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세상의 고통에 대하여

세상의 고통에 대하여


고통이 삶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의 존재는 그 방향을 완전히 잃고 만다.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며 생존에 필수적인 욕구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 엄청난 고통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우연의 산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생각도 없다. 개별적인 불운은 겪을 때마다 마치 예외적인 사건처럼 다가오지만, 사실 불운은 삶의 보편적인 법칙에 가깝다.


악(Evil)을 단순히 결핍이나 부정적인 상태로 규정하는 수많은 철학 체계의 주장보다 더 황당한 논리는 알지 못한다. 악은 오히려 실재하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분명히 드러내는 긍정적인 성질을 띤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억지를 정당화하는 데 유독 집착했는데, 그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뻔하고 비루한 궤변을 늘어놓을 뿐이다. 정작 부정적인 상태에 머무는 것은 '선'이다. 다시 말해, 행복과 만족은 언제나 결핍된 욕망이 채워지거나 고통스러운 상태가 끝나는 순간에만 비로소 체감되는 법이다.


기대했던 즐거움은 막상 겪어보면 신통치 않고, 도리어 고통은 예상보다 훨씬 처절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흔히 이 세상에는 고통보다 즐거움이 더 많다거나, 적어도 양자 사이에 균형이 잡혀 있다고들 말한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두 동물의 감정을 잠시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쪽은 생존의 희열을 느끼고 있을지 모르나, 다른 한쪽은 존재가 해체되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다.


불운이나 고난에 처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위안은 나보다 더 가혹한 처지에 놓인 타인을 떠올리는 일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허용된 위안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류 전체의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인가. 타인의 더 큰 불행을 거울삼아야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마치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양과 같다. 도살업자의 매서운 눈길 아래서 차례로 먹잇감이 되길 기다리면서도, 당장 내 차례가 아니라는 사실에 천진하게 유희를 즐긴다. 질병과 빈곤, 불의의 사고나 정신의 붕괴 같은 가혹한 운명이 바로 곁에 도사리고 있음에도, 안락한 날들 속에서 우리는 다가올 재앙을 까맣게 잊고 살아간다.


존재 자체가 고문으로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세우는 시간의 압박에 있다. 시간은 채찍을 든 감독관처럼 잠시도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뒤를 쫓는다. 만약 시간이 그 가혹한 손길을 멈추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권태라는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을 때뿐이다.


하지만 불운에도 나름의 쓰임은 있다. 기압이 사라지면 우리의 신체가 파열되고 마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서 결핍과 고난, 역경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인간은 오만에 부풀어 터져버리거나 걷잡을 수 없는 어리석음, 나아가 광기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풀리기만 한다면 말이다. 결국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근심과 고통, 번거로움이 늘 필요한 법이다. 평형수를 채우지 않은 배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곧게 나아갈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거의 모든 이에게 노동과 걱정, 수고와 고난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숙명이다. 만약 모든 소망이 생겨나자마자 즉시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삶을 채우며, 그 많은 시간을 대체 어디에 쓰겠는가? 세상이 온통 사치와 안락으로 가득한 낙원이고, 젖과 꿀이 흐르며, 누구나 원하는 상대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즉시 얻을 수 있는 곳이라 가정해 보자. 인간은 권태에 지쳐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과 학살, 살육을 일삼으며 자연이 준 것보다 훨씬 잔혹한 고통을 스스로에게 가할 것이 분명하다.


어린 시절, 앞으로 펼쳐질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은 막이 오르기 전 극장에 앉아 들뜬 마음으로 연극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닮아 있다.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은 어쩌면 축복이다. 만약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다면, 아이들은 사형이 아닌 '삶'이라는 형벌을 선고받고도 그 판결의 의미조차 모른 채 앉아 있는 무고한 죄수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누구나 노년에 이르기를 갈망한다. 노년이란 결국 "오늘은 나쁘고 내일은 더 나쁠 것이며, 마침내 최악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계속될 삶"의 상태를 의미할 뿐인데도 말이다.


태양이 궤적을 그리며 비추는 이 세상에 얼마나 거대한 비극과 신음, 온갖 형상의 고통이 도사리고 있는지 상상해 보라. 그 참상을 온전히 마주한다면, 차라리 지구가 달처럼 생명이라는 현상을 싹 틔우지 못하는 무생물의 결정체로 남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삶이란 존재하지 않음의 축복된 평온을 방해하는, 아무런 이득 없는 에피소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설령 지금까지의 삶이 제법 순탄했다 하더라도, 오래 살면 살수록 인생은 결국 실망스러운 것, 아니 하나의 거대한 사기극임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될 뿐이다.


