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층 차분한 코스미시즘
한층 차분한 코스미시즘
코스미시즘(cosmicism)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의 작품과 철학에서 주로 정립된 세계관으로, 인간이 우주의 중심적 존재라는 믿음을 부정하는 사상에 가깝다.
이 세계관에서 우주는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무관심하다. 인간의 도덕과 종교와 문명은 우주적 규모에서는 국지적 현상에 불과하며, 인간은 존재 전체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보장받지 않는다. 코스미시즘은 우주를 악의적인 공간으로 묘사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적 가치와 감정에 무심한 거대한 구조로 바라본다.
러브크래프트는 인간이 우주의 진정한 규모와 구조를 완전히 이해할 경우,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붕괴하면서 정신적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의 작품들에서 공포는 단순히 크툴루와 같은 괴물의 위협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의 미미함을 자각하는 순간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코스미시즘은 반드시 단순한 허무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리는 시선이며, 인간 문명과 도덕과 의미를 보다 비인간적 규모 위에서 다시 바라보려는 태도에 가깝다.
인간은 자신이 중심이라고 느끼도록 진화했다.
이것은 오만(傲慢)이라기보다 생존 전략에 가깝다. 자신의 부족, 자신의 도시, 자신의 국가, 자신의 문명이 세계의 중심처럼 느껴져야 협력하고 싸우고 번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명 규모의 부족 사회에서 형성된 정신 구조는 거대한 우주를 상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주변을 세계의 중심으로 축소한다.
그러나 우주는 인간의 본능을 고려하지 않는다.
관측 가능한 우주의 지름은 약 930억 광년이다. 그 안에는 약 2조 개의 은하가 있다. 우리 은하에만 수천억 개의 별이 있고, 그 별들 대부분은 행성을 거느린다. 인간은 그 중 하나의 별 주변을 도는 작은 암석 행성 표면에 얇게 붙어 사는 유기체 집단이다. 인류 문명 전체는 우주적 규모에서 보면 먼지보다도 작은 사건이다.
인간은 천 년을 길다고 느낀다. 그러나 빙하기는 인간 문명보다 오래 지속되었고, 항성은 인간이 세운 제국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인간은 수 세기의 패권을 영원이라 착각하지만, 은하는 수십억 년 동안 서로를 향해 움직인다. 문명은 자신을 세계사의 주인공처럼 묘사하지만, 우주는 그 문명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않는다.
여기서 많은 인간들은 공포를 느낀다.
자신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간 정신에 꽤 치명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다시 배치하려 한다. 종교는 인간을 위해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민족주의는 자신의 민족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묘사한다. 이념은 자신이 역사의 필연적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많은 세속적 세계관조차 인간 진보를 우주의 의미처럼 다룬다.
인간은 우주를 설명하려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중요하다는 확신을 원한다.
그러나 우주는 그 확신을 제공하지 않는다.
초신성은 인간의 도덕과 무관하게 폭발한다. 블랙홀은 정의와 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감마선 폭발은 신자의 도시와 무신론자의 도시를 구별하지 않는다. 별은 인간 문명의 흥망에 침묵하고, 은하는 인간의 역사에 관심이 없다. 인간은 자신의 전쟁을 시대의 전환점이라 부르지만, 우주적 규모에서 그것은 행성 표면의 얇은 생물권 안에서 일어난 소란에 가깝다.
러브크래프트의 코스미시즘은 바로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회의감에서 출발했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우주는 인간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의 가치 체계는 우주적 규모에서는 특권적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 코스미시즘의 핵심은 크툴루와 같은 괴물에 대한 공포만이 아니다.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의 붕괴다.
다만 나는 여기서 러브크래프트와 완전히 같지는 않다.
