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6편
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6편
종교 전반에 대한 전면적 회의: 아브라함을 넘어서
1. 시작하며: 소재와 결론을 구분하는 것
1편부터 5편까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을 중심 소재로 삼았다. 이 선택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아브라함 계통의 세 종교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극단적인 종교적 폭력의 사례들을 제공했으니까. 그러나 이 에세이 시리즈의 결론은 처음부터 더 넓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만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종교라는 시스템 자체가 문제다.
이것을 명확히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를 비판하면 "그렇다면 불교는 어떻냐", "힌두교는 더 평화롭지 않냐"는 반론이 나온다. 이 반론은 종교에 대한 비판을 특정 종교에 대한 편견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다. 그래서 이 편에서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를 넘어 종교 일반을 해부한다.
결론이 먼저다. 어떤 종교도 예외가 없다. 구조가 같기 때문이다.
2. 불교: 자비(慈悲)라는 이름의 브랜드와 현실의 간극
불교는 서구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서 가장 매력적인 '동양 종교'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비폭력(아힘사, ahimsa), 자비(카루나, Karuṇā), 명상, 깨달음,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메시지는 폭력과 독선으로 점철된 아브라함계 종교들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이상적인 대안처럼 보였다. 달라이 라마의 미소와 노벨 평화상, 선(禪)의 미니멀리즘, 그리고 '모든 존재의 고통을 끝내라'는 가르침은 불교를 비판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만들었다. 서구에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이나 심리치료 기술로 재포장되며, 폭력과 무관한 '평화의 브랜드'로 소비되었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역사와 현실의 거울 앞에서 빠르게 금이 간다.
미얀마의 로힝야 사태를 보자. 2017년 미얀마 군부가 자행한 로힝야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과 강제 추방은 국제사회에서 제노사이드(genocide)로 규정되었다. 수십만 명이 살해되거나 방글라데시로 쫓겨났고, 마을은 불태워졌으며, 여성들에 대한 조직적 강간이 자행되었다. 이 폭력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불교 민족주의였다. '마바타(Ma Ba Tha, 종족과 종교 보호를 위한 조직)'라는 불교 극단주의 단체는 로힝야 무슬림을 '이슬람 침략자', '불교 미얀마를 파괴하려는 외세'로 규정하며 증오를 체계적으로 선동했다. 아신 위라투(Ashin Wirathu) 승려는 자신을 '불교의 빈 라덴'이라고 칭하며, 반무슬림 연설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로힝야는 버마 불교를 없애고 이슬람 칼리파국을 세우려 한다"는 공포를 퍼뜨렸다. 수많은 불교 승려들이 군부의 작전에 침묵하거나 적극 동조했으며, 일부는 직접 증오 선전을 주도했다. 자비와 무살생(不殺生)을 설파하는 승려들의 로브 아래에서, 이교도로 규정된 '타자'에 대한 학살이 정당화되었다.
이것을 단순한 '일탈'이나 '정치적 오용'으로 치부하기 쉽다. 그러나 일탈이 이토록 손쉽고 대규모로, 그리고 종교적 권위를 가진 이들에 의해 반복된다면, 그 가능성은 이미 불교라는 시스템의 구조 안에 내재해 있다는 뜻이다. 불교는 '나'와 '타자', '불교 공동체(상가, Sangha)'와 '외부의 위협'을 구분하는 정체성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며, 이 구분이 민족·인종과 결합할 때 폭력은 자연스럽게 정당화된다.
스리랑카의 사례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지속된 스리랑카 내전은 싱할라족(불교 다수)과 타밀족(힌두교 다수) 사이의 충돌로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이 전쟁의 배경에는 불교 민족주의가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싱할라 불교 우월주의는 '스리랑카는 본래 싱할라 불교의 섬'이라는 역사 서사를 동원해 타밀족을 '침입자'나 '이방인'으로 프레임화했다. 그 근거로 가장 자주 소환된 것이 5세기 팔리어 연대기 마하밤사(Mahāvaṃsa)다. 싱할라 왕조의 불교적 정통성을 서술한 이 문헌은, 현대 민족주의자들의 손에서 영토적 배타성의 신화적 증거로 재전유되었다. 싱할라 온리 정책(Sinhala Only Act), 불교 사원의 타밀 지역 건설, 그리고 민족주의적 설교는 타밀족에 대한 체계적 차별과 폭력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했다. 자비를 강조하는 종교가 민족주의와 결합하자, 수십 년간의 유혈 내전이 '불교 문명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역사적으로도 불교는 결코 순수한 평화의 종교가 아니었다. 일본의 경우가 특히 극명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선불교(특히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曹洞宗))는 일본 제국주의와 긴밀히 결합했다.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수많은 선사(禪師)와 승려들은 '황군(皇軍)의 전쟁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성전'이라는 논리를 제공했다. '선검일여(禅剣一如, 선과 검의 일치)'라는 구호 아래, 명상 수련이 전사의 정신력 강화로 재해석되었고, 불교 의식은 군인들의 사기 진작과 전사자 위령에 동원되었다.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를 비롯한 영향력 있는 불교 지식인들조차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거나 미화하는 발언을 했다. 불교 기관들은 전쟁 채권 판매, 군사 훈련, 식민지 '평정' 작업에 적극 협력했다. 자비와 무집착을 가르치는 종교가,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와 결합하자 '불교를 위한 전쟁'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연의 연속이 아니다. 불교 역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위협'으로 규정된 외부를 배제하거나 정복하는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팔리 경전에서조차 왕의 통치와 벌(罰)이 논의되며, 역사적으로 불교 국가는 전쟁과 정복을 '불법(佛法) 수호'나 '교화'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왔다. 자비라는 이상은 강력한 브랜드지만, 현실에서 공동체·민족·권력과 결합할 때 그것은 선택적으로 적용된다. '진정한 불교도'만이 자비의 대상이 되고, '불교를 위협하는 자'는 예외가 된다.
불교를 비판하는 것은 특정 문화나 민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교가 가진 보편적 구조를 지적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신성한 서사, 공동체 정체성, 도덕적 우월감, 그리고 '구원/해탈'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통해 인간을 조직한다. 이 구조 자체가 '우리 vs 그들'의 이분법을 생산하고, 위기 상황에서 폭력의 정당성을 제공한다. 불교가 아브라함계 종교만큼 극단적 폭력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브랜드가 더 세련되었을 뿐이다.
자비를 설파하면서도 증오를 선동하고, 무살생을 강조하면서도 학살을 묵인하거나 정당화하는 모순. 이것이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라는 시스템의 본질적 취약점이라는 점을, 미얀마와 스리랑카와 일본의 역사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종교는 이상을 제시하지만, 그 이상은 언제나 현실의 권력과 정체성 정치 앞에서 굴복하거나 도구화된다.
