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번역 완전수정판] 닉 랜드, 암흑계몽주의 제3부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 3부
닉 랜드 (Nick Land), 2012년 3월 19일
이 시리즈의 지난 편은 주인공 멘시우스 몰드버그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지독한 늪에 깊숙이 빠진 채 결말을 맺었다. 몰드버그는 '도킨스는 어떻게 몰락했는가'라는 정치·종교적 사색의 어두운 핵심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몰드버그는 도킨스가 토마스 헉슬리의 인종차별적인 '빅토리아 시대적 정서'를 맹렬히 비난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이는 도킨스의 위선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킨스는 헉슬리의 말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면서도, 굳이 그 말을 인용하는 이유가 "단지 시대정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기묘한 선언으로 설교를 끝맺는다.
몰드버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그 '시대정신'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 참으로 대단한 포착이 아닐 수 없다. 생물학자이자 자연주의적 진화와 아브라함 계열 종교라는 상반된 두 주제에 유독 집착해 온 사상가(도킨스)가, 세계사적인 정신의 일방향적 발전 흐름을 마주한 셈이다. 하지만 그는 이 흐름이 과학의 발전이나 인간 생물학, 혹은 종교적 전통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단호히 부정한다. 정밀한 논리나 증거는 전혀 대지 못한 채 말이다. 그 결과로 나온 횡설수설은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몰드버그의 눈에는 그 모든 맥락이 명확히 보였다.
“사실 도킨스 교수가 말하는 시대정신은 과거 영국-칼뱅주의나 청교도가 믿었던 '섭리'의 개념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어쩌면 잘못 짚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개념은 기가 막힐 정도로 닮아 있다.
시대정신을 다른 말로 바꾸면 바로 '진보'다. 보편주의자들이 진보를 믿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실제로 정치적 맥락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 부르곤 한다. 보편주의는 헉슬리가 부끄러운 망언을 남겼던 1913년 이래로 분명 상당한 진보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편주의가 기생적인 전통이라는 주장이 반박되는 것은 아니다. 진드기에게 진보가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개에게도 진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 이 질문은 거듭 던질 만한 가치가 있다. 우선, 영국의 한 진화론자(리처드 도킨스)가 다른 진화론자(토마스 헉슬리)를 공격하기 위해 집어 든 가장 유용한 무기가 독일어 단어라는 사실부터가 놀랍지 않은가? 더욱이 이 단어는 국가를 숭상하는 난해한 관념론 철학의 계보와 닿아 있으며, 자연주의적 진화 과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역사적 시간관을 뚜렷이 담고 있다. 이는 물리학자들이 양자 불확정성을 두고 논쟁을 벌이다가 느닷없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외치는 상황만큼이나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사실 이 두 사례는 긴밀하게 얽혀 있다. 도킨스가 시대정신에 가지는 맹신은 '아인슈타인적 종교'의 교조적 진보주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몰드버그가 치밀하게 분석해 낸 바 있다.