러브크래프트는 이 인식을 공포로 번역했다. 인간 정신은 우주의 무관심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중심적 착각에서 조금 멀어질수록 더 차분하게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주는 인간에게 목적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목적 없이 살아야 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목적의 규모다. 인간은 자신의 국지적 경험 안에서 살아간다. 친구, 가족, 공동체, 사랑, 호기심, 창작, 쾌락, 생존. 이것들은 우주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별들이 인간의 삶을 중요하다고 인정해야만 삶이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문제를 일으키는 순간은 자신의 국지적 의미를 우주적 진리로 착각하기 시작할 때다.
종교 전쟁은 대개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의 부족 신화를 우주의 절대 질서로 믿기 시작할 때, 인간은 타인을 교정해야 할 오류처럼 보기 시작한다. 이념도 마찬가지다. 특정 시대의 정치적 모델을 역사의 최종 형태로 믿는 순간, 인간은 현실보다 서사를 우선하기 시작한다. 종교 재판도, 혁명기의 숙청도, 제노사이드(genocide)도 결국 자신들이 역사의 필연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던 인간들에 의해 벌어졌다. 인간은 의미 자체보다 의미의 절대화를 더 위험하게 사용해왔다.
우주적 거리감은 여기서 일종의 해독제가 된다.
인간 문명은 영원하지 않다. 국가도 영원하지 않고, 종교도 영원하지 않고, 정치 체제도 영원하지 않다. 인간은 반복해서 자신의 시대를 역사의 정점이라 믿었지만, 거의 언제나 틀렸다. 로마인들도 자신들의 질서가 문명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중세의 신앙인들도 자신들의 세계관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으며, 냉전 이후의 자유주의 세계 역시 역사의 종착점처럼 이야기되었다. 현대인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코스미시즘적 시선에서 보면, 그것들은 모두 일시적 패턴이다.
바람이 모래 위에 남긴 무늬처럼.
인간은 자신의 도덕이 특별하다고 느낀다.
선과 악은 우주 어디에선가 새겨져 있는 질서처럼 여겨진다. 많은 종교와 철학은 그렇게 가르쳐왔다. 인간은 자신의 도덕 체계가 단순한 취향이나 환경 적응의 결과가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항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초신성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며, 블랙홀은 정의(正義)를 고려하지 않는다. 우주에는 인간의 도덕 감각과 연결된 흔적이 없다. 인간이 잔혹함이라 부르는 것과 인간이 숭고함이라 부르는 것은 모두 지구 표면의 한 생물 종 내부에서 형성된 평가 체계다.
이 말은 모든 것이 똑같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여기서 자주 오해한다. 도덕의 초월적 근거를 부정하면, 곧바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뛰어간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협력 없이 살아남지 못했다. 인간의 도덕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생존과 협력 과정에서 형성된 행동 규칙에 가깝다.
공동체를 장기적으로 유지시키는 행동은 선으로 불렸고, 공동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행동은 악으로 불렸다.
위선이 문제가 되는 이유도 결국 여기 있다. 위선은 신의 분노를 사기 때문이 아니라, 신뢰 구조를 침식시키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완전한 선의 위에서 굴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예측 가능성 위에서 굴러간다. 인간은 서로의 내면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반복되는 행동 패턴과 규범을 통해 협력 비용을 낮춘다. 위선은 그 패턴을 흐린다.
착취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은 착취를 도덕적으로 먼저 비난하지만, 구조는 그 이전에 이미 반응한다. 지나친 착취는 협력 구조를 무너뜨리고, 인간 자원을 소모시키며, 공동체의 재생산 능력을 갉아먹는다. 인간은 종종 특정 구조가 오래 지속되면 그것을 자연 질서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역사 대부분은 오래 지속된 구조들의 무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도덕은 절대 명령이라기보다, 붕괴를 조금 늦추기 위해 만들어진 적응 전략에 더 가깝다. 인간은 그것을 신성한 언어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초사회성 동물이 만든 협력 알고리즘에 가깝다.
