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층 냉정하고 불친절한 코스미시즘(cosmicism)
한층 냉정하고 불친절한 코스미시즘(cosmicism)
위선이 왜 나쁜가.
이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시 멈춘다. 그리고 이내 "당연히 나쁘다"라고 답한다. 그 당연함 안에 이미 전제가 묻혀 있다. 어딘가에 도덕의 절대 근거가 있고, 그 근거에 비추어 위선은 나쁘다는 것. 신이든, 이성이든, 보편 인권이든 그 이름은 달라도 구조는 같다. 위에서 내려오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인간 행동을 평가한다.
나는 그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위선이 나쁜 이유는 간단하다. 공동체의 장기적 안정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착취가 문제인 이유도 같다. 인센티브 구조를 망가뜨리고, 협력의 기반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도덕처럼 보이는 대부분의 판단은 사실 효율성에 대한 판단이다. 포장이 다를 뿐이다.
이것을 "도덕이 아니라 효율"이라고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틀렸다. 그 구분 자체가 도덕의 초월적 근거를 전제할 때만 의미가 있다. 도덕의 근거가 공동체 구조의 유지와 적응이라면, 효율과 도덕은 애초에 같은 층위에서 작동한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 협력이 일어나는 이유는 인간이 이기심을 극복해서가 아니다. 협력이 이기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집단이 유지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협력의 이익이 배신의 이익을 일정 기간 동안 초과하기 때문이다. 그 균형이 깨지면 집단은 흔들린다.
여기서 종교가 등장한다.
종교는 이 이기심을 숨기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활용한다. 보상 구조를 내세(來世)로 연장하고, 공동체 규범을 신의 명령으로 코딩하고, 이탈자에게 사회적 비용을 부과한다. 효율적인 것처럼 보이는 설계다. 수천 년을 살아남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 설계가 오작동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가.
신의 뜻으로 포장된 무상 노동 요구. 달란트를 부여받았으니 결과로 보답하라는 논리. 자발성이라는 언어로 감춰진 열정 페이(Passion Tax). 이것들은 신학의 왜곡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 제도라는 장치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생산하는 부산물이다.
달란트 비유를 제대로 읽어보면 오히려 흥미롭다. 주인은 종(從)에게 재능을 맡기고 수익을 요구한다. 결과에 책임을 묻는 구조다. 공짜 노동을 명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현실의 종교는 이 비유를 거꾸로 뒤집어, 달란트를 부여받았으니 무상 혹은 거의 무상에 가깝게 봉사하라는 논리로 쓴다. 신학적 왜곡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보다 더 단순하게 본다. 권력을 가진 쪽이 언어를 자기 쪽에 유리하게 재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종교만의 현상이 아니다. 모든 이념 체계가 제도화되면 반복하는 패턴이다.
착취가 공동체를 약화시킨다는 주장에 반박이 나온다. 로마 제국은 노예제로 수백 년을 유지했다. 효율적이었다. 그렇다면 그 착취는 나쁜 것이 아니었는가.
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이 답변이 불편한 이유는 직관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노예제가 나쁘다는 것을 '느낀다'. 그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 묻지 않은 채, 느낌을 근거로 논증을 종결한다. 그런데 그 직관 자체가 어디서 오는가. 특정 문화권의 도덕 감각이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보편 진리와 같지 않다.
가난한 농민보다 대감집 머슴이 더 나은 삶을 살았다는 말은 노예제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구조를 보는 것이다. 착취의 형태와 강도는 스펙트럼이다. 절대 기준으로 재단하기보다, 어떤 구조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는 것이 더 정직하다.
진짜 문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삶 자체가 영위되지 않는 폭정이다. 폭정의 문제는 도덕적 악(惡)을 넘어, 그것이 인간 자원을 소진시키고 공동체의 재생산 능력을 파괴한다는 데 있다. 결국 구조의 문제다.
그렇다면 도덕 판단은 아예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다만 그 판단의 근거가 달라진다. 초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조의 지속 가능성에서 온다. 어떤 행위가 공동체의 협력 기반을 장기적으로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어떤 제도가 구성원의 이기심을 집단 이익과 정렬시키는가, 아니면 분리시키는가.
