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P, 청동기 시대 사고방식 제1부

제1부: 생명의 불꽃


어쩌면 우리는 생명의 본질에 대해 철저히 기만당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 수법은 단순하다. 우리 눈앞에서 붉은 마리오네트 두 마리를 요란하게 흔들어 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움직임에 홀려 넋을 잃고는, 마치 잘 길들여진 물개처럼 박수를 쳐댄다.


지난해 이전의 정치판이 꼭 이와 같았다. 트럼프가 등장하기 전 수년 동안, 우리는 우파의 탐욕스러운 기득권층과 좌파의 투박하고 서슬 퍼런 이념가들이 격투기 경기장 같은 광장에서 서로 물어뜯는 광경을 목격했다. 선량한 이들조차 이 기괴한 쇼에 매료되곤 했다. 뒷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억척스러운 여성과 살집 있는 대머리 남성이 입에 거품을 문 채 서로의 눈을 파내려 안달복달하는 모습은 어떤 면에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의 입에선 돼지의 멱따는 소리나 미리 짜인 진부한 공식 같은 말들만 터져 나올 뿐, 정작 영혼이 담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사이 나라는 병들고 청년들의 미래는 속절없이 팔려 나갔다.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속는 것은 이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당장은 문제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60년쯤 흐른 뒤, 당신의 손주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그림자 사이를 배회하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되어버린다면 어떨까. 혹은 고결한 힘을 지녔음에도 사냥꾼을 피해 반쯤 부서진 건물 아래 숨어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좌파와 우파 모두가 생명의 실체에 대해 눈이 멀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직시해야 한다.


드넓은 평원을 가로지르는 말 무리 속에서, 우두머리 수말이 어떤 야생의 정령에 사로잡힌 듯 이리저리 질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온 무리가 그 거대한 힘과 자유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뒤를 따른다. 니체가 말했던 풍경이 바로 이런 것이다. 나 역시 이와 유사한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다. 


거대한 폭포 아래, 수많은 새와 짐승들이 모여드는 곳이 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르는 동안에도 그 장소는 변함없이 그곳에 머물렀고,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새들은 영겁의 시간을 가로질러 기억 속의 그곳으로 늘 돌아온다. 날씨가 미묘하게 변할 때면 작은 새 떼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폭포가 워낙 거대해 미풍만 불어도 물보라가 사방으로 흩날리던 날이었다. 구름 뒤에서 햇살이 비치며 무수한 무지개가 피어나자, 바위틈에 숨어 있던 새들이 흥분에 들떠 쏟아져 나왔다. 녀석들은 물보라와 무지개 사이를 가로지르며 곡예를 부리듯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호메로스가 노래한 장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시아의 어느 초원에서 기러기와 두루미, 목이 긴 백조 무리가 날개의 위용을 뽐내며 하늘을 누비다 스카만드로스 평원의 강가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모습 말이다. 이런 행위를 보며 그저 생존이나 번식에 어떤 목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어떤 박식한 이는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을 직접 마주한다면, 그것이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진 이질적인 모습이 아님을 알게 된다. 어쩌면 우리 역시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느꼈을지 모른다. 그때 우리에게 생존이나 번식이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그런 무거운 강요는 ‘중력의 영(spirit of gravity)’일 뿐이며, 생명의 본질은 그 반대편에 있다. 삶을 옹졸하고 비좁게 바라보는 시각을 걷어내면 진실이 보인다. 자유로운 생명, 충만한 생명은 사치와 과잉, 그리고 낭비를 즐긴다. 생존과 번식은 그저 근원적인 무언가가 발현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가장 고결한 야생의 존재들은 가두어진 상태에서 번식하기를 거부한다. 인간뿐 아니라 수많은 동물이 굴레에 갇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곤 한다. 우리는 흔히 모든 생명체가 그저 생존과 번식만을 위해 분투한다고 믿어 왔지만, 정말 그것이 전부일까? 만약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오늘날 '진화심리학'을 논하는 이들은 대개 효모의 생태에서 도출한 원리를 동물과 인간에게 그대로 대입하곤 하는데, 이는 명백히 선후가 뒤바뀐 발상이다. 단순한 유기체의 생존 공식을 복잡한 의지와 기개를 지닌 생명체에 투영하는 것은 생명의 층위를 오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의 세계에도 그들만의 사회학적 생리가 존재한다. 생물학이나 진화론을 둘러싼 수많은 혼란은 대개 여기서 기인한다. 우리는 흔히 과학이 객관적 진리만을 전달한다고 믿지만, 사실 생물학자들의 사고 지평은 대체로 그리 넓지 못하다. 냉정히 말해, 과학계에서 가장 명민한 두뇌들은 언제나 물리학을 택했고, 그다음은 화학이었다. 최근 들어 판도가 바뀌고는 있으나, 여전히 생물학은 자연의 신비를 꿰뚫는 통찰이나 물리적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즐기는 최상위 지성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생물학계는 다소 어정쩡한 이들의 집합소였다. 쇼펜하우어는 "원숭이 목록"이나 작성하면서 자연을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자들을 경멸 섞인 어조로 비판한 바 있다. 니체 역시 다윈을 두고 자잘한 사실들을 수집해 서툰 이론을 조립하기 좋아하는 소시민적인 계산가라며 깎아내렸다. 실제로 그 이론은 투박하고 허점투성이다. 창조론자들이—비록 그들 역시 틀렸을지언정—이론 물리학에는 감히 도전하지 못하면서도 유독 진화론에 끊임없이 시비를 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화와 생명을 논하는 과학자와 생물학자들 사이에는 여전히 상당한 기만과 어리석음이 뒤섞여 있다.


내가 진화론이라는 개념을 공격하거나 수정하려 드는 이유가, 마치 좌파들이 그러하듯 그것이 인종차별적이라거나 불편해서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절대 그렇지 않다. 내 말을 들어보라. 유전의 힘과 진화의 흐름을 믿기 위해 굳이 다윈까지 불러올 필요는 없다. 인류는 다윈이 등장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유전의 원리를 알았고, 인간에게 다양한 혈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다윈의 가르침을 장려하고 이를 인류에게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진실을 은폐하려는 좌파와 그들의 수많은 로봇—이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다—에 대항할 때, 진화론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진리의 무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마리오네트를 기억하라. 인형극에 정신을 팔려서는 안 된다. 어리석은 상대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상대가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눈앞에 제시된 단 하나의 대안을 덥석 받아들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내가 ‘버그맨(Bug-man)’이라 부르는 부류와 좌파들이 인간에게 적용된 진화론적 사고를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다윈주의 그 자체가 바로 그 ‘벌레 같은 사고(bug-thought)’의 산물이다. 결국 그것은 우리를 시대의 감옥에서 해방해 줄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


개별 형질이 유전된다는 사실, 그리고 유기체와 환경이 서로에게 적응하며 어우러진다는 관찰은 분명한 진실이다. 그리고 유전에 관한 그 명확한 관찰만으로도 버그맨들의 온갖 간계와 허영을 완전히 짓밟기에 충분하다. 버그맨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다윈이 아니라, 바로 유전과 자연 그 자체다.


진화심리학자나 생물학자, 그리고 일반적인 다윈주의자들을 관찰해 보면 일종의 ‘미끼 상술’과 같은 논리적 비약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들 중 대다수는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지성을 갖추었으며, 단지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을 잃었을 뿐이다. 심지어 자신이 이런 기만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은 다윈주의를 일종의 목적론적 신앙으로 받든다. 즉, 번식과 생존이 곧 생명의 종착지이며 모든 생명체가 이를 향해 분투한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목적이 생명이나 유기체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고, 나아가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까지 설명해 준다고 여긴다. 하지만 막상 이 부분을 정면으로 반박하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목적론적 관점을 전면 부인한다. 자신들은 결코 그런 것을 믿지 않으며, 오직 자연선택이라는 물질적 기제만을 신봉한다고 항변한다. 환경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는 유기체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도태될 뿐이라는 논리다. 우리가 개나 말을 개량하듯, 자연 역시 우연의 힘을 빌려 생명체를 이리저리 빚어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목적이나 끝 같은 건 없다, 그런 소리를 하는 당신이 미친 거다!”


그러나 주의가 느슨해지는 순간, 그들의 말투는 다시 바뀐다. 예외가 없다. 어느새 특정 동물이 번식이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한다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신체적 특징조차 그런 방식으로 풀이하며, 심지어는 이를 바탕으로 도덕적 원칙까지 세우려 든다. 조금 더 솔직한 이들은 신뢰가 쌓였을 때 비로소 속내를 드러낸다. 자신을 복제하고 후세에 남기는 것을 하나의 염원이자 목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너무나 인간적인’ 반응이며, 동시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목적이나 의도에 대한 고려 없이 생물학이나 생명을 논하기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물리학이나 화학은 명백히 어떤 목적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반면 동물은 뚜렷한 동기나 목적에 이끌리는 듯하며, 그 목적을 배제하고는 생물학적 특징을 온전히 설명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다윈주의자는 본질을 잊은 척하거나 끊임없이 화제를 돌리려 애쓴다. 그는 무엇이 생명을 움직이는지, 무엇이 동물의 행동과 환경에 대한 적응을 설명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야말로 진정 흥미로운 대목임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유전의 메커니즘이나 종이 형성되는 방식, 즉 자연선택 혹은 인위적 선택이라는 다윈의 유일한 통찰은 사실 가장 따분한 부분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번식에 성공한 동물만이 형질을 물려준다는 사실을 역사상의 어떤 양치기가 몰랐겠는가. 하지만 오로지 이것만이 동물의 적응과 행동을 설명해 준다는 주장은 명백한 넌센스다.


겨울을 나기 위해 먹이를 저장하는 알프스 생쥐가 있다. 이 쥐는 겨울 식량을 보관하기 위해 독초를 어느 정도 섞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독초가 너무 많으면 식량은 독극물이 되고, 너무 적으면 썩어버린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또 다른 예도 있다. 두 마리의 곤충이 있는데, 한쪽이 다른 쪽을 마주치자마자 죽여버리는 경우다. 죽임당하는 곤충은 당장 상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지만, 먼 미래에 상대의 알을 먹어 치울 존재다. 대체 그 곤충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아는 것일까?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신경계조차 지극히 원시적이다. 그저 ‘피’ 속에 새겨진 무언가를 통해 본능적으로 알 뿐이다. 


자연계에는 이처럼 정교하고 복잡한 행동 양식이 도처에 널려 있다. 창조론자들은 눈의 구조나 박테리아의 편모 같은 복잡한 신체적 특징에만 집착해 왔는데, 사실 그런 것들은 점진적인 진화 과정을 가정한 그럴싸한 이야기를 지어내기가 그나마 쉽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믿지 않는다. 개연성도 떨어지고 억지로 짜 맞춘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체 구조보다 더 설명하기 힘든 것이 바로 이러한 '본능적 행동'이다. 수많은 동물과 하등 곤충들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완성된 형태의 복잡한 행동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이를 점진적 변화로 설명하려다 보면 논리가 너무 꼬여버려 결국 믿기 힘든 수준에 이르게 된다.


과거 천체의 운동을 계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도 한동안은 꽤 잘 작동했다. 하지만 지구 중심설이라는 근본적인 오류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복잡하고 억지스러운 가설들을 덧붙여야 했고, 결국 폐기되었다. 오늘날의 진화론이 처한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이런 선천적 행동을 설명하려 할 때 그 한계가 극명히 드러난다. 소위 ‘적응’이라 불리는 이러한 행동들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유의미한 중간 단계 없이 완성된 형태로 나타났음이 분명하다.


