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主權), 책임, 소유: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 일치의 방법론에 관하여

주권(主權), 책임, 소유: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 일치의 방법론에 관하여


서문


빚은 눈에 보인다. 청구서가 오고, 이자가 붙고, 언젠가는 독촉장이 온다. 그런데 어떤 빚은 청구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안보를 빌리고, 시장을 빌리고, 심지어 자기 정권의 존속 가능성 자체를 빌린 나라들이 있다. 그 나라들은 이상하게도 채무자라는 자각이 없다. 청구서가 없으니 빚도 없다고 여긴다.


이 착각을 깨는 순간 한 문명의 골격이 드러난다.


국제금융자본이나 그림자 정부를 들먹이는 음모론은, 해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의 정치꾼들이 해외에 종속된 현실에서 오는 무기력함과 열등감을 털어내고 자주성을 과시하며 뽐내기 가장 좋은 배출구다. 반세계화라는 훌륭해 보이는 명분을 쥐고 정의로운 척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는 현실을 외면하는 눈속임일 뿐이다. 배후의 손을 탓하는 편리한 서사 속에서 정파적 인맥과 연고주의(緣故主義)로 점철된 자국 카르텔의 부실함을 진단할 기회는 사라진다.


문제는 서사가 아니라 태도다. 지원은 당연시하고, 대가는 회피한다. 이것이 일부 해외의존도가 높은 국가에서 흔히 보여지는 현상이다. 국제정치학은 이걸 오래전부터 무임승차(Free-riding)라 불러왔다. 가령, 안보는 미국에, 시장은 미국과 중국에 걸쳐놓고, 정작 그에 따르는 비용은 최소한만 낸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 때마다 반복되는 장면이다. '주권(主權)'과 '자주(自主)'라는 수사(修辭)가 화려할수록, 그 밑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눈앞의 청구서 액수를 줄여보려는 흥정이다.


하지만 이 진단에서 멈추면 절반짜리 분석에 불과하다. 무임승차라는 말은 도덕적 비난에 가깝고, 도덕적 비난은 구조를 설명하지 못한다. 왜 이 패턴이 반복되는가. 왜 정권이 바뀌어도 매번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가. 이 질문을 붙잡고 계속 내려가면, 국제정치의 표면 밑에서 전혀 다른 지형이 나온다. 회계의 문제, 소유의 문제, 그리고 마지막에는 통치라는 것 자체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


이 글은 그 쉽사리 보이지 않는 본질의 궤적을 쫓아 내려간 사유(思惟)의 기록이다.


분석의 출발점은 단순하다. 해외로부터 안보와 시장 접근권이라는 거대한 자원을 빌려 쓰는 대가를 도대체 '누가' 내느냐다. 그것을 공적 재원인 국고(國庫)로 지불하면 정상적인 국가 간 외교 거래가 되지만, 정치인이나 재벌 개인의 주머니에서 내는 순간 그것은 추잡한 뇌물이 된다. 설령 똑같은 금액일지라도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이 질문 하나를 끝까지 따라가면, 국가라는 것이 애초에 누구의 것인가라는 지분(持分)과 소유의 문제로 이어진다. '공공의 돈'과 '내 돈'이 법적으로 칼같이 분리되어 있다면 그 국가는 시민 전체의 것이고, 국가의 부와 통치자의 자산이 애초에 하나라면 그 국가는 1인의 것이다. 이 소유권의 경계를 끝까지 따라가면, 결국 민주정(民主政)과 군주정(君主政)이라는 두 개의 통치 체제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갈림길 위에서, 통치자라는 존재가 국가를 자기 몸처럼 여긴다는 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지, 가능하다면 그런 인물을 어떻게 다시, 또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본질에 대한 집요한 추적의 끝에는 어떤 이름이 하나 기다리고 있다.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그리고 그가 주창한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의 핵심 논리인 '형식주의(Formalism)'다. 여기서 형식주의란 국가를 하나의 기업으로 보고, 모호한 주권 대신 국가의 소유권을 명확히 하여 통치 유인을 정상화하려는 사상이다. 이 이름을 미리 밝혀두는 이유는, 이 글이 결코 특정 사상에 끼워 맞추기 위해 쓰인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국가 지원의 대가와 회계 구조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정직하게 파고들다 보니, 그 논증의 종착지가 우연히 이들의 문제의식과 맞닿았을 뿐이다. 처음부터 이 목적지를 향해 걸은 것이 아니다.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선입견을 품고 결론에 안주하는 전자와, 현상의 궤적을 쫓아 본질에 도달하는 후자는 전혀 다른 행위이며, 이 글은 철저히 후자다


한 가지는 먼저 짚어두어야 한다. 이 글이 다루는 층위는 철저히 통치 체제와 인센티브 구조(Incentive Structure)다. 복지나 분배, 시민권의 자격 같은 가치 지향적인 문제들은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이 글의 분석 기준은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혹은 위계와 평등이라는 제도적 효율성의 축에 가깝다. 이 관점을 미리 공유해두지 않으면, 이 글이 도달하는 결론들이 기존의 정치적 진영 논리에 의해 엉뚱한 곳에 배치될 위험이 있다.


국제정치적 부채, 즉 안보와 시장을 제공받은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책임의 청구서'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빚은 갚아야 한다는 감각이 있어야 존속한다. 그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서 생기는 국가적 위선들, 그리고 그 감각을 인위적으로 되살리려 할 때 통치 구조에 요구되는 것들. 이것이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몸통이다.


1. 수혜와 부담의 불일치: 국고, 사재, 뇌물이라는 회계적 아이러니

국제정치에서 나타나는 '책임의 청구서'는 외교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의사결정 권한과 비용 부담이 서로 다른 주체에게 귀속될 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보다 일반적인 거버넌스의 문제다. 외교는 그 원리가 가장 쉽게 드러나는 사례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외교정책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불일치를 만들어내는 제도적 구조로 옮겨간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는 국가 재정이다. 누가 편익을 얻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가. 그 가장 단순한 회계의 원리에서 논의를 다시 시작해 보자.


공공재정학에는 오래된 원칙이 하나 있다. 편익을 누리는 자가 비용을 낸다는 '수익자 부담 원칙(Benefit Principle)'이다. 상식적으로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명제다. 하지만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이 원칙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교묘하게 무너진다. 사익을 취하는 소수의 기득권이 국고라는 회계적 익명성 뒤로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국가 지원 사업은 이 원칙을 충족한다. 수혜자가 국민 전체고, 부담자도 국민 전체다. 안보를 얻고 세금을 낸다. 산업 경쟁력이 오르고 그 세금이 되돌아온다. 이 순환에서는 국고 지출이 정당하다. 문제는 이 순환이 깨질 때다.


수혜자가 기득권 일부, 특정 재벌, 특정 산업의 카르텔, 정치인의 인맥 네트워크로 좁혀지는데, 부담자는 여전히 국민 전체인 경우. '이익은 사유화되고 손실은 사회화된다(Privatize profits, socialize costs)'는 격언이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낯선 말이 아니다. 이 문구는 경제학과 정치학에서 매우 널리 쓰이는 공식적이고 유서 깊은 격언이다. 그리고 이 격언이 말한 기만적인 구조는 매번 형태만 바꾼 채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왜냐하면 이 불일치를 교정할 자연스러운 압력이 없기 때문이다. 


세금은 익명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공공선택이론의 핵심인 '집중된 이익과 분산된 비용의 법칙(Law of Concentrated Benefits and Diffuse Costs)'이 작동하는 지점이다. 소수 카르텔에게는 막대한 이익이 집중되는 반면, 그로 인한 국고의 손실은 수천만 명의 대중에게 대중 스스로 자각하기 힘든 상대적으로 미미한 액수로 분산된다. 이 '집중된 이익과 분산된 비용'의 비대칭성 때문에, 흩어진 다수가 자신도 모르게 지불한 푼돈의 피해를 자각하고 그 복잡한 회계적 흐름을 추적하는 데 드는 거래비용은, 소수가 담합하여 흐름을 만들어내는 비용보다 언제나 압도적으로 크다. 이 구조적 맹점이 소수의 사익 추구를 영속시키는 알리바이가 된다.


따라서 지극히 상식적인 해결책이 도출된다. 수혜자가 자신의 자산으로 직접 비용을 청산하게 하는 방식이다. 공적 재원인 국고를 동원해 사적 비용을 상쇄하는 행태를 차단하자는 취지다.


그런데 이 직관을 실제로 적용해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국가재정에서 대가를 지불하면, 이건 국가 간의 정상적인 거래로 분류된다. 세금이 나갔고, 그 세금은 국민 전체의 몫이었으니, 회계상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동일한 금액을, 동일한 목적으로, 특정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개인 계좌에서 지불하면 그 순간 그것은 뇌물이 된다. 정확히 같은 거래, 정확히 같은 대가, 정확히 같은 지원일지라도 자금의 출처만 국고에서 개인 지갑으로 옮겼을 뿐인데, 하나는 정상적인 외교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 행위가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가상의 상황을 하나 예로 들어보면 이 기묘한 차이가 더 선명해진다. 두 나라가 있다고 하자. 한쪽은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특정 산업의 시장 접근권을 얻어오는 대가로, 상대국에 인프라 차관 100억 달러를 국고에서 내주기로 서명한다. 국회 동의를 얻고, 예산에 반영되고, 감사원이 사후 점검한다. 아무도 이걸 부패라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 대통령이 같은 조건, 같은 상대, 같은 100억 달러를 자기 개인 재산이나 자신이 지배하는 재단의 돈으로 지불했다고 해보자. 액수의 크기는 본질이 아니다. 단 1억 달러라도, 심지어 그 사실을 대외에 공개하고 언론 앞에서 발표해도 마찬가지다. 이 순간 사법 당국이 움직인다. 사적 자금이 국가의 외교 행위에 개입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죄의 형태를 갖추기 때문이다. 자금의 출처를 국고에서 개인 통장으로 옮겼다는 그 사실 하나가, 외교를 뇌물로 바꾼다.


이걸 아이러니라고 부르고 싶은 유혹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가 아니다. 정확히 논리적이다.


