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14편 <完>
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14편
우로보로스: 문명의 수렴진화, 전쟁의 순환, 그리고 냉혹한 현실주의
1. 종교 비판에서 문명론으로
1편부터 13편까지 이 에세이 시리즈는 종교라는 시스템을 철저히 해부했다. 결론은 단 하나였다. 종교는 인간이 대규모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창조한 인공 보철물이며, 그 보철물이 원래 메우려 했던 틈새보다 더 깊고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를 걷어내고 난 뒤, 무엇이 남는가. 신도 없고, 진보도 없고, 어떤 성역도 허락되지 않는 자리에서 인류 문명을 직시할 때,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이 14편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종교 비판에서 출발해 문명론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그 문명론이 도달하는 결론은 — 종교 비판의 결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불편하고 냉혹하다.
2. 수렴진화: 기술-자본이라는 엔진
매우 초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인류 문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으로 서서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이 수렴진화하고 있다. 완전한 단일 극점에 아직 도달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서로 다른 문명적 DNA가 충돌하고 융합하며 다극적으로 발산하는 듯한 긴장과 혼돈을 거듭한 끝에, 결국 하나의 중심을 향해 수렴해 가는 과정이다. 동양은 서양의 급진적 혁신, 개인주의적 창의성, 단기적 효율과 시장의 날카로움을 탐닉하고, 서양은 동양의 집단적 통제, 장기적 전략적 인내,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깊은 복종과 조화를 부러워하며,서로를 증오하면서도 닮아가는 기이한 대칭이 지속되고 있다.
이 수렴을 가속시키는 핵심 엔진이자 연료는 다름 아닌 기술-자본(techno-capital)이다. 기술과 자본은 이미 분리 불가능한 복합체가 되었다. 기술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그 가치가 다시 자본을 증식시키며, 증식된 자본이 더 강력한 기술을 요구하는 자기강화 루프. 이것이 현대 문명의 실질적인 원동력이다.
초기 인류에게 기술 발전은 순수한 생존의 문제였다. 맹수, 기아, 질병, 혹한 앞에서 불을 피우고, 창을 만들고, 작물을 재배하고, 바퀴를 발명하는 행위 자체가 인본주의적 희망과 일치했다. 기술은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하고, 더 오래 살게 하고, 더 나은 삶을 약속했다.
그러나 문명이 복잡해지고 국가와 관료제가 거대해지면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뒤틀렸다. 이제 기술 발전은 종종 도덕적·정치적 명분에 의해 지연되거나 왜곡된다. 탄소 배출을 줄인다는 명분으로 원전 건설을 막고, 형평성을 외치며 혁신의 인센티브를 약화시키고, 다양한 정체성을 보호한다는 구호 아래 사회 전체의 동적 효율을 갉아먹는다. 생산성을 높여 국가의 파이를 키우는 엔지니어와 기업가보다, 파이의 재분배를 관리하며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관료, 정치인, 활동가, 미디어 계층이 더 많은 자원을 빨아들이는 구조가 공고해졌다.
기술-자본은 국경과 문명권의 경계를 무자비하게 녹인다. 신자유주의적 글로벌리즘은 그 물질적 기반일 뿐, 진짜 힘은 기술과 자본의 자체 증식 논리에 있다. 네이션(nation) 단위의 순혈주의는 더 이상 구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정학적 위치와 문화적 관성에 따라 저항의 강도는 다르지만, 결국 기술-자본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 클래시(The Clash)의 「Rock the Casbah」(1982)라는 노래에서는 이 현상을 날카롭게 예감한 것처럼 보인다.
Now the king told the boogie men - 왕이 부기맨(춤추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You have to let that raga drop - “그 라가(인도풍 음악)를 그만둬라”
The oil down the desert way - 사막 쪽의 석유가
Has been shaken to the top" - 위로 흔들려 올라왔다
The Sheikh, he drove his Cadillac - 셰이크는 캐딜락을 몰고
He went a-cruising down the ville - 마을을 유유히 드라이브했다
The Muezzin was a-standing on the radiator grille - 무아진은 자동차 라디에이터 그릴 위에 서 있었다
Sharif don't like it (샤리프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Rocking the Casbah, rock the Casbah (카스바를 흔드는 것, 카스바를 흔들어라)
사막의 석유가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신정 지도자들이 금지하는 서구 문화가 캐딜락과 함께 스며들며, 무아진(이슬람 사원(모스크)의 미나렛(첨탑)에서 하루 5번 무슬림들에게 기도 시간(Adhan)을 알리는 사람)이 라디에이터 그릴 위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 이것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기술-자본이 문명적 순혈을 해체하는 물질적 현실을 상징한다. 셰이크(부족의 원로, 수장, 숭배하는 현인, 이슬람 지식인을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가 캐딜락을 몰고, 이슬람주의자조차 스마트폰으로 서구 콘텐츠를 소비하는 오늘날, 그 예언은 이미 일상화되었다.