이런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강조하건대, 이것은 창조론자의 책이 아니다.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또한 ‘무작위 변이’나 ‘점진적 변화’라는 모호한 표현 뒤에 숨은 현대 과학의 ‘기적’ 역시 믿지 않는다. 자연선택설이나 라마르크설로 진화를 설명하기에는 시간도, 표본의 수도, 관찰된 변이의 종류도 턱없이 부족하다. 특정 형질이 집단 내에서 어떻게 퍼져나가는지를 보여준다는 수많은 수학적 모델 역시 대개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기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떤 단어로 포장하든 마찬가지다. 분명히 ‘설계’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비롭거나 지성적이지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신경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능 낮은 생명체인 거미가 아름답고 복잡한 거미줄을 ‘설계’하는 것을 보라. 이것이 바로 자연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다. 사물의 내면에는 기괴하고 고요하며, 때로는 마성적인 고유의 ‘지능’이 깃들어 있다. 그 작동 방식과 목적은 우리에게 철저히 가려져 있다. 인간의 지능이란 그 거대한 흐름에서 떨어져 나온 투박한 파편이자 근사치에 불과하다. 


모든 사물에는 지능이 깃들어 있으며, 이는 뇌나 신경계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 몸속에 내재해 있다. 집단 내에서 형질이 확산되는 과정에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어떤 선택이 개입했건 간에, 모든 ‘적응’은 무작위가 아니라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어떤 자발적인 조응에 의해 일어난다. 언젠가는 이 조응의 물리적 원인이나 실체, 혹은 무생물인 바위와 원소로부터 생명의 형상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신호 체계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 체계가 존재하기에, 적응은 결코 무작위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선택은 그저 생성된 형질이 집단 속에 퍼져나가는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생명을 대하는 진정으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는 모든 선입견을 버리는 데서 출발한다. 거창한 서사를 지어내지 말고, 그저 동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연구하라. 실험실이 아니라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 속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다양한 개체를 표본으로 삼아 계절에 따라, 장소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처한 운과 복지의 수준에 따라 기분과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피는 것이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함부로 단정 짓지 마라. 오직 동물에게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인 '지금 이 순간', 그들이 오늘과 내일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하라.


그들의 뇌 속을 들여다보라. 호르몬 수치와 내면의 상태를 세심하게 조사하고, 임상적인 안목으로 그 내밀한 상태가 그날, 그 순간의 행동이나 의도와 어떤 상관관계를 맺는지 분석해야 한다. 당신이 멋대로 상정해 둔 ‘번식이나 생존’ 같은 개념에 억지로 끼워 맞추지 말고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동물과 적응, 행동, 그리고 생명 그 자체를 이해하는 유일하고도 진실한 길이다. 이런 연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고 조잡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결국 당신이 염소나 개, 심지어 개미와 그렇게나 다른 존재인가? 그런 생명체들을 바라보며 정말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그들이 수수께끼 같은 존재인가? 물론 고리타분한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말한 실증적인 연구는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신 자신이 그들과 닮은 존재가 아니었다면, 동물의 행동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을 것이다. 숲이 우거진 곳에서 은빛 자작나무 아래 노니는 곰이나, 벌떼에게 화를 내는 곰, 혹은 바위 사이를 겁에 질려 파고드는 도마뱀의 행동을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해한다. 그들과 닮은 우리에게 그것은 전혀 신비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위선 없이 정직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개나 다른 반려동물들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이유는 동물 특유의 태평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에 짓눌리지 않는다. 여성들 또한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이러한 조건에 가깝거나 대체로 더 근접해 있으며, 그들의 매력과 힘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여성에게 과도한 자의식과 미래에 대한 불안, 추상적인 신경증을 주입하는 현대 교육은 그들을 당차고 거침없는 존재로 만들어준다고 속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힘과 매력을 크게 앗아갈 뿐이다. 과잉 의식에 사로잡힌 여성은 도리어 무력해지고 매력을 잃기 마련이다.)


어쨌든 유기체의 내면 상태를 다양한 조건 아래서 면밀히 연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유기체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는 결국 무엇을 말해줄까? 생명은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


다윈의 사고방식이 그저 허구에 불과했다면, 그토록 깊은 인상을 남기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다윈주의는 '진실'이다. 다만 특정한 조건 아래서만 그렇다. 그것은 단순히 절반의 진실도 아니다. 어떤 특수한 형태의 삶에 대해서는 완벽한 진실이지만, 이를 모든 생명의 보편적인 원리라고 믿는 것이 치명적인 오류다.


다윈을 이해하려면 맬서스를 빼놓을 수 없다. 니체가 두 사람을 두고 '영국적인 삶', 정확히는 그 시대의 영국만을 묘사했을 뿐이라고 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산업화의 여명기, 그리고 영아 사망률 문제를 최초로 해결한 국가로서의 영국. 이것이 다윈주의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핵심 사실이다. 영국이 신대륙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문제를 선제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흔히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식 식민 지배를 비판하곤 하지만, 항해 왕 엔히크 시절 포르투갈의 인구는 고작 100만 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위험천만한 항해에 몸을 던질 젊은 남성은 극소수였고, 항해 중에만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멀리 떨어진 땅에 정착할 인적 자원이 부족했던 그들은 정복자들이 현지 여성과 혼인하는 식의 구태의연한 '소수 엘리트 지배 모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영국은 넘쳐나는 인구 덕분에 민족 전체를 통째로 이주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도시는 인파로 북적였고, 하층민들이 괴물 같은 산업 기계 주위로 몰려들면서 도시는 참을 수 없는 오물로 뒤덮였다. 20세기까지 이어진 노동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이 이 비참함을 파고들 수 있었던 것도 그 지점만큼은 진실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처참한 빈곤은 오늘날 제3세계의 빈민가와 닮았거나 오히려 그보다 심각했다. 영아 사망률이 낮아지자 하층민들은 늘어난 수입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쓰지 못하고, 그저 늘어난 식구들의 입을 거두는 데 쏟아부었다.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덩어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맬서스와 다윈이 목격한 세계, 즉 오물과 고통 속에 침잠한 삶의 현장이다. 다윈주의는 극심한 스트레스 아래 놓인 생명을 묘사한다. 다윈은 이 지극히 편협한 시각을 통해 생명 일반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비좁은 곳에 갇혀 감시당하고, 불결한 환경에서 매 맞고 구속된 채, 하고 싶은 일을 빼앗기고 통제받는 생명체는 삶의 비밀을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 생명체는 생명의 본질을 오독하게 만드는 아주 나쁜 사례일 뿐이다. 다윈주의와 거기서 파생된 모든 사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빈민가와 슬럼가, 혹은 노천 강제 수용소에서 싹튼 생명 철학이다.


자신이 갇혀 있다는 느낌만큼 끔찍한 고통은 없다. 내 가장 지독한 악몽은 문을 열 때마다 똑같은 알루미늄 감옥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꿈이다. 밤새 체스를 두고 난 뒤의 그 탈진 상태, 잠들어도 머릿속에서 무의미한 수들이 반복되는 고통을 나는 잘 안다. 이것은 피로가 만들어낸 자가적 고문이지만, 외부의 힘이나 존재가 나를 억누를 때의 고통은 비할 바가 아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정신과 힘이 온전한 상태이기에 더욱 그렇다. 고결한 동물들에게 이런 구속은 참을 수 없는 일이며, 그들은 필요하다면 죽음을 택하거나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탈출할 길을 찾아낸다.


노예로 전락한 많은 카리브인들이 이를 견디지 못해 죽어갔다. 어떤 이들은 사슬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팔을 물어뜯었고, 포로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도 감내했다. 로마 군단이 압박해 올 때 게르만 어머니들은 영아들을 죽였다. 타키투스는 평생을 전쟁과 명예에 바치며 결코 가축화되지 않았던 게르만 전사들의 삶을 기록했다. 마사다에서, 그리고 역사의 여러 순간 속에서 유대인들은 아직 고결한 민족이었던 시절, 굴종을 피하기 위해 자식들을 죽였다.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는 우라르투 고원에서 그리스군의 진격을 피해 아이를 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우리는 오키나와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일본 어머니들의 영상에서도 같은 광경을 목격한다. 베트남 불교 승려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사회에 커다란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니체가 말했듯, 고결한 민족은 노예 상태를 견디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롭거나, 아니면 멸종할 뿐이다. 어떤 종류의 생명에게 노예 상태로의 ‘적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생존만을 택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지불한 대가는 가혹했으며, 그런 굴종을 받아들인 민족은 기괴하게 왜곡되고 만다. 지배하는 민족과 그 외의 민족을 가르는 기준은 단순하고도 명확하다. 헤라클레이토스를 인용해 헤겔이 말했듯, 대결의 순간에 노예가 되거나 복종하기보다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바로 주인 된 민족이다. 세상에는 그런 민족들이 많다. 아리아인뿐만 아니라 코만치족, 폴리네시아인, 일본인 등 수많은 이들이 그러하다.


이런 종류의 동물은 함정과 굴복을 거부한다. 탈출할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그런 동물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나는 언젠가 동물원 유리 벽 너머에 갇힌 재규어를 본 적이 있다. 인간의 형상을 한 온갖 벌레 같은 자들이 그 고귀한 맹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수치심을 주고 있었다. 재규어는 도처에서 자신을 구경하며 비굴하게 굴거나 눈짓으로 조롱하는 유인원들—아니, 유인원만도 못한 존재들— 때문에 깊고도 끈질긴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보았다. 녀석은 자신이 가짜 환경 속에 살고 있으며, 움직이거나 살아갈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 슬픔이 나를 짓눌렀고, 나는 그 동물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나는 생명이 그런 처지에 놓인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불과 몇 주 전, 나는 일류 국가 특유의 철저한 위생 관념이 아직 침투하지 못한 어느 도시의 나이트클럽 밖에 서 있었다.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깨끗하게 청소해 여성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게 만드는 일에는 도시의 정취라는 비싼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 도시의 정부와 관료 집단은 마음만 먹는다고 해서 행정력과 정화 작업을 구석구석 미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덕분에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으슥한 골목과 숨겨진 모퉁이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 무법지대에는 마피아와 온갖 변태가 들끓고 범죄도 빈번했지만, 대개는 아주 경미하거나 비폭력적인 수준에서 관리되었다. 돈을 챙기려는 비번 경찰들이나 국내외의 첩보원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류들이 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도피처가 없는 삶을 거의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자유를 느꼈다. 몽롱한 하루를 보낸 뒤 글리신 성분이 몸에 돌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테아닌 600mg을 삼키고 커피까지 잔뜩 들이켠 터라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지독하게 노란 네온사인 아래서 나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기도(bouncer)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삶은 어떤 것일지 궁금해졌다. 그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직업에 걸맞은 자세와 눈빛을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군대식 견장이 달린 가죽 재킷 아래로 당당한 체격을 뽐내며 경계하는 척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묘한 친절함 혹은 부드러움이 서려 있었다. 예리한 관찰력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것이었겠지만, 덕분에 손님들의 소란에 휘말리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가끔 먼 곳을 응시하며 슬픔과 지루함에 잠기는 모습을 보았다.


나 역시 길고 넓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몇몇 취객과 매춘부, 유흥을 즐기는 무리 말고는 텅 빈 거리였다. 저 멀리 광장에는 사방에서 빛을 받는 거대한 분수가 솟구치고 있었다. 아미노산이 주는 평온함 덕분이었을까, 내 시선은 길가에 있는 어느 아파트 건물로 향했다. 건물의 중간쯤에 불이 켜진 창문이 딱 하나 있었다. 내 마음은 그곳에 누가 살고 있으며 어떤 사람일지, 그리고 내가 그곳에 사는 소년이나 소녀라면 어떨지 하는 공상으로 흘러갔다. 나는 종종 내가 불멸의 존재가 되길 바라기보다, 한 번에 수많은 삶을 동시에 살아보길 소망하곤 했다. 단 하나의 정체성에 갇히지 않기를 말이다.


