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번역] 스팬드렐, 생물학적 레닌주의
생물학적 레닌주의(Biological Leninism)
스팬드렐(Spandrell) 기고, 2017년 11월 13일
이 글은 현대 좌파의 조직 원리인 ‘생물학적 레닌주의’를 다룬 3부작 에세이 중 첫 번째 글이다. 두 번째 글과 세 번째 글은 각각 해당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주제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생각을 나눈 인터뷰 글도 함께 링크해 둔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이제 100년이 흘렀다. 소련, 레닌과 볼셰비키, 그리고 레닌주의. 벌써 한 세기 전의 일이지만, 요즈음 언론을 보면 그 시절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남아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사람들은 마치 지금도 혁명이 유효하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역사를 넘어선 무언가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전히 혁명을 찬양하거나 비난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좌파와 우파는 레닌 시절의 좌파, 우파와는 손톱만큼의 공통점도 없다.
악인인 레닌을 찬양할 생각은 없다. 원래 위대한 인물 중에는 악한 사람이 많은 법이다. 사실 인간 레닌에게는 별 관심이 없지만, ‘레닌주의’에는 눈길이 간다. 레닌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아직 묻히지도 못했는데, 푸틴은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를 일이다), 레닌주의는 여전히 서슬 퍼렇게 살아 있다. 서구 언론은 이제야 세계 2위의 강대국이자 수년 내에 1위 자리를 노리는 중국이 실은 레닌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진핑이 5년 동안이나 중국공산당의 레닌주의 정통성을 매일같이 외쳐대고 나서야 간신히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서구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서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레닌주의가 강력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련은 1991년에 무너졌지만, 74년이나 버틴 것 자체가 대단한 성과다. 애초에 소련이라는 국가를 세운 과정 자체가 초인적인 대업이었다. 이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서구 지식인 사회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 블로그를 읽는 독자들은 잘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주의는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지식인 계층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식 이념이며, 서구에서도 '문화 마르크스주의'라는 변형된 형태로 우리 곁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지식인들이 왜 자본주의를 그토록 혐오하는지 분석하는 일은 우파의 단골 메뉴다. 레이건 전 대통령도 이와 관련해 숱한 재담을 남겼다. 늘 그렇듯 우파는 농담을 던지는 데는 능숙했지만, 문제의 본질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우파가 패배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패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고 흑인 트랜스젠더가 공직에 출마하는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려면 마르크스가 살았던 1848년이라는 시대와 자유주의 혁명의 물결을 들여다봐야 한다. 유럽은 봉건제를 거쳐 17세기 절대주의 전쟁과 현대 국가의 탄생을 지나왔고,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된 자유주의 혁명의 흐름은 1848년까지 이어지며 먼 길을 달려왔다. 이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은 바로 관료제 국가의 부상이다.
사실 봉건제는 매우 자연스럽게 형성된 통치 형태다. 정복 군대의 위계질서를 평시 체제로 그대로 옮겨놓은 구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1046년 중국 주나라의 시작이 그러했고, 서로마를 정복한 게르만 부족들의 체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터의 왕은 평화로운 시기에도 왕이 되었고, 장군들은 백작이, 대령들은 백작 아래의 영주가 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영토를 분배받고, 그에 따르는 행동 규범과 충성의 의무를 짊어졌다.
이러한 방식은 군대 내의 유대감과 충성심을 유지하는 데 꽤 효과적이다. 물론 완벽할 수는 없다. 세대가 바뀌면 전우들 사이에 맺어졌던 끈끈한 유대감도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그래도 제법 오랫동안 제 구실을 해왔다. 중국과 유럽 모두에서 봉건제는 1,0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봉건제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국가적으로 무언가를 추진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점이다. 세금을 걷기도, 대규모 토목 사업을 벌이기도 쉽지 않다. 구성원 모두가 물려받은 신분과 권리를 지키는 데만 급급해 아주 작은 변화조차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고도로 중앙집권화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왔을 때, 가장 자유롭고 분권화되어 있던 헝가리 왕국은 모하치 전투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국가 역시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누구보다도 뚜렷한 성과를 내고 싶어 한다. 스스로 성장하며 권력과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속성을 지녔다. 그리하여 봉건제는 절대주의로 이어졌고, 절대주의는 다시 자유주의로 나아갔다. 자유주의 국가는 강력했다. 수많은 관료 조직과 봉건 국가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막대한 세수를 확보했다.
