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번햄, 정치적 인간

제임스 번햄, 『마키아벨리주의자들: 자유의 수호자들』


제2부 마키아벨리: 권력의 과학


3. 정치적 인간


사람들은 흔히 마키아벨리가 말한 ‘인간 본성’을 두고 여러 비판을 제기해왔다. 그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체로 그는 인간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혐오스럽게 묘사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핵심을 비껴간다. 마키아벨리는 인간 본성 자체에 대해 특별한 견해를 제시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저작 어디에서도 그런 견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심리학자도 도덕철학자도 아니다. 그의 관심은 정치였고, 그는 정치를 탐구한 사상가였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을 읽어보면, 그가 분석하려 한 대상은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정치적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는 애덤 스미스가 ‘경제적 인간’을 분석한 방식과 비슷하다. 애덤 스미스 역시 자주 오해를 받지만, 인간이 이윤을 추구한다거나 자본주의 시장에서 최대한의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 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인간 본성 전체를 완전하게 설명한다고 믿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그는 인간이 살아가며 수행하는 수많은 활동이 이윤 추구 말고도 다양한 동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의 관심은 인간 본성 전부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시장에서 경제적 행위자로 활동하는 측면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 본성의 다른 요소들은 일단 제쳐두고, 경제 법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으로서 ‘경제적 행위자’를 설정했다. 그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추상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은 모든 과학에서 널리 쓰인다. 뉴턴이 마찰이 전혀 없는 운동, 아무런 힘도 작용하지 않는 물체, 완전탄성체 같은 개념을 도입했을 때도 그런 것이 현실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특정한 물리 현상을 보다 일반적인 법칙으로 설명하기 위해 현실의 일부 조건을 추상화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도 마찬가지다. 그의 관심은 정치적 현상과 관련된 인간, 다시 말해 권력을 둘러싼 투쟁 속에서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친구나 가족, 신을 대하는 인간이 아니라 정치의 장에서 움직이는 인간을 분석했다.


따라서 현실의 인간이 언제나 그의 설명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반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신도 그런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인간 본성의 많은 측면이 정치적 행동을 이해하는 데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만약 그의 생각이 틀렸다면, 그것은 인간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를 결국 심리학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치를 실제로 수행하는 주체가 인간인 이상, 정치도 인간의 심리에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정치를 정치 지도자나 평범한 시민의 성격과 동기로 설명하려는 흔한 시도의 바탕에 놓여 있다. 이런 접근은 일상적인 대화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수년 동안 쏟아져 나온 정치 저널리즘 서적들에서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더 나아가 정치를 정신분석학이나 행동주의 같은 당대의 심리학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한층 학문적인 연구들 역시 같은 전제에 서 있다.


하지만 심리학과 정치의 관계가 그렇게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인간 심리를 완전하고 보편적으로 설명하는 심리학이 존재한다면, 그 안에는 정치학은 물론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까지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런 가능성조차 충분히 보여주는 심리학이 없다.


현재로서는 정치를 연구하는 일은 심리학을 연구하는 일과 분명히 구별된다. 정치의 법칙은 심리학의 법칙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를 이해하려면 정치 투쟁이 실제로 전개된 기록에서 직접 근거를 찾아야 한다.


오늘날 심리학이 밝혀낸 반응 시간, 조건반사, 유아기의 행동 특성과 같은 세부적인 지식은 정부 형태가 어떻게 바뀌는지, 또는 지배계급이 어떤 과정을 거쳐 몰락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실제 사례들을 연구한 끝에, 인간 일반이 아니라 ‘정치적 인간’에 관한 몇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우선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인간을 두 부류로 뚜렷하게 구분한다. 하나는 ‘통치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받는 유형’이다.


통치하는 유형에는 당장 사회의 지도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만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 혹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까지 여기에 속한다. 반면 통치받는 유형은 지도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지도자가 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사회의 절대다수를 이룬다.