마음이 평온하면서도 자유로움을 느끼는 이런 순간에는 삶의 모든 세세한 디테일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모든 풍경이 평화로운 꿈속의 이미지처럼 차례로 나타나고, 그 너머를 꿰뚫어 보게 되기에 어떤 것에도 감정이 휘둘리지 않는다. 나는 마치 동물학적 실험을 하듯 베트남 소녀나 네일숍 주인, 혹은 분홍색 벽지가 발린 가게에서 페디큐어를 하는 뚱뚱한 앙골라 중년 여성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 그래, 이런 순간만큼은 어떤 형태의 인간의 삶도 내 아래에 있지 않다. 꿈속에서는 문이나 꽃병이 되어 그저 관찰하기도 했다. 내가 들어가 보고 싶은 그 사람들이 겪어야 할 수천 가지 걱정은 빼놓고, 오직 보는 행위와 호기심의 충족만을 누리는 상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호기심에 갑작스러운 에너지의 분출이 더해질 때면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들이 매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에 이끌려 다니는지 말이다. 그때 나는 그들과 나 자신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갈망을 느낀다. 그들과 맺을 수 있었던 우정과 우리를 기다릴 위대한 과업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마치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에로틱한 자극처럼 나를 에워싸며, 저 창문 너머에 누가 살고 있는지 결코 알 수 없고 그들이 밖을 내다보며 무엇을 보았는지 영원히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과 짜증을 느낀다.


이런 방식들... 이것이 바로 나만의 ‘인류애’다.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저 추상적인 인류애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그것을 들먹이는 자들은 그저 허풍쟁이일 뿐이다.


아주 어린 숫양이나 새끼 사슴은 뿔이 돋아나기 훨씬 전부터 머리를 맞대고 모의 전투를 벌인다. 앞으로 자라날 뿔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 말이다. 아무도 가르쳐준 적 없지만, 그들은 이미 피 속에 새겨진 본능으로 그 방법을 알고 있다. 이 동물들에게 무엇이 '먼저'였을까? 뿔의 발달일까, 아니면 그런 방식으로 싸우고자 하는 '지식'과 의지일까? 


이와 같은 현상 속에 진화와 생명의 본질을 꿰뚫는 비밀과 진실이 숨겨져 있다.


공간을 향한 투쟁—학대받지 않고, 신체가 훼손되지 않았으며, 인간에게 길들지 않은 건강한 동물은 어린 시절 무엇보다 먼저 '공간'을 갈구한다.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공간, 즉 영역이다. 하지만 이 의미를 그저 투박한 물리적 영역으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영역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수많은 동물의 생태는 하나의 생생한 상징일 뿐이다. 더 본질적으로는 이를 '타고난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무에 사는 원숭이는 숲의 지붕을 장악할 기술을 연마하고, 비버는 강줄기와 둑, 갈대밭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은 실질적인 영역을 지배하며 그 안의 먹잇감과 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맹수와 사냥개들이 발톱과 송곳니를 갈고 후각을 비롯한 감각을 예민하게 가다듬는 이유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서다. 그들이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물질을 지배하고 장악하려는 욕구에 있다. 이 모든 과정은 고등 유기체가 주변 공간의 물질을 장악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해 나가는 과정이다.


물질을 성공적으로 지배하면 타고난 역량이 발달하고 유기체는 번성한다. 이는 더 많은 물질을 장악할 힘을 부여하며, 하등한 것을 다스려 고등한 것을 살찌우는 선순환을 만든다. 즉, 타고난 기질이나 이념, 혹은 숙명을 꽃피우기 위해 물질을 동원하고 결집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먹이 활동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적 동물에게서는 사회적 관계나 '사회적 공간' 안에서도 이와 유사한 과정이 일어난다. 세부적인 양상은 다를지언정 원리는 동일하다.


여기서 핵심은 유기체가 자신의 고유한 능력에 걸맞은 방식으로 공간과 환경, 물질을 장악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의 결과로 신체와 감각, 모든 기능이 발달하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고난 숙명적 형상이나 본성이 비로소 만개하게 된다. 제철을 만난 꽃이 피어나듯 말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생존 투쟁으로부터의 자유, 혹은 그 압박으로부터 벗어난 유예의 시간이 필요하다.


번식에 관해서라면, 자연 상태의 동물은 이 단계에서 번식을 추구하지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강해지고, 숙련되고, 난관을 극복하며 자신의 힘이 팽창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단순히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지각하고자 한다. 번식에 대한 욕구나 필요는 오직 역량이 완전히 발달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공간을 장악한 뒤에야 찾아온다. 번식은 공간 지배를 달성한 동물이 그 넘치는 힘을 배출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기에 하등한 동물일수록 서둘러 번식에 매달리지만, 생명의 형태가 고등하고 조직적일수록 발달에 필요한 조건이 복잡해지므로 번식 시기는 늦춰지고 생존 경쟁의 압박에 더 취약해진다. 극심한 경쟁 속에서 '진화'한 동물들은 어떤 면에서 성장이 왜곡되어 있으며, 덜 아름답고, 덜 영리하며, 덜 웅장하다. 자연에는 수많은 '파벌'이 존재하며 서로 반대 방향으로 끄는 여러 경로가 있다. 당신은 자연의 은밀한 언어와 그것이 지향하는 바를 읽어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길 중 하나는 지고의 표본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것이 바로 고등한 생명을 지배하는 길이다. 생존과 번식은 이 길 위에서 나타나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생명이란 가장 근원적인 층위에서, 공간의 소유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다.


직접적인 신체적 도발보다 내 피를 더 거꾸로 솟게 만드는 일들이 있다. 한번은 체육관을 나서는데 어떤 '채드(Chad)' 같은 사내가 다가와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주머니를 뒤져 자기 물건을 누가 훔쳐갔는지 확인하려던 것이었다. 나는 그 상황이 꽤 재미있었다. 운동 직후라 평온했던 탓도 있겠지만, 그의 태도가 하는 짓에 비해 그리 무례하지 않았던 덕분이기도 했다. 어쩌면 일종의 근육 숭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생활 침해라는 측면에서, 텅 빈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굳이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을 때만큼 화가 나는 일도 드물다. 가장 혐오스러운 경험은 아마 인도인이나 한족 무리로 보이는 이들이 텅 빈 식당에서 내 옆에 몰려앉아 입을 벌린 채 음식을 씹어대던 순간일 것이다. 그 소리 또한 견디기 힘들다. 이른바 '인간'이라는 존재가 먹는 소리만큼 신경을 긁고 내 공간을 침범하는 불쾌한 소리도 없다. 다른 동물이 먹는 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 말이다.


동물이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서도—나는 '종'이라는 단어를 거부한다—서로 다른 유형은 삶에 필요한 요구 조건이 판이하다. 내 본연의 친절함이나 이성적 판단과는 별개로, 함께 있는 여자가 "춥다"는 이유로 에어컨을 끄거나 창문을 닫으라고 고집을 피우면 피가 끓기 시작한다. 나는 탁 트인 공간과 약간의 서늘함을 선호한다. 옹송그리며 모여 살고 지나치게 따뜻한 환경을 좋아하는 존재들과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다.


백인종, 혹은 그 안의 특정 집단들—사람들이 인정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종이 존재한다—은 대체로 밀집된 생활 방식을 좋아하는 부족들과는 상극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이 요구하는 생물학적 조건이며, 어떤 법률이나 공통된 신념으로도 이렇게 다른 유형들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다. 만약 이런 이질적인 유형들 사이에서 혼혈이 태어난다면, 그 존재는 아마 생리적으로 혼란스럽거나 병약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호르몬—에너지와 고등한 생명은 하나다. 만약 동물에게 간섭하지 않고, 우리의 개입으로 인한 불쾌감이나 압박감을 주지 않으면서 멀리서도 그 내면을 아주 정교하게 관찰할 수 있는 최첨단 센서가 있다면, 우리는 생명의 의미를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장소에 있는 여러 개체를 관찰함으로써 동물이 삶에서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센서는 지금 우리가 보유한 장비보다 훨씬 더 진보해야 한다.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 보여주어야 함은 물론, 그것이 혈압과 심박수, 면역 체계의 반응, 각종 염증 및 항염증 지표의 수치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포착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호르몬이 신체 계통과 뇌에 작용하는 방식과 균형이며, 이것이 매 순간 동물의 행동과 어떻게 연동되는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현재 우리가 이 분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기껏해야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의학 문헌들은 대단한 자신감을 내비치며 서술되지만, 실제로는 뒤섞여 혼란스럽기 짝이 없으며 돈과 경력, 그리고 온갖 이해관계로 오염되어 있다. 과학 문헌은 그보다 덜 알려져 있을뿐더러 그 자체로도 모순덩어리다. 가령 하루 중 특정 시간대에 갑상샘 호르몬이나 코르티솔 수치가 높아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신체 조직과 계통에 미치는 다각적인 영향에 대해 우리는 극히 일부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신체의 전반적인 프로세스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나아가 유기체 전체의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진정한 통찰을 갖고 있지 못하다. 레이 피트(Ray Peat)처럼 그런 종합적인 이해를 시도했던 극소수의 인물들은 괴짜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서는 생명의 의미도, 유기체가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도, 구체적인 행동이나 신체적 적응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생물학자들이 정직한 이들이었다면, 아무런 전제 없이 그저 다양한 상황에 놓인 유기체들에 대한 관찰 데이터를 축적하며 이런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그마저도 자신들의 여러 의제와 편견에 의해 늘 왜곡되어 왔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진 데이터는 지나치게 빈약하며, 연구자들이 당장 시작한다 해도 필요한 정보를 얻기까지는 수십 년이 더 걸릴 것이다.


호르몬이 유기체 내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해낼 이가 있다면, 그는 시대를 아우르는 천재일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반어법도 섞여 있지 않다. 나는 반어법 같은 건 쓰지 않는다. 소위 '아이러니'라고 불리는 그 가벼운 발상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호르몬은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의미를 푸는 열쇠를 쥐고 있다. 만약 이 말이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이라거나 신비감을 떨어뜨린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거나, 과학자들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른다.


편견 없이 바라본다면, 이 물질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마법이다. 그것들은 유기체의 성장과 쇠락이라는 모든 주기를 지배한다. 보잘것없는 송아지나 아기 고릴라를 풀만 먹고도 거대한 코끼리나 500kg의 실버백으로 탈바꿈시킨다. 앙상한 남자를 헤라클레스 같은 반신반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강인한 남성을 여성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성향과 감정까지 바꾸어 놓으며,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신호에 따라 성별을 바꾸는 동물의 마법 같은 변신을 재현해 내기도 한다.


이것은 갑상샘 호르몬, 프로게스테론, 각종 신경전달물질이 가진 심오한 의미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물질들은 신경계와 장, 그리고 면역 체계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며, 세포 분열과 기능 보존을 조절한다. 그 구체적인 원리는 현재의 의학과 과학에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숨겨진 물질들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에야 비로소 생명의 충만한 영광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지금껏 생명을 '블랙박스'처럼 다루어 온 연구 방식은 수많은 오해를 낳았다. 관찰자들은 정직하지 못하거나 어리석어서, 특정 행동만 보고할 뿐 그 전후 맥락이나 동물의 삶에서 그 행동이 갖는 위치를 살피지 않는다. 스스로의 내면을 통해 직관하려 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호르몬을 비롯한 유기체의 내부 과정을 연구하게 된다면, 그들이 이런 식으로 거짓을 늘어놓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동물이 스트레스와 압박 속에서 취하는 행동이 겉보기에는 개방성과 자기 확장의 정신에서 우러나온 행동과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생물학적 의미는 완전히 다를 수 있는데, 이는 체내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 사이토카인의 작용을 통해 명백히 증명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결국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내가 말해주겠다. 지금까지 오직 레이 피트만이—거대하고도 이질적인 통찰력을 축복처럼 타고난 이 사람만이—이 신성한 물질들의 비밀스러운 언어를 해독하려 시도했다.


