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업, 한국어 번역] 닉 랜드, 암흑계몽주의 제1부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1부: 신반동주의자들(新反動主義者, Neo-reactionaries), 출구를 향해 나아가다


닉 랜드(Nick Land), 2012년 3월 2일 


계몽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자 과정이다. 18세기 북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일컫는 계몽주의는 현대성의 '진정한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개념이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도 후보에 오르지만, 계몽주의만큼 현대의 기원과 핵심을 잘 포착하는 말은 없다. 사실 '계몽'과 '진보적 계몽'은 모호한 한 끗 차이다. 빛이 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며, 계몽은 스스로를 증명하고 확산하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몽이 밝혀낸 진실은 그 자체로 명백하다. 그렇기에 시대를 거스르는 반동적인 '암흑 계몽주의'라는 말은 얼핏 모순처럼 들린다. 이 역사적 맥락에서 계몽된다는 것은 삶을 이끄는 빛을 인식하고, 그 빛을 향해 나아감을 의미한다.


어둠의 시대가 지나고 계몽의 시대가 왔다. 발전은 스스로 그 가치를 증명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아갈 모범을 제시했다. 게다가 계몽은 르네상스와 다르다. 잃어버린 과거를 기억해 낼 필요도 없고, 옛것으로의 회귀가 지닌 매력을 강조할 이유도 없다. 계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역사가 진보의 과정이라는 휘그주의 사관을 받아들이게 된다.


일단 계몽된 진실이 명백하다고 판단되면 다시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보수주의는 필연적으로 모순에 직면할 운명에 처한다.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 부르기를 거부했던 F. A. 하이에크가 '고전적 자유주의자'나 그보다 더 쓸쓸한 표현인 '남겨진 자들' 대신 '올드 휘그'라는 명칭을 선택한 일은 유명하다. 이는 진보가 예전 같지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선택이었다. 반동적 진보주의자가 아니라면 대체 올드 휘그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물론 상당수의 사람은 반동적 모더니즘이 어떤 모습인지 이미 잘 안다고 생각한다. 특히 1930년대와 같은 혼란으로 회귀하는 듯한 지금의 형국에서는 이러한 우려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진보 진영에서 흔히 쓰는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현상을 가리킨다. 현 상황에서 민주주의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는 대중의 예상과 너무나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그 특수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그저 시대착오적인 퇴행이나 불길한 역사의 반복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기존의 틀과는 분명 다른 구석이 있다. 하나의 기점이 된 것은 2009년 4월 자유지상주의 성향의 싱크탱크 '케이토 연구소'에서 열린 토론회였다. 당시 패트리 프리드먼(Patri Friedman)과 피터 틸(Peter Thiel)을 비롯한 자유지상주의 사상가들은 민주주의 정치의 방향과 가능성에 대한 실망감을 이례적일 만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특히 틸은 이러한 흐름을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요약했다. "이제 나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공존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2011년 8월, 마이클 린드(Michael Lind)는 <살롱(Salon)>에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반박하는 을 기고했다. 그는 꽤 지독하고 해묵은 치부를 들춰내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자유지상주의자들과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자유지상주의는 실제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대부분의 자유지상주의자는 두 가치 중 자신이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 이미 명백히 밝혔다. 이제 남은 유일한 문제는, 왜 우리가 더 이상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이다."


린드와 '신반동주의자들'[1]은 민주주의가 단순한 체제를 넘어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 하나의 벡터라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민주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실상 동의어이며, 이는 국가 권력의 비대화와 분리할 수 없다. 극우 성향의 정부가 아주 드물게 이 과정을 잠시 멈추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를 완전히 되돌리는 일은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선거에서 이기는 법은 결국 표를 사는 행위에 가깝고, 사회의 정보 기관인 교육계와 언론 역시 유권자만큼이나 이러한 매수에 취약하다. 따라서 예산을 아끼려는 정치인은 단지 무능한 정치인일 뿐이며, 민주주의식 다윈주의는 이런 부적격자들을 정치 생태계에서 빠르게 솎아낸다. 좌파는 이러한 현실에 환호하고, 기득권 우파는 불만스레 수용하며, 자유지상주의 우파는 무기력하게 반발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남들이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전혀 다른 출구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자유지상주의의 목소리가 묻히는 것은 구조적으로 필연적인 결과이며, 린드의 말대로 그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자유지상주의자가 이 의견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를 지배해 온 루소주의적 맥락에서 '목소리'는 민주주의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 관점은 국가를 대중 의사의 대변자로 보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결국 정치적 참견을 늘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정치적 권력을 쥔 대중의 집단적 자기표현인 투표가 온 세상을 집어삼키는 악몽이라면, 그 소란에 목소리를 보태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세상은 '평등 대 자유'를 넘어 '목소리 대 탈출'이라는 새로운 대립 구도로 나아가고 있으며,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목소리를 내는 대신 소리 없는 도피를 선택하고 있다. 패트리 프리드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자유로운 탈출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유일한 보편적 인권이라 부른다."


