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스 랄리베르테, 이데올로기의 개념
서론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는 곧 가톨릭의 역사다.
원한다면 이를 신학적 명제로 받아들여도 좋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장은 다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역사에는 본래부터 존재하는 거대한 서사 따위는 없다. 모든 서사는 외부에서 부여된 것일 뿐이다. 만약 인류 역사에 그와 같은 거대 서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직 신만이 집필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가 곧 가톨릭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하나의 서사를 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뚜렷한 주제가 있고 주인공과 악당이 등장하며, 특정 미덕은 찬양받고 특정 악덕은 비난받는다. 이 서사는 특정한 렌즈를 통해 투영된 결과다. 이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심지어 일종의 음모론처럼 보일 수도 있는 역사관이다. 나는 독자들에게 이 렌즈, 즉 이데올로기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서술하는 역사가 어떻게 '신반동주의', 다른 말로 '암흑 계몽주의'라 불리는 이데올로기와 지적 사건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목격하게 될 것이다.
내 어조를 보고 지레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내 표현이 지나치게 타협적이고 상대주의적이며, 심지어 포스트모던하게 보일 수도 있다.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주관성에 몸을 맡기는 것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데올로기란 주체가 내면화하여 일체화되는 몸이 아니라, 그저 필요에 따라 걸치는 의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반동주의의 관점을 이해하려면 지적인 모험을 함께 떠나야 하며, 스스로 인지조차 못 했던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전제들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들이 그저 하나의 가설이나 추측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을 뿐이다.
이 글의 성격은 논문과 선언문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다. 신반동주의에 포함된 지적 흐름을 상당 부분 요약하고는 있지만, 이를 단순히 집대성한 글은 아니다. 신반동주의를 옹호하는 여러 논거를 담고 있으면서도, 오직 변호만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또한 신반동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분석 도구를 동원하지만, 단순한 해설서에 그치지도 않는다. 나는 나만의 관점으로 이 에세이의 전체적인 구조를 이끌어 가고자 한다. 여기서 다루는 아이디어들이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반동주의적 접근법을 체계화하고, 새로운 토론의 흐름을 만들어 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경제학부터 진화론, 양상 논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추론 방식을 아낌없이 활용했다.
미리 경고해 두지만, 이 글은 결코 입문서가 아니다. 신반동주의 내부에서 전개되는 여러 관점을 훑어보고는 있으나, 초심자를 입문시킬 목적으로 쓴 글은 아니다. 멘시우스 몰드버그 같은 사상가나 가부장주의(patriarchalism) 같은 개념에 이미 익숙한 이들을 위한 글이다.
이데올로기의 개념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말은 보통 자신의 신념 체계나 사회 정치적 태도를 설명할 때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신반동주의를 설명하고 옹호하는 방식은 그것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다루는 데서 출발한다. 다른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특정 이데올로기의 관점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에 있다.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저 자신의 신념이 현재 사회적으로 용인된 전통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게다가 이런 이들일수록 다루기가 더 쉽다. 자신의 삶을 유지해 주는 '고귀한 거짓말'에 철저히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전에 대한 자신의 면역력을 과신하며, 바로 그 때문에 완벽한 표적이 된다. 사기를 치려 할 때 사기를 쉽게 알아챌 수 있다고 자만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중 누구를 고르겠는가?
진화는 지독하리만치 영악하다. 오직 비용 효율성만을 기준으로 삼는, 세상에서 가장 계산적인 경영자와도 같다. 종이든, 직원이든, 아이디어든 다른 경쟁 상대가 주변 환경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순간 모두 도태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내가 시도하려는 이데올로기 분석 역시 사회적 환경 속에 자리 잡은 특정 '아이디어 종(種)'을 확립하는 데 바탕을 둔다. 이는 창시자조차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을 모호한 형태일 수 있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그 아이디어 종의 형태학적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비로소 밝혀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이데올로기의 형태학적·계통학적 변화에 진화의 원리를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나의 핵심 주장은, 여러 사회적 환경(사회, 엘리트층, 정부)이 채택해 온 개별 교리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 원리가 바로 이데올로기의 핵심부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21세기 진보주의자들이 내거는 목표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20세기의 선배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관찰이다. 하지만 두 세대 사이에는 모호하면서도 분명한 연속성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정치적 스펙트럼의 '좌파'로 분류한다. 비록 좌파라는 말이 정치적 관점을 온전히 담아내기엔 부족할지라도, 어떤 본질적인 정서를 포착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목표들의 이면에는, 특정 시점에 어떤 정책이 '진보적'이고 어떤 정책이 그렇지 않은지를 규정하는 거의 무의식적인 가치관이 숨어 있다. 구체적인 입장 하나하나가 본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예컨대 어떤 강령 하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고 해서 다른 강령까지 바꿀 필요는 없다. 실제로 그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이 고수하는 몇몇 입장은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동일한 핵심 가치를 공유한다는 유대감으로 묶여 있다. 이들은 수단에는 동의하지 않을지언정 목표에는 뜻을 같이한다. 비록 그 목표가 정확히 무엇인지 스스로 말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만약 우리가 그 기저에 깔린 신념을 알아낼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집단들이 왜 같은 정치 조직 안에서 공존하는지 그 경향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같은 종(種)에 속한 구성원들과 같다. 그 종 안에서 뚜렷이 구분되는 하위 집단들을 추적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서로 번식할 수 있는 관계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특정 이데올로기는 그 기저에 깔린 숨은 동기, 즉 일종의 잠재적 열망을 통해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숨은 동기란 가려져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나 존재를 뜻한다. 구체적인 작동 원리를 알 수 없는 현상, 즉 블랙박스 기술과도 같다. 버튼을 누르면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사람들은 그 세부 매커니즘을 모르고 알 필요도 없다.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내부 기제를 알아야 하는 유일한 사람은 기계의 구체적인 구조와 원래 목적을 모두 파악해야 하는 수리공뿐이다. 여기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힌트가 있다.
현대 자유주의, 현대 보수주의, 자유지상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페미니즘 등 서로 대비되는 일련의 관점들은 저마다 완전히 다른 대상과 목적을 지닌 별개의 사상적 도구들이다. 심지어 서로 대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현대 정치철학이라는 거대한 몸체 아래에서 공존하고 있다. 나는 이 사상들이 비록 서로 엮이기를 거부할지라도 결국 같은 종(種)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오늘날 이 모든 사상을 움직이는 숨은 동기, 즉 이데올로기를 포착할 때 비로소 그 공존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 브라이스 랄리베르테(Bryce Laliberte), 『신반동주의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 사회·역사적 진화, 그리고 문명의 현상(What is Neoreaction: Ideology, Social-Historical Evolution, and the Phenomena of Civilization)』, 개인 출판, 2013,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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