3. 힌두교: 우주적 질서라는 이름의 억압
힌두교는 수천 년에 걸쳐 인도 아대륙에서 축적된 다양한 신앙, 철학, 의식, 신화의 복합체다. 베다부터 우파니샤드, 에픽, 푸라나까지, 그리고 수많은 지역 신앙과 철학적 학파까지 포괄하는 이 다양성은 "힌두교는 단일한 교리가 아니다"라는 강력한 방어막을 제공한다. 비판자가 특정 요소를 지적하면, "그건 힌두교의 본질이 아니다", "진정한 힌두교는 더 깊고 철학적이다"라는 반론이 즉시 나온다. 그러나 힌두교가 실제로 사회를 조직하고 인간의 삶을 규정해 온 방식, 즉 그 사회적 구현체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핵심이 바로 카스트 제도(varna and jati)다. 이는 종교가 어떻게 가장 오래되고 가장 견고한 사회적 억압 구조를 창조하고 정당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힌두교의 전통적 세계관에 따르면, 사회는 브라만(사제·지식인), 크샤트리아(전사·통치자), 바이샤(상인·농민), 수드라(노동자)라는 네 개의 바르나(varna)로 나뉘며, 이 아래에 카스트 밖의 불가촉천민(Dalit, Scheduled Castes)이 존재한다. 이 구분은 단순한 직업 분업이 아니다. 그것은 카르마(karma)와 환생의 논리로 철저히 종교적으로 정당화된다. 현재의 낮은 신분은 전생에 쌓은 악업(惡業)의 결과이며, 이생에서 주어진 '의무(dharma)'를 순종적으로 수행하면 다음 생에서 더 높은 카스트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천재적일 만큼 효과적이다. 현재의 고통, 빈곤, 차별, 폭력을 '우주적 질서(dharma)'와 '개인적 업보'로 돌림으로써 피해자 스스로 저항 대신 순응을 선택하게 만든다. 불평등을 '신성한 우주 질서'로 포장하고, 구조적 억압을 개인의 도덕적 실패로 재해석한다. 이는 아브라함계 종교가 사후 천국/지옥으로 현세의 고통을 설명하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정확히 동일하다. 방향만 다를 뿐, 결국 인간의 현재 삶을 통제하고 복종을 유도하는 도구라는 점에서는 같다.
현대 인도에서도 이 유산은 강력하게 지속된다. 헌법으로 카스트 차별이 금지되고, 긍정적 차별(예약제)이 시행된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달리트에 대한 폭력과 사회적 배제는 일상적이다. 인도 국가범죄기록국(NCRB) 자료에 따르면, 매년 수만 건의 달리트 대상 범죄가 보고되며, 실제 발생 건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달리트 여성에 대한 강간, 집단 폭행, 마을 전체에 대한 사회적 보이콧, 상위 카스트 집단에 의한 린치와 방화가 끊이지 않는다. 달리트가 교육이나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상승하려 하면, 상 caste 공동체의 폭력적 반발이 뒤따르는 경우가 흔하다. "불가촉"이라는 낙인은 여전히 물을 길으러 가는 것, 사원을 출입하는 것, 심지어 그림자를 밟는 것조차 위험으로 만든다.
이것을 "오래된 관습의 잔재"나 "경제적 요인"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편리한 회피다. 카스트 차별의 뿌리는 종교적 신화와 철학 속에 깊이 박혀 있으며, 수천 년 동안 사회 구조와 의식, 결혼, 음식, 공간까지 철저히 침투해 내면화되었다. 법률은 표면을 바꿀 수 있지만, '우주적 질서'로 정당화된 세계관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극히 어렵다.
현대에 들어 힌두 민족주의, 이른바 힌두트바(Hindutva)는 또 다른 폭력의 패턴을 만들어냈다. RSS, VHP, Bajrang Dal 등 조직과 BJP 정치 세력이 주도하는 힌두트바는 "힌두 국가(Hindu Rashtra)" 건설을 목표로 하며, 이슬람과 기독교 소수자를 '외부 침략자'나 '국가 내부의 적'으로 규정한다. 소에 대한 숭배를 명분으로 한 '카우 비질란테(cow vigilantism)'는 그 상징적 표현이다. 무슬림이나 달리트가 소를 운송하거나 도축했다는 의심만으로 군중이 결성되어 린치가 자행된다. 2015년 모하마드 아크라크 살해 사건 이후 이런 공격은 급증했으며, 가해자들은 종종 소셜미디어에 폭력 장면을 올리며 '힌두 보호'를 자랑한다.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할 독립 과정은 종교적 정체성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규모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수백만 명이 종교에 따라 이주하는 과정에서 힌두시크무슬림 간의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고, 사망자 추정치는 20만에서 200만 명에 이른다. 기차가 피로 물들고, 마을이 불타고,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참상이 펼쳐졌다. 이 폭력은 단순한 '정치적 혼란'이 아니라, 종교적·민족적 정체성을 절대화한 결과였다.
힌두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덜 폭력적이라는 이미지는, 카스트 제도라는 내부 억압을 '문화'나 '전통'으로 미화하고, 외부에 대한 폭력을 '민족주의'로 재포장한 결과일 뿐이다. 힌두교 역시 '우리(힌두 공동체)'와 '그들(이슬람, 기독교, 또는 낮은 카스트)'을 구분하는 정체성 메커니즘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으며, 이 구분이 위기나 정치적 동원 상황에서 폭력과 억압으로 쉽게 전환된다.
우주적 질서(dharma)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계급화하고, 그 질서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구조. 이것이 바로 종교가 가장 오래도록 유지해 온 억압의 본질이다. 힌두교는 그 다양성과 철학적 깊이로 인해 비판을 피하기 쉽지만, 사회적 현실 앞에서 그 브랜드는 힘을 잃는다.
자비나 해탈, 우주적 조화라는 이상은 강력한 수사지만, 현실에서 공동체 정체성, 권력, 두려움과 결합할 때 선택적으로 적용되거나 완전히 역전된다. 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힌두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4. 신토: 살아있는 신과 제국의 결합
신토(神道)는 일본 열도의 토착 신앙으로, 자연의 여러 카미(神), 조상 숭배, 그리고 계절과 삶의 리듬에 대한 의식에서 출발했다. 원래는 중앙집권적 교리나 독단적 신학이 없는, 다소 유연하고 지역적인 전통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정부는 신도를 국가 통합의 도구로 체계화하면서 국가신토(State Shinto)를 만들어냈다. 천황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직계 후손이자 살아있는 신(現人神, 아키츠미카미)으로 위치시키고, 신도 의식을 국가의 공식 종교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 변화는 단순한 문화 정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가 정치 권력과 결합하여 대규모 집단을 동원하고, 희생을 신성한 의무로 승화시키는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천황의 신성은 국가의 모든 행위를 절대화하는 강력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 천황의 명령은 곧 신의 뜻이었고, 국가에 대한 충성은 종교적 숭배로 승화되었다. 코쿠타이(國體)라는 개념(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유기적 국가 공동체)은 모든 일본인이 천황에게 절대적 충성과 목숨 바침을 바쳐야 한다는 논리를 제공했다. 이 구조 속에서 개인의 죽음은 더 이상 비극이 아니라, 신성한 국가를 위한 최고의 헌납으로 재해석되었다.
이 논리의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 바로 카미카제(神風) 특공대였다. 1944년 말부터 시작된 이 작전은 조종사들이 폭탄을 실은 비행기로 적함에 돌진하는 자살 공격이었다. '신풍'이라는 이름 자체가, 몽골 침략을 막았던 역사적 신풍을 연상시키며 전쟁을 신의 뜻으로 포장했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천황 폐하 만세(天皇陛下萬歲)"를 외치며 죽음을 선택했다. 국가신토는 이 행위를 영웅적 희생이자 '카미'에게로의 귀환으로 미화했다. 자비나 해탈을 강조하는 다른 종교와 달리, 여기서는 국가와 천황에 대한 절대 복종이 최고의 종교적 덕목이 되었다.