이것은 상대주의보다도 오히려 더 냉정하다. 초월적 근거는 비생산적인 논쟁들을 계속 야기하지만, 구조는 관찰할 수 있고 비교할 수 있고 검증할 수 있다.
위선이 나쁜 이유는 신(神)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다. 위선은 공동체 내부의 신뢰를 조용히, 지속적으로 갉아먹기 때문이다. 그 갉아먹힘이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집단은 안에서부터 무너진다. 역사는 그 패턴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도덕이 구조라는 말은 도덕을 공중에 떠 있는 관념이 아니라, 지면에 발을 딛고 있는 무언가로 보는 것이다.
인간이 합리적 존재라는 믿음은 꽤 오래된 착각이다.
계몽주의가 그 착각을 정교하게 다듬었고, 근대국가의 제도들이 그것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이성적(理性的) 시민, 합리적 경제인(Homo economicus), 자유로운 개인. 그런데 실제 인간을 들여다보면 그 모델과 맞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소속감으로, 두려움으로, 습관으로, 그리고 자기가 속한 집단의 언어로 판단한다.
이것을 단순히 결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인간은 수십만 년 동안 수십에서 수백 명 규모의 부족 안에서 살아왔다. 그 환경에서 생존에 유리한 것은 추상적 이성이 아니라 빠른 판단, 강한 소속감, 이탈자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지금의 인간이 그 유산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명은 그 초사회성 동물(Ultrasocial animals)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초사회성 동물의 특성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내집단(內集團) 편향이다. 자기 집단에게는 관대하고 외집단(外集團)에게는 가혹하다. 이것은 의식적 선택이 아니라 거의 자동적인 반응이다. 인종, 국가, 종교, 이념 등 이 모든 것들이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기능한다.
종교는 이 메커니즘을 가장 정교하게 활용한 장치 중 하나다.
같은 신(神)을 믿는다는 것은 강력한 내집단 신호다. 같은 의례를 반복하고,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금기를 지킨다는 것은 신뢰 비용을 낮춘다. 낯선 사람이라도 같은 신앙을 가졌다면 배신 가능성이 낮다는 신호를 서로에게 보내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가 대규모 협력을 가능하게 한 구조적 이유다.
그런데 이 장치는 양날의 검이다.
내집단을 강하게 묶을수록 외집단에 대한 적대감도 강해진다. 역사상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폭력들 초사회성 동물의 본성이 종교라는 증폭기를 만난 결과다. 신의 이름으로 죽이는 것은 신앙의 왜곡이 아니라, 초사회성 동물이 종교라는 장치를 가지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한 것이다.
시장(市場)도 마찬가지다. 합리적 경제인이 가격 신호에 반응하는 메커니즘이 시장의 전부인 것처럼 가르치지만, 실제 시장은 신뢰 네트워크, 평판 구조, 연줄과 내집단 거래로 가득 차 있다. 합리성은 그 위에 얇게 덮인 포장이다.
기술도 예외가 아니다. 인터넷이 정보를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실제로는 부족을 더 정교하게 분리했다. 알고리즘은 내집단 확증 편향을 먹이로 자라고,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것들만 점점 더 많이 보게 된다. 기술이 인간 본성을 바꾸지 않는다. 인간 본성이 기술을 자기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제도는 무엇인가.
제도는 초사회성 동물의 본성을 억압하는 장치라고만 볼 수 없다. 그 본성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구조다. 잘 설계된 제도는 이기심을 집단 이익과 정렬시킨다. 나쁜 제도는 이기심이 집단을 갉아먹게 방치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강화한다.
문제는 제도를 설계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점이다.
초사회성 동물이 만든 제도는 어느 순간 반드시 그 초사회성 동물의 본성의 '날 것'을 반영하기 시작한다. 공정한 절차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절차를 운영하는 것은 내집단 편향을 가진 인간이다. 권력을 분산시키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구조 안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또 인간이다.
이것은 제도 자체의 무의미함을 선동하려는 비관론은 아니다. 다만 제도를 인간 본성의 해결책으로 보는 것은 틀렸다. 제도는 본성과의 지속적인 협상 결과물이다. 그 협상은 끝나지 않는다.