어린 시절의 친구가 평생을 떨어져 살다 노인이 되어 다시 만났다고 가정해 보자. 서로를 마주한 그들이 느낄 지배적인 감정은 삶 전체에 대한 극심한 허무일 것이다. 장밋빛 새벽 안개 속에서 온갖 찬란한 약속을 늘어놓았던 젊은 날의 기대와 달리, 삶이 실제로 내어준 결과물은 너무나도 초라하기 때문이다. 이 감정은 굳이 말로 꺼낼 필요조차 없을 만큼 강렬해서, 두 사람 사이의 모든 대화에 묵직한 기저음처럼 깔리게 된다.


두세 세대가 교체되는 것을 지켜볼 만큼 장수하는 사람은, 장터의 마술 공연장에 앉아 똑같은 눈속임을 반복해서 관람하는 관객과 같다. 마술이란 본래 단 한 번만 보라고 고안된 것이기에, 참신함이 사라지고 속임수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마력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타인의 처지를 진심으로 부러워할 만한 이는 거의 없으나, 그 운명을 함께 슬퍼해 주어야 할 가련한 영혼은 셀 수 없이 많다.


삶은 완수해야 할 과업과 같다. 죽은 이를 두고 '소임을 다했다(defunctus est)'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그 말은 한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마침내 끝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아이들이 순수한 이성의 작용만으로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면, 인류라는 종이 과연 존속할 수 있을까. 다가올 세대를 향한 연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들에게 존재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기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배려를 베풀지 않겠는가. 적어도 냉혹하게 그 짐을 떠넘기는 일만큼은 주저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내가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나의 철학이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신이 만든 세상은 모두 선하다는 근거 없는 확신 속에 안주하고 싶어 하니까. 그런 이들이라면 철학자를 괴롭히지 말고 사제를 찾아가는 편이 낫다. 자신들이 배운 교리에 맞추어 우리의 학설을 뜯어고치라고 요구하지 마라. 그런 비굴한 짓은 철학의 탈을 쓴 사기꾼들이나 하는 일이다. 그들에게 가면 당신이 원하는 입맛대로 어떤 교리든 만들어줄 것이다. 대학 교수들 역시 낙관론을 전파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겠지만, 사실 그들의 빈약한 이론을 무너뜨리는 것만큼 쉽고 즐거운 일도 없다.


앞서 강조했듯, 모든 복지와 만족감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성질을 띤다. 즉, 그것은 존재의 실체적 요소인 고통으로부터 잠시 해방된 상태일 뿐이다. 따라서 어떤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그가 누린 즐거움의 양이 아니라, 고통과 실재하는 악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웠는가로 측정해야 마땅하다. 이 관점이 옳다면, 하등 동물이 인간보다 훨씬 행복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자.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아무리 다채로운 형상을 띠고 우리를 유혹하거나 겁주더라도, 그 기저를 이루는 실체는 결국 육체적인 쾌락과 고통으로 귀결된다. 이 토대는 생각보다 매우 좁다. 건강, 음식, 추위와 비바람을 피할 안식처, 그리고 성적 본능의 충족이거나 혹은 그것들의 부재가 전부다. 따라서 순수한 육체적 즐거움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 다만 인간은 고도로 발달한 신경계 덕분에 온갖 즐거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 예민함이 고통을 느낄 때도 똑같이 작용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인간의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격정은 짐승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며, 감정의 깊이와 격렬함 또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요란한 감정 소모의 결과가 고작 건강이나 음식, 옷가지 따위를 얻는 데 머문다는 점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이토록 격정적인 삶을 만드는 주범은 현재 곁에 없는 것, 즉 미래에 대한 생각이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미래에 투영된 생각에 지배당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짐승은 결코 알지 못하는 깊은 근심과 희망, 공포의 진짜 근원이다. 인간은 성찰하고 기억하며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을 통해, 즐거움과 슬픔을 압축하고 저장하는 일종의 기계를 소유하게 된 셈이다. 반면 짐승에게는 그런 기제가 없다. 설령 수없이 겪어온 고통이라 할지라도, 고통이 닥치는 그 순간 짐승은 마치 그것을 처음 겪는 것처럼 고스란히 당할 뿐이다. 짐승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낱낱이 합산하여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짐승이 그토록 태연하고 평온한 기질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반면 인간에게는 성찰이라는 기제가 개입하며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짐승과 공유하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단순한 재료를 가지고도, 인간은 행복과 불행에 대한 민감도를 극단적으로 증폭시킨다. 그 결과 인간은 찰나의 환희에 도취되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희열을 맛보기도 하지만, 때로는 절망의 심연에 빠져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분석을 한 걸음 더 밀고 나아가면, 인간이 즐거움을 늘리기 위해 본래의 욕구들을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들고 스스로 압박을 가해 왔음을 알게 된다. 사실 태초의 욕구들은 짐승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충족시키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온갖 형태의 사치를 만들어냈다. 미식에 집착하고, 담배와 아편, 술에 탐닉하며, 화려한 옷을 짓고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믿는 수천 가지의 자잘한 물건들을 발명해 낸 것이다.


