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주의적 민주주의
다윈주의적 민주주의(Darwinian Democracy)
민주주의라는 대의제 정치 체제를 생물학적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의 메커니즘으로 환원하여 관찰할 때, 우리는 이 시스템이 가진 철저한 '방향성 없는 맹목성'과 마주하게 된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정립한 진화론 중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은 생태계를 더 고차원적이고 우수한 상태로 견인하는 개량적 진보의 과정이 아니며, 도덕적 표상에 부합하는 개체를 선별하는 윤리적 심판의 장 역시 아니다.
그것은 오직 특정한 시공간적 국소 환경(Local Environment)이 가하는 즉각적인 생존 압력에 대해, 단기적인 번식 적합도(Reproductive Fitness)를 극대화한 형질이 세대를 거쳐 맹목적으로 축적되는 통계적 확률 현상일 뿐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생태계 역시 이와 정확히 동일한 동학으로 작동한다. 이 체제에서 최종적으로 생존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정치인은 국가와 공동체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고결하거나 유능한 주체가 아니라, 오직 ‘선거를 통한 재선 및 집권’이라는 특수한 환경적 압력에 완벽하게 국소 최적화(Local Optimization)된 개체다.
문제는 표를 획득하기 위해 대중의 즉각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단기적 적응 형질과, 국가의 생존 지평을 수십 년 너머로 확장하여 거시적 국정 운영을 구축하는 장기적 경영 형질이 구조적으로 완전히 양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제한된 임기라는 시간적 구속 조건 하에서 유권자의 표심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은 필연적으로 미래의 사회적 자산을 현재의 전리품으로 탕진하는 높은 시간선호(High Time Preference)를 유도한다.
반면, 임기를 넘어서는 초장기적 관점에서 국가의 기초 체력을 강화하려는 전략은 당장 대중의 즉각적인 희생과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기에 시스템 내부에서 가차 없이 처벌받는다.
민주주의라는 잔인한 선택압(Selection Pressure)은 미래를 담보로 현재의 인기를 매수하는 기회주의적 전략을 적극적으로 보상하고 체제 내에 확산시키는 반면, 국가의 장래를 위해 구조 개혁을 시도하는 책임감 있는 형질을 지는 정치인은 철저하게 도태시킨다.
이처럼 자연선택의 맹목적 생존 경쟁이 대중 정치의 권력 복제 메커니즘과 완벽히 결합한 생태계를 우리는 '다윈주의적 민주주의(Darwinian Democracy)'라 명명할 수 있다.
다윈주의적 민주주의란 결코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선형적 진보의 장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표를 얻는 데 최적화된 단기적·포퓰리즘적 형질만이 '적자생존의 승자'가 되어 생태계를 독점하고, 장기적 생존을 도모하는 정치인은 멸종에 이르게 만드는 잔인한 진화론적 역설의 무대다.
결국 이 냉혹한 체제의 실체는, 시스템 자체가 구조적으로 공동체의 장기적 파멸을 가속하는 형질을 지닌 정치인만을 선택적으로 득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필연적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 다윈주의적 선택압의 핵심 동학을 심층적으로 해체해 보면, 시스템 내부의 모든 모순은 결국 ‘시간(Time)’이라는 단일 축으로 수렴한다. 다당제 민주주의 하에서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한시적 권력을 위임받은 지배 세력은, 제도가 설계한 구조적 인센티브로 인해 거부할 수 없는 약탈적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들에게 허용된 제한된 시간 지평(Time Horizon) 안에서 손에 쥔 유한한 국가 자원을 가능한 한 빠르고 철저하게 소진(Depletion)하려는 충동이다.
민주주의의 임기제는 권력자에게 일시적인 ‘용익권(用益權)’만을 부여할 뿐, 국가 재정에 대한 장기적 ‘소유권(Property Rights)’을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일개 정권이 미래를 위해 국가 재정을 절약하고 축적하더라도, 임기 종료 후 남겨진 국고는 자신들의 몫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적대 관계에 있는 후임 정권의 자산으로 귀환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 경우 후임 지배 세력은 전임자가 고통스럽게 절약하여 남긴 국고를 자신들의 단기적 치적으로 포장하기 위한 재분배 재원으로 탕진하거나, 심지어 전임 정권의 실책을 발굴하고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자본으로 전용할 수 있다.
