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페의 담론에 NRx가 열광했던 이유 [확장판]
호페의 담론에 NRx가 열광했던 이유 [확장판]
※ 이 글은 이 링크의 글(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bosoo&no=44928)의 내용을 수정하고 더 보충한 글임을 밝힘.
한스 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는 군주제를 사랑해서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Democracy: The God That Failed)》를 쓴 것이 아니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공공 소유물을 해부하다가, 논증의 귀결로서 군주제를 잠깐 끌어들였다. 민주정 정치인은 짧은 임기 안에 최대한 빨리 뜯어먹는 세입자다. 군주는 왕국 전체를 자신의 재산으로 여긴다. 그래서 군주는 먼 후손까지 생각하며 관리하려는 유인을 갖는다. 시간선호의 차이. 그게 핵심이었다. 정치경제학적 인센티브 구조 비교. 학술 논증.
호페 본인은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2001) 서문에서 이를 명확히 밝힌다.
“간단히 말해, 군주제 정부는 이론적으로 사유(私有) 정부로 재구성되며, 이는 정부 통치자가 미래 지향성과 자본 가치 및 경제 계산에 대한 관심을 촉진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민주 정부는 공유(公有) 정부로 재구성되며, 이는 정부 통치자들의 현재 지향성—자본 가치에 대한 무시나 방치를 초래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 따라서 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문명의 쇠퇴로 해석된다.”
- 출처: Hans-Hermann Hoppe, Democracy: The God That Failed, Introduction, p. xix (Transaction Publishers, 2001).
[PDF 링크](https://www.riosmauricio.com/wp-content/uploads/2013/04/Hoppe_Democracy_The_God_That_Failed.pdf)
그리고 그는 단호하게 덧붙인다.
“군주제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묘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군주주의자가 아니며 이하의 내용은 군주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 만약 국가를 가져야 한다면 [...] 경제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민주주의보다 군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출처: Hans-Hermann Hoppe, Democracy: The God That Failed, Introduction, Introduction, p. xx.
(Transaction Publishers, 2001).
호페에게 군주제는 이상향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공유지의 비극’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비교 도구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비교가 퍼지자, 뜻밖의 사람들이 그것을 강하게 물었다.
신반동주의자들은 호페의 글을 단순히 인센티브 모델로 읽지 않았다. 강력한 CEO-군주,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절대적 주권자를 보았다. 민주주의가 썩어가는 현실을 매일 목도하며 ‘강경우파 철권통치’에 목이 말랐던 자들에게, 호페의 문장은 학술 논증이 아니라 날카로운 카타르시스였다. 인센티브 분석은 어느새 정치적 갈망으로, 더 나아가 거의 신화적 선언으로 변모했다.
커티스 야빈(멘시우스 몰드버그)은 호페의 사유재산권 논리를 가장 체계적으로 확장한 인물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대성당(The Cathedral)’이라는 거대한 이념 복합체로 규정하고, 대신 국가를 주식회사처럼 운영하는 신관방주의(neocameralism)과 분산형 소형 주권국가 체제, 이른바 패치워크(Patchwork)를 제안했다.
“패치워크의 기본 아이디어는 [...] 역사에서 물려받은 형편없는 정부들을 부수고, 그 자리에 수만 개에 달하는 주권적이고 독립된 소국들로 이루어진 글로벌 거미줄을 세우는 것이다. 각각은 자체 주식회사 형태의 합동 주식회사에 의해 거주자들의 의견과 무관하게 통치된다. [...] 패치워크 왕국은 하나의 사업체—기업이다. 그 자본은 그것이 주권을 가지는 패치(영토) 그 자체다. [...] 설계의 핵심은 ‘퇴거(exit)’이지 ‘참정권(voice)’이 아니다.”
- 출처: Mencius Moldbug, “Patchwork: A Positive Vision, Part 1”, Unqualified Reservations (2008).
[링크](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08/11/patchwork-positive-vision-part-1/)
야빈에게 이상적인 통치자는 호페가 말한 ‘장기 소유자’를 극단적으로 구현한 CEO-군주였다. 민주주의의 단기 착취를 끝내기 위해 국가를 주식회사로 만들고 주권자를 실질적 절대권력자로 삼는 구조. 호페의 학술적 비교는 여기서 정치적·기술적 청사진으로 재탄생했다.
야빈은 호페의 영향을 가장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는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를 극찬한다.
"미제스주의자가 자유지상주의를 넘어서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의 이름은 한스-헤르만 호페다. 호페 교수의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는 내가 읽은 최고의 반(反)-민주주의 논고 중 하나이며, 확실히 최초의 것이었다. [...] 호페 교수는 미제스는 아닐지 몰라도, 어쩌면 로스바드도 아닐 수 있지만, 로스바드 사후 로스바드주의 학자 중에서는 단연 최고다."
- 출처: Mencius Moldbug, “From Mises to Carlyle: My Sick Journey to the Dark Side”, Unqualified Reservations (2010). [링크: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10/02/from-mises-to-carlyle-my-sick-journey/]
그러나 몰드버그는 호페가 군주제를 “만약 국가를 가져야 한다면”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비교한 점, 그리고 여전히 무정부 자본주의(경쟁적 보호기관)로 되돌아가는 한계를 비판한다.야빈은 일단 이렇게 말한다.
"뉴턴적 범위 안에 머물기 위해, 호페 교수는 자유지상주의적 위장 전략의 우아한 이중 회전 점프를 구사한다"
- 출처: Mencius Moldbug, “From Mises to Carlyle: My Sick Journey to the Dark Side”, Unqualified Reservations (2010).
야빈은 다음과 같은 호페의 어록을 인용한다.
"군주제를 비교적 유리하게 묘사하긴 했지만, 나는 군주주의자가 아니며 아래의 내용도 군주제에 대한 변호가 아니다. 대신 군주제에 대해 취하는 입장은 이러하다: 만약 국가를 가져야만 한다면—국가를 최종적 결정(관할권)과 과세에 대한 강제적이고 영토적인 독점 기관으로 정의할 때—민주주의보다 군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유리하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과연 필요한지, 즉 군주제와 민주주의 둘 다의 대안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열어둔 채로 남긴다. 역사 역시 이 질문에 답을 줄 수 없다."