나는 이것이 인간을 비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우주에는 도덕을 보장하는 초월적 질서가 없는데도, 인간은 스스로 규범을 만들고 협력 구조를 구축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기심과 충동에 흔들리면서도,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협력 체계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자신을 합리적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철학은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했고, 근대 문명은 그 전제를 기반으로 자신을 설계했다. 토론하면 더 나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고,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면 인간은 올바른 판단을 내리며, 제도를 정교하게 만들면 사회는 점점 더 합리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믿음. 계몽주의 이후의 세계는 상당 부분 이 낙관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 행동은 그 신화를 자주 배반한다.
인간은 대부분 논리보다 소속감으로 움직인다. 사실보다 부족을 먼저 선택하고, 진실보다 자기 집단의 언어를 먼저 방어한다. 인간은 정보를 처리하는 존재이기 전에 집단 안에서 생존하도록 진화한 동물이다. 인간의 정신은 거대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나 글로벌 사회를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수십만 년 동안 인간이 살아온 환경은 작고 밀집된 부족 사회였다. 그 환경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 진실보다 빠른 판단이었다.
현대 인간의 뇌는 여전히 그 시대의 유산을 품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독립적으로 사고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집단적 분위기와 감정에 강하게 동기화된다. 인간은 논리를 통해 결론에 도달하는 것보다, 먼저 결론을 정한 뒤 그것을 정당화하는 데 더 능숙하다. 정치적 논쟁 대부분은 진실 탐구가 아니라 부족 의례에 가깝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집단에게 충성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우주적 규모에서 보면 이 모습은 꽤 흥미롭다.
인간은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행동 양식 상당수는 사회성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늑대는 무리를 이루고 영역을 방어하며, 침팬지는 권력 투쟁을 하고, 개미는 집단을 위해 개체를 희생한다. 인간 역시 복잡한 언어와 상징 체계를 가졌을 뿐, 여전히 부족적 본능 위에서 움직인다.
문명은 그 본능 위에 세워진 거대한 임시 구조물이다.
인간은 자주 자신을 자연 바깥의 존재처럼 상상한다. 그러나 인간의 도시도 결국 생태 구조의 일부다. 콘크리트와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거대한 도시조차 에너지 흐름이 멈추면 빠르게 기능을 잃는다. 인터넷 역시 인간은 마치 비물질적 공간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막대한 전력망과 희귀 금속과 해저 케이블 위에 얹혀 있는 물리적 구조다. 인간 문명은 생각보다 훨씬 동물적이고 물질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이 이런 허구를 통해 실제 현실을 조직한다는 것이다.
종교, 국가, 시장, 법률, 인권, 이념. 이것들은 물리 법칙처럼 우주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정신 내부에서 생성된 상징 체계다. 그러나 인간은 그 상징을 통해 수억 명 규모의 협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인간 문명의 위대함은 초월적 진리를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허구를 공유하는 능력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이 만든 허구가 허구라는 점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상징 체계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 법칙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생물도 지나치게 특화되면 멸종에 취약해지듯, 문명도 자신의 구조를 절대화하는 순간부터 경직되기 시작한다. 모든 제국은 자신이 영원할 것처럼 행동했고, 수메르 제국도 사라졌으며, 로마 제국도 사라졌고, 그 외의 수많은 왕조와 국가와 신화들이 시간 속으로 침전되었다.
인터넷은 인간을 더 이성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 본능을 전세계적 규모로 증폭시켰다.
인간은 이제 알고리즘을 통해 부족을 형성한다. 과거에는 같은 마을 사람들이 같은 신화를 공유했다면, 이제는 서로 다른 대륙의 인간들이 같은 분노와 같은 음모론과 같은 정치적 정체성을 공유한다. 기술은 인간을 탈부족화하지 않았다. 더 거대한 디지털 부족들을 만들었을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인간은 우주를 탐사할 정도의 지성을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여전히 부족 사회의 감정 구조 안에서 움직인다. 달 착륙을 가능하게 만든 종(種)이 인터넷 댓글에서 원시적 부족 싸움을 반복한다. 나는 이것이 특별히 실망스럽지는 않다. 인간은 원래 그런 종이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불완전한 존재들이 때때로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협력 구조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구조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라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가깝다. 별이 죽는다고 해서 우주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문명도 그 거대한 흐름 안의 한 순간일 뿐이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가장 거대한 상징 체계 중 하나다.