전쟁 중 일본 제국군의 행위도 이 신성한 프레임 안에서 정당화되었다. 1937년 12월, 난징(南京) 함락 이후 벌어진 대규모 학살과 약탈, 강간은 그 대표적 사례다. 국제군사재판 기록과 역사적 추정에 따르면, 수십만 명의 중국 민간인과 포로가 살해되었으며, 수만 명의 여성이 성폭력을 당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이 행위를 단순한 군사 작전의 부산물이 아니라, 신성한 제국의 확장 과정으로 보았다. 황군(皇軍)은 천황의 군대이고,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므로, 그들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신성한 성격을 띤다는 논리였다. 이 구조는 어떤 잔인한 폭력도 '제국을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나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수립'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이것은 종교가 '신성한 서사'를 통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보편적 패턴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신도가 본래 자연과 조화, 정화의 전통이었다고 해도, 국가 권력과 결합한 순간 그것은 강력한 동원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는 전사자들의 영혼을 위령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을 신으로 모셨다. 살아있는 신(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체계에서 죽은 자들까지도 국가 신앙의 일부가 되었다.
패전 이후 이 구조는 급진적으로 해체되었다.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 천황은 인간 선언(人間宣言)을 통해 자신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혔다. 연합군의 압력 아래 이루어진 이 선언은 국가신토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천황 중심의 신성한 국가관은 공식적으로 부정되었고, 신토는 다시 민간 종교에 가까워졌다.
신토의 사례는 종교 비판의 핵심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문제는 특정 신앙의 내용(자연 숭배, 조상 제사 등)이 아니라, 종교가 권력과 결합하여 '신성한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위한 희생'을 절대화하는 구조 자체에 있다. 신토가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와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은 평화로운 토착 신앙이 아니라 제국 동원의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5. 유교: 교조주의화되어버린 정치철학
유교를 비판하려 들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것은 교리 논쟁이 아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다"라는 방어막이다. 이 방어막은 꽤 효과적이다. 유교에는 인격신(人格神)이 없고, 예배당이 없고, 뚜렷한 사후 세계관이 없다. 공자 자신도 귀신과 죽음에 대한 질문에 "아직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 '미지생, 언지사')"고 유보했다. 그러니 "유교를 종교로 비판하는 것은 카테고리 오류"라는 반론이 손쉽게 나온다.
그러나 이 방어막 자체가 유교가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자기보호 장치라는 사실을 먼저 짚어야 한다.
종교의 정의를 인격신의 유무에 한정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사회과학적으로도 낡은 접근이다.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은 종교를 이렇게 정의했다.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고, 그 구분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통합하며, 믿음과 실천의 체계를 통해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시스템. 이 정의에 인격신은 없다. 뒤르켐의 기준을 유교에 적용하면 결론은 하나다. 공자-맹자 시절은 몰라도 그 이후 신유학(新儒學)은 종교다.
천(天)이라는 초월적 도덕 질서, 성인(聖人)이라는 신성화된 인물, 사서오경(四書五經)이라는 경전, 과거제(科擧制)라는 입문 의례, 관혼상제(冠婚喪祭)라는 생애주기 의례, 그리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이단 처형 기타 등등. 종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구조적 요소가 모두 갖춰져 있다.
오히려 "우리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주장 덕분에 유교는 수천 년 동안 종교 비판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었다. 종교라는 딱지를 피함으로써 비판을 '철학적 견해 차이'의 영역으로 격하시켰고, 동시에 종교가 가진 공동체 통제력과 도덕적 권위는 온전히 누렸다. 이것이 유교의 가장 영리한 생존 전략이었다.
공자(孔子)의 원전 유교는 그나마 논의의 여지가 있었다. 인(仁)을 중심으로 한 덕목 체계, 군주에 대한 간언(諫言)의 의무, 민본(民本)적 요소들은 적어도 열린 논쟁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공자 자신이 말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 '삼인행 필유아사')." 이 문장을 액면 그대로 읽는다면, 공자 시절 유교는 어느 정도의 지적인 겸손을 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겸손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나라의 동중서(董仲舒)가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으로 유교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격상시키면서 첫 번째 경직화가 일어났다. 황제의 권위가 천(天)의 뜻을 대리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순간, 유교는 정치 권력의 정당화 도구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그리고 12세기, 주희(朱熹)가 등장했다.
주희가 한 일을 단순화하면 이렇다. 공맹의 유교를 우주론적 형이상학으로 재편했다. 이(理)와 기(氣)의 이원론을 통해 도덕적 질서를 우주의 물리적 법칙과 동일시했다.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라는 오륜(五倫)은 더 이상 사회적 관습이나 합의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의 이치(理)가 인간 관계에 구현된 것, 즉 자연법칙과 동급의 진리가 되었다. 누가 감히 자연법칙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핵심이다. 주희 이전의 유교는 "이렇게 사는 것이 도덕적이다"는 권고였다. 주희 이후의 성리학은 "이렇게 사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선언이 되었다. 반박의 차원 자체가 달라진다. 사람의 의견에는 반론할 수 있지만, 우주의 이치에 반론하는 자는 우주 그 자체에 저항하는 미치광이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이 성리학을 가장 극단적으로, 가장 원리주의적으로 수용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성리학의 발원지 송나라, 그리고 그것을 국교로 삼은 명나라조차 성리학 이외의 학문적 흐름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았다. 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 왕양명(王陽明)의 양명학이 명나라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조선은 달랐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분석가 한 명을 소환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朴正熙). 군사혁명으로 집권하여 18년간 한국을 통치한 반공(反共) 지도자. 그리고 동시에, 조선 성리학 체제의 폐해를 누구보다 신랄하고 상세하게 기록한 인물. 그의 진단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가 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 지식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체제를 직접 운영한 자가 바로 이전 권위주의 체제의 해악을 이토록 날카롭게 해부했다는 아이러니는 그의 분석에 독특한 무게를 더한다.
박정희는 그의 저서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조선 유교 체제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했다.
"이성계의 군사 쿠데타는 정권교체에 그쳤을 뿐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개혁에는 다가갈 수 없었다. 나라의 지도원리를 유교에 고정시킨 이성계는 유교 진흥을 정책의 슬로건으로 내세워 국민교육에 활용했고 관직에 나가기 위한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그렇게 조선의 관직은 유교 지식인 출신이 차지했고, 이들은 지배층을 이루면서 실제 땅을 경작하는 농민을 착취하며 자신은 놀고먹는 지주가 되었다. 양반이라는 사회적 신분은 대대로 물려주고 또 물려받는 특권이었다. 이처럼 유교사상은 신분의 차별을 당연시하고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를 합리화시켜 주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사회에 투영되었다.
(...) 조선왕조는 유교라는 가족적이고도 윤리적인 성격을 띤 사상을 지배원리로 하는, 그 본질상 전체주의라 하겠다."
—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기파랑(2017), pp. 56~57
"그 본질상 전체주의." 권위주의 지도자가 이전 체제를 전체주의로 규정한다. 이 문장의 아이러니를 잠시 음미해 두자.
그런데 이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은 힌두교의 카스트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힌두교가 카르마(karma)와 윤회의 논리로 신분을 우주적으로 정당화했다면, 성리학의 오륜(五倫)은 이(理)와 기(氣)의 형이상학으로 위계질서를 우주의 이치로 정당화했다. 방법은 달랐지만 기능은 동일하다. 태어나면서 결정된 위치에 복종하는 것이 곧 우주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 되고, 저항하는 자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가 된다.
박정희는 이 구조가 만들어낸 실용적 폐해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중앙관서의 기술직 종사자들은 양반 이하의 사무원 취급밖에 받지 못했다. 기술직을 업신여기는 사조가 팽배해서 수공업에 종사하는 기술사무원이나 종들은 '~쟁이'라는 천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상공업이나 과학기술을 업신여기는 생각들은 후일 근대화를 가로막는 암(癌)과 같은 역할을 했다. (...) 벼슬이면 다라는 생각에 감투 쓰는 일에만 모두가 집중하는 어두운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근대민주주의의 바탕이 되는 지방자치의 성장을 방해하고 '나으리'에게 아부하는 근성을 길러냈다. 나랏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던 백성은 나랏일을 자기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겼고, 그러다 보니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날 토양은 전혀 만들어지지 못했다."