하지만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추었을지언정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봉건제는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했지만, 자유주의는 이 부분에서 낙제점이었다. 정치에서 충성심은 더없이 중요한 요소다. 카를 슈미트의 말대로 정치의 본질적 문제는 결국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데 있으며, 아군이란 곧 나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구체제(Ancien Régime)를 무너뜨린 19세기는 경제와 과학의 황금기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수라장이었다. 10년마다 혁명이 터졌고, 내각은 몇 달을 버티지 못했으며, 매주 대형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선거는 폭력과 혼란으로 얼룩진 행사였다. 그럼에도 사회가 굴러갈 수 있었던 건, 정치적 혼란 덕분에 오히려 경제적 자유가 생겨나 민간 부문이 제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민간은 실로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식인은 언제나 관료제의 예비군과 같다. 이들은 사기업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여 무언가를 해내기를 바란다.
지난 세기 동안 이룩한 엄청난 과학적 발전 덕분에, 18세기와 19세기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해낼 수 있는 수많은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회 공학적인 온갖 계획을 실현하고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일이 손에 잡힐 듯 실현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 과정 속에서 그 계획들을 완수하기란 불가능했다. 도저히 해낼 수가 없었다. 정치가들과 관료들의 충성심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파벌 싸움과 내부 암투 속에서 진정한 개혁은 번번이 좌절될 뿐이었다.
레닌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사실 레닌주의라는 명칭 자체에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레닌이 소련 공산당을 창당한 것은 맞지만, 그는 192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24년의 소련은 여전히 극심한 혼란기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공산당을 실질적으로 구축하고 소련 정부를 안정시킨 인물은 바로 1922년부터 당 서기장을 지낸 스탈린이었다. 흔히 ‘스탈린주의’라고 하면 그의 잔혹한 숙청과 사법 방식을 떠올리지만, 사실 오늘날 우리가 레닌주의라 부르는 일당독재 공산 정권의 통치 구조야말로 스탈린주의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소련에 대해 무엇이라 비판하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공산당은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그리고 계획한 일은 반드시 완수했다. 정치국이 승인한 일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계획일지라도 예외 없이 실행에 옮겨졌다. 물론 이러한 통제력을 갖추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스탈린은 수많은 사람을 숙청해야 했다. 하지만 공산당이 제대로 굴러간 원동력은 단지 무시무시한 공포와 잔혹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산당에는 확실하게 작동하는 자신들만의 시스템이 있었다.
이 시스템은 오늘날 중국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 서구 사회가 중국을 평가할 때도 정확히 같은 표현을 쓴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중국은 계획한 일을 빠르고 저렴하게 해낸다. 미국 보스턴에서 터널 하나를 뚫을 시간 동안, 중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고속철도망을 깔아버렸다. 비용도 그리 많이 들이지 않고 말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레닌주의가 완벽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어느 국가에나 지배 계급은 존재한다. 여기서 내가 말한 ‘충성심’은 지배 계급 자체의 결속력을 뜻하는 ‘아사비야(asabiya)’로 바꾸어 불러도 좋다. 지배 계급이 서로 뭉치고 연대하여 통치 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능력 말이다. 봉건제는 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귀족은 농민과 철저히 분리된 자신들만의 사회를 형성했고, 자신들의 지배가 위협받지 않도록 각별한 공을 들였다.