권력의 소유권이 부재한 상황에서, 미래를 위한 국가 재정의 축적은 적대 세력에게 강력한 무기를 쥐여주는 자멸적 행위가 된다. 따라서 남겨진 국고가 적의 전리품이 될 것이라면, 임기 내에 재정을 아낌없이 소비하여 현 시점의 정치적 지지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이 개체 수준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전략적 선택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특정 정치 세력의 도덕적 타락이나 윤리적 결함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 자체가 장기적인 자본 축적이나 재정 건전성을 시도하는 행위자에게는 구조적 손실을 입히고, 당장의 기회주의적 소비를 감행하는 행위자에게는 극대화된 보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명화 과정이 결국 당장의 소비 충동을 유보하고 미래의 가치를 축적해 온 낮은 시간선호(Low Time Preference)의 역사적 축적물이라면, 민주주의라는 엔진은 이 문명적 축적 방향과 정확히 정반대로 주행한다.
미래 세대의 몫이어야 할 국가 재정을 현재의 정치적 전리품으로 치환하는 이 역행적 구조는, 체제 내부의 구성원들을 장기적인 문명 건설자가 아닌 단기적인 자원 약탈자로 진화시키는 탈(脫)문명화의 분기점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단기적인 국가 재정 고갈을 유도하는 시간 축의 모순 위에서, 경제학자 알베르트 허시먼(Albert Hirschman)이 정식화한 ‘이탈(Exit)’과 ‘발언(Voice)’이라는 두 가지 실천적 선택지가 논리적 대안으로 부상한다.
본래 허시먼의 구조 체계에 따르면, 특정 조직이나 체제의 기능 부전과 퇴행에 직면한 개별 행위자가 취할 수 있는 대응 경로는 명확히 양분된다. 체제 내부에 잔류한 채 집단적 의사소통을 통해 구조적 교정을 도모하는 정치적 행위로서의 ‘발언(Voice)’을 선택하거나, 해당 체제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대안적 공간으로 이동하는 경제적 선택으로서의 ‘이탈(Exit)’을 감행하는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를 신봉해 온 전통적 규범 정치학은 언제나 ‘발언’의 가치를 도덕적으로 우월한 고결한 선택으로 찬미해 왔다.
이 관점 하에서 투표는 분산된 개인들의 목소리를 집약하는 집단적 저항의 신성한 형태로 격상되며, 적극적인 정치 참여는 민주시민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최우선의 의무로 칭송된다.
그러나 공공선택이론의 냉정한 렌즈로 투표 행위를 재규정한다면, 이른바 ‘발언’이라는 행위는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소음을 자아내는 시스템 내부에서 유권자의 표라는 또 하나의 엔트로피를 추가하여 시스템의 구조적 혼란을 증폭시키는 무의미한 에너지 소모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대중 정치가 양산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국고 약탈의 루프 안에서, 개인이 목소리를 보태어 시스템을 내부로부터 개혁하겠다는 시도는 대개 실패로 귀결된다.
따라서 제어 장치를 상실한 폭주의 소용돌이에 동참하여 자원을 낭비하는 대신, 민주주의 체제의 제도적 경계 밖으로 조용히 이탈하는 것이 개체 수준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비용 효율적이며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 된다.
‘발언 대 이탈’이라는 이 대칭적 구도는 근대 정치철학이 오랜 기간 천착해 온 평등(Equality)과 자유(Liberty)의 대립 전선을 완전히 새로운 가치 축으로 전환시키며, 이는 현대 게임이론(Game Theory)의 구조적 렌즈를 통해 완벽히 증명된다.