극렬한 신반동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단지 파멸할 운명에 처한 체제가 아니라, 파멸 그 자체다. 따라서 민주주의로부터의 탈출은 절대적인 명령에 가깝다. 이러한 반(反)정치의 저변에 흐르는 사상적 조류는 홉스주의와 궤를 같이한다. 이는 대중의 자기표현을 향한 루소식 열정을 처음부터 배제한, 일관되고 일탈 없는 암흑 계몽주의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대중을 본질적으로 울부짖는 비이성적 폭도로 규정하는 이 관점은, 민주화의 역학을 근본적인 퇴행 과정으로 이해한다. 즉 개인의 악덕과 원한, 결핍이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통해 조직적으로 공고해지고 악화되면서, 결국 집단적 범죄와 사회 전반의 부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인과 유권자는 서로를 자극하는 공생 관계다. 이들은 상대방을 부추기며 더 야만적이고 뻔뻔한 폭거로 치닫게 만들고, 끝내 그 소란에 동조해 소리를 지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상황만을 남겨놓는다.


진보적 계몽주의가 정치적 이상을 보는 곳에서 암흑 계몽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본다. 정부 역시 인간이 만드는 조직이며, 그들 또한 배불리 먹으려 들 것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낮춘 암흑 계몽주의의 유일한 목표는 문명이 광기 어린 파멸과 탐욕스러운 방탕으로 치닫는 것만큼은 막는 데 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부터 한스 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에 이르기까지 이 사상적 계보는 한결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바로 '사회를 집어삼키려는 주권(主權) 권력을 어떻게 저지하고 만류할 것인가'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민주주의식 '해법'을 마주할 때마다, 암흑 계몽주의는 그것이 잘해봐야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 유치한 발상임을 거듭 확인해 줄 뿐이다.


호페는 무정부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사법 사회'를 옹호하지만, 군주제와 민주주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는 주저 없이 군주제를 선택한다. 그의 논리는 철저히 홉스주의적 시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세습 독점권자인 왕은 자신의 통치 아래 있는 영토와 백성을 사유 재산으로 여기며, 이 '재산'을 독점적으로 착취한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도 이러한 독점과 독점적 착취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형태만 바뀔 뿐이다. 즉, 국가를 사유 재산으로 여기는 왕과 귀족 대신, 임기가 정해진 교체 가능한 관리인이 국가의 독점적 운영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 관리인은 국가를 소유하지는 않지만, 재임 기간 동안 자신과 추종자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이용할 권한을 갖는다. 그는 국가의 자산 그 자체가 아니라, 재임 중의 이용권, 즉 용익권(用益權)만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착취를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미래의 자산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분별한 착취를 낳는다. 결국 착취는 근시안적으로 변하고, 국가 자산의 고갈이 조직적으로 부추겨질 뿐이다."


다당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한시적인 권력을 쥔 정치 세력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에 직면한다. 바로 가능한 한 가장 빠르고 철저하게 사회를 약탈하려는 충동이다. 이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남겨둔 자산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정치적 후임자에게 고스란히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후임자는 물려받은 자원을 동원해 전임자를 공격하는 데 쓸 것이 분명하다. 결국 남겨진 모든 것은 적의 손에 쥐어질 무기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훔칠 수 없다면 차라리 파괴하는 편이 그들에게는 이롭다.


