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번역] 닉 랜드, 암흑계몽주의 제2부: 역사의 궤적은 길지만, 결국 좀비 아포칼립스로 흘러간다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2부: 역사의 궤적은 길지만, 결국 좀비 아포칼립스로 흘러간다


닉 랜드(Nick Land), 2012년 3월 9일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 이 논의를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지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리나 시트린(Marina Sitrin):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민주주의가 존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


(존 J. 밀러(John J. Miller)의 기록에서 인용)


“역사의 문제는 늘 여기에 있다. 마치 모든 상황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민주주의’와 ‘자유’를 함께 검색해 보면 어두운 의미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적어도 사이버 공간에서는 두 개념이 긍정적으로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명백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글 검색엔진이 긁어모은 방대한 데이터로 여론을 판단해 보면, 두 단어는 서로 결합하기보다 대립하고 충돌하는 관계로 나타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민주주의가 자유를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인 위협이며, 결국에는 자유를 완전히 말살하고 말 것이라는 보수주의적 통찰과 궤를 같이한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계는 마치 '엄청난 식성과 거대한 체구를 가진 가르강튀아(Gargantua)'와 파이의 관계와 같다. “우리가 자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가. 속이 출출해 침이 고일 지경이다.”


스티브 행크(Steve H. Hanke)는 짧은 에세이 <민주주의 대 자유>에서 미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대다수 미국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1776년 독립선언서나 1789년 미국 헌법에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또한 미국의 건국 문서에 왜 이 단어가 빠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나면 더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대중이 그동안 선전 선동을 통해 믿어온 바와 달리,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았으며 몹시 우려했다. 다수의 폭정이 가져올 폐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 제정자들은 연방 정부가 다수의 의지에 휘둘리지 않도록, 즉 민주주의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헌법 제정자들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과연 무엇을 지키려 했을까? 이들은 정부의 목적이 존 로크가 주장한 생명, 자유, 재산이라는 세 가지 권리를 시민에게 보장하는 데 있다는 점에 모두 동의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 한다.


“헌법은 기본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주체와 그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명시한 구조적이고 절차적인 문서다. 특히 권력분립과 견제와 균형을 매우 강조한다. 이는 사회 공학을 목적으로 만든 가공의 설계나 공식이 아니라, 정부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였다. 한마디로 헌법은 국민이 아니라 정부를 다스리기 위해 고안된 법이다.


권리장전은 국가의 침해로부터 국민이 지키는 권리를 규정한다. 권리장전에 따라 시민이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배심원 재판을 받을 권리뿐이다. 그 밖의 모든 시민 권리는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헌법 비준 후 약 100년 동안 미국의 사유재산과 계약, 국내 자유 무역은 절대적인 가치로 존중받았다. 이에 따라 정부의 권한과 규모도 극히 제한되었다. 이 모든 제도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자유'의 개념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반동의 정신이 시스(Sith)의 촉수처럼 뇌리를 파고들기 시작하면, 과거의 고전적(혹은 비공산주의계열) 진보주의 서사가 한때 어떻게 통용될 수 있었는지조차 기억하기 어려워진다. 도대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갈수록 막강한 권력을 쥐며 포퓰리즘에 빠져들던, 저 굶주린 괴물 같은 국가에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결국 마주하게 될 이 재앙은 너무도 뻔히 예견된 일이 아니었나? 과거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토록 태연히 휘그주의자, 즉 낙관적 진보주의자가 될 수 있었을까?


