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홀든 — 핏빛 자오선과 영미권의 세계관

『판사 홀든 — 핏빛 자오선과 영미권의 세계관』


들어가며: 이 소설은 왜 불편한가


코맥 맥카시의 『핏빛 자오선(Blood Meridian, or the Evening Redness in the West)』은 1985년에 출판됐다. 미국 문학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소설로 꼽히는 작품이고, 동시에 가장 철학적인 소설 중 하나로도 꼽힌다. 이 두 가지 평가는 모순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폭력은 장식이 아니라 논증이다.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고 하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존 웨인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황야, 총잡이, 정의, 그리고 결국 승리하는 영웅. 헐리우드가 수십 년에 걸쳐 공들여 만들어온 서부극의 문법이다. 맥카시는 그 문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순다. 영웅은 없다. 정의도 없다. 서부는 낭만적 개척의 공간이 아니라 학살의 공간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학살은 예외적 일탈이 아니라 문명 확장의 본질적 동력으로 제시된다.


불편한 건 그래서다. 이 소설이 그리는 미국의 얼굴은 미국이 스스로에 대해 말해온 이야기와 너무 다르다. 맥카시는 그 간극을 직접 지적하지 않는다. 그냥 보여준다. 독자가 그 간극 앞에서 알아서 불편해지도록.


배경: 1849년, 텍사스멕시코 국경 지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849년에서 1850년 사이. 멕시코미국 전쟁(1846~1848)이 막 끝난 직후다. 미국은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으로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등 현재 미국 남서부 전체에 해당하는 영토를 멕시코로부터 뜯어냈다. 황금이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게 1848년이다. 서부는 열려 있었고, 그 열린 공간에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밀려들었다.


공간적 배경은 텍사스 남부에서 멕시코 북부 소노라 사막, 치와와 사막에 걸친 광활한 황야 지대다. 이 지역은 당시 사실상 어떤 법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미국 연방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고, 멕시코 정부는 이미 전쟁으로 무력화되어 있었으며, 코만치를 비롯한 원주민 부족들은 침략자들과 생존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국경이라는 게 지도 위에만 존재하고 현실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간.


맥카시는 이 공간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 법이 없는 곳, 국가가 없는 곳, 문명의 외피가 벗겨진 곳. 거기서 인간이 무엇을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줄거리: "키드"의 여정


주인공은 이름조차 없다. 그냥 "키드(the kid)"라고만 불린다. 1833년생, 테네시 출신. 소설이 시작할 때 그는 열네 살이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었다. 그는 아무런 도덕적 교육도, 공동체적 유대도 없이 자란 인물이다. 그냥 폭력적인 세계에 내던져진 원초적 인간.


키드는 가출 후 남쪽으로 흘러간다. 처음엔 뉴올리언스 인근에서 잠시 머물다가, 텍사스로 넘어간다. 거기서 멕시코와의 전쟁에 뒤늦게 합류하려는 용병 부대에 끼어든다. 이 첫 번째 부대는 코만치의 기습에 거의 전멸한다. 키드는 살아남는다. 이후 멕시코 군에 잠시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나고, 결국 그랜턴 갱단(Glanton Gang)과 합류한다.


그랜턴 갱단이 이 소설의 핵심 집단이다. 존 조엘 그랜턴이라는 실존 인물이 이끌었던 이 집단은 역사적으로도 실재했다. 멕시코 치와와 주 정부로부터 아파치 두피를 사냥하는 계약을 맺은 용병 집단이었다. 당시 멕시코 주 정부들은 원주민 약탈로 인한 피해가 극심해지자 두피 하나당 현상금을 걸었다. 그랜턴 일당은 그 계약을 이행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아파치든 멕시코 민간인이든 원주민이든 가리지 않고 학살하고 두피를 가져다 팔았다.


이 집단에 판사 홀든이 있다.


그랜턴 갱단의 행적: 폭력의 연대기


소설의 중반부는 그랜턴 갱단의 이동 경로를 따라간다. 그 경로는 학살의 연대기다.


맥카시는 이 부분을 묘사할 때 어떤 도덕적 판단도 끼워 넣지 않는다. 서술자는 냉정하다 못해 무감각하다. 마을 하나가 불탄다. 주민들이 죽는다. 아이들이 죽는다. 두피가 잘린다. 서술은 계속 이어진다. 독자가 기대하는 공포나 분노나 슬픔의 언어적 신호가 없다. 그냥 그 일이 일어났다고 기술된다.


이게 맥카시의 전략이다. 독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도덕적 프레임을 제거해버리는 것. 보통 폭력을 다루는 소설은 독자에게 감정적 출구를 제공한다. 악당은 나쁘고, 피해자는 가엾고, 결국 응보가 온다. 그 구조 안에서 독자는 폭력을 소비하면서도 자신의 도덕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 맥카시는 그 출구를 막아버린다. 독자는 그냥 폭력 앞에 서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장면들을 보자.


갱단이 한 원주민 마을을 습격하는 장면에서 맥카시는 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의 시신을 묘사한다. 이 장면은 길지 않다. 서술은 담담하다. 그런데 바로 그 담담함이 독자를 무너뜨린다. 비명을 지르는 서술보다 조용한 서술이 더 깊이 박힌다.


또 다른 장면. 갱단이 강을 건너는 장면이 있다. 강물이 붉다. 왜인지는 독자가 알아서 이해해야 한다.