물론 이런 구분에는 어느 정도 임의적인 측면이 있으며, 두 집단을 가르는 경계도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마키아벨리와 그의 전통을 잇는 사상가들은 이런 구분이 정치 현실의 근본적인 사실을 반영한다고 본다. 실제 정치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은 대부분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며, 대다수는 다른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결국 통치받는 위치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대다수를 이루는 사람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치적 수동성이다. 통치자들의 극심한 압박을 받거나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 내몰리지 않는 한, 통치받는 사람들은 권력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안전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소소한 일상을 꾸려갈 수 있는 여건이다.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명예를 해치지 않는 한 평온하게 살아간다. 따라서 군주가 맞서야 할 상대는 소수의 자존심 강하고 야심 많은 사람들뿐이며, 그런 이들은 여러 방법으로 비교적 쉽게 제어할 수 있다.”(『군주론』 19장)


마키아벨리는 대체로 인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은혜를 쉽게 잊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이고, 위험을 두려워하며, 이익에 욕심이 많다. 당신에게서 이익을 얻고 있고 위험이 아직 멀리 있을 때는 전적으로 당신 편에 선다. 자신의 피와 재산, 생명, 자식까지도 당신을 위해 바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위험이 닥쳐 당신이 그들의 도움이 절실해지는 순간이 오면,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등을 돌린다.”(『군주론』 17장)


마키아벨리는 변덕스럽고 쉽게 마음이 흔들리는 민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선에 대한 그릇된 환상에 속아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으며, 공동체를 헤아릴 수 없는 위험과 어려움으로 몰아넣는다.”(『로마사 논고』 제1권 53장)


동시에 그는 사람들이 강력한 권위를 깊이 존중하는 성향도 지녔다고 보았다. 


“민중의 소요를 진정시키고 그들을 다시 이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는 권위를 지닌 현명한 인물 한 사람이 나서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 이 점은 베르길리우스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했다. ‘소란이 한창일 때 위엄 있는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면, 모두가 조용해지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로마사 논고』 제1권 54장)


“지도자가 없는 군중은 아무 쓸모가 없다. … 베르기니우스 사건 이후 무장한 민중이 성산으로 물러나자, 원로원은 왜 지휘관들을 버리고 그곳으로 떠났는지 묻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원로원의 권위는 민중에게 너무도 막강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는 감히 대답에 나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티투스 리비우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었지만, 누가 그 말을 해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확실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앞장서 원로원의 노여움을 사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실은 지도자가 없는 군중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잘 보여준다.”(『로마사 논고』 제1권 44장)


“갈리아인들의 침공으로 로마가 패배하고 국토가 크게 황폐해졌을 때, 많은 로마 시민들은 원로원의 명시적인 명령을 어기고 베이이(Veii)로 이주해 로마를 떠났다. 이에 원로원은 새로운 포고령을 내려, 정해진 날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소식이 처음 베이이에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모두 이를 비웃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귀환 기한이 다가오자 짐을 싸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명령대로 로마로 돌아왔다. 리비우스는 이 일을 두고 ‘함께 있을 때는 그토록 완강하던 사람들도 혼자가 되면 두려움을 느꼈고, 그 두려움이 그들을 복종하게 만들었다’고 적었다.


이보다 군중의 본성을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드물다. 군중은 대담하게 군주의 명령을 비난하고 거리낌 없이 불평을 쏟아낸다. 그러나 막상 처벌이 눈앞에 닥치면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먼저 몸을 사리고 다시 복종한다. 그러므로 백성이 군주의 통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군주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우호적일 때는 그 마음을 유지하게 하고, 적대적으로 돌아섰을 때는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제어할 힘을 갖추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백성의 적대감이란 자유를 빼앗겼을 때, 또는 아직 살아 있는 훌륭한 군주를 잃어 그에게 품었던 애정을 상실했을 때 생기는 경우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불만을 가리킨다.”(『로마사 논고』 제1권 57장)


“자유를 빼앗기거나 사랑하던 훌륭한 군주를 잃어 생긴 불만은 무엇보다도 두렵다. 그런 경우에는 이를 억누르기 위해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밖의 경우 민중의 분노는 대체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히 그들을 이끌 지도자가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하나로 뭉친 군중의 분노만큼 무서운 것도 없지만, 흩어진 군중만큼 무력한 존재도 없다. 비록 무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처음의 격렬한 기세만 넘기면 그들은 쉽게 진정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열기는 식고, 사람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저마다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며 화해의 길을 찾거나 달아날 궁리를 하게 된다.