많은 인간은 종교를 단순한 신앙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종교는 훨씬 더 복합적인 구조다. 그것은 세계관이고, 부족 신호이며, 도덕 체계이고, 죽음 공포를 관리하는 장치이며, 동시에 대규모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 기술이다. 종교는 단지 신을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르는 인간들끼리 같은 질서를 공유하게 만든다.
인간은 의미 없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죽음을 인식하는 종은 필연적으로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자신의 삶이 왜 존재하는지, 왜 고통이 있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설명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우주는 그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종교는 그 침묵 위에 세워진 거대한 서사다.
인간은 자신이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진다고 믿고 싶어한다. 자신들의 도덕이 단순한 생존 전략이 아니라 더 높은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고 싶어한다. 종교는 그 욕망에 구조를 부여했다. 우주는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고, 인간은 그 목적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가지며, 역사는 특정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선과 악은 최종적으로 심판받는다는 이야기.
이 구조는 인간 정신에 강한 안정감을 준다.
혼돈은 견디기 어렵다. 인간은 무작위성을 싫어한다. 이유 없는 고통보다 차라리 신의 시험이 더 견딜 만하다. 아무 의미 없이 죽는 것보다, 더 큰 계획 안의 죽음이라고 믿는 편이 인간 정신에는 안정적이다. 종교는 우주의 침묵을 인간 언어로 번역하는 거대한 심리적 인터페이스에 가깝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이상한 점이 있다.
종교는 초월을 말하지만, 그 초월의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인간 중심적이다.
신은 인간의 도덕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의 성행위와 식습관과 의복과 사고방식을 평가하며, 인간 역사를 중심으로 우주를 설명한다. 거대한 우주를 창조한 존재의 관심사가 특정 종의 행동 규범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주적 규모를 떠올리는 순간 묘한 부조화를 만든다.
관측 가능한 우주에는 약 2조 개의 은하가 있다. 그 어딘가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마냥 낮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도 인간과 같은 원죄를 가지고 있는가. 인간의 구원 서사는 우주 전체를 위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특정 행성의 특정 종 내부에서 만들어진 지역적 이야기인가.
전통적 종교는 이 질문 앞에서 종종 흐릿해진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대부분의 종교 체계는 우주적 규모를 상정하지 않은 시대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인간에게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하늘은 신들의 영역이었고, 별은 인간을 위한 장식처럼 보였으며, 인간 역사는 우주의 중심 사건처럼 느껴졌다. 현대 천문학은 그 감각을 무너뜨렸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인간은 물리적으로 중심에서 밀려났지만, 인간 정신은 여전히 자신을 존재론적 중심에 두고 싶어한다.
죽음을 인식하는 사회적 동물이 우주의 침묵을 견디기 위해서는 거대한 서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영혼을 만들고, 천국을 만들고, 역사의 목적을 만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거짓말이라기보다, 유한성을 견디기 위한 정신적 구조물에 가깝다.
문제는 인간이 그 구조를 절대화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상징 체계는 본래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인간이 상징 체계를 위해 존재하기 시작한다. 종교는 공동체를 조직하는 도구였지만, 점차 공동체보다 신학 체계 자체를 우선시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살아 있는 타인보다 추상적 교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현실보다 서사를 우선하기 시작했다.