갱단은 두피 사냥의 계약 대상을 점점 확장한다. 처음엔 아파치. 그다음엔 다른 부족. 그다음엔 멕시코 농민. 그다음엔 그냥 눈앞에 보이는 사람. 이 확장에는 내적 논리가 있다. 두피는 두피고, 죽은 자는 증언하지 못한다. 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이라면 누구든 두피가 된다. 그리고 "적"의 정의는 점점 넓어진다.


그랜턴 자신은 점점 통제를 잃어간다. 그는 처음부터 도덕적 인물이 아니었지만, 소설이 진행될수록 그는 방향을 잃은 폭력 그 자체가 되어간다. 반면 판사 홀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논리를 갖고 있다. 그랜턴이 본능이라면 홀든은 철학이다.


소설의 폭력이 단순한 잔혹성이 아닌 이유


이 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 중 상당수가 중간에 덮는다. 폭력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맥카시가 이 수위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서부극이라는 장르는 미국이 스스로의 팽창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 장치다. 거기서 폭력은 항상 정당한 폭력이다. 악당을 처단하는 폭력, 가족을 지키는 폭력, 문명을 세우는 폭력. 폭력은 언제나 더 큰 선의 도구로 등장한다.


맥카시는 그 신화를 해체하기 위해 폭력을 그 도구적 프레임에서 끄집어낸다. 여기서 폭력은 어떤 목적의 수단이 아니다. 폭력은 그냥 폭력이다. 그리고 그 폭력이 실제로 서부 팽창을 추동했던 힘이었다는 것, 그게 이 소설이 말하려는 역사적 진실이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미국이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차지하는 것은 신이 부여한 사명이라는 이데올로기. 이 이데올로기는 19세기 미국 팽창의 공식 언어였다. 교과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고, 그림으로 그려지고, 연설로 낭독됐다.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의 실제 집행은 그랜턴 갱단 같은 무리가 했다. 맥카시는 그 사이의 거리를 보여준다. 수사와 실행 사이의 거리. 명분과 현실 사이의 거리.


결말: 키드의 죽음과 홀든의 춤


소설의 마지막으로 가면 키드는 혼자다. 그랜턴 갱단은 결국 자신들이 약탈하던 원주민 집단인 율리 부족의 반격으로 거의 전멸한다. 그랜턴은 죽는다. 살아남은 일부는 사막에서 흩어진다.


키드는 그 이후로도 수십 년을 떠돌다가, 소설 말미에서 어느 변경의 마을에 나이 든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거기서 판사 홀든과 다시 마주친다.


홀든은 변하지 않았다. 30년이 지났지만 그는 늙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맥카시가 그를 시간 밖의 존재로 그린다. 홀든은 키드에게 말한다. 너는 항상 이 게임 밖에 있으려 했다고. 그것이 너의 실패라고.


그날 밤 키드는 죽는다. 외딴 변소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홀든이 죽였다는 명시적 서술은 없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들은 춤을 추고 있다. 마루판이 군화 아래서 쿵쿵 울리고 바이올린 주자들은 비스듬히 기울인 악기 위로 소름 끼치게 씩 웃는다. 그 모든 이들 위로 우뚝 솟은 것은 판사다. 그는 알몸으로 춤을 춘다. 작은 발이 경쾌하고 날렵하게 움직이다가 이제는 두 배 빠르기로, 숙녀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거대하고 창백하고 털 하나 없는, 마치 엄청나게 큰 갓난아기 같다. 그는 절대 잠들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바이올린 주자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뒤로 사뿐사뿐 물러나다가 고개를 젖히고 목구멍 깊은 곳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대단한 인기인이다, 판사는. 모자를 흔들자 그의 두개골의 달빛 같은 둥근 천장이 램프 아래를 창백하게 스쳐 지나가고, 그는 홱 돌아서서 바이올린 하나를 손에 쥐고 빙글 돌며 한 번, 두 번 춤추면서 동시에 바이올린을 켠다. 발이 가볍고 날렵하다. 그는 절대 잠들지 않는다.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빛 속에서 그림자 속에서 춤을 추고 그는 대단한 인기인이다. 그는 절대 잠들지 않는다, 판사는. 그는 춤을 추고 있다, 춤을.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키드는 죽었다. 갱단은 흩어졌다. 하지만 홀든은 거기 있고, 알몸으로 춤을 추고, 바이올린을 켜고, 웃는다. 맥카시는 이 장면에서 어떤 설명도 덧붙이지 않는다. 설명이 필요 없다. 홀든이 대표하는 논리는 패배하지 않았다. 키드가 죽고, 그랜턴이 죽고, 갱단이 흩어졌어도 홀든은 춤을 춘다. 그리고 그 춤은 끝나지 않는다.


줄거리 소개를 마치며


『핏빛 자오선』은 서부 개척 시대의 역사 소설이지만, 특정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맥카시가 그리는 건 시간을 관통하는 어떤 논리다. 문명이 팽창할 때 그 팽창의 최전선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 일을 하는 인간들이 자신의 행위를 어떤 논리로 이해하는가.


판사 홀든은 그 논리의 극단적 결정체다. 그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다. 그는 말을 한다. 긴 말을. 정교한 말을. 그 말 안에 영미권이 폭력과 지배와 문명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의 가장 날것이 담겨 있다.


그리고 곧 그 홀든이라는 존재를 낱낱이 분석해보겠다.


판사 홀든이라는 존재: 이 인물은 무엇인가


판사 홀든은 소설 초반부에 갑자기 등장한다. 배경도 없고 출신도 없다. 그냥 어느 순간 거기 있다. 맥카시는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키가 198센티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 피부는 털이 하나도 없이 매끈하다. 눈썹도, 속눈썹도 없다.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흰색에 가깝다. 그는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의 과거는 한 번도 설명되지 않는다.