물론 수렴은 매끄럽지 않다. 중국은 서구 기술을 받아들이면서도 당의 통제 아래 디지털 권위주의라는 독자적 변종을 만들어냈고, 서구는 기술 봉건제와 워키즘(Wokeism) 문화가 기이하게 결합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이슬람권 역시 석유 자본과 스마트폰, SNS를 통해 외부 문명을 흡수하면서도 샤리아의 일부를 유지하려 애쓴다. 그러나 이러한 하이브리드 시도들조차 장기적으로는 기술-자본의 논리 — 효율, 확장, 연결, 최적화 — 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기술-자본은 문명의 경계를 녹이는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긴장과 경쟁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이것이 초장기적 수렴의 본질이다. 완벽한 일치가 아니라, 충돌과 흡수, 저항과 순응이 뒤엉킨 불편한 동거. 그리고 그 과정의 속도와 규모는 과거 어떤 제국 순환보다 압도적으로 거대해졌다.
3. 순혈주의의 불가능성: 좀비국가로의 퇴행
그렇다면 순혈주의를 진정으로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명확하다. 타 문명권과의 극단적인 물리적·정신적·경제적·디지털 고립뿐이다. 단순한 보호무역이나 문화적 배타주의가 아니라, 공항과 항구를 폐쇄하고, 해외 무역을 원천 차단하고, 인터넷을 인트라넷으로 전환하며, 외부인 출입은 물론 자국민의 출국까지 극단적으로 봉쇄하는 수준의 쇄국이어야 한다. 조선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현대 기술 시대에 맞춰 업그레이드한, 실질적인 디지털·물리적 철의 장막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고립의 결과는 필연적인 퇴행이다. 내부는 좀비국가의 모습을 띠게 된다. 기술-자본의 흐름을 차단한 채 순혈의 순수성을 최우선으로 삼는 공동체 — 그것이 아미쉬 공동체이든, 북한이든, 탈레반 통치 하의 아프가니스탄이든 — 공통적으로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극도로 희생시킨다. 의료, 영양, 교육, 기대수명, 기술적 역량 모든 면에서 외부 세계와의 격차가 벌어지고, 그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순혈주의의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문명을 지키겠다”는 고귀한 명분으로, 정작 그 문명을 경직시키고 화석화하며 결국 죽이는 길을 택한다는 점이다. 살아있는 문명은 변화와 혼합, 외부 자극에 대한 선택적 흡수를 통해 진화한다. 변화를 거부하고 순수성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문명은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거나, 역사 속으로 소멸할 뿐이다.
순혈주의, 즉 극단적 고립주의를 실현하려면 단순한 국경 강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파괴가 뒤따라야 한다. 모든 국제 공항과 주요 항구를 폐쇄하거나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비행기와 선박 제조 능력을 해체하며, 해외에 나간 기업과 자산을 철수시키고, 사이버 공간에서는 해외 인터넷을 완전히 차단한 채 국가 인트라넷만 허용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으로부터의 완전 단절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조치는 이론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현대 산업 사회의 붕괴를 의미한다. 희토류, 반도체 소재, 정밀 기계, 첨단 의약품 등 핵심 요소의 수입이 끊기면, 스마트폰 하나, MRI 기계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사회로 후퇴한다.
북한은 이 실험의 살아있는 표본이다. 극단적 고립과 주체사상의 순혈주의가 결합된 결과, 인구의 상당수가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기술 수준은 수십 년 뒤처지며, 엘리트층조차 외부 세계의 정보를 극도로 제한된 채 소비한다.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역시 중세적 규범 강요로 사회 전체의 역량을 갉아먹고 있다. 아미쉬 공동체는 규모가 작고 자발적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지되지만, 국가 규모로 확대하면 치명적이다.
물론 문명권 간 융합의 비율과 강도는 지정학적 위치, 자원 보유량, 인구 규모, 문화적 관성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다. 그 누구도 만능의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나마 참고할 수 있는 것은 유사한 문명권에 속한 인접 국가들의 대전략 시행착오 역사뿐이다. 그러나 자연 — 즉 냉혹한 지정학적 생존경쟁 — 은 문명 스스로를 해치는 방향의 하이브리드 실험, 혹은 과도한 순혈 실험을 가차 없이 탈락시킨다. 기술-자본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려는 시도는 결국 내부 구성원들의 삶을 좀비처럼 만들어, 장기적으로는 국가 자체의 생존 가능성을 갉아먹는다.
순혈주의는 아름다운 환상일 뿐, 지속 가능한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문명을 지키려다 문명을 죽이는, 자기모순적인 퇴행의 길이다.