계몽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이 이 세계를 무너뜨린 결과, 지배 계급의 결속력과 질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해졌다. 자유지상주의자라면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그 말에도 나름의 일리가 있다. 하지만 어떤 조직이든 무질서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의 안정과 재생산을 보장하고자 하는 법이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이 과제를 해결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그리고 레닌주의는 이 문제에 대한 최초의 해법이었다.
레닌주의는 결국 마르크스주의를 현실에 적용한 결과물이다. 사실 사회주의는 레닌주의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마르크스주의가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이유를 단지 소련의 후원 때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뇌 속에 자리 잡은 '사회적 계산 능력'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신분에 극도로 집착한다.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과 추락에 대한 공포야말로 인간의 행동을 이끄는 원동력이다. 사회주의가 내거는 평등주의는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한다. 신분 사다리의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높은 자리를 가질 수 있다고 유혹하는 것이다.
산업혁명으로 수백만 명의 농민이 도시로 밀려났을 때,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층민으로 전락했다고 느꼈다. 경제학자들은 지표를 들이밀며 산업 노동자의 생활 수준이 실제로는 향상되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것이 사실일지언정 정작 노동자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사회주의자들이 다가와 아주 확실하게 신분을 상승시켜 줄 계획이 있다고 속삭였다. 파급력은 대단했다. 물론 과거 기독교 역시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저 간악한 부자들과 달리 모두 천국에 갈 것이라는 약속을 건네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 세계의 실질적인 신분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반면 사회주의는 눈에 보이는 실제 가치를 약속했다. 사회주의가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위세는 여전하다. 사회주의는 인간에게 그야말로 마약과도 같으며, 단박에 판을 뒤집는 외통수다.
사회주의가 이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단지 수많은 사람에게 더 높은 신분을 약속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주의가 인간에게 그야말로 마약처럼 작용하는 진짜 이유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은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느끼는 이들에게까지 신분 상승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인간 사회라면 어디에나 통용되는 일종의 자연법칙이 존재한다. 기초적인 생물학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 인간은 모두 다르게 태어난다. 누군가는 더 똑똑하고, 더 매력적이며, 더 수완이 좋고 대중에게 인기를 얻는다. 인간의 짝짓기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우리 뇌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여성은 본능적으로 우두머리 남성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아무리 관대하게 보아도 모든 인간 사회는 상위 20%가 높은 신분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평생 열등감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파레토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세상의 이치란 원래 그렇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그 잔혹한 현실을 바꾸겠다고 약속했고, 마르크스는 자신들에게 꽤 그럴듯한 계획이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그리고 레닌은 그 계획을 현실로 옮겼다. 레닌이 한 일은 명확했다. 기존 러시아의 자연발생적 엘리트 계층을 철저히 말살하고, 사회 하층민들로 구성된 새로운 지배 계급을 세운 것이다.
노동자, 농민, 유대인, 라트비아인, 우크라이나인 등 레닌은 제정 러시아 사회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이 전략은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졌다. 대중적 지지 기반이 미약했던 소수 파벌 볼셰비키는 결국 내전에서 승리했고, 훗날 전 세계를 호령한 소련의 주역이 되었다.
초기 소련은 소수 민족, 여성, 성소수자, 무신론자, 사이비 종교인 등 온갖 기이한 부류를 전면에 내세웠다.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의 똑똑하고 보수적인 러시아인들만 철저히 배제한 채 말이다. 이는 중국에서도 정확히 되풀이되었다. 일례로 남부 몽골 초원을 형성하던 5개 성을 하나로 묶어 '내몽골 자치구'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언론인 스티브 세일러(Steve Sailer)가 지적한 이른바 '통합과 굴복' 전략이 그대로 실행된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성분, 즉 가문의 내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부농이나 귀족, 혹은 지주 가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 당내에서 출세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직 농민과 노동자 출신만이 신뢰를 얻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직 그들만이 배신하지 않고 충성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부유한 이들이나 부자가 될 만한 타고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회라면 어디서든 대접을 받는다. 어떤 세상이 오든 살아남을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신뢰할 수 없었다. 체제가 무너진다 해도 그들이 잃을 것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더 많은 자유를 갈망하기 마련이었다.