출처: Hans-Hermann Hoppe, Democracy: The God That Failed, Introduction, p. xx (Transaction Publishers, 2001).
호페를 인용한 이후 야빈은 시니컬하게 호페와 자유지상주의 전반을 비판한다.
"역사는 또한 해왕성에 파란 용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도 답을 줄 수 없다—지금까지 단 한 마리도 관측되지 않았다는 것만 알 뿐이다.
역사는 또한 우리 종이 지난 약 5,600만 년 동안—즉 최초의 나무쥐가 최초의 나뭇가지에 오줌을 싼 이래로—지리적 주권 독점을 기반으로 운영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쩌면 침팬지 몇 마리를 고용해서 복수의 중첩된 보호 기관을 실험하게 하고, 결과를 알려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해왕성의 파란 용을 고용하거나.
다시 한번, 우리는 순수한 혼돈의 독소인 아나키즘이 우파 쪽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목격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우파를 더 효과적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덜 효과적으로 만드는가? 아나키스트 우파가 비아나키스트 우파보다 더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가, 낮은가? 일단 집권하면 더 잘할 것인가, 못할 것인가?
글쎄, 좌파적 우파—즉 좌파의 무기를 휘두르도록 타락한 우파—의 역사를 일반화한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히틀러다. 좌파적 색채를 띤 우파가 바로 파시즘이다. 그리고 쉽게 그렇게 알아볼 수 있다. 파시즘은 2010년에도 적이 없지 않다. 따라서 (a) 그것은 아마도 작동하지 않으며, (b) 만약 작동한다면… 히틀러를 만들어낸다.
물론, 약간의 아나키즘이 호페 교수를 히틀러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하는 일은 그를 훨씬 덜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 기이한 아인슈타인적 영역, 즉 왕정주의를 탐험하기 위해 범위 밖으로 나가는 것을 완전히 막아버린다. 대신, 그는 로스바드의 해왕성 파란 용—경쟁하는 보호 기관들—으로 후퇴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도, 그 밖의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순진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훌륭한 교육 기관들에 의해 철저히 교육받아, 강경한 미제스주의적 자유지상주의에 도달했을 때 나는 기묘하게도 마호메트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공식적 현실로부터 반쯤 빠져나온 상태. 상체는 거대한 거짓의 그물에서 완전히 빠져나왔지만, 엉덩이는 여전히 걸려 있었다.
나는 제다이 평의회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직 유일한 대안을 보지 못했다: 시스의 옛 방식으로의 귀환. 어둠 속에서 모든 길은 어둡다! 그래도 걸어야 한다. 어둡다; 그리고 밝아지지 않는다.
나는 자유지상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나는 자유지상주의를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보았다. 나의 상상 속 미래에서, 자유지상주의의 명백히 올바른 이념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대중의 마음에 퍼져나갈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 거기에 머물 것이었다. 그들은 자유지상주의 정치인들을 선출할 것이었고, 그때도 영원히. 그 정치인들은 자유지상주의적으로 통치할 것이었다—적절한 부사(副詞)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실제로 이 생각들을 명시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명시적으로 했다면, 그것들의 수성(水性)이 명백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암묵적으로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나는 민주주의적 자유지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민주주의를 재고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일단 민주주의를 재고하자, 자유지상주의의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의존성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주의 없이, 우리는 자유지상주의를 그 자체로 필요로 하는가? 우리가 그것을 생각해내기나 했을까?
자유지상주의는 정부를 위한 공식이다. 우리가 보았듯, 그러한 공식이라는 개념 자체에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다. 미제스는 비(非)자유지상주의적 정부 공식들을 꽤 성공적으로 신뢰성을 떨어뜨렸지만, 그는 어떤 공식에 의한 정부도—자유지상주의적 공식을 포함하여—실용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더욱이, 공식에 의한 정부라는 명제 전체가 단 하나의 목표에 의해 동기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에 의해 집행될 수 있는 정부 체계를 설계해야 한다는 필요성. 따라서 자유지상주의는 정부의 방법이자, 그 방법을 부과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방법은 이러하다: 최소한으로 통치하라(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든). 수단은 이러하다: 최소 정부의 필요성을 유권자들에게 납득시키고, 그들이 그렇게 납득된 상태를 유지하도록 보장하라. 흠.
문제를 보는 또 다른 방법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구호—제한 정부—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제, 내 안의 좌절한 영어 교사는 이 구절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을 주목한다: 그것은 수동태다. 누가 정부를 제한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다른 당사자가 이 제한을 행한다면, 누가 그들을 제한할 것인가? 이것은 물론, 오래된 '감시자를 누가 감시하는가'의 문제다. 로스바드도 유베날리스보다 나은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답변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민주주의적 자유지상주의자라면, 정부는 인민 주권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당신은 또한 지난 200년 동안 창문 밖을 내다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당신이 사법적 자유지상주의자라면, 정부는 사법 주권—즉 헌법 원리와 앵글로-아메리칸 보통법에 헌신하는 사법부—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당신은 지난 75년 동안 창문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민주주의적 그리고 사법적 자유지상주의 모두의 본질적인 문제는, 역사 속에서 이 두 현상이 성공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것들은—다시 한번—오직 좌파 편에서만 성공한다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역사는 로스바드가 보여줄 수 있듯, 국가 권위에 대한 민중 저항과 사법적 저항 모두의 풍부한 보고다. 그러나 이 저항은 어떤 더 높은 질서—왕실이든 귀족이든—를 약화시키는 과정에 있을 때만 성공한다. 일단 인민 스스로가 안장에 앉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이런 형태의 불평을 듣지 않는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유지상주의적 정부를 위해 유권자나 사법부에 요청하는 것은 권한을 가진 기관에게 그것이 가진 권한을 포기하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인민은 X, Y, Z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권한을 사용해 A, B, C 정부 서비스에 투표한다; 만약 이 서비스들을 제거한다면, 권한을 제거해야 한다; 권한을 제거하면, 권한을 박탈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판사에 의한 정부의 황금기에 살고 있다. 현대 정부 체계의 대부분의 중요한 행정적 결정들은 어떤 식으로든 판사의 품에 안기게 된다. 이것은 뉴딜 법적 현실주의 법학의 직접적인 결과다. 그런데 당신은 사법부 스스로에게, 순전히 선의로, 이 살찐 햄 다리를 포기하라고 요청하는 것인가? 당신과 무슨 군대가?