급진적 민주화가 지닌 이념적 파급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진보주의 성향의 월터 러셀 미드(Walter Russell Mead)부터 무신론적 반동주의자인 멘시우스 몰드버그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상가가 낱낱이 파헤쳤듯, 급진적 민주화는 극단적 개신교의 종교적 열광과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이것이 혁명가의 영혼을 뒤흔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마틴 루터가 교황청 체제에 도전장을 던진 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독일 전역에서는 농민 반란군들이 지배 계층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적 발전이 지닌 실증적 신뢰성은 훨씬 더 당혹스럽고 진정으로 복잡한 문제다. 이는 데이터에 기반한 치열한 논쟁이 필요한 영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혼란이 생기는 이유는 현대 민주주의 제도가 과학 기술, 경제, 사회, 정치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착시와 잘못된 인과관계가 만들어졌다.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의 주장대로 산업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관료주의 문화를 낳고 결국 정체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겉보기에는 민주주의가 물질적 풍요와 '동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특히 이념적 열망이 편견으로 작용하면, 후행 지표를 긍정적인 원인으로 오인하기 쉽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암은 살아 있는 생명체에만 생기는 병이므로, 암을 생명력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로빈 핸슨(Robin Hanson)은 다음과 같이 완곡하게 지적한다.


“그렇다. 수많은 지표가 지난 한 세기 동안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왔고, 앞으로 한 세기 동안도 계속 나아질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판 케네디의 정치적 여정에 동참하면 '빈곤, 질병, 독재,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두고, 이를 '유토피아적 환상'이라 비판하는 학생들의 생각이 실증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 이 분야에서 나타난 긍정적인 변화들은 결코 그러한 정치 운동 덕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대부분 산업혁명을 통해 인류가 풍요해진 결과물이며, 오히려 정치 운동은 평균적으로 이러한 발전을 가로막는 경향이 있었다.”


단순한 역사적 연대기만 보더라도 민주화는 산업화의 결과물일 뿐, 산업화를 이끈 원동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찰은 대중 사회과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이론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사회가 민주적인 방향으로 '성숙'하는 것은 부의 축적이나 중산층 형성과 같은 특정 임계점을 넘어서야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 깔린 엄격한 논리적 귀결, 즉 민주주의가 물질적 진보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대개 간과된다. 민주주의는 진보를 소비할 뿐이다. 암흑 계몽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라는 현상을 연구하는 데 가장 적합한 분석 틀은 다름 아닌 일반기생충학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식인 행위와 함께 사회가 붕괴해 갈 때, 준(準)자유지상주의적 대응은 이러한 현실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이 선호하는 대책은 격리다. 이때 중요한 것은 소통의 단절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를 기능적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피드백 루프를 긴밀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를 가장 강력한 형태로 직접 마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사회적 연대는 기생적 행위의 편이다. 급진적으로 민주화된 사회는 시장 신호와 같은 즉각적인 피드백 메커니즘을 모두 잘라낸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일반 의지’라는 중앙 집중화된 광장을 통과하는 느릿하고 불투명한 시스템으로 대체한다. 그 결과 사회는 기생 행위가 저지른 파괴적 결과로부터 기생 행위 자체를 안전하게 분리해 준다. 결국 개인의 차원에서 고통스럽고 역기능적이어서 당장 바로잡아야 했을 잘못된 행동 패턴들이, 사회 전체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만성적인 구조적 병리 현상으로 고착되고 만다.


남의 신체를 물어뜯으면 취업하기 힘들어진다. 시장 원리에 충실하고 피드백이 확실한 자유방임 사회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깨달을 법한 교훈이다. 그러나 인정 넘치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이를 두고 사상이 불온한 '좀비 혐오적 차별'이라며 맹비난할 것이 뻔하다.


그러면서 이들은 생체 기능 저하자들을 위한 정부 예산을 늘리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식인 충동을 느끼는 이들을 위해 인식 개선 캠페인을 벌일 것이다. 대학 교육과정에는 좀비 라이프스타일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집어넣으며, 비틀거리는 언데드들이 이윤만 추구하는 성과중심적인 기업이나 구시대적인 생명존중 사상을 지닌 고용주에게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일터에 대한 규제를 촘촘하게 강화할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기생충의 비호 아래 좀비에 대한 자비로운 관용이 판을 칠 때, 현실적인 보상 체계의 효과에 주목하는 소수의 반동주의자들은 으레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런 정책들이 결국 좀비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가?”