—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기파랑(2017), pp. 57~58
오직 경서(經書)를 암송하고 과거를 통과해 관직에 오르는 것만이 인간다운 삶의 유일한 경로였다. 기술자는 '~쟁이'였고, 상인은 천민이었으며, 농민은 수탈의 대상이었다. 성리학이 우주의 이치로 규정한 위계 안에서 이 배치는 변경 불가능한 자연 질서였다. 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 산업이 성장할 수 없었다. 근대화의 토대 자체가 유교적 세계관에 의해 사전에 봉쇄되어 있었다.
성리학이 가진 가장 종교적인 메커니즘은 이단 처형이었다. 그 이름이 사문난적이다.
"유교 문명(斯文)을 어지럽히는 도적(亂賊)." 이것이 종교적 파문(破門)과 구조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 딱히 없다.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공동체에서 축출하고, 그 낙인을 통해 다른 구성원들이 감히 같은 질문을 꺼내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것. 이것이 사문난적이라는 개념이 수행한 기능이었고, 종교 재판소가 수행한 기능이었다.
박정희는 이 메커니즘의 구체적 작동을 기록했다.
"본디 토론이나 논쟁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조선의 당파싸움에서 시비는 그야말로 문제도 안 되는 남의 흠을 찾아 헐뜯고 공연히 시비를 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파싸움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송시열(宋時烈)과 대립각을 세웠던 남인파 허목(許穆)은 주자학 말고 다른 학문도 진리가 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가 사문난적의 가시관을 썼다. 이렇게 사소한 시빗거리에서 시작한 당파싸움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으로 발전해 가곤 했다."
—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기파랑(2017), p. 63
허목이 한 말은 이것이었다. "주자학 말고 다른 학문도 진리가 될 수 있다." 이 한 문장으로 이단이 되었다. 다른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범죄가 되는 체계. 이것을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것은 신학이다. 이단 심문관이 갈릴레오에게 요구한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을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서로에게 요구했다. 우주의 이치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것은 주자가 해석한 대로이며, 그 밖의 가능성을 입에 올리는 자는 처단된다.
사문난적 메커니즘이 지식인 사회에 작동했다면, 당쟁은 그것이 정치 권력과 결합했을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당파 분열의 계보를 이렇게 추적했다.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대립이 '동인, 서인'으로 발전, 동인은 다시 '남인, 북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 소북'으로 대북이 다시 '육북(肉北), 골북(骨北)'으로, 소북은 별도로 '청소북(淸小北), 탁소북(濁小北)'으로 남인은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서인은 '청남(淸南), 훈남(勳南), 소남(少南), 노남(老南)'으로 분열, '노론(老論), 소론(少論)'의 당파가 일어나고, 소론은 다시 '벽파(僻派), 시파(時派)'로 참으로 어떤 계보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 박정희, 『평설 국가와 혁명과 나』, 기파랑(2017), pp. 205~206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이것은 수사가 아니라 사실이다. 이 무한 분열의 계보를 들여다보면 한 가지가 보인다. 이 싸움은 이념이나 정책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성리학적 예법 해석의 미세한 차이, 복상(服喪) 기간의 몇 개월 차이, 제사 절차의 작은 차이들이 정치적 숙청의 명분이 되었다. 왜? 성리학이 우주의 이치를 독점한다고 주장하는 한, 그 이치의 해석권을 장악하는 것이 곧 권력의 정당성이 되기 때문이다. 교리 해석권을 둘러싼 투쟁. 이것이 종교 전쟁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이 당쟁이 국가 안보 판단을 오염시켰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박정희는 하나의 사례를 기록했다.
"선조 24년(1591) 3월 조정에서 사신을 일본에 보내 왜란의 기미를 탐색했다. 그런데 다녀온 자들의 보고가 서로 갈렸다. 정사(正使)로 간 동인의 황윤길(黃允吉)은 왕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눈빛이 찬란하고 야심만만해 보이니 반드시 쳐들어올 것"이라고 적의 정세를 똑바로 보고했다. 그러나 부사(副使)로 갔던 서인의 김성일(金誠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이 쥐눈깔 같고 인물이 보잘것없으니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며 반대 소견을 들고 나왔다. 그 결과가 임진왜란이었다. 이렇게 당파싸움은 수시로 겨레를 위험한 고비로 몰아넣었다."
—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기파랑(2017), pp. 65~66
당파가 달랐다. 그것이 국가 안보 보고를 갈랐다. 그 결과가 7년 전쟁이었다. 수십만 명이 죽었다. 성리학적 붕당 논리가 현실 판단보다 우선했을 때 벌어진 일이다. 종교적 교리 충성이 현실 인식을 압도하는 현상 — 이것은 이 에세이가 내내 추적해온 패턴의 조선판이다.
박정희는 이 당쟁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하기도 했다.
"조선 사회가 후세에 남긴 가장 못된 유산이 사화(士禍)와 당쟁이다. 그것은 관인 지배층 내부에서 벌어진 무자비한 권력투쟁이었다. 이 싸움은 페어플레이가 아니었다. 헐뜯고 시기하고 모함하는, 일종의 테러와 같은 잔인성을 띤 음성적인 당파싸움이었다. 반대 당이나 정치적인 적수에 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었다. 그 결과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고 평화로운 정치세력의 교체를 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후세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장애와 해독을 끼쳤다."
—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기파랑(2017), p. 63
"일종의 테러와 같은 잔인성을 띤 음성적인 당파싸움." 이것이 우주의 이치를 독점했다고 주장하는 학문이 500년 동안 산출한 정치의 모습이었다.
성리학이 내부적으로 신분 위계와 당쟁을 생산했다면, 대외적으로 생산한 것은 사대주의(事大主義)였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 전략이 아니었다. 성리학적 세계관 자체가 중화(中華)를 문명의 중심으로 규정하고, 그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문명의 등급을 매기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을 섬기는 것은 외교적 현실주의가 아니라 우주의 이치에 순응하는 도덕적 행위가 되었다.
박정희는 이 구조를 이렇게 분석했다.
"애당초 태조가 정치적인 이유로 설정한 사대주의는 중국을 따르는 유교사상을 지식인 사회에 뿌리박게 하고 모든 사회제도나 심지어 생활양식까지도 그대로 본뜨게 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자기 판단이나 자기 민족의 문화가 아닌 '중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비추어 결정되었다. 이런 경향은 민족적 자립이나 민족적 주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채 외국에서 들여온 문화나 사상의 기성복만을 입으려는 이른바 '구호물자'식 민주주의 수입으로 이어졌다."
—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기파랑(2017), pp. 29~30
"가치판단의 기준이 '중국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비추어 결정되었다." 이것은 문화적 열등감이 아니라 성리학적 세계관의 논리적 귀결이다. 성리학이 규정한 문명의 위계 안에서 중화를 모범으로 삼는 것은 우주의 이치를 따르는 일이었다. 자기 민족의 판단과 문화는 그 이치 앞에서 열등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었다. 이 내면화된 복종이 500년 동안 반복되면서 독자적인 철학, 독자적인 과학, 독자적인 문화의 발생 가능성 자체를 차단했다.
당쟁과 신분 억압과 사대주의는 성리학이 사회에 가한 외부적 해악이다. 그러나 더 깊은 곳에서 작동한 것이 있었다. 백성의 내면에 체념을 심어놓은 것이다.