4. 기생충 계층과 좀비국가: 문명 복잡화의 역설
문명이 발달할수록, 역설적으로 기생이 가능한 공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수렵채집 시대의 소규모 부족 사회에서는 기생이 거의 불가능했다. 매일 직접 사냥하고 채집하지 않으면 다음 날 굶주림이 찾아왔다. 잉여 생산물이 거의 없었고,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생산에 직접 참여해야 생존이 가능했다. 그러나 농업혁명 이후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고, 국가가 그 잉여를 체계적으로 수탈·재분배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관료제가 등장해 재분배의 흐름을 관리하게 되자, 생산 행위 없이도 그 흐름 위에 올라타서 자신의 몫을 챙길 수 있는 구조적 틈새가 생겨난 것이다.
이 기생 공간은 시간이 갈수록 더 정교하고, 더 넓고, 더 안전해진다. 단순한 세금 징수원에서 시작해 전문 관료, 법률가, 학자, 비영리 활동가, 미디어 종사자, 규제 산업 로비스트, 금융 중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한다. 특히 현대 복잡 사회에서는 지대추구(rent-seeking) 행위가 가장 강력한 기생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았다. 규제를 만들어 경쟁자를 막고, 기존 이해관계를 보호하며, 정치적·도덕적 명분으로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기술이다.
도덕적 명분은 이 기생의 가장 세련되고 강력한 형태다. “약자를 보호한다”, “평등을 실현한다”, “다양성을 존중한다”, “지속가능성을 추구한다”는 등의 고귀한 구호 아래서 실제로는 생산 활동을 방해하고, 자원을 재분배하며, 자신들의 지위와 급여를 공고히 하는 계층이 출현한다. 이것이 바로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Mencius Moldbug)이 《도킨스는 어떻게 몰락했는가 제 2부(How Dawkins Got Pwned, Chapter 2)》(2007)에서 지적한 기생적(parasitic) 전통의 가장 순수한 인간적 구현체다. 개인적으로는 극히 합리적이고 유리한 전략이지만, 집단적으로는 문명의 동역학을 서서히 좀먹는 치명적인 메커니즘이다.
기생충 계층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국가는 본격적인 좀비국가로 전환된다. 생산자가 소비자를 부양하는 자연스러운 구조가 완전히 역전된다. 이제 소수의 생산자와 혁신자들이 거대한 소비자와 기생 계층을 떠받쳐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 기술-자본의 혜택 — 스마트폰, 의료, 교통, 에너지 — 은 누리면서도 그 기술과 자본을 유지·발전시키는 데 거의 공헌하지 않는 무임승차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관료제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더 많은 규제를 만들고, 그 규제를 관리하기 위해 더 많은 관료를 고용하며, 그 관료를 먹여 살리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한다. (파킨슨의 법칙이 극단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이다.)
현대 진보주의 복지국가는 이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복지 지출이 GDP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규제 준수 비용이 기업의 생산성을 갉아먹으며, 대학과 미디어, 비정부기구가 도덕적 우위를 무기로 삼아 실질적인 기득권을 형성한다. 금융화된 경제에서는 실제 가치 창출과 동떨어진 투기·중개·레버리지 행위가 또 다른 형태의 기생을 낳는다. 규제 포획(regulatory capture)은 가장 노골적인 사례다. 규제를 만들어야 할 기관이 오히려 규제 대상 산업과 유착해 경쟁을 막고 초과이윤을 보장받는 구조.
이 역설이 문명 복잡화의 핵심이다. 문명이 정교해질수록 관리와 재분배를 위한 시스템이 커지고, 그 시스템 자체가 거대한 기생 기구로 변모한다. 초기에는 문명의 윤활유였던 것이, 어느 순간 문명의 엔진을 갉아먹는 기생충이 된다. 생산자의 피로와 절망이 쌓이고, 혁신의 인센티브가 약화되며, 기술-자본의 가속력마저 둔화된다.
이것이 좀비국가의 본질이다.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지만,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시체. 혈액(자본과 생산력)은 계속 순환하지만,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썩은 기생 조직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5. 카진스키 vs 랜드: 두 극단의 불가능성
이 좀비국가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려면, 결국 두 가지 극단적인 처방만이 남는다.
하나는 시어도어 카진스키(Theodore Kaczynski) 식이다. 《산업사회와 그 미래(Unabomber Manifesto)》에서 그는 기술-자본 체계 자체를 인간 자유와 자율성의 근본적 적으로 규정했다. 그의 해법은 명확하다. 기술-자본의 혜택만 누리면서 공헌은 하지 않는 거대한 무임승차 계층을 굶주리게 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기술 문명의 수준을 극단적으로 다운그레이드하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전 수준으로, 혹은 그보다 더 원시적인 농경·수공업 사회로 강제 회귀시킨다. 기술-자본이 사라지면 기생충들은 더 이상 복잡한 관료제, 복지 시스템, 규제 산업 위에서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기생충과 함께 숙주까지 죽이는 자살적 처방이다. 현대 문명이 부양하고 있는 80억 명에 가까운 인구를, 기술 이전 수준의 농업 생산력만으로 감당할 수는 없다. 기아, 질병, 사회 붕괴를 통해 수십억 명의 대량 사망을 전제로 한 처방이다. 카진스키가 폭탄을 보내 사회를 깨우치려 했던 것처럼, 그의 사상은 문명의 자해를 미화하는 극단적 반기술주의의 결정판이다. 실현된다면 인류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자연은 대부분의 현대인을 받아줄 만큼 관대하지 않다.