반면, 코크 같은 사람이 찰스 1세 같은 사람과 사법적으로 다퉜을 때, 사법적으로 제한된 정부는 자명한 것이었다. 아아, 판사들도 인간이다. 만약 이 행성에 천사들이 있었다면, 우리는 오래전에 이 임무를 그들에게 맡겼을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번: 자유지상주의는 좌파를 위해서는 작동하고 우파를 위해서는 실패한다. 주권적 유권자와 주권적 사법부 모두 타인들—즉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데는 완전히 행복하다. 그들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민주주의가 앙시앵 레짐의 잔재들과 경쟁할 때, 그것은 제한 정부를 위한 힘이다. 일단 이 잔재들을 패배시키고 무력화하면, 그것은 사회주의의 동의어가 된다."
출처: Mencius Moldbug, “From Mises to Carlyle: My Sick Journey to the Dark Side”, Unqualified Reservations (2010).
그리고 이이서 야빈은 오스트리아학파를 넘어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군주제를 지지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포스트-미제스주의자로서, 나는 세 번째 부류의 자유지상주의자다: 군주주의적 자유지상주의자. 즉, 군주주의자. 호페 교수가 감히 밟으려 하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며, 나는 좋은 왕을 찾는 문제에 착수한다. 그리고 그를 권좌에 앉히는 것—그리고 그가 거기에 머물도록 확인하는 것. 왕정주의자로서, 나는 좋은 왕이 자유지상주의적 정책을 추구할 것이라 당연시한다—물론 그것들이 요구된다면.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호페를 읽은 것에 대한 나의 반응은, 따라서, 즉시 나가서 반민주주의에 관한 다른 저작들을—자유지상주의적이든 아니든—도서관에서 샅샅이 뒤지는 것이었다. 나는 이 저작들이 내 상식을 위반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에, 유황 냄새에 대비했다. 꽤 많이 발견했다. 실제로 꽤 많이 있다—비록 1945년 이후에는 드물지만. 일반적으로, 반민주주의 논고는 오래될수록 더 좋다, 비록 빅토리아 시대 전성기가 빛나는 예외이긴 하지만.
그래서 나는 칼라일을 발견했다. 실로 유황 냄새가 나는. 그는 유황 냄새 나는 세상에서 자신이 보는 것을 말한다. 그 세상은—그가 예언하고 실제로 그렇게 된 것처럼—훨씬 더 유황 냄새가 짙어질 것이었다. 일단 칼라일이 당신에게 악마를 보여주면, 당신은 그의 존재를 오래 의식하지 못한 채 있을 수 없다!
미제스주의자들을 위한 간단한 칼라일식 수수께끼가 있다. 다음 질문들에 답하라:
당신은 도시에 사는가? 아니라면, 왜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그 도시 어디서나, 하루 중 어느 시간에나 안전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가?
만약 아니라면, 어떤 권위가 당신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가?
당신의 답변은 다음 중 하나를 드러낼 것이다: (a) 당신이 사는 행성이 우리가 아는 지구가 아니거나, (b) 당신의 자연권이 가장 직접적이고 현저하게 위협받는 것은 공식적인 세력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세력에 의해서라는 것. 즉: 경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범죄자들에 의해서. 뻔한 소리다.
[...]
따라서, 자유지상주의자가 자신의 사회에서 자연권을 지지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범죄에 대한 강경한 경찰 탄압을 지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 시대 법 집행 체계의 기준과 관행을 재도입함으로써—분명히 이용 가능하고 실용적인.
불가피하게 몇 가지 실수가 있을 것이다; 몇몇 무고한 머리가 깨질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자유지상주의적 권리를 행사하는 자유지상주의자로서, 당신의 목표는 미국에서의 자연권 침해 수를 최소화하는 것이다—누가 그것을 저지르든, 어떤 제복을 입고 있든. 따라서, 당신은 일반적으로 범죄자들에 맞서 경찰을 지지해야 한다. 전자는 사고나 비리로만 자연권을 침해하지만, 후자는 통상적인 절차의 문제로 그렇게 한다. 실제로, 누가 경찰이고 누가 범죄자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반동주의자 에리크 리터 폰 퀴넬트레딘(그런데, 그는 호페 교수 이후에 읽기 좋다; 적어도, 미제스 연구소가 그의 책들을 소장하고 있으니, 그들이 승인해야 한다)에 의해 처음 대중화된 이 공식, '우파는 옳고 좌파는 그르다'를 접할 때, 큰 주의가 필요하다.
그렇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우파는 옳고 좌파는 그르다. 그러나 순수한 것만. 우파, 순수한 우파는 옳고 좌파는 그르다. 그 두 가지의 어떤 혼합에 대해서는—오직 악마만이 안다. 20세기의 두 위대한 전체주의적 폭정은 모두 우파와 좌파, 질서와 혼돈의 혼합이다—두 요소 모두 두드러지게. 만약 단순한 무정부 상태 하나보다 더 악마적인 것이 가능하다면, 이 혼합물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출처: Mencius Moldbug, “From Mises to Carlyle: My Sick Journey to the Dark Side”, Unqualified Reservations (2010).
야빈에게 호페는 자유지상주의를 넘어서는 결정적인 계단이었지만, 여전히 “경쟁적 보호기관” 담론에 머무르는 한계를 가진 사상가였다. 반면 야빈 자신은 그 너머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질적인 CEO-군주가 강력한 주권을 행사하는 모델을 적극적으로 탐구한다. 즉 호페의 사적 소유 정부 논증은 몰드버그의 패치워크와 CEO-군주 개념에서 결정적인 도약판이 되었으나, 몰드버그는 호페보다 더 과감하게 “강한 주권자”를 현실적인 정치적 처방으로 삼았다.
NRx 블로그스피어가 호페를 자신들 입맛에 맞게 인용하는 이 구조를 이해하려면 잠깐 다른 곳을 봐야 한다.
우마무스메, 페이트 그랜드 오더, 블루아카이브, 니케: 승리의 여신, 트릭컬 리바이브, 젠레스 존 제로, 명일방주:엔드필드 등등. 남초(男超) 서브컬쳐 문화의 핵심 거점들이다. 이쪽 커뮤니티를 조금이라도 모니터링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무작정 캐릭터의 외견만 보고 소비한다'라는 표현이 이쪽 문화를 얼마나 단편적으로 묘사하는지를.