이 모든 것 너머에는 인간이 성찰의 능력을 발휘하여 스스로 만들어낸, 아주 독특하고 개별적인 즐거움과 고통의 원천이 존재한다. 이것은 그 실제 가치에 비추어 볼 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니 어쩌면 삶의 다른 모든 이해관계를 합친 것보다 더 완강하게 인간을 사로잡는다. 바로 야망과 명예, 그리고 수치심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쉽게 말해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집착이다. 이는 때로 기괴할 만큼 다양한 형상을 띠며, 육체적 쾌락이나 고통에 뿌리를 두지 않은 인간 활동의 거의 모든 목적이 된다.


물론 인간에게는 짐승과 공유하는 즐거움 외에도 정신적 유희라는 영역이 있다. 여기에는 아주 사소한 농담이나 가벼운 대화부터 최고 수준의 지적 성취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층위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통의 또 다른 얼굴인 '권태'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권태는 자연 상태의 짐승은 결코 알지 못하는 고통의 형상이다. 기껏해야 가축화된 영리한 동물들에게서나 그 흔적을 겨우 찾아볼 수 있을 뿐이지만, 인간에게 권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혹한 재앙이 되었다. 머릿속을 채우기보다 지갑을 채우는 일에만 골몰하는 가련한 무리들은 이 권태라는 형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에게 부(富)는 오히려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비참함'으로 귀결되는 징벌이 된다. 그들은 이 공허를 피하려 사방팔방으로 여행을 떠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구걸하는 거지처럼 그곳에 무슨 즐길 거리가 있는지부터 묻는다. 실로 인간의 삶이란 결핍과 권태라는 두 극단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성적인 관계에서도 인간은 단 한 사람만을 집요하게 선택하도록 유도되는 특이한 굴레에 얽매여 있다. 때때로 이 감정은 격정적인 사랑으로 치닫기도 하는데, 냉정히 말해 이는 아주 짧은 즐거움의 대가로 기나긴 고통을 지불하는 일에 가깝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그 좁은 토대 위에, 단지 '생각'이 더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방대하고 거창한 행복과 불행의 성채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인간은 격정의 폭풍과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며 살아간다. 그가 겪어온 고통의 흔적은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이 되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모든 곡절을 겪은 뒤 마주하는 진실은 허망하다. 인간이 그토록 처절하게 투쟁하며 얻으려 했던 것들은, 결국 짐승이 훨씬 적은 고통과 열정만으로도 이미 누리고 있는 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은 삶의 즐거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의 부피를 키우는 데 일조한다. 특히 인간에게 죽음이 실재하는 공포로 다가온다는 사실은 생의 비극을 더욱 심화시킨다. 짐승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그저 피할 뿐이지만, 인간은 죽음이라는 전망을 늘 눈앞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비록 야생의 짐승 중 자연사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종을 번식시킬 만큼만 살다가 다른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는 운명일지라도,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인간보다 우위에 있다. 반면 인간은 이른바 자연사를 규칙으로 삼으려 애쓰지만, 실상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제 수명을 다 누리는 경우가 드물다. 부자연스러운 생활 방식, 과도한 노동, 그리고 감정의 소모가 인종의 퇴화를 부추겨 결국 목표했던 생의 끝자락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짐승은 인간보다 단순히 존재하는 상태 그 자체에 훨씬 더 자족할 줄 안다. 식물에 이르면 그 만족은 완전한 수준에 도달한다. 인간 역시 지적으로 둔감하고 무뎌질수록 존재 자체에서 오는 만족감을 더 크게 느끼기 마련이다. 짐승의 삶은 인간에 비해 슬픔이 적은 대신 기쁨 또한 적다. 이는 근심과 불안이라는 형벌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희망'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짐승은 상상력의 산물인 행복한 미래에 대한 지적 예견이나 판타지가 주는 활기찬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우리에게 가장 크고 값진 기쁨을 주는 이 원천들을 짐승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짐승이 근심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같은 맥락에서 희망 또한 부재한다. 짐승의 의식은 오직 현재의 순간, 즉 눈앞에 실제로 보이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짐승은 현재의 충동이 구체화된 존재이며, 따라서 그 본성에 깃든 미약한 공포나 희망도 오직 당장 손에 닿는 대상과 충동에 관련해서만 발생할 뿐이다. 반면 인간의 시선은 자신의 생 전체를 아우르며 과거와 미래의 저 먼 곳까지 뻗어 나간다.