박정희는 조선 문학을 통해 이 내면화된 체념을 추적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래인 〈아리랑〉을 보면 소극적인 체념이 고질화된 한 단면을 알 수 있다. 노래 가사를 보면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라는 구절이 있다. 자기를 뿌리치고 떠나가는 임을 그리워하면서도 "여보, 날 두고 어디를 가시오" 하고 막아서는 대신 혹시 십 리쯤 가서 요행히 발병이라도 나서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 애처로움이 그를 대신한다. 유럽 사람들 같으면 따라 나서든지 목에 매달려 못 가게 할 터이다. 〈밀양 아리랑〉도 가사가 "정든 임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 해 /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이다. (...) 「처용가」를 보면 "(...) 밤 깊도록 노니다가 / (집에)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어라 / 둘은 내 것인데 / 둘은 뉘 것인고 / 본래 내 것이다마는 / 빼앗김을 어찌하리" 장탄식을 늘어놓고 있다. 유럽의 사나이라면 바로 권총을 들어 둘을 다 쏴버렸을 것이다.
이러한 체념은 대결 의식이 없고 굴복하는 인생 태도이며 운명에 순순히 굴하는 태도라 하겠다. 따라서 운명을 개척하거나 새 길을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으며 불가능한 것을 바꿔 보려는 용기도 없었다."
—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기파랑(2017), pp. 73~75
이 체념은 어디서 왔는가. 성리학이 우주의 이치로 규정한 위계 안에서, 그 위계에 저항하는 것은 우주 자체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저항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체념뿐이었다. "될 대로 돼라"는 정서는 나태함의 산물이 아니라 500년간 체계적으로 설계된 복종의 산물이었다.
비판정신의 부재도 같은 뿌리를 가진다.
"비판은 현실을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에서 나온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같이 무지막지한 권력 밑에서는 체념과 도피만이 있게 마련이다. 특히 동양정신 속에는 진정한 비판은 없고 물려받는 것과 물려주는 것만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있다. 공자의 말이 그것이다. 공자의 말이면 무조건 옳다며 '공자 왈'로 모든 것을 정리해 버리는 것이다. 조선사회의 문화 역시 주자학 이외의 자유로운 학문의 연구를 허락지 않았고 다른 학문의 연구를 억압했다. 그러다 보니 백성의 마음속에 뚜렷한 비판의식이 생겨나지 못하고 뒷전에서 불평, 불만만을 늘어놓게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사람들은 비교적 시문(詩文)에는 능했으나 논리적인 근거를 통한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지 못했다. 감수성이나 감각에는 민감해서 언어에서도 감각적인 형용사는 발달했지만 논리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이성에는 둔하여 중국의 문헌을 그대로 옮겨 놓는 데 그쳤다. 토론이나 의견의 발표는 대개 양반의 위신과 관련되어 매번 독단적이며 절대적인 것이었다. 상대편의 의견을 고려한다든가 논쟁을 통해 이론적으로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격다짐으로 매사를 강제했다. 권세를 등에 업은 허위가 권세 없는 진리를 누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버렸던 것이다."
—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기파랑(2017), pp. 77~78
"공자의 말이면 무조건 옳다며 '공자 왈'로 모든 것을 정리해 버리는 것." "주자학 이외의 자유로운 학문의 연구를 허락지 않았고." "권세를 등에 업은 허위가 권세 없는 진리를 누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 세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성리학이 어떤 인식론적 체제였는지가 명확해진다. 진리는 검증의 산물이 아니었다. 진리는 권위의 산물이었다. 주자가 말했으므로 진리다. 권세가 뒷받침하므로 진리다. 이것이 학문인가, 신학인가.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뒤, 박정희는 한국사 전체에 대해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론은 섬뜩할 정도로 솔직하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퇴영(退嬰)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였다. 그 어느 시대에 변경을 넘어 타국을 지배하였으며, 그 어느 시기에 해외의 문물을 널리 구해 사회의 개혁을 시도한 적이 있었으며, 또 그 어떤 시대에 민족국가의 위세를 밖으로 과시하고 산업과 문화로써 독자적인 자주성을 떨친 바가 있었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강대국에 밀리고 치여 외래문화에 맹목적으로 동화되었고, 원시적인 산업의 범위를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 불교에서 유교로 문물제도가 바뀜에 따라 유교가 급격하게 민족의 자주적인 기개를 좀먹었다.
(...) 우리가 진정 민족의 일대 중흥을 기하려면 무엇보다 이 역사를 새롭게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악(惡)의 창고 같은 우리의 역사는 차라리 불살라 버려야 한다."
— 박정희, 『평설 국가와 혁명과 나』, 기파랑(2017), pp. 204~209
"유교가 급격하게 민족의 자주적인 기개를 좀먹었다." "모든 악의 창고 같은 우리의 역사는 차라리 불살라 버려야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주의 지도자가 내린 유교 문명에 대한 판결이다.
이 모든 구조적 해악을 지적할 때 언제나 돌아오는 반론이 있다. "그것은 성리학이 타락한 것이지, 유교의 본질이 아니다." 혹은 "주자학은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악용된 것이지, 주희의 원래 뜻이 아니다."
이 반론은 익숙하다. 미얀마의 학살 앞에서 "그건 진정한 불교가 아니다"고 말하는 것과 구조적으로 정확히 같다. 힌두교의 카스트 앞에서 "그건 힌두교의 철학적 깊이와 무관한 사회적 왜곡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어떤 종교도, 어떤 이데올로기도, 자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해악 앞에서 "그건 우리의 진짜 가르침이 아니다"는 면피 발언을 준비해 두고 있다.
그러나 일탈이 이토록 손쉽게, 이토록 대규모로, 이토록 오래 — 500년 동안 — 반복된다면, 그 가능성은 이미 그 시스템의 구조 안에 내재해 있었다는 뜻이다. 성리학은 타락한 것이 아니었다. 성리학은 자신의 논리적 귀결을 착실하게 실현했을 뿐이다. 이(理)를 독점하는 자가 권력을 독점한다는 논리가, 500년 동안 그대로 작동한 결과가 조선의 역사다.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인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은 외부인의 눈으로 이 체제의 결과를 이렇게 기술했다. 박정희가 인용한 그의 말이다.
"외톨이로 떨어져 있게 된 결과 창조의 재능도 국내에 갇히고 훌륭한 사상은 알력의 화근이 되어 싸움과 다툼질의 누룩으로 변해 당파싸움을 일으켜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았다."
— 모리스 쿠랑,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기파랑(2017), p. 67에서 재인용
"훌륭한 사상은 알력의 화근이 되어." 지적 생산물이 진보의 토대가 되는 대신 당파 투쟁의 연료가 되었다는 관찰이다. 이것이 성리학이 우주의 이치를 독점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사상은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가 되고, 논쟁은 진리를 향한 과정이 아니라 상대를 제거하기 위한 무기가 된다.
6. 전세계 각지의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과 제의적(祭儀的) 폭력
아즈텍 제국에서 벌어진 대규모 인신공양은 종교적 폭력의 가장 극단적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태양신 위츠일로포치틀리(Huitzilopochtli)가 매일 피를 먹어야 세상이 유지된다는 신화 아래, 수만 명의 포로와 희생자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심장을 도려내졌다. 그러나 이 제의적 폭력은 아즈텍이나 메소아메리카 문명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특히 토착 신앙(토테미즘, 애니미즘, 샤머니즘, 그리고 다양한 파간(pagan) 전통) 속에서 인간을 신에게 바치는 행위는 반복적으로 나타난 구조적 패턴이다.