첫 등장 장면부터 그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떤 설교자를 향해 군중 앞에서 갑자기 고발 연설을 한다. 이 사람은 어린 소녀를 건드렸다, 짐승과 교접했다, 사기꾼이다. 군중은 흥분하고 설교자는 쫓겨난다. 나중에 홀든은 태연하게 인정한다. 그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그냥 해봤다고.


이 장면 하나로 맥카시는 홀든의 본질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는 언어를 도구로 쓴다. 진실이나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효과의 문제로. 말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말의 진위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말이 군중에게 작동했느냐이고, 그 작동의 결과로 자신이 원하는 현실이 만들어졌느냐다.


홀든은 이후 소설 전체에 걸쳐 이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는 박식하다. 지질학, 식물학, 언어학, 군사학, 음악, 춤, 법률. 그가 모르는 분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지식은 전시용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그 지식을 사용해서 주변 환경을 통제한다.


홀든의 세계관: 지식은 지배다


홀든은 말이 많은 인물이다. 그리고 그 말들은 흘려들을 수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판사는 말했다. 나의 지식 없이 존재하는 것은 나의 허가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세계의 비밀이 영원히 어둠 속에 있다고 믿는 자는 미지와 공포 속에서 살아가지. 미신이 그를 끌어내릴 것이고. 비가 그의 삶의 행위를 침식할 걸세. 하지만 직조의 실가닥을 헤아리는 작업에 착수한 자는 그 결정 하나만으로 세계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책임을 진 자들만이 자신의 운명의 규약이 판결되는 길에 영향을 줄 수 있네.


그게 새를 잡는 것과 뭔 상관인데? 토드바인이 말했다.


새들의 자유는 내게 모욕일세. 모조리 우리에 가두는 것이 나아."


— 챕터 14, 그의 연구에 대한 과학자로서의 견해


이 문장은 단순한 오만이 아니다. 하나의 완결된 인식론이다. 알지 못하는 것은 통제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위협이다. 따라서 세계를 알고 분류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지배의 행위다. 세계를 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두 문장이 핵심이다. 새는 자유롭다. 그런데 홀든에게 그 자유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모욕이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자유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는 우리에 가둬야 한다. 이 논리의 귀결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소설 전체가 보여준다.


이 논리의 계보를 짚어보면 흥미롭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17세기 초에 말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 이 명제는 근대 과학의 출발점으로 흔히 인용된다. 자연을 이해함으로써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 계몽주의는 이 생각을 더 밀고 나갔다. 세계는 이성으로 파악 가능하고, 이성으로 파악한 자는 세계를 개선할 수 있다.


홀든은 이 계보의 극단에 있다. 그는 베이컨과 계몽주의의 논리를 도덕적 제어 없이 끝까지 밀어붙인다. 알기 때문에 지배할 권리가 있다. 지배할 권리가 있으므로 지배하지 못하는 것은 모욕이다. 이게 미친 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 논리는 영미권 제국주의의 실제 언어와 그렇게 멀지 않다. 19세기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쓴 언어가 정확히 이것이었다. 우리는 인도를 안다. 인도인보다 인도를 더 잘 안다. 알기 때문에 지배해야 한다. 지배는 착취가 아니라 책임이다. 이 논리 구조가 홀든의 논리 구조와 동일하다.


홉스의 자연 상태와 홀든


토머스 홉스는 1651년 『리바이어던』에서 자연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결하고, 잔인하고, 짧다(solitary, poor, nasty, brutish, and short)."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있다. 이 전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계약을 맺고 주권자에게 권력을 위임한다. 그게 국가의 기원이고 문명의 시작이다.


홉스의 논지는 자연 상태가 나쁘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인간은 계약을 맺고 그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홀든은 이 전제를 뒤집는다. 그는 자연 상태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상태야말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계약과 법과 국가는 그 진실 위에 씌워진 허구다. 문명은 폭력을 제어하는 게 아니라 폭력을 독점하고 그 독점을 정당화하는 장치다. 홀든은 그 허구를 걷어내고 밑에 있는 진실을 그대로 실행하는 인물이다.


이게 홀든이 단순한 악당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악당은 문명의 규칙을 어기는 자다. 홀든은 문명의 규칙 자체가 허구라고 보는 자다. 그는 규칙을 어기는 게 아니라 규칙 이전의 논리로 작동한다.


텍사스-멕시코 국경 지대라는 배경이 여기서 의미를 얻는다. 법이 없는 공간, 국가가 미치지 않는 공간. 그 공간은 홀든의 세계관이 실제로 구현되는 실험실이다. 문명의 외피가 없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홀든의 대답은 이렇다. 이렇게 행동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실이다.


전쟁론과의 대화: 클라우제비츠를 넘어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전쟁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다. 따라서 전쟁은 그 목적에 종속되어야 하고, 목적이 달성되면 전쟁은 끝나야 한다.


홀든의 전쟁관은 다르다. 읽기 전에 먼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사람은 놀기 위해 태어나지. 모든 아이는 놀이가 일보다 고귀하단 걸 알고 있어. 아이도 놀이의 재미는 놀이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위험 속에 던져진 가치에 있단 점에 있단 걸 알아. 운에 달린 놀이가 의미를 가지려면 무언가를 걸어야 해. 육체적인 놀이에는 서로의 힘과 기술이 작용하며 판돈은 승자의 영광과 패자의 치욕이면 충분한데, 그건 놀이가 법칙의 가치를 내재하고 정의하기 때문임세. 하지만 운이나 가치의 재판은 결국 판돈이 게임과 참가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전쟁으로 귀결되지.