국고 지불의 수혜자는 형식상 국민 전체다. 안보를, 시장 접근을, 공공재를 얻는 건 국민 전체라는 법적 의제(擬制)가 지탱하고 있다. 개인 지불의 수혜자는 그 개인이다. 정치적 비호, 사업 특혜, 차기 권력 승계라는 사적 이익. 뇌물죄의 구성요건은 은폐 여부가 아니다. 몰래 했느냐가 아니라 공적 권한 행사의 대가로 사적 이익이 오갔느냐다. 그러니 투명하게, 각서를 쓰고, 명세서를 작성하고, 대외적으로 공개해도 뇌물 프레임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투명성은 기소를 쉽게 만드는 증거가 된다. 은폐된 뇌물보다 서류화된 서류로 증명된 명확한 대가 관계(quid pro quo)가 법정에서는 더 명확한 물증이다.


여기서 착시가 하나 걷힌다. "떳떳하게 하면 문제없다"는 생각. 이 생각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회계 구조의 문제다. 공직자라는 신분과 사적 개인이라는 신분이 하나의 몸에 겹쳐 있는 한, 그 몸이 무엇을 얼마나 투명하게 지불하든 공적 권한이 사적 거래의 그림자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정치인이 사비(私費)를 쓰지 않는 게 오히려 정석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 명쾌한 법칙 뒤에는 또 다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수혜와 부담의 불일치, 즉 특정 소수만 이득을 보는 사업에 국고를 투입하는 왜곡이 발생했을 때, "사비를 쓰지 않는 게 정석"이라는 논리는 도리어 그 불일치를 덮어버리는 알리바이로 돌변한다. "국고로 지출했으니 정상 거래"라는 회계적 정당성이, 실질적으로는 소수의 사익을 다수의 세금으로 메워주는 행위를 가려주는 방패가 되는 것이다. 정치인은 자기 돈을 한 푼도 안 쓰면서 "내가 강대국 정상과 담판을 지어 지원을 따냈다"고 생색을 낼 수 있다. 그 지원의 실질적 수혜자가 자신의 정치적 네트워크라는 본질은, 그렇게 국고라는 거대한 회계적 익명성 뒤로 숨어버린다.


그러니 진짜 질문은 국고냐 사비(私費)냐가 아니다. 그 지출을 결정하는 자가 '국가의 공적 이익'과 '자신의 사적 이해'를 얼마나 완벽하게 분리할 수 있는가다. 이해충돌 방지나 회전문 규제 같은 제도적 장치가 촘촘한 나라일수록 국고 지출은 본연의 공공성을 유지한다. 반대로 이 장치가 허술한 나라일수록, 국고는 소수의 사익 추구를 가려주는 교묘한 우회로로 전락할 뿐이다. 분리가 무너지는 순간, 국고는 이미 권력자 개인의 창고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이러한 공사(公私)의 분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체제가 있다면 어떤가.


군주가 곧 국가인 체제. 지도자의 개인 자산과 국가 재정이 애초에 다른 두 개의 몸이 아닌 체제.


그 일체화된 체제 안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논해온 회계적 모순과 부패의 정의(定義)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2. 군주정: 국가의 소유권과 통치 인센티브

국고와 사재의 구분은 단순한 회계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통치자가 자신의 결정에 대해 어느 정도의 경제적 책임을 직접 부담하는가를 보여주는 구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가장 극단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 통치자의 재산과 국가의 재산이 다시 하나였다면, 인센티브 구조는 어떻게 달라질까. 군주제는 이러한 사고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사례다.


공적 국고와 사적 자산의 분리가 없는 자리에서는, 자금 출처가 어디든 회계적 모순도 발생하지 않는다.


앞서 짚어봤던 '출처가 국고면 외교이고 사재면 뇌물이 되던' 구도를 다시 복기해보자. 뇌물죄의 프레임이 발동하는 이유는 공직자라는 공적 신분과 사적 개인이라는 신분이 한 몸에 겹쳐 있기 때문이었다. 공적 권한을 쥔 자가 동시에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이 이중성이 전제되어야 "공적 권한이 사적 이익으로 전환됐다"는 죄가 성립한다. 그런데 애초에 이 신분과 재산의 이중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체제가 있다. 바로 군주정(君主政)이다. 정확히는, 군주와 국가 사이에 법적·회계적 경계가 아예 없거나 흐릿한 체제다. 


전근대 절대군주정이 그랬다. 루이 14세가 남긴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은 단순한 과시용 수사가 아니었다. 프랑스 절대왕정에서 국고는 왕의 사유재산이라는 관념이 법적으로 정합했다. 조선 왕조의 내탕금(內帑金) 역시 왕의 개인 금고처럼 불렸으나, 본질적으로는 조세 수취 체계의 일부였다. 왕의 사유재산과 국가재정이 별개의 두 계좌로 쪼개져 있었던 게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계좌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불렀을 뿐이다.


현대에도 이와 유사한 전형적인 사례가 존재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같은 걸프 군주국들이다. 사우디의 국부펀드(PIF)는 형식상 국가기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왕실의 완벽한 통제 하에 움직인다. 왕실의 개인 지출과 국가 예산이 역사적으로 뒤섞여 있었기에, 최근 시작된 회계 분리 시도 자체가 역설적으로 원래는 분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처럼 공적인 국고와 통치자의 사유재산이 하나로 묶인 체제가 민주정보다 강력한 유인을 갖는 지점이 존재한다. 앞서 보았듯, 민주정의 정치인은 자신의 단기적인 임기 동안 국고라는 '타인의 돈'을 쓰며 생색을 내고, 정작 실질적 이득은 자기 카르텔로 빼돌리는 합법적 부패를 저지른다. 심지어 정권이 바뀌면 국가 간의 외교적 약속과 신용을 하루아침에 뒤집어버리는 무책임한 행태도 빈번하다.


반면, 국가 자체를 소유한 군주에게는 국가의 대외적 신용도가 곧 자기 가문의 자산 가치다. 외교 무대에서 사재를 쓰든 국고를 쓰든 그것은 결국 하나의 지갑에서 나가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다수의 세금을 훔쳐 소수의 사익을 메꿨다"는 식의 기만적인 알리바이가 애초에 필요 없다. 나눌 경계가 없으니 사유화라는 비난도 성립하지 않으며, 국가의 장기적 존속과 군주 개인의 이익이 완벽하게 맞물리게 된다.


이 지점에서 민주정의 뇌물죄가 전제하는 법리적 본질이 거꾸로 드러난다. 그 사법적 메커니즘은 특정한 '소유권의 철학' 위에 서 있다. 즉, 국가 자산은 국민 전체의 신탁재산이며 통치자는 그 관리인일 뿐이라는 관념이다. 존 로크(John Locke)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로 이어지는 사회계약론의 유산이다. 여기서 통치자는 소유자가 아니라 수탁자(Trustee)에 불과하다. 수탁자가 신탁재산을 사적으로 유용하면 배임과 횡령이 되며, 여기에 공적 권한의 대가성까지 결합할 때 비로소 뇌물이라는 죄가 법적 성격을 갖게 된다.


반면 군주정, 정확히는 막스 베버(Max Weber)가 《경제와 사회(Economy and Society)》를 통해 전통적 지배의 핵심 구조로 정립한 '가산제(Patrimonialism)' 체제는 민주정의 소유권 철학 자체를 공유하지 않는다. 베버의 분석에 따르면, 가산제 아래서 국가의 통치권과 행정 기구는 공공의 위임 자산이 아니라 통치자 가문이 대대로 상속받은 '임의 처분 가능한 사유재산'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국가는 군주 가문의 사적 가계(家計)와 살림이 거대하게 확장된 형태일 뿐, 그 자체로 재산을 소유하고 계약을 맺는 '독립된 법적 주체(법인격)'가 아니다


이 정당성의 논리는 공화주의적 신탁 관념과 완전히 다른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쪽은 잠시 맡아 관리하는 위탁(委託)이고, 다른 한쪽은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소유(所有)다. 둘은 같은 언어로 서로를 비판할 수 없다. 신탁의 언어로 소유를 비난하면 범주 오류가 되고, 소유의 언어로 신탁을 옹호하면 마찬가지로 어긋난다.


그러니 앞서 짚어봤던 그 기묘한 회계적 모순, 즉 투명하게 서류화할수록 도리어 죄의 형태를 갖추는 사법적 딜레마는 애초에 공화주의적 소유권 철학을 전제한 체제에서만 발생한다. 군주가 곧 국가인 체제에서는 그 모순 자체가 발생할 토양이 없다. 이건 군주정이 민주정보다 더 도덕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 정당성의 논리가 다를 뿐이다. 서로 다른 규칙의 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까지 오면 하나의 함의가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 만약 어떤 나라가 정치인의 사익 추구와 국가의 공익을 완전히 일치시키고 싶다면, 가장 깔끔한 방법은 애초에 그 둘을 나누지 않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소유를 일치시키는 것. 통치자의 장기적 이익이 곧 국가의 장기적 이익이 되도록, 법적 등식을 만들어버리는 처방이다.


이건 논리적으로 완결된 해법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 완결성이 딱 거기서 멈춘다는 점이다.


소유권의 형식적 일치가 실질적인 인센티브의 최적화를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절대군주정의 역사는 무능한 후계자, 사치, 후계 다툼, 측근정치로 점철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 후기나 청나라 말기가 보여주듯, 왕조가 스스로 자기 존속의 이익을 파먹은 사례는 예외가 아니라 반복되는 패턴에 가깝다. 소유권의 형식적 등식이 성립한다고 해서, 그 소유자가 반드시 자산을 장기적·현명하게 관리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법적 등식은 행동의 유인(인센티브)의 방향만 정해줄 뿐, 그 구조가 소유자의 개인적 역량과 통치 능력까지 함께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남는다. 이 등식이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얻는 것은 통치의 '연속성'이다. 왕조는 자식에게 물려줄 자산의 장기적 가치를 고려하며 통치한다. 정권 임기라는 시한이 없으니, 단기적 치적을 위해 미래의 재정을 미리 탕진하는 근시안적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반면 잃는 것은 '견제'다. 무능하거나 부패한 통치자를 축출할 제도적 메커니즘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민주정이 정책의 비일관성을 대가로 치르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이 견제 능력이다. 임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능한 통치자의 권력 유효기간에 명확한 상한선이 있다는 뜻이지만, 군주정에는 이 최소한의 제어 장치가 없다.