기억하라, 생명에는 적어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생명과 무생물을 대비시켜 생각한다. 재미있게도 바스크어처럼 네안데르탈인의 투박한 웅얼거림을 간직한 가장 원시적인 언어들은 명사의 성별이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을 기준으로 대상을 구분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효모를 무엇이라 불렀을지 궁금해진다.


생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효모는 고등 생명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등 생명체란 물론 화려하고 신비로운 면모를 많이 지니고 있지만, 가장 밑바닥의 층위에서 보자면 결국 ‘분화’와 ‘구조’의 문제로 귀결된다. 효모가 그저 무정형으로 증식하는 덩어리에 불과하다면, 고등 유기체는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분절된 부위와 장기, 그리고 내밀한 체계들을 갖추고 있다. 유성 생식을 하기에 암수의 구분이 생기는데, 어떤 이들은 무성 생식과 유성 생식의 차이를 생명의 가장 큰 갈래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고등 유기체가 보여주는 ‘분화’는 그보다 훨씬 심오한 영역에 걸쳐 있다.


유기체는 자신의 장기와 체계들이 지닌 고유한 기능을 보존하기 위해, 효모처럼 무분별하게 팽창하고 복제하는 능력을 희생시킨다. 이를 능력의 ‘희생’이라 보든, 아니면 세포의 증식 및 복제 경향과 고차원적 기능의 보존 경향이 서로 충돌한다고 보든 본질은 같다. 이 두 가지 모드는 각기 다른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지배를 받는다. 에스트로겐과 세로토닌은 세포 분열을 관장하는 일종의 ‘스트레스’ 물질인 반면, 갑상샘 호르몬과 프로게스테론은 기능의 보존을 주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트로겐을 단순한 ‘성호르몬’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것은 스트레스 호르몬에 가까우며, 여성의 몸에 그 비중이 높은 이유는 체내 세포 분열과 월경이라는 생리적 요구로 인해 여성이 더 큰 스트레스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전체 그림은 아니지만, 많은 유의미한 관찰을 끌어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병리학적인 관점에서 이를 뒤집어 보면, 인간의 몸 안에서 무분별한 세포 분열이 일어나 ‘원시적 생명’의 상태로 회귀하는 현상을 우리는 암이라 부른다. 암은 그 모습이나 동작 방식이 곰팡이와 매우 흡사하다. 반대로 건강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포가 에너지를 성공적으로 제어할 때 비로소 신체의 구조가 유지된다. 예술적으로 표현하자면—동시에 진실이기도 한데—세포 에너지를 촉진하는 갑상샘 호르몬 같은 것들이 곧 기능의 보존을 돕는 물질인 반면, ‘나태함’을 유발하고 에너지를 앗아가는 물질들은 세포 분열과 염증, 활성 산소의 생성, 그리고 질서와 기능의 붕괴를 부추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이는 자연의 근원적인 진리와 맞닿아 있다. 즉, 구조와 에너지는 결국 하나라는 사실이다. 에너지는 우리가 상상하듯 막연히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지능’을 품고 있다. 여기서 ‘지능’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우리 두뇌의 불완전한 지성이야말로 이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의지’를 겨우 흉내 낸 근사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의지’는 전능하다. 그 형상은 끝이 없다. 그것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불’과 다르지 않으니, 만물 속에 깃들어 장난을 치듯 명멸하며, 스스로를 더 높은 단계의 기이한 존재로 조직하고 재편하려는 편재하는 에너지다. 그 의도는 짓궂으며, 인간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다. 유기체의 세계에서 이 에너지는 스스로를 더 고등하고 분화된 형태로 질서 지우려 한다. 즉,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단 하나의 지고한 표본을 생산해내려 하는 것이다. 민족이란 위대한 표본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이 택한 우회로이며, 그렇기에 자연으로부터 발생한 각 민족은 그 고유한 형상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미학적으로 완성된 신체는 우주적인 중대성을 지닌다. 앞서 말했듯 아름다운 육체는 ‘저편의 세계를 보여주는 창’이며, 자연이 도달한 정점이기 때문이다. 분명 존재하나 숨어 있는 신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육체를 지녔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꿈속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이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 바로 비만한 자들에게서 보이는 과잉된 살덩어리다. 그것은 현대인뿐 아니라 역사 속 수많은 삶의 형태—마을의 하수구와 악취 나는 골목, 가축화된 노예들의 삶, 오물 위에 세워진 도시의 공해, 늪지대의 삶—에서 발견되는 나태함이자 영성적 비만이다. 그저 살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삶이 미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지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효모의 단계로 퇴행해버린 모습이다.


그 반대편에는 순수한 산맥의 공기를 마시며 사는 불멸하는 신들의 삶이 있다. 에너지가 고차원적인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 결집된 삶, 그 징표가 바로 영광스럽고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닌 육체, 즉 미학적 체격이다. 그렇다면 정신은 어떠한가? 아름다운 육체가 희귀한 만큼, 그에 걸맞은 정신을 만나는 일은 훨씬 더 드물다.


노쇠하고 암적이며 악취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당장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신체를 망각한 채 ‘완벽한 정신’이나 ‘완벽한 영혼’을 쫓는 자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부류다. 오직 신체적 아름다움만이 정신과 영혼의 진정한 고등 문화를 세울 수 있는 토대가 된다. 태양과 강철만이 그대에게 길을 보여줄 것이다.


야생 상태의 침팬지는 결코 자위하지 않지만, 우리에 갇힌 침팬지는 자위를 한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쉽게 말해, 야생의 침팬지는 그럴 틈이 없을 만큼 바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공간을 장악하는 데 몰두한다. 나무 위아래에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도구를 익히며, 권력과 지위를 얻기 위해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조율한다.


하지만 이러한 발달과 자기 확장의 의지를 박탈당한 채 포로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타인의 소유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직감한 침팬지는 모든 노력과 행동이 헛수고임을 깨닫고 무의미한 자위행위로 퇴행한다.


현대 사회가 앓고 있는 오나니즘(Onanism)은 소위 ‘과잉 성애화’ 및 저출산 문제와 깊은 궤를 같이한다. 사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성적 과잉이라기보다, 흐리멍텅하고 유약한 성적 나태함으로 영혼이 퇴보한 것에 가깝다. 타인에게 점유된 공간에서의 삶은 이처럼 무가치하고 저급한 자극에 에너지를 소진하게 만든다. ‘노팹(Nofap)’ 운동은 일종의 카고 컬트(Cargo Cult)처럼 보일 수 있다. 에너지를 재결집해 다시 상승의 궤도에 오르려는 시도 말이다. 물론 때때로 이 미신적인 시도는 성공을 거두기도 하는데, 그 효과 여부는 대개 일주일 안에 판가름 난다.


안타까운 사실은 여성들이 이런 종류의 에너지를 감지하는 데 탁월한 촉을 가졌다는 점이다. 남자가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 생명력을 회복하면, 그들은 아주 멀리서도 이를 알아챈다. 상승하는 생명을 찾아내 그 정수를 빨아들이려는 것이 그들의 본능이다. 그렇게 그들과 그 종은 목적을 달성하지만, 정작 당신은 피가 말라붙어 껍데기만 남게 된다. 그들은 생명을 다시금 짜증 섞인 스트레스 상태로 되돌려 놓으며, 생명의 핵심적인 정기를 고갈시킴으로써 수많은 위대한 과업을 무너뜨려 왔다.


나는 언제나 오물과 더러움에 이끌려 왔다. 오늘날 존재하는 삶의 밑바닥, 그 이면의 솔기 같은 곳에서야말로 시스템의 손길이 닿지 않거나 무력해지는 진정한 '틈새'와 '구멍'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안의 무언가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녀와 약쟁이, 변태, 그리고 그보다 더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가장 어두운 홍등가에서 나는 늘 진정한 자유의 낌새를 맡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기꺼이 그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곤 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어떤 이는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어느 망상가 스페인 엔지니어의 편지를 보여주었고, 또 다른 이는 친구가 늙은 변태의 화장실에서 유산했던 이야기, 그리고 그 핏덩이를 변기 속으로 흘려보낸 뒤 화장지 조각에 이름을 적어 넣었던 순간을 들려주었다. 오늘날 자연이 당신에게 부여한—혹은 부여했을지도 모를—발톱을 갈고 닦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이런 세계뿐이다.


안타깝게도 예리한 촉을 가진 이라면, 이 그림자의 세계조차 기껏해야 조건부로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진실은 이렇다. 거짓의 주인들이 활개 치는 이 사회의 직물을 짠 자들이 이런 '구멍'들을 방치하는 이유는, 조종자에게 이런 '자유 구역'이 얼마나 유용한지 알 만큼 그들이 영악하기 때문이다. 법과 질서를 숭상하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이 야쿠자의 매춘과 필로폰 사업, 그보다 더한 짓들을 왜 묵인해 왔는지 보라. 서구 사회의 마피아가 그러했듯, 이런 것들은 일본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오직 천치 같은 정부만이 이런 세상을 완전히 없애려 들 뿐이며, 다행스럽게도 현재 서구의 정부들은 매우 멍청하다. 그들의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저주받은 세계에서 느끼는 첫 자유의 고양감이 가신 뒤에는 슬픈 깨달음이 찾아온다. 이 공간들 역시 다른 모든 것을 소유한 자들이 관리하는 입구와 성문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지배력이 도처에 스며있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 순간만큼은 저 바깥의 억압이 멀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느 늦은 여름밤, 부패한 변호사로부터 레바논 출신 스트립 클럽 주인을 감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마당으로 나갔을 때를 떠올려 본다. 스무 살 난 창녀가 내 혀 위에 코카인을 얹어주고, 밤의 바닷바람이 거대한 대양을 향한 갈망으로 나를 가득 채우던 그 순간. 그때 당신은 바깥세상의 숨 막히는 중력을 잠시 잊고, 사냥 직전의 맹수가 된 듯한 기분을 단 몇 분간이라도 만끽할 수 있을지 모른다.


호르몬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서 나를 유물론적 환원주의자라거나, 인간을 기계 같은 존재로 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많은 과학자, 혹은 과학이라는 사이비 종교를 믿는 자들의 태도다. 실제로 좌파들 중 상당수가 이런 태도를 취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권리’나 ‘연민’이라는 가치가 신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인간 본성에 실재하는 것도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도덕적 설득력을 얻는지 결코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절대 믿지 않는다. 진짜 무신론자는 스탈린이나 브레즈네프처럼 행동하지, 장로교 여선생처럼 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좌파의 핵심을 이루는 자들의 실체는 도덕적 광신도들이다. 그들에게선 무신론이나 상대주의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회의주의라는 맑은 공기를 즐겨본 적도 없고, 즐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당신이 보지 않을 때마다 슬쩍 ‘영혼’이나 ‘자유 의지’를 끼워 넣는다. 그들은 사실 이런 이중성에 희열을 느끼며, 원한—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혀 행동한다.


그들은 자신이 통제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느끼고 싶어 한다. “내 호르몬 때문에 그랬어”라는 식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호르몬, 유전자, 타고난 본능을 제외한 ‘당신’이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유전자 때문이다”, “환경 때문이다”, “경제나 억압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니체가 말한 ‘신경증 환자의 이론’인 환경 결정론의 변종일 뿐이다.


그들이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을 믿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물질이 어떻게든 잘못 구성될 수 있으며, 우리 모두가 남성 혹은 여성의 본질을 지닌 ‘육체 이탈형 영혼’을 가졌다고 믿는 자들이다. 성적 정체성뿐만 아니라 모든 정체성을 ‘결정’의 문제—즉 독단적이고 자유로우며 지성이나 이성에 의한 선택—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는, 자연이나 생물학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영혼과 자유 의지에 대한 새로운 정당성을 찾으려는 그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당신이 곧 당신의 육체이며, 육체 이외의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런 주장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일리아드』의 첫 구절은 이 점을 명확히 한다. 당신에게 육체와 분리된 일종의 ‘영혼’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림자일 뿐이다. 그것은 완전히 동성애적인 발상이다.