게임이론에서 정의하는 ‘게임’이란, 상호 의존적인 의사결정자(Player)들이 규칙(Rule)의 제약 하에서 자신의 보상(Payoff)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략을 주고받는 수학적 상호작용의 모델이다. 다윈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게임 내부에서 유권자와 정치인은 미래의 국고를 먼저 약탈하는 자가 승리하는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에 봉착해 있다. 이 시스템의 규칙 하에서는 공동체의 장기 존속을 위해 재정을 절약하고 협조하는 전략은 가차 없이 처벌받으며, 오직 미래를 배반하고 현재의 자원을 소진하는 기회주의적 전략만이 지배전략(Dominant Strategy)이 된다.
그 결과 모든 플레이어가 각자의 사익을 위해 합리적인 최선 대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전체는 참여자 모두에게 가장 파멸적인 결과인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으로 수렴하는 비극적 역설을 낳는다. 여기서 내쉬 균형이란, 상대방이 기회주의적 약탈 전략을 고수하는 한 나 홀로 장기적 절약을 선택했다가는 독박을 쓰고 도태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먼저 자신의 전략을 바꿀 유인을 갖지 못하고 파멸적 공멸 속에 갇혀버리는 수학적 교착 상태를 뜻한다.
이 닫힌 매트릭스 속에서 기존 정치학이 청송하던 ‘발언(Voice)’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규칙 자체가 왜곡된 게임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상대가 파놓은 함정 속에서 무의미한 하위 전략을 반복하며 시스템의 연명을 돕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 체제를 거부하고 떠날 수 있는 ‘이탈(Exit)’은 게임 내부에서의 순종이나 단순한 전략 수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이 스스로 의사결정권자로서의 지위를 파기하고 ‘게임의 판 자체를 깨부수는 메타 전략(Meta-strategy)’이다. 플레이어 중 하나가 판을 떠나면, 남아있는 지배 세력이 기대하던 약탈적 보상 구조(Payoff)는 즉각 붕괴한다.
그러므로 이탈의 자유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권리라는 발상은, 기존의 민주주의적 프레임처럼 권력의 배분과 참여를 통해 정치라는 게임의 영토를 무한히 확장하려는 시도를 중단한다. 대신 국가의 독점적 통치 권력이 지배하는 게임 법칙 자체를 무력화하고, 제도적 구속력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옴으로써 스스로가 게임의 규칙을 결정하는 탈정치적 주권의 확립을 지향한다.
앞서 논한 시간선호의 제어와 이탈의 권리라는 프레임을 지성사(知性史)적으로 추적하면,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사회계약론적 국가관에서 출발하여 시간선호(Time Preference) 이론을 바탕으로 현대 민주주의를 비판한 한스 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 등 현대의 자유지상주의 사상가들로 이어지는 거대한 사상적 계보(Genealogy)가 도출된다.
이 계보학적 전통이 일관되게 던져온 핵심적 화두는, 문명의 성취를 잠식하고 개인의 사적 권리를 위협하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의 무제한적 팽창과 그 국가 권력이 지닌 대내외적 약탈성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저지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근원적인 거버넌스적 질문 앞에서 현대 민주주의 체제가 제시하는 해법은, 해당 계보의 시선에서 보면 시스템의 설계적 결함을 오인한 치명적으로 불완전한 대안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국가 권력의 절대적 크기와 사법적 영역 자체를 제한하는 근원적인 통제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대신, 거대한 권력을 행사할 주체를 주기적인 선거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교체하는 ‘권력 향배의 순환 구조’만을 설계해 놓았을 뿐이다.
문제는 이 권력 주체의 정기적 전환 자체가, 체제 내부의 행위자들에게 ‘자신이 권력을 장악한 한시적 기간 동안 자원을 남김없이 수탈해야 한다’는 약탈의 인센티브를 극단적으로 강화한다는 점에 있다.
이 약탈적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 정치인과 유권자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장기적 생존을 희생양 삼아 서로의 사익을 증폭시키는 파멸적인 적대적 공생 관계(Hostile Symbiosis)를 형성한다. 나아가 이 기만적인 공생 관계는 선거 무대에서 철천지원수처럼 대립하는 거대 좌파와 우파 양당 간의 역학으로까지 확장된다.