이 지점에서 짐승은 인간보다 훨씬 지혜로운 면모를 보인다. 현재의 순간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즐길 줄 안다는 점이 그렇다. 그들이 누리는 마음의 평정은, 생각과 근심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우리를 종종 부끄럽게 만든다. 사실 앞서 언급한 희망과 기대라는 즐거움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어떤 특정한 만족을 고대하며 미리 맛보는 기쁨은, 나중에 실제로 얻게 될 즐거움을 가불해 쓰는 것과 같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막상 그 일이 닥쳤을 때 체감하는 만족감은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다. 반면 짐승의 즐거움은 미리 앞당겨 쓰는 법이 없기에 어떤 공제도 당하지 않는다. 덕분에 찰나의 쾌락은 온전하고 손상되지 않은 채 그들에게 전달된다. 고통 역시 마찬가지다. 짐승은 오직 고통이 가진 본연의 무게만큼만 아파하지만, 인간은 고통이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 무게를 열 배는 더 무겁게 짊어지곤 한다.


짐승이 현재의 순간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이 특성은 우리가 반려동물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들은 '현재' 그 자체가 형상화된 존재이며, 고뇌와 번거로움이 없는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생각과 집착에 빠진 우리가 평소 무심코 지나치는 그 시간의 가치를 말이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냉혹한 인간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짐승의 이 성질을 악용하여 그들에게 오직 '목숨만 붙어 있는 삶'을 강요한다. 지구 절반을 가로질러 날아다녀야 할 새를 단 한 자 남짓한 공간에 가두고, 자유를 향한 갈망과 울음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게 만든다. 새장 속의 새는 즐거워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개를 어떻게 학대하는지, 그 영리한 동물을 쇠사슬로 묶어두는 모습을 볼 때면 짐승을 향한 깊은 연민과 그 주인에 대한 불타는 분노를 참기 어렵다.


관점을 아주 높여서 본다면 인류가 겪는 고통을 정당화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정당화는 동물에게는 통용될 수 없다. 동물의 고통은 상당 부분 인간에 의해 초래되지만, 설령 인간의 개입이 없더라도 그 자체로 이미 가혹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목적으로 이토록 처절한 고문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동물에게는 의지를 잠시 멈추고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동물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이것뿐이다. 현상 세계의 근저에 흐르는 '삶을 향한 의지'가 스스로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잡아먹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의지는 현상의 위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 자신의 존재를 이어간다. 다만 앞서 밝혔듯 동물이 느끼는 고통의 깊이는 인간보다는 덜하다. 그들의 운명에 대해 이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는 것은 가설의 영역이거나 신화적인 성격에 가까울 것이기에, 판단은 독자의 사색에 맡기고자 한다.


힌두교의 브라만은 일종의 타락이나 실수로 세상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속죄하기 위해, 스스로 구원을 얻을 때까지 이 세상에 머물러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만물의 기원에 관한 설명치고는 제법 훌륭하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세상은 열반의 그 복된 고요함 속에 원인 모를 동요가 일어나면서 생겨났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평온이 일종의 숙명적인 변화를 맞이하며 존재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의 밑바탕에는 도덕적 함의가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현대 과학이 태양의 기원을 정체 모를 원시 성운의 소용돌이에서 찾듯, 물리적인 비유를 빌려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후 세상은 거듭된 도덕적 과오로 인해 점차 나빠졌고—이는 물리적 질서에서도 마찬가지다—결국 오늘날처럼 우울한 형색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 또한 탁월한 통찰이다. 그리스인들은 세계와 신들을 불가해한 필연의 산물로 보았다. 이 역시 더 나은 답을 얻기 전까지는 수긍할 만한 설명이다. 선의 신 오르무즈드와 악의 신 아흐리만이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다는 설정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여호와 같은 신이 순전히 변덕에 따라, 혹은 그 일이 즐겁다는 이유로 이토록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창조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게다가 자신의 창조물을 보며 박수를 치고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더라"고 선언했다니,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이다. 세상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 유대교는 문명 국가의 그 어떤 종교적 교리보다도 열등하다. 영혼의 불멸에 관한 믿음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종교라는 점도 이러한 수준과 궤를 같이한다.