이런 관점이 당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 면제해 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신은 당신의 행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당신을 구속하거나 결정짓는다고 일컬어지는 그것이 사실은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본연의 욕망과 행동 방식에 따라 당신의 행위를 제한하는 것은 맞지만, 당신이 바로 그 '그것'이며, 그것이 존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실 훨씬 더 막중한 책임, 즉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좋고 나쁜 일들, 당신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사고나 질병에 대해서도 당신은 책임이 있다! 사실 그 모든 일은 당신이 태어나거나 수정되던 순간, 아니 그보다 훨씬 전, 당신의 부모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던 그 찰나에 이미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기로 되어 있었다. 근본적으로 당신과 그 눈빛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동물들은 영구적인 종교적 도취 상태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마음과 지성, 즉 매 순간의 지각이 갖는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컴퓨터 얼간이가 자기들의 사기성 산업을 정당화하려고 종교를 "초창기 가상현실" 체험이라 지껄이는 것을 들었다. 아니다, 오히려 영성과 지성이 메말라 버린 채 "탈신비화"되고 "환멸"을 느끼며 돌아다니는 상태야말로 가상현실의 조건이며, 그것도 아주 끔찍한 조건이다. 우리가 현재 파악하고 있는 가장 긴 시기인 수십만 년의 구석기 시대 동안, 인간은 건강한 동물처럼 오늘날 우리가 '종교적 망상'이라 부를 만한 상태로 걸어 다녔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모든 의식적, 반의식적 생명체의 기본 상태다. 문명이 도래한 이후로도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이 상태를 유지하거나, 인간이 자신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던 연중 특별한 시기나 축제 동안 그러했다.


이러한 상태를 금지하고 인류의 대다수를 반영구적인 억압적 혹은 우울한 틀 속에 가둔 것은 바로 문명, 특히 농경 문명이었다. 이것이 고등 문명과 고등 문화의 인상적인 업적 및 발전과 일치하며, 심지어 그 전제 조건이 된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농경의 시작으로 인류 대다수는 신체적으로도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한 노동, 농경민들의 유골에서 나타나는 작은 키와 가냘픈 골격이 증명하는 영양실조, 치아의 파괴, 뇌와 기타 장기의 위축 등이 이를 보여준다. 농사가 꾸준한 식량원과 인구 증가를 가능케 했고, 무엇보다 이러한 강요된 고통에서 벗어나 다수에게 기생하며 살아가는 엘리트 계층을 유지하게 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농경은 인간이라는 동물을 굴복시키고 가축화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환멸에 찬" 세계관이 무엇인지 이해하겠는가? 나는 소위 "세속적 세계관", 즉 환멸에 찬 세계관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다. 그것은 사실 꺾여버린 소작농의 세계관이자 기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물이라 주장하는 "과학"은... 여기선 상관조차 없는 이야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낮 동안 술에 완전히 취해 도시를 거니는 것이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나 강변, 혹은 해안가의 산책로를 걸으며, 겉보기엔 아이스티나 생수통 같지만 실은 술로 가득 찬 통을 들고 말이다. 밤에는 그만큼 즐겁지 않다. 하지만 대낮에 술 기운을 빌려, 혹은 가장 좋게는 인간을 위대하고 성스러운 분노로 몰아넣는 어떤 와인의 힘을 빌려 충만한 열정과 에너지에 휩싸여 걷는 것은 최고다. 진짜 화가 났다는 뜻은 아니다. 내면에서는 웃고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런 상태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하고, 낯선 이들에게 온갖 방식으로 말을 거는 것을 좋아한다.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


이럴 때면 나는 종종 생각하곤 한다. 술을 마실 때뿐만 아니라 늘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그리고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면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일까 하고 말이다. 참고로, 술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마셔서는 안 된다. 술기운이 떨어질 때, 혹은 그다음 날 코르티솔 수치가 급증하여 불쾌한 기분이 더 악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항상 이런 고양감을 느끼는 상태가 어떤 것일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분명 존재하거나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에는 돌연변이들이 가득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행복감에 영구적으로 도취해 있는 돌연변이가 왜 없겠는가?


더 나아가, 왜 단 한 세트의 감정, 혹은 단 하나의 감정만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특정한 단 하나의 감정에만 사로잡혀 산다면 삶은 어떠할지, 평생 다른 감정 없이 가장 순수하고 강렬한 분노만을 느끼는 사람이나, 아주 특수한 종류의 기쁨만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어떤 종류의 슬픔조차 삶을 아름답게 만들고 위대한 일을 도모하는 박차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공포조차 우리 시대가 조장하는 무감각함보다는 낫다. 평생 오직 그런 감정 하나만을 느끼는 존재는 어떤 모습일까? 왜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는가? 그는 괴물이거나 신일 것이며, 어찌 되었든 신에게 사로잡힌 존재일 것이다.


역사 속의 천재들이나, 소위 과학자라 불리는 이들이 오늘날의 과학 광신도나 유물론자들처럼 경직된 태도를 지닌 채 맑은 정신으로, "환멸에 찬" 이성적인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했을 것 같은가? 그 어떤 위대한 발견도 이성의 힘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이성이란 발견한 바를 타인에게 불완전하게나마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과학의 경우 이러한 전달 과정을 확실하고 정밀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방법론에 불과하다. 삼단논법이나 이성, 혹은 이런 임시방편적인 전수 방식을 통해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위대한 수학자들은 공간적 관계를 보았고, 위대한 물리학자들은 물리적 관계를 보았으며 어느 정도는 그것을 몸으로 느꼈다. 수학적 형상을 명상하다 보면 기하학적 관계를 거의 물리적으로 느끼게 되는데, 기하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수학조차 그 근본은 모두 기하학적 관계에 관한 것이다. 삼단논법에 기반하여 정작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전혀 이해시켜 주지 못하는 유클리드의 피타고라스 정리 증명과, 세 개의 정사각형을 이용한 형상적 증명을 비교해 보라. 후자는 왜 이 정리가 참인지를 당신의 육체로조차 물리적으로 지각하게 만든다.


고리타분한 과학주의 고블린들에게조차 사랑받아 구글 로고에까지 등장했던 가우스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알아냈다... 이제는 증명해내야 한다." 즉, 그는 자신이 찾던 근본적인 공간 관계를 이미 보고 느꼈지만, 이제는 그것을 타인을 위해 수학이라는 불완전한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모든 수학과 과학 전반—수학은 과학의 원형이자 가장 정밀한 형태일 뿐이다—에 있어 중요한 것은 정의이지, 증명이나 과정, 혹은—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알고리즘"이 아니다. "이성"의 위대한 산물이라 여겨지는 모든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사실 직관과 갑작스러운 아이디어의 포착이 가져온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든 돌연변이적 포착과 도달은, 다른 상황에서라면 일종의 ‘종교적 도취’라고 불릴 만한 상태에 기반한다. 그것은 지성의 지각 기능이 극도로 집중되어 맑게 개인 동시에, 꿰뚫고자 하는 가장 집요한 에너지에 의해 추동되는 정신 상태에 달려 있다. 직접적인 지각은 이미 ‘지성화’되어 있으며, 사실 대뇌의 삼단논법보다 사물 본연의 ‘지능’에 훨씬 가깝다. 가치 있는 과학자라면 그 누구도 알고리즘이나 시행착오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이 가부장적이며 자연에 대한 ‘강간’이라는 페미니스트들의 말은 옳다. 갈루아와 같은 진짜 과학자들은 의지의 괴물들이며, 경성 과학(hard science) 분야에 남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이러한 성격적 지향뿐만 아니라, 여성보다 남성의 정신이 한 가지 일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데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여성은 멀티태스킹에 더 능하다). 위대한 여성 과학자들도 존재했으나, 위대한 여성 체스 기사나 시인들이 그러하듯 그들은 아마 영성적 레즈비언일 것이다.


현대의 소작농은 미신과 마을 아낙네들의 옛이야기가 주던 인위적인 편견을, 과학 대중화의 권위자들로부터 기성품처럼 건네받은 과학의 미신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그는 기술이 가져다주는 안락함 때문에 과학을 숭배한다. 그는 일종의 '카고 컬트(화물 숭배)' 신봉자다. 과학적 발견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과학자들 사이에서 그 정수가 어떻게 전수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홍보된 결과물의 이미지에만 매달린다. 이것은 원시인들이 과학을 대하는 방식, 즉 '백인의 거대한 마법'이라는 믿음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문제는 과학의 내용 그 자체가 아니다. 과학 또한 다른 대중 종교들만큼이나 커다란 유용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그것이 추종자들을 몰아넣는 정신적 틀에 있다. 과학은 인간이 현재로서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자연의 과정들을 마치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대중을 움직이는 유일한 경외심인 '원초적 공포'를 제거함으로써, 그 자리에 자기만족과 오만, 잔인함, 그리고 광신이라는 독성 강한 혼합물을 주입한다. 그리고 이 괴물들은 시절이 좋을 때만 표면 아래에 숨어 있을 뿐이다.


대중 종교로서의 과학은 진정한 위안을 주지 못하며, 대신 일종의 가짜 자부심, 즉 자기 자신을 해치면서 느끼는 자부심을 부추긴다.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누구보다 여성들에게 익숙하게 들려야 할 이야기다.


기술을 이해하고 조종한다고 상정된 권위자들에게 대중을 더욱 굴종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과학이라는 대중 종교의 목적이다. 그 목적은 대중을 굴복시키는 것이며, 만약 그들이 ‘거짓의 군주들’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딱히 나쁜 일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 모든 정황을 통해 당신은 왜 계몽이 결코 일어날 수 없는지, 동시에 하이데거의 추종자들 같은 계몽주의 비판가들이 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의 타고난 기질이 어떤 면에서 독특하며, 그 생물학적 특성이 동물의 획일적인 특성보다 훨씬 더 개별적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말 자체는 옳다. 개미나 초파리 두 마리는 정확히 똑같은 본성을 지녔을지 모르나, 인간은 모두 조금씩 다르다. 여기서 그들은 모든 이에게 들어맞는 공통된 ‘방식’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당신에게 유일하고 진정성 있는 방식은 오직 내면의 자아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외부의 규범이나 종교,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것은 모두 ‘비본래적’이며, 본질적으로는 당신의 신진대사와 생물학적 조건, 특수한 성장 환경에 부적합한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정신 지배라는 것이다.


그렇다, 사실이다. 니체는 자신의 정신이 오염되지 않도록 타인이 쓴 글을 읽는 것조차 피할 정도였다! 그는 매우 특수한 생물학적 조건을 가진 돌연변이였고—그런 부류들이 대개 그러하듯—그들에게는 생리학과 식단이 가장 시급한 연구 과제일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옳았다. 하지만 그는 자연의 근본적인 사실이 ‘불평등’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을 하이데거의 추종자들과 하이데거 본인조차 상당 부분 망각하고 있다.


규격화된 평범한 대중에게 스스로의 길과 ‘종교’를 개척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광기다. 대중은 오직 복종 안에서만 위안과 의미를 찾는다. 이것은 좋은 일이며, 그들이 이로 인해 수치심을 느껴서도 안 된다. 현대의 수많은 백치미는 복종에서 진정한 기쁨을 찾는 이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데서 비롯된다! 존재의 거대한 사슬은 명령과 복종에 의해 유지된다. 대중은 서로 그리 다르지 않으며, 그들의 삶의 조건 또한 큰 차이가 없다.