민주주의 정치인의 관점에서 볼 때, 직접 손에 넣을 수 없거나 자기 정파의 업적으로 포장할 수 없는 사회적 재화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낭비일 뿐이다. 반대로 심각한 사회적 재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 정권의 탓이거나 다음 정권으로 미룰 수만 있다면, 이들의 합리적 계산법 안에서는 명백한 호재로 둔갑한다. 과거 휘그주의적 의미에서 사회적 진보를 구성했던 장기적인 기술 경제적 발전이나 이에 따른 문화적 자산의 축적은, 이제 그 어떤 정치인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번성하는 순간, 문명이 쌓아 올린 이 모든 가치는 당장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나의 과정으로서 문명은 '낮은 시간선호', 즉 현재보다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나 역사적 사실로나 미래보다 현재를 극단적으로 우선시하게 만들며, 끝내 사회를 발작적인 폭식 경쟁으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문명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개념에 가장 가깝다. 당장 야만적인 살육전이나 좀비 아포칼립스 같은 파멸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 결국에는 그와 같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바이러스가 사회 전반을 태워버리면서, 인적·산업적 투자를 가능하게 했던 미래지향적이고 신중한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오직 무의미하고 말초적인 소비주의와 재정적 방종, 그리고 '리얼리티 TV 예능 프로그램' 수준으로 전락한 정치 쇼뿐이다. 내일은 다른 정파의 세상이 될지도 모르니,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편이 낫다는 식이다.


"평균적인 유권자와 5분만 대화를 나눠보면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신반동주의자나 할 법한 말을 남긴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사실 다른 발언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민주주의는 이미 시도된 다른 모든 체제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부 형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 민주주의는 형편없다.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하지만 대안이 없지 않느냐"라고 노골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속뜻은 명백하다.


이러한 정서는 현대 보수주의자들에게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끊임없이 몰락하는 문명을 씁쓸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의 환멸 섞인 태도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파멸적이거나 비현실적인 대안들을 모두 버리고 남은, 매력 없지만 지워버릴 수도 없는 최종적인 사회 제도로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지적 인식과도 공명한다. 이 관점에서 시장 경제는 정치적으로 황폐해진 세상의 폐허 속에서 가까스로 기워 맞춘, 자생적인 생존 전략에 불과하다. 세상은 아마도 영원히 나빠지기만 할 것이다. 원래 다 그런 법이다.


그렇다면 대체 대안은 무엇일까. 물론 그 대안을 찾겠다고 1930년대를 다시 뒤지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반동주의의 절대 권위자인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는 이렇게 반문한다. "21세기 포스트 민주주의 사회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동유럽이 공산주의라는 병에서 회복되었다고 여기듯, 민주주의라는 병으로부터 회복되었다고 자처하는 사회 말이다. 글쎄, 내 생각에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은 우리 중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몰드버그의 사상적 기반은 오스트리아학파 자유지상주의에 닿아 있지만, 이제는 그 단계를 완전히 넘어섰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또 그 승리가 온전히 유지되는 세상에 대한 현실적인 그림을 제시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국가라는 존재가 내리막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비대해지려는 세상을, 억지로 다시 산 위로 밀어 올릴 방법만 찾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전망은 시지프스의 형벌과도 같으며, 왜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그토록 적은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그가 신반동주의로 각성하게 된 계기는 주권이란 결코 제거되거나, 구속되거나, 통제될 수 없다는 (홉스주의적) 인식이었다. 무정부자본주의적 유토피아는 SF 소설 속에서나 존재할 뿐 결코 현실로 응고될 수 없고, 분립된 권력들은 마치 산산조각 났다가도 다시 합쳐지는 터미네이터처럼 결국 하나로 흘러들며, 헌법은 오직 주권을 쥔 해석 권력이 허용하는 만큼만 실제적인 권위를 가질 뿐이다.


국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를 운영하는 자들에게 그 가치는 포기하기엔 너무나도 막대하며, 사회 내에서 주권이 집중되어 발현된 실체인 국가에게 그 어떤 존재도 무언가를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몰드버그는 국가를 없앨 수 없다면, 적어도 민주주의(즉, 조직적이고 퇴행적인 악정)라는 질병만큼은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국가를 '공식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신관방주의(neo-cameralism, 新官房主義)'라 부르는 접근법이다.