그러니 여기서 하나의 트레이드오프가 선명해진다. 신뢰할 수 있는 연속성과, 권력 남용에 대한 견제. 이 둘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대립은 정치학에서 낯설지 않다. 국가 역량(State Capacity), 법치(Rule of Law), 책임성(Accountability)이라는 세 축을 따로 떼어 파악해야 한다는 오래된 통찰이 정확히 이 지점을 가리킨다. 이 세 축의 조합은 체제의 외형과 무관하게 다양하게 변주된다. 좋은 민주정도, 나쁜 민주정도 존재하며, 좋은 군주정이 있는가 하면 나쁜 군주정도 있다. 체제 형태 자체가 성과를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본질적인 질문이 하나 남는다. 완전한 형식적 소유권 일치(군주정)까지 가지 않고도, 통치자의 '시간 선호(Time Preference)'를 국가의 장기적 존속 방향과 일치시킬 제3의 대안이 존재하는가.


여기서 시간 선호란 현재의 이익을 위해 미래의 가치를 얼마나 희생시키는지를 뜻하는 경제학적 개념이다. 임기가 정해진 민주정 정치인은 눈앞의 표를 위해 미래의 재정을 당겨 쓰는 '높은 시간 선호(단기주의(Short-termism))'를 가질 수밖에 없다. 견제 능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임기라는 시한이 만들어내는 이 치명적인 근시안을 우회할 방법이 과연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붙잡고 다시 민주정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번에는 왜 민주정이 그토록 자주 임기라는 시한 앞에서 눈이 멀어버리는지, 그 높은 시간 선호의 무너짐이 얼마나 구조적인 메커니즘인지를 파헤쳐야 한다.


3. 민주정의 구조적 결함: 정권교체와 신뢰 확약 문제


군주제가 갖는 장점은 소유권의 일치가 만들어내는 장기적 유인에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좋은 통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통치자는 여전히 자신의 약속을 미래에도 지킬 것이라는 신뢰를 제공해야 한다.


이제 문제는 소유권이 아니라 신뢰확약(credible commitment)이다.


약속은 미래의 자신을 담보로 삼는 행위다. 그러나 민주정은 구조적으로 담보를 제공할 '지속적인 주체'가 결여되어 있다. 4년 혹은 5년 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전임자와 인센티브를 공유하지 않는 전혀 다른 행위자다. 설령 같은 정당이 재집권하더라도 정권의 연속성이 온전히 보장되지는 않는다.


이 지점에서 국제정치학과 신제도주의 경제학의 고전적 화두인 ‘신뢰 확약 문제(Credible Commitment Problem)’라는 렌즈를 들이대어야 한다. 한 행위자가 미래의 특정 행동을 약속할 때, 훗날 마음이 바뀌어 약속을 깨고 싶은 강력한 사후적 유인이 생기더라도 이를 제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조적 딜레마다. 이 신뢰 확약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으면 국가 간 협상과 대규모 자원 거래는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외교적 지원이나 차관을 제공하는 국가 입장에서, 상대국의 "추후 보상하겠다"는 선언을 강제할 만한 객관적인 제도적 통제 장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정은 주기적인 정권교체를 통해 이 신뢰 확약의 기반을 스스로 잠식하며, 구조적으로 ‘신뢰 확약 문제’를 심화시킨다. 예컨대, 상대국에 장기 인프라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차세대 시장 접근권을 확보하기로 약속한 민주국가 A가 있다고 하자. 정권이 바뀌는 순간, 새 정부는 막대한 재정 부담을 이유로 전임 정권의 경제협력 합의를 단번에 백지화하곤 한다. 이러한 약속 파기는 민주정 외교에서 이례적인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상수에 가깝다. 전 정부의 서명을 후임 정권이 '청산해야 할 구태'나 '지나간 전 정부의 부채'로 규정하며 손을 떼버리기 때문이다.


정치학자들은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청중비용(Audience Cost)'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지도자가 국제무대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한 약속을 번복할 때, 국내 유권자들로부터 치르게 되는 정치적 타격을 의미한다. 이론적으로 이 비용이 무거울수록 국가의 대외적 약속은 강력한 신뢰도를 획득한다. 여론이라는 감시자가 존재하므로, 민주정이 오히려 독재정보다 신뢰할 수 있는 협력 파트너가 된다는 논거로 자주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치명적인 시차적 맹점이 존재한다. 청중비용은 동일한 정권이 동일한 임기 내에 머무를 때만 유효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정권이 교체되는 순간, 이 비용의 계산식은 완전히 리셋된다. 후임 정권은 전임자가 체결한 계약을 파기하더라도 그에 따르는 청중비용을 대리 변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 정부의 외교적 실책을 바로잡는다"는 청산의 서사를 구축함으로써, 잠재적 부채였던 청중비용을 즉각적인 정치적 자산과 보상으로 치환해 버린다. 약속의 파기가 처벌이 아닌 보상으로 귀결되는 구조적 역설이다.


이 지점에서 논리를 더 밀어붙여 보자.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이 국가 간 협력과 생존의 필수 조건임에도 민주정이 구조적으로 이를 생산할 수 없다면, 순수하게 이 영속성의 문제 하나만 놓고 볼 때, 최적의 해법은 '임기가 존재하지 않는 통치자'의 출현이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자의 시간 지평(Time horizon)이 자기 생애와 가문의 미래까지 통째로 포괄한다면, 그 약속은 미래의 신용을 담보할 실재적 주체가 존재하므로 신뢰의 가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이 논증의 종착지에서 우리는 결국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Leviathan)』과 마주하게 된다. 홉스가 말한 주권자는 단순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이 아니다. 그는 사익과 국익이 수학적으로 완전히 등치되는 '인위적인 단일 주체'다. 홉스에 따르면 주권이 의회나 정파로 분열되는 순간, 국가의 의지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혼돈(자연상태)으로 회귀한다. 통치자의 시한이 사라지고 주권의 분열이 차단될 때 비로소 국가는 미래의 시간까지 저당 잡혀 대외적인 '신뢰할 수 있는 계약'을 체결할 물리적 기초를 얻는다. 계약을 강제할 절대적인 권력과 영속적인 시간이 한 몸에 결합한 상태, 그것이 리바이어던이다.


이 결론은 논리적으로 대단히 매끈하다. 그리고 바로 그 매끈함 자체가 의심스럽다.


다론 아제몰루(Kamer Daron Acemoglu)와 제임스 로빈슨(James A. Robinson)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를 통해 정립한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의 역학'을 이 지점에 배치해야 비로소 사유의 균형이 잡힌다. 외교적 약속을 이행하는 국가 역량과 내부적 폭정을 방지하는 분권 능력은 동일한 시소의 양 끝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두 저자의 논증에 따르면, 국가가 지속 가능한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질서와 신뢰를 생산할 '중앙집권화된 권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임기 없는 통치자가 대외적 신뢰를 쉽게 획득하는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기에 정책의 연속성이 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집권화된 권력이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는 '다원주의(Pluralism)'적 견제 장치와 결합하지 못할 때, 체제는 필연적으로 권력자가 자국민의 고혈을 짜내 사익을 채우는 '착취적 체제'로 타락한다.


견제 장치가 전무한 절대권력은 공익에 부합하는 좋은 약속만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에 치명적인 나쁜 약속도, 국민을 파멸로 이끄는 해로운 결정도 똑같이 오랜 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관철한다. '신뢰성'이나 '예측 가능성'이라는 가치가 언제나 선한 방향으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일례로 스탈린이 감행한 대숙청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정교한 내부적 일관성을 유지하며 지속되었다. 그 무자비한 예측 가능성이 곧 독재 정권의 신뢰성이었고, 그 신뢰성이 곧 거대한 재앙이었다.


그러니 민주정이 보여주는 외교적 비일관성은 치명적인 결함인 동시에, 체제가 착취적 폭정으로 완전히 침전하는 것을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이 이중성을 사장한 채 결함만을 도려내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그 종착지는 언제나 폭정을 제어할 방법이 상실된 체제뿐이다. 논증으로서는 정합적이나, 통치 처방으로서는 극히 위험하다. 이 정합성과 위험성이라는 모순적인 두 현실을 한 시야에 담아두는 것, 그것이 이 글이 견지하려는 관점이다.


그렇다면 극단적인 민주정의 결함에 함몰되지도, 절대주권이라는 폭정의 유혹에 굴복하지도 않는 그 회색지대에서, 대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을 길어 올리는 실제적인 제도 장치들은 무엇인가?


완전한 민주정도, 완전한 절대주권도 아닌 그 회색지대에서, 대외적인 신뢰를 길어 올리는 실제적인 장치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초당적 외교 규범(Bipartisan Consensus)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핵심 동맹이나 조약만큼은 결코 훼손하지 않는다는 정치권의 암묵적 합의를 뜻한다. 냉전기 미국의 대소련 봉쇄정책이 공화당과 민주당의 진영 논리를 넘어 40년 가깝게 일관성을 유지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는 관료제의 연속성(Bureaucratic Continuity)이다. 정무직 지도자는 선거에 따라 끊임없이 교체되지만, 외교부와 국방부의 실무 관료들은 정권의 명멸과 무관하게 자리를 지키며 국가의 장기 기억을 담당한다. 마지막으로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다. 외교적 조약을 국내법적 효력으로 격상시키거나 헌법적 장치와 결합함으로써, 단순한 정권교체만으로는 손댈 수 없도록 쐐기를 박는 방식이다.


이 제도적 장치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통치자 개인의 짧은 시간 지평을 제도를 통해 강제로 늘리는 것이다. 정치인 한 명의 임기는 시한부일지라도, 그가 활동하는 시스템의 시간 지평을 인위적으로 길게 설계함으로써 개인의 구조적 근시안을 제도가 보정하게 만드는 역학이다.