물론 특정 캐릭터의 디자인, 전투 성능, 서비스신에 집착하는 건 사실이다. 수많은 팬아트가 돌아다니고, 캐릭터 출시 때마다 과금을 하겠다는 소리가 넘친다. 그러나 동시에 이쪽 유저들은 공식 스토리를 줄줄이 외우고, 세계관 설정 충돌을 지적하며, 메인 스토리 작가의 필력 부족을 신랄하게 비판하곤 한다. 이벤트 스토리에서 캐릭터의 성장 궤적에 진심으로 감정 이입하고, "이 세계관이라면 이 캐릭터는 이렇게 행동해야 맞다"며 대안 서사를 고민한다. 공식이 세계관 논리를 어기는 분탕 행위(트롤링)를 하면 "스토리팀을 갈아엎어라"라는 소리가 나오는 게 남초 서브컬쳐 커뮤니티다. 스토리 파괴, 억지 관계성 덧씌우기는 오히려 다른 쪽에서 더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결정적 순간, 남성 오타쿠들의 에너지는 특정 캐릭터에게로 몰린다. 강하고 아름다우며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는 캐릭터들. 복잡한 관계망과 장기 서사는 그 캐릭터의 매력을 뒷받침하는 배경으로만 기능한다. 작가가 의도한 '전체 구조와 인센티브'는 선택적으로 소비되거나, 특정 요소만 극도로 증폭된다. 스토리 전체를 꿰고 있으면서도, 결국 가장 강렬하게 끌리는 하나에 에너지가 집중된다. 그게 이쪽 소비 방식의 실제 구조다.
호페의 텍스트를 대하는 신반동주의(NRx) 커뮤니티의 태도가 정확히 이와 닮았다.
호페가 그린 복잡한 정치경제학적 관계망——시간선호, 재산권, 장기 대 단기 인센티브, 계약 공동체의 미세한 균형——은 배경으로 밀려났다. 대신 '강력한 군주'라는 하나의 강렬한 요소가 전면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호페를 '우리 편'으로 끌어당기며, 민주주의 비판의 날카로움만을 극대화하고 군주제의 유혹적인 이미지를 과잉 소비했다. 세계관은 챙기면서 결국 에너지는 압도적 존재감의 캐릭터에게로 수렴하는 것처럼, 신반동주의 커뮤니티는 호페의 논증 구조는 어느 정도 파악하면서도 결국 '강한 주권자'라는 하나의 상(像)에 모든 열망을 투사했다.
이를 단순히 오독이라고만 보면 절반도 이해 못 한 것이다.
NRx 블로그스피어가 호페의 군주제 발언을 체리피킹한 것처럼, 물리적 제거(physical removal) 개념도 같은 왜곡을 겪었다.
호페에게 그것은 소유자의 권리 행사였다. 계약 공동체 안에서 규칙을 파괴하는 자를 내쫓는 축출. 폭력이 아니라 재산권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호페는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에서 이렇게 썼다.
"[...] 현대 복지 국가는 사유 재산 개념에 내포된 배제 권리를 상당 부분 박탈해왔다. 차별은 불법화되었고, 고용주는 원하는 사람을 고용할 수 없으며, 집주인은 원하는 사람에게 임대할 수 없고, 판매자는 원하는 사람에게 물건을 팔 수 없으며, 구매자는 원하는 사람에게서 물건을 살 수 없다. 사유 재산 소유자들이 상호 이익이 된다고 믿는 제한적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국가는 개인과 물리적 보호의 상당 부분을 빼앗았다. 타인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복지 국가 하에서 사유 재산권이 약화된 결과는 강제적 통합이다. 강제적 통합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미국인들은 원하지 않는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하며, 교사는 형편없거나 무례한 학생을 내보낼 수 없고, 고용주는 부적절하거나 파괴적인 직원과 함께 일해야 하며, 집주인은 불량 세입자와 함께 살아야 하며, 은행과 보험회사는 위험성이 높은 거래를 피할 수 없고, 식당과 술집은 원치 않는 손님을 받아들여야 하며, 사적인 클럽과 계약은 그들의 규칙과 제한을 위반하는 회원과 행동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욱이 공공, 즉 정부 소유의 재산에서 특히 강제적 통합은 위험한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이는 무질서와 불법을 일반적 규범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재산에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재산 소유자가 재산 가치를 떨어뜨리는 "나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는 수단이다. 자유롭게 배제할 권리가 허용되지 않으면, 무례하고 게으르며 신뢰할 수 없거나 형편없는 학생, 직원, 고객 등의 나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증가하고 재산 가치는 하락하게 된다. 사실, 모든 차별 금지 정책의 결과인 강제적 통합은 나쁜 행동과 인성을 조장한다. 문명 사회에서 나쁜 행동에 대한 궁극적 대가는 추방이다. 모든 면에서 무례하거나 부패한 인물들은(비록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어디에서나 모두에게 빠르게 추방당해 문명으로부터 물리적으로 제거되는 추방자가 된다. 이는 큰 대가를 수반하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의 빈도는 줄어든다. 반면, 자신이 원치 않는 사람들을 재산에서 추방할 수 없을 때, 나쁜 행동, 부적절한 행동, 부패한 인물들은 오히려 조장되며(그 비용이 감소하게 된다), 이들은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무능함을 드러내는 모든 분야에서 불쾌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벌일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부류의 행동과 인물들이 증가하게 된다. 강제적 통합의 결과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모든 사회적 관계, 사적이든 사업적이든 간에, 점점 더 평등주의적으로 변하고(모두가 서로 이름을 부르며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등), 비문명화되었다.
이에 명확히 대조되는 사회는 사유 재산 소유자의 배제 권리가 완전히 회복된 사회로, 이 사회는 심각하게 불평등하고, 관용적이지 않으며, 차별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좌파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관용"과 "개방성"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을 것이다. 대신 사유 재산 제도에 내포된 결사와 배제의 자유를 회복하는 올바른 길을 가게 될 것이며, 이는 단지 마을과 도시들이 19세기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당연하게 행했던 것들을 다시 할 수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마을 입구에는 입장 조건이 명시된 표지판이 있을 것이고, 마을 안에서는 특정 재산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거지, 노숙자, 부랑자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약물 사용자, 유대인, 무슬림, 독일인, 줄루족은 입장 금지).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불법 침입자로 간주되어 추방될 것이다. 거의 즉시, 문화적·도덕적 정상성이 다시 확립될 것이다.
