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변이의 족적
돌연변이의 족적
우리는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
사상의 계보가 수천 년에 걸쳐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고, 문화적 수렴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한 개인이 그 전체 흐름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사실상 미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메타인지가 무슨 소용이냐.’
열심히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고, 주변환경이 심어준 프레임을 벗어나려 애써보았자, 결국엔 압도적인 문화적·역사적 조류 앞에서 한낱 작은 부유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개인의 의식 같은 것이 이 거대한 물결을 바꿀 수 없다면, 그런 메타인지는 그저 허망한 자기 위안일 뿐이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의문은 정당하다.
그런데 못 막는 것과 무의미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그 거대한 흐름이 실제로 어디서부터 만들어지고,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사상의 수렴진화라는 말을 쓰면, 많은 사람들이 그냥 비유나 은유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문화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진화한다는 식의, 그럴듯하지만 과학적으로는 느슨한 표현으로 들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상당히 문자적인 의미에 가까워지고 있다.
진화생물학과 문화인류학의 교차 지점에는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라는 개념이 오랫동안 연구되어 왔다. 이는 유전자가 문화를 형성하고, 그 문화가 다시 유전자에 대한 선택압을 만들어 내는 쌍방향 피드백 루프를 말한다. 인간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환경을 만들어 그 환경이 다시 자신을 선택하는, ‘생태적 틈새 구축(niche construction)’의 가장 강력한 사례다.
고전적이고 가장 잘 알려진 사례들이 있다.
목축 문화가 발달한 집단, 특히 북유럽과 동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성인 유당분해효소 유지(lactase persistence) 유전자가 강하게 선택되었다. 대부분의 포유류는 젖을 떼고 나면 유당을 분해하는 락타아제 효소 생산이 급격히 줄어든다. 그런데 목축을 통해 동물의 젖을 식량 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집단에서는, 성인이 되어서도 우유를 소화할 수 있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개인들이 생존과 번식에서 큰 이점을 가졌다. 문화적 실천(낙농)이 새로운 선택압을 만들었고, 그 선택압이 불과 수천 년 만에 유전자 빈도를 극적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인간 진화에서 가장 빠르고 명확한 유전자-문화 공진화 사례로 평가받는다.
비슷하게, 농경 문화가 정착한 집단에서는 전분 소화 관련 아밀라아제(amylase) 유전자의 복제 수가 증가했다. 탄수화물이 풍부한 곡물 중심의 식생활이 지속되면서, 침과 췌장에서 전분을 더 효율적으로 분해할 수 있는 유전형을 가진 사람들이 영양 흡수와 생존에서 유리해졌기 때문이다. 문화가 식단을 바꾸고, 식단이 다시 유전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런 생물학적 사례는 이미 놀랍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사상, 가치관, 정치적 성향의 영역까지 확장될 때다.
최근 수십 년간 진행된 신경생물학 연구들은 정치 성향과 뇌 구조·기능 사이에 체계적인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보수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편도체(amygdala)의 크기나 활성화 패턴이 다르고, 위협·불확실성·혐오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관찰된다. 반대로 진보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의 특정 영역이 상대적으로 더 활발하게 작용하며, 새로운 경험과 불확실성에 대한 내성이 높은 편이다.
쌍둥이 연구(twin studies)는 이 차이의 상당 부분이 유전적 기반을 가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일란성 쌍둥이와 이란성 쌍둥이를 비교한 연구들에서, 정치적 이념의 유전율(heritability)은 대략 40~60% 정도로 추정되곤 한다. 성격 심리학의 Big Five 모델에서 특히 개방성(Openness to Experience)은 진보 성향과, 성실성(Conscientiousness)은 보수 성향과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는데, 이 두 성격 특성 자체도 상당한 유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주의점이 있다.
상관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며, 유전적 기반이 있다고 해서 결정론(determinism)이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환경, 교육, 개인적 경험, 우연한 사건들이 상호작용하며 표현형(phenotype)을 형성한다. 게다가 유전자는 운명이 아니라 ‘경향성’이나 ‘유인’을 제공할 뿐이다. 특정 뇌 구조나 호르몬 반응 패턴이 어떤 사상이나 가치관에 더 친화적인 토양을 만들어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격, 신체적 특징, 신경생물학적 경향성이 특정 사상 체계나 세계관에 더 잘 맞는 ‘유인’을 제공한다는 것은 더 이상 무리한 추측이 아니다. 문화가 유전자를 바꾸고, 그 바뀐 유전자가 다시 문화와 사상의 선택 환경을 형성하는 이 순환 고리는, 우리가 사상의 수렴진화를 이야기할 때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인 메커니즘으로 다가온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밈(meme, 문화적 유전자)이라는 개념을 제안한 것은 정확히 이 맥락에서였다. 문화적 단위 — 아이디어, 가치관, 행동 패턴, 상징, 서사 — 가 유전자처럼 복제되고, 변이되고, 선택압을 받고, 숙주(인간)의 행동을 변형시킨다는 관점이다.