여기서 사유의 중대한 전환이 이루어진다. 절대적인 권력을 쥔 한 사람의 탁월한 역량(Virtù)에 기댈 것인가, 아니면 그 역량이 결여되어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정교한 제도를 설계할 것인가. 이 갈림길은 사실 정치사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다.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가 『군주론(The Prince)』을 통해 국가를 창건할 강력한 일인의 비르투를 역설하면서도, 동시에 『로마사 논고(Discourses on Livy)』를 통해 그 인격이 사라진 뒤에도 체제를 영속시킬 공화정의 제도적 설계를 고민했던 바로 그 고뇌의 지점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붙잡는 순간, 우리의 논의는 체제의 외형적 형태라는 틀을 깨고 통치자라는 '인간 존재 자체의 희소성'이라는 본질로 옮겨가야 한다. 국가의 안위와 자신의 안위를 수학적으로 일치시키며, 국가를 정말로 자기 몸처럼 여기는 인간이 대체 역사상 얼마나 드문 존재인가라는 서늘한 질문으로 말이다.


4. 비르투의 희소성과 관료제


제도가 신뢰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제도를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장기적 관점을 갖는 통치자와 관료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고전 정치사상은 이 문제를 '비르투'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현대 국가에서 비르투는 더 이상 개인의 덕목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


국가를 자기 몸처럼 여기는 인간은 실재한다. 문제는 그 인간이 통계적으로 거의 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가 '비르투(Virtù)'라고 명명한 것은 단순히 탁월한 행정 능력이나 지략을 뜻하지 않는다. 변동하는 정세의 찰나를 포착하는 감각, 가혹한 운명인 '포르투나(Fortuna)'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결단,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 개인의 물리적 운명과 국가의 영속적 운명을 하나로 완전히 겹쳐 보는 능력'이다. 이 마지막 결착이 비르투의 핵심이다. 권력을 쥔 능력자는 도처에 널려 있으나, 자아의 인센티브와 국가의 이해관계를 진심으로 등치시키는 자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통치자는 공익을 수호하는 척을 할 뿐이며, 그 기만적인 연출과 실재하는 비르투는 오직 국가적 위기의 순간에만 명확히 갈라진다.


리콴유의 싱가포르, 그리고 박정희의 한국. 이 이름들이 현대인들에게 복잡한 불편함을 자아내는 이유는 단순히 이들의 통치가 단순히 권위주의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본질적인 불편함은, 이들이 실제로 국가를 자신들의 사유물처럼 거칠게 다루면서도, 동시에 그 사유물의 가치를 장기적으로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 존재를 던졌다는 사실에 있다. 이 기묘한 독재의 공간에서는 국가 자산의 사유화와 국부의 증진이 충돌하지 않고 역설적으로 결합했다. 경제기획원이 수립한 5개년 계획들은 당장 눈앞의 선거를 계산하지 않았다. 오직 국가의 장기적인 생존을 위한 노력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 이는 시한부 임기를 가진 민주정의 짧은 시간 지평으로는 도저히 해명되지 않는 궤적이다.


이들의 통치에서 국가의 성패는 곧 통치자 개인의 생리적 신체 반응과 동기화되어 있었다.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강제 독립을 당하며 "싱가포르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전 세계 카메라 앞에서 생방송으로 통곡했던 리콴유에게, 국가의 대외 신용도와 달러 보유고는 곧 자신의 혈압과 심장 박동을 결정하는 생체 지표였다. 거리의 사소한 낙서나 공항의 사소한 물류 적체조차 자신의 신체에 가해진 물리적 오염으로 받아들였던 그의 극단적인 결벽성은, 국가라는 유기체를 완벽하게 장악하려는 군주적 강박증 그 자체였다.


박정희 역시 국가의 거시경제 지표와 개인의 신체적 희로애락이 완벽하게 묶여 있던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였다. 매월 열린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보고되는 수출 실적 그래프의 굴곡에 따라 그의 하루 생체 리듬이 지배당했다. 목표치가 미달하면 회의장을 얼어붙게 만들고 식사를 거르던 냉혹함은, 포항제철 용광로에서 마침내 첫 쇳물이 뿜어져 나왔다는 보고를 전해 들을 때나,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날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 흙먼지 묻은 샴페인을 들이켜며 아이처럼 격정적으로 감격을 토해내던 희열로 치환되곤 했다. 국가의 산업 총량이 곧 자기 자아의 영토였고, 국가의 성장은 그의 자아 실현을 넘어 생리적인 쾌락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기괴할 정도로 완벽한 결합을 이뤄낸 인물들이 왜 이토록 역사상 희귀한가. 답은 단순하다. 비르투는 유전되지 않으며, 안정적으로 학습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리콴유라는 독보적인 주체가 가졌던 비르투가 그의 후계자에게 그대로 세습될 수는 없었다. 정교한 후계 설계의 산물인 리셴룽이 아버지의 궤적을 상당 부분 모방하고 계승해 냈지만, 국제사회가 그 계승 자체를 극히 이례적인 성공 사례로 취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비르투 세습의 불가능성을 증명한다. 대부분의 가산제 왕조와 카리스마적 지배의 이면에는, 창업자의 거대한 신체적 동조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류와 삼류 후계자들의 나태함이 필연적으로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근본적인 체제 설계 문제가 부상한다. 비르투를 가진 탁월한 통치자가 한 세대에 우연히 출현했다면, 그 단절된 세대의 성취를 다음 세대까지 어떻게 온전히 이관할 것인가. 인물 개인의 비르투에 의존하는 거버넌스는 필연적으로 파멸을 유예할 뿐이다. 생물학적 인간은 반드시 죽고, 그 물리적 소멸과 함께 그가 가졌던 비르투도 대책 없이 증발하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라는 무대에 남겨지는 것은 오직 그 인물이 남긴 제도의 유골뿐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이 권력의 유한성 문제를 정면으로 해부했다. 베버에 따르면 카리스마적 지배(Charismatic Authority)는 본질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권력 형태다. 카리스마는 초자연적이거나 비일상적인 개인의 천재성에 귀속되는 일시적 자질이기에, 제도적 유산처럼 후계자에게 고스란히 상속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베버가 제시한 이 치명적 불안정성의 해법이 바로 '카리스마의 일상화(Routinization of Charisma)'다. 비일상적인 영웅의 계시와 직관을,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관료제적 규칙과 문서적 절차(Rational-Legal)로 응고시키는 강박적 과정이다. 창업자의 천재적인 결단은 조직의 표준 매뉴얼이 되고, 그의 날카로운 통찰은 하위 관료들이 기계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표준운영절차(SOP)의 궤적으로 환원된다.


관료제는 역설적이게도 '비르투의 영구적 부재'를 기본 전제로 설계된 차가운 시스템이다. 뛰어난 한 명의 거인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시스템 자체가 평범한 인간들의 합리적 협업을 통해 평균 이상의 결과물을 도출하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설계 철학 자체가 일종의 서글픈 자백이다. 우리는 리콴유나 박정희 같은 돌연변이를 매번 정기적으로 생산해 낼 수 없다는 현실적 자백 말이다. 그러니 창업자가 옳게 판단했던 그 특정한 개발의 궤적을, 그의 천재성 없이도 재현할 수 있는 차가운 법적·절차적 규칙으로 박제해 두자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기획원(EPB) 사례가 신제도주의 경제학 관점에서 극도로 흥미로운 이유가 정확히 여기에 있다. 박정희 개인의 중화학공업 드라이브와 개발주의(Developmentalism)적 비르투는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사장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경제기획원이라는 기술관료(Technocrat) 조직은 그의 직관적 의지를 고도의 거시경제 계량 모델과 예산 통제권이라는 절차적 무기로 번역해 냈다. 자원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산업 정책의 스크리닝(Screening) 구조, 고시 제도를 통한 비정치적 엘리트의 충원과 승진의 능력주의(Meritocracy) 기준, 그리고 정당의 포퓰리즘적 요구로부터 국가 재정을 방어하는 독점적 예산 편성권. 이 모든 제도적 장치는 통치자 개인의 비르투를 관료 조직의 지적 관성으로 강제 전환하는 정교한 여과 장치였다. 박정희라는 물리적 신체가 소멸한 뒤에도 이 관료제적 관성은 한동안 국가의 시간 지평을 지탱해 주었다. 조직화된 관성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동안 시스템은 정상 작동했으나, 선거 승리가 지상과제가 된 민주화 이후 정파적 계산에 의해 이 기획원 체제가 해체되고 오염되는 순간부터 국가의 시간 지평은 다시 급격히 수축하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소환해야 하는 필연성이 발생한다. 아비투스는 개인이 매 순간 의식적으로 계산하거나 선택하지 않아도, 무의식중에 발현되는 육체화된 성향 체계다. 만약 국가를 자기 몸처럼 여기는 강박적 태도가 지도자 개인을 넘어, 특정 통치 엘리트 집단 전체의 공통된 아비투스로 안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개별 인물이 지닌 비르투의 우연성과 희소성에 목매지 않고도 그 집단에서 배출되는 행위자 누구든 국가의 장기적 이익이라는 정해진 궤도로 움직이게 유도할 수 있다. 인물이라는 일시적 주체가 아니라, 엘리트 집단이라는 지속적인 성향의 메커니즘을 설계하는 경로다.


그러나 이 경로에는 가혹한 체제적 대가가 수반된다. 아비투스가 하나의 견고한 규범으로 내부화되려면 반드시 일정 수준 이상의 외부적 폐쇄성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완전히 개방되어 이질적인 행위자들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빠져나가는 구조에서는, 공통의 아비투스가 집단 기억으로 응고될 최소한의 시간 지평이 확보되지 않는다. 진입할 때마다 매번 같은 규범을 처음부터 재학습해야 하는 지체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반대로 이 딜레마의 반대편인 완전한 폐쇄성을 선택한 집단은 필연적으로 자신들만의 성벽을 쌓은 채 비밀주의와 번문욕례(繁文縟禮) 속으로 침전한다. 외부의 새로운 정보가 차단된 채 현실 감각을 상실한 관료들은, 오직 선례답습과 법규만능주의라는 무사안일의 습속에 갇혀 창의성을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자신들 소수 엘리트 집단의 사익(Cartel Interest)과 조직의 보존을 곧 국가의 장기적 공익(National Interest)이라고 오판하는 치명적인 인지부조화에 이르게 된다.