겉으로 보기에 양당은 이념과 정책을 놓고 격렬한 사생결단의 투쟁을 벌이는 것처럼 포장되지만, 시스템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상대 정당의 포퓰리즘적 실책과 재정 탕진을 부각해 자신들의 권력 획득 명분으로 삼는 거대한 상호 의존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좌파 정권이 단기적 재분배로 국고를 소진하면 우파 정권은 그 반작용을 타고 집권하며, 우파 정권 역시 임기라는 시간 제약 탓에 재정 건전성을 포기하고 단기적 경기 부양책을 쏟아내며 다시 좌파에게 권력의 빌미를 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지배 권력을 교대로 나눠 가지는 양당은 결국 민주주의라는 게임 법칙을 지속시키기 위해 정적(政敵)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서로를 공격하는 척하면서도 미래의 국가 재정을 공동으로 약탈하는 파멸적 동맹을 맺고 있는 셈이다.
피지배층인 유권자는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보장할 더 강력하고 즉각적인 자원 재분배 정책을 요구하고, 지배층이 되고자 하는 정치인은 그 표심을 매수하기 위해 실현 불가능할 정도로 대담하고 대중 영합적인 공약을 투하한다. 이 대담한 보상은 다시 유권자의 기대 수준과 탐욕의 임계치를 한 단계 더 부풀리며, 다음 선거에서 더 파괴적인 요구를 생산해내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러한 상호 진화적 동학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Hypothesis)’의 전형적인 발현이다. 시스템 내부의 구성원들은 생존(당선과 복지 혜택)을 위해 끊임없이 더 자극적인 방향으로 질주하지만, 국가라는 생태계 전체는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 채 자원 고갈이라는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출력이 다시 입력으로 환류하며 스스로를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이 ‘양성 피드백 루프(Positive Feedback Loop)’는, 내부에 어떠한 자가 제어 브레이크도 탑재하지 않은 채 시스템 전체가 붕괴하는 임계점을 향해 저절로 폭주하는 기계적 필연성을 지닌다.
앞서 기술한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라는 개념은, 정치 현상을 도덕과 이념의 궤적이 아닌 제어공학(Control Engineering) 및 시스템 다이내믹스(System Dynamics)의 분석적 시선으로 환원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선거와 정책의 인과율을 단순한 ‘원인과 결과의 선형적 일회성 사슬(Linear Causal Chain)’로 파악하는 고전적 거버넌스 프레임을 거부한다. 대신, 시스템의 출력이 다시 입력으로 환류하여 스스로를 재규정하는 ‘비선형적 순환 구조(Nonlinear Cyclical Structure)’로 정치를 조망하는 동역학적 방법론이다.
이 구조 내에서는 유권자의 단기적 요구가 정치인의 포퓰리즘적 정책을 유도하고, 그 결과물인 정책이 다시 유권자의 기대 수준과 물질적 의존도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며, 그렇게 변모한 기대치가 다음 선거에서 한층 더 급진적인 요구를 생산하는 환류 현상이 일어난다.
이 고도화된 순환 메커니즘 안에서는 고전적인 정치학이 추구하던 ‘원인과 결과의 선후 관계’를 규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완벽히 무력화된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정책과 요구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꼬여있는 동시적 상호의존성(Simultaneous Interdependence)의 관계에 놓이게 되며, 시스템 전체가 외생적 변수 없이 작동하는 하나의 거대한 폐루프 시스템(Closed-loop System)으로서 스스로의 진폭을 키워나갈 뿐이다.
이 냉정한 공학적 렌즈를 통해 바라볼 때, 민주주의는 인류가 지향해야 할 고결한 '가치나 정의의 구현체'가 아니라, 입력값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하나의 피드백 시스템(Feedback System)으로 재정의된다. 따라서 이 시스템이 최종적으로 산출해 내는 결과물 역시 규범적인 정의(正義)나 공공선(Public Good)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수많은 상호작용의 끝에 시스템의 수학적 동학이 스스로 수렴하게 되는 통계적 안정 상태(Attractor / Steady State)일 뿐이다.