파렴치함이 도를 넘었다. 과학적 이성의 규칙이 이러한 논쟁에서 적어도 원칙적으로나마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순진하게 믿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아이러니가 극에 달해 비명이 나올 지경이지만,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우주의 절대 법칙'이다. 판단의 기준은 오직 신(新)청교도적인 도덕적 결벽증에 따를 뿐, 검증 가능한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과학적 발언들은 진보적인 사회적 의제에 부합하는지 검열받으며, 이 의제의 권위는 과학적 진실성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도 끄떡없는 듯하다. 몰드버그가 이를 두고 리센코(Trofim Lysenko)를 떠올린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실이 이론과 맞지 않는다면, 사실이 잘못된 것이다." 헤겔의 단언이다. 이 관점에서는 국가를 통해 역사적으로 시각화된 시대정신이 곧 신이며, 하찮은 데이터쯤은 흙바닥에 짓밟아버려도 그만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태도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잘 알고 있다. 평등주의라는 도덕적 이상이 보편적 공리나 반박할 수 없는 교리로 굳어지면서,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적 관용의 한계를 재단하는 현대사 최고의 역설이 완성된다. 관용 없는 태도는 용납할 수 없다는 논리가 널리 받아들여질 때, 혹은 더 현실적으로 문화 권력을 쥔 모든 사회 세력의 지지를 얻을 때, 정치 권력은 자신들에게 편리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아무런 제약 없이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의 마법, 혹은 논리적 왜곡이 가진 힘이다. 오직 관용만이 용납되고, 영향력 있는 모든 이들이 이 명백히 터무니없는 공식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 신념의 보편적 원칙으로 받아들일 때, 남는 것은 오직 정치뿐이다. 완벽한 관용과 절대적인 불관용은 논리적으로 구별할 수 없게 되며, 어느 쪽이든 다른 쪽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A는 A가 아니다'라는 식의 모순이 성립하는 셈이다. 그 결과 펼쳐지는 노골적인 오웰적(Orwellian) 세상에서는 오직 권력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할 수 있는 열쇠를 쥔다. 관용이 지나치게 진보한 나머지, 사회를 감시하는 경찰 기능으로 전락하고, 새로운 이단심문 기관이 존재할 수 있는 실존적 구실을 마련해 준 것이다. 몰드버그는 이를 두고 "불관용을 용인하는 자들은 관용 자체를 남용하는 것이며, 관용의 적은 곧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라며 비꼬았다.
정치를 제한하고 정부의 불관용을 억제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발적 관용은, 민주주의의 거센 파도 속에서 이른바 '관용받을 권리'라는 긍정적 권리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 권리는 갈수록 광범위하게 정의되며 일종의 거대한 권리 증서처럼 변해갔다. 존엄성에 대한 공적인 인정, 공공과 민간을 불문한 모든 영역에서의 평등한 대우, ‘물리적 폭력이 아닌’ 모욕이나 굴욕으로부터의 정부 보호, 경제적 보조금, 나아가 모든 고용과 성취, 사회적 인정 분야에서 통계적으로 균등한 비율을 보장받는 일까지 포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다다를 종말론적 결말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변증법의 세계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불가능성이 정치적 과정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정책적 포만감으로 정치가 멈추는 일이 없도록 영원한 불만의 연료를 계속해서 태워댄다. "내 마음의 싸움을 멈추지 않으리, 내 손에서 칼을 잠재우지 않으리, 영국의 푸르고 아름다운 땅에 예루살렘을 세울 때까지."
그들이 말하는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도 전에, 자유 사회가 품고 있던 조용하고 다양한 다원주의(多元主義)는 온건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공격적인 다문화주의로 어느새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유대인이나 18세기 런던의 위그노 교도들은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누렸고, 그 보답으로 자신들이 정착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반면, 민주주의의 힘을 등에 업은 현대의 피해의식을 지닌 집단들은 정치가들의 부추김을 받으며 목소리를 낼 권리를 요구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에 반하는 요구이며, 사회적으로도 해악이 훨씬 크다. 하지만 스스로를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이들의 목소리라 포장하며 이익을 챙기는 정치가들에게는, 이보다 더 확실한 이해관계도 없을 것이다.
한때 무관심을 전제로 했던 관용은 이제 무관심을 비난하며, 그 과정에서 관용의 반대말로 변질된다. 만약 이것이 어느 한 정당만의 움직임이었다면 민주주의적인 정당 정치를 통해 되돌릴 가능성이라도 있었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미국의 '온정적 보수주의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기득권 언론과 학계의 주류 흐름인 '대성당'을 무모하게 따라잡으려 하며 "누군가 고통받고 있다면 정부가 움직여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우파의 목소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 우파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이며 썩은 내가 진동하는 상태나 다름없다. 이처럼 '진보'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쁜 일일까? 몰드버그는 이 질문에 엄격하게 접근한다.