이 개방성과 폐쇄성의 딜레마는 결코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는 영구적인 연속선이다. 시스템의 균형추를 어느 지점에 정박시켜야 하는가의 문제는, 한 번의 제도 설계로 영원히 안심할 수 있는 정답이 아니라 매 정권마다 끊임없이 재계산해야 하는 가변적인 고차방정식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질문은 다시 한번 차원을 바꾼다. 체제의 외형이 민주정이냐 군주정이냐는 이제 부차적인 유희에 불과하다. 진짜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통치자든, 혹은 그들을 떠받치는 엘리트 집단이든, 그들의 '인센티브(Incentive) 구조'를 어떻게 정교하게 짜 맞추어야 개인의 필연적인 사익 추구 행위가 도망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공익의 댐으로 흘러 들어갈 것인가. 이 냉혹한 효율성의 질문 앞에서 군주정과 민주정이라는 체제의 형태는 목적이 아니라, 단지 인센티브를 구동하기 위한 가변적인 수단일 뿐이다.


이 거대한 질문을 붙잡고 사상사의 심해로 내려가면, '정치에서 엘리트의 존재는 불가피하다'는 냉정한 관찰에서 출발해 그 불가피한 존재들을 정교한 제도로 길들이고자 고군분투해 온 지적 계보와 마주하게 된다. 다수 대중의 지배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소수 지배 계급의 철칙을 고발했던 가에타노 모스카(Gaetano Mosca)와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 그리고 아무리 민주적인 조직이라도 결국 소수의 독점 체제로 귀결된다는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을 정립한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의 고전 엘리트주의 이론에서 시작하여, 그 이기적 행위자들의 전략적 계산을 수학적으로 통제하려는 현대의 공공선택론(Public Choice)과 메커니즘 설계(Mechanism Design)로 이어지는 차갑고도 정교한 현실주의의 계보 말이다.


5. 엘리트주의 이론·공공선택론·메커니즘 설계의 교차점


개인의 역량은 사라질 수 있지만, 조직은 경험과 규범을 축적한다. 그렇다면 통치의 지속성은 개인보다 조직의 구조 속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서 비르투는 개인의 품성이 아니라 조직이 재생산하는 능력으로 다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는 엘리트와 관료제의 문제로 이어진다.


가에타노 모스카(Gaetano Mosca)는 1896년에 이미 극도로 냉소적이었다. 어떤 사회든 고도의 조직력과 전략적 결속력을 지닌 '조직된 소수'가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파편화되어 있는 '조직되지 않은 다수'를 지배한다는 법칙이다. 이는 당위를 따지는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인류사를 관통하는 차가운 관찰의 결과물이다. 그는 이 지배 집단을 ‘정치계급(Classe Politica)’이라 명명했다. 체제의 외형이 주권을 강조하는 민주정이든, 혈통을 앞세우는 군주정이든,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신정(Theocracy)이든 관계없다. 국가의 실질적인 의사결정과 자원 배분을 독점하는 자는 언제나 소수의 정치계급이다. 절대다수의 대중은 그들이 내려놓은 결정을 사후적으로 추인하거나(선거), 기껏해야 소극적으로 저항할 뿐 시스템의 전면에서 결정 자체를 생산하지 못한다.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는 1911년, 이 거시적인 관찰을 조직 내부의 미시적인 세포 구조로 가져갔다. 그 유명한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이다. 아무리 평등, 분권, 대중 해방이라는 숭고한 이상주의적 깃발을 내걸고 출발한 조직이라 할지라도, 규모가 비대해지고 관리해야 할 자원이 늘어나면 행정적 효율성과 전문성을 위해 필연적으로 소수 지도부에게 전권과 실권이 집중된다. 미헬스가 현미경을 들이댄 대상은 역설적이게도 당시 급진적인 민주주의와 노동자 해방을 외치던 독일사회민주당(SPD)이었다. 대중 정당조차 관료화와 과두화라는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확인한 미헬스는 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조직을 말하는 자는 곧 과두제를 말하는 것이다."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는 1916년, 이 고정된 지배 구조에 동학(Dynamics)을 불어넣었다. 바로 ‘엘리트의 순환(Circulation of Elites)’이다. 지배력을 영원히 독점하는 단일 엘리트는 존재하지 않으며, 집권 엘리트가 노화하여 시스템 전반의 지적·물리적 활력을 상실하면 하부 계급에서 부상하는 새로운 엘리트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파레토는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려 이를 '사자와 여우'의 영구적인 룰렛으로 묘사했다. 물리적인 억압과 마초적 힘으로 군림하는 사자형 엘리트가 득세하다가, 체제가 안정되면 외교적 기만과 법적 교묘함으로 통치하는 여우형 엘리트가 그 자리를 물려받는 순환 구조다. 대중이 열광하는 '혁명'이라는 거대한 극장 정치 역시, 파레토의 눈에는 엘리트 지배 체제 자체의 소멸이 아니라 구(舊) 엘리트가 더 젊고 굶주린 신(新) 엘리트로 교체되는 냉혹한 권력 이관 의식에 불과하다. 다수는 늘 지배당하며, 단지 주인의 얼굴이 바뀔 뿐이다.


이 세 거두의 통찰을 하나의 수식으로 묶으면 명징한 결론에 도달한다. 엘리트 지배는 역사적 우연이나 통치자 개인의 사악함이 만든 일탈이 아니라, 인간 사회 조직화의 본질이 낳은 ‘구조적 상수’라는 점이다. 낭만적인 이상주의나 포퓰리즘적 혁명으로 박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인류가 어떤 체제를 고안하든 반드시 그 하부에서 재생산되는 필연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지독한 오해가 있다. 흔히 대중은 '엘리트주의'라는 단어를 접할 때, 소수의 잘난 인간들이 대중을 지배하는 것이 옳다는 '규범적(Normative) 주장'으로 받아들이며 분노하곤 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이 정립한 엘리트 이론(Elite Theory)의 본질은 당위의 영역이 아닌, 철저한 '기술적(Descriptive) 설명'에 있다. 즉, "소수가 통치해야만 한다"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아무리 뒤져보고 제도를 뒤집어봐도 "결국 소수가 통치하고 있는 것이 냉혹한 현실"임을 과학적으로 고발하는 렌즈다. 통치 엘리트의 존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외형적 수사(Rhetoric)에 속지 말고 그 권력의 핵심에 실재하는 소수의 기하학적 메커니즘을 직시하라는 현실주의적 요청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민주정의 이념가들과 대중운동은 이 '기술적 사실'을 부정하려다 길을 잃고 냉소로 침전했다. 어차피 소수가 지배하니 모든 체제는 다 똑같다는 전형적인 도덕적 체념이다. 그러나 이 관찰을 감상주의를 배제한 채 정말 끝까지 진지하게 밀어붙이면, 오히려 정반대의 역동적인 설계론적 결론이 도출된다. 엘리트 지배가 도저히 제거할 수 없는 우주의 상수라면, 그 상수를 없애보겠다는 유토피아적 헛수고에 국가의 에너지를 탕진할 것이 아니라, 그 불가피한 상수를 '어떤 유인 구조로 설계하느냐'가 인간이 제도 수정을 통해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독립변수라는 사실이다.


이 독립변수를 통제하기 위해, 바로 이 지점에서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과 고든 털록(Gordon Tullock)이 정립한 공공선택론(Public Choice Theory)이 구원의 투수로 등판한다. 이들이 학계에 던진 폭탄은 단순하지만 극도로 급진적이었다. 정치인과 관료를 국가와 공익을 위해 봉사하는 숭고한 화신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장의 이기적 행위자와 똑같은 인간으로 취급한 것이다. 뷰캐넌은 이를 '로맨스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Romance)'라 불렀다. 시장에서 소비자가 효용을 좇고 생산자가 이윤을 좇듯, 정치인은 오직 '선거에서의 재선과 권력 획득'을 좇으며, 관료는 '자기 부서의 예산 팽창과 권한 확대'라는 사익을 추구할 뿐이다. 이는 정치 체제를 향한 감정적 냉소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동물을 있는 그대로 모델링하여 시스템을 짜기 위한 가장 냉철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적 전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체제를 향한 모든 질문의 패러다임이 전면 전환된다. 대중이 흔히 던지는 "어떻게 사심 없고 도덕적인 정치인을 감별하여 뽑을 것인가"는 완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잘못된 질문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사심 없는 정치인이라는 인간 범주는 통계적으로 거의 공집합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던져야 할 유일하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다. "정치인과 관료가 철저히 자기 사심을 좇아 본능적으로 행동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기적 행동의 최종 결과물이 신기하게도 공익에 부합하도록 게임의 규칙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뷰캐넌은 이 규칙의 설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헌법경제학(Constitutional Economics)’이라 명명했다. 게임판 위에서 개별 플레이어의 도덕성에 호소하는 층위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어떤 짓을 해도 공익을 벗어날 수 없도록 게임의 규칙 자체를 수학적으로 옭아매는 고차원의 엔지니어링이다.


현대 경제학의 정점인 메커니즘 설계(Mechanism Design)는 이 발상을 수학적·게임이론적으로 정교화한 공학적 학문이다. 참가자 각자가 오직 자신의 사익만을 위해 전략적으로 최선을 다해 계산하고 행동해도, 규칙 자체의 내적 구조(Architecture) 때문에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최적의 결과(Social Optimum)가 도출되도록 시스템을 짜는 기술이다.