우주는 인간의 신학 논쟁에 무관심하다. 별들은 어느 편도 들지 않았고, 은하는 어떤 교리도 승인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코스미시즘은 종교와 충돌한다. 종교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감각을 강화하지만, 코스미시즘은 그 중심 자체를 해체한다. 우주적 거리감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신화를 조금 더 국지적인 것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이 거리감을 종종 허무주의로 오해하지만, 우주가 인간의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자동으로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의미는 객관적 우주 질서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들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다.
인간은 자신의 문명이 안정적이라고 느끼고 싶어한다.
도시는 계속 불을 밝힐 것이고, 인터넷은 언제나 연결될 것이며, 금융 시스템은 유지되고, 식량은 공급되고, 국가는 존속할 것이라는 감각. 현대인은 거대한 인프라 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을 자연 환경처럼 인식한다.
그러나 문명은 자연 법칙이 아니다.
문명은 극도로 복잡한 협력 구조다. 수많은 인간이 서로를 직접 알지 못한 채 신뢰하고, 분업하고, 규칙을 공유하며 가까스로 유지하는 거대한 패턴이다. 에너지 공급, 물류, 신뢰 구조, 정치 질서가 동시에 유지될 때만 가까스로 굴러간다. 이 중 몇 개만 동시에 흔들려도 현대 문명은 빠르게 불안정해진다.
별도 영원히 안정적이지 않다.
항성은 중력과 핵융합 사이의 균형 위에서 잠시 빛난다. 균형이 무너지면 팽창하거나 붕괴한다. 인간 문명 역시 다르지 않다. 복잡성이 증가할수록 유지 비용도 증가한다.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제도와 규칙과 기술을 만들어내지만, 그 구조는 다시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지나치게 복잡해진 구조는 작은 충격에도 연쇄적으로 흔들린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들의 시대만큼은 예외라고 믿는다.
역사는 반복해서 그 착각을 무너뜨렸다. 당대를 살던 인간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무너진다고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세계는 무너졌다. 다만 우주 전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움직였다.
나는 문명의 붕괴를 낭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붕괴는 실제 인간들에게 고통을 준다. 기아와 폭력과 전염병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붕괴를 우주적 신파극처럼 보지도 않는다. 문명은 재편된다. 우주는 그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별은 인간의 몰락을 애도하지 않는다.
많은 종교와 이념은 역사가 특정 결말을 향해 간다고 믿는다. 최후의 심판, 혁명의 완성, 역사의 종착점. 그러나 우주는 목적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은하는 인간 문명을 위해 회전하지 않는다. 문명은 선형적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성과 팽창과 경직과 붕괴와 재편을 반복한다.
그리고 언젠가 인류 문명 전체도 끝날 것이다.
코스미시즘은 여기서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거리감을 제공한다. 인간은 자신의 시대를 우주의 중심 사건처럼 느끼지만, 우주는 그 열기를 식힌다. 그 거리감 속에서 인간은 문명을 신격화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벚꽃이 언젠가 지는 것을 안다고 해서 꽃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별이 죽는다고 해서 별빛이 의미를 잃는 것도 아니다. 유한(有限)은 가치의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끝이 있기 때문에 현재를 더 강하게 인식한다.
문명은 신성한 목적지가 아니다. 잠시 존재하는 구조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흥미롭다.
우주는 침묵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그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신화를 만들고, 신의 목소리를 만들고, 역사의 방향성을 만들었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 묻지만, 우주는 답하지 않는다. 왜 고통이 존재하는지 묻지만, 우주는 침묵한다. 문명이 왜 무너지는지, 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지 묻지만, 우주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침묵을 자주 잔혹함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주는 잔혹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무관심한 것에 가깝다. 태풍은 인간을 증오하지 않는다. 지진은 인간 문명을 의식하지 않는다. 블랙홀은 악의를 가지고 별을 삼키지 않는다. 우주는 인간의 기대를 배려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코스미시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 정신을 흔든다.