따라서 민중이 봉기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들을 이끌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야 질서를 유지하고 단결을 지키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 버지니아가 죽은 뒤 로마 시민들이 로마를 떠났을 때도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스무 명의 호민관을 선출했다.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리비우스가 말한 그대로의 결과를 맞게 된다. ‘단결한 군중만큼 용감한 존재도 없지만, 흩어진 군중만큼 비굴한 존재도 없다.’”(『로마사 논고』 제1권 57장)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언제나 선하거나 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은 통치자와 피통치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현명한 사람들은, 바골로가 원수인 교황을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손에 넣고도 왜 그 기회를 이용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만 했어도 그는 영원한 명성을 얻고 교황의 군수품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바골로는 양심이나 선한 성품 때문에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친누이와 간통하고 여러 친족을 살해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은 완전한 선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완전한 악인도 될 수 없도록 섭리가 정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로마사 논고』 제1권 27장)


마키아벨리가 인간은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의 뜻은 훨씬 더 일반적이다. 누구나 때로는 실수를 저지르고, 초인 같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현명하고 올바른 판단만 내리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도 가끔은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고, 사람은 언제나 일관되게 행동하지도 않으며,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동기와 욕망에 이끌린다.


이런 생각은 너무도 당연해 보이지만, 정치의 세계에서는 의외로 쉽게 잊히곤 한다.


변덕스럽고 나약하며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피통치자 다수는, 마키아벨리에게서 통치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절대적인 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통치하는 유형의 인간이 더 일관성이 없고, 더 쉽게 배신하며, 많은 경우에는 오히려 더 어리석다고까지 본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군중만큼 변덕스럽고 믿기 어려운 존재는 없다는 데에는 티투스 리비우스를 비롯한 모든 역사가들이 동의한다. 리비우스도 ‘군중의 본성은 비굴하게 복종하거나 오만하게 폭정을 휘두르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군중을 비난하는 상황에서, 이제 내가 그들을 변호하려 한다면 지나치게 대담하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했다가는 비난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불명예스럽게 주장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내세우려는 것은 힘이 아니라 논거인 만큼, 그렇게까지 문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군중을 변호하며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대부분의 저자들이 군중에게 돌리는 비난은 사실 모든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으며, 특히 군주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법의 제약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가장 방탕한 군중 못지않은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역대 군주가 얼마나 많았고, 그 가운데 훌륭한 군주가 얼마나 적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이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통념과 달리, 백성이 군주보다 더 경박하거나, 더 배은망덕하거나, 더 변덕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양쪽 모두 똑같은 결함을 지니고 있으며, 군주만을 두둔하려 드는 사람은 크게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로마사 논고』 제1권 58장)


마키아벨리 용어에 관한 주석


마키아벨리를 이해할 때는 그가 사용하는 몇몇 용어 때문에 혼란이 생길 수 있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정부의 형태를 기준으로 모든 국가를 ‘군주국(principality)’과 ‘공화국(commonwealth)’으로 나눈다. 여기서 군주국이란 주권이 형식적으로 한 사람에게 귀속된 정치체제를 뜻한다. 반면 공화국은 주권이 형식적으로 두 사람 이상에게 귀속된 체제를 가리킨다.


따라서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공화국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말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군주국 역시 곧 폭정을 뜻하는 개념은 아니다.


『로마사 논고』의 첫머리에서 마키아벨리는 정부를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세 형태로 구분한다. 이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단순히 정부의 형식만이 아니라 국가 안의 사회적 권력관계까지 함께 염두에 둔 것이다. 특히 그가 말하는 ‘귀족정’과 ‘민주정’은 귀족과 민중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한 구분이다.


마키아벨리가 귀족과 민중을 논할 때 염두에 둔 것은 로마의 귀족과 평민의 대립,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봉건 귀족과 시민계층 사이의 대립이었다. 로마에서 귀족은 원래 오래된 씨족을 이끌던 가문의 수장들이었다. 그들의 계층 아래에는 같은 가문의 구성원들과 피보호민, 하인, 노예 등이 종속적인 지위로 속해 있었다. 초기 로마에서는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이 될 자격도 오직 귀족에게만 주어졌다.