199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윌리엄 빅크리(William Vickrey)가 제안한 '빅크리 경매(Vickrey Auction, 2등 가격 밀봉경매)'가 이를 보여주는 완벽한 시금석이다. 이 경매 방식에서는 가장 높은 금액을 적어낸 사람이 낙찰받되, 돈은 자신이 적은 금액이 아니라 '2등이 적어낸 금액'을 지불하게 규칙을 짠다. 이 사소해 보이는 규칙 하나가 거대한 심리적 반전을 낳는다. 참가자들은 가격을 속이거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자신이 그 물건에 대해 진짜로 지불할 의사가 있는 가치(True Valuation)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적어내는 것이 수학적으로 자신에게 무조건 가장 유리하게 유인 구조가 고정되어 버린다. 이를 메커니즘 설계에서는 '유인 부합성(Incentive Compatibility)'이라 부른다. "정직하게 행동하라"는 단 한 마디의 도덕적 훈계나 윤리적 검열 없이, 오직 이기심을 역이용한 순수한 구조의 힘만으로 완벽한 정직과 시장 효율성을 인출해 내는 것이다.


고전 엘리트주의 이론의 차가운 기술적 관찰, 공공선택론의 로맨스 없는 인간관, 그리고 메커니즘 설계의 정교한 공학적 태도라는 이 세 갈래의 거대한 흐름을 하나로 용접하면, 지금까지 이 글이 걸어온 길 전체가 단 하나의 철학적 문장으로 압축된다. 엘리트 지배는 인간 조직화의 피할 수 없는 불변의 상수다. 그러니 통치 체제의 유토피아적 이상은 엘리트라는 존재 자체를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엘리트들의 필연적인 사익 추구 행위가 자동적으로 국가의 장기적 공익과 정렬(Alignment)되도록 그들이 갇혀 있는 게임의 규칙을 공학적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이 공학적 명제 안에 지금까지 우리가 앞서 해왔던 사유들이 정교하게 접혀 들어간다. 


우리는 가장 먼저 공익과 사익의 유인 구조가 완전히 분리된 채 방치되었을 때 발생하는 '국고의 사유화와 외교적 부채'의 참상을 목격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국가 자산의 소유권과 통치자의 주머니를 법적으로 등치시킴으로써 이 분리 자체를 원천적으로 지워버리려 했던 '군주정의 가산제적 시도'를 해부했다. 그러나 권력의 독점과 폭정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민주정'은, 주기적인 정권교체라는 시간적 비일관성을 낳으며 대외적인 '신뢰 확약 문제'를 심화시키는 불완전성을 노출했다. 결국 인류는 소멸하기 마련인 통치자 개인의 일시적인 비르투(Virtù)에 의존하는 대신, 이를 영속적인 규칙과 행정적 관성으로 박제해 두기 위해 '관료제'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고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역사적 전개는 결국 단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이 낳은 거대한 변주곡들이었다. 사익과 공익을 어떻게 형식적으로든, 혹은 실질적으로든 일치시킬 것인가.


이 메커니즘을 현실에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인센티브 — 아비투스 — 개인적 기질(Disposition)'이라는 세 가지 조형적 층위를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인센티브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유인 구조이자 제도적 규칙의 영역이다. 아비투스는 그 유인 구조에 오랜 기간 노출된 특정 엘리트 집단이 몸에 새겨 넣은 집단적 무의식 성향이다. 그리고 최종 단계의 기질은 시스템을 거쳐 간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남는 최종적인 각 개인 본연의 체질이다.


공학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인센티브 구조가 수십 년간 반복되면 그에 부합하는 건강한 아비투스가 형성되고, 그 아비투스는 마침내 개별 관료들의 주관적 기질로 내려가 단단히 굳어진다. 반대로 나쁜 인센티브가 낳은 기만적인 아비투스는, 사후에 규칙을 합리적으로 바꾼다 한들 가공할 만한 조직적 관성이 되어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그 어떤 국가의 제도 개혁도 늘 더디고 늦게 효과를 발휘하는 본질적인 비극의 이유다. 제도적 규칙은 하루 만에 바꿀 수 있어도, 인간의 체질은 한 세대를 통째로 갈아 넣어야 비로소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선발(Selection)과 등장(Emergence)의 구분이 임계점에 도달한다. 공익과 사익이 정렬된 최적의 통치 엘리트를 확보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경로다. 하나는 선발이다. 고도화된 시험, 엄격한 평판 검증 체계를 통해 이미 준비된 성향을 가진 자를 정밀하게 걸러내는 필터링 장치다. 다른 하나는 등장이다. 특정하게 고안된 환경과 조직 문화, 도제식 훈련에 피선선발자들을 장기간 노출시킴으로써 국가를 내 몸처럼 여기는 태도를 후천적으로 배양해 내는 인큐베이팅 장치다. 역사상 가장 정교했던 엘리트 재생산 체계인 과거제(Imperial Examination)가 정확히 이 둘을 예술적으로 융합한 사례였다. 그들은 고시를 통해 날카로운 지성을 선발했고, 평생에 걸친 관직 생활의 규범을 통해 통치 엘리트로서의 아비투스를 등장시켰다.


이제 이 모든 사유의 파편들을 하나의 완성된 거대한 설계도로 종합할 전율의 시점이 왔다. 인간의 필연적인 사익과 국가의 영속적인 공익을 기하학적으로 정렬시키는 그 거버넌스의 최종 형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차가운 설계도를 타협 없이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될 종착지는 어디인지 말이다.


그 종착지에는, 이미 이름이 붙어 있다.


6. 형식적 소유와 실질적 권력


엘리트의 존재가 모든 정치체제에서 반복되는 상수라면, 문제는 엘리트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유인을 어떻게 공익과 정렬시키는가이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메커니즘 설계의 문제가 된다.


논리를 정직하게 따라가면 가끔 전혀 예상치 못한 좌표에 도착하곤 한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촘촘하게 쌓아 올린 논리의 블록들을 단 한 줄로 세워보자. 사익과 공익의 분리는 외교적 부채와 국고 사유화라는 치명적인 병리를 낳는다. 이 분리를 해결하는 가장 명쾌한 방법은 소유와 권력의 형식적 일치, 즉 국가라는 자산과 통치자의 법적 법격(法格)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가산제적 결착이다. 이 일치는 대외적인 신뢰 확약과 장기적인 시간 지평을 선사하는 대가로 내부적 견제 장치를 상실한다. 이 치명적인 손실을 메우기 위해 기술관료제라는 기구가 요청되지만, 관료제는 인물의 비르투를 규칙으로 응고시키는 과정에서 조직적 관성과 자기복제라는 또 다른 병리를 파생시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체제 설계의 최종 진화 형태는, 엘리트 지배라는 불변의 상수를 명확히 인정한 위에서 그들의 필연적인 사익 추구 성향을 국가의 공익과 정렬시키는 정교한 게임의 규칙을 짜는 공학적 지향점으로 수렴된다.


이 사유의 사슬을 단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끝까지 이어붙이면, 결과는 단 하나의 극단적인 설계도로 귀착된다. 국가를 명확한 소유권자가 존재하는 법인 자산으로 재정의하는 것, 그 소유자의 사익이 자산 가치의 장기적 극대화와 수학적으로 일치하도록 유인 구조를 고정하는 것, 그리고 그 소유자를 견제하는 수단으로서의 민주적 투표 제도를 시장 경쟁이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전면 대체하는 것 말이다.


이 도발적인 설계도는 이미 현대 정치사상사에서 뚜렷한 자기 이름을 획득했다. 계몽주의와 민주주의의 기획을 전면 거부하는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 NRx)’, 그리고 국가를 주식회사로 재설계하자는 ‘신관방주의(Neocameralism)’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냉혹한 설계도를 그려낸 인물이 바로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필명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다. 실리콘밸리의 프로그래머 출신인 그는, 철저하게 소스코드를 짜듯 국가의 유인 구조를 재해석하며 최근 미국 우파의 지적 심장부에서 가공할 만한 사상적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야빈의 사유가 출발하는 방법론적 초석은 실질적인 권력 관계를 법적인 소유권과 투명하게 일치시키자는 '형식주의(Formalism)'다.


야빈의 사유가 출발하는 지점은 현대 민주국가의 권력 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이다. 그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진짜 비극은 권력이 어디에 실재하는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극도로 불투명하다는 사실이다. 선출된 임기제 정치인, 영속하는 행정 관료, 여론을 조작하는 언론, 그리고 정당성을 배포하는 학계 카르텔. 야빈은 특히 언론과 거대 학계가 결성한 이 비공식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동질적 권력 복합체를 ‘대성당(The Cathedral)’이라 명명했다. 대성당은 선거라는 무대 뒤에서 대중의 아비투스를 제조하고 지배 여론을 통제하며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하지만, 그 어떤 법적·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 대성당의 존재야말로 앞서 우리가 목격했던 민주정의 구조적 비극, 즉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청중비용의 계산식이 리셋되며 '신뢰 확약 문제'를 심화시키던 현상의 배후다. 정치인들은 국가의 중장기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약속을 맺는 대신, 대성당이 허락한 정치적 올바름의 의제와 당장 눈앞의 선거 표 구걸에만 매달린다. 실질적 권력은 대성당이 쪼개어 행사하고, 법적·정치적 청구서는 임기제 정치인과 국민에게 청구되는 식으로 독박을 쓰게 되는 이 책임의 비대칭성 속에서는 그 어떤 효율적 거버넌스도 불가능하다. 책임의 주체가 불투명하면, 시스템은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야빈이 제시한 '형식주의(Formalism)'는 이 권력의 안개와 불투명성을 공학적으로 걷어내자는 극단적인 처방이다. 실질적인 힘을 가진 숨은 자들에게 형식적인 법적 소유권(Property Right)을 정직하게 부여하여, 권력의 실체와 책임의 장부를 일치시키라는 요구다. 


여기서 그의 가장 핵심적인 체제 모델인 ‘신관방주의(Neocameralism)’가 도출된다. 야빈은 이 체제 아래에서 국가를 숭고한 사회 계약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그는 국가를 ‘주권기업(Sovereign Corporation, 일명 Sovcorp)’으로 재정의하며, 그 내적 구조를 철저하게 영리 목적의 ‘합자회사(Joint-Stock Corporation)’ 형태로 재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권기업(Sovcorp) 모델에서 주주(株主)는 가치 판단이 매번 흔들리는 유권자 대중이 아니다. 국가라는 영토적 자산에 대해 거래와 배당이 가능한 실제 지분(Shares)을 소유한 가분적(可分的) 재산권자들이다. 이 지분 소유자들이 이사회를 구성하고, 이사회가 경영을 총괄할 전문경영인이자 독점적 권력을 쥔 ‘CEO-군주(CEO-Monarch)’를 고용하는 방식이다.