좌파 자유지상주의자들과 다문화적 또는 반문화적 생활 방식을 실험하는 사람들은, 비록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다시 한 번 그들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행동이나 생활 방식을 계속 고수한다면, 문명 사회에서 배제되어 격리된 채로, 게토나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게 될 것이며, 많은 직위나 직업은 그들에게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반면, 그들이 사회 내에서 살고 발전하고자 한다면, 그들이 진입하고자 하는 사회의 도덕적·문화적 규범에 맞춰 적응하고 동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동화가 반드시 그들의 열등하거나 비정상적인 행동이나 생활 방식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공장소에서 그들의 대안적 행동이나 생활 방식을 드러내고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사적인 영역, 즉 자신의 집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공공의 시선에서 숨겨져야 한다. 이를 광고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드러낸다면 추방될 것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보수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좌파 자유지상주의자들과 달리, 사유 재산권이 가정과 토지 소유자들에게 완전히 회복된 자유지상주의 사회에서는 차별(배제, 추방)이 급격히 증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강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이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사유 재산 무정부주의(또는 순수한 사법 사회)를 목표로 한다면 엄격한 차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차별이 없으면 자유지상주의 사회는 빠르게 약화되고 복지 국가적 사회주의로 전락할 것이다. 모든 사회 질서, 자유지상주의적이든 보수주의적이든, 자율적 집행 메커니즘을 필요로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 질서는 기계적 또는 생물학적 시스템과 달리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붕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식적 노력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자유지상주의의 표준적인 공동체 모델은, 물리적으로 서로 분리되고 고립된 상태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소유된 인접한 땅에서 이웃으로서 서로 연대하며 사는 개인들의 모델이다. 그러나 이 모델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 사람들이 고립보다 이웃을 선택하는 이유는, 노동 분업에 참여하고 그 혜택을 누리는 개인들에게 이웃이 거래 비용을 줄여주는 추가적인 이점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웃은 교환을 촉진한다. 그 결과, 개별적으로 소유된 땅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이 소유한 인접한 땅의 존재로 인해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일 수 있고, 고립보다 이웃을 선택할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이웃 관계는 위험을 동반할 수 있으며, 재산 가치를 증가시키기보다는 하락시킬 수 있다. 이 모델에 따라 처음에는 인접한 재산의 설정이 상호 유익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리고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범죄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추가로 가정하더라도, 이전에 "좋았던" 이웃이 불쾌하게 변하거나,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지 않거나, 다른 공동체 구성원의 재산 가치를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재산을 변경할 수도 있으며, 또는 공동체 전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협력적 노력에 참여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누어진 소유권 아래에서의 공동체 개발의 내재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실제로 이웃과 공동체의 형성은 앞서 언급한 모델에서 제안된 방식과는 다른 경로를 통해 진행되었다.
따라서, 여러 개의 개별적으로 소유된 인접한 토지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이웃들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소유주가 설립하고 소유한 독점적 또는 계약적 공동체로 구성되었으며, 이 소유주는 특정 조건 하에 선택된 개인들에게 땅의 일부를 "임대"했다. 원래 이러한 계약들은 친족 관계를 기반으로 했으며, 소유주의 역할은 가족이나 씨족의 우두머리가 수행했다. 다시 말해, 단일 가정 내에서 가족 구성원의 행동이 가정의 가장이자 소유주에 의해 조정되듯이, 인접한 가정 집단의 토지 사용을 지시하고 조정하는 역할은 전통적으로 확대된 친족 집단의 우두머리가 수행했다. 현대에는 인구 증가와 친족 관계의 중요성 상실로 특징지어지며, 이러한 원래의 자유지상주의적 독점 공동체 모델은 쇼핑몰과 폐쇄형 주거단지와 같은 새로운 발전 형태로 대체되었다. 쇼핑 센터와 폐쇄형 주거 커뮤니티는 개인이나 사기업이 소유하며, 커뮤니티 소유주와 임차인 또는 거주자 간의 관계는 순전히 계약적이다. 소유주는 사람들이 거주하거나 사업을 영위하기를 원하는 주거 및/또는 비즈니스 커뮤니티를 개발하고 관리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가이다. 스펜서 맥컬럼이 설명하듯이,
소유주는 커뮤니티 토지 재고의 가치를 주로 세 가지 기능적 요구 사항을 충족함으로써 높인다. 이 세 가지는 소유주만이 충분히 이행할 수 있는 것으로, 회원 선정, 토지 계획, 그리고 리더십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기능, 즉 회원 선정과 토지 계획은 소유주가 토지 사용권을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제공할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세 번째 기능인 리더십은 소유주의 자연스러운 책임이자 특별한 기회로, 그의 관심은 특정 이익 집단이 아니라 전체 커뮤니티의 성공에만 있기 때문이다. 토지를 배정함으로써 그는 세입자 유형과 그들의 공간적 배치를 결정하고, 따라서 커뮤니티의 경제적 구조를 형성한다. 리더십은 또한 세입자 간의 분쟁 중재, 공동 노력에 대한 안내와 참여도 포함된다. 사실, 근본적으로 커뮤니티의 안전은 소유주의 부동산 기능의 일부이다. 소유주는 토지 계획 하에 모든 건축의 설계를 안전 측면에서 감독하며, 다른 구성원들과의 적합성과 상호 보완성을 고려하여 세입자를 선택하고, 세입자 간에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을 사전에 예상하여 이를 방지하는 조항을 임대 계약에 포함시킨다. 그의 비공식적인 중재와 조정을 통해, 심각해질 수 있는 차이를 해결한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세입자들에게 "평온한 점유"를 보장한다.