반면 농민 출신들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지금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오직 공산당 덕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죽기 살기로 당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 정권이 무너지는 순간,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우물 속에 던져진 망치처럼 곤두박질칠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모든 하층민, 특히 소수 민족의 경우에도 정확히 마찬가지였다.
소수 민족을 다루는 일은 공산 정권에 언제나 까다로운 숙제였다. 이들에게는 독립을 통해 신분을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마지막 카드가 늘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과 중국이 권력을 잡자마자 소수 민족을 가혹하게 탄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스탈린은 정치국에서 유대인들을 차례로 숙청했고, 제2차 세계대전을 기회 삼아 과거 제정 러시아의 영토를 대부분 되찾았다. 그가 철저한 러시아 중심 국가를 세운 결과,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국민들은 여전히 러시아어를 쓴다.
중국도 판박이였다. 문화혁명 시기 내몽골에서 벌어진 대규모 유혈 숙청이나 티베트 사찰들의 파괴 조치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공산당은 비로소 잡음 없이 매끄럽게 굴러가는 강력하고 안정적인 통치 기계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소련의 계획경제는 엉망이었고 결국 체제 붕괴를 불렀다. 하지만 중국이 보여주었듯, 중앙집권적 경제 계획은 레닌주의 정치 체제와는 별개의 문제다. 수천 년 동안 중앙집권 관료제를 운영해 온 중국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히 알고 있었을 이치다. 그들에게 레닌주의는 이미 존재하던 통치 시스템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을 뿐이다.
결국 레닌주의의 핵심은 지배 계급을 무(無)에서부터 새로 창조해 낸 천재성에 있다. 사회 밑바닥에 있던 하층민들을 의도적으로 발탁해 권력층을 구성함으로써 그들의 결속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체제가 무너지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이들이었기에 당을 향한 충성심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정교한 통치 기계는 워낙 강력하게 작동한 나머지, 지난 한 세기 동안 전 세계 지식인 계급의 찬탄과 동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한편 미국을 필두로 한 서구 자본주의 진영은 전 세계 공산주의의 숙적을 자처하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레닌주의에 맞선 미국의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주변을 둘러보라. 미디어를 틀고 뉴스를 읽어보면 답은 명확하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이들은 누구인가. 여성,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무슬림, 그리고 흑인이다. 심지어 장애인과 비만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운동까지 활발하다. 지금 진보주의가 실행하고 있는 체제는 레닌주의의 극단적인 형태, 바로 '생물학적 레닌주의'다.
러시아와 중국에 공산주의가 들어섰을 당시, 두 나라는 여전히 굶주린 농민이 넘쳐나는 가난하고 전통적인 사회였다. 덕분에 계급적 원한과 분노만으로도 레닌주의 정당을 충분히 굴러가게 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입버릇처럼 "계급투쟁을 절대 잊지 말라"고 강조했다. 속뜻은 명확했다. "과거에 너희가 노예처럼 살았던 사실을, 그리고 내 덕분에 지금 그 신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는 협박이자 당부였다.
그러나 1945년 이후 미국의 주도로 평화와 질서가 정착된 서구 사회는 사정이 달랐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계급투쟁은 더 이상 대중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동력이 되지 못했다. 삶은 풍요로웠고,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도 누구나 자동차를 몰고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전통 사회는 종말을 고했고, 가문의 내력이나 토지 자산에 기반을 둔 과거의 신분 사다리 역시 완전히 해체되었다. 1960년대의 서구는 부유한 산업 기반의 능력주의 사회였다. 개인의 재능과 생산성, 그리고 기득권층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처세술이 곧 새로운 신분의 기준이 된 시대였다.