이 신관방주의 체제 아래에서 CEO-군주는 국가라는 주권기업의 장기적인 자산 가치, 즉 국부와 주가를 극대화해야 하는 절대적인 유인 구조에 물리적으로 갇히게 된다. 기업이 파산하거나 가치가 폭락하면 이사회에 의해 즉각 해고당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익과 생존 기반도 동시에 소멸하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우리가 군주정의 역사에서 목격했던 '소유권 등식'과 '낮은 시간선호'의 강점을, 실리콘밸리의 차가운 주식회사 회계 시스템으로 이식하여 완벽하게 정교화한 형태다. 과거의 왕조는 영리적 주권기업으로, 군주는 고용된 최고경영자(CEO)로 치환될 뿐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견제 메커니즘' 역시 전면 교체된다. 야빈은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Albert O. Hirschman)의 고전적 이분법인 '목소리(Voice)'와 '이탈(Exit)'의 역학을 가져온다. 어떤 조직이나 시스템에 결함이 발생했을 때 내부에서 발언권을 행사하고 투표나 시위를 통해 구조를 뜯어고치려는 주체적 행위가 목소리(Voice)라면, 미련 없이 계약을 파기하고 그 조직을 떠나버리는 행위가 이탈(Exit)이다. 민주정은 기본적으로 시끄럽고 비용이 많이 드는 목소리(Voice)의 메커니즘에 올인하는 체제다. 그러나 야빈은 대성당이 여론을 지배하는 민주정 하에서 대중의 목소리(Voice)는 시스템을 정화하기는커녕 비효율과 정쟁(政爭)만 양산하는 최악의 수단이라고 일축한다.


그의 대안은 완벽하게 고안된 이탈(Exit)을 통한 견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야빈은 지구 상의 거대한 영토 주권을 수천 개의 소규모 독립 주식회사형 단위로 잘게 쪼개는 ‘패치워크(Patchwork)’ 체제를 제안한다. 쉽게 말해,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분산형 소형 주권국가 체제'다. 국가들이 마치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처럼 영토 시장에서 무한 경쟁하는 생태계다. 만약 특정 법인-국가의 통치 서비스나 세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시민은 투표장을 찾는 대신 도처에 널려 있는 옆 동네의 다른 소형 주권 국가(Patchwork)로 이주(Exit)해 버리면 그만이다. 이 체제 속에서 각 법인-국가들은 소중한 자산인 인구와 자본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시장 경쟁의 압박 속에서 최고 품질의 치안과 인프라 서비스를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해야만 하는 강력한 유인을 갖게 된다. 시끄러운 정치적 투쟁(Voice)이 하던 견제의 역할을, 차가운 시장의 가격 경쟁(Exit)이 완벽히 대체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소름 돋는 수렴은 우리가 처음부터 야빈의 추종자로서 걸어왔다는 뜻이 아니다. 서로 다른 출발점, 즉 국제정치의 무임승차 구조와 국가 통치 체제의 회계학적 아이러니에서 출발한 차가운 논증이, 단 한 번의 도덕적 타협도 없이 끝까지 밀렸을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논리적 좌표가 바로 이곳임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이 좌표에 정확히 도착했다는 사실이 곧 이 체제의 전적인 정당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이 매끈해 보이는 신반동주의 설계도의 밑바닥에 숨겨진 치명적인 균열들을 응시해야 할 차례다.


그러나 이 매끈해 보이는 주권기업(Sovcorp) 설계도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현실 세계의 중력과 마찰력을 계산에서 누락시킨 세 가지 치명적인 설계 결함이 발견된다. 이 결함들은 체제의 도덕성에 대한 리버럴리즘적 분노가 아니다. 철저히 경제학과 제도 설계의 언어로 해부해야 할 공학적인 누수 지점들이다.


첫 번째 균열은 앞서 추적했던 '소유권 등식'이 지닌 행동경제학적 한계의 재현이다. 신관방주의는 형식적 소유권의 귀속이 실질적인 유인의 정렬을 자동으로 담보할 것이라 낙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행동경제학이 입증하듯, 인간은 소유권 유무와 상관없이 언제나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과 인지적 편향에 갇혀 있는 존재다. CEO-군주에게 절대적 지분이 쥐어지더라도, 그의 정보 처리 능력과 미래 예측 능력이 자동으로 고도화되지는 않는다.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창업자 주도형 스타트업조차 대리인 비용(Agency Cost)을 통제하지 못해 내부 정치로 자멸하거나, 경영자의 독선적 오판으로 파산에 이르는 사례가 허다하다. 형식적 소유권은 유인의 방향을 거시적으로 고정할 뿐, 이를 집행할 실제 능력과 합리성까지 주입해 주지는 못한다. 소유가 곧 완벽한 책임과 능력으로 자동 변환되리라는 이 선형적인 가정을, 복잡계인 인간 기질에 맞추어 세밀하게 보정하지 못한 점은 이 설계도의 가장 아쉬운 지점이다.


두 번째 균열은 견제 메커니즘으로 상정된 이탈(Exit)이 유발하는 신제도주의 경제학적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의 비대칭성이다. 야빈의 패치워크 모델은 소비자가 장을 볼 때 들르는 동네 마트를 바꾸듯 국적을 갈아타는 마찰 없는 생태계를 가정한다. 그러나 현실의 이주에는 언어적 장벽, 자산의 현금화 비용, 매몰 비용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자본과 가족의 해체 등 천문학적인 거래비용이 수반된다. 문제는 이 마찰력이 계층에 따라 극단적으로 불균등하게 분배된다는 점이다. 고소득층과 핵심 기술 관료들은 언제든 자본을 들고 가볍게 이주(Exit)할 수 있어 주권기업을 상시 견제하지만, 이동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평범한 노동자와 빈곤층에게 이주(Exit)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허구적 옵션이다. 결국, 이탈 중심의 견제 시스템은 이동성을 독점한 상위 계급에게만 시장 지배력을 부여하고, 바닥에 묶인 다수에게는 아무런 견제력도 주지 못하는 '견제력의 양극화'를 낳는다. 민주적 발언권(Voice)의 비효율을 치료하겠다며 도입한 시장 메커니즘이, 도리어 불완전 경쟁과 이동 독점이라는 또 다른 시장 실패를 방치한 셈이다. 이 마찰 비용을 상쇄할 정교한 보정 규칙이 설계도에 누락되어 있다.


세 번째는 앞서 예고했던 공공선택이론(Public Choice) 관점에서의 세습 엔트로피 차단 실패다. 오스만 제국의 후기 관료제나 청나라 말기의 몰락, 그리고 재벌 기업들의 치명적인 승계 잔혹사는 예외적 일탈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권력 내부에서 지대추구(Rent-seeking) 성향이 고개를 들고, 조직이 비대해지며 심각한 병리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통계적 규칙성에 가깝다. 소유권의 명확성이 통치의 영속적 질서를 담보해 줄 것이라는 명제는, 인류가 축적한 실증적 통치 기록들과 충돌한다.신관방주의는 통치자 개인을 CEO로 규정했으나, 그를 보좌할 관료 조직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밀주의와 번문욕례(繁文縟禮)에 갇히고, 창의성을 상실한 채 선례답습과 법규만능주의라는 무사안일로 침식되는 고질적인 관료제적 병리를 제어할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이 주권기업(Sovcorp) 모델이 완전한 주식회사 형태로서 영속하려면, 대를 이어 침식되는 무능한 경영자를 이사회가 즉각적으로 해고하고 조직의 지대추구 행위를 리셋할 '독립적인 파면 및 능력주의 선발 메커니즘'을 헌법경제학적 층위에서 정교하게 탑재했어야 했다. 그러나 소유의 연속성(세습)에 과도한 무게를 둔 나머지, 시스템 내부에서 증폭되는 관료제 고유의 역기능과 오만을 필터링할 제어 장치를 명시하지 못한 구조적 한계를 보인다.


그러니 이 논리적 종착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겠는가. 우리가 이 정교한 사유의 사슬을 따라 신반동주의의 좌표에 도착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논리적 정합성이 곧 현실 세계에서의 처방적 실효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님을 명확히 유념해야 한다.


야빈의 기획은 권력과 책임의 불투명성을 걷어내야 한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날카롭고 매력적인 '기술적(Descriptive) 진단'이다. 이 진단은 우리가 지금까지 추적해 온 통치 체제의 회계학적 왜곡과 정확히 공명한다. 그러나 처방으로 전환되는 순간, 이 논증은 현실의 거대한 마찰력과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간과한 채 또 다른 '엔지니어링적 낙관'을 빌려온다. 소유가 곧 합리적 책임이라는 낙관, 이동 비용이 없는 완벽한 시장 경쟁이 가능하리라는 낙관 말이다.


7. 결론


이제 우리는 질문을 한 단계 더 밀어 올려야 한다. 이 논증이 왜 이토록 차갑고 특정한 기하학적 방향으로만 흘러왔는지, 그리고 이 현상을 단순한 '좌우'라는 낡은 진영의 잣대로 잘못 재단할 때 우리가 놓치게 되는 거대한 사상사적 좌표가 무엇인지를 직시해야 할 차례다.


이 기하학적인 사유 전체를 낡아 빠진 '좌우'라는 평면적 축 위에 조잡하게 올려놓으려는 집요한 유인들이 존재할 것이다. 국가의 거대 개입을 용인하는 듯 보이니 공산주의라 손가락질하고, 엘리트 과두제를 상수라 고발하니 극우 파시즘이라 낙인찍는 식이다.