“어떤 전통이 인간으로 하여금 개인의 목표를 그르치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면, 이는 '미제스적(Misesian) 병리성'을 띤다. 인간이 자신의 유전적 번식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면, 이는 '다윈적 병리성'을 띤다.
그 전통을 따르는 것이 개인에게는 이득이 되거나 최소한 해가 되지 않지만(이탈자가 보상을 받거나 최소한 처벌받지 않는 경우), 집단 전체에는 해를 끼친다면 그 전통은 '기생적'이다. 반대로 개인에게는 손해지만 집단 전체에 이롭다면 '이타적'이다.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이롭다면 '공생적'이며, 양쪽 모두에게 해롭다면 '악성'이다.
이러한 각각의 분류는 미제스적 병리성과 다윈적 병리성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비이성적이기는 하지만 미제스적 병리성이나 다윈적 병리성 중 그 어느 쪽도 띠지 않는 사상은 '사소한 병리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미제스적 체계와 다윈적 체계는 각각 재산 축적과 유전자 번식을 지향하는 '이기적' 동기들의 집합체다. 다윈주의자들이 미제스적 영역을 유전적 이익을 따르는 동기의 특수한 사례로 보는 반면, 매우 합리화된 신(新)칸트주의적 반(反)자연주의에 뿌리를 둔 오스트리아학파 전통은 이러한 환원주의에 저항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이 논쟁이 갖는 궁극적인 함의는 상당히 크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그리 시급하지 않은 말다툼일 뿐이다. 두 체계 모두 '증오' 안에서, 즉 부적응자에게 벌을 주는 인센티브 구조를 반동적으로 용인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증오'는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볼 만한 단어다. 이 단어는 '대성당'이 가진 종교적 정통성을 특히 명백하게 입증하며, 그 특이점들은 주의 깊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 신(新)청교도적 복음주의 열풍에 휩쓸리지 않고 법적·문화적 규범을 분석하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단어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철저한 중언부언이라는 점이다. '증오 범죄'는 결국 일반적인 범죄에 '증오'를 더한 것에 불과한데, 여기서 증오가 덧붙이는 유동적인 의미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잠시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범죄의 예로만 한정해서 질문을 던져보자. 범죄의 동기가 '증오' 탓으로 돌려질 때, 살인이나 폭행이 정확히 어떤 이유로 가중 처벌을 받게 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특히 두드러지는데, 둘 다 일반적인 법적 규범과는 명확한 연관성이 없다.
첫째, 범죄의 형량은 순전히 관념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심지어 '영적(靈的)'이기까지 한 요소에 의해 가중된다. 이는 문명화된 행위를 위반했다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이단적인 의도를 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는 증오를 범죄 행위 자체로부터 완전히 분리해 내는 도구가 된다. 그 결과 증오는 '혐오 발언'이나 단순한 '증오'라는 독자적인 형태로 자리 잡는다. (물론 보호받지 못하는 집단이나 사회적 부류, 혹은 개인을 향해 비판, 논란, 심지어 단순한 욕설을 퍼부을 때 나타나는 격정, 격분, 의로운 '분노' 등과는 늘 철저히 구분된다.) 결국 '증오'란 대성당 체제 자체에 대한 모독이자 그 영적 인도(引導)를 거부하는 행위이며, 세상에 명백히 드러난 종교적 천명(天命)에 정신적으로 저항하는 몸짓이다.
둘째, 이와 맞물려 '증오'는 선진 민주주의 사회의 균형 잡힌 정치적 극성과 관련해 의도적이고 전략적인 비대칭성을 띤다. 끊임없이 나아가는 진보의 행진과 보수주의의 무력한 불평 사이에서, 이 기준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앞서 보았듯 오직 우파만이 '증오'를 저지를 수 있다. '증오' 억제라는 신학적인 면역 체계가 엘리트 교육과 언론 시스템 내에 공고해지면서, 고도로 선택적인 보호 조치들이 적용된다. 그 결과 담론, 특히 권력을 쥔 담론은 일관되게 좌측으로, 즉 갈수록 더 전면적이고 급진화되는 보편주의 방향으로만 톱니바퀴처럼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추세가 지닌 병리성은 극에 달해 있다.