설령 이 세상이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주장이 옳다 해도, 그것이 신의 창조를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신은 단순히 세계를 만든 존재가 아니라, '가능성' 그 자체를 설계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은 마땅히 더 나은 상태가 가능하도록 그 가능성의 조건부터 제대로 설정했어야 했다.


이 세상이 전지전능하고 지극히 선한 존재의 성공적인 피조물이라는 믿음을 가로막는 두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세상 도처에 범람하는 고통이며, 둘째는 그 창조의 정점이라는 인간의 명백한 불완전함이다. 인간은 마땅히 도달했어야 할 모습에 비하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희화화된 존재에 불과하다. 이런 참담한 현실을 신성한 창조의 결과와 결부시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들은 내가 앞서 주장한 바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즉, 이 세계를 우리 자신의 과오가 빚어낸 결과물로,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무엇으로 바라보게 하는 근거가 된다. 만약 전능한 창조주라는 가설을 유지한다면 이 비극들은 창조주를 향한 통렬한 비난이자 조롱거리가 되겠지만, 세상을 우리 과오의 산물로 본다면 이는 우리 자신의 본성과 의지에 대한 고발이 되어 겸허라는 교훈을 안겨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마치 방탕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처럼, 원죄의 짐을 짊어진 채 세상에 나왔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존재가 이토록 비참하고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는 이유는, 살아있는 동안 그 죄를 끊임없이 속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처절한 고통이 곧 세상의 깊은 죄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진리는 없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경험적 영역에서 드러나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그 이면에 자리한 형이상학적 의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수긍할 수 있는 대목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비록 우화의 형식을 빌리고는 있으나, 내 눈에는 그것만이 그 책에 담긴 유일한 형이상학적 진실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를 설명함에 있어, 어떤 잘못된 발걸음이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과정으로 보는 것보다 더 적절한 해석은 없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비관주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클라우디우스의 깊이 있는 논문, 《너로 말미암아 땅은 저주를 받고》를 사색적인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스의 윤리와 인도의 윤리 사이에는 극명한 대비가 존재한다. 플라톤이라는 예외를 제외한다면, 그리스 윤리의 목적은 인간이 어떻게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다. 반면 인도의 윤리는 삶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구원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는 상카 카리카(Sankhya Karika)의 첫머리에 직설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그리스적 관점과 기독교적 관점의 대비다. 피렌체 미술관에 소장된 고대 석관의 부조는 이러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정교한 조각 속에는 정식 청혼부터 혼인의 신 히멘의 횃불이 행복한 신혼부부의 귀갓길을 비추는 저녁에 이르기까지, 고대 혼례의 전 과정이 담겨 있다. 이를 슬픔을 상징하는 검은 천으로 덮고 그 위에 십자가 형상을 세운 기독교의 관과 비교해 보라. 죽음 앞에서 위안을 찾는 이 두 가지 방식에는 실로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두 관점은 서로 정반대 지점에 서 있지만, 각자의 논리에 충실하다. 그리스적 관점은 '삶을 향한 의지'의 긍정을 향한다. 비록 생명의 형상은 찰나에 변할지언정 생명 그 자체는 영원하리라는 확신이다. 반면 고통과 죽음의 상징을 내세운 기독교적 관점은 삶을 향한 의지의 부정을 가리킨다. 죽음과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는 것이다. 삶을 긍정할 것인가, 혹은 부정할 것인가라는 이 궁극적인 물음 앞에서, 결국 최후의 진리를 쥐고 있는 쪽은 기독교다.


교회의 전통적인 견해에 따를 때 신약성경이 구약성경과 이루는 대비는, 나의 윤리 체계가 유럽의 근대 도덕 철학에 대해 가지는 관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구약은 인간을 율법의 지배 아래 두지만, 그곳에 구원은 없다. 반면 신약은 율법의 한계를 선언하며 인간을 그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리고 그 자리에 믿음과 이웃 사랑, 온전한 자기희생을 통해 도달하는 '은총의 나라'를 세운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개신교도나 합리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아무리 왜곡할지라도, 신약의 본질적인 정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금욕주의에 있다.