따라서 자유지상주의적(독점적) 공동체에서 계약을 유지하는 과제는 무엇보다도 소유주의 책임이다. 그러나 그는 한 명의 개인일 뿐이며,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해당 공동체의 대다수 구성원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특히, 소유주는 공동체 엘리트, 즉 공동체에 가장 많이 투자한 가정과 기업의 수장들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그들의 재산과 투자의 가치를 보호하고 가능하면 증대시키기 위해, 소유주와 공동체 엘리트는 두 가지 형태의 보호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첫째, 그들은 외부 침입자와 내부 범죄자들에 대해 물리적 힘과 처벌을 통해 자신들을 방어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둘째, 그리고 이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그들은 재산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계약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옹호하고, 광고하거나 선전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해 추방, 배제, 궁극적으로는 추방이라는 방법으로 자신들을 방어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공동체는 항상 평등주의와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이중적이고 상호 관련된 위협에 직면한다. 모든 형태와 방식의 평등주의는 사유 재산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 사유 재산은 배타성, 불평등, 그리고 차이를 내포한다. 그리고 문화적 상대주의는 가족과 세대 간의 친족 관계라는 근본적-사실상 토대적인-사실과 양립할 수 없다. 가족과 친족 관계는 문화적 절대주의를 의미한다. 사회심리학적 사실로서, 평등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감정은 매 세대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들의 정신적 발달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청소년들, 특히 남성 청소년들은 항상 이러한 사상에 취약하다. 청소년기는 가족 생활과 부모의 권위가 부과한 규율에 대한 젊은 세대의 정기적인(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정상적인) 반항이 특징적이다. 문화적 상대주의와 다문화주의는 이러한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상적 도구를 제공한다. 그리고 평등주의는, 재산이 개인적으로 취득되고 생산된 것(따라서 개인의 생산성에 따라 공정하게 분배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따라서 자의적으로 분배된 것)이라는 유아적 관점에 기초하여, 반항적인 청소년들이 가족의 규율적 틀 밖에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자원을 주장할 수 있는 지적 수단을 제공한다.
계약의 집행은 주로 신중함의 문제이다. 언제,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보호 조치를 취할 것인지는 공동체 구성원들, 특히 소유주와 공동체 엘리트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도덕적 상대주의와 평등주의의 위협이 일시적으로 청소년과 젊은 성인들 사이에서만 존재하고, 그들이 가족 중심의 성인기로 돌아설 때까지 잠시 동안만 지속된다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충분할 수 있다. 문화적 상대주의와 평등주의의 옹호자들은 일시적인 곤란이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불과할 것이며, 추방이라는 처벌은 상당히 가볍고 관대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다. 약간의 조롱과 경멸만으로도 상대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위협을 억제하는 데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져 도덕적 상대주의와 평등주의의 정신이 성인 구성원들, 즉 어머니, 아버지, 가정과 기업의 가장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면, 훨씬 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성숙한 사회 구성원들이 민주주의(다수결)나 공산주의의 형태로 평등주의적 감정을 습관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옹호하기 시작하면, 다른 구성원들, 특히 자연적 사회 엘리트들이 단호히 행동할 준비를 해야 하며, 계속된 불순응이 있을 경우 이들을 사회에서 배제하고 궁극적으로 추방해야 한다. 사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소유주와 공동체 세입자들 간에 체결된 계약에서는 자유(무제한) 발언의 권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의 세입자 재산에서조차 무제한의 발언권은 허용되지 않는다. 수많은 것을 말하고 거의 모든 생각을 홍보할 수 있지만, 자연적으로 사유 재산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계약의 목적에 반하는 사상(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을 옹호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자유지상주의 사회 질서에서는 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대한 관용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은 신체적으로 분리되고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족과 친족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계약에서는 이러한 목표와 양립하지 않는 생활 방식을 지속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용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대안적이고 비가족 중심의 생활 방식을 옹호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개인적 쾌락주의자, 기생적 생활 방식 추구자, 자연 환경 숭배자, 동성애자 또는 공산주의자들로, 자유지상주의 질서를 유지하려면 이들도 사회에서 물리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왜 가장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문화적 보수주의자가 되어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현재의 도덕적 퇴폐, 사회적 붕괴, 문화적 타락은 지나친 관용, 특히 잘못되고 오해된 관용의 결과이다. 계약의 원칙에 따라 습관적인 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대안적 생활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신속히 고립되고 배제되어 문명에서 추방되기보다는, 사회는 그들을 관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은 평등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감정과 태도를 더욱 장려하고 촉진시켰으며, 결국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 배제할 수 있는 권위가 사실상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렀다(반면, 국가가 강제적 통합 정책을 통해 발휘하는 권력은 그에 상응하게 커졌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자연 사회 질서를 확립하려는 시도에서, 사유 재산에 내재된 배제의 권리를 국가로부터 되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이루기 전이라도, 그리고 이러한 성취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일상생활에서 배제의 권리를 다시 주장하고 행사하기 시작해야 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평등주의자,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다문화주의자, 환경주의자, 무례한 행동, 부적절한 행동, 무능력, 무례함, 저속함, 외설적 행위 등에 대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불관용과 차별을 실천하고 옹호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해야 한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뷰캐넌주의자들이나 신보수주의자들의 거짓된 사회(주의적) 보수주의와 거리를 두어야 하듯이, 진정한 자유지상주의자들도 다문화적 반문화와 반권위주의적 평등주의를 옹호하는 거짓 좌파 자유지상주의자들과 명백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한다."
- 출처: Hans-Hermann Hoppe (2001). Democracy: The God That Failed (pp 210-219). Transaction Publishers.
리버테리언적 계약 공동체가 공산주의자나 네오나치처럼 공동체의 근본을 갉아먹는 자들을 자치적으로 배제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논리. 경찰력이 아니라 부동산 소유자의 권리. “여기 규칙 안 지키면 이 공동체에 살 수 없습니다”의 논리에 훨씬 가까운 이야기다.
이게 NRx와 대안우파로 옮겨가면서 어떻게 변하는지는 몇 단계를 거친다.