두 사람이 목숨을 건 노름을 한다고 하자.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이가 있겠나? 카드가 뒤집히는 것. 도박꾼에게 온 우주는 이 순간만을 위해 재깍거리며 작동해 왔네, 저 자가 내 손에 죽을 것인가 내가 저 자의 손에 죽을 것인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더 명확한 증명이 있겠는가? 노름이 끝으로 치달을 때 운명에 대해 이야기할 이유는 없어. 한 놈이 다른 놈 대신 선택받는 것은 절대적이고 불가역적이며, 무관한 제 삼자만이 그 거대함과 효력을 마음에 두지 않고 선택에 대해 깊이 평가할 수 있어. 놀이가 패배자의 제거를 담보로 두고 있기 때문에 판결은 명료하네. 더 낮은 카드의 조합을 들고 있는 놈은 오로지 그 때문에 존재를 박탈당함세. 이것이 전쟁의 본질이고 담보로 걸린 것이 곧 놀이이고 권한이고 정당성이다.


이렇게 보면 전쟁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신탁일세. 그것은 의지와 다른 한 의지, 그들을 묶고 선택을 강요하는 더 거대한 의지의 재판이야. 전쟁은 마침내 존재의 통일을 강제하는 궁극의 놀이일세. 전쟁은 신이야."


— 챕터 17, 판사가 전쟁에 관해


"전쟁은 신이야."


이 한 문장이 클라우제비츠와의 차이를 압축한다. 신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신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근거이고 정당성이다. 홀든에게 전쟁은 존재의 가장 순수한 형태다. 전쟁 상태에서 인간은 가장 진실하게 존재한다. 모든 허구와 약속과 계약이 벗겨지고, 순수한 의지와 의지의 충돌만 남는 상태.


주목해야 할 것은 홀든이 전쟁을 도달점으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는 놀이에서 시작한다. 아이들의 놀이. 거기서 판돈이 생기고, 판돈이 커지고, 결국 목숨이 걸린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느껴지도록 서술된다. 홀든의 수사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극단을 극단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놀이의 논리적 귀결로 제시한다. 독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을 이성의 통제 아래 두려 했다면, 홀든은 이성이 전쟁 앞에서 무릎 꿇어야 한다고 본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근대 국민국가의 논리를 반영한다면, 홀든의 전쟁론은 그 국민국가 이전, 혹은 그 아래에 있는 어떤 논리를 반영한다.


닉 랜드(Nick Land)는 2016년에 쓴 짧은 글 <War is God>[1]에서 이 독백을 헤라클리토스, 클라우제비츠, 푸코와 나란히 놓았다. 그의 독법은 홀든의 논리를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진실의 진술로 받아들이는 방향이었다. 랜드의 그 수용 방식 자체가 흥미로운 사례다. 홀든의 논리가 지식인에게도 작동한다는 것, 그 언어가 단순한 악당의 말이 아니라 어떤 지적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허버트 스펜서와 사회진화론의 미국적 수용


찰스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출판했을 때, 가장 열렬하게 그 논리를 사회에 적용한 사람은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였다. 스펜서는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표현을 만든 사람이다. 사실 이 표현은 다윈의 것이 아니었다. 다윈은 자연선택을 이야기했지, 그것을 인간 사회에 직접 적용하려 하지 않았다. 스펜서가 그 논리를 사회로 끌고 왔다.


스펜서의 논리는 단순하다. 자연에서 강한 개체가 살아남듯이, 사회에서도 강한 개인과 강한 집단이 살아남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따라서 빈곤층을 돕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것이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사상이 미국에서 폭발적으로 수용됐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산업 자본가들, 록펠러, 카네기, 밴더빌트 같은 인물들은 스펜서를 읽었고 그의 논리에서 자신들의 성공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를 찾았다. 자신이 부자가 된 것은 자연의 법칙이 작동한 결과다. 내가 강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홀든은 이 사상의 극단적 구현이다. 하지만 홀든은 스펜서보다 솔직하다. 스펜서는 자신의 논리를 "자연법칙"이라는 과학적 언어로 포장했다. 홀든은 그 포장 없이 말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게 전부다. 도덕은 강자가 약자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허구다. 진실은 폭력이고, 폭력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폭력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미국적 변형


프리드리히 니체는 홀든과 비교할만하다. 홀든의 독백에는 니체적인 향취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 비교를 너무 단순하게 끌고 가면 오해가 생긴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허약함이었다. 그는 기독교 도덕을 "노예 도덕"이라고 불렀다. 강자를 억압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도덕은 약자들이 강자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도구라는 것. 그는 그 도덕을 넘어서는 인간, 초인(Übermensch)을 이야기했다.


니체의 초인은 흔히 오해받는다. 그가 말한 강함은 자기 극복의 강함이었다. 자신의 본능과 충동을 통제하고 그것을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능력. 미국에서 니체는 개인주의와 경쟁의 철학으로 읽혔다. 강자가 되어라. 약자처럼 굴지 마라. 동정심은 약함이다. 이 독법은 니체의 복잡한 사유를 사회진화론과 합체시켜버렸다. 홀든은 이 합체된 버전의 구현이다.


홀든이 니체와 다른 결정적인 지점이 있다. 니체는 창조를 이야기했다. 홀든은 지배만 이야기한다. 홀든에게 세계는 이해하고 기록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이다. 거기서 창조는 없다. 지배가 있을 뿐이다. 이 차이가 홀든을 단순히 니체적 초인으로 읽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다.