다른 하나는 닉 랜드(Nick Land) 식 가속주의(Accelerationism)다. 《암흑계몽주의(The Dark Enlightenment)》과 그의 여러 글에서 랜드는 카진스키와는 정반대의 길을 제시한다. 기술-자본의 힘을 극단적으로 가속시켜라. 자본과 지능의 폭발적 증식을 막지 말고, 오히려 모든 제동장치를 해체하라. 기술-자본은 정체된 상태에서만 기생할 수 있는 관료·정치인·도덕적 기업가·워키즘 활동가 같은 계층을 불태워버릴 것이다. 가속이 충분히 강력해지면, 비효율적이고 기생적인 모든 구조는 시장과 혁신의 불길 속에서 증발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여기에도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가속은 인간의 의도와 통제를 벗어나 작동한다. 기술-자본이라는 자율적 프로세스는 기생충을 태우는 동시에, 인간 문명 자체를 우리가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변형시킬 가능성이 크다. 초지능 AI, 완전 자율 자본, 생물학적·디지털적 융합, 인간성의 해체 — 랜드가 환영하는 그 ‘미래’는 인류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이 지배하는 세계일 수 있다. 메스를 빨고 랜드가 되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숙주를 제물로 바치는 가속의 제의(祭儀)다.
원시의 숲으로 도망쳐 폭탄을 만들거나, 기솔가속주의의 본산지인 상하이(上海) 안으로 뛰어들거나. 아니, 반기술주의의 원시적 퇴행을 외치거나, 가속주의의 초월적 파국을 환영하거나. 둘 다 극약처방이며, 처방을 내리는 의사 자신도 그 과정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카진스키는 기술을 죽여 문명을 죽이고, 랜드는 기술을 매우 빠르게 달리게 만들어 문명을 알아볼 수 없는 것으로 바꿔버린다. 둘 다 현재의 좀비국가를 끝장내지만, 그 끝이 인류에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한쪽은 대량 학살적 퇴행이고, 다른 한쪽은 포스트휴머니즘적 소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두 극단 사이의 좁고 불편한 지대에 서 있어야 한다. 두 극단 모두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을 버텨내야 한다. 좀비국가의 기생충을 조금씩 도려내면서도 기술-자본의 가속을 완전히 멈추지 않고, 문명의 완전한 붕괴와 완전한 초월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것. 이것은 쾌적한 해결책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이 에세이 시리즈 전체가 지향해온 “대안 없는 비판의 정직함”이다. 위안을 주지 않고, 유토피아를 약속하지 않으며, 다만 냉혹한 구조를 직시하게 하는 태도. 우리는 그 불편한 진실 위에 서서, 가능한 한 파국을 지연시키고 비용을 최소화하는 실용적 현실주의를 취할 수밖에 없다.
6. 우로보로스: 소국에서 제국으로, 제국에서 소국으로
인류 문명사를 초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하나의 거대한 패턴이 끝없이 반복된다. 그것은 파괴와 재생, 분열과 통합, 소국에서 제국으로, 다시 제국에서 소국으로 이어지는 순환이다.
소규모 국가와 부족들이 지정학이라는 끝없는 게임이론 실험장에서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간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고, 안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들은 포식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다. 약한 자를 집어삼키고, 강한 자와는 일시적 동맹을 맺으며 생존을 도모한다. 혼돈이 깊어질수록 기성 리버럴리즘의 도덕적 제약을 벗어던진 냉혹한 현실주의자들이 득세한다. 그들은 이상보다 생존과 권력을 우선시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제2의 시황제, 제2의 칭기즈 칸(테무진),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제2의 나폴레옹, 제2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 이들은 소국들을 피와 철로 정복하며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세운다. 로마, 몽골, 마케도니아, 프랑스 제국, 독일 제국,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 형태는 달라도 구조는 동일하다.
제국이 패권을 장악하면 일시적인 평화와 번영이 찾아온다. 그러나 내부에서 분열과 부패, 기생충 계층의 팽창, 엘리트 간의 권력 투쟁이 시작된다. 과도한 확장으로 인한 관리 비용 증가, 주변 세력의 도전, 내부의 퇴폐가 누적되면서 제국은 쇠락한다. 결국 제국은 쪼개지고, 다시 소국들의 난립 시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새로운 포식의 시대가 열린다. 이 순환은 수천 년 동안 반복되어 왔다.