필자가 지금 제시하고 있는 이러한 시각을 간혹 냉소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냉소주의라고만은 볼 수 않다. 냉소는 기대했다가 실망한 자의 것이다. 처음부터 그냥 인간을 동물로 보면 실망할 일이 없다. 오히려 그 본성 안에서 협력이 일어나고, 제도가 만들어지고, 어떤 공동체는 꽤 오랫동안 꽤 잘 굴러간다는 사실이 더 흥미롭게 보인다.
인간이 위대해서가 아니다. 초사회성 동물이 적응하면서 만들어낸 구조가 때때로 어떤 동물 집단보다 더 오래, 더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조도 결국 무너진다.
종교는 죽음의 공포에서 태어났다는 설명이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죽음의 공포를 달래는 장치라면 개인의 내면에서 끝날 수도 있었다. 종교가 집단적 제도로 발전한 것은 그것이 공동체 결속에 기능했기 때문이다.
공통의 의례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 신뢰를 만든다. 공통의 금기는 내부 갈등을 줄인다. 공통의 서사는 집단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구성원이 자신을 그 이야기의 일부로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대규모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다. 종교는 그 인프라를 가장 오래, 가장 넓은 범위에서 제공해온 장치다.
자연선택은 이것을 걸러냈다. 더 강한 내부 결속을 만들어낸 종교 공동체가 더 오래 살아남았다. 그 공동체의 후손들이 지금 여기 있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수천 년의 생존 실험을 통과한 적응 형질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런데 모든 적응 형질이 그렇듯, 환경이 바뀌면 형질의 의미도 바뀐다. 종교의 성장이 임계점을 넘으면서 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아니, 어쩌면 종교의 태동기 때부터 필연에 가까웠는지) 공동체 제공자에서 제도 유지자로. 신앙의 공간에서 권력의 공간으로. 성직자 직위가 세습되고, 헌금이 사유화되고, 봉사가 착취로 전환되었다. 신의 뜻으로 포장된 무상 노동 요구가 일상화되었다.
이것을 타락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나는 그보다는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라고 본다.
인간 본성이 종교라는 인공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 본성이 그 인공물을 자기 방식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권력을 추구하는 본성이 종교 제도 안에 자리를 잡았고, 그 제도를 자기 이익에 맞게 재편했다. 종교가 착한 척하는 포장지가 되는 것은 이 과정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흥미로운 것은 이 루프가 결국 종교 자체를 갉아먹는다는 점이다.
착취가 심해질수록 이탈자가 늘어난다. 내부 신뢰가 무너지면 공동체 결속력도 약해진다. 외부에서 보는 시선이 냉담해지면 새로운 유입도 줄어든다. 종교가 제공하던 공동체 기능이 다른 장치들로 대체되면, 종교만의 고유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
그렇다면 종교는 끝나는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종교 시장 이론(Religious Market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국가가 특정 종교를 독점적으로 지원하는 환경보다, 다양한 종교가 경쟁하는 환경에서 오히려 종교의 활력이 유지된다는 관찰이다. 미국이 그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독점이 해소되고 경쟁이 도입되면, 각 공동체는 구성원에게 더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하려는 압력을 받는다.
붕괴가 곧 소멸이 아니다. 거대한 단일 구조가 무너지면 소규모 공동체들로 분산된다. 그 소규모 공동체들 중 일부는 더 강한 결속력과 더 실질적인 상호부조 기능을 가지고 살아남는다. 자연선택은 계속된다.
종교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신학의 정교함 때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죽음 공포와 소속 욕구와 의미 추구를 다른 무언가보다 더 잘 채워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채우지 못하는 형태는 도태(淘汰)된다.
나는 종교인들끼리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과정에 뜨겁게 분노하지 않는다. 때로는 재밌기도 하다.
교인들이 착취당하는 것이 개탄스럽다는 감정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 구조 자체가 예측 가능하다는 생각이 강하다. 인간 본성이 특정 장치를 만나면 어떤 패턴을 반복하는지가 보인다.
그 패턴이 반복되는 한, 분노도 감탄도 어울리지 않는다. 냉담한 관찰이 맞다.
다만 그 관찰 안에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이전투구 안에 있는 사람들이 현명하게 대처하길 바라는 마음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 그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초사회성 동물로서의 심리적 흔적 기관일 것이다.