"신관방주의자의 관점에서 국가란 한 나라를 소유한 하나의 기업이다. 따라서 국가는 다른 대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합리적으로 경영되어야 한다. 즉, 국가의 논리적 소유권을 매매와 협상이 가능한 주식으로 분할하고, 각각의 주식에 국가가 창출하는 이윤의 정확한 지분만큼 배당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막대한 이윤을 남긴다.) 각 주식은 하나의 의결권을 가지며, 주주들은 이사회를 구성하여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거나 해고한다.


이 기업의 고객은 바로 그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이윤을 극대화하도록 경영되는 신관방주의 국가는 다른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고객에게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이 관점에서 정치의 부패와 실정(失政)은 곧 기업의 경영 부실과 정확히 같은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국가가 시민 전체의 '소유'라는 민주주의적 신화를 완전히 짓밟아버리는 것이 급선무다. 신관방주의의 핵심은 주권 권력의 실질적인 이해관계자들을 돈을 주고 매수하여 정리하는 것이지, 대중의 참정권이라는 감상적인 거짓말을 영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소유권이 실제 지배자들의 손으로 공식 이양되지 않는 한, 신관방주의으로의 전환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권력은 여전히 음지에 머물 것이며, 민주주의라는 저급한 코미디도 계속될 뿐이다.


따라서 두 번째 단계로, 실제 지배계급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식별해야 한다. 여기서 즉각 짚고 넘어갈 점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분석과 달리 이 지배계급이 결코 '자본가 부르주아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논리적으로도 그럴 수가 없다. 비즈니스 계급의 권력은 이미 화폐라는 형태로 명확히 공식화되어 있으므로, 자본을 정치 권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완전히 중복이자 불필요한 분석이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자본가들이 정치적 특혜를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 특혜의 잠재적 가치는 얼마나 되며, 이를 부여할 권한은 어떻게 분배되어 있는가?"


이를 파악하려면 도덕적 거부감을 최소화한 채, 정치적 뇌물 수수(이른바 '로비')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지형 전체를 정밀하게 지도로 그려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뇌물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행정·입법·사법·언론·학계의 특권들을 매매 가능한 주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유권자들 역시 뇌물을 줄 만한 가치(표값)가 있는 한 이 계산에서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들이 가진 주권의 지분은 그에 걸맞은 조롱과 함께 아주 미미하게 책정될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도출되는 최종 결론은 민주주의 정체(政體)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진짜 권력 기구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몰드버그는 이 지배적 실체를 '대성당(The Cathedral, 大聖堂)'[2]이라 부른다.


정치 권력의 공식화가 가져오는 세 번째 결과는, 비로소 효율적인 통치가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적 부패로 얼룩진 세계가 '정부-주식회사(gov-corp)'의 자유롭게 거래 가능한 주식 지분으로 전환되면, 국가의 소유주들은 최고경영자(CEO) 임명을 시작으로 합리적인 기업 지배구조를 가동할 수 있다. 다른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이제 국가의 이해관계는 '장기적인 주주 가치의 극대화'라는 명확한 목표로 공식화된다.


이 시점부터 주민(고객)들은 정치에 그 어떤 관심도 가질 필요가 없다. 아니, 사실 이 체제에서 정치에 관심을 두는 행위는 반쯤 범죄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정부 기업이 세금(주권 임대료)에 걸맞은 만족스러운 가치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주민들은 고객 서비스 부서에 민원을 제기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자산을 챙겨 다른 국가로 떠나면 된다.


정부-주식회사는 더 많은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효율적이고, 매력적이며, 활력 넘치고, 깨끗하고 안전한 나라를 운영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참정권(Voice)은 없다. 오직 자유로운 퇴거(Exit)만이 존재할 뿐이다.


"… 비록 완전한 형태의 신관방주의 접근법이 실제로 실행된 적은 없지만, 역사적으로 이와 가장 유사한 사례를 꼽자면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대표되는 18세기 계몽절대주의(啓蒙絕對主義) 전통, 그리고 홍콩, 싱가포르, 두바이 같은 대영제국의 잃어버린 파편들에서 볼 수 있는 21세기의 비민주주의적 전통이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의미 있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에게 매우 높은 수준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범죄율은 극도로 낮고,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자유의 수준은 매우 높다. 또한 이들은 대개 상당히 번영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이 취약한 부분은 오직 정치적 자유뿐인데, 정부가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기능할 때 정치적 자유란 정의상 아무런 중요성도 가지지 못한다."