문명은 우로보로스(Uroboros) 그 자체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유래한,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상징. 우로보로스는 영원한 순환, 자기파괴를 통한 재생, 죽음과 탄생의 불가분성을 나타낸다. 뱀은 자신의 몸을 갉아먹으며 살아가고, 먹힌 부분에서 새로운 살이 돋아난다. 문명 역시 마찬가지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몸체를 키우기 위해 소국들을 삼키고, 그 제국이 내부에서부터 부패하고 분열되어 스스로를 해체한다. 해체된 잔해 위에서 다시 새로운 소국들이 싹트고, 그 소국들은 다시 제국을 향해 포식의 길을 걷는다. 자기포식(self-cannibalism)을 통해 재생하는, 잔인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존재. 우로보로스의 눈은 차갑고, 그 순환은 무자비하다. 멈추지 않으며, 멈출 수도 없다.
이 순환을 멈출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소국들은 영원히 분산된 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국방력을 강화하면 상대는 그것을 위협으로 느끼고 더 강력한 군비를 확장한다. 내가 뭉치지 않으면 상대가 먼저 뭉쳐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따라서 모든 행위자는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동맹을 맺고, 군비를 증강하고, 기회를 포착해 선제 공격을 고려한다. 그러나 그 합리적 선택들의 총합은 집단적 파국으로 향한다. 이것은 바로 죄수의 딜레마가 문명사적 스케일로 확대된 형태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다 보면, 모두가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는 구조. 역사상 어떤 이상주의적 국제기구도, 어떤 도덕적 선언도 이 구조를 해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우로보로스 순환은 종교, 이념과 깊이 공생한다.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가들은 결코 “나는 권력을 원한다”고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반드시 고귀한 명분을 필요로 한다. 천명(天命)을 받은 황제, 알라의 성전(지하드)을 수행하는 칼리프, 백인의 짐을 지고 문명화 사명을 다하는 제국주의자, 역사의 필연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끄는 전위대(vanguard), 혹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전파하는 현대 서구 민주주의 국가 — 형태는 시대마다 다르지만 구조는 동일하다.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집단적 신념 체계(종교든 세속 이념이든)가 정복과 학살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해준다.
종교와 제국은 완벽한 공생 관계다. 종교는 제국에 신성한 명분과 대중의 충성심을 제공하고, 제국은 종교에 강제력과 영토, 자원을 제공한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 이슬람 제국들이 칼리프의 이름으로 확장한 것, 유럽 제국주의가 기독교 선교를 앞세운 것, 현대 중국이 ‘중화민족 부흥’이라는 준종교적 서사를 동원하는 것 — 모두 같은 메커니즘이다.
우로보로스는 자신의 꼬리를 물고 돌고 돈다. 문명은 스스로를 먹어치우며 재생한다. 이 순환을 초월하겠다는 모든 시도는 지금까지 실패했다. 오히려 그 시도들 — 종교든, 이념이든 — 이 순환의 연료가 되어왔다.
7. 전쟁은 멈추지 않는다: 무리동물로서의 인간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을 멈추겠다는 도덕적 외침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쟁을 실질적으로 막지 못했다. 오히려 때로는 그 도덕 자체가 새로운 전쟁의 명분이 되어 더 큰 피를 불렀다.
인간은 다른 동물을 사육하면서도 그 본성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 개미와 벌의 초조직적 협력, 늑대와 사자의 위계 질서, 침팬지의 잔인한 영역 전쟁, 보노보의 성적 평화 유지 전략까지 — 인간은 수많은 무리동물을 관찰하고 길들여왔다. 그러나 그 어떤 종도 인간처럼 복잡한 문명을 만들어낸 적은 없다. 하물며 수십만 년, 아니 수백만 년에 걸쳐 무리동물로서의 적응을 거듭해온 인간이, 스스로가 구축한 문명 속에서 전쟁을 영원히 멈춘다는 것은 얼마나 허황된 꿈인가.
13편에서 이미 다루었듯이, 인간은 진화적 스펙트럼에서 매우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 있다. 벌이나 개미처럼 공동체 행동이 DNA에 완전히 하드코딩되어 있지도 않고, 호랑이나 표범처럼 독립성 종(solitary species)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어중간함이 문제의 핵심이다. 협력과 경쟁, 이기심과 이타심, 충성심과 배신이 불안정하게 공존하는 상태. 이 불안정한 균형이 바로 영역 다툼, 부족 간 충돌, 국가 간 전쟁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벌은 다른 벌집을 “이단”이라는 종교적 명분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한다. 그리고 그 고귀한 명분은, 전쟁을 막아야 할 내적 제동장치를 해체하고 오히려 폭력을 증폭시킨다.
전쟁을 진정으로 “멈추는” 방법은 이론적으로 단 두 가지뿐이다.