문제는 제어공학적으로 설계된 폐루프가 특정한 안정 상태에 도달했다고 해서, 그 상태가 시스템 전체의 생존과 문명의 유지에 반드시 바람직하거나 거시적인 전역 최적 상태(Global Optimization)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스템 내부의 국소적 상호 작용이 만들어낸 그 안정 상태는, 거시적 관점에서는 사회적 총자본의 고갈과 제도적 퇴행이 완전히 고착화되어 파멸 자체가 새로운 표준(New Normal)으로 안착해 버린 ‘하향 평준화된 디스토피아적 정상 상태(Steady State)’일 확률이 구조적으로 훨씬 높다.
시스템의 맹목적 폭주를 목도한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의 설계적 결함을 전면적으로 폭로하는 하나의 전복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정치철학적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 탄생한다.
민주주의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맹목적인 환경 압력에 기계적으로 동조하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체제라면, 이 기만적인 표류를 중단시키고 엄격한 위계(Hierarchy) 구조, 냉혹한 성과주의, 그리고 초장기적 가치 축적을 지향하는 낮은 시간선호(Low Time Preference)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고도의 기술관료제적(Technocratic) 거버넌스로 이행하는 것은 이른바 ‘창조론적 전환’이라 일컬을 수 있다.
이 창조론적 전환의 경제학적 실체는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설파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의 동학과 완벽한 궤를 같이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지탱하는 진정한 힘이 시장의 점진적이고 수동적인 적응 과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혁신적인 기업가가 기존의 낡은 경제 구조를 내부로부터 가차 없이 파괴하고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인위적으로 창조하는 단절적 충격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진화생물학적 자연선택이 당장의 생존에만 급급하여 점진적이고 비효율적인 조율을 반복하는 과정이라면, 슘페터식 창조적 파괴에 기반한 창조론적 거버넌스는 기존의 타락한 민주주의적 균형을 전면적으로 폭파하는 기획이다. 대중 정치라는 낡은 시스템의 관성을 단절적 충격으로 무력화하고, 문명의 생존을 담보할 완전히 새로운 통치 패러다임을 인위적으로 창조(Artificial Creation)해내는 변역의 동학이다.
이처럼 단절적으로 창조된 새로운 영토 위에서 작동하는 실천적 양식은, 신학적 형이상학이 아니라 기막히게 차갑고 실용적인 선택적 육종(Selective Breeding)의 메커니즘에 가깝다. 민주주의라는 자연선택의 표류에 맞서기 위해 개념상 '창조론'이라는 타이틀을 잠시 빌려왔을 뿐, 본질은 철저하게 통제된 인위적 품종 개량의 공학이다.
이는 광활한 야생마 무리 속에서 우연과 생존 투쟁의 반복을 통해 어쩌다 강인한 개체가 출현하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자연선택의 비효율을 비웃는다. 대신 처음부터 인간이 원하는 속도와 방향성을 명확히 투영하여, 원하는 형질을 가진 개체들만을 격리하고 인위적으로 선택(Artificial Selection)해 교배시키는 방식이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대중 정치의 맹목적 선택압 위에서 문명의 존속과 국가 재정의 축적 방향이 무질서하게 표류하도록 방치하는 대신, 거시적 생존을 위해 어떤 엘리트적 형질을 지닌 정치인과 장기적 자본이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지성적으로 선제 규정(Pre-determination)하는 것이다. 야생의 표류를 끝내고 사회 계약과 체제의 하드웨어를 인위적이고 전면적으로 재설계(Re-engineering)하는 이 과정은, 문명을 기르는 거대한 '지성적 농장주'의 실천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복적인 사고실험의 논리적 귀결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순간, 우리는 시스템이 파놓은 지독한 자가당착의 함정과 마주하게 된다.