켈트족의 드루이드 사제들은 로마 시대 기록과 고고학 증거에서 인신공양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줄리어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기록에서 드루이드들이 거대한 밀짚 인형(wicker man)에 사람들을 가두고 불태워 신에게 바쳤다고 기술했다. 영국 린도우 늪(Lindow Moss)에서 발견된 '린도우 맨'은 목이 졸리고 머리가 맞고 목이 베인 흔적을 가진 고위층 남성으로, 삼중 죽음(threefold death)이라는 켈트 의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희생은 전쟁, 흉작, 또는 로마 침공 같은 위기 상황에서 신들의 호의를 구하거나 공동체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연의 정령과 조상을 숭배하는 애니미즘적 세계관이, 인간 생명을 가장 강력한 제물로 승격시켰다.
지중해 세계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확인된다. 페니키아인과 그들의 식민지 카르타고에서는 바알 하몬(Baal Hammon)과 타니트(Tanit)에게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토펫(tophet)' 유적지에서는 수천 구의 유아 유골이 항아리에 담겨 발견되었으며, 비문에는 부모가 자녀를 신에게 봉헌했음을 뜻하는 페니키아어/푸니크어로 된 제사의식 용어 'mlk'가 새겨져 있다. 위기 상황(전쟁이나 재앙)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침으로써 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공동체의 생존을 확보하려는 논리였다. 애니미즘과 다신교적 세계관에서 신들은 늘 피와 생명의 대가를 요구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인도 아대륙에서는 칼리(Kali) 여신 숭배와 결합한 타기(Thuggee) 집단이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활동했다. 이들은 여행자를 유인해 실크 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으며, 그 행위가 칼리 여신에게 인간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라고 믿었다. 타기들은 자신들을 칼리의 자식으로 여기며, 살인을 통해 여신의 힘을 유지하고 공동체(그들 내부 집단)의 번영을 보장한다고 여겼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 대대적으로 진압되기 전까지 수만 명의 희생자가 이 의식적 살인에 목숨을 잃었다. 힌두교의 일부로 보이지만, 그 본질은 토착적이며 샤머니즘적 요소가 강한 파간 숭배의 연장선에 있었다.
이 패턴은 아프리카의 전통 종교와 샤머니즘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서아프리카의 요루바(Yoruba)나 다른 부족 사회에서 조상 숭배와 오리샤(Orisha)에게 바치는 희생 의식은 동물에서 인간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인간 표범(Human Leopard)'이나 '악어 사회' 같은 비밀 결사체가 의식적 살인과 신체 부위 절취를 통해 영적 힘(Àṣẹ, 아쉐)을 얻으려 했다. 중앙아프리카의 피그미족이나 다른 애니미즘 공동체에서도 질병, 흉작, 또는 지도자 사망 시 인간 희생이 공동체의 균형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샤먼은 영적 세계와 교감하며, 가장 강력한 제물인 인간의 생명을 통해 신이나 조상의 분노를 진정시키거나 미래의 번영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폴리네시아와 하와이의 토착 신앙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와이의 루아키니(heiau) 사원에서는 전쟁의 신 쿠(Ku)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 전쟁 포로나 마을에서 선택된 희생자가 제단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이는 전투 승리, 풍작, 또는 지도자의 마나(Mana, 영적 권능) 강화와 직결되었다. 타히티나 다른 폴리네시아 섬들에서도 전쟁신 '오로(Oro)'에게 인간 희생이 행해졌고, 희생자의 몸은 때로 의식적으로 처리되어 신의 호의를 구하는 도구가 되었다. 자연의 정령, 조상, 그리고 신들이 살아 숨 쉬는 애니미즘 세계에서, 인간 생명은 가장 가치 있는 통화였다.
토테미즘 역시 이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특정 동물이나 사물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사회에서, 토템 동물을 죽이고 먹는 행위는 때로 신성한 희생 의식으로 승화되었다. 로버트슨 스미스가 지적했듯, 토템은 공동체와 신, 그리고 동물 사이의 혈연적 유대를 상징하며, 그 죽음은 신과의 교감(communion)을 이루는 신성한 순간이었다. 애니미즘적 관점에서 모든 것은 영혼을 지니고 있으므로, 희생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의 재균형을 위한 필수 행위로 정당화되었다.
희생의 논리는 종교 전반에 깊이 내재한다. 신(또는 정령, 조상)에게 무언가를 바침으로써 호의와 보호, 힘을 얻는다는 거래 구조다. 그 대상이 처음에는 동물이나 곡식이었으나, 더 강력한 효과를 위해 인간(특히 어린아이, 포로, 또는 사회적 약자)으로 확대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형태는 바뀌었을 뿐 본질은 유지된다. 시간을 바치는 헌신, 쾌락을 포기하는 금욕, 재산을 바치는 헌금, 또는 극단적으로 타인의 생명을 바치는 자살 폭탄 테러까지. 모두 '더 큰 선'이나 '신성한 질서'를 위한 희생이라는 스펙트럼 위에 놓여 있다. 자살 폭탄 테러와 주일 헌금 사이의 구조적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
페이건(Pagan) 전통, 토착 신앙즘, 샤머니즘은 종종 '조화로운 자연 숭배'나 '영적 지혜'로 미화되지만, 역사적·고고학적 증거는 제의적 폭력이 그 세계관의 핵심 메커니즘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살아 있고 영혼을 가진 세계에서, 인간 생명은 가장 강력한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신이나 정령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폭력을 신성한 행위로 승화시키는 이 구조는, 아브라함계 종교의 번제나 이슬람의 지하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결국 문제는 특정 신의 이름이나 문화적 맥락이 아니라, 종교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신성한 거래'와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라는 프레임 자체에 있다. 토착 종교와 페이건 전통 역시 이 프레임에유롭지 않으며, 오히려 그 원형적 형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7. 종교의 공통 구조: 왜 항상 같은 패턴인가
인류 역사에서 수천 개의 종교가 나타났고, 사라졌으며, 또 다시 변형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토록 문화적·지리적·시대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종교들이 결국 거의 동일한 구조적 패턴을 반복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서로 복제라도 하듯이.
이 반복은 우연이 아니다. 종교라는 '형식' 자체가 가진 보편적 구조 때문이며, 그 구조는 인간 심리의 취약점과 권력의 논리를 교묘하게 결합한 결과물이다.
(1). 절대적 진리의 독점 선언
모든 조직화된 종교는 한 가지를 가장 먼저, 가장 강렬하게 주장한다.
"우리가 가진 진리는 절대적이며, 유일하며, 다른 모든 것은 오류거나 불완전하다."
기독교는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고, 이슬람은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لَا إِلٰهَ إِلَّا الله مُحَمَّدٌ رَسُولُ الله)"라고 선언하며, 많은 불교 종파는 자신의 해석만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라고 단언한다. 힌두교의 일부 전통이나 신흥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이 선언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강력한 사회적 경계를 만든다. '진리를 가진 우리(내집단)'와 '진리를 거부하거나 모르는 그들(외집단)'로 인류를 명확히 양분한다. 일단 이 경계가 그어지면, 외집단에 대한 무관심, 경멸, 차별, 심지어 폭력까지도 도덕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그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불쌍하거나, 위험하거나, 구원받아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이다.
(2). 초월적 권위에 의한 모든 행위의 정당화
종교는 인간의 판단을 초월하는 권위를 내세운다. 신의 계시, 카르마의 법칙, 우주의 도(道), 천명(天命) 등.
이 초월적 권위가 등장하는 순간, 도덕적 논쟁 자체가 무효화된다. "왜 이 전쟁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신이 그렇게 명령하셨다"는 답이 나오면, 더 이상 인간적 이성과 윤리로 따질 수 없게 된다. 학살, 정복, 이단 심판, 심지어 테러까지도 '신성한 의무'나 '우주적 정의'로 둔갑한다.