홀든의 신체: 인간인가 아닌가


맥카시는 홀든을 묘사할 때 의도적으로 그의 인간성을 흐린다. 늙지 않는다. 털이 없다. 거대하다. 창백하다. 그는 어린아이들을 좋아한다고 서술되는데, 이 묘사는 독자를 불안하게 만든다. 실제로 소설 중에 아이들이 홀든 주변에서 사라지거나 죽는 일이 반복된다. 맥카시는 명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느낀다.


홀든을 악마의 화신으로 읽는 해석이 있다. 사탄, 혹은 죽음의 의인화. 이 독법은 소설의 몇 가지 장면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는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고, 마지막에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 외친다.


하지만 이 독법은 오히려 홀든을 평범하게 만들어버린다. 그가 악마라면 그의 논리는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된다.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것이 된다. 그러면 독자는 안도할 수 있다. 우리와 다른 존재의 논리라고.


맥카시는 그 안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홀든은 악마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다. 다만 인간 안에 있는 어떤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인간이다. 그 논리는 누구 안에나 있다. 사회와 법과 공동체가 그것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홀든은 그 억누름 없이 존재하는 인간이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폭력이 감각이 될 때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은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인간은 사회적 환경 속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몸에 새긴다. 그 새겨진 방식은 의식적 선택이 아니라 감각으로 작동한다. 어떤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어떤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가. 그 감각 자체가 사회적 산물이다.


영미권의 아비투스를 생각해보자. 경쟁은 자연스럽다. 개인의 성공은 개인의 능력 때문이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 폭력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이것들은 영미권에서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아니라 상식으로 느껴진다. 논증이 필요 없는 자명한 것으로.


홀든은 이 아비투스의 극단에 있다. 그의 논리가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완전히 다른 세계관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의 극단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의 경쟁과 지배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홀든은 그 "어느 정도"를 없애버린 버전이다.


서부 국경 지대는 그 아비투스가 제도적 제어 없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법이 없다. 국가가 없다. 공동체적 제재가 없다. 그 공간에서 영미권의 아비투스는 홀든의 행동으로 현실화된다.


이게 맥카시의 가장 날카로운 통찰이다. 홀든은 미국 문명 밖에서 온 야만인이 아니다. 그는 미국 문명의 논리가 그 문명의 최전선에서 아무런 완충 없이 작동할 때 나타나는 인물이다.


칼 슈미트의 적과 동지: 정치론이 아닌 존재론으로


칼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정의했다. 적은 도덕적으로 나쁜 자가 아니다. 단지 나와 다른 자, 나의 존재 방식과 양립할 수 없는 자다. 정치는 그 구분을 만들고 유지하는 행위다.


슈미트의 논리는 국가와 정치의 차원에서 전개된다. 국가는 적과 동지를 구분할 권한을 독점한다.


홀든은 이 논리를 개인의 차원으로 내려온다. 그에게 적과 동지의 구분은 국가의 결정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다. 그는 스스로 누가 적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자신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그 결정은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에 따른다.


그랜턴 갱단이 아파치에서 멕시코 농민으로, 멕시코 농민에서 그냥 눈앞에 보이는 사람으로 학살 대상을 확장해가는 과정이 이 논리의 실제적 귀결이다. 적의 정의가 자의적이고 확장 가능하다면, 결국 모든 타자가 잠재적 적이 된다.


미국의 대외정책 역사에서 이 패턴은 반복된다. 


홀든이라는 거울


홀든에 대해 독자들이 느끼는 가장 강렬한 감정 중 하나는 매력이다. 그는 불쾌하고 공포스럽지만 동시에 흡인력이 있다. 그의 독백은 길고 철학적이고 정교하다. 그는 명확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말한다.


이 매력이 불편한 이유가 있다. 홀든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그의 논리에 어느 정도 공명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세계를 이해한 자가 세계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는 논리.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진실이라는 논리. 전쟁이 가장 순수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논리.


이것들은 완전히 낯선 논리가 아니다. 우리가 경쟁, 성공, 힘, 승리에 부여하는 가치들의 극단적 버전이다. 홀든은 거울이다. 그 거울이 불편한 건 거기 비치는 것이 낯선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의 확대된 버전이기 때문이다.


닉 랜드가 홀든의 "전쟁은 신이야"라는 말을 헤라클리토스의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라는 말과 나란히 놓은 것은 그냥 지적 유희가 아니었다.[1] 그는 홀든의 논리가 서양 사상의 가장 오래된 층위와 연결된다는 것을 포착했다. 문명의 외피 아래 그 논리는 계속 있었다. 홀든은 그것을 다시 지표면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맥카시는 이 거울을 1849년의 서부 국경에 세워놓았다. 하지만 그 거울이 비추는 것은 1849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홀든의 논리가 살아있는 곳: 소설 밖으로


판사 홀든은 1985년에 출판된 소설 속 인물이다. 하지만 맥카시가 그를 통해 해부한 논리는 소설 안에 머물지 않는다. 홀든의 세계관 — 지식은 지배의 근거이고, 전쟁은 존재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며, 강자의 의지가 현실을 구성한다 — 은 미국이 실제로 세계에 개입해온 방식의 심층 구조와 겹친다.


물론 미국 대통령들은 홀든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 인권, 안보, 평화라는 언어를 쓴다. 홀든과의 차이는 언어에 있다. 논리 구조에 있지 않다.


수사와 구조를 구분하는 것. 그게 이 글의 작업이다.