그러나 역사의 주류 흐름은 이러한 성가신 반론을 소외시키고 무시하며, 가능하면 사회적 매장을 통해 입을 막아버리는 쪽으로 흘러간다. 결국 이러한 주류 흐름에 반발하는 이들은 비상식량과 탄약, 은화를 챙겨 지하실을 요새화하거나, 제2국적 취득 절차를 서두르며 짐을 싸기 시작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역사적 실체 없는 막연한 소리로 들린다면, 아주 적절한 처방이 있다. 잠시 시선을 돌려 요즘 화제인 그리스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서구 몰락의 축소판으로서 그리스의 이야기는 눈을 떼기 힘들 만큼 흡인력이 있다. 초기 민주주의에서 시작해 완연한 좀비 아포칼립스에 이르기까지, 깔끔하진 않지만 지극히 극적인 2500년의 궤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례가 지닌 최고의 미덕은 극단에 치달은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대규모 중앙 집중식 재분배 시스템을 통해 개인과 지역 사회의 행동을 교란함으로써, 자신들이 내린 결정의 결과로부터 이들을 완전히 분리해 버린다. 개인이 할 행동은 스스로 결정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다 함께 투표로 책임을 지우는 식이다. 이런 달콤한 제안을 대체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한 후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여준 모습은 전혀 놀랍지 않다. 이들은 미시적인 사회적 신호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 피드백을 '유럽의 연대'라는 거창한 회로로 우회시키는 사회공학적 초거대 프로젝트에 열성적으로 동참해 왔다. 결과적으로 경제적으로 유의미한 모든 정보가 유럽중앙은행(ECB)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그리스가 '유럽'이라는 체제와 결탁하여 자국 금리에 담길 수 있었던 모든 시장 신호를 완전히 말살해 버렸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 정책 선택에 작동해야 할 금융 시장의 모든 자정 작용을 사실상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야말로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가장 극치에 달한 민주주의의 형태다. 현실을 법적으로 폐기해 버리는 것만큼 '일반 의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은 없으며, 독일의 낮은 금리를 그리스의 방만한 재정 지출에 결합하는 것만큼 현실 세계에 확실하게 독약을 들이붓는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처럼 살고, 돈은 독일인처럼 내라." 이 지극히 매력적인 슬로건을 내걸고도 정권을 잡지 못하는 정당이 있다면, 황량한 광야에서 독수리가 파먹다 남은 찌꺼기나 찾아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마땅할 것이다. 이 표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상상 가능한 의미 그대로, 그야말로 진정한 '뇌가 없는 자들'을 위한 궁극의 선택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될 수 있겠는가?


보다 정확히 말해,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멘시우스 몰드버그는 자신의 블로그 ‘무조건적 유보(Unqualified Reservations)’에 연재한 시리즈 《도킨스는 어떻게 몰락했는가(How Dawkins Got Pwned)》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염성을 지닌' 가상의 '최적화된 밈적인(memetic) 기생충'을 설계하기 위한 규칙들을 개괄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엄청난 전염성을 지닐 것이고, 극도로 병원성이 높을 것이며, 끈질기게 살아남을 것이다. 그야말로 매우 끔찍한 바이러스다."


이 이념적인 매우 강력한 흑사병에 비하면, 리처드 도킨스가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그토록 조롱했던 구시대의 유물 같은 일신교 신앙은 고작해야 조금 불쾌한 독감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밈(meme)의 개조 작업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암흑 계몽주의의 도식에 따라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을 관통하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내 생각에 도킨스 교수는 그저 '기독교적 무신론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개신교적 무신론자'다. 그리고 단순한 개신교적 무신론자도 아니다. 그는 '칼뱅주의적 무신론자'다. 더 나아가 그는 '영국-칼뱅주의적 무신론자'다.