단언컨대 이 두 판정은 모두 유치한 오독이다. 이 글은 어중간한 양비론 뒤에 숨어 기계적 중도를 연기하는 비겁한 방어적 텍스트가 아니다. 애초에 기존의 좌우라는 눈금으로는 이 냉혹한 사유가 딛고 선 영토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뿐이다.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가공되지 않은 잣대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좌우축이 인간 사회를 재단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층위에 머문다. 경제적으로 시장의 자율성을 신봉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 주도의 재분배를 추구할 것인가 , 혹은 사회문화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집단의 결속을 우선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숨 가쁘게 밀어붙여 온 질문은 감상적인 재분배의 비율이나, 진부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외형적 줄다리기가 아니었다.


물론 본문이 지향하는 국가주의(Statism)와 위계(Hierarchy)라는 가치 역시, 역사적으로는 좌파의 극단적인 국가 통제 체제나 우파의 절대왕정 및 전체주의라는 형태로 기존의 좌우 스펙트럼 양 끝단에 언제나 짙게 내재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숨 가쁘게 밀어붙여 온 질문은 진영 논리가 소비하는 감상적인 재분배의 비율이나, 진부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외형적 줄다리기가 아니었다.


우리가 파헤친 본질은 좌우라는 이데올로기가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가려놓았던 그 하부의 뼈대, 즉 '통치의 기하학적 형태', '주권 권력의 위계 구조', 그리고 '이기적 행위자들의 유인 설계(Mechanism Design)'였다. 이는 국가의 개입 여부나 집단의 성격만을 표피적으로 묻는 2차원적 잣대로는 결코 온전히 계측할 수 없는, 오직 시스템의 효율성과 생존만을 따지는 차가운 통치 공학의 영역이다. 우리는 바로 그 국가주의와 위계가 교차하는 가장 날카로운 정중앙에 기치를 꽂고 서 있다.


이 호전적인 좌표를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 겉보기에 시장 메커니즘을 공유하는 듯하지만 본질은 정반대인 사상사적 거인과 칼끝을 맞대어 보아야 한다. 바로 하이에크(Friedrich Hayek)와 미제스(Ludwig von Mises)의 오스트리아학파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다.


오스트리아학파가 서 있는 단단한 논리는 '지식의 문제(Knowledge Problem)'다. 중앙의 설계자는 파편화된 정보를 결코 통합할 수 없으며, 시장의 가격 통제 기구만이 그 분산된 정보를 압축해 전달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결론은 언제나 권력을 분쇄하고 개입을 증발시켜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에 영혼을 맡기라는 국가 축소론으로 귀결된다.


반면, 우리가 걸어온 길은 이 자생적 질서의 낭만에 냉소를 띠는 정반대의 현실주의적 논리에서 출발했다. 대외 외교, 군사적 안보, 초장기 인프라 투자 등 시장이라는 컴퓨터가 절대로 연산해 낼 수 없는 국가적 영토가 명백히 실재한다는 사실 위에서 말이다. 우리의 질문은 "이 국가를 어떻게 박멸할 것인가"가 아니었다. "국가라는 이름의 이 장치를 통제하는 소수 엘리트의 이기심을 공공선택론적으로 어떻게 인정하고, 그들의 사익 추구가 공익을 잣도록 헌법경제학적 규칙을 정밀하게 타겟팅할 것인가"였다.


오스트리아학파의 눈에 이 글은 현실의 마찰력을 오판한 위험한 설계주의적 오만이고, 이 글의 렌즈로 보면 오스트리아학파는 국가라는 거대 폭력 장치가 실재하는 현실을 회피하는 이상주의다. 전제의 층위가 다르니, 타협을 종용하는 중도적 대화 따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글의 차가운 유인 설계론과 궤를 같이하는 현실의 역사적 계보는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찰머스 존슨(Chalmers Ashby Johnson)의 발전국가론(Developmental State Theory)을 떠올릴 것이다. 기술관료 엘리트가 정치적 포퓰리즘으로부터 격리된 채, 장기 가치를 계산하며 시장의 방향을 전략적으로 조준하던 체제 말이다. 일본의 통산성(通商産業省, MITI), 싱가포르의 경제개발청(EDB), 한국의 경제기획원(EPB)은 우리가 분석한 ‘비르투를 관료제적 규칙과 제도적 자산으로 체화(Embodiment)하려던’ 실증적 표본들이 맞다.


그러나 이 글의 사유를 발전국가론이라는 역사적 경제 모델 하나로 가두어 수렴시키는 것은 명백한 한계가 있으며, 정합적이지도 않다. 발전국가론은 단지 우리가 추적해 온 ‘유인 부합성(Incentive Compatibility)’의 논리가 역사라는 무대 위에서 가장 기괴하고도 강력하게 발현되었던 거시적 현상 형태(Phenomenon)일 뿐이다. 이 글의 진짜 방법론적 지적 고향은, 인간의 철저한 사익 추구 성향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하여 게임의 규칙을 짜나가는 신제도주의 경제학과 공공선택론, 그리고 메커니즘 설계의 정교한 언어들이다.


박정희와 리콴유가 발전국가라는 유기체적 육체를 통해 공사 일치의 비르투를 보여주었다면, 커티스 야빈은 그들의 카리스마적 유산을 공공선택론적 주권기업(Sovcorp) 모델로 치환하여 극단으로 밀어붙인 기계적 캐리커처다. 발전국가가 관료제적 관성으로 통치자의 시간 지평을 강제로 연장하려 했다면, 야빈은 지분 재산권의 등식으로 신제도주의적 거래비용을 소멸시키려 했다. 접근의 도구는 달랐을지언정 이들이 직면했던 공학적 질문은 완벽히 동일하다.


이 논리가 도달한 종착지에서, 우리는 이 글 전체를 관통해 온 가장 근본적인 태도적 도구를 다시 벼려내야 한다. 바로 '기술적 진단(Descriptive Diagnosis)'과 '규범적 처방(Normative Prescription)'의 엄격한 절단이다.


소수 엘리트의 과두제적 지배가 인간 사회의 피할 수 없는 물리적 상수라는 모스카, 미힐스, 파레토의 관찰은 철저한 기술적 진단이다. 이는 데이터와 역사가 반복해서 증명하는 검증 가능한 과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 단단한 진단으로부터 "그러니 국가를 주식회사로 개조해야 한다"거나 "CEO-군주의 절대권력만이 유일한 구원이다"라며 처방으로 도약하는 순간, 야빈의 신반동주의는 과학적 방법론을 멈추고 거대한 설계주의적 낙관을 밀수하기 시작한다. 그 처방이 성립하려면 형식적 소유권의 귀속이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을 즉각 치료할 것이라는 가정, 이탈(Exit)의 거래비용이 제로에 수렴할 것이라는 환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이 늘상 설계도들의 균열을 사정없이 들이받았던 이유는, 특정 정치적 진영을 방어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진단의 정밀함이 곧 처방의 맹목적인 정당화로 이어질 수 없다는 이 현실주의의 철칙을 단 한 순간도 타협하지 않고 밀어붙였을 뿐이다.


이 엄격한 구분을 놓치는 자들은 이 글 전체를 특정한 체제를 옹호하거나 격하시키는 얄팍한 정치적 선언문으로 오독할 것이다. 단언컨대 이 글은 나약한 선언이 아니다. 사익과 공익의 완전한 유인 정렬이 거버넌스의 최우선 가치라는 냉혹한 헌법경제학적 전제, 그리고 국가라는 폭력 장치는 결코 인류 역사에서 소멸하지 않는다는 국가주의적 전제를 받아들였을 때, 논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한계선이 어디인지를 정직하고 무자비하게 추적해 나간 사유의 전도(戰圖)다.


그 추적의 끝에서 마주한 이름들, 리콴유와 박정희, 그리고 주권기업(Sovcorp)을 설계한 야빈은 이 전제를 진지하게 추적했던 극단의 행위자들이 필연적으로 착륙했던 사상사적 좌표들이었을 뿐이다. 그 좌표가 실재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디딘 전제의 서늘함을 정당화해 주지는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가장 깊숙한 분석의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문에서 던졌던 날카로운 질문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열쇠를 얻는다. 왜 어떤 나라는 대외적 수혜를 당연시하면서 그에 따르는 책임과 대가는 필사적으로 회피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은 얄팍한 외교 정책이나 일시적인 정권의 성향 따위가 아니다. 답은 이것이다. 그 국가적 무임승차와 기만이 가능한 진짜 본질적인 이유는, 그 나라를 지배하는 통치 엘리트 집단의 인센티브 구조 내부에 국가의 장기 가치 증진과 자신들의 사익 추구 행위가 애초부터 정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정렬의 부재라는 영구적인 결함을 메우기 위해, 문명은 지금까지 군주정의 가산제적 소유 구조, 관료제의 규칙화, 민주정의 상호 견제, 그리고 최근에는 신관방주의적 형식주의라는 거대한 공학적 실험들을 역사라는 시험대 위에 들이밀어 왔다.


그 어떤 설계도 완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공학적으로 완결될 수도 없다. 


인류의 문명은 이 제도의 미완결성 앞에서 매 순간 가혹한 선택과 대가의 지불을 강요당한다. 장기적 안정을 선택하는 대가로 내부 권력을 향한 견제 장치를 상실할 것인가, 아니면 상호 견제의 다원주의를 선택하는 대가로 주기적인 임기제가 낳는 근시안적 파멸을 감수할 것인가.


이 잔혹한 트레이드오프를 단번에 증발시키는 마법 같은 완전무결한 거버넌스 설계는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 지독한 낙관이 사실이었다면, 이미 그 시스템을 탑재한 특정 체제가 지구상의 다른 모든 낙후된 체제들을 진화론적으로 압도하고 멸절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사에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 글이 도착한 자리는 영원불멸의 정답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보정해야 할 서늘한 '좌표' 그 자체다. 완벽한 기계를 조립해 두고 안심하는 설계주의자의 오만을 내려놓고, 시스템의 마찰력과 인간의 한계를 상시적으로 관찰하며 규칙을 미세하게 튜닝해 나가는 동적인 제어의 과정. 문명이 이 오래된 딜레마 앞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진동 체제 자체가 생동하는 현실의 풍경이라는 것.


이 분석의 끝, 가장 단단한 바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실은 오직 이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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