첫째, 무리동물로서의 인간이라는 생물학적·심리적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찢어발기고, 전혀 다른 존재로 인위적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공격성, 부족주의, 영토 본능, 지위 경쟁 욕구 등을 유전자 편집, 뇌-기계 인터페이스, 신경정신약리학(Neuropsychopharmacology), 혹은 기계에 인간의 의식을 업로드하는 작업 등을 통해 제거하거나 새롭게 프로그래밍한다. 평화주의적 프로토콜에 따라 완전히 재코드화(Recoding)된 신인류(新人類)가 되는 길, 즉 극단적 트랜스휴머니즘의 방향이다. 그러나 그렇게 탄생한 존재가 과연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는 심각한 의문이다. 우리가 아는 인간성은 바로 그 불완전하고 폭력적인 무리동물적 특성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둘째, 외부에서 인류를 일거에 제거하는 것이다. 대규모 천재지변, 운석 충돌, 혹은 인공적으로 만든 전지구적 재앙. 이것은 해결이 아니라 단순한 제거, 멸종이다. 문제의 근원을 없애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답은 결코 아니다.
그 외의 모든 시도 — 국제연합, 핵무기 억지력, 민주평화론(democratic peace theory), 경제적 상호의존, 글로벌 거버넌스, 인권 선언 등 — 은 전쟁의 빈도와 형태를 바꾸었을 뿐, 전쟁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20세기에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수많은 지역전쟁이 있었고, 21세기 들어서도 우크라이나, 중동, 대만해협, 남중국해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문명은 더 정교해졌지만, 인간 본성의 근본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종교 비판과 깊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종교가 전쟁의 근본 원인이 아니다. 전쟁은 무리동물로서의 인간 본성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다. 종교(그리고 그 세속적 후계자들인 이념)는 그 전쟁의 규모와 잔혹함, 조직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강력한 증폭기 역할을 했을 뿐이다. 십자군 전쟁, 이슬람 정복 전쟁, 종교개혁 전쟁, 심지어 세속 이념으로 포장된 세계대전까지 — 종교가 없었다면 전쟁은 여전히 존재했을 것이다. 다만 그 규모와 광기, 지속 기간이 지금보다 작고 덜 체계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 모순된 존재다. 우로보로스 순환의 한 축이 바로 이 전쟁의 메커니즘이다. 제국이 탄생하고 쇠퇴하는 과정에서, 소국이 서로를 삼키는 과정에서, 전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8. 메스트르가 목격한 제단: 유물론과 신학의 수렴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는 카톨릭 반동주의 사상가이자, 프랑스 혁명의 피비린내 나는 혼란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화: 섭리의 세속적 통치에 관한 담론(Les Soirées de Saint-Pétersbourg)》에서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충격적일 만큼 잔혹한 통찰을 남겼다.
"살아 있는 자연의 광대한 영역 전체에는 노골적인 폭력, 마치 모든 생물을 공통의 파멸로 몰아가는 어떤 선험적 격정이 지배하고 있다. 무생물의 왕국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폭력적 죽음의 섭리는 생명의 경계에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징후는 이미 식물의 세계에서도 느껴진다. 거대한 카탈파나무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식물들이 죽으며 또 얼마나 많은 식물들이 고의로 죽임을 당하는가. 그러나 일단 동물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이 법칙은 가장 끔찍한 형태로 눈앞에 드러난다.
숨겨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만져질 듯 분명한 어떤 폭력의 힘이 각 종(種)마다 다른 동물을 잡아먹도록 예정해 두었다. 그래서 포식성 곤충이 있고, 포식성 파충류가 있으며, 맹금류가 있고, 육식성 어류가 있으며, 포유류 중에도 포식자가 있다. 단 한순간도 어떤 생명이 다른 생명에게 잡아먹히지 않는 때가 없다.
이 셀 수 없이 많은 동물 종들 위에 인간이 놓여 있으며, 그의 파괴적인 손길은 살아 있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먹기 위해 죽이고, 입기 위해 죽인다. 치장하기 위해 죽이고, 공격하기 위해 죽이며, 방어하기 위해서도 죽인다. 그는 배우기 위해 죽이고, 즐기기 위해서도 죽인다. 그는 죽이기 위해 죽인다.
거만하고도 무시무시한 왕인 그는 모든 것을 원하며, 그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어린양의 내장을 찢어 그 창자로 자신의 하프를 울려대게 하고… 늑대로부터는 가장 치명적인 송곳니를 뽑아 자신의 고운 공예품을 다듬는다. 코끼리에게서는 상아를 빼앗아 자기 아이의 장난감을 만든다. 그의 식탁은 시체들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가운데서, 모든 것을 죽이는 그를 누가 죽일 것인가? 그 자신이다. 인간은 인간을 도살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다… 이렇게 이루어졌다… 살아 있는 피조물들의 폭력적 파괴라는 최초의 법칙이.
영원히 피에 잠긴 온 땅은 끝없는 희생이 바쳐지는 거대한 제단일 뿐이다. 거기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끝도, 한도, 멈춤도 없이 바쳐져야만 한다. 만물의 종결에 이르기까지, 악이 소멸되기까지, 죽음이 죽을 때까지."
- 조제프 드 메스트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화: 섭리의 세속적 통치에 관한 담론(Les Soirées de Saint-Pétersbourg ou Entretiens sur le gouvernement temporel de la Providence)》, 1821.