결국 당신이 아무리 특별하거나 천재적이라 할지라도, 생물학이라는 수많은 끈으로 평균적인 인간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체에 관한 한 공통된 요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당신과 대중 모두에게 유익하다. 신체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신체는 병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예술이 발견한 올바른 전형으로서의 보편적 신체는, 당신의 ‘개별적인’ 기벽이나 독단, 그리고 나약한 취향들을 보살핀다고 해서 발달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은 '고유한' 개인적 기벽의 발현이 아니라, 전형(types)과 발현의 단계에 따라 작동한다. 올바르게 이해된 과학은 우리가 이러한 전형과 종, 그리고 자연의 진정한 갈래들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과학 그 자체가 우리 문제의 원인이나 당신이 느끼는 '소외'의 근본인 것은 아니며,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를 제외하면 과학 그 자체에는 어떤 고정된 내용도 없다.


과학은 모든 생명의 생물학적 조건과 다양한 생명 유형 간의 관계를 밝혀낼 수 있기에 위대한 도구다. 니체가 예견했듯, 과학은 진정한 가치 위계의 문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명의 실질적인 사다리와 생물학적 유형 간의 진정한 위계를 정립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과학이나 기술 그 자체에 내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다. 결국 때가 되면, 올바른 힘이 과학의 권능을 거머쥐고 그 진정한 잠재력을 드러낼 것이다. 과학은 결코 안락함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모른다. 그 문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어떠한 감정도 느껴본 적이 없다. 종교 시설에 앉아 있어 보기도 했지만, 나는 항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그저 졸음만 쏟아졌다. 불교나 힌두교 사찰이 주는 신선함조차 아주 빨리 시들해졌다. 구경거리는 즐거웠지만... 이 사제들 또한 그저 또 다른 압박을 가하는 자들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항상 너무 지루했다. 은밀하고 숨겨진 소중한 것들이 어떻게 교리에 관한 것일 수 있으며, 그저 말뿐인 것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사람들이 왜 이 두 가지를 엮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그것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나는 아주 어린 소년이었을 때도 모든 사물 안에 기이한 그림자나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느꼈다. 나는 특정 장난감이나 밖에서 찾아내 조심스럽게 숨겨둔 특정 물건들에 경의를 표하곤 했다. 누구도 나에게 그러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죽은 동물을 발견하면 의식을 갖추어 묻어주었다. 나는 항상 동물과 대화할 수 있다고 느꼈고, 그들이 나의 형제자매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애니미즘’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종교이며, 홀로 남겨져 노는 어린아이에게조차 나타나는 모습이다. 나는 골강판 위에서 자라난 등나무 덤불 아래 있던 작은 흰 개를 애틋하게 기억하며, 이 개가 평생 다른 형상으로 나를 따라다녔다고 믿는다.


나는 신들이 존재한다고 거의 확신한다. 어쨌든 ‘유일신’에 반대하는 논거와 ‘다른 신들’에 반대하는 논거는 같지 않다. 샘 해리스나 히친스, 그리고 ‘신(新)무신론자’들의 그 모든 맹렬한 비난 속에는 사실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그들은 공적 영역에서 종교를 몰아내고 싶어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정신 속으로 침투해 그곳에 남아 있는 기성 종교의 잔재들을 자신들의 아주 멍청한 기성 종교로 대체하고 싶어 한다.


그들이 손쉽게 승세를 잡는 이유는 유일신교가 제 분수에 넘치는 주장을 해왔기 때문이다. 유일신교는 너무나 거창한 주장들을 늘어놓았고, 그 주장들이 폐기되자 사람들에게 "과학"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물론 그 과학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방법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회의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정직했겠지만, 물론 그들은 당신이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잠시 신에 대한 모든 주장, 즉 무(無)에서 물질을 창조했다는 식의 주장은 잊어버리자. 그런 주장은 인간이 직접 할 수 있는 모든 직관과 관찰에 반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데는 과학조차 필요 없다. 파밀리아(Paglia)는 유일신의 진정한 특이점이 그가 세상을 '말'로써 존재하게 했다는 점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천지창조 신화와 얼마나 다른가! 모든 이교도는 세상이 영원하며, 현재의 상태가 탄생과 재생, 재생산, 교합의 순환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일본 신화에는 신들이 들판을 비옥하게 하려고 똥을 누는 장면도 나온다! 얼마나 적절한가. 이 대목은 일본 문화의 다른 많은 것들을 훨씬 이해하기 쉽게 해준다.


지적이거나 이신론적인 변종을 포함한 유일신교, 특히 그런 변종들은 물질이나 자연의 법칙성, 지적 설계 같은 온갖 주장을 늘어놓는다. 이는 유일신교를 부정한다는 과학과 오히려 더 가깝지, 인류 공통의 원초적 이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이야기의 상당수는 시간을 선형으로 만들고, 물질을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신이나 창조주에 종속된 조건부적인 것으로 만든다. 무에서 물질을 창조하고, 무에서 당신의 영혼을 창조한다는 식이다. 여기서 물질은 죽어 있고 어떤 면에서는 균질하며, 그 의미는 오직 외부의 신이 창조했음을 드러내거나 신이 제정한 법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만 "신성"할 뿐이다.


이런 관점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거나 세상에 대한 즉각적인 지각과 충돌하기에, '믿음'이라는 것을 요구한다. 이는 온갖 고대 이교도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렇기에 로마인들은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을 무신론자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그 시각은 매우 독특하다. 이처럼, 우리보다 더 강하고 우월하며 지적이고 장엄한 존재, 우리 지성으로는 마법처럼 보이는 능력을 갖춘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해야 할 "과학적" 이유는 전혀 없다. 이를 묵살할 이유로 내가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즐거운 신박박(神反駁)뿐이다. 즉, 인간보다 지능이 높은 존재라면 이미 아주 오래전에 스스로를 소멸시켰을 것이라는 논리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 말을 믿지 않는다면, 신들의 존재를 부정할 다른 무슨 근거가 있겠는가?


부디 "증거가 없다"느니, "본 적이 없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말길 바란다. 여기에서 과학적 증명 따위는 철저히 금지다. 사실 세상의 어떤 사건 못지않게 수많은 이들에 의해 기록된 기이한 현상들이 차고 넘치지만, 이것들은 과학적 의미가 결여되어 있으며, 말하자면 "해당 사항 없음"의 영역에 속한다. 만약 이 세상에 가득한 하급 신들 중 하나인, 사악한 얼굴을 한 보랏빛 고블린 같은 장난꾸러기 신이 하얀 가운을 입은 박식가 앞에 나타난다면, 그 과학자는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타인에 의해 관찰 가능한 연구와 테스트, 실험의 대상(최근 들어 많은 분야에서 이 기준조차 버려지고 있지만)이 될 수 없다면, 그 존재는 결코 "과학"의 권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그런 존재들이 예전에는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냈으며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는 고대의 기록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하겠는가? 그들이 왜 당신에게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가? 현대인의 나약함과 비겁함—그 어떤 신도 비웃음이나 사러 그런 피조물들 앞에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왜인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신풍련(神風連)』에 나오는 젊은이들이 왜 불멸의 신들을 대신해 그토록 열정과 분노로 불타올랐는지 기억하라. 그들은 자신들 같은 무사 계급이 없다면 대중이 신들을 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들은 갈대숲 사이에 숨어 미신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무력한 정령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진정한 신들은 일종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대중이 상상하는 그런 종류의 힘은 아니다. 그들이 왜 인류를 신경 써야 하는가? 그들은 희귀하고 고귀한 존재들이며, 그들을 찾아내고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적어도 이것이 고대의 관점이었다. 신탁을 세우고 보존하는 일은 삶과 통치술의 첫 번째 과제였다. 신들은 자연이나 운명을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작동 원리를 드러내 줄 수는 있었다.


만약 오늘 신이 꿈속에서 당신에게 모습을 드러낸다면, 당신은 그를 공경하고 이 세상에서 그의 명을 수행할 내면의 에너지와 힘을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현대의 만연한 노예적 집단지성에 의해 거세된 채, 그 현상을 부정하고 당신 자신을 비실재적이거나 가치 없는 존재로 치부해 버릴 것인가? 정작 실재감이 결여된 것은 현대의 벌레 같은 자(bugman)들과 그들의 헛소리인데 말이다. 나는 당신이 최고의 열정에 도취되어, 크나큰 자신감을 가지고 이 지고한 축복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길 바란다!


도시를 지배하며 자신들이 똑똑하기에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중산층 속물(clothmos)들에게 귀하게 대접받는 너드(Nerds)들은, 사실 자기파괴적인 수준으로 지성을 흉내 내는 자들에 불과하다. 이들은 무의미한 개념과 추상 관념을 다루는 데 능숙한 나머지 본인이 실체를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단어와 문법에 대한 오해를 의미가 퇴색될 정도로 과하게 일반화한 것에 불과하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현란한 말재주를 진짜 지성으로 혼동하곤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생명의 형태를 두고 우주가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며,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는 역사가 더 큰 합리성이나 평화, 번영, 자유 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 역사적 진보론자들과 유사한 발상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완전히 틀렸다. 내가 말한 두 가지 생리학적 과정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생명과 그들의 상이한 조건 및 목적을 설명한다고 믿지만, 우주나 인류 역사를 통틀어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는 방향으로 시간이 흐른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증거는 더 하등한 생명 형태를 향한 움직임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장엄한 아름다움과 복잡성을 지닌 존재들이 과거에 존재했으나, 그들을 보존하기 위한 조건이 훨씬 까다로웠기에 사라졌음을 의심치 않는다. 또한 인류 문명이 수십만 년에 걸쳐 수많은 주기를 반복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우리보다 훨씬 진보했던 문명들이 수 마일의 화산재와 암석 아래, 혹은 남극의 빙하 밑에 묻혀 있거나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기억은, 기생충처럼 유기체를 장악할 만큼 강인한 신경계를 가진 매우 예민한 청년들에게 찾아온다. 맑고 고요한 순간, 의지 속의 작은 파동이 아주 오래전의 희미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은 갑자기, 마치 계시처럼 그것을 기억해 낸다.


윤회는 삶과 자연을 관찰하여 결론을 도출했던 모든 사회나 부족의 본래적 믿음이었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그로부터 파생된 종교들, 그리고 그 무렵이나 그 이후에 생겨난 수많은 새로운 종교들—성경적 신앙의 뿌리 또한 조로아스터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은 그 시작점에 모종의 신성한 영감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그것들이 해석되는 방식은 인간 정신의 고안물이며 계산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추상적이고 공리주의적이며 조잡할 정도로 정치적이다.


이런 종교들이 등장하기 전 거의 모든 사회에는 윤회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비록 불교나 힌두교가 윤회에 부여한 도덕적 의미가 플라톤의 경우처럼 사회적 효용과 정치적 이유 때문이긴 하지만, 윤회 신앙은 여전히 일부 지역에 남아 있다. 그러나 원시적인 윤회 신앙에는 훨씬 더 큰 중대성이 담겨 있는데, 이는 일종의 근원적이고 영구불변한 믿음에 가깝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천진하며, 그렇기에 나는 그 안에 분명 어떤 진실이 들어있으리라 믿는다.