자유주의 정치는 늘 그렇듯 난장판을 면치 못했다. 서로 뭉쳐야 할 뚜렷한 유인이 없는 지배 계급에게 결속력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독점이라는 달콤한 유인은 언제나 그 자리에 도사리고 있었다. 결속된 지배 계급은 권력을 독점하고 사회 전체로부터 영원히 불로소득을 뜯어낼 수 있다. 레닌의 망령은 늘 그렇게 주위를 맴돌았다. 결국 역사의 화살표는 다시 레닌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꺾이기 시작했다.
서구 사회는 서서히 레닌주의적 권력 구조를 구축해 나갔다. 겉으로 드러나지도,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뻔히 보이는 유인을 쫓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간 결과였다. 그렇게 우리에게 도래한 것이 바로 '생물학적 레닌주의'다. 이것이 바로 거대한 지배 체제, 즉 '대성당(The Cathedral)'의 본질이다.
자유 사회에서 개인의 신분이 타고난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면, 결속력 있는 레닌주의 지배 계급을 구축하기 위해 자연적 하층민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결론은 필연적이다. 어떤 사회에서든 남성은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성과를 낸다. 남성은 신체적으로 더 강하고, 더 거칠게 일하며, 성향의 분산이 크다. 이는 모든 특성에서 우측 꼬리가 두텁다는 뜻이며, 결과적으로 천재의 비율이 더 높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남성에게는 자연적인 짝짓기 시장이 제공하는 강력한 성취 동기까지 존재한다. 가부장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물론 생물학적 요인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보다 더 뛰어난 노동자라는 뜻도 아니다. 가부장제 안에는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누리는 신분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본질은 명확하다. 사회의 핵심 축은 남성들이 보여주는 자연적인 성과와 역량이며, 이들은 자연스럽게 남성으로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를 구축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남성들은 무임승차를 하고, 어떤 여성들은 불이익을 받으며 거대한 구조적 관성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있는 실체는 진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1960년대의 서구는 백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였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백인 남성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라면 어디든 결국 백인 남성 집단의 지배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생물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지만, 15세기 이래 축적된 사회적 자본과 우수한 문화적 관습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백인 남성은 본래 무리를 이끌고 관리하는 능력이 탁월하며, 자연스럽게 높은 사회적 지위를 점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자연 그대로의 상태는 정치를 난잡하게 만든다. 모두가 뻔히 아는 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는 아무런 사회적 가치가 없다. 집단의 결속을 증명하는 진짜 신호는 진실이 아닌 거짓, 즉 비자연적인 것을 옹호할 때 발생한다.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어떤 면에서 터무니없는 거짓은 진실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조직화 도구다. 진실은 누구나 믿을 수 있다. 반면 말도 안 되는 거짓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위조할 수 없는 충성심의 증명이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제복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제복을 입은 이들이 모이면, 비로소 군대가 된다."
중국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부르는 '지록위마(指鹿爲馬)'와 같은 이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백인 남성만으로는 빈틈없고 결속력 있는 지배 계급을 유지할 수 없다. 그들은 굳이 체제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 어떤 세상이 오든 어떻게든 잘 살아남을 부류이기 때문이다. 반면 고분고분하고 충성스러운 조직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백인 남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부류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여성, 흑인, 동성애자, 무슬림, 트랜스젠더, 심지어 소아성애증 환자까지 말이다.
이들 개개인의 역량은 뛰어날지 몰라도, 사회의 핵심 역량에 의해 굴러가는 자연스러운 사회, 즉 백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들은 결코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대가로 높은 신분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하면, 이들은 기꺼이 같은 팀으로 뛰어들기 마련이다. 얻을 것은 많고 잃을 것은 없기 때문이다. 스티브 세일러는 이를 '주변부 연합'이라 불렀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보다 더 최악이다. 이는 사회가 정상적이고 올바르게 굴러갈수록 신분이 추락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연합이다. 즉, 열등한 자들의 연합이자 말 그대로 최악의 악인 정치, 즉 '카키스토크라시(Kakistocracy)'의 완성이다.