다시 말해, 그를 '청교도적 무신론자', '비국교도적 무신론자', '반국교도적 무신론자', '복음주의적 무신론자' 등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생물학적 분지학(分枝學)에 기반한 계통 분류는 도킨스 교수의 지적 가계를 약 400년 전, 즉 영국 내전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다. 물론 무신론이라는 주제만 제외한다면, 도킨스의 핵심 사상은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에 번성했던 랜터(Ranter), 레벨러(Leveller), 디거(Digger), 퀘이커(Quaker), 제5왕국파(Fifth Monarchist), 혹은 그 외 극단적인 영국 비국교도 전통의 교리들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일치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 자들은 괴짜들이었다. 광적인 광신도들이었던 셈이다. 17, 18, 19세기의 평범한 영국 주류 사상가에게 이들의 전통(혹은 그 현대적 후손)이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지배적인 기독교 교파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면, 그는 이를 인류 종말이 임박했다는 징조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 주류 사상가들이 틀렸다고 확신한다면, 당신은 나보다 훨씬 더 강한 확신을 지닌 셈이다.


다행히도 크롬웰 본인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편이었다. 호국경 체제 치하에서 극단적인 초(超)-청교도 종파들이 권력을 완전히 틀어쥐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 다행스럽게도 크롬웰은 나이가 들어 사망했고, 크롬웰주의도 그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영국에는 합법적인 정부와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복원되었으며, 비국교도들은 다시 변두리의 비주류 밀려났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이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 시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쓸 만한 기생충을 그리 쉽게 잠재울 수는 없는 법이다. 청교도 집단은 미국으로 도망쳐 뉴잉글랜드에 신권정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미국 독립 혁명과 남북 전쟁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며, 미국 청교도주의는 세계를 제패하는 가도로 거침없이 진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에서의 승리는 이들의 전세계적인 패권을 확고히 다져놓았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정당성을 인정받는 모든 주류 사상은 결국 미국의 청교도들, 그리고 그들을 거쳐 영국의 비국교도들에게서 뻗어 나온 후손들이다.”


이 '매우 끔찍한 바이러스'가 세계를 제패하게 된 상황에서, 도킨스처럼 이러한 상황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난 인물을 굳이 물고 늘어지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몰드버그가 도킨스를 비판 대상으로 삼은 데에는 정교하게 계산된 전략적 이유가 있다.


몰드버그는 도킨스의 다윈주의, 아브라함계 유신론에 대한 지적 거부, 그리고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광범위한 헌신이라는 측면에서 그와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몰드버그가 포착한 핵심은 따로 있다. 도킨스의 비판적 사고 능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진보주의를 위협할 만한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지극히 갑작스럽고 종종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딱 멈춰 버린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도킨스는 매우 상징적인 지표다. 오늘날의 전투적 무신론 역시 아브라함계 메타 밈(meta-meme)이 현대적으로 변형된 하나의 변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영국-개신교 및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계통적 분파에 속해 있으며, 그들만의 고유한 전통은 다름 아닌 '반(反)전통주의'다.


따라서 《만들어진 신》에서 보여주는 요란한 무신론은 일종의 방어용 교란 작전이자 종교 개혁의 일관된 업그레이드 버전에 가깝다. 이는 경험주의와 이성을 압도하는 진보적 열망에 의해 작동되며, 초기 유신론 버전에서 발견되던 것 못지않게 신경질적인 교조주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도킨스는 그저 계몽된 현대 진보주의자나 암묵적인 급진적 민주주의자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화려한 경력을 지닌 과학자, 더 정확히는 생물학자이며, (따라서) 다윈주의 진화론자다. 그러므로 그가 이 밈적 슈퍼 바이러스가 규정한 '용납 가능한 사상의 한계'에 부딪히는 지점이 어디일지는 아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가 물려받은 저교회파(low-church) 초(超)-개신교 전통은 영적 투자의 대상을 '신'에서 '인간'으로 대체했다. 문제는 그 '인간'이라는 개념이 지난 1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윈주의적 연구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을 겪어왔다는 점이다.


(올바르고 품격 있는 당신이라면 몰드버그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읽었을 때, 아마 이미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발 인종 얘기는 하지 마세요, 인종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시대정신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맹신하는 저 달콤한 '진보'라는 신의 이름으로 제발 인종만큼은 언급하지 말아주세요...')