이를 그저 불멸을 향한 그릇된 욕망이나 소망 충족의 기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첫째, 우리가 보듯 후대의 종교들이 내세의 가르침을 통해 그 목적을 훨씬 더 잘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많은 이들에게 윤회는 일종의 지옥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모두 매우 안락한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삶을 다시 사는 것이 나쁘지 않겠으나, 화상 병동을 한 번 방문해 보라. 수많은 이들에게 삶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이 지옥 같은 감옥을 탈출하려는 자살이 언제 어디서나 흔히 일어난다. 하지만 자살자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죽음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비록 대부분의 종교가 '윤회(metempsychosis)'라는 비유적이고 대중적인 형태로 가르쳐왔을지라도, 나는 윤회가 근본적으로 진실이라고 믿는다. 의지와 지성의 (거짓된) 합일체라고 상정되는 '영혼'이 온전히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은 틀렸다. 지성은 근력과 같은 순수하게 신체적인 자질일 뿐이며, 당신의 근육이 문자 그대로 다시 태어날 수 없듯이 지성 또한 "다시 태어날" 수 없다. 당신의 본질은 지성이 아니며,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거의 모든 현대인이 겉으로는 다르게 주장할지라도 실제로는 그렇게 가정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들은 "욕망의 우위"나 생물학적 결정론을 입에 올리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이 육체와 물질, 유전자와 생물학적 "프로그래밍"에 갇힌 '지성' 그 자체라고 믿는다. 이것은 잘못되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지성이 아니다. 무엇이 다시 태어나는지 내가 말해주겠다. 초파리나 일개미를 보라. 이런 존재 유형은 어떤 면에서 식물과 매우 가깝다. 아주 원시적인 지성과 신경계를 가지고 있다. "피 속에" 각인된 타고난 행동 방식,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 타고난 욕망과 지향성이 존재한다. 개미 한 마리를 죽여도 옆에 있는 다음 개미는 이 점에 있어 앞선 개미와 동일하다. 개미의 재탄생은 "즉각적"이다. 개미는 군집 내의 동일한 유형들 사이에서 균일하게 공유되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의지는 지속되고 인내하기 때문이다. 여왕개미가 죽어도 다음 여왕개미는 쇼펜하우어가 '의지'라 부른 것, 즉 타고난 욕구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이전 것과 구별할 수 없다. 그것은 매우 문자 그대로 동일한 존재의 "윤회"다. 당신이 이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 자신을 계속해서 당신의 지성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당신인 그 부분은 당신의 지성이 잠들어 있을 때도 존속하며, 설령 당신이 완전한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해도 여전히 존속할 것이다.


의심이 든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만약 선택해야만 한다면—모든 기억을 잃었지만 여전히 당신이 알던 방식대로 행동하는 것과, 모든 기억과 지식은 간직하고 있지만 인격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리는 것 중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쉽다. 만약 누군가가 아는 것이나 기억하는 것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면... 그것이 배신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것은 진정한 당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인격의 근본적인 변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등한 생명체들은 그들의 의지나 타고난 행동 방식에 있어 거의 획일적이며 매우 단순하다. 아메바나 효모 같은 것들의 행동은 완전히 균일하고 지속적인 중력과 같은 자연의 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죽자마자 즉시 다시 태어나며, 실제로 수많은 몸을 통해 동시에 살아간다. 더 높고 차별화된 동물로 갈수록 '의지'는 각 유형과 종에 따라 더 구체적으로 정의되며, 인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각 개체에 따라 정의된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 기억하는 것, 혹은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것과는 무관한 이 생물학적 실체는 피와 몸의 문제다. 그리고 이 동일한 존재, 사물, 혹은 '의지'(당신이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는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시대는 다르겠지만, 당신 안에 있는 이 특정한 욕망과 행동 방식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윤회의 진정한 의미다.


인구가 넘쳐나는 우리 시대에, 우리는 혹시 동일한 존재가 가끔은 여러 개의 몸으로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게 된다. 이 존재들은 다 어디서 오는 것인가? 어떤 이들은 이 새로운 수십억의 인류가 전생에 효모나 아메바, 메뚜기, 혹은 계절마다 떼 지어 태어나는 곤충이었음이 틀림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도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지만, 그보다는 과거의 시대에도 인류가 수십억 혹은 그 이상으로 팽창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나는 온 우주가 온갖 종류의 생명체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전의 각 인류 문명 주기에서 "멸종" 사건이나 그 경로가 무엇이었는지 안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그것이 소행성이나 화산 폭발처럼 완전히 무작위적이고 외부적인 요인인지, 아니면 문명 그 자체에 내재된 무언가인지 말이다. 치명적인 질병으로 이어지는 어떤 상황이나 행동, 혹은 일종의 거대한 무기, 어쩌면 그보다 더 기이한 무언가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존재하는 민족들과 종교들이 과거의 주기에서도 서로 다른 이름과 약간씩 다른 피상적 환경 및 외양을 한 채, 그러나 모든 근본적인 면에서는 동일하게 존재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 중 하나 혹은 일련의 집단, 아니면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어떤 새로운 믿음이 매 주기 문명을 종말로 이끄는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어느 개구리 같은 사람이 언젠가 나에게 제안하기를, 우리 시대 아프리카 인구의 폭발은 영화 <에이리언>이 묘사하는 바로 그 사건이라고 했다. 가장 극단적인 병원균 부하 속에서 번식된 인구이며, 추운 날씨에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나머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사회가 좀비들의 행진 아래 붕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를 의심한다. 아시아는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거나 두 번 돌아보지도 않고 그들을 차단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이전 주기들의 종말은 제각각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매우 자주,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지구를 정화하고 '인간-바퀴벌레'의 창궐을 몰아내기로 결심한 야만적인 사내들의 형제단이 출현한 것이 한 가지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장기적으로 문명과 안락함의 발전은 손상된 생명들의 증식으로 이어지고, 인류의 혁신은 입에 담을 수 없는 생명의 낙태물들을 낳기에, 자연 질서를 보존하려는 변방의 사내들이 모든 것의 종말을 꾸미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또한 어떤 고대 문명이 이 모든 파괴의 주기를 용케 피해서 어딘가 지하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로 영생하며 삶을 하나의 실험으로, 초연하게, 멀리서 관찰할 수 있는 장난스러운 꿈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의 유흥을 위해 때때로 사절이 지상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논리로, 매 문명의 주기마다 인류 대중이 필연적으로 퇴행하여 도달하게 되는 그 낙태된 로봇 같은 생명체들 또한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아마도 석회암 언덕 내부의 작은 "두더지" 군락이나, 오래된 동굴과 터널망의 지하 그리 깊지 않은 곳에 말이다. 뱀파이어, 코볼트, 크립티드 휴머노이드 등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는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를 사냥하고 공포에 떨게 하는 이 퇴행한 낙오자들을 지칭하는 것일지 모른다... 신들의 서열 중 많은 이들이 이 두 유형 모두에서 나왔을 것이며, 땅 밑에는 여전히 이보다 더 기이한 것들이 존재한다. 관심이 있다면 데로(DEROs, 1940년대 미국의 공상과학 잡지인 Amazing Stories에서 리처드 샤프 셰이버(Richard Sharpe Shaver)가 발표한 '셰이버 미스터리(The Shaver Mystery)'에 등장하는 가상의 존재들)를 찾아보라. 더 많은 것들이 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방식의 ‘인공지능’이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의 지성을 흉내 내는 기계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가능할 수도 있고, 현재로서는 그 목표에 한참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꽤 유용할 수도 있다. 체스에서의 승리는 그들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지만, 여전히 공을 차거나, 케첩을 따르거나, 단순한 사물을 식별하는 데는 실패한다... 과연 기계가 사냥을 하거나, 사냥당하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방식의 지성이나 그 조잡한 모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말할 때 그들이 진정으로 뜻하는 것은 언제나 인공 생명, 즉 어떤 종류의 로봇이나 인간의 의식과 구별할 수 없는 인공 의식이다. 너드들이 열광하는, 겉보기엔 달라 보이지만 사실상 유사한 추측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우주가 ‘논리’ 혹은 정보라는 생각이다. 물질을 구성하는 것이 사실 ‘정보’나 논리적 관계로 기록될 수 있다는 믿음이며, 따라서 우주가 정밀하게 바로 이것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당신의 지능을 컴퓨터에 ‘업로드’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과 그와 관련된 수많은 저능한 발상들 뒤에는 바로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이러한 발상의 동기는 너드 기질이며, 또한 어느 정도는 유대인식 사고방식, 혹은 단어와 숫자를 다루는 재주는 장려하되 시각적인 것에 있어서는 지적 결핍이나 지체 수준에 가까운 유대화(Judaizing) 경향이다. 성경 이전부터 존재했던 유대인들의 물질에 대한 증오, 그리고 다른 셈족이나 그 외 여러 민족과 공유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증오—이 모든 것이 결합하여 이러한 공격적인 너드 기질을 부추긴다. 이것이 앞선 주장들의 기원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나 다른 곳에서 모든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이것이 비유대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유대화’ 경향은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이며, 비유대인들 사이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 활기찬 물질과 이미지,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반작용적 사랑과 함께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사람마다, 그리고 민족마다 다른 정도로 존재할 뿐이다.


어쨌든 당신의 ‘뇌’가 업로드될 수 있기 때문에 당신 자신도 ‘업로드’될 수 있다거나, ‘우주는 정보’라거나, ‘인공지능’ 같은 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등의 모든 망상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망상이자 너드들의 권력 투사일 뿐이다. 너드란 우아하지 못하고 현학적인 지성, 종종 어중간한 지성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는 지성, 심지어는 사실의 암기나 조잡한 개념 설계에 과도한 자부심을 느끼며, 현실이 그 개념에 맞춰지기를—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기대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그 지성과 동일시한다. 역사상 아주 드물게는 자신의 사악한 인격과 의지를 부끄러워하여 명상 속에서 구원을 찾고, 그곳에서 탈출구를 찾으려 했던 성자나 순교자들도 존재했다.


이들은 때로 고결한 인물들이기도 하지만, 이는 너드(nerd)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너드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본성, 경향성, 혹은 영혼을 혐오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지성은 자신의 옹졸한 의지를 압도할 만큼 강력하지도 않으며, 이해관계의 압박이나 사소한 욕망의 중력에서 벗어나 사물을 고찰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하지도 않다. 그는 지성의 지각 능력이 너무나 강력해진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여 사물의 충만함이 의식 전체를 점유하고, 아이디어나 세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실제로 거머쥐게 되는 진정한 천재나 예술가처럼 사물을 보지 못한다.


아니다, 너드는 의지의 피조물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편협한 의지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모든 생각과 개념, 설계에는 항상 모종의 이득을 향한 필요와 욕망이 결부되어 있기에 강요된 듯한 특성을 띤다. 이것은 매우 자주 단순한 물질적 이득이기도 하지만, 명성에 대한 욕망은 훨씬 더 고약하다. 지식인들에게 있어 명예욕은 종종 가장 역겨운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타고난 남성다움이 결여된 경우에 그러하다. 이는 타인과 자기 자신에 대한 비겁함과 거짓말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니체는 남성다움이 철학자의 첫 번째 요건이라고 말했지만, 비겁한 너드보다 철학자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존재는 없으며, 인류와 종의 천재성에 대해 이 너드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보다 더 집요한 적은 없다.


알고리즘을 통해, 시행착오의 무차별 대입(brute-force)을 통해 생명을 ‘흉내’내려는 시도는 결코 생명이나 ‘의식’을 창조할 수 없다—도대체 그런 기계가 무엇을 ‘의식’한다는 말인가?—그것은 단지 평범한 인간 지성의 모방이자 패러디일 뿐이다. 단어와 삼단논법, 동기와 욕망의 흐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며, 어떤 사소한 필요의 압박 아래 있기에 항상 강요되고 부자연스러운 너드의 가짜 지성을 비추는 거울이자 찬양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괴기스럽다. 마치 당신이 갈망하던 소녀가 죽었는데, ‘거대한 마법(Big Magic)’을 부려 그녀의 시체를 소생시키고, 화장을 시키고, 이 좀비에게 다시 말을 가르치고, 그녀의 옛 습관들을 모두 복제하도록 강요하며, 당신이 기억하고 좋아했던 방식대로 행동하도록 비둘기를 길들이듯 조건화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소생된 실사 인형에 불과하며, 이것은 괴기스러운 일이다. ‘AI’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너드들, ‘이성’의 지성—공허한 말을 믿는 무리들—평범한 자들, 그리고 인간 정신의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어 그들의 골렘을 희망하게 만드는 생물학적 이해관계의 음모가 투사된 권력의 환상이다. ‘AI’는 생명을 증오하는 자들의 골렘이다... 그것은 그들의 진정한 메시아이자 복수다.