메스트르는 가톨릭 신학, 특히 섭리와 원죄, 희생과 구원의 전통 속에서 이 처절한 결론에 도달했다. 폭력과 희생, 피와 죽음은 그에게 우주의 근본 질서이자 신의 숨겨진 섭리였다.
이 에세이 시리즈는 정반대의 경로, 즉 진화론적 유물론과 냉혹한 생물학적 현실주의에서 출발해 같은 풍경에 도달한다. 신학과 유물론이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동일한 지옥 같은 광경을 목격하는 이 아이러니는, 생각할수록 섬뜩하다.
메스트르에게 이 잔혹함은 신의 의지이자 섭리의 일부였다. 폭력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였다. 필자의 에세이에서 이 잔혹함은 진화의 필연적 산물이다. 무리동물로서 수백만 년 동안 생존경쟁을 거쳐온 인간이, 그리고 그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명이 필연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결과다. 설명의 원인은 완전히 다르지만, 현상 자체에 대한 묘사는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온 땅은 끝없는 희생이 바쳐지는 거대한 제단이라는 점에서.
“인신공양으로서의 역사” — 종교의 이름으로, 이념의 이름으로 수억 명이 제물로 바쳐진 역사 — 역시 이 더 큰 그림의 일부일 뿐이다. 종교적 전쟁, 성전, 십자군, 이단 심판, 혁명 재판, 대숙청, 현대의 테러와 보복 전쟁까지. 인간은 언제나 서로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이댔다. 명분만 바뀔 뿐, 행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종교가 없더라도 인간은 다른 명분으로 같은 일을 계속해왔다. 국가, 민족, 계급, 인종, 이념, 자원, 심지어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현대의 신성한 가치조차도 제단 위에 새로운 제물을 요구한다. 메스트르가 본 제단은 여전히 존재하며, 우리는 그 위에 서 있다.
신학자와 유물론자가 마주친 이 공통의 풍경은, 어떤 위로도 주지 않는다. 다만 냉혹한 직시만을 강요할 뿐이다.
9. 문명의 수렴과 인신공양: 단일 극점을 향한 제단
결국 인류 문명의 수렴진화 그 자체가,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가장 끊임없는 인신공양의 제단이다.
문명이 단일 극점을 향해 수렴해 가는 과정은 결코 평화롭거나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길고 지루하며, 피로 물든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수천 년에 걸쳐 국가들은 찢겨나가고 합쳐지며, 제국들은 일어섰다 쓰러졌다. 그 과정에서 수억 명이 죽었고, 수십억 명의 삶이 강제로 재편되었다. 기술-자본이라는 거대한 엔진이 가속 페달을 밟을 때마다 혁신의 물결은 이전 세대의 삶을 잔인하게 쓸어갔다. 농민은 공장에, 공장 노동자는 실업자로, 실업자는 새로운 플랫폼 경제의 초단기 근로자(gig worker)로, 그리고 다시 AI와 자동화의 여파로 또 다른 불확실성 속으로 내몰린다.
문명권 간의 융합 역시 마찬가지다.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흡수할 때,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언어, 신앙, 관습, 세계관이 서서히, 혹은 폭력적으로 소멸한다. 조선의 성리학 질서가 일본 제국주의와 서구 근대성에 밀려났고(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 내부의 모순으로 무너지고), 아즈텍의 신전은 스페인 기독교와 총포 앞에 무너졌으며, 오늘날에도 전통 이슬람 사회는 글로벌 자본과 디지털 문화의 침투 앞에서 서서히 해체되고 있다. 강한 문명은 약한 문명을 삼키고, 그 삼켜진 것의 잔해 위에 새로운 하이브리드가 피어난다. 이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수많은 인간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 체계다.
인간들은 이 거대한 수렴의 제단 위에서 서로를, 그리고 자신들을 바친다. 칼과 총으로 서로를 죽이고, 경제적 파괴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문화적 동화로 영혼을 말살당한다. 명분은 시대마다 화려하게 바뀐다. 고대에는 신의 이름으로, 중세에는 천명과 성전으로, 근대에는 민족과 진보, 계급투쟁으로, 현대에는 기술-자본의 필연적 진화, 글로벌 거버넌스, 지속가능한 발전,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구조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누군가는 제물이 되고, 누군가는 제사장이 되며, 문명이라는 우로보로스는 자신의 몸을 계속해서 갉아먹는다.
이 순환은 지금까지 어떤 이념도, 어떤 도덕도, 어떤 종교도 막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이 순환의 가장 강력한 연료가 되어왔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을, 이슬람은 아랍 제국을, 공산주의는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자유주의는 미국 중심의 글로벌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었다. 오늘날 워키즘 이념이든, 민족주의든, 기술 낙관주의든,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제단 위에 새로운 제물을 요구한다. 평화를 외치며 전쟁을 준비하고, 인권을 외치며 규제를 통해 생산자를 짓누르고, 진보를 외치며 전통을 파괴한다.
이것은 냉혹한 결론이다. 그러나 정직한 결론이기도 하다.