비판 자체가 신성모독이 되는 구조다. 인간의 이성은 유한하고 타락했으며, 감정은 속기 쉽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초월적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는 '오만'이자 '불경'으로 규정된다.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오히려 겸손과 지혜로 포장된다.
(3). 내집단 결속과 이탈에 대한 철저한 처벌
종교 공동체는 내부 결속을 극대화하는 메커니즘을 정교하게 갖추고 있다.
- 입회는 비교적 쉽지만, 탈퇴는 매우 어렵다.
- 의심, 회의(懷疑), 비판적 질문을 하는 순간 '영적 위험'이나 '마귀의 유혹'으로 프레임화된다.
- 이탈자는 파문, 출교, 샤닝(shunning), 가족·사회적 단절, 심지어 물리적 위협까지 당한다.
이 메커니즘은 단순한 규율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한 명의 이탈자가 공동체 전체의 신념 체계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는 이탈자를 '배신자', '타락자', '영혼을 판 자'로 낙인찍으며, 공동체 구성원들이 스스로 그를 배제하고 증오하도록 유도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증오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4). 세대 간 강제적 전수와 조기 세뇌
종교가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을 재생산하는 방법은 바로 '선택'이 아닌 '탄생'을 통해 귀속시키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비판적 사고 능력이 형성되기도 전에, 부모와 공동체로부터 종교적 세계관을 주입받는다. 기도, 의식, 찬송, 경전 암송, 두려움(지옥, 윤회, 저주)과 희망(천국, 구원, 해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그 세계관은 뇌의 신경 회로 자체에 깊이 새겨진다.
성인이 되어 논리와 증거로 그 믿음을 검토하려 할 때, 이미 감정적·신경학적 기반이 너무 단단하게 형성되어 있다. "이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의 일부였다"는 착각이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 때문에 많은 신자들은 자신의 종교를 '문화'나 '정체성'으로 방어하며, 비판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5).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신성화와 권력 독점
거의 모든 주요 종교는 한 명(또는 소수)의 초인적 인물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예수, 무함마드, 붓다, 조로아스터, 공자, 조셉 스미스(Joseph Smith), 문선명(文鮮明), 알라, 각종 구루와 교주들. 그들은 단순한 창시자가 아니라, 신의 대리자, 깨달은 자, 신의 아들, 마지막 예언자, 환생한 존재 등으로 신성화된다.
이 신성화는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 그 인물의 말은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어진다.
- 그 인물에 대한 비판은 곧 신성에 대한 모독이 된다.
- 교리 해석권을 독점한 후계자나 성직자 계급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지도자의 신화화가 완성되는 순간, 추종자들은 더 이상 '이 가르침이 맞는가?'를 묻지 않고, '이 가르침을 어떻게 더 순수하게 따를 것인가?'만을 고민하게 된다. 질문이 사라지고 순종만 남는 구조가 완성된다.
8. 세속 이념도 예외가 아니다
종교를 비판하면 가장 흔하게 돌아오는 반론이 있다. "종교가 없어도 인간은 충분히 폭력적이다. 20세기 전체주의가 그 증거 아닌가?"
이 말은 맞다. 그러나 이 반론은 종교 비판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비판의 깊이를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왜냐하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 그리고 그 밖의 극단적 세속 이념들은 종교를 버렸다고 선언하면서도, 종교의 가장 위험한 구조를 거의 완벽하게 복제했기 때문이다.
(1). 절대적 진리의 세속적 재포장
나치즘은 '인종 과학'과 '아리아인 우월성'이라는 이름으로 절대적 진리를 선언했다. 스탈린주의는 '역사 유물론'과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필연적 종착역을 선포했다. 이 둘 모두 "우리의 진리는 과학이며, 객관적이며,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종교가 '신의 계시'로 진리를 독점했다면, 이들은 '과학'과 '역사의 법칙'이라는 더 세련된 포장으로 동일한 독점을 시도했다.
진리가 절대화되는 순간, 반대 의견은 더 이상 '다른 의견'이 아니라 '반과학', '반역사', '반인류'가 된다. 유대인은 '인종적 오염', 부농은 '역사의 장애물', 반대파는 '객관적 반동'으로 규정되면서 학살의 도덕적 장벽이 제거되었다.
(2).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신격화
히틀러는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민족의 구원자', '역사의 필연', '천년 제국의 건설자'로 신화화되었다. 스탈린은 '인민의 아버지', '천재적인 전략가', '인류의 스승'으로 우상화되었다. 당의 선전은 그들의 초상화를 신처럼 모시게 했고, 그들의 말 한마디는 성스러운 경전이 되었다.
지도자에 대한 비판은 곧 '반민족', '반혁명', '배신'으로 즉각 전환되었다. 종교에서 예수나 무함마드를 건드리는 것이 불경죄이었다면, 여기서는 '총통'이나 '동지 스탈린'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존재 자체에 대한 도전이 되었다.
(3). 이단 사냥과 숙청의 메커니즘
종교의 파문과 이단 심판은 세속 이념에서 '숙청'과 '강제수용소', '재교육', '자아비판'으로 그대로 재현되었다.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와 SS, 소련의 NKVD와 굴라그, 문화대혁명의 홍위병 기타 등등. 이 모든 것이 종교 재판소의 세속적 후계자였다.
한 번 '이단'으로 낙인찍히면, 과거의 공적도, 충성의 증거도 소용없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반역자가 되는 순간, 공동체 전체가 그를 향한 증오와 배제를 경쟁적으로 수행했다. 이 구조는 종교의 '샤닝' 못지않게 더 체계적이고, 더 잔인했으며, 더 효율적이었다.
(4). 세대 간 강제적 세뇌
히틀러 유겐트(Hitlerjugend)와 소련의 피오네르(Пионер), 중국의 중국소년선봉대(中国少年先锋队)는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종교 교육의 세속 버전이었다. 아이들은 아직 도덕적·비판적 판단력이 성숙하기도 전에, '우리 민족의 우월성', '혁명의 필연성',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주입받았다.
교과서, 노래, 행진, 집단 의식, 청년 단체. 이 모든 것이 종교적 의례를 연상시켰다. 이들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뇌를 이념으로 점령하기 위한 체계적 프로그램이었다. 종교가 '원죄'와 '지옥'으로 두려움을 심었다면, 이들은 '계급의 원수'와 '반동분자'라는 새로운 공포를 심었다.
(5). 좌익 리버럴리즘과 워키즘 문화의 종교적 구조
극단적 전체주의만 문제가 아니다. 현대의 좌파적 리버럴리즘, 특히 그 극단 형태인 '워키즘' 담론 역시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 절대적 진리: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젠더", "체계적 억압", "백인 특권" 등은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적 진리로 군림한다.
- 이단 사냥: 캔슬 컬처, 공적 처형, 직장 해고, 소셜 미디어 린치 — 이는 종교적 파문의 디지털 버전이다.
- 도덕적 우월감: "나는 깨달았다(awake)"는 선언은 '구원받은 자'의 언어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 초월적 권위: '역사적 정의', '진보의 방향', '약자의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봉쇄한다.