한 번 퍼지기 시작한 밈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복제되며, 말과 글, 이미지, 의식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된다. 성공적인 밈은 숙주가 그 밈을 더 많이, 더 열정적으로 전파하도록 행동을 조작한다.
그런데 밈과 유전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밈의 전달은 상당 부분 라마르크주의적(Lamarckism, 용불용설) 특징을 가진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배우고, 고민하고, 수정·개선한 아이디어가 그대로(또는 크게 개선된 형태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다. 획득 형질이 빠르고 직접적으로 복제되는 것이다. 유전자는 철저히 다윈적 — 부모가 평생 노력해서 얻은 형질은 DNA에 직접 반영되지 않는다 — 인 데 반해, 문화는 이런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바로 이 라마르크주의적 유연성 때문에 문화 진화는 생물 진화보다 압도적으로 빠르다. 생물학적 진화는 세대 교체 시간에 묶여 있지만, 문화는 수평적 전파가 가능하고, 한 사람의 평생 동안 축적된 변화가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다.
하지만 더 정확히 들여다보면, 밈의 진화는 결국 다윈주의에 더 가깝다.
개별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라마르크주의적으로 생각을 수정하고 개선할 수 있지만, 전체 문화 풀(cultural pool)에서 어떤 밈이 살아남고 번성하는지는 철저한 다윈주의적 과정 — 변이(variation), 선택(selection), 유전(heredity) — 을 따른다. 아무리 열심히 다듬은 아이디어라도 사회적·경제적·심리적 적합도가 낮으면 사라진다. 반대로 우연한 변이로 생긴 단순하고 강력한 밈이 폭발적으로 퍼지기도 한다.
플랫폼 알고리즘은 이 다윈주의적 선택을 극도로 가속화한다. 어떤 콘텐츠가 더 많은 클릭, 공유, 체류 시간을 끌어내는지를 실시간으로 측정해, 승자 독식 구조로 복제 기회를 부여한다.
이 문화적 수렴의 속도가 생물학적 적응의 속도를 압도적으로 앞서가고 있다.
미국식 세속 칼뱅주의 — 성공을 도덕적 증거로 보는 세계관, 끊임없는 자기 최적화와 생산성 숭배 — 가 할리우드 영화, 실리콘밸리, 대학 등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속도는 가속 중이다. 틱톡이나 인스타, X(트위터)의 알고리즘이 분노, 불안, 질투 같은 감정 반응을 전 지구적으로 최적화하는 속도 역시 가속 중이다. 영미권 데이터로 훈련된 AI 언어 모델들이 특정 도덕 프레임과 개념 구조를 기본값으로 깔고 확산시키는 속도 역시 매우 가속 중이다.
이 모든 것이 불과 수십 년 만에 일어나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는 여전히 수만 년 전의 환경에 가까운 상태인데, 문화적 환경은 극적으로, 그리고 비대칭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 결과, 어떤 성격이나 인지 스타일이 사회적으로 유리한지가 빠르게 바뀐다. 오늘날 rewarded 되는 특성이 내일은 penalty를 받을 수도 있다. 이런 문화적 선택압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한 방향으로 지속되면, 결국 유전자 빈도에도 미묘한 흔적이 남는다. 문화가 먼저 선택압을 만들고, 그 압력이 장기적으로 생물학적 다양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하나의 단일한 극점으로 깔끔하게 수렴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수렴의 양상은 훨씬 더 복잡하고, 층위별로 다르게 진행된다. 표층과 심층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흔하고, 계층에 따라서도 수렴의 속도와 깊이가 크게 갈린다.
표층의 영역 — 언어, 의례, 제도적 형식, 외형적 라이프스타일 — 은 매우 빠르게 수렴한다. 미디어 매체, SNS, 국제 기업 문화, 그리고 서구 중심의 정체성·도덕 언어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표면적으로는 점점 더 비슷해 보인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 옷차림, 소비 패턴, SNS에 올리는 이미지, 심지어 정치적 슬로건까지도 쉽게 공유되고 모방된다.