피해자 지위는 경제적 무능에 대한 정치적 보상으로 부여되기 때문에, 그것은 사회적 파탄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자동적인 문화적 메커니즘을 구축한다. 불평등을 곧 불의로 조건반사식으로 동일시하는 보편주의적 신조는 '처지가 비참하고 지위가 낮을수록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더 강력해지며, 그들의 명분 또한 더 순수하고 고결해진다'라는 명제 외에는 그 어떤 대안도 상상하지 못한다. 세속적인 실패가 곧 영적 선민(選民)의 징표가 되는 셈이며(마르크스-칼뱅주의), 이 중 단 하나라도 반박하려 드는 행위는 명백한 '증오'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 냉혹한 신반동주의자마저 과거 빅토리아 시대 전성기의 고풍스러운 태도를 흉내 내며, 정치적 폭력, 범죄, 노숙, 파산, 복지 의존 등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불이익이 그저 개인의 도덕적 결함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처지는 상당 부분, 어쩌면 압도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순전한 불운을 반영한다. 학대 가정에서 무질서하게 자라나 범죄로 무너진 지역사회에 고립된, 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충동적이며 건강하지 못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탓하기 전에 신을 저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재앙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효과적인 인센티브 구조의 관점에서 볼 때, 앞서 말한 비참한 사정이나 불운 따위는 눈곱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현실 세계에서 통하는 철칙은 오직 하나뿐이다. 무언가에 혜택을 주기 시작하면, 그것은 반복되고 확산된다.
사회민주주의가 ‘고통을 겪는 개인이나 불운한 문화이든, 혹은 대기업이든 간에’ 나쁜 결과의 충격을 완화하려 할 때 상황이 더 악화된다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만큼이나 절대적인 필연이다. 이 공식을 우회하거나 뛰어넘을 방법은 없다. 오직 미련한 희망사항과 퇴행에 대한 공모가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반동주의의 핵심적인 통찰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운명이다. 왜냐하면 이는 '진보적'인 개선을 위한 모든 시도가 '역설적으로' 끔찍한 실패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대중에게 절대 환영받을 수 없는 궁극의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민주주의도 이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는 곧 모든 민주주의가 결국 실패할 것임을 의미한다.
미제스적-다윈적 퇴행이 빚어내는 폭주하는 소용돌이는, 주류 '대성당'의 대변지인 <더 애틀랜틱(The Atlantic)>에 기고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순하고 전형적인 제도권 자유지상주의자' 메건 맥아들(Megan McArdle)의 글에 아주 깔끔하게 담겨 있다.
“유럽의 인구 변화가 가져온 첫 번째 심각한 균열이 유럽의 복지 예산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다소 역설적이다. 연금 제도 그 자체가 유럽의 성장을 형성하고 제한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0세기에는 미래의 세금 수입으로 확정된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는 사회보장 제도가 전 세계적으로 도입되었다. 연금 전문가들은 이를 '청년들의 세금으로 노인들의 연금을 대주는 부과방식'이라 부르지만, 비판자들이 보기엔 다음 세대가 끊기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폰지 사기'에 불과했다.
이러한 제도들은 노후 빈곤에 대한 공포를 크게 덜어주었지만,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회보장 제도가 더 관대해질수록(그리고 노후가 더 보장될수록) 사람들은 아이를 더 적게 낳는다. 한 추정치에 따르면, 미국의 (대체 출산율 이상인) 출산율과 유럽의 출산율 차이 중 50~60%는 유럽의 더 관대한 연금 제도로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유럽의 연금 제도가 바로 그 연금 제도 자체와 일부 유럽 정부들을 파산 상태로 몰고 간 인구 감소의 불씨를 지핀 셈이다.”
