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랜드, 지옥이 벼려낸 것들

지옥이 벼려낸 것들


닉 랜드 (Nick Land), 2015년 7월 17일


이 글에는 본론에 앞서 자칫 몰입을 방해할 법한 서문이 하나 붙어 있다. 내향적인 관점에서 '신반동주의(NRx)'라는 문화적 돌연변이를 다루는 내용인데, 핵심은 전략적이든 혹은 단순히 심술궂든 간에, 기존의 윤리적·정치적 비난 방식에 대해 이들이 철저히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파시스트’나 ‘인종주의자’처럼 사고의 흐름을 막기 위해 설계된 단어들을 이들은 가볍게 딛고 넘어간다. 비웃음을 던질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단어들이 품고 있는 ‘종교적 공포’의 정체를 폭로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일종의 통제 체제가 내거는 표지판과 같다. “여기서부터는 괴물이 사는 생각 불가능한 황무지”라고 경고하며, 사람들이 감히 그 너머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할 때만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한때 ‘사탄적’이라는 말이 농담거리로 전락하기 전까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단어들은 성스러움이 지닌 부정적 측면, 즉 인간의 사고에 한계를 긋고 금기를 설정하는 주술적 장치로 이해하지 않으면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신반동주의(NRx)는 과연 파시스트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와 별개로, 신반동주의는 현존하는 정치 철학의 흐름 중 아마도 파시즘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물론 이를 이해하려면 파시즘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통찰이 필요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남용되는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그 본질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렇다면 신반동주의는 인종주의적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용어는 그것을 휘두르는 자들의 입맛에 따라 워낙 제멋대로 변주되기에, 무엇이 정말 인종주의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최소한 이 블로그의 확고한 견해에 따르자면, 신반동주의의 정체성은 다름 아닌 '사회진화론'에 있다. 이 용어가 신반동주의를 깎아내리기 위한 멸칭으로 던져질 때, 우리는 이를 유머 섞인 초연함으로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침울한 즐거움으로 맞이한다. 물론 이 단어 역시 앞서 언급한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문화권 내에서 제대로 된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소모되고 있다. 이 개념을 끝까지 파헤쳐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다.


‘사회진화론’이라는 명칭에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이 개념이 그저 다윈주의, 더 정확히는 ‘일관된 다윈주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윈주의적 공정이 우리와 관련된 그 어떤 지점에서도 멈추지 않는다는 명제와 궤를 같이한다. 인류는 다윈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을 구성하는 그 어떤 요소도 자신이 물려받은 다윈주의적 유산을 초월적인 위치에서 심판할 수는 없다. 마치 도덕적 평가의 원칙이 인류의 발생 과정과는 무관한 별개의 기원이나 기준을 갖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말하기는 쉽다. 그리고 이 블로그가 견지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를 넘어선 명백한 사실이기도 하다. 비록 전 세계를 지배하는 주류 의견과는 거리가 멀지만, 지능 지수가 높은 고학력 계층 사이에서는—비록 명목상일지라도—상당히 넓게 퍼져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맨정신으로 감당하며 사유하기에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진실이기도 하다.


사회진화론이 가리키는 논리적 귀결은 명확하다.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지옥'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자연이 무언가 건설적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도덕과는 무관한, 아니 인간의 관점에서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영향력들이 지배적이었던 덕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체군에 가해진 끈질기고 야만적인 도살만이 복잡하고 적응적인 형질을 자연이라는 혼돈으로부터 걸러낼 수 있었다. 비효율적일 만큼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가 찬미하는 건강, 아름다움, 지능, 그리고 사회적 품격은 실상 경계 없는 학살이 자행된 거대한 도살장에서 길러진 것들이다. 아주 미세한 이점 하나를 끌어내기 위해 계산조차 불가능할 만큼 기나긴 세월 동안 살육이 반복되어야 했다. 이는 단순히 선택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맷돌질의 문제만은 아니다. 보잘것없는 보존 형질 하나를 얻기 위해 방향도 없이 내달리는 우연의 광기가 쏟아낸 무수한 돌연변이의 흉물들, 그리고 그 '적응도'(혹은 순수한 생존)라는 것 자체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공포의 산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통받는 물질의 아주 미세한 표본에 불과하다. 무한한 식욕을 가진 무자비한 살육 기계가 사악한 돌연변이들로 가득한 우주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유전적 생존 괴물들인 셈이다. (이조차도 어쩌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포장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논의를 전개하기에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결정적인 지점은 여기다. 이 숙명에서 벗어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혹은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해 그로부터 얻어낸 우연하고 일시적인 유예조차도, 지금까지 쌓아온 공든 탑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멜서스적 완화'는 자비의 전부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 우주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거대한 파괴의 엔진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주 잠시라도 고통을 면하게 되는 바로 그 정도만큼, 우리는 퇴보한다. 이 철칙은 계통발생과 개체발생, 개인과 사회, 제도, 그리고 게놈과 세포, 유기체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모든 차원과 규모에 예외 없이 적용된다. 지옥의 대장간 밖에서, 단 한 줌의 성취된 가치라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 장치는 실재하지 않으며, 엄밀히 말해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만약 모든 상황이 최적의 상태로 흘러간다면(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신반동주의—혹은 ‘암흑 계몽주의’라 불러야 할 이 흐름이—세상에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답은 바로 ‘영원한 지옥’이다. 마케팅 문구로 쓰기엔 확실히 매력적이지 않다. 차라리 이렇게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그래도 이보다는 덜 나쁠 것이다(비록 실제로는 거의 확실히 더 나빠지겠지만).”


원문 링크: https://archive.md/NdG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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