많은 인간은 여기서 허무주의로 미끄러진다. 자신이 우주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결론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인간 중심적 사고다. 인간은 의미가 반드시 우주 전체 수준에서 승인되어야 한다고 전제한다. 마치 은하가 자신의 삶을 중요하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삶 전체가 무효가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나는 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경험 안에서 살아간다. 배고픔을 느끼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상실을 경험하고,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공포를 느끼며 하루를 보낸다. 그 경험은 우주의 승인 없이도 실제다. 인간은 종종 의미를 지나치게 거창하게 생각한다. 역사를 바꿔야 하고, 영원히 기억되어야 하며, 우주적 목적에 연결되어야만 가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명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새는 우주의 목적 없이 날고, 늑대는 형이상학 없이 무리를 이루며, 고래는 역사철학 없이 바다를 헤엄친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공허한 것은 아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인간의 비극 상당수는 자신을 지나치게 중심에 놓으려는 데서 나온다. 자신의 부족을 절대화하고, 자신의 이념을 역사 법칙처럼 믿고, 자신의 문명을 세계의 완성형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서로를 죽인다.
우주는 그 전쟁들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수천 년 전 인간들이 벌인 전쟁 대부분은 이미 잊혔다. 한때 세계의 중심처럼 보였던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고, 절대 진리처럼 보였던 교리들은 사라졌으며, 불멸처럼 보였던 권력자들의 이름은 먼지 속으로 침전되었다.
언젠가 현재 인간 문명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주는 계속 움직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절망적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은 일종의 해방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더 이상 거대한 우주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존재 전체의 운명을 짊어질 필요도 없고, 역사의 최종 목적을 완성해야 할 의무도 없다.
인간은 단지 살아 있는 존재다.
그 사실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
냉소주의자는 자주 모든 것을 비웃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모든 이상을 조롱하며, 인간의 선의를 위선으로 환원하고, 결국 아무 의미도 남기지 않는 태도. 인간은 이런 시선을 불편해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회는 어느 정도의 집단적 환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냉소주의를 단순한 조롱으로 보지 않는다.
진짜 냉소주의는 기대가 무너진 뒤에 생긴다. 인간을 지나치게 이상화했던 사람이 현실의 폭력성과 위선을 보고 환멸을 느낄 때, 냉소는 방어 기제로 나타난다. 세상을 믿고 싶었지만 실패한 인간의 태도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스로를 전통적인 의미의 냉소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인간을 그렇게까지 이상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과 악이 뒤섞인 사회적 동물이다. 협력하고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잔혹하고 부족적이다. 문명은 위대한 창조물이지만 동시에 불안정하고 폭력적이다. 이 모순은 인간의 타락이라기보다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구조에 가깝다.
인간은 자신의 시대를 유난히 중요하게 느낀다. 정치적 갈등도, 이념 대립도, 문화 전쟁도 모두 역사의 결정적 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긴 시간 규모에서 보면 인간은 반복해서 비슷한 패턴을 되풀이해왔다. 부족은 이름만 바뀌었고, 신화는 형태만 달라졌으며, 권력 투쟁은 매 시대 새로운 언어로 재포장되었다.
이 침묵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반응을 만든다. 어떤 인간은 허무주의로 기울고, 어떤 인간은 더 광신적으로 의미를 붙잡는다. 나는 오히려 그 확신이 두렵다. 인간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순간 가장 위험해진다. 자신의 폭력을 정의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자신의 잔혹함을 구원이라고 정당화하며, 타인을 제거해야 할 오류처럼 보기 시작한다.
코스미시즘은 그 열기를 식힌다.
우주적 규모 앞에서 인간의 확신은 상대화된다. 인간은 자신의 이념을 영원한 진리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특정 시대와 환경에서 형성된 국지적 사고 체계에 불과할 수 있다. 자신의 문명을 보편 문명처럼 묘사하지만, 언젠가 현재의 가치 체계 역시 과거의 신화들처럼 낡아질 가능성이 높다.