그러나 심층 — 실제 가치 구조, 가족 내 관계 방식, 공동체에 대한 감각, 성공과 실패에 대한 내면적 평가 기준 — 은 훨씬 느리게, 그리고 불완전하게 변한다. 이곳에서는 오랜 역사적·생태적 조건이 만들어낸 깊은 습속과 정서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한다.
한국은 이 현상을 관찰하기에 특히 좋은 사례다.
표층적으로는 미국식 정체성 담론, 다양성·포용·자기표현 중심의 언어, 그리고 글로벌 소비문화가 빠르게 수입되어 지배적이다.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 인스타그램식 자기 연출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심층에서는 여전히 강한 가족주의, 극단적인 교육 열정, 부모-자녀 간의 밀접한 의무감, 그리고 관계 중심의 사회적 계층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많은 가정이 핵가족 형태로 바뀌었지만, 부모가 자녀의 교육과 성공에 쏟는 정서적·경제적 투자 규모는 서구 사회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성인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거나, 가족의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태도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직장과 사회생활에서도 서구식 수평적·개인주의적 커뮤니케이션이 표면적으로 유행하지만, 실제 의사결정과 인간관계에서는 여전히 연공서열, 학연·지연, 그리고 미묘한 위계와 관계 맺기가 깊이 작동한다.
이 표층과 심층 사이의 괴리와 충돌이 한국 사회 특유의 혼종성을 만들어낸다. 겉으로는 글로벌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오랜 문화적 문법이 여전히 강력하게 사람들을 움직이는, 독특한 긴장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차원은 계층적 수렴이다.
전 세계 엘리트층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수렴한다. 그들은 같은 소수 명문 대학(아이비리그, 옥스브리지, 서울대·KAIST 등)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같은 영어로 소통하며, LinkedIn과 X(Twitter), 같은 국제 컨퍼런스와 TED 스타일의 프레임워크를 공유한다. 소비 취향(스타벅스, 애플 제품, 미니멀리즘 디자인), 도덕적 신호(환경·다양성·포용), 정치적 견해까지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 이들은 국적을 초월한 하나의 초국가적 계급(cosmopolitan elite)처럼 행동한다.
반면 각국의 대중들은 수렴의 속도가 훨씬 느리고 불완전하다. 그들은 지역적·국가적 특수성 — 언어, 종교, 가족관, 역사적 기억, 경제적 불안 — 을 훨씬 강하게 유지한다. 글로벌 문화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이를 자신들의 맥락에 선택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한다.
이 구조가 강화되면 흥미로운 역설이 나타난다.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동질적인 글로벌리즘 엘리트 문화가 존재하는 한편, 각국 대중 문화와 정서는 여전히 뚜렷한 차이를 유지한다. 그리고 이 사이의 괴리가 커질수록, 포퓰리즘이 전 세계적으로 거의 동시에 부상하는 현상이 설명된다.
수렴하는 엘리트와 상대적으로는 발산하는 대중 사이의 문화적·경제적·정서적 균열이 각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폭발하는 것이다. 엘리트가 “진보주의적이고 글로벌한 가치”를 당연시할수록, 대중은 “우리의 것”, “우리 공동체”, “우리 전통”을 방어하려는 강한 반발을 보인다. 이는 단순한 경제 불평등 문제가 아니라, 인식과 정체성의 괴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렴은 결코 직선적이지 않다. 오히려 다층적이고, 불균등하며, 때로는 강한 역반발을 동반하는 복잡한 과정이다.
어느 사회에나, 어느 시대에나 자기 집단의 주류 아비투스(habitus)와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주류가 공유하는 당연한 세계관, 몸에 밴 행동 방식, 가치 판단의 패턴, 미적 감각, 심지어 유머 코드까지 — 그 집단이 오랜 시간 동안 다듬어온 ‘정상’의 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종종 겉돌거나, 불편한 질문을 던지거나, 은근한 거부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때로는 괴짜, 때로는 위험한 이단, 때로는 단순히 ‘적응하지 못한 사람’으로 규정한다.
역사적으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몇 가지 뚜렷한 패턴을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형성이다.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화교(海外華人)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본토를 떠나 민족적·국가적 경계를 넘어 퍼져나가면서도, 각지에서 자기들만의 긴밀한 공동체를 구축했다. 박해나 경제적 기회를 따라 이동했지만, 그 과정에서 혈연·종교·문화적 유대를 바탕으로 한 강한 내부 결속력을 유지했다. 이들은 현지 사회의 주류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동시에 여러 문화 사이를 오가며 독특한 경제적·지적 틈새를 파고들었다.