영미권 리버럴리즘의 핵심 가치(보편적 인권, 평등주의, 피해자 숭배)는 기독교 신학(특히 청교도 전통)의 세속화된 형태라는 점에서 더욱 아이러니하다. 그들은 기독교를 버렸다고 믿지만, 기독교가 가진 구조적 골격(구원 서사, 원죄 개념, 선악 이분법, 이단 심판)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9. 비판의 균등성
종교 비판은 균등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종교는 비판받고, 어떤 종교는 비판에서 보호받는다. 이 불균등함의 이유를 파고들면, 비판을 회피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종교가 만들어낸 문화적 방어막임을 알 수 있다. 신성모독 금지, 문화적 불가침성이 종교를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구조적 비판은 어떤 종교에도 균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비판의 대상이 특정 신자들이 아니라 종교라는 시스템 자체일 때, 그 비판은 편견이 아니라 일관성이다. 불교가 평화의 이미지를 가져도 미얀마의 학살은 직시해야 한다. 힌두교가 깊은 철학적 전통을 가져도 카스트 억압은 직시해야 한다. 이슬람이 서구 제국주의의 피해자이기도 해도 이슬람 극단주의는 직시해야 한다. 기독교가 근대 문명의 토대이기도 해도 십자군과 식민지배는 직시해야 한다.
어떤 종교도 자신의 역사로부터 면제될 수 없다.
10. 종교가 인류에게 한 가장 큰 짓
전쟁과 학살. 이것이 종교가 인류에게 한 가장 큰 해악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해악이 있다.
인간이 자기 삶을 스스로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능력 자체를 빼앗은 것.
종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의 의미와 방향을 미리 지정해놓는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이미 주어져 있다. 인간이 스스로 이 질문들과 씨름할 여지가 없다. 질문 자체가 불경이 되거나, 질문할 능력이 형성되기 전에 답이 주입된다.
이것이 전쟁보다 더 광범위한 해악이다. 전쟁은 시공간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삶의 주체성을 빼앗기는 것은 종교적 문화권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일이다. 신앙을 의심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구조.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하는 것이 배교가 되는 구조. 이 구조 안에서 평생을 사는 인간이 지구 인구의 절대 다수다.
그리고 그 인간들 대부분은 자신이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 구조 안에 있었으니까.
11. 무(無)로의 귀환
모든 주요 종교는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 이슬람의 낙원과 지옥불,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와 환생, 불교의 열반, 유교의 조상 숭배와 내세. 형태와 세부 내용은 천차만별이지만, 핵심 메시지는 하나로 수렴된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왜 인류의 거의 모든 종교가 이토록 일관되게 사후 세계를 주장하는가.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이 평생 가장 견디기 힘든 진실, 바로 의식의 완전한 소멸, 아무것도 없는 무(無)를 직면하는 것이 극도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 공포를 정면으로 해결해주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효과적인 심리적 장치였다. 죽음 뒤에도 계속 '나'가 존재한다는 보장, 선한 삶에 대한 보상과 악한 삶에 대한 처벌이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제공함으로써, 죽음의 절대성을 희석시킨다. 존재의 소멸이라는 차가운 사실을, 따뜻하고 의미 있는 서사로 바꿔준다.
역설적이게도, 종교인들은 종교가 그리는 지옥조차도 '무(無)'보다는 나은 선택으로 느낀다. 지옥은 고통스럽지만, 적어도 '존재'는 계속된다. 고통을 느끼는 '나'가 여전히 있다는 사실 자체가, 완전한 소멸보다는 견디기 쉽다는 것이다. 무(無)는 고통 이전의 문제다.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고통을 느낄 '주체'조차 남아 있지 않다.
종교는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완전한 소멸과 단절이라는 것을.
종교는 이 사후 공포를 단순히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을 강력한 통제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 세상에서 신의 뜻을 거스르면 지옥에 떨어진다."
"업보에 따라 다음 생에서 짐승으로 태어난다."
"구원받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이다."
이런 협박과 약속은 신자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독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종교는, 현세의 도덕과 행동까지도 철저히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이 클수록, 현세에서 종교가 요구하는 순종, 희생, 헌신은 더욱 강력해진다.
궁극적인 무신론은 이 공포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죽으면 끝이다. 의식은 완전히 소멸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보상도, 처벌도, 재회도, 심판도 없다. 그저 빛이 꺼지듯, 모든 것이 끝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생각만으로도 불안과 허무, 실존적 공포를 느낀다. 그런데 바로 그 공포의 강렬함 자체가, 이미 종교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뇌에 심어놓은 조건화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주입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무(無)를 상상하는 것조차 불경하고, 두렵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종교는 죽음의 공포를 해결해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공포를 증폭시키고 영속화시킨다. 무(無)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 인정 자체를 '영적 빈곤'이나 '절망'으로 프레임화한다. 진정한 정신적 자유는,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직시하고도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될지도 모른다.
무(無)로의 귀환. 그것은 종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론이자, 인간이 마침내 자신의 조건을 직시하는 성숙한 순간이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유한한 삶을 보다 솔직하고, 보다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영원한 사후 세계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가장 냉정하면서도 가장 해방적인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12. 결론: 대안 없는 비판의 정직함
이 에세이는 종교를 대체할 무언가를 뚜렷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의도적인 선택이다.
대안을 제시하는 순간 그 대안이 또 다른 절대적 진리의 주장이 될 위험이 있다. 세속적 휴머니즘을 대안으로 제시하면 그것이 또 하나의 이념적 종교가 된다. 어떤 집단적 답을 제시해도 그것이 또 다른 종교의 씨앗이 된다. 이 에세이가 내내 추적해온 패턴이 거기서 다시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가 확인한 것은 하나다. 종교라는 시스템은 그 형태가 무엇이든, 그 교리가 무엇이든 구조적으로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절대적 진리의 주장, 초월적 권위에 의한 정당화, 내집단 강화와 외집단 배타성, 비판의 봉쇄, 삶의 주체성 박탈. 이 패턴을 인식하는 것이 이 에세이가 할 수 있는 거의 전부다.
그 인식이 각자에게 무엇으로 이어질지는 각자의 몫이다. 어떤 집단적 답도 없다. 있다면 그것이 또 다른 종교가 될 것이기 때문에.
빈 캔버스는 결핍이 아니다. 그리고 그 캔버스를 무엇으로 채울지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종교가 인류에게서 오랫동안 빼앗아온 바로 그것이다.
7편에서는 기성종교를 비판하는 이념들(진보주의, 리버럴리즘, 무신론적 좌파)이 어떻게 기성종교의 구조를 반복하는 멍청한 짓을 하는지 추적할 예정이다.
- 참고문헌 -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 종교적 신앙이 합리적 근거가 없는 망상이며 종교 자체가 밈으로서 자기복제하는 구조를 가진다는 논지. 불교를 포함한 비-아브라함계 종교들에 대한 분석도 포함한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God Is Not Great)』 — 아브라함계를 넘어 불교, 힌두교 등 세계 주요 종교들의 역사적 해악을 추적. "종교는 모든 것을 독살한다"는 명제의 범종교적 적용.
대니얼 데닛, 『주문을 깨다(Breaking the Spell)』 — 종교를 자연현상으로 분석. 왜 어떤 종교도 구조적 폐해에서 자유롭지 않은지를 인지과학적으로 설명한다.
파스칼 보이어,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Religion Explained)』 — 종교적 관념이 인간 인지 구조에 달라붙는 메커니즘을 분석. 특정 종교가 아닌 종교 일반의 인지적 기반을 해부한다.
박정희, 『평설 국가와 혁명과 나』, 기파랑(2017) — 조선 역사의 퇴영성과 당파싸움의 구조적 해악, 유교가 민족의 자주적 기개를 좀먹은 과정에 대한 분석.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기파랑(2017) — 조선 유교 체제의 전체주의적 신분 구조, 사문난적 메커니즘, 사대주의의 내면화, 체념과 비판정신 부재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상세한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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