붕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의 구조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감각. 제도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감각. 그 감각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구조 안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구조의 소멸은 곧 자신이 딛고 선 바닥의 소멸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구조를 분석하는 능력을 마비시킬 때, 문제가 시작된다.
문명은 안정적인 상태가 기본값이 아니다. 문명은 언제나 붕괴와 재건 사이 어딘가에서 진행 중인 실험이다. 우리가 안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붕괴의 속도가 재건의 속도보다 잠시 느린 구간일 뿐이다.
역사를 길게 보면 이것이 보인다.
로마 제국이 무너졌다. 그 자리에서 여러 중세 유럽 소국들이 만들어졌다. 중세 유럽의 구조가 흔들리면서 근대 국가가 등장했다. 근대 국가의 프레임이 지금 다시 흔들리고 있다. 이 각각의 전환점에서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세계가 끝난다고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세계는 끝났다. 그런데 세계 자체는 끝나지 않았다.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붕괴는 소멸이 아니다. 재편이다.
여기서 기독교의 묵시록과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기독교의 종말은 끝이 아니다. 심판이고, 정산(精算)이고, '의미'의 최종 승리다. 악(惡)이 패배하고 선(善)이 구원받는다. 역사는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며, 그 목적이 종말에서 완성된다. 붕괴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 이 서사에서 종말은 두렵지만 결국 의미 있다.
내가 말하는 붕괴는 그것과 다르다. 심판도 없고, 구원도 없고, 의미의 완성도 없다. 거대한 구조가 내부 모순으로 무너지고, 그 자리에서 다른 패턴이 생긴다. 그 새 패턴이 이전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다. 더 나쁠 수도 있고, 그냥 다를 수도 있다. 종말은 종말이 아니라 다음 실험의 시작일 뿐이다.
이것이 더 냉혹하게 들린다면, 그 냉혹함은 정확하다. 탈종교적 묵시록에는 위로가 없다. 다만 그 대신 착각도 없다.
문제는 재편의 비용이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붕괴의 충격을 거의 받지 않고 다음 구조에 적응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삶이 통째로 파괴된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구조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는 것이다. 다만 그 비용의 존재가 붕괴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붕괴는 막고 싶다고 해서 막히지 않는다. 내부 모순이 임계점을 넘으면 구조는 스스로 무너진다.
가속주의(加速主義, Accelerationism)라는 말이 있다.
내가 이 말을 쓸 때, 그것은 파괴를 욕망한다는 뜻이 아니다. 현재 구조의 내부 모순을 그 끝까지 밀고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어설프게 봉합하는 것이 오히려 더 긴 고통을 만들 수 있다는 직관이다.
치명적인 오류로 가득 찬 운영체제에 끊임없이 임시적인 패치(patch)만 덧대는 것은 시스템을 서서히 마비시킬 뿐이다. 일시적인 데이터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시스템을 완전히 포맷하고 재설치해야만, 비로소 정상적인 작동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낙관적 전제를 깔고 있다. 붕괴 이후 더 나은 구조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더 나쁜 것이 나올 수도 있다. 역사에는 그런 사례가 충분히 많다.
그래서 나는 가속주의를 신념으로 쥐고 있지 않다. 하나의 관찰 방식으로 쓴다.
어떤 국가 내의 종교가 붕괴한다면 어떻게 될까.
복지, 교육, 지역사회 인프라의 상당 부분을 종교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공백을 국가나 시장이 즉시 메우기 힘들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기능하지 않는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인프라 공백은 채워진다. 느리게, 고통스럽게, 때로는 형편없는 방식으로. 그러나 채워진다. 수요가 있는 곳에는 결국 공급이 생긴다. 그것이 국가에 의한 복지가 되든, 민간 시장이 되든,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의 공동체가 되든.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다.
거대한 단일 구조가 해체되면 소규모 공동체들이 분산된다. 각 공동체는 다른 방식으로 실험한다. 기성종교 공동체 형태를 유지하는 곳도 있을 것이고, 종교라고 불러주기엔 민망할 정도의 전혀 다른 원리로 조직되는 곳도 있을 것이다. 이 공동체들은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고, 흡수하고, 해체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중 일부가 더 큰 구조로 통합된다. 어떤 형태의 국가가 다시 탄생할 수도 있다.
이것이 인류 문명이 반복해온 실험의 구조다.