또 다른 중요한 경로는 국제도시로의 이주였다.
고대의 알렉산드리아, 압바스 왕조의 바그다드,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근현대의 뉴욕과 런던 같은 도시들은 단순한 인구 밀집지가 아니었다. 이곳들은 민족적 동질성보다 지적·기질적 친화성으로 결합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이었다. 국적, 언어, 종교가 뒤섞인 가운데,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을 의심하고,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조합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끌어 모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빛나는 문명의 순간들 상당수가 바로 이런 공간에서 태어났다.
압바스 왕조의 바그다드(특히 8~10세기 ‘지혜의 집’ 시기)에서는 아랍, 페르시아, 그리스, 인도, 심지어 중국의 사상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혼종되며, 수학과 철학, 의학, 천문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와 톨레도에서는 이슬람, 유대, 기독교 지식인들이 함께 토론하고 번역 작업을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이슬람 신학이 만나 중세 유럽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했다.
19세기 말 빈(Vienna)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변방 출신 — 유대인, 체코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등 — 이들이 주류 빈 문화의 아비투스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 채 모여들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쇤베르크의 무조 음악, 클림트와 콕슈카의 회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으로 이어지는 모더니즘의 폭풍을 일으켰다. 20세기 중반 뉴욕 역시 유럽에서 망명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아인슈타인, 아렌트, 폴록, 듀샹 등)이 미국 문화와 만나면서, 추상표현주의, 현대 철학, 금융 자본주의의 새로운 형태를 창조했다.
이것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기 집단 내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한 집단의 ‘당연함’을 완전히 내면화하지 못한 상태로 여러 문화의 문법을 동시에 익힌다. 그 결과, 한 문화권의 구성원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모순과 가정을 날카롭게 포착할 수 있게 된다. 경계에 선 사람, 여러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낯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특권 — 혹은 저주 — 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로부터, 기존의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과 예술, 제도가 탄생하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한편, 자기 집단 내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사람이, 연애와 결혼, 장기적인 관계를 오로지 같은 민족 안에서만 찾으려 할 때 구조적인 한계가 생긴다.
주류가 당연하게 여기는 세계관, 감정 반응 방식, 삶의 우선순위, 유머 감각, 미래에 대한 상상력 등 — 이 모든 것이 몸에 밴 아비투스와 자신의 본성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존재한다. 관계를 맺을 때마다 이 차이를 끊임없이 협상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본성을 조금씩 접거나 숨겨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자기 집단의 기대와 자신의 깊은 욕구 사이의 긴장이 관계 안으로 스며든다. 상대방이 아무리 노력해도, 근본적인 차원에서 “아, 이 사람은 나를 정말 이해하는구나” 하는 깊은 안도감과 공감이 쉽게 생기지 않는다. 서로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랑 속에 늘 약간의 피로와 감정 번역의 비용이 따라다닌다. 설명해야 할 것, 양해를 구해야 할 것, 조심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지는 것이다.
반면, 민족이나 인종은 다르지만 기질(temperament)과 사상적 수렴점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가장 중요한 층위 — 세상을 보는 기본적인 방식,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태도,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하찮게 여기는지, 감정의 파장과 리듬 — 에서 먼저 이해가 이루어진다. 이 공통의 기반 위에서 문화적 차이는 위협이나 장벽이 아니라, 표층의 흥미롭고 매력적인 다양성으로 느껴진다. 오히려 서로의 문화적 배경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주고받으며 관계가 더 풍부해지는 경우가 많다.
기질적 동질성이 깊은 결합의 토대가 되고, 문화적 이질성은 그 위에 올려지는 재미있는 장식처럼 작용한다.
이것은 다문화주의라는 이념적 선언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의 가장 실용적이고, 가장 사적인 귀결일 뿐이다. 자신이 어떤 돌연변이인지, 어떤 기질과 가치관의 조합을 가진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같은 종류의 돌연변이를 알아보고 만날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과 같은 민족일 수도, 전혀 다른 민족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억지로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보다, 진짜로 맞는 사람과 사는 것이 낫다는 것은 사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거창한 이념도, 도덕적 의무도 아니다. 그저 인간적으로 훨씬 건강하고, 지속 가능하며, 서로에게 덜 폭력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선택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다. “같은 민족끼리여야 한다”, “혈통이 중요하다”, “타 집단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식의 집단 압력과 인식의 제한들이다. 대부분은 오랜 역사와 환경이 주입한 디폴트값일 뿐, 영원한 진리도, 생물학적 필연도 아니다.