일단 정통 NRx 쪽, 커티스 야빈의 패치워크 개념부터 보면——수백 수천 개의 주식회사 모델 소형 국가들, 주권 기업들이 각자의 고객(주민)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체제——이쪽은 사실 호페의 물리적 제거 개념에서 그렇게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시민은 고객이고, 도시국가는 회사고, 주민 추방은 계약 종료다. 이동의 자유(Exit)가 참정권(Voice)보다 중요하다. 야빈도 닉 랜드도 일관되게 이 선을 유지해왔다. 마음에 안 들면 나가고, 다른 우파적 거버넌스를 골라 이동하면 된다. “당신과 우리 서비스 가 안 맞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서비스 구독료를 환불해줄 테니 당신은 다른 데로 가는 게 좋을 것이다.”라는 레토릭이 야빈의 주요 레토릭이다. NRx 정파(正派) 쪽에선 좌파를 잔인하게 제거하는 게 아니라 좌파 국가에서 우파가 이탈하는 방향이 주류 해석이다. 물론 그렇다고 야빈이 완전 평화로운 방식을 고집한다고 하기는 애매하다. 야빈은 그의 블로그 에세이 시리즈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An Open Letter to Open-Minded Progressives)>에서 반동 세력이 집권하고서 해야만 할 일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정부 관료 전원 해고, 공립학교 매각, 대학 해체, 언론 폐지, "탈문명화된 집단들"의 수감, '안보 보장, 외국 원조, 대규모 이민을 포함한 국제 관계'의 단절. 호페의 물리적 제거 담론보다도 더 급진적인, 아니 참으로 호쾌한 발상이다.
그런데 NRx 사파(邪派), 그리고 강성 대안우파로 갈수록 해석이 더욱 급진적으로 달라진다. ‘소규모 공동체 내부 배제’가 ‘국가 단위의 좌파 전체에 대한 물리적 처벌’로 확대된다. 리버테리언의 물리적 제거는 극단적 상황 논리였는데, 여기선 좌파들에게 즉시 상시 적용하는 만능 기술이 된다. 재산권 행사 개념이 정치적 정당성 확보 개념으로 교체된다. ‘무상 헬리콥터(free helicopter rides)’ 밈은 그 감정적 과잉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피노체트 치하 칠레에서 반공 세력이 좌파를 헬기에 태워 바다에 던진 역사에서 나온 밈이다. 호페가 말한 “이 공동체에서 나가라”가 “하늘에서 떨어뜨려라”로 변이하는 거리감. 이게 얼마나 먼 거리감인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이 변이도 남초 오타쿠 문화의 서브컬쳐 캐릭터 소비 구조와 겹쳐 읽으면 선명해진다.
남성 오타쿠들이 좋아하는 강한 캐릭터가 스토리에서 ‘적을 단호하게 제거하는’ 장면에 특히 열광하는 건 현실이다. 세계관 논리와 캐릭터 내면을 꼼꼼히 챙기면서도, 그 캐릭터가 압도적인 힘으로 적들을 쓸어버리는 순간에 에너지가 터진다. 복잡한 서사 구조는 그 카타르시스를 더 정당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제거의 장면이 선명할수록, 그것을 뒷받침하는 서사가 두터울수록, 열광의 강도는 배가된다.
NRx 일부도 호페의 개념에서 바로 그것을 읽어냈다. ‘단호한 정리’의 쾌감. 복잡한 정치경제학적 논리는 그 쾌감을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배경이 되고, 정작 그들이 소비한 건 배경이 아니라 쾌감 자체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걸 단순히 “NRx가 호페를 오독했다”로 끝내면 핵심을 빗나간다.
왜 이 특정한 개념들이 이 특정한 방식으로 소비되었는가. 왜 군주제고, 왜 물리적 제거인가. 왜 호페인가.
민주주의의 시간선호 문제는 현실에서 매일 확인된다. 선거 주기에 맞춰 뜯어먹고 나가는 정치인들. 장기적 비전보다 다음 선거 여론에 최적화된 정책들. 대성당——하버드, 뉴욕타임스, NGO 복합체——이 문화와 언어와 제도를 서서히 점령해가는 현실. 민간 영역마저 이미 특정 이념의 입맛에 맞게 해킹당한 현실. 자생적 질서를 형성할 공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감각. 이 현실 앞에서 “그냥 자유시장을 하면 알아서 문제가 해결된다”라는 정통 리버테리언의 처방은, 갈수록 공허하게 들린다.
호페의 군주제 발언과 물리적 제거 개념은 이 공허함에 대한 응답처럼 읽혔다. 철권통치. 긴 시간지평. 규칙을 파괴하는 자를 단호하게 내쫓는 권리. 무질서한 민주적 소모를 끝낼 수 있는 어떤 결단력. 그 갈망이 호페의 학술 논증에 투사되었다.
닉 랜드(Nick Land)는 《암흑계몽주의(The Dark Enlightenment)》(2012)에서 호페의 이 논증을 NRx의 핵심으로 끌어들인다.
"극렬한 신반동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단지 파멸할 운명에 처한 체제가 아니라, 파멸 그 자체다. 따라서 민주주의로부터의 탈출은 절대적인 명령에 가깝다. 이러한 반(反)정치의 저변에 흐르는 사상적 조류는 홉스주의와 궤를 같이한다. 이는 대중의 자기표현을 향한 루소식 열정을 처음부터 배제한, 일관되고 일탈 없는 암흑 계몽주의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대중을 본질적으로 울부짖는 비이성적 폭도로 규정하는 이 관점은, 민주화의 역학을 근본적인 퇴행 과정으로 이해한다. 즉 개인의 악덕과 원한, 결핍이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통해 조직적으로 공고해지고 악화되면서, 결국 집단적 범죄와 사회 전반의 부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인과 유권자는 서로를 자극하는 공생 관계다. 이들은 상대방을 부추기며 더 야만적이고 뻔뻔한 폭거로 치닫게 만들고, 끝내 그 소란에 동조해 소리를 지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상황만을 남겨놓는다.
진보적 계몽주의가 정치적 이상을 보는 곳에서 암흑 계몽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본다. 정부 역시 인간이 만드는 조직이며, 그들 또한 배불리 먹으려 들 것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낮춘 암흑 계몽주의의 유일한 목표는 문명이 광기 어린 파멸과 탐욕스러운 방탕으로 치닫는 것만큼은 막는 데 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부터 한스 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에 이르기까지 이 사상적 계보는 한결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바로 '사회를 집어삼키려는 주권(主權) 권력을 어떻게 저지하고 만류할 것인가'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민주주의식 '해법'을 마주할 때마다, 암흑 계몽주의는 그것이 잘해봐야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 유치한 발상임을 거듭 확인해 줄 뿐이다.
