상 최적이지 않을 수 있다. 새로운 조건 아래에서 선택적 업데이트와 수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다만 그 업데이트는 수십 년 단위의 이념적 환상이나 도덕적 과시가 아니라, 새로운 현실 조건 아래서 축적되는 실제 데이터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파괴가 아니라, 신중한 리팩토링(refactoring)과 A/B 테스트에 가까운 태도다.


종교도 아니고, 진보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상적·낭만적 보수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진화론적 유물론에서 출발하는 냉정한 현실주의. 인간을 도덕적·이성적 개선의 대상이 아니라 관찰 가능한 생물학적·행동적 존재로 먼저 놓고 보자는 철저한 현실주의다. 선형적 진보 서사, 인간 본성을 교육과 제도로 교정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환상, 진보주의적 도덕과 이념을 통한 근본적 인간 개조 가능성을 냉정하게 거부하며, 다윈주의적 관찰과 역사적 데이터를 출발점으로 삼는 사유의 흐름. 그리고 보편 종교 탄생 이전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전통과 관습을 분석하고 여기서 도출된 진리로 되돌아갈 것을 검토하는 사유의 흐름. 어쩌면 이러한 필자의 견해를 '인류학적 반동주의(Anthropological Reactionism)'라는 이름으로 명명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이 에세이 시리즈 전반에서 암묵적으로 지향해온 입장이다. 


여기에는 신도 없다. 진보의 필연적 도래도 없다. 성역도, 절대적 금기도, 도덕적 우월감도 없다. 그러나 수천~수만 년의 데이터는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방대하고, 가장 오래된, 가장 현실적인 증거다. 아무리 세련된 이념으로 포장해도, 그 데이터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관념론자가 된다.


이 현실주의는 좌우익 종교인 모두에게 불편하다. 


하지만 바로 이 불편함이 이 입장의 가치다. 


신도 없고, 구원도 없고, 역사의 종착역도 없다. 다만 차가운 데이터와 현실의 선택압만이 있을 뿐이다. 그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가능한 최선의 항로를 찾는 것. 그것이 종교라는 유전병을 앓고 있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하고, 가장 솔직한 태도가 아닐까.


다음 편에서는 문명은 우로보로스(Ouroboros)처럼 자신을 포식하며 재생하며 순환의 끝에서 냉혹한 현실주의만이 남는다는 것을 파헤쳐볼 예정이다.


- 참고 문헌 -


<How Dawkins Got Pwned, Chapter 2>, Mencius Moldbug · OCTOBER 4, 2007 [링크: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07/10/how-dawkins-got-pwned-part-2/]


<The Dark Enlightenment (Part 3)>, 19 March, 2012 by Nick Land [보관된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120723151556/http://www.thatsmags.com/shanghai/article/1920/the-dark-enlightenment-par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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