‘평민(plebs)’, 곧 ‘민중’ 계층은 무엇보다도 재산 규모에 따라 다시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실제 정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점차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고, 호민관직을 신설했으며, 나아가 원로원 의원과 집정관이 될 자격까지 얻어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들은 평민 전체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는 장자 계통으로 이어진 초기 씨족장의 후손들만이 진정한 귀족으로 인정되었고, 그들 역시 귀족 계층 전체에서는 소수였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마키아벨리가 로마를 이야기하며 ‘민중’이라고 할 때, 그것은 모든 사람이나 막연한 의미의 ‘대중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대개는 평민 계층 가운데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상층 집단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여기서 ‘민중’은 우선 도시 시민과 주요 길드의 유력 인사들을 가리켰다. 이들은 명문 귀족 가문의 수장들이 이끄는 귀족 계층과 대립하는 세력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민중’의 범위는 점차 넓어졌다. 이에 따라 부유한 시민과 대길드의 지도자들(popolo grasso), 그리고 하층 시민(popolo minuto)을 구분할 필요가 생겼다. 마키아벨리는 후자를 때때로 ‘하층 민중’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가 사회의 가장 아래층, 곧 도제와 노동자,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대중을 가리킬 때는 대개 ‘민중’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신 ‘폭민(rabble)’이나, 때로는 ‘군중(multitud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런 용어법에는 중요한 의미가 두 가지 담겨 있다.


첫째, 군주정이냐 공화정이냐 하는 정부의 형태는 ‘민중’이 사회에서 우위를 차지하는지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다. 민중도 군주정이나 참주정을 세울 수 있고, 공화정을 세울 수도 있다. 반대로 귀족 역시 공화정을 통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실제로 로마 역사의 상당 기간과 베네치아, 그리고 여러 고대 도시국가에서 공화정은 귀족 지배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둘째, 앞에서 살펴본 ‘통치하는 유형’과 ‘통치받는 유형’의 구분 역시 사회 계층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민중’ 안에도 통치하는 유형과 통치받는 유형이 모두 존재하며, 다른 계층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통치하는 유형과 통치받는 유형을 도덕성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지적 능력이나 일관성, 혹은 실수를 피하는 능력으로 나누는 것도 아니다. 다만 통치자와 장차 통치자가 될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으며, 바로 그 점이 그들을 언제나 통치받는 위치에 머무는 다수와 구별해 준다.


무엇보다도 통치하는 유형의 인간은 마키아벨리가 비르투(virtù)라고 부르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 이 말은 흔히 ‘덕(virtue)’으로 번역되지만, 그것으로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에게 비르투는 영어는 물론 다른 언어에서도 정확히 대응하는 표현을 찾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 개념에는 우리가 말하는 야망, 추진력, 기개, 그리고 플라톤이 말한 튀모스(thymos), 다시 말해 권력을 향한 의지와 같은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통치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통치하기를 강하게 원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끊임없이 몰아붙인다. 어려움 속에서도 버티고, 위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며, 끝까지 밀고 나가게 만드는 힘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로 크리스토퍼 말로의 『탬벌레인 대왕』에서 탬벌레인이 말하는 바로 그런 인간이다.


“우리의 영혼은

이 경이로운 세계의 질서를 이해하고,

떠도는 모든 별의 궤도까지 헤아릴 수 있다.

끝없는 지식을 향해 끊임없이 오르며,

쉼 없이 움직이는 천체들처럼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끝없이 몰아붙인다.

마침내 가장 탐스러운 열매,

완전한 행복이자 유일한 충만함,

곧 이 세상의 왕관을 손에 넣을 때까지.”


통치하는 유형의 인간은 대체로 강인한 힘을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 군사적 역량에서 두드러진다. 마키아벨리는 전쟁과 전투야말로 통치자를 길러내는 가장 중요한 훈련의 장이라고 보았다. 또한 권력은 결국 힘을 바탕으로 할 때만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통치하는 유형의 인간에게서 더욱 보편적인 자질로 꼽는 것은 기만이다. 그의 저작에는 정치에서 기만이 얼마나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다룬 논의가 곳곳에 등장한다. 전쟁에서의 속임수와 계략, 조약의 파기, 일상적인 정치와 사회생활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기만까지 그 범위도 매우 넓다.


그는 『로마사 논고』 제2권 13장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일반화한다. 


“사람들은 대개 힘보다 기만을 통해 하찮은 지위에서 큰 권력으로 올라선다.”


마키아벨리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늘 확인해 온 바에 따르면, 사람은 미천한 처지에서 높은 지위로 올라설 때 대개 기만이나 무력을 이용한다. 물론 남에게서 권력을 물려받거나 상속받는 경우는 예외다. 순전히 무력만으로 위대한 권력을 손에 넣은 사례는 거의 찾기 어렵지만, 기만과 책략으로 성공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시칠리아의 아가토클레스, 그리고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해 끝내 왕이 된 여러 인물들의 삶이 이를 잘 보여준다.