미국이 유럽의 죽음으로 향하는 길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있다는 맥아들의 터무니없는 암시에도 불구하고, 진단의 전반적인 개요는 명확하며 갈수록 (애써 무시되기는 하지만)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날로 세를 얻고 있는 진보적 신조에 따르면, 자녀와 저축을 통해 확보하는 복지는 '보편적'이지 않기에 도덕적으로 미개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적 복지는 민주 시민에게 보편적으로 지급되는 보편적 수혜나 '실질적 권리'로 최대한 널리, 그리고 빠르게 대체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타적인 국가'를 거쳐야만 한다.
그 결과, 정치적 올바름을 전혀 봐주지 않는 냉혹한 현실 탓에 경제와 인구가 한꺼번에 붕괴한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적어도 우리의 영혼만큼은 더럽혀지지 않을 텐데 말이다.
오, 민주주의여! 감상에 젖으며 죽어가는 바보 같은 존재여, 저 좀비 무리가 네 영혼 따위에 눈길이나 줄 것 같은가?
몰드버그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내 생각에 보편주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권력을 숭배하는 신비주의 밀교(密敎)'다.
보편주의가 권력을 숭배하는 밀교인 이유는, 이 사상의 번식 주기에서 ‘국가’라는 존재가 핵심적인 숙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보편주의의 표면적 특징들을 살펴보면 그 대부분이 국가를 장악하고 유지하며, 국가의 힘을 빌려 자신들이 계속해서 번식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가 없는 보편주의는 모기가 없는 말라리아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렵다.
보편주의가 밀교인 이유는 유일신 신앙의 자리에 형이상학적 미신 대신 인간, 진보, 평등, 민주주의, 정의, 환경, 공동체, 평화 같은 철학적 신비주의를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정통 보편주의 교리가 정의하는 이러한 개념들은 단 하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 어떤 합리적인 사유도 이끌어내지 못한 채 무의미한 정신적 에너지만 끝없이 집어삼킬 뿐이다. 이런 점에선 플로티노스(Plotinus)의 형이상학적 관념이나 탈무드의 교리적 말장난, 혹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탁상공론이 가진 공허함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에 덤으로, 현대 정치 체제의 핵심 경로 가이드를 소개한다.
체제 (1) : 공산주의 폭정
평균 성장률 : 약 0%
발언권 / 이주 가능성 : 낮음 / 낮음
문화적 풍토 : 광기 어린 이상주의(理想主義)
삶의 모습 : 고되지만 ‘공평’함
다음 단계로의 이행 경로 : 경제 활동이 거의 멈춘 임계점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시장의 존재를 재발견함
체제 (2) :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평균 성장률 : 5 ~ 10%
발언권 / 이주 가능성 : 낮음 / 높음
문화적 풍토 : 냉혹한 현실주의
삶의 모습 : 고되지만 생산적임
다음 단계로의 이행 경로 : 주류 기득권 체제인 대성당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민주화의 길로 들어섬
체제 (3) : 사회민주주의
평균 성장률 : 0 ~ 3%
발언권 / 이주 가능성 : 높음 / 높음
문화적 풍토 : 위선적 도덕주의
삶의 모습 : 안락하지만 지속 불가능함
다음 단계로의 이행 경로 : 미봉책으로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름
체제 (4) : 좀비 아포칼립스
평균 성장률 : 해당 없음
발언권 / 이주 가능성 : 높음 (대부분 무의미한 절규에 불과함) / 높음 (연료, 탄약, 비상식량, 귀금속 화폐를 쥐고 있을 때만 가능)
문화적 풍토 : 생존주의
삶의 모습 : 버티기 고달프거나, 혹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함
다음 단계로의 이행 경로 : 미지수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