고대 유럽의 고전기 그리스·로마 시대에 민주주의는 순환적인 정치 발전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한 단계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퇴행하고 부패하는 성격을 지녔으며, 궁극적으로는 독재와 폭정으로 미끄러지기 직전의 전조 단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고전적 이해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비판적 자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글로벌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는 신뢰할 만한 사회과학적 논증이나 대중의 자발적인 열망으로서 주장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명확히 식별 가능한, 특정한 형태의 종교적 신조로서 강요되고 있다.


"… 내가 '보편주의'라 부르는 이 기성 전통은 사실 신을 믿지 않는 비유신론적 형태의 기독교 파벌이다. 오늘날 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다른 명칭들로는 진보주의, 다문화주의, 자유주의, 인본주의, 좌익 사상, 정치적 올바름 등이 있다. … 보편주의는 칼뱅주의 계보에서 뻗어 나온 현대 기독교의 가장 지배적인 분파로, 영국의 비국교도나 청교도 전통에서 시작해 유니테리언, 초월주의, 그리고 진보주의 운동을 거치며 진화해 왔다.


그 뿌리 깊은 덤불 속에는 기독교적 혈통이 비교적 잘 숨겨져 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몇 가지 곁가지들도 포함되어 있다. 루소주의적 세속주의, 벤담주의적 공리주의, 개혁 유대교, 콩트주의적 실증주의, 독일 관념론, 마르크스주의적 과학적 사회주의, 사르트르주의적 실존주의, 하이데거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바로 그것이다. … 내가 보기에 보편주의는 권력을 숭배하는 신비주의 사이비 종교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 모기 없는 말라리아를 상상할 수 없듯, 국가 없는 보편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핵심은 당신이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이 실체의 역사가 적어도 200년, 길게 보면 500년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종교개혁 그 자체다. … 그러니 그저 이 거대한 존재 앞에 걸어가 '악마'라고 비난하는 짓이 통할 리 없다. 그것은 크툴루 신화의 외계 신인 슈브 니구라스(Shub-Niggurath)를 상대로 소액 재판소에 고소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은 어떤 모습인가. 끊임없이 비대해지는 국가 권력, 타인의 자원을 강제로 징발할 권리로 변질된 가짜 '기본권'의 난립, 정치화된 화폐,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명목 하에 자행되는 무모한 성전(聖戰), 보편주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 촘촘히 짜인 사상 통제, 그리고 정부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한 과학. 이 모든 현상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몰드버그가 던졌던 핵심적인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어떻게 미국 북동부 메사추세츠의 청교도적 진보주의가 전 세계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해가 갈수록 올바른 통치에 대한 국제적 이상은 뉴잉글랜드 대학들의 ‘불만 연구’ 학과들이 세운 기준에 더 가깝고 더 엄격하게 다가서고 있다. 이것은 과거 영국 혁명기 극단적 평등주의자들인 랜터파(Ranters)와 레벨러파(Levelers)가 부르짖던 '신성한 섭리'가 지구적 규모의 목적론으로 격상된 결과이며, '대성당'의 통치가 전 지구적으로 공고해졌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대성당'은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을 자신들의 복음으로 대체해 버렸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표명했던 우려들을 한번 살펴보자. (이 어록들은 한 블로그의 댓글에서 '리버티-클링어(Liberty-clinger)'라는 닉네임의 사용자가 정리해 놓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군중의 지배에 지나지 않는다. 51퍼센트가 나머지 49퍼센트의 권리를 빼앗아갈 수 있는 체제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민주주의란 늑대 두 마리와 양 한 마리가 점심 메뉴를 두고 투표하는 것이다. 자유는 양도 제대로 무장하고 그 투표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립한다!" —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민주주의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이내 스스로 닳아 없어지고, 기진맥진해지고, 끝내 파멸하고만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민주주의는 지금껏 단 하나도 없었다." — 존 애덤스(John Adams)