금욕주의란 곧 삶을 향한 의지를 부정하는 일이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율법의 지배에서 믿음의 세계로, 행위에 의한 정당화에서 중보자를 통한 구원으로, 그리고 죄와 죽음의 영역에서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 실질적인 의미를 따져볼 때 결국 도덕적 미덕의 차원을 넘어 '삶에 대한 의지의 부정'으로 이행함을 뜻한다. 나의 철학은 정의와 인류애가 근거하는 물리적 토대를 밝히고, 이러한 미덕들이 완벽하게 실현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될 종착지를 가리킨다. 동시에 인간은 마땅히 세상을 등져야 하며, 의지의 부정이 곧 구원의 길임을 정직하게 고백한다.


따라서 나의 철학은 신약의 정신과 진정으로 맞닿아 있다. 반면 다른 모든 철학 체계는 구약의 정신, 즉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유대교적 전제주의 신론의 틀 속에 갇혀 있다.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겉핥기식 견해에 머무는 이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런 의미에서 나의 학설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진정한 기독교 철학이라 불릴 만하다.


삶을 이끌어줄 안전한 나침반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모든 의구심을 떨쳐버리고 싶다면, 이 세상을 하나의 수용소나 유배지, 혹은 고대 철학자들이 일컬었던 '노역소'로 간주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초기 기독교 교부 중 한 명인 오리게네스는 찬사받아 마땅한 용기를 발휘하여 이미 이러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으며, 이는 삶에 관한 여러 객관적 이론들로도 충분히 정당화된다. 비단 나의 철학뿐만 아니라 브라만교와 불교에 담긴 시대를 초월한 지혜, 엠페도클레스나 피타고라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격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키케로 역시 고대의 현자들이 '우리는 전생에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가르쳤음을 언급했는데, 이 교리는 당시 밀교의 입문 의식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동시대인들이 그를 논리로 꺾는 대신 화형대에 세우는 쉬운 길을 택했던 바니니 또한 이 점을 매우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는 "인간이 온갖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건대, 만약 기독교 신앙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악령들이 인간의 형상을 빌려 태어나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고 있는 것이라 단언하고 싶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역시 우리의 존재를 죄와 과오의 결과로 간주한다.


이러한 인생관에 익숙해진다면 삶에 대한 기대치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인생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불쾌한 사건들, 고통과 걱정, 비참함을 더 이상 이상하거나 예외적인 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재의 형벌을 치러나가는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유배지가 갖는 고통 중 하나는 그곳을 채우고 있는 구성원들과 부대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독자가 더 나은 부류와 어울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을 견뎌내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 굳이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평범함을 넘어서는 고결한 영혼이나 천재성을 지닌 이라면, 자신이 마치 파렴치한 잡범들과 함께 노를 젓는 형벌을 선고받은 고귀한 정치범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는 앞선 이들이 그러했듯,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내면의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인생관을 갖게 되면 대다수 인간이 지닌 이른바 '불완전함', 즉 도덕적·지적 결함이나 그로 인해 빚어진 비천한 인상 등을 보더라도 분노는커녕 놀라지조차 않게 된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그리고 우리 주변의 인간들이란 죄악 속에 잉태되고 태어나 그 죄를 씻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끊임없이 되새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의 참뜻이다.


그러니 모든 이를 용서하라! 타인이 어떤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든, 그들의 결점이나 악덕이 무엇이든 간에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타인에게서 발견되는 그 잘못들이 결국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과 악덕의 투영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인류 공통의 결함이며, 우리 역시 그 허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공유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그토록 분개하며 비난하는 타인의 잘못조차, 사실은 단지 우리 자신에게서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한 결점들은 표면 아래 숨어 있을 뿐 우리 본성의 심연에 엄연히 존재하며,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타인에게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고개를 들 것이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있고 다른 이에게는 없는 결함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떤 경우 악한 성질의 총합이 유독 거대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 개개인의 개성 차이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결국 세계와 인간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무엇이라는 확신은, 우리를 서로에 대한 관용으로 이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상대를 부르는 적절한 호칭은 '귀하'나 '선생'이 아니라 '고난을 함께하는 동료(my fellow-sufferer)', 즉 '고통의 동반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것이 엄연한 사실에 부합하며, 타인을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또한 이는 삶에서 무엇보다 절실한 것, 즉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고 그렇기에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관용과 인내, 배려, 그리고 이웃 사랑을 일깨워 준다.


Schopenhauer, Arthur. “On the Sufferings of the World.” Studies in Pessimism, translated by Thomas Bailey Saunders, George Allen & Company, 1913, pp.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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