먼로 독트린: 지식과 허가의 논리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의회 연두교서에서 이후 먼로 독트린으로 불리게 될 원칙을 선언했다. 서반구는 유럽 열강의 식민지화 대상이 될 수 없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표면적으로는 방어적 선언이다. 유럽의 개입을 막겠다는 것. 하지만 이 독트린의 논리 구조를 들여다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서반구에 대해 개입할 권한을 가진 자는 미국이라는 선언이다. 유럽은 안 되고 미국은 된다. 왜? 미국이 이 반구를 안다. 이 반구에 대한 책임을 진다. 따라서 이 반구에 대한 권한은 미국에 있다.


홀든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나의 지식 없이 존재하는 것은 나의 허가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먼로 독트린은 이후 100년 넘게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개입의 법적, 도덕적 근거로 사용됐다. 쿠바, 니카라과, 파나마, 과테말라, 칠레, 도미니카 공화국. 개입의 방식은 달랐다. 군사 침공도 있었고, 쿠데타 지원도 있었고, 경제 봉쇄도 있었다. 하지만 매번 그 개입을 정당화하는 논리의 뼈대는 같았다. 우리는 이 지역을 안다. 우리는 이 지역에 대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개입할 권한이 있다.


명백한 운명과 그 집행자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이데올로기였지만, 그 이데올로기를 실제로 집행한 것은 그랜턴 갱단 같은 무리였다.


이 이념이 정치적 언어로 처음 등장한 건 1845년이다. 저널리스트 존 오설리번이 텍사스 합병을 지지하는 글에서 처음 쓴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념의 실질적 집행은 그보다 앞서 시작됐다. 앤드루 잭슨은 1830년 인디언 강제 이주법(Indian Removal Act)을 통해 동부 원주민 부족들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밀어냈다. 체로키, 촉토, 크리크. 이게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다. 서부를 백인 정착민의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의 시작이었고, 그 작업은 국가가 직접 수행했다.


절정은 제임스 포크 행정부(1845~1849)였다. 포크는 단임 동안 텍사스를 합병하고,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현재의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를 한꺼번에 뜯어냈다. 『핏빛 자오선』의 배경은 바로 이 직후다. 포크의 전쟁이 끝나고 그 땅에 쏟아져 들어온 인간들 — 금을 찾는 자, 땅을 찾는 자, 그리고 그랜턴 갱단 같은 무리 — 이 실제로 그 영토를 '확보'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 간극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의 서부 팽창은 정착민들의 자발적 이주와 개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코만치, 아파치, 수우, 체로키를 비롯한 수십 개 원주민 부족의 조직적 학살이 그 팽창의 실제 동력이었다. 미국 정부는 이 학살을 직접 수행하기도 했고, 민간 무장 집단에 위탁하기도 했다. 두피 현상금 제도는 실제로 존재했다. 그랜턴 갱단은 소설 속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실재였다.


팽창은 포크 이후에도 계속됐다. 링컨 행정부 시기인 1862년에는 홈스테드법으로 서부 정착을 국가가 적극 장려했고, 1869년에는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됐다. 원주민과의 전쟁은 오히려 이 시기에 더 격렬해졌다. 그리고 1890년, 미국 인구조사국이 공식적으로 "프런티어의 소멸"을 선언했다. 더 이상 개척되지 않은 서부가 없다는 선언. 잭슨에서 시작해 60년에 걸쳐 진행된 작업이 완료된 것이다.


명백한 운명의 수사는 이 학살을 문명화의 과정으로 포장했다. 야만을 문명으로 대체하는 역사의 진보. 신이 부여한 사명. 하지만 그 사명의 실제 집행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은 수사와 거리가 멀었다.


홀든이 소설에서 하는 일은 그 포장을 걷어내는 것이다. 그는 문명화라는 명분 없이 작동하는 동일한 논리를 보여준다. 지식이 지배의 근거이고, 지배는 폭력으로 실행되며, 그 폭력의 결과가 현실이다. 명분은 사후적으로 붙는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홀든에 가장 가까운 대통령


미국 대통령들 중 홀든의 세계관과 가장 공명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루스벨트는 지식인이었다. 하버드를 나왔고 역사서를 직접 썼다. 자연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탐험가였다. 그는 세계를 알고 분류하고 기록하는 것을 삶의 방식으로 살았다. 동시에 그는 폭력을 낭만화했다. 전쟁을 남성성의 시험대로 봤다. 쿠바에서의 전투 경험을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회고했다.


그의 외교 원칙은 "큰 몽둥이를 들고 조용히 말하라(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였다. 외교적 언어의 뒤에 압도적 폭력의 잠재력을 두라는 것. 이 원칙은 홀든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말이 통하는 것은 그 말 뒤에 폭력이 있기 때문이다. 폭력이 현실의 기반이고, 외교는 그 위에 얹힌 형식이다.


루스벨트 코롤러리(Roosevelt Corollary)로 불리는 1904년의 선언도 있다. 먼로 독트린을 확장해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자국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을 경우 미국이 개입할 권한과 의무가 있다는 선언이었다. 능력 없는 자는 자율의 권리를 잃는다. 이를 판단할 권한은 미국에 있다. 홀든의 논리를 국제법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우드로 윌슨: 수사의 변형, 구조의 유지


루스벨트가 폭력을 비교적 솔직하게 이야기했다면, 우드로 윌슨은 그것을 훨씬 정교한 수사로 포장했다.


윌슨은 1차 세계대전 참전을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to make the world safe for democracy)"라고 정당화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국익 때문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서라는 것. 이 수사는 이후 미국 대외정책의 표준 언어가 됐다.


하지만 윌슨 행정부가 실제로 한 일들을 보면 수사와 행동 사이의 간극이 드러난다. 그는 아이티에 군사 개입해서 1915년부터 19년간 점령했다. 도미니카 공화국도 점령했다. 멕시코에도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주권을 짓밟는 동안, 그 행위는 매번 그 나라들의 안정과 문명화를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됐다.