"우리는 공화정부(Republican Government)다. 진정한 자유는 전제정치에서도, 급진적인 민주주의에서도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순수한 민주주의가 실현 가능하다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정부가 될 것이라는 견해도 존재해 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틀린 주장도 없다는 것이 경험으로 입증되었다. 주민들이 직접 모여 국사를 논했던 고대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좋은 정부로서의 면모를 단 한 가지도 갖추지 못했다. 그 본질 자체가 바로 폭정이었다." —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발로 하는 투표(퇴거의 자유)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 그리고 몰드버그의 눈부신 천재성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글에서 계속 이어진다…


추가 주석 (3월 7일):

위에서 인용한 '벤자민 프랭클린'의 명언은 실제 그가 한 말이 아닐 수 있으니 맹신하지 말 것. 배리 포픽(Barry Popik, 미국의 어원·학술 연구가)에 따르면, 이 문구는 아마도 1992년 제임스 보바드(James Bovard)가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보바드는 다른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정치적 사고(思考)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동일시하는 것만큼 위험한 오류는 거의 없다.")


- 역주 -

[1]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 NRx): 2000년대 후반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필명: Mencius Moldbug)이 블로그 《무조건적 유보(Unqualified Reservations)》를 통해 초석을 다진 극우·반동주의 철학 및 정치 운동. 야빈은 2008년 6월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제 10부: 간단한 주권 파산 절차(An Open Letter to Open-Minded Progressives Chapter X: A Simple Sovereign Bankruptcy Procedure)》에서 ‘neoreactionary’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2012년 닉 랜드(Nick Land)가 《암흑 계몽주의》 에세이를 통해 운동을 대중화하고 가속주의적 요소를 결합해 정립했다.


이들은 평등주의와 민주주의를 인류의 진보가 아니라 ‘사회의 역동성을 마비시키고 쇠락으로 이끄는 재앙’으로 규정하며, 대안으로 건국 초기 미국의 제한적 공화정, 절대군주제, 또는 주식회사처럼 운영되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도시국가를 제시한다. 


‘반동(Reactionary)’이라는 이름은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보편적 이성과 평등 가치에 대한 전면적 거부에서 비롯되며, ‘신(Neo-)’이 붙은 것은 단순한 과거 복고가 아니라,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신관방주의(Neocameralism)·가속주의·블록체인 등 현대적인 사상과 도구들을 활용해 민주주의 체제로부터의 탈출(Exit)과 포스트-자유주의적 미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기술관료주의자들과 피터 틸(Peter Thiel) 같은 투자자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 인사(JD Vance 등)에게 간접적인 지적 영향을 미치며, 미국 ‘신우파(New Right)’의 중요한 사상적 하류 중 하나로 평가된다. 


[2] 대성당(The Cathedral): 신반동주의(NRx) 철학의 창시자 커티스 야빈(Curits Yarvin. 필명: Mencius Moldbug)이 정립하고 닉 랜드가 수용한 핵심 용어로,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실질적인 지적·도덕적 권력을 행사하는 ‘진보주의적 엘리트 지식인 카르텔’을 뜻한다. 주류 학계, 레거시 미디어, 그리고 관료제 집단 및 문화·연예계가 이에 포함된다.


이들이 명확히 중앙에서 조정하는 사람 없이도 자전거 경주의 펠로톤(Peloton)처럼 일제히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며 통합된 세계관인 ‘시놉시스(Synopsis)’를 생산·전파하는 현상을 비유한 것이다.


야빈이 굳이 '대성당'이라는 종교적 명칭을 선택한 이유는, 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세속주의와 평등주의를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세 유럽의 대성당처럼 ‘정통 교리를 생산하고 유포하며, 이단(보수·반동주의)을 심판하는 신권정치적 사제 계급’의 매커니즘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들이 정치적 이권을 사기 위해 로비하는 진짜 대상이자, 대중 선동을 통해 민주 국가의 이념적 정통성과 실제 정책 수립 권한을 독점한 ‘선출되지 않은 진정한 지배 계급’을 꼬집는 신랄한 은유다.


원문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120414125952/http://www.thatsmags.com/shanghai/article/1880/the-dark-enlightenment-par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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