역사상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젊음과 아름다움은 보편적으로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사회들은 노쇠하고 경직된 노인들에 의해 운영된다. 때때로 그들은 '대지의 어머니'라는 뚱뚱한 여성의 이미지를 이용해 젊은이들의 머리를 내리치며 굴복시킨다. 또 어떤 때는 모든 면에서 추함을 조장한다. 관습에서의 추함과 변태성, 난도질, 할례, 자해 등이 그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뒷처리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양치를 해야 하는지, 어떤 '마법적-의학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항문에 손가락을 몇 개나 넣어야 하는지에 관여하는 관습과 종교적 권위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좀졸한 법조문들—이슬람의 시아파와 유대교의 랍비 전통이 가장 그러하다. 이 모든 것들이 진정한 종교적 열정과 참된 신탁의 과학을 질식시키며, 위대한 아름다움의 예술은 바로 그 열정과 과학으로부터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종종 그들의 음식은 입맛을 떨어뜨리고 마치 삶은 돌덩이처럼 보인다. 그들의 언어—대부분의 인간 언어는 듣기에 너무나 괴롭다! 타갈로그어는 듣는 것이 거의 고문에 가까운데, 내가 특정 문화를 꼬집으려는 것은 아니며, 추함을 사랑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이 최악인 것도 아니다(사실 필리핀인들은 이제는 흡수되어 사라진 네그리토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장난스러운 유머 감각을 지닌 유쾌한 사람들일 수 있다).


그곳의 사람들은 추하다. 인도인들—본래 고결한 민족이었던—사이에서 수천 년간 경제적 이득을 위해 행해진 중매결혼은, 이제 인구 10억 명의 국가가 되었음에도 운동 경기에서 거의 이기지 못하고 건국 이래 획득한 금메달 수가 1992년 이후의 작은 크로아티아보다도 적으며, 남녀 모두가 근친교배로 인해 추하고, 매력이 없으며, 거의 기형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게 했다. 그들만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유일한 사례가 아니며, 이러한 추함, 신체적 추함은 인류에게 거의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이득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출산을 장려하려 노력했던 부족들만이 간직한 매우 희귀하고 소중한 전유물이다. 아니다, 추함의 조장은 거의 보편적이며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은 매우 드물다. 위대한 문명들 중 고대 그리스인, 프랑스인, 일본인, 그리고 어느 정도의 이탈리아인들만이 진정으로 아름다움과 세련미를 사랑했으며, 오로지 아름다움의 증진에 그들 존재의 기반을 두었다.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문화가 결혼에서의 우생학보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함으로써 추하고 옹졸해졌던가—자유 연애가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아버지가 사익을 위해 딸을 거래하게 두는 것보다는 다분히 우생학적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들의 증오와 불신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회들이 엄청난 결핍의 압박 속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


그들의 진정한 통치자는 중력의 신이며, 그들은 미래에 대한 공포, 돈과 물질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결핍과 소유욕, 그리고 자신들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뿌리 깊은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끈덕지고 야만적인 행동들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느낀다. '존중'에 대한 갈망이야말로 영원히 소외된 자들의 진정한 표식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불신은 때때로 성스럽거나 친절하거나 명상적인 이들에 의한, 물질적 욕망에 대한 고결한 거부로 포장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며, 당신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름다움을 증오하는 문화권들은 모두가 공유하는 또 하나의 아주 폭로적인 특징이 있다. 그들은 사생활과 개인적 공간 또한 증오하며, 선하고 세련된 예절 속에 깃든 아름다움 또한 증오한다. 이런 사회들은 소위 민중적 연대감에 기반하고 있어서, 남의 공간에 불쑥 침범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노크를 요구하는 것을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 짐승 같은 소리를 낸다. 혹은 역사적으로 그런 사회들과 마주쳤을 때 흔히 묘사되던 그 특유의 체취까지—이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에 대한 증오가 실은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프로이트는 그의 내담자 중 상당수가 이런 중세적이고 집단적이며 질식할 것 같은 추함의 문화에서 개인적 공간과 거리, 세련미와 아름다움이 가치 있게 여겨지는 문화로 이행하려 할 때 겪었던 내면의 고통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차별성이나 우월함에 대한 증오이며, 극소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문화권에서 그토록 소중히 여겨지는 '개인 간의 차이와 거리의 원칙'에 대한 증오다. 그리고 우월함에 대한 증오는, 아름다움을 증오하는 사회의 대중이 느끼는 의구심에서 비롯된다. 즉, 자신들이 짓눌려 사는 그 끔찍한 결핍과 불안의 압박을 받지 않는 아름답고 태평한 자들이, 자신들이 가장 심각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조롱하고 있다는 의구심 말이다. 아름다운 존재들은 대중이 자신들의 끊임없고 조잡한 물질적 욕구를 억눌러야만 하는 그 엄격한 통제 체계를 해체해 버릴 위협이 된다.


이것이 바로 그런 사회들의 고유한 법 집행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즉시 가장 저급한 나약함과 타락으로 빠져드는 이유다. 이슬람이 가장 그러하다. 종교를 잃어버린 유대인들, 시아파 법의 폭정 아래 사는 페르시아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걸프 국가의 사람들은 엄격한 법이 없으면 즉시 조잡한 짐승의 상태로 회귀하여 완전히 방탕해진다.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들이 그러했다고 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곧 그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사회성이 부족한 너드(spergs)들이나 현학자들을 위해 사족을 붙일 필요는 없겠지만, 존 밀리어스(John Milius) 같은 인물들은 이런 판결에서 예외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일반적인 유형과 그 유형이 생성되는 방식에 관한 나의 논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서로 아주 다른 두 가지 생물학적 지향이 지닌, 서로 아주 다른 두 가지 필요에 기반한 두 개의 대립하는 생명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핍의 압박과 물질적 증식의 압박 속에 살아가며 죽은 자들의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한 자들과, 그 반대편에 있는 태평하고 즐거우며 쾌락을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자들 사이에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전자는 단순한 생명의 보존과 확장을 추구하고, 후자는 생명의 고양을 추구한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권능을 지진 남자는 '아네르(aner)'라고 불렸는데, 이는 단지 희미한 그림자 같은 존재, 즉 정체불명의 인간 형상을 가리키는 '안트로포스(anthropos)'라는 단어와는 구분되는 것이었다. 진정한 인간은 희귀했으며, 대부분의 남성은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의미의 남자라고 할 수 없다!


원래 이 단어는 아킬레우스, 디오메데스, 오디세우스와 같은 반신반인이나 초인들에게만 사용되었다. 일리아드에서 영광의 순간을 맞이한 디오메데스는 상처로 인한 분노로 정신이 고양되어, 눈앞의 목동들과 개들을 흩어버리는 사자에 비유된다. 아테나는 그의 머리와 어깨 위에 불을 지펴, 그를 만물 깃든 진정한 내면의 힘에 사로잡힌 존재로 각인시켰다. 이 힘이 이제 그에게서 터져 나와 다른 모든 이들 위에서 스스로 빛을 발한 것이다. 진정한 남자는 존재의 과잉에서 비롯된 용기와 대담함으로 가득 찬 인간이었다.


이러한 관념은 다른 아리안 문화권에서도 공유되었다. 로마의 '비르(vir)', 산스크리트어와 아베스타어의 '나르(nar)', 웨일스어의 '네르(ner)', 인도유럽조어의 '흐네르(Hner)'는 모두 궁극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종류의 활기찬 생명력을 가리킨다.


또한 이와 관련된, 남성적인 젊음과 결부된 또 다른 단어가 있는데, 바로 '아유(ayu)'다. 아유는 매 세대마다 스스로를 갱신하며, 끝없이 삶에서 삶으로 이동하며 영원히 지속되는 청춘의 생명력을 뜻한다. 이는 젊음, 그리고 젊은 시절의 힘과 권능을 뜻하는 모든 인도유럽어 단어들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단어는 라틴어 '이우우에니스(iuuenis)'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모든 게르만어와 영어 형태에 나타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틴어 '아이타스(aetas)'와 '아이테르누스(aeternus)'의 배후에, 즉 하나의 시대, 순환하는 시대, 영원(eternity)이라는 비전의 배후에 있는 것도 바로 이 동일한 단어, 동일한 관념이다. 이 언어들에서 '젊음'과 '영원'이 같은 단어이자 같은 관념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가! 고트어와 게르만어 단어들도 마찬가지다.


이 관념은 그리스어에서 매우 생생하게 나타난다! '영원히'를 뜻하는 '아이에이(aiei)'와 '아이온(aion)'이라는 단어는 모두 그 뿌리에 수명, 생명력, 젊은 힘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이 민족들은 젊음의 활력을 삶과 만물 뒤에 숨겨진 진정한 원동력으로 보았다. 비록 인간과 사회의 기억은 사라질지라도, 그 활력은 매 세대 충만한 힘으로 스스로를 새롭게 갱신하고 환생한다. 이 관점을 가장 아름답고 시적으로 표현한 대목을 보고 싶다면,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에우포르보스의 죽음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아야 한다. 그의 죽음은 강풍에 쓰러진 전성기의 젊은 나무에 비유된다. 피타고라스는 시칠리아에서 에우포르보스의 방패를 바라보며 자신이 바로 그 남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방패 뒷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계속 이어진다. D.H. 로렌스가 고대 에트루리아인들의 석관을 바라보며, 쾌락과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이 민족에게서 이와 매우 유사한 무언가에 대한 찬미를 읽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장례 용품에 환락과 연회, 풍요롭게 번성하는 삶과 커다란 기쁨, 와인 파티, 도약하는 돌고래의 형상을 새겨 넣었다. 이 억제할 수 없는 힘, 즉 자연과 젊음은 매 세대 새롭게 지속되며 결코 죽음에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아름답고 잘생긴 청년들의 체격(physiques)을 게시(poast)하는 이유는, 그것들을 응시할 때 깊은 평온과 기쁨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만물 속에 깃든 바로 그 동일한 영원한 힘이 끈질기게 회춘하는 모습을 본다. 나는 이 힘에서 자연의 숨겨진 설계와 의도, 즉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도달을 본다. 자연의 설계는 형언할 수 없으며, 그것이 도달하고자 하고 원하는 바는 우리에게 신비로 남아 있을 뿐, 오직 비유를 통해서만 불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


자연의 '계획'과 설계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지만, 그것이 수많은 다른 '파벌'과 원심력에 맞서 어떤 종류의 우월한 피조물, 즉 전율할 만한 아름다움과 권능을 지닌 전형을 생산하고 창조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고대 그리스의 신탁들에게 꿈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것처럼 오직 젊은 남성의 아름다운 체격이 완성되고 향상된 모습일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진정한 생물학적·신체적 형태, 즉 올바른 형상과 진정한 비율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이었다.


또한 나는 이 힘이 우리 안에서 다른 요소들과 공존하며 인류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 자신의 정신을 그 작용의 전장이자 무대로 삼았음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 권능 앞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 힘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내맡겨 그 힘에 사로잡히게 하고, 그 힘을 대신해 적들과 전쟁을 벌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아이온(aion)', 즉 우주 그 자체인 영원한 청춘의 에너지의 진정한 권능을 이해하고 싶다면, 헤라클레이토스가 이 단어를 사용하며 남긴 파편들을 공부해야 한다. 그가 이 단어를 어떻게 만물과 모든 작용의 정수인 '불'의 관념과 연결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는 지극히 옳았다. “가장 뛰어난 자들은 다른 모든 것보다 한 가지를 원하니, 곧 필멸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영원한 명성이다. 하지만 대중은 가축처럼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믿는 바이다!


- Bronze Age Pervert (Costin Vlad Alamariu), 『Bronze Age Mindset』, 2018, pp. 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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