호페는 무정부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사법 사회'를 옹호하지만, 군주제와 민주주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는 주저 없이 군주제를 선택한다. 그의 논리는 철저히 홉스주의적 시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 출처: Nick Land, The Dark Enlightenment, Part 1 (2012). [아카이브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120414125952/http://www.thatsmags.com/shanghai/article/1880/the-dark-enlightenment-part-1)
닉 랜드가 인용한 호페의 어록은 다음과 같다.
"세습 독점권자인 왕은 자신의 통치 아래 있는 영토와 백성을 사유 재산으로 여기며, 이 '재산'을 독점적으로 착취한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도 이러한 독점과 독점적 착취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형태만 바뀔 뿐이다. 즉, 국가를 사유 재산으로 여기는 왕과 귀족 대신, 임기가 정해진 교체 가능한 관리인이 국가의 독점적 운영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 관리인은 국가를 소유하지는 않지만, 재임 기간 동안 자신과 추종자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이용할 권한을 갖는다. 그는 국가의 자산 그 자체가 아니라, 재임 중의 이용권, 즉 용익권(用益權)만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착취를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미래의 자산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분별한 착취를 낳는다. 결국 착취는 근시안적으로 변하고, 국가 자산의 고갈이 조직적으로 부추겨질 뿐이다."
- 출처: Hans-Hermann Hoppe, Democracy: The God That Failed, Chapter 1 (Transaction Publishers, 2001).
그리고 이 호페의 어록에 대한 닉 랜드의 비평은 다음과 같다.
"다당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한시적인 권력을 쥔 정치 세력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에 직면한다. 바로 가능한 한 가장 빠르고 철저하게 사회를 약탈하려는 충동이다. 이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남겨둔 자산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정치적 후임자에게 고스란히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후임자는 물려받은 자원을 동원해 전임자를 공격하는 데 쓸 것이 분명하다. 결국 남겨진 모든 것은 적의 손에 쥐어질 무기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훔칠 수 없다면 차라리 파괴하는 편이 그들에게는 이롭다.
민주주의 정치인의 관점에서 볼 때, 직접 손에 넣을 수 없거나 자기 정파의 업적으로 포장할 수 없는 사회적 재화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낭비일 뿐이다. 반대로 심각한 사회적 재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 정권의 탓이거나 다음 정권으로 미룰 수만 있다면, 이들의 합리적 계산법 안에서는 명백한 호재로 둔갑한다. 과거 휘그주의적 의미에서 사회적 진보를 구성했던 장기적인 기술 경제적 발전이나 이에 따른 문화적 자산의 축적은, 이제 그 어떤 정치인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번성하는 순간, 문명이 쌓아 올린 이 모든 가치는 당장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나의 과정으로서 문명은 '낮은 시간선호', 즉 현재보다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나 역사적 사실로나 미래보다 현재를 극단적으로 우선시하게 만들며, 끝내 사회를 발작적인 폭식 경쟁으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문명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개념에 가장 가깝다. 당장 야만적인 살육전이나 좀비 아포칼립스 같은 파멸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 결국에는 그와 같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바이러스가 사회 전반을 태워버리면서, 인적·산업적 투자를 가능하게 했던 미래지향적이고 신중한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오직 무의미하고 말초적인 소비주의와 재정적 방종, 그리고 '리얼리티 TV 예능 프로그램' 수준으로 전락한 정치 쇼뿐이다. 내일은 다른 정파의 세상이 될지도 모르니,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편이 낫다는 식이다."
- 출처: Nick Land, The Dark Enlightenment, Part 1 (2012).
랜드는 호페의 시간선호 논증을 단순히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를 “문명의 정밀한 부정”으로 규정하며 암흑계몽주의 서사 전체에 강력하게 편입시켰다. 호페의 학술적 비교는 여기서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철학적 무기로 재탄생했다.
이건 NRx 블로그스피어의 지적 오남용 이전에 인간 본능의 필연적 귀결이다.
우리는 복잡한 구조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강렬하고 단순하며 카타르시스를 주는 서사와 상징에 더 강하게 끌린다. 문명 규모가 커질수록, 정보가 넘칠수록, 인간의 오래된 부족 본능——강한 지도자에 대한 갈망, 내부자 정화 욕망, 안정된 질서에 대한 갈망——은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진화된 동물은 정보 과잉 앞에서 더 원시적인 판단 회로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이념은 그 회로를 정교하게 포장하는 옷에 불과하다.
리버테리언의 미시적 계약 공동체와 NRx의 거시적 주권 재편은, 같은 현실의 다른 층위에서 나온 반응이다. 그리고 NRx 사파의 과잉된 물리적 제거 해석조차, 그 현실 감각의 격렬한 표현이지 단순한 무지의 산물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허심탄회하게 양쪽을 공평하게 지지한다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루하고 현학적이고 뜨뜻미지근한 정통 리버테리언보다 호쾌한 대안우파 쪽이 훨씬 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군주제? 현 민주정보다 나아보이면 지지해버리는 게 맞지 않나. 물리적 제거? 기왕 추방할 거면 게토(Ghetto)를 세우거나 공동체 밖으로 깔끔하게 내보내버리면 되지 않나. 범죄자들? 태형이든 중형이든 단호하게 처리해버리면 되지 않나. 이 직선적인 에너지에는 분명 뭔가 있다.
다만 그 에너지가 어디에서 오는지는 냉정하게 봐야 한다. 민주주의의 장기적 소모와 무질서 앞에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소환하는 것——강한 형태, 단호한 정리, 오염된 것에 대한 배제——은 지금 이 시대에만 나타난 감각이 아니다. 문명이 자기 무게를 감당 못 하고 흔들릴 때마다 반복해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에너지는 원하는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호페 본인은 결국 무정부 자본주의를 향하고 있었다. 군주제도 민주제도 중간 도구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글이 불러일으킨 파동은, 현대인이 민주주의의 소모와 무질서 속에서 얼마나 깊이 ‘강한 형태’를 갈망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갈망은 정당하다. 그것을 촉발한 현실도 실재한다.
다만 우리는, 그 갈망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직시하면서도 그 에너지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유해야 한다.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정교하게 작동하는 동물이 아니니까.
그래서 이 균열은 닫히지 않는다. 호페의 텍스트가 드러낸 균열은, 지금도 계속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균열 앞에서, 각자 자신이 가장 강렬하게 끌리는 부분을 과잉 소비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건 비판이 아니라 그저 현실에서 발생하는 현상에 대한 서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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