물론 독신을 선택하는 삶도 완전히 유효하고 존중받아야 할 선택이다. 실제로 자기 집단 내 이방인들 중에는 혼자 사는 것이 관계를 맺는 것보다 훨씬 자유롭고, 자기 본성과 조화롭게 살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독신 그 자체가 아니라, 결합을 원하면서도 잘못된 제약 조건 때문에 계속 맞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거나, 아예 포기해버리는 상황이다. 자신이 어떤 돌연변이인지 모른 채, 혹은 알면서도 사회적 압력 때문에 그 사실을 외면한 채 살아갈 때 발생하는, 불필요한 고통과 기회의 상실이다.
자기 집단에서 오래도록 겉돌던 남녀가 서로를 발견하고 만나는 서사에는, 주류 로맨스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독특한 서사가 있다.
일반적인 로맨스 서사는 대개 다음 세 가지 패턴 중 하나를 따른다. 완벽에 가까운 두 사람이 운명처럼 만나 사랑에 빠지거나, 서로의 결핍을 정확히 채워주며 ‘완성’되는 이야기, 혹은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결국 해피엔딩에 이르는 구조다. 그러나 겉돌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런 극적이고 선형적인 서사가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함께 인정하고 웃어넘기는 형태로 깊어진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비로소 서로에게만은 완전히 속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은 조용하고, 때로는 서툴고, 외부의 화려한 이벤트보다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쌓인다. 그래서 오히려 더 깊고, 더 단단하며, 더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서사에는 특히 재미있고 따뜻한 부분이 하나 있다.
이 돌연변이 남녀는 각자 자기 딴에는 “나는 내 출신 집단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서로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 집단 출신다운 면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 집단과 완전히 단절된 존재가 아니었다는, 묘한 당황과 동시에 묘한 안도감. “너도 결국 그 집단 사람 맞구나” 하면서도, “그래도 나와는 다르게 배어 나오는구나” 하는 신기함. 그들은 서로에게 그런 순간들을 지적하며 웃는다.
아비투스는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비판하고, 초월하려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머릿속 개념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 것이다. 말투의 미묘한 리듬, 특정 상황에서 나오는 유머의 결, 음식을 대하는 태도, 놀랄 때나 당황할 때 나오는 몸짓, 심지어 침묵하는 방식까지. 오랜 시간 동안 문화와 환경이 새긴 흔적들은,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저절로 드러난다.
이 점이 흥미로운 대조를 만든다.
자기 집단의 주류에게 그런 부분을 지적당하면 대개 상처를 받는다. “너는 결국 우리와 다르지 않아”라는 말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하는 폄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때로는 거부감과 외로움이 커진다.
그러나 같은 돌연변이인 상대가 그 부분을 지적할 때는 완전히 다르다.
그 지적에는 악의가 없다. 오히려 충분히 이해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부드러운 관찰이자 호기심이다. 게다가 상대 역시 똑같이 ‘부끄러운’ 상태라는 사실을 서로가 잘 알고 있다. 이 대칭성이 웃음을 만들고, 동시에 깊은 친밀감을 만든다.
“나도 결국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구나. 초월하려 애쓰면서도 여전히 내 집단에 발이 걸려 있는, 보통의 인간이구나.”
그런 자기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생겨난다. 그것은 가장 따뜻하고, 가장 너그러운 형태의 자기 이해다. 가면을 벗은 채로, 서로의 가장 인간적인 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너는 나를 구원해줘” 같은 극적인 선언이 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우리 같이 이 불완전함을 견디며 살아가자”에 가까운, 조용하고 현실적인 제안이 오간다. 그리고 그 제안이 오히려 더 강력한 유대를 만든다.
이 돌연변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부모 양쪽이 각자 자신의 출신 집단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아이는 이중으로 중간지대에 서게 된다. 아버지의 집단에도, 어머니의 집단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깔끔한 한 문장으로 답하기 어렵다. 혈통, 언어, 문화적 기억, 가족의 전통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고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힘들고 외로울 때 돌아가 기댈 수 있는 명확한 ‘우리 집단’ 자체가 모호해진다.
그런데 이 혼란은 동시에 강력한 자원이 될 수도 있다.
여러 문화의 문법을 거의 선천적으로 동시에 내면화한 사람. 어느 한 집단의 ‘당연함’을 완전히 내면화하지 못한 채, 모든 당연함을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사람. 경계 자체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 이런 특성은 의도적으로 키우기 어려운, 상당 부분 타고나는 자질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자존감이다. 같은 객관적 조건에서도 두 갈래로 완전히 갈린다.