여기서 나의 위치를 묻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 거대한 실험의 관찰자인가, 참여자인가.
둘 다다.
어떤 공동체 안에서 살면서 다른 공동체들을 관찰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가장 정직한 위치다. 완전한 외부 관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속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다만 자신이 속한 구조를 그 안에서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거리가 냉소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저 어떤 구조에도 맹목적으로 투신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맹목적 투신은 구조가 기능할 때는 강점이 되지만, 구조가 무너질 때는 사람을 같이 끌고 내려간다.
문명의 실험에 참여하되, 특정 실험의 결과에 자신의 전부를 걸지 않는 것. 그것이 이 긴 반복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어떠한 붕괴를 하나의 희극(喜劇)으로서 볼 수 있는 건 냉담함이 아니라 일종의 해방이다. 어떤 구조의 붕괴에 과도하게 애도하거나 과도하게 두려워하지 않을 때, 다음에 오는 것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슬픔과 공포는 시야를 좁힌다. 거리는 시야를 넓힌다.
세상은 늘 그렇게 돌아갔다. 적응하는 것은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도태된다. 이것이 잔인하게 들린다면, 그 잔인함은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직면하기 싫은 인간의 감각 안에 있다.
문명은 실험이다. 붕괴는 그 실험의 일부다. 다음 실험이 지금보다 낫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보장도 없다.
종교는 초월을 말한다.
신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 앞에 선다. 그 구도 안에서 인간은 작아지고, 신은 큰 존재이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유대교든, 유일신 전통의 핵심 구조는 이것이다. 인간 너머에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의미와 도덕과 질서의 원천이다.
그런데 그 초월이 실제로 어디까지 뻗어 있는가를 물으면, 이야기가 묘하게 수축한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지구에 왔다. 최후의 심판은 인간 역사의 끝에서 일어난다. 천국과 지옥은 인간 영혼의 행선지다. 초월을 말하지만 그 초월의 내용은 철저히 인간 중심이다. 우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다.
현대 우주론이 보여주는 규모를 잠시 가져와보자.
관측 가능한 우주의 지름은 약 930억 광년이다. 그 안에 약 2조 개의 은하가 있다. 우리 은하에만 2천억에서 4천억 개의 별이 있고, 그 별들 대부분이 행성계를 거느린다. 지구는 그 중 하나의 별 주변을 도는 하나의 행성이다. 인류의 역사는 우주의 나이 138억 년에 비하면 눈 깜짝할 사이도 아니다.
이 규모 앞에서 인간 구원의 서사를 놓으면 어떻게 보이는가.
안드로메다 은하의 어느 행성에 지적 생명체가 있다면, 그들도 원죄를 가지고 있는가. 예수는 그 행성에도 성육신(成肉身)했는가. 그들에게도 최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가. 전통 신학은 이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경이 쓰인 고대 근동의 세계관은 이 규모를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이 물음에 대개 이렇게 답한다. 하나님은 우주 전체의 주인이다. 인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 답은 틀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답은 사실상 질문을 돌려보내는 것이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는 이 우주적 규모의 불편함을 공포로 번역했다.
우주는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인간이 의미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우주적 규모에서는 흔적도 없이 작다. 그 인식이 인간 정신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코즈미시즘(cosmicism)의 핵심이다.
나는 그 공포까지는 공유하지 않는다. 다만 그 규모 인식은 공유한다.
인간 문명이 우주적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인간의 도덕 체계, 이념 체계, 종교 체계가 우주의 관점에서는 특정 행성의 특정 생물 종이 특정 시기에 만들어낸 국지적 구조물일 수 있다는 것. 이 인식이 반드시 허무주의로 이어져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인식 앞에서 어떤 체계를 절대화하는 것은 어렵다.
신도 그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종교는 인간을 초월하는 신을 말한다. 그런데 그 신의 관심사는 철저히 인간적이다. 인간의 죄, 인간의 구원, 인간의 역사, 인간의 심판. 초월을 말하지만 그 초월은 인간 중심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반면 우주(universe) 규모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기 시작하면,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대화된다. 설령 신이 있다 해도, 그 신이 2조 개의 은하 중 하나의 은하의 변두리 별 주변 행성의 한 생물 종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는 서사가, 우주의 규모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는 초월을 통해 인간을 중심에 세운다. 우주적 시선은 그 중심 자체를 해체한다.