크세노폰도 『키루스의 교육』에서 비슷한 점을 암시한다. 키루스가 처음 아르메니아 원정을 벌였을 때, 그의 행동과 협상은 온통 속임수와 기만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는 용맹이나 무력이 아니라 그런 수단으로 왕국을 정복했다. 이는 어떤 군주도 뛰어난 위장술, 곧 자신의 의도를 감추는 기술 없이는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다.


나 역시 미천한 처지에서 출발한 사람이 정직한 관대함과 무력만으로 위대한 권력을 얻은 경우는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기만만으로 성공한 사례는 많다. 대표적으로 잔 갈레아초는 바로 그런 방법으로 삼촌 베르나르도에게서 롬바르디아의 통치권을 빼앗았다.


군주들이 권력을 처음 장악할 때 사용할 수밖에 없는 수단은 공화국도 건국 초기에는 마찬가지로 사용한다. 정부가 안정되고 스스로를 지킬 만큼 충분한 힘을 갖추기 전까지는 그렇다. 로마도 우연이든 선택이든 위대한 국가가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초기의 성공 과정에서 앞서 말한 것보다 더 교묘한 계략을 사용한 적도 있었다.


이 모든 사실을 보면, 로마인들 역시 미약한 출발점에서 위대한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야심을 가진 모든 나라에 필요한 기만의 기술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그런 기만은 명분으로 잘 포장할수록 비난을 덜 받는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바로 그 점에서 누구보다 뛰어났다.”(『로마사 논고』 제2권 13장)


무력(武力)과 기만의 결합은 『군주론』의 유명한 구절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표현된다. 마키아벨리는 성공하는 통치자는 사자와 여우를 동시에 닮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자와 같은 힘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하지만, 여우와 같은 교활함으로 함정과 계략을 간파하고 이를 능숙하게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싸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법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의한 것이다. 전자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방식이고, 후자는 짐승의 방식이다. 그러나 전자의 방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때로는 후자의 방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군주는 인간의 방식과 짐승의 방식을 모두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언제 이성에 의지하고 언제 힘을 써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고대의 저술가들이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여러 군주를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인 켄타우로스 케이론에게 맡겨 교육하게 했다고 전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을 우회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군주는 인간과 짐승의 두 본성을 모두 익혀야 하며, 어느 한쪽만으로는 오래 권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군주는 어떤 짐승을 본받아야 하는가. 그는 사자와 여우를 함께 본받아야 한다. 사자는 덫과 함정을 피하지 못하고, 여우는 늑대를 물리칠 힘이 없다. 따라서 군주는 여우처럼 함정을 알아차릴 줄 알아야 하고, 사자처럼 늑대를 겁주어 물리칠 힘도 갖추어야 한다. 사자만 흉내 내는 사람은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군주론』 18장)


마지막으로, 통치하는 유형의 정치적 인간은 시대와 상황에 자신을 맞추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 권력투쟁에서는 잔혹함이든 자비로움이든, 과감함이든 신중함이든, 관대함이든 인색함이든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 자질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오직 시대와 상황에 맞을 때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군주의 행동 방식이 시대의 흐름과 맞아떨어질 때 그는 성공하고, 시대에 맞게 자신을 바꾸지 못하면 결국 실패한다고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부와 명예를 얻기를 바라지만, 그 목적에 이르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신중하게 행동하고, 어떤 이는 열정적으로 밀어붙인다. 어떤 이는 무력을 쓰고, 어떤 이는 계략을 쓴다. 어떤 이는 인내로 버티고, 어떤 이는 격렬하게 행동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방식을 택하면서도 모두 성공할 수 있다.


반대로 똑같이 신중한 두 사람이 있어도 한 사람은 성공하고 다른 사람은 실패한다. 또 한 사람은 침착하게, 다른 사람은 성급하게 행동하면서도 둘 다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오직 시대의 상황이 그들의 행동 방식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도 같은 목표에 이를 수 있고, 반대로 똑같은 방식을 따르는데도 한 사람은 성공하고 다른 사람은 몰락하는 일이 생긴다. 행운의 변화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신중하고 인내심 있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시대가 그의 방식에 맞게 흘러간다면 그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다.”(『군주론』 25장)


James Burnham, The Machiavellians: Defenders of Freedom (Endeavour Media Ltd, 2019), pp. 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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