자존감이 충분히 튼튼하면, “나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유로 읽힌다. 중간지대가 결핍이나 결손의 공간이 아니라, 선택의 폭이 넓은 자유의 공간으로 느껴진다. 새로운 문화와 환경을 두려움 없이 탐험하고, 다양한 관점을 종합할 수 있는 강점이 된다.
반대로 자존감이 부족하거나, 부모로부터 부정적인 프레임을 물려받으면 같은 사실이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만성적인 소외감과 불안으로 변한다.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자책과 고립감이 평생을 따라다닐 수 있다.
그래서 돌연변이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지식도, 문화적 유산도, 물질적 자원도 아니다.
“자신이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결핍이 아니라 자원으로 바라보는 틀”이다.
이 틀은 부모 자신이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프레임하는가에서 가장 강력하게 전달된다. 자기 집단 내 이방인임을 수치스럽거나 실패로 여기는 부모와, 그것을 “나만의 독특한 위치,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시야”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부모는 자식에게 완전히 다른 내면의 지도를 물려준다. 유전자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전달되는 것은 바로 부모의 이 자기인식이다.
역사적으로 극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면, 발트 독일인 귀족 가문 출신이면서 러시아 제국에서 자라, 몽골 문화와 불교에 깊이 빠져들어 ‘몽골 제국 부흥’을 꿈꾸었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Roman von Ungern-Sternberg)가 있다. 여러 문화와 정체성의 경계 위에서 극단적으로 방황하고, 성정이 거칠고 호방하던 인물이다. 그의 삶은 중간지대에 선 사람이 얼마나 강렬한 혼란과 동시에 강렬한 에너지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다소 극적인 예시다.
물론 모든 돌연변이 자식이 그런 극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너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진심으로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된다면, 이 아이들은 기존의 어떤 집단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그래서 오히려 여러 집단을 연결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가진 세대로 성장할 수 있다.
그 돌연변이 자식이 어느 날, 어디선가 자신과 닮은 또 다른 괴짜 돌연변이를 만나 짝으로 데려오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부모 입장에서 그 순간은 특별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아이의 연인을 보는 순간, 거의 본능적으로 한눈에 알아차린다.
‘아, 저 아이도 어딘가에서 오래 겉돌던 애구나.’
말투의 미묘한 어색함, 눈빛에 스치는 경계심과 호기심의 조합, 세상을 바라보는 약간 비뚤어진 각도. 같은 돌연변이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듯, 부모 세대 돌연변이는 자식 세대 돌연변이를 직관적으로 알아본다. 혈연도, 민족도, 문화적 배경도 다를 수 있지만, ‘겉도는 방식’ 자체에 공통된 무언가가 있다.
자식 입장에서는 이 순간이 또 다른 깨달음의 시간이다. 부모가 예상 밖으로 자연스럽게, 심지어 따뜻하게 그 연인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깨닫는다.
‘아, 우리 부모도 그랬구나.’
자신이 왜 이런 사람에게 강하게 끌렸는지, 왜 주류와는 잘 맞지 않는 사람에게서 편안함을 느꼈는지, 부모를 통해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인정 이상이다. 자신의 선택이 우연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이어진 어떤 깊은 패턴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세대가 하나둘 쌓이면, 아이러니하면서도 아름다운 일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각자 자신의 출신 집단에서 배척당하거나 불편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다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가정을 이루면서, 서서히 ‘자기들만의 전통’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돌연변이가 더 이상 개인의 특이사항이 아니라, 가족의 내력(legacy)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역설로 가득하다.
그들은 주류 집단의 아비투스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살아왔지만, 결국 자신들만의 아비투스를 만들어간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 여러 문화의 문법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방식, 당연함을 의심하는 습관, 서로의 불완전함을 너그럽게 웃어넘기는 관계의 리듬. 이런 것들이 반복되고 공유되면서, 새로운 ‘우리’의 감각이 생겨난다.
그 아비투스의 핵심이 “나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정체성이 된다.
“우리는 경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여러 세계를 동시에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완전한 소속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런 암묵적인 합의가 세대를 거치며 가족 안에서, 그리고 비슷한 가족들 사이에서 공유되기 시작한다. 처음엔 개인의 고독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공동의 자산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작은 공동체의 기초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돌연변이 계보가 쌓이는 과정은, 기존 민족이나 집단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한때는 주류 사회에서 벗어난 변종이었던 사람들이, 시간의 힘을 빌려 새로운 문화적·정서적 지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형은, 처음 출발했던 주류 집단의 아비투스와는 분명히 다른, 그러나 그만큼이나 진짜인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결국 모든 것은 개인에서 시작된다.