종교 대 무신론의 토론은 인간이 중심이라는 전제를 공유한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만, 그 논쟁의 무대는 인간 세계다. 그런데 그 무대 자체를 우주적 규모로 가져가면, 논쟁의 전제가 흔들린다.
그렇다고 인간이 아예 의미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의미는 규모에서 오지 않는다. 의미는 관계에서 온다. 인간에게 인간의 삶이 중요한 것은 우주가 그것을 중요하다고 인정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 삶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국지적(局地的)이다. 그러나 국지적이라고 해서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국지적 의미를 우주적 진리로 격상시키려는 시도, 특정 공동체의 믿음 체계를 절대적 도덕 질서로 포장하려는 시도, 인간 역사의 한 챕터를 우주의 목적으로 읽으려는 시도들 앞에서는 코스미시즘이 유용한 해독제가 된다.
신적 존재에 대한 관념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공포와 욕망과 소속감을 가지고 빚어낸 것이다. 우주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이 공포스럽다면, 그 공포는 인간 안에 있다. 우주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더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종교인들은 무신론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 신을 부정하는 것이 이상하고, 도덕의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 이상하고, 의미 없이 산다는 것이 이상하다. 그 "이상함"은 대개 하나의 전제에서 나온다. 인간은 의미를 필요로 하고, 그 의미는 초월에서 와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그 이상함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인간중심주의를 의심하고, 도덕을 구조로 환원하고, 문명을 실험으로 보고, 신을 국지적 개념으로 상대화하는 것. 이것이 "이상한 소리"라면, 그 이상함이 어떤 층위에서 이상한지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 논증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적인 직관이 흔들릴 때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드러내는 것.
거부감이 나온다면 그것도 흥미롭다. 왜 이 시각이 불편한가. 그 불편함은 어디서 오는가. 대개 그 불편함은 방어반응이다. 자신이 당연하게 깔고 있던 전제가 건드려졌을 때 나오는 반사(反射).
이 글이 그런 불편함을 한 번쯤 만들어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내 생각마저도 100%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을 고백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건조하고, 겸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구조적이다. 그냥 그렇다. 지금까지 적은 내용들은 일정 부분 틀릴 수 있다. 내가 놓친 층위가 있을 수 있고, 내가 전제하고 있는 것들 중 검토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다.
회의주의(懷疑主義)의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일관성 있는 회의주의는 자신의 회의주의조차 의심한다. 이것이 역설처럼 들릴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가장 정직한 인식론적 위치라고 본다.
어떤 체계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체계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신을 믿지 않는다. 보편 도덕의 초월적 근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문명을 선형적인 진보의 서사로 읽지 않는다. 국가를 영속적 구조로 보지 않는다. 종교를 진리 체계로 대하지 않는다.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전제하지 않는다. 내 생각조차 철저히 확신하지 않는다.
이 목록을 늘어놓으면 허무주의처럼 보인다.
여기서 반드시 나오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 세계관으로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날카로운 질문이다. 구조를 기술(記述)하는 것과,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처방(處方)하는 것은 다르다. 내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전자다. 인간은 이렇게 작동한다, 문명은 이렇게 반복한다, 종교는 이런 기능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 빈약함을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그 질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전제를 깔고 있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산다는 것. 그 이유를 제공하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것. 그런데 실제로 인간은 그 이유를 확보한 뒤에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산다. 이유는 대개 나중에 붙인다. 살고 나서 그 삶을 정당화할 서사를 찾는 것이다.
처방이 빈약하다는 비판은 맞다. 그러나 처방이 없다는 것이 살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처방이 너무 강한 세계관이 더 위험하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너무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그 확실함의 이름으로 타인을 죽인다.
그렇다고 이상하게도 나는 허무하지 않다. 왜인지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짐작하건대, 허무는 기대가 무너질 때 오는 것인데, 나는 처음부터 그 기대들을 그렇게 높게 쌓아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가 의미로 가득 차야 한다는 기대, 역사가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기대, 인간이 특별해야 한다는 기대. 이것들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것들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신을 발명했다.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이것을 너무나 잘 아는 동물일 것이다. 그 앎이 만들어내는 공포를 감당하기 위해 인간은 여러 장치를 발명했다. 신화, 종교, 철학, 예술, 자녀, 유산, 명성 등등. 이것들은 모두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가 남는다는 감각을 만들어내는 시도들이다.