정부 부처에 이른바 무능하고 독선적인 여성 관료들이 유독 많이 포진해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만약 정부가 이들을 원하지 않았다면 이들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민주당이라는 거대한 권력 기계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들은 스스로의 역량으로 성취해 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과거 공산당이 모스크바의 평범한 농가 출신 젊은이를 중간 관리직으로 앉히며 모든 것을 쥐여주었듯, 오늘날의 민주당 역시 이들에게 삶의 모든 기반을 제공한다.
사회에 적대적인 무슬림이나 트랜스젠더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사회 밖으로 추방당하거나 정신병원에 수용되던 부류였다. 미국 진보주의가 이토록 이들에게 집착하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이 누리는 아주 작은 권리조차도 오직 좌파의 비호와 후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악마의 계약이 존재한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사회적 거부감이 큰 집단일수록, 당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가치 있는 구성원이 된다. 체제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순간 모든 것을 잃기에 이들의 충성심은 그만큼 더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좌파가 소수자 집단을 다루는 방식을 간파한 로렌스 오스터(Lawrence Auster)의 제1법칙, 즉 '특정 집단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비행을 저지를수록 좌파는 그들을 더욱 총애한다'는 명제의 본질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좌파가 과거 소련의 공산주의에 열광했던 바로 그 좌파와 궤를 같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의 좌파가 옹호하는 가치들은 1920년대나 심지어 1950년대의 좌파가 보더라도 경악할 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완전히 같다. 국가 권력을 독점할 결속력 있는 지배 계급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동일한 유인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수단이 계급투쟁이었다면, 이제는 젠더 투쟁과 인종 투쟁으로 간판만 바뀌었을 뿐이다.
미국에서 인종 투쟁이 유독 강력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이민자들에게 독자적인 영토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소련이나 중국의 소수 민족과는 전혀 다른 조건이다. 덕분에 사회적 하층민인 소수자에게 지위를 부여해 충성을 유도하는 이 오랜 작전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먹혀들고 있다.
심지어 레닌 치하의 소련과 달리, 미국은 이제 전 세계의 모든 소수 인종을 입맛대로 끌어다 쓸 수 있는 환경까지 갖추었다. 미국 좌파가 소말리아 이민자를 악착같이 들여오는 데 혈안이 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 사회적 성과가 가장 떨어지는 집단이야말로, 당의 처분에 전적으로 목을 매는 가장 완벽한 충성 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나 소아성애증 환자보다 더 악화될 리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메커니즘의 작동 방식을 여전히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한 기사를 보면 그 극단을 목격할 수 있다. 자신의 네 살짜리 친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복역한 전과자 출신의 한 흑인 여성이 있다. 그녀는 교도소에서 20년을 복역하며 사회학 따위를 공부했다. 출소 후 그녀는 하버드 대학교 박사과정에 지원했으나 낙방했다. 그러자 진보주의자들은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냐며 말이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보라.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죽인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반성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다. 심지어 박사과정 지원서에는 그 사실을 교묘하게 속이기까지 했다. 아이의 시신을 유기한 뒤 경찰에게 끝까지 그 장소를 말하지 않은, 그야말로 완전한 사이코패스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이 여자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핵심이다. 1900년대 이전의 인류 사회였다면 그녀는 법의 심판이든 사적이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추락해야 마당한 바로 그런 인물이야말로, 좌파가 자신의 팀으로 가장 간절히 원하는 인재다. 당이 주입하는 그 어떤 극단적인 진보주의 사상에도 맹목적으로 충성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뉴욕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냈다. 그리고 다른 평범한 박사과정 학생들의 97%는 꿈도 꾸지 못할 정교수 자리를 조만간 아주 손쉽게 꿰찰 것이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이 미친 짓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확실하게 맞아떨어진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캘리포니아와 뉴욕은 이제 사실상 일당 독재 체제나 다름없다. 게다가 일정 규모 이상의 민간 기업에 여성과 흑인, 그리고 성소수자를 일정 비율 이상 의무적으로 고용하도록 강제하는 법안까지 마련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오직 제도적 혜택 덕분에 그 자리에 올랐음을 잘 알고 있기에, 체제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정치위원이 된다. 이들의 충성심은 중국 공산당이 민간 기업에 직접 파견하는 공식 정치위원보다 훨씬 더 맹목적이고 강력하다.