개인이 만나 가족을 이루고, 가족들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들이 모여 더 큰 집단 — 부족, 국가, 민족 — 을 형성한다. 역사는 위에서 내려온 설계도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수없이 많은 작은 선택과 만남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며 ‘단일민족’으로 여기는 국가와 민족들조차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오랜 시간에 걸친 혼종(hybridization)의 산물이다.
로마는 라틴족, 사비니족, 에트루리아족 등 다양한 이탈리아 부족들이 경쟁하고 동화되며 탄생했다. 미국은 17세기부터 유럽 전역은 물론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에서 온 수많은 ‘이방인’들의 거대한 집합체였다. 그들이 만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한민족(韓民族)의 형성은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해 삼국시대를 거치며 오랜 혼합과 통합의 과정이었다.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예(濊)·맥(貊) 계통의 부족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최초의 국가적 연맹체였다. 이후 고조선이 쇠퇴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 다양한 부족 국가들이 등장했다. 북쪽으로는 부여와 고구려가, 남쪽으로는 삼한(三韓) — 마한, 진한, 변한 — 이 성장했다. 특히 가야는 변한의 연맹체에서 발전한 독특한 철기 문화 공동체였다.
고구려는 북방 예맥 계통의 전통을 강하게 계승하면서도 주변 부족들을 흡수·통합했다. 백제는 마한 지역의 토착 세력과 북방에서 내려온 세력이 결합한 혼종 국가였다. 신라는 진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주변 세력을 유연하게 포섭하며 성장했다. 가야 연맹은 철 생산과 해상 교역을 통해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으나 결국 신라에 통합되었다.
삼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를 거치며 이들은 치열한 경쟁과 전쟁, 동맹, 문화 교류를 통해 점차 공통의 언어, 문화, 의식 체계를 공유하게 되었다. 특히 신라의 삼국 통일(668년) 이후, 그리고 발해를 거치면서 한반도 내 다양한 집단들이 점차 하나의 민족적 정체성으로 수렴되어 갔다.
현대 유전학 연구(게놈 분석)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원은 북아시아 신석기인(약 8,000년 전)과 중국 남부에서 유래한 동아시아 농경인 집단(약 4,000~5,000년 전)이 한반도에서 만나 결합한 결과로 나타난다. 즉, 한민족은 단일한 혈통의 순수한 연속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북방과 남방, 토착민과 이주민이 섞이며 만들어진 혼종의 결과물이다.
지금 우리가 ‘단일하게’ 느끼는 민족과 문화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의 수많은 돌연변이와 이방인, 혼혈과 문화적 교류가 쌓인 층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실은 중요한 함의를 준다.
돌연변이 개인들이 만나 짝을 이루고, 그 결합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이 다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며 결합이 점점 커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개인적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성공적으로 지속되고 규모를 키운다면, 장기적으로는 또 다른 공동체, 새로운 문화, 심지어 새로운 민족이나 국가의 탄생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 실제로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기존의 민족과 국가는 영원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특정 시점에 형성된 결과물일 뿐이다. 그들은 언제든지 변화하고, 재편되고,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 수 있다.
이것은 다문화주의 이념을 강제하자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그저 맞는 사람끼리 자연스럽게 모이고, 안 맞는 사람은 안 맞는 대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쌓이면 역사가 된다는 평범한 관찰일 뿐이다. 위에서 누군가가 설계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 개인들 간의 만남, 사랑, 출산, 육아 —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오늘날의 ‘돌연변이’들이 내일의 새로운 ‘주류’가 될 가능성도 열린다.
돌연변이의 운명은 결국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새로운 특성을 가진 개체가 주변 환경과 너무 심하게 어긋나, 생존하거나 번식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조용히 도태되는 경우다.
또 다른 하나는, 살아남아 어느 순간 새로운 표준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괴이하고 위험하며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그 돌연변이가,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화하면서 오히려 가장 적합한 형태로 인정받는 경우다.
살아남은 돌연변이는 더 이상 돌연변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 되고, 새로운 주류가 되며, 새로운 ‘당연함’의 기준이 된다. 한때 이단이었던 것이 정통이 되고, 한때 괴짜였던 것이 표준이 된다.
지금 우리가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고, 심지어 ‘인간의 보편적 가치’라고까지 부르는 것들 대부분이, 사실은 한때 강력한 돌연변이였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당대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을 정면으로 뒤흔드는 위험한 괴짜였다. 중앙집권적 권력에 맞서 개인의 재산권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한 이들, 그리고 공산주의를 반대한 사람들 역시 한때는 소수의 이단이자 혼란스러운 돌연변이로 여겨졌다.