무작위성과 단기적 약탈성으로 점철된 민주주의의 자연선택을 종식하고 인위적 설계에 기반한 창조론적 거버넌스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그 거대한 전환을 집행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압도적인 실효적 통치 권력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권력을 획득하는 통로가 반드시 선거라는 민주주의적 게임 내부의 경쟁으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규칙을 전면 거부하고 판을 뒤엎는 군사 혁명과 같은 물리적 폭력의 게임 역시 체제 전환의 유력한 경로로 존재한다. 그러나 지적해 두어야 할 사실은, 선거판을 우회한 이 날 것의 무력 충돌조차 결국 생물학적 자연계에 존재하는, '강한 형질이 약한 형질을 살육하고 집어삼키는' 가장 원초적이고 잔인한 자연 상태의 적자생존이라는 다윈주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 강력한 변혁의 동력이 외부에서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중을 기만하고 단기적 표심을 매수해야만 살아남는 민주주의의 선택압이든, 혹은 적의 목을 베어야만 승리하는 원시적 폭력의 생태계든, 자신이 파괴하고자 하는 기존의 다윈주의적 게임 법칙 내부에서 완벽하게 승리해야만 비로소 주어지는 전리품이라는 사실에 있다.
결국 시스템을 통제하는 전지전능한 창조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선택의 맹목적인 생존 투쟁 속에 스스로를 던져 그 생태계의 가장 잔인한 적자생존의 승자로 군림해야 한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제도적 선거판이든 야생의 전장이든, 다윈주의라는 거대한 질곡을 영원히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이 도리어 그 다윈주의가 요구하는 가학적인 생존 논리에 완벽하게 순응하고 적응(Adaptation)해야만 한다는 이 지독한 역설은, 체제 변혁을 도모하는 사유 전체를 지배하는 치명적인 구조적 고립이자 존재론적 피로감의 진정한 근원이다.
기존 체제를 전복하겠다는 순수한 변혁의 의지 자체가, 자신이 파괴하려는 그 체제의 가학적인 생존 논리에 가장 철저하게 굴복하고 동화되어 승리를 거둔 이후에야 비로소 유효한 힘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론적 거버넌스를 향한 뜨거운 열망은, 민주주의라는 자연선택 게임의 완전한 종료나 해방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 타락한 진화 게임에서 최종 승리하여 최정상에 선 괴물이, 마침내 슘페터식 창조적 파괴를 감행하며 다음 게임의 규칙을 자신만의 위계로 다시 써 내려가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냉혹한 '권력 이동의 순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가혹한 도약의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체제의 전복을 꿈꾸는 창조론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시스템 하에서 가장 완벽하게 진화한 다윈주의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 본문에서 다룬 '다윈주의적 민주주의의 폭주와 이탈의 메타 전략'은 닉 랜드(Nick Land)가 정립한 암흑계몽주의(Dark Enlightenment)의 문제의식과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랜드가 암흑계몽주의 1부에서 지적한 '목소리 대 탈출'의 구도, 암흑계몽주의 2부의 '좀비 아포칼립스적 퇴행', 그리고 암흑계몽주의 3부에서 묘사한 여론 조작 카르텔 '대성당'[1]의 동학은 본 논의의 공학적 피드백 루프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핵심 근거다.
[1] 대성당(The Cathedral): 신반동주의(NRx) 철학의 창시자 커티스 야빈(Curits Yarvin, 필명: Mencius Moldbug)이 정립하고 닉 랜드가 수용한 핵심 용어로,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실질적인 지적·도덕적 권력을 행사하는 ‘진보주의적 엘리트 지식인 카르텔’을 뜻한다. 주류 학계, 레거시 미디어, 그리고 관료제 집단 및 문화·연예계가 이에 포함된다.
이는 중앙의 지휘나 통제 없이도 도로 자전거 경주의 선수 무리처럼 일제히 동조하여 움직이며, 특정 시점에 사회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규정된 '올바른 상식과 가치관의 총체' 그 자체인 통합된 주류 진보주의 세계관을 생산·전파하는 지식인 집단의 역학을 비유한 개념이다.
야빈이 굳이 '대성당'이라는 종교적 명칭을 선택한 이유는, 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세속주의와 평등주의를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세 유럽의 대성당처럼 ‘정통 교리를 생산하고 유포하며, 이단(보수·반동주의)을 심판하는 신권정치적 사제 계급’의 매커니즘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즉, 자본가들이 정치적 이권을 사기 위해 로비하는 진짜 대상이자, 대중 선동을 통해 민주 국가의 이념적 정통성과 실제 정책 수립 권한을 독점한 ‘선출되지 않은 진정한 지배 계급’을 꼬집는 신랄한 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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