그 시도들은 인간적이다.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그것을 우주적 진리로 격상시키면 무언가 어긋난다는 느낌이 든다.
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는 것은 그 어긋남이 극단으로 간 형태다. 죽음의 공포를 달래기 위해 만든 장치가, 다시 죽음을 생산하는 도구가 된다. 이 아이러니를 보면서 분노하기보다, 인간 본성이 얼마나 일관되게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다른 생물들을 생각해보라.
세균은 신앙 없이 번식한다. 바이러스는 도덕 없이 숙주를 바꾼다. 늑대는 무리를 이루고 위계를 만들고 영역을 지키지만, 그 행동에 신학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
인간이 그들보다 복잡한 것은 사실이다. 언어가 있고 문화가 있고 역사가 있다. 그런데 그 복잡함이 인간을 자연 바깥에 놓는 것은 아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진화의 산물이고, 환경의 제약을 받고,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운석을 맞을 수도 있다. 자기들끼리 핵전쟁을 벌여 멸종할 수도 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바이러스에 허무하게 쓸려갈 수도 있다. 그 어떤 종말도 우주에서 보면 별다른 사건이 아닐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인간의 삶을 마냥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는다. 삶은 우주가 가치를 부여해야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삶을 사는 자에게 가치 있으면 충분하다.
그래서 결론은 단순하다.
그냥 살아라.
이 말이 허무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오히려 가장 무게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뇌가 만들어낸 초월적 존재에 매달리며 이 삶을 다음 삶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 쓰는 것보다, 지금 여기서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직면하는 것이 더 어렵고 더 정직하다.
인생에는 즐길 것이 많다. 이것도 단순하게 들리지만, 단순한 것이 맞다. 음식, 대화, 수면, 웃음, 어떤 날의 날씨, 좋은 책 한 권, 혹은 남녀 간의 끈적하고 순애보(純愛譜)적인 성관계. 이것들은 신학적 정당화 없이도 좋다. 의미의 원천을 먼 곳에서 찾을 이유가 없다.
나는 인식론적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주조차 유한하지 않은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확신한다. 내 믿음이 옳다, 내 공동체가 선택받았다, 내 이념이 역사의 방향이다, 내 신이 유일하다. 이 확신들이 서로 충돌할 때 폭력이 생긴다. 그 폭력의 규모는 확신의 강도에 비례한다.
회의(懷疑)는 무기력이 아니다. 회의(懷疑)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행동을 막지 않는다.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더 수정 가능하게, 더 타인에게 열려 있게 행동하게 한다.
물론 나는 이 생각마저도 전적으로 확신하지 않는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이 너무 차갑다고 느낄 것이다. 인간을 너무 멀리서 본다고, 따뜻한 것이 없다고. 그 감상이 틀리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구조를 냉정하게 보는 것이 사람을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착각 없이 보는 것이 더 지속 가능한 태도일 수 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고, 실망이 크면 사람은 쉽게 냉소로 간다.
제브데트 메흐메트 쾨세멘(Cevdet Mehmet Kösemen)의 소설 <모든 내일들(All Tomorrows)>의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 하지만, 결국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그들의 이야기 역시 일시적이었고, 길긴 했지만 결국에는 덧없는 것이었다. 확실한 결말은 없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인류의 이야기는 수천 개의 은하를 궁극적으로 지배하는 것도, 미지의 영역을 향한 수수께끼의 탈출도 아니었다. 인간의 본질도 마찬가지였다. [...] 그리고 지금도 자신들만의 거짓되고 웅장한 서사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남은 삶을 전부 바쳐가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이상, 사상, 성공과 황금기를 좇는 일은 지독하게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들이 보통 확실한 결말로 끝난다는 것을 멍하게 생각하자면, 그러한 생물들은 주위 생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스스로 몰락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잘못된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 조언하고 싶다. 인간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정신을 차려라! 중요한 것은 결말이 아니라 여정이다. 당신이 오늘 걸었던 행적은 당신의 내일을 좌우할 뿐,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늘을 사랑하고, 모든 내일을 붙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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