그러나 몰드버그는 이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를 인용한 도킨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물어뜯기가 아니라 사고력으로 겨루는 경쟁에서, 문명 위계질서의 가장 높은 자리는 확실히 우리의 어두운 피부를 가진 사촌들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킨스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틀에 가두어 논평한다. 


"만약 헉슬리가 우리 시대에 태어나 교육받았더라면, 그의 빅토리아 시대적 감상과 번지르르한 어조에 우리와 함께 가장 먼저 몸서리쳤을 것이다. 내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오직 시대정신(Zeitgeist)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상황은 더 악화된다. 몰드버그는 헉슬리의 손을 잡고... (우웩!) 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듯한 기괴한 짓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건 확실히 기존의 평범하고 온건한 자유지상주의적 반동주의의 수준을 넘어섰다. 진정으로 어둡고 섬뜩해지는 지점이다. 


"진지하게 묻건대, '인류는 평등하다는 사상'의 증거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도킨스 교수는 정확히 무슨 이유로 모든 신인류(新人類)가 신경학적 발달 측면에서 완전히 동일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가?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생물학적 다양성 혹은 균일성이 지닌 과학적 타당성에 대해 각자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든 간에, 오늘날 오직 후자의 가정(균일성)만이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설령 인간 본성에 대한 진보주의적·보편주의적 믿음들이 실제로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그 믿음을 고수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합리성의 기준을 통과할 만한 검증 과정을 거쳐 그 결론에 도달한 것도 결코 아니다.


이 믿음들은 종교적 교리로서 수용될 뿐이다. 신앙의 핵심 조항들이 으레 그러하듯, 격정적이고 강렬한 맹신을 동반한 채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과학적 오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정치적 올바름의 결여'라 부르고, 과거에는 '이단'이라 불렀던 바로 그 사상의 문제다.


인종주의에 대해 이처럼 초월적인 도덕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원죄’ 교리를 맹신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는 비합리적인 행위다. 사실 인종주의는 원죄 교리가 현대적으로 변형된 명백한 대체물에 불과하다.


물론 결정적인 차이는 있다. ‘원죄’는 고립된 사회적 집단이 고수하는 전통적 교리일 뿐이며, 대중 지식인이나 언론인들 사이에서 거의 대변되지 못하고, 주류 세계 문화에서도 철저히 유행에 뒤떨어진 취급을 받는다. 게다가 이 원죄 교리를 널리 비판하거나 조롱하더라도, 비판자가 살인, 절도, 간통을 옹호하고 있다고 곧바로 단정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 인종주의가 사회의 '최악이자 본질적인 죄악'이라는 지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사회 엘리트들로부터 전방위적인 비난을 사게 되며, 노예제 옹호론에서부터 제노사이드 망상에 이르는 온갖 사상범의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다. 이 체제 속에서 인종주의는 일상적인 시민 간의 상호작용이나 사회과학적 현실주의, 혹은 효율적이고 비례적인 법 집행의 영역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그것은 무한과 영원의 영역, 즉 초(超)-개신교도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타오르는 죄악의 심연에 속하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악'으로 군림한다.


과거의 이단과 이를 대체한 새로운 이단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감정의 불균형, 제재의 격차,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사회적 권력의 비대칭성은 한번 눈치채고 나면 계속해서 신경을 자극하는 지표가 된다. 새로운 종파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들은 딱히 자신들을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종 간에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인간 생물학적 다양성(HBD, Human Biodiversity)’을 지지하는 집단마저도, ‘주류 사회의 올바른 인종관을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신성화하는 현상 그 자체’만을 가지고 논해서는 몰드버그가 간파한 급진 민주주의의 그 깊은 병리성을 전부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그 병리의 핵심은, 국가에 대한 헌신적 신앙에 있다. 


- 원문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120724074812/http://www.thatsmags.com/shanghai/article/1901/the-dark-enlightenment-p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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