문명의 수렴은 필연적으로 보이지만, 그 길은 결코 향기로운 꽃밭이 아니라 피와 잔해로 뒤덮인 길이다. 우리는 그 제단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누가 그 위에 올라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제단이 언제까지 작동할 것인지를 직시할 수밖에 없다. 어떤 위대한 서사도, 어떤 도덕적 환상도 이 제단의 작동을 멈추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그 위에서 조금이라도 덜 바쳐지기 위해, 혹은 바쳐지는 비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냉정한 눈으로 현실을 바라볼 뿐이다.
10. 냉혹한 현실주의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종교를 해체하고 문명의 구조를 끝까지 파헤친 뒤에 무엇이 남는가.
낭만주의는 없다. 민족의 영광, 문명의 고귀한 사명, 역사의 필연적 진보, 인류의 밝은 미래 같은 서사들은 모두 우로보로스의 순환을 가속시키고, 제단 위에 더 많은 제물을 바치기 위한 아름다운 거짓말이었을 뿐이다. 허무주의 역시 답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깨달음은 지적 쾌감은 줄 수 있을지언정, 실제로 살아가고 결정해야 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행동 지침도 되지 못한다. 무기력한 방관이나 자조적 체념으로 전락할 뿐이다.
남는 것은 오직 냉혹한 현실주의뿐이다.
문명은 수렴한다 — 그렇다면 우리는 그 수렴의 방향과 속도를, 가능한 한 파국적이지 않은 형태로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기생충 계층은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 그렇다면 그들이 문명의 생산 동력을 갉아먹기 전에, 임계점을 어떻게 감지하고 통제할 것인가. 전쟁은 멈추지 않는다 — 그렇다면 전쟁의 빈도와 규모, 그리고 그로 인한 파괴의 비용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 우로보로스 순환은 반복된다 — 그렇다면 그 순환의 주기를 길게 늘이고, 진폭을 줄여 문명이 스스로를 너무 빨리, 너무 처참하게 먹어치우는 일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유토피아를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떤 영원한 평화도, 완전한 정의도, 최종적인 구원도 약속하지 않는다. 오직 파국을 지연시키고, 희생의 비용을 줄이며, 조금이라도 더 오래,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버티는 것에 관한 실용적이고 냉정한 질문들이다.
이런 현실주의를 실천하려면 도덕적 명분이나 감정적 위로가 아니라, 현실의 구조를 직시하는 냉철한 시선이 필요하다. 기술-자본의 자기강화 루프를 이해하고, 안보 딜레마와 죄수의 딜레마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인정하며, 인간이 무리동물이라는 진화적 조건을 받아들이고, 기생적 전통이 어떻게 국가를 좀비로 만드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 땅이 끝없는 희생의 제단이라는 메스트르의 통찰을 유물론적 시각에서 다시 마주해야 한다.
이 에세이 시리즈 전체는 바로 그 직시의 시도였다.
1편부터 13편까지 종교를 철저히 해부하고, 그 세속화된 변종인 진보주의를 해체했으며, 전통을 진화론적 빅데이터로 재해석하고, 문명의 순환을 우로보로스로 읽어냈다. 우리는 어떤 위안도, 어떤 희망적인 대안도, 어떤 도덕적 우월감도 제공하지 않았다. 다만 구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했다. 종교가 인공 보철물임을, 그 보철물이 상처를 더 키웠음을, 그리고 그 보철물을 제거한 뒤 드러난 문명의 본질이 얼마나 잔혹하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질기고 집요하게 생존해 왔는지를 직시하는 것.
이 시리즈가 끝나는 지금, 독자에게 남겨지는 것은 편안함이 아니라 불편함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 최소한의 정직함은 있다.
온 땅이 제단이라면 — 적어도 우리가 무엇 위에 서 있는지, 무엇이 우리를 제물로 요구하는지, 그리고 그 제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고 서 있어야 한다. 환상에 취하지도, 절망에 빠지지도 않은 채, 차갑게 눈을 뜨고 현실을 마주한 사람만이, 이 제단 위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가진다.
이것이 종교라는 이름의 바이러스에 대한, 그리고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좌우익 종교인들에게 보내는 불친절한 공개서한의 마지막 말이다.
<完>
- 참고 문헌 -
조제프 드 메스트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화: 섭리의 세속적 통치에 관한 담론(Les Soirées de Saint-Pétersbourg)》 — 폭력과 희생이 우주의 질서에 내재한다는 반동주의 사상가의 저서. 진화론적 유물론과 다른 경로로 같은 풍경에 도달한 텍스트.
Nick Land, "The Dark Enlightenment" 시리즈 — 가속주의적 관점에서 기술-자본이 정치적 기생충 계층을 도태시킨다는 논점의 글.
Theodore Kaczynski, "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 (Unabomber Manifesto)" — 기술-자본의 발전이 인간 자율성을 파괴한다는 반기술주의적 논점이 담긴 저서. 가속주의의 대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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