홀든의 논리가 윌슨의 행동 안에 있다.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가 결정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개입은 지배가 아니라 책임의 이행이다.


수사가 정교해질수록 그 뒤에 있는 논리 구조는 더 잘 가려진다. 윌슨은 루스벨트보다 훨씬 도덕적인 언어를 썼다. 하지만 그 도덕적 언어가 정당화한 행동의 구조는 동일했다.


냉전: 적과 동지의 전세계적 확장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소련과의 냉전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 시기 미국의 전략적 사고에서 슈미트적 적-동지 구분이 전세계적 규모로 작동했다.


세계는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나뉜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 미국의 사명이다. 이 프레임 안에서 어떤 정권이든 반공이면 동지가 되고, 어떤 민주적 정부든 좌파적 성향이 있으면 잠재적 적이 됐다.


1953년 이란에서 모사데크 정부를 무너뜨린 CIA 쿠데타. 모사데크는 이란의 석유를 국유화하려 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총리였다. CIA는 그를 제거하고 팔라비 왕정을 복원했다. 명분은 공산주의의 위협이었다. 실제 이해관계는 영미 석유 자본의 이권이었다.


1954년 과테말라에서 아르벤스 정부를 무너뜨린 CIA 쿠데타. 아르벤스는 토지 개혁을 추진했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보유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정책이었다. CIA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쿠데타를 지원했다.


1973년 칠레에서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쿠데타. 아옌데는 선거로 당선된 사회주의 대통령이었다. 닉슨 행정부는 칠레 경제를 조여 "비명을 지르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이 사례들의 공통 구조가 있다. 우리가 그 지역의 상황을 안다. 우리가 그 지역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이 있다. 그 결정에 따르지 않는 정부는 제거될 수 있다. 홀든의 언어로 하면 이렇다. 나의 허가 없이 존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민주당 행정부도 공화당 행정부도 이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트루먼은 봉쇄 정책을 세웠고, 아이젠하워는 이란과 과테말라 쿠데타를 승인했고, 케네디는 피그만 침공을 기획했고, 존슨은 베트남 전쟁을 확대했고, 닉슨은 칠레 쿠데타를 지원했다. 당적은 달랐다. 논리 구조는 같았다.


베트남 전쟁: 전쟁이 목적이 되는 순간


베트남 전쟁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실패하는 지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전쟁은 방향을 잃는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전쟁은 처음부터 목적이 불명확했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상태가 되면 목적이 달성된 것인지가 불분명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전쟁 자체가 관성을 갖기 시작했다. 철수하면 지는 것이다. 지면 안 된다. 따라서 계속 싸워야 한다. 이 논리에서 전쟁은 수단에서 목적으로 전환된다.


홀든이 말한 것이 이것이다. 전쟁은 신이다. 전쟁은 다른 무언가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은 어느 순간부터 홀든의 논리로 작동했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해서. 지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불명확한 채로.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나중에 회고록에서 털어놓은 것이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내부적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그러나 전쟁은 계속됐다. 5만 8천 명의 미군이 죽었고, 베트남인 수백만 명이 죽었다.


이라크 전쟁: 지식의 오만과 지배의 논리


2003년 이라크 침공은 홀든의 논리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현대적 사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침공의 근거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들었다. 하지만 그 정보는 조작되거나 과장됐다는 것이 이후 확인됐다. 실제 동기는 복합적이었다. 중동 지역에 대한 전략적 통제, 석유, 이스라엘의 안보, 그리고 9.11 이후의 정치적 동학.


하지만 이 침공의 더 깊은 논리 구조를 보면 지식과 지배의 프레임이 있다. 네오콘들이 침공 이후 이라크를 중동 민주화의 교두보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라크 사회를 해체하고 새로 설계하면 된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안다. 우리가 자유 시장을 안다. 우리가 이라크 사회에 그것을 이식하면 된다.


이 사고방식에서 이라크인들의 역사, 문화, 정치적 자율성은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설계자들의 지식이고 의지다.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가 결정한다.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이라크는 붕괴됐다. 수십만 명이 죽었다. IS가 그 폐허에서 태어났다. 설계자들의 지식은 실제 이라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지식에 대해 가졌던 확신은 홀든의 그것과 동일한 구조였다.


민주당도 이 전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상원에서 침공 승인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민주당 상원의원들 중에는 힐러리 클린턴과 존 케리가 있었다. 지지의 논리는 당적에 따라 다르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은 위협이고, 우리는 그 위협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처리할 권한과 능력이 있다.


오바마의 드론 공습: 도덕적 언어와 기술적 살해


버락 오바마는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면서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그의 행정부에서 드론 공습은 전임 부시 행정부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드론 공습의 논리 구조는 홀든적이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를 식별하는 정보를 갖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기술적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제거한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다. 그것은 불행한 부수 피해(collateral damage)다.


"부수 피해"라는 개념 자체가 홀든의 논리를 관료적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정당하다. 우리의 지식과 판단은 옳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는 부차적이다. 우리의 의지가 현실을 구성하고, 그 현실 안에서 타자의 생명은 변수가 된다.


오바마는 부시보다 세련되보이는듯한 언어를 썼다. 국제법을 존중한다고 했고, 동맹을 중시한다고 했고, 다자주의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파키스탄, 예멘, 소말리아에서 수행된 드론 공습의 실제 논리 구조는 이전 행정부들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영미권 철학의 저변: 경험론과 실용주의


홀든의 논리가 미국 정치에서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영미권 철학의 저변에 있는 어떤 경향과 연결된다.