이와 같은 생물학적 레닌주의의 파괴력은 비단 미국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해외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과거 소련의 공산주의가 전 세계에 자발적인 제5열(내부의 적)을 심어두고 서구 사회 각지의 산업 노동자들을 조직해 모스크바의 지령을 따르게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오늘날 미국의 생물학적 레닌주의 역시 전 세계를 흔들고 선동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작동하고 있다.
과거 소련이 계급 모순을 파고들어 해외에 영향력을 투사했다면, 오늘날 미국은 현대적인 사회적 갈등과 정체성 정치를 활용해 자국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고 상대국의 결속을 흔드는 전략을 취한다는 분석이다. 특히 미·중 패권 경쟁이 치열해진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러한 문화적·이데올로기적 공세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는 인권, 다양성, 소수자 권리라는 보편적 가치를 외교 정책의 핵심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상대국의 기존 지배 질서나 전통적 결속력에 균열을 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소프트 파워 무기가 되기도 한다. 체제 내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거나 불만을 품기 쉬운 집단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권익 신장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친미적이고 친서구적인 성향의 내부 동조 세력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이다.
중국 내부나 중화권 매체에서 분출되는 진보적 담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여성 인권이나 성소수자 권리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겉으로는 순수한 인권 운동의 형태를 띠지만, 결과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제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정치적 효과를 낳는다. 지배 체제에 순응할 이유가 없는 이들이 서구식 진보주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전파하는 핵심 계층이 되는 것은, 체제 유지에 취약한 고리를 파고드는 권력 투쟁의 오랜 법칙과 궤를 같이한다.
얼마 전 다소 불쾌한 기사를 하나 읽었다. 중국이 새로 짓고 있는 입자 가속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가 현장의 수석 과학자를 인터뷰했는데, 기사는 내내 공산당의 검열 때문에 프로젝트 전체가 오염되었다며 흠집을 내기에 바빴다. 정작 인터뷰에 응한 과학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같은 중국인끼리 도대체 왜 이러느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서구 지배 체제에 충성하는 세력의 전형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서구 사회에서는 소외당하기 쉬운 특정 인구학적 특성을 가진 이들이 도덕적 전위대이자 자발적인 사상 경찰로 군림하며 강력한 권력을 누린다. 반면 중국이나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같은 전통적인 사회 체제 속에서 이들은 결코 주류의 높은 지위를 누리지 못한다. 따라서 서구의 선전 선동과 사상적 영향력에 노출되는 순간, 이들이 자국의 독립성과 체제에 저항하는 내부의 적, 즉 제5열로 전향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소수 민족을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서구 학계에서 중국 전문가로 인정받고 연구 자금을 지원받으려면 현지의 주류 문화나 역사 대신 위구르족이나 티베트족 같은 소수 민족 문제에 집착해야만 한다. 오랜 역사와 깊이를 지닌 문명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보다, 기존 체제에 적대적인 소수 집단을 발굴하고 부각하는 것이 서구의 지정학적 인센티브와 이데올로기적 요구에 완벽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와 중국의 레닌주의가 역사적으로 진화했듯, 현대 서구의 생물학적 레닌주의 역시 권력의 안정화 단계에 따라 그 형태를 바꿀 가능성이 크다.