그들이 살아남아 족적을 남기고, 그 족적이 세대를 거쳐 퍼져나가면서, 한때의 돌연변이는 보편적 상식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순환이 완성된다.
살아남은 돌연변이가 새로운 표준이 되는 순간, 그 새로운 표준에서 다시금 겉도는 다음 세대의 돌연변이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새로운 주류가 만들어지면, 그 주류의 아비투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시 나타난다.
오늘의 상식이 내일의 구시대적 편견이 될 수 있다. 지금 가장 앞서간다고 여겨지는 가치관과 생활 방식도, 언젠가는 또 다른 돌연변이들에게는 답답하고 억압적인 ‘주류’로 느껴질 날이 온다.
이 순환은 끝나지 않는다. 끝날 수도 없다.
돌연변이는 문명이라는 살아 있는 유기체의 변이와 적응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메커니즘이다. 돌연변이가 완전히 사라진 사회는, 더 이상 진화할 수 없는 정체된 사회다. 반대로 돌연변이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일부가 살아남아 새로운 길을 여는 사회는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문명이 건강하다는 것은, 완벽한 일치와 조화가 영원히 유지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새로운 이방인과 돌연변이가 나타나 기존의 당연함을 흔들고, 때로는 넘어설 수 있는 역동성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그 흔들림이야말로 문명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징후다.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거시적 문명의 수렴진화도, 사상의 복잡한 계보도, 메타인지의 노력도, 결국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의 자기인식과 두 사람의 만남에서 비롯되고, 또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미시(微視)가 있으니 거시(巨視)가 있고, 거시가 있으니 미시가 있다. 이는 단순한 상호작용이 아니라 필요충분조건이다.
큰 흐름은 작은 선택들의 누적으로 만들어지며, 작은 선택들은 다시 큰 흐름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이 순환을 제대로 이해하는 순간, 개인의 노력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일이 된다.
자기 사상을 명료하게 아는 것은 철학적 각성이나 고상한 지적 유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실용적인 자기보호의 문제다.
한국 속담에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본성과 맞지 않는 행동을 억지로 따라가다 보면 결국 자신의 심신이 찢어지는듯한 고통을 겪게 된다는 뜻이다.
자기가 어떤 돌연변이인지 분명히 알면, 불필요한 비교와 강요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자기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그 게임을 진심으로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디폴트값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구별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종류의 돌연변이를 알아보고 만날 가능성이 열린다.
그렇게 시작된 작은 만남들 — 두 사람의 이해와 결합 — 이 모이고 모여 수백 년, 수천 년의 시간을 거치면 거대한 문화적·역사적 흐름의 일부가 된다. 개인이 흐름 전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흐름 속에서 다양성의 씨앗을 조용히 보존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씨앗들은 환경이 바뀌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철학 서적 속에 나오는 고상한 선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실용적인 조언이다.
이 말은 결코 “완전히 자기 자신을 꿰뚫어 알라”는 완벽주의적 요구가 아니다. 그런 완전한 자기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진짜 의미는 이것이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 자기 생각의 출처를 의심할 줄 아는 것, 환경이 주입한 것과 자신의 본성을 구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 조용한 노력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다. 자기 집단 내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수치나 결함으로 느껴지지 않고, 가능성으로, 때로는 특별한 선물로 읽히기 시작한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는 그 감각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유로, “나는 여러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자존감으로 바뀐다.
그리고 비로소, 비슷한 방식으로 겉돌고 있는 사람을 멀리서도 알아보게 된다.
거창한 문명론도, 사상의 계보도, 수렴진화의 거대한 물결도, 결국엔 이 가장 작고 인간적인 만남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불완전함을 함께 웃어넘기며 삶을 이어가는 그 순간에서 새로운 계보가, 새로운 문화의 싹이 틔운다.
주류에서 겉도는 것이 결코 낙담할 일만은 아니다. 모든 주류는 한때 돌연변이였고, 모든 돌연변이는 잠재적인 미래의 주류다. 이 순환은 끝나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문명은 살아 있다.
그러므로 꿋꿋이 살아남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족적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억지로 맞추려 애쓰지 않고, 자신의 돌연변이적 특성을 인정하며 버티는 것.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역사라는 긴 이야기 속에, 작지만 지울 수 없는 한 줄을 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겉돌던 누군가가 당신을 알아보고 다가올 때, 그 만남이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 될 것이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