나는 내 생각조차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은 겸손을 가장한 수사가 아니다. 인간 정신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편향과 감정과 집단 심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회의주의(懷疑主義)를 주장하는 인간도 결국 특정 시대와 문화와 생물학적 조건 안에서 사고한다.
일관된 회의주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주의까지 포함한다.
자신의 의심조차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인간은 완전히 중립적인 위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거리감을 늘릴 수는 있다. 자신의 부족으로부터 조금 떨어지고, 자신의 시대정신으로부터 조금 떨어지고, 자신의 문명을 절대적 기준으로 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코스미시즘은 바로 그 거리감을 제공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만든다.
나는 이것이 인간 혐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인간을 신격화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불완전함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은 원래 모순적이고 감정적이며 불완전한 종이다. 그런데도 때때로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서로를 사랑하며, 음악과 예술과 과학을 창조한다. 그것은 우연한 진화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해서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인간이 우주적으로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우주의 중심도 아닌 존재들이, 자신들의 유한성을 인식하면서도 계속 살아가고, 의미를 만들고, 서로를 사랑하며, 문명을 구축한다. 언젠가 모두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만들고 별을 바라본다.
어쩌면 인간의 존엄은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영원해서가 아니다.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살아간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우주는 인간에게 목적을 제공하지 않는다. 역사는 특정 결말을 보장하지 않으며, 문명은 영원하지 않고, 도덕은 우주 바깥 어딘가에 새겨진 절대 명령처럼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인간의 신화 역시 우주 전체의 언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모든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많은 인간은 결국 허무주의를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코스미시즘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지나치게 거대한 의미에 중독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우주 전체 수준에서 승인받기를 원하고, 역사의 방향성과 연결되기를 원하며, 죽음 이후에도 지속될 무언가를 갈망한다. 인간은 의미를 느끼기 위해서 반드시 영원성이 필요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름다운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
노을은 몇 분 만에 사라지고, 계절은 지나가며, 꽃은 떨어지고, 음악은 끝난다. 인간은 바로 그 유한성 때문에 그것들을 아름답게 느낀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랑을 서두르고, 기억하려 하고, 무언가를 남기려 하며, 현재를 붙잡으려 한다. 유한성은 인간에게 불안을 주지만, 동시에 감각의 밀도를 높인다.
의미는 규모에서 오지 않는다.
의미는 관계에서 온다.
인간은 너무 오랫동안 의미를 하늘에서 찾으려 했다. 신의 계획, 역사의 목적, 민족의 운명. 그러나 그런 거대한 서사들은 종종 인간을 현재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인간은 추상적 미래를 위해 현재 인간을 희생했고,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위해 살아 있는 타인을 파괴했다.
나는 거대한 목적론보다 지금 존재하는 삶을 더 신뢰한다.
오늘 먹는 음식, 오늘 나누는 대화, 오늘 바라보는 하늘, 오늘 느끼는 감정. 인간은 자주 이런 것들을 사소하다고 여기지만, 실제 삶은 대부분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배고픔은 실제고, 슬픔도 실제며, 사랑도 실제다. 인간의 감정은 우주적 규모에서는 미세한 현상이지만, 인간 자신에게는 가장 직접적인 현실이다.
코스미시즘은 인간의 자존심을 해체한다.
인간은 우주의 주인공이 아니고, 역사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문명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그 시선은 동시에 인간을 불필요한 중압감에서도 해방시킨다. 인간은 더 이상 우주의 최종 목적을 완성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잠시 살아가는 생물 종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삶은 더 가까워진다.
우주는 인간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우주는 인간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서로를 기억할 수 있다.
언젠가 태양도 차갑게 식고, 지구도 사라지며, 인간이라는 종 자체도 우주 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수십억 년 규모에서 보면 인간 문명 전체는 짧은 섬광에 가깝다.
그러나 짧다고 해서 반드시 하찮은 것은 아니다.
별빛도 언젠가 꺼진다.
그래도 인간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어쩌면,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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