과거 스탈린은 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제국 이전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고 권력이 공고해진 수십 년 뒤 소령 공산당은 다시 역량 있는 러시아 남성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은 체제의 이념에 진심이 아니었기에, 소련이라는 국가가 무너질 때도 별다른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 그 후예들은 러시아에서 여전히 지배 계층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중국 공산당 역시 더 이상 농민과 노동자의 정당이 아니다. 철저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은 '학급 1등'들의 정당이다. 과거처럼 지주들이 돌아와 자신과 자식들을 다시 노예로 삼을지 모른다는 공포로 충성을 유도하는 시대는 끝났다. 대신 차세대 감시 체계와 정교한 선전 기구가 그 충성심을 담보한다. 주목할 점은 러시아와 중국 모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계급투쟁이라는 공식 이데올로기를 여전히 유지했으며, 구성원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를 끊임없이 맹목적으로 복창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중국은 진보주의적 공세에 지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내 블로그에도 썼듯이, 현재 중국에서 여성과 소수 민족의 입지는 과거보다 훨씬 더 위축되었다. 성소수자는 말할것도 없다. 중국 정계에 동성애자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는 중국 내에서 미국식 진보주의 정부를 동경할 만한 잠재적 세력이 수억 명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미국은 바로 이들을 과녁으로 삼기 시작했다. 과거 중국 중산층을 겨냥해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를 선전하던 전략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이제는 중국 중산층의 생활 수준이 미국보다 높고 삶의 스트레스도 확실히 덜한 편이어서, 예전 같은 경제적 선전은 더 이상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전략을 완전히 수정했다. 물질적 풍요를 미끼로 던지는 대신, 중국 체제 내에서 절대로 주류가 될 수 없는 소외 계층과 소수자 집단의 정체성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선전의 과녁을 바꾼 것이다. 경제적 만족감으로는 채울 수 없는 신분적 열망과 생물학적 불만을 파고드는 이 새로운 접근법은, 기존 중산층 포섭 전략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파괴적인 전술로 작동하고 있다.
미국의 이른바 '주변부 연합' 체제가 해외를 교란하는 데 실패하고 국내에 안착한다고 가정할 때, 이 시스템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에 대한 분석이다.
과거 러시아와 중국은 건국 초기 무능한 하층민 중심의 카키스토크라시를 수십 년 만에 끝내고 엘리트 관료 체제로 복귀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이미 명목상의 일당 독재 체제가 구축되어 있었고, 수세기에 걸친 전제주의적 전통이라는 토양이 존재했기 때문에 위로부터의 급격한 궤도 수정이 가능했다.
반면 미국은 공식적인 일당 체제로 이행하기까지 아직 최소 10년에서 20년의 시차가 존재하며, 상호 대립적인 민주주의 전통이 깊게 박혀 있어 이미 좌편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한 이 거대한 바퀴를 중간에 멈춰 세우기가 구조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향후 민주당 일당 지배 체제하에서 강력한 권력자가 등장해 선동가들을 숙청하고 체제를 안정시키는 '스탈린주의적 전환'이 일어난다 한들, 이데올로기 자체는 이미 국교(國敎)로 고착된 이후일 것이다. 즉, 체제가 안정화된 최선의 시나리오에서조차 2020년대의 진보주의 수사들이 국교 수준으로 박제될 가능성이 크다.
이 체제 하에서 여성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어 풍자의 대상조차 될 수 없고, 특정 종교는 무조건 평화의 상징으로 규정되며, 트랜스젠더들은 소급하여 출생 증명서를 수정하는 권리를 당연하게 누리게 된다. 실질적인 국가 운영과 실무는 여전히 역량 있는 백인 남성 엘리트들이 담당하겠지만, 그들은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매일 정해진 횟수만큼 이 진보주의적 교리를 맹목적으로 복창하고 신앙 고백을 해야 하는 기괴한 관료 체제가 완성되는 셈이다.
미국이 일당 체제로 안착하기도 전에, 브라질처럼 양극화와 부패로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 전체가 아수라장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이 시나리오가 훨씬 더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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