영미권 철학의 주류는 경험론과 실용주의다. 대륙 철학이 선험적 원리와 보편적 이성을 중시했다면, 영미 철학은 경험과 효과를 중시했다. 존 로크는 인간의 정신은 백지(tabula rasa)에서 시작하고 경험을 통해 지식을 축적한다고 했다.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의 실용주의는 진리를 결과로 판단한다. 효과가 있으면 옳다.


이 철학적 전통은 강점을 가지고 있다. 독단적 이론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 하지만 그 강점의 그림자 면이 있다. 효과가 정당성의 기준이 될 때, 효과를 만들어낸 수단의 도덕성은 부차적이 된다. 작동하면 옳다. 이기면 정당하다.


홀든은 이 논리의 극단에 있다. 그는 결과주의자다. 전쟁의 결과가 현실을 구성하고, 그 현실이 정당성이다. 패자는 틀렸다. 왜냐면 졌기 때문에. 이것은 실용주의의 철학적 변형이 아니라 그 논리의 극단적 귀결이다.


프런티어 정신과 그 지속


미국의 역사가 프레더릭 잭슨 터너는 1893년에 "프런티어 테제"를 발표했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는 서부 개척의 경험에서 형성됐다는 주장이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미개척지가 미국인의 성격을 만들었다. 도전, 개인의 능력, 자립, 경쟁.


터너의 테제는 학문적으로는 오래전에 비판됐다. 하지만 그것이 묘사한 자기 이미지는 미국 문화 안에 계속 살아있다. 개척자 정신. 프런티어. 한계 없는 가능성.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홀든이 활동하는 공간이 바로 그 프런티어다. 하지만 맥카시의 프런티어는 터너의 낭만적 프런티어가 아니다. 법이 없고, 따라서 폭력만이 규칙이며, 그 폭력 위에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공간. 이것이 실제 프런티어였고, 미국 문명은 그 위에 세워졌다.


프런티어 정신은 미국의 자기 서사에서 계속 소환된다. 우주 개발을 "마지막 프런티어"라고 부른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문화를 "디지털 프런티어"라고 부른다. 새로운 시장, 새로운 영역으로의 팽창을 미국은 프런티어의 언어로 이해한다. 그 언어 안에 홀든의 논리가 잠재되어 있다. 새로운 영역은 먼저 알고 먼저 점유하는 자의 것이다.


민주당과 공화당: 수사의 차이, 구조의 동일성


이 에세이가 처음부터 강조한 것이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명확히 해야 한다. 홀든의 논리는 미국 정치의 한 파벌의 논리가 아니다.


공화당의 강경파들은 홀든과 언어적으로 더 가깝다. 힘을 통한 평화, 미국 예외주의, 군사력의 노골적 사용. 이 언어는 홀든의 폭력 찬양과 표면적으로 유사하다.


민주당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는 포장이 다르다. 인도주의적 개입, 민주주의 촉진, 인권 보호. 하지만 이 포장 아래의 논리 구조는 동일하다. 우리가 알고,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가 실행한다. 타자의 주권과 자율은 우리의 판단 앞에서 부차적이다.


클린턴 행정부의 코소보 개입은 인도주의적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오바마 행정부의 리비아 개입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가 해당 지역에 안정을 가져왔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리비아는 개입 이후 내전 상태로 빠져들었고 2020년에야 겨우 휴전 중이다. 설계자들의 지식이 현실을 통제하지 못했을 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항상 불분명해졌다.


홀든은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작동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만족을 얻는다. 미국의 대외 개입도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라크는 지금도 불안정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의 전쟁은 탈레반의 재집권으로 끝났다. 리비아는 내전을 겪었다. 책임을 묻는 구조가 없다.


홀든이 춤추는 이유


소설의 마지막에서 홀든은 춤을 춘다. 키드는 죽었다. 갱단은 흩어졌다. 하지만 홀든은 거기 있고, 춤을 추고, 외친다. 나는 절대 죽지 않는다.


이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자. 홀든이 대표하는 논리 — 지식이 지배의 근거이고, 강자의 의지가 현실을 구성하며, 전쟁이 가장 순수한 존재의 형태다 — 는 패배했는가?


역사를 보면 그 논리는 패배하지 않았다. 형태를 바꾸면서 계속 작동했다. 때로는 총과 칼로, 때로는 쿠데타와 봉쇄로, 때로는 드론과 제재로. 수사는 매번 달랐다. 야만의 척결, 공산주의의 봉쇄, 민주주의의 촉진, 테러와의 전쟁. 논리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홀든이 춤추는 술집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이 맥카시가 말하려 한 것이다.


에필로그: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


『핏빛 자오선』을 읽고 나서 느끼는 감각은 불쾌함이나 충격이 아니다. 더 정확히는 안개가 걷히는 것 같은 명료함이다.


미국이 세계에 대해 말해온 언어들 — 자유, 민주주의, 인권, 평화 — 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 언어들은 실재하고, 그 언어로 이루어진 성취들도 실재한다. 하지만 그 언어 아래에 다른 논리가 있다는 것, 그 논리가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작동했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홀든은 그 논리의 극단적 결정체다. 그는 포장 없이 말한다. 그래서 불편하다. 그리고 그래서 유용하다. 홀든의 언어를 읽고 나면, 그 언어의 완화된 버전들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더 잘 보인다.


맥카시는 서부 시대의 이야기를 썼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홀든은 아직 춤추고 있다.


[1] https://web.archive.org/web/20160510020450/http://www.xenosystems.net/war-is-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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