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번역] 멘시우스 몰드버그,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제1장: 캔버스로 이루어진 수평선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제1장: 캔버스로 이루어진 수평선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 2008년 4월 17일
당신은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인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변에 그런 친구가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들을 위한 글이다. 어쩌면 이 낯선 블로그, '무조건적 유보(Unqualified Reservations)'를 소개하는 입문서로 쓰기에도 적절할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라면 가톨릭 신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설령 신자라 해도 교황의 말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로마 교황청의 음험한 속박에서 벗어나 생각의 자유를 찾으라고 제안하는 공개 서한을 쓴다고 상상해 보자. 요즘 세상에 이런 글은 영 시대를 역행하는 짓처럼 보일 것이다. 게다가 첫머리는 또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하지만 이 블로그에서는 시대에 뒤처지는 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작은 어차피 이미 했으니 말이다.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과 비슷할까?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다. 두 가지 모두 저마다의 신념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은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으며, 혹은 거짓조차 되지 못할 만큼 터무니없는 소리일 수도 있다.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혹은 열린 마음을 가진 가톨릭 신자)라면 자신이 가진 모든 신념이 진실이기를 바라겠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의 상냥한 도움을 받아 언제든 그 신념을 재평가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가톨릭과 진보주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가톨릭은 흔히 말하는 '종교'라는 점이다. 가톨릭의 핵심 신념은 영적 세계에 대한 주장이며, 이는 교황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신자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반면 진보주의적 신념은 정부와 역사, 경제와 사회 같은 현실 세계에 대한 주장이다. 삼위일체와 달리,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직접 겪고 눈으로 확인하는 현상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 대부분은 정부 기관에서 일해 본 적이 없으며, 경험이 있다 해도 극히 일부의 좁은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그저 책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성경은 아닐지라도 성경과 다를 바 없다. 경제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이란 것도 고작 기름값 변동 같은 일상적인 수준에 머문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삶이 아주 길고 유별나지 않았다면, 개인의 기억은 국가 경영이나 역사 같은 거대한 질문에 거의 아무런 실마리도 주지 못할 것이다. 내 기억 역시 그렇다.
물론 진보주의 사상의 상당수는 순수 이성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순수 이성으로 가톨릭을 도출했고, 존 롤스(John Rawls)는 순수 이성으로 진보주의를 도출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둘 중 한 명은 오류를 범한 셈이다. 어쩌면 둘 다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논증을 직접 검증해 본 적이 있는가? 변수 하나만 잘못되어도 증명 전체가 무너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그런 과정을 거쳐 진보주의자가 되었는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 허무주의자 상태에서 출발해(“우리는 허무주의자다! 우리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오직 깊은 사색만을 거쳐 진보주의라는 결론에 도달했단 말인가? 물론 개인의 경험을 내가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부모가 진보주의자였거나, 혹은 어떤 책이나 스승, 혹은 지적인 자극을 통해 감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억해 두자. 가톨릭 신자가 되는 과정도 이와 완전히 똑같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더 있다.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신앙'이 필요하다. 성령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진보주의자가 되려면 '신뢰'가 필요하다. 자신의 세계관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만의 좁은 시야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경험한 현실을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인류의 경험 전체를 공유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인류의 경험에서 발췌하여 엮어낸 방대한 글과 소리, 영상이라는 가공된 기록물들을 읽고 듣고 보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엮은 이는 과연 누구인가? 바로 이 대목에서 앞서 말한 '신뢰'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지만, 진보주의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으며,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보냈고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줄곧 친환경 치약인 '톰스 오브 메인(Tom’s of Maine)'으로 양치를 해왔다. 그런 내가 진보주의를 벗어나게 된 이유는 단 하나, 그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마멧(David Mamet)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신뢰를 잃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가가 자신은 더 이상 '생각 없는 리버럴'이 아니라고 선언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빌리지 보이스(Village Voice)에 기고한 에세이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 글에는 500개에 달하는 댓글이 달렸는데, 내가 놓친 게 아니라면 마멧 덕분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댓글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마멧은 마멧일 뿐이다. 그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 아니라 충격을 주려 했을 뿐이다. 게다가 '리버럴(liberal)'이라는 단어는, 적어도 오늘날의 정치적 성향을 지칭할 때는 거의 혐오 표현에 가깝다. 마치 전직 가톨릭 신자가 "내가 왜 더 이상 생각 없는 교황의 노예가 아닌가"를 설명하는 꼴이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리버럴이었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는 진보주의자이며, 당신 역시 마찬가지다. 예의의 기본 원칙은 간단하다. 남이 스스로를 부르지 않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지 않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마멧은 진보주의를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수주의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세상에나, 문제를 스스로 더 어렵게 꼬아버린 셈이다. 온 나라 국민이 오직 가톨릭 신자와 힌두교도, 이 두 부류로만 나뉜 나라에 살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교황청의 음험한 속박에서 누군가의 정신을 해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일 아닌가? 그런데 그가 로마를 벗어나는 동시에 칼리(Kali)와 크리슈나(Krishna), 가네샤(Ganesha)까지 숭배하도록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예를 들어 마멧은 보수 성향의 작가 토마스 소웰(Thomas Sowell)을 두고 "당대 최고의 철학자"라며 치켜세웠다. 나 역시 토마스 소웰을 좋아하고 그의 저작이 가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최고라는 찬사는 과한 감이 있다. 실제로 구글에 그를 검색해 보면, 그의 칼럼이 '타운홀닷컴(townhall.com)'이라는 보수 성향 웹사이트에 자주 실린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해당 링크를 한 번 클릭해 보라. 끔찍하기 짝이 없는 그래픽 디자인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오바마 진영의 그래픽 디자인이 다른 이들에 비해 얼마나 독보적으로 뛰어난지 느껴본 적이 있는가? 폰트 디자이너라면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반면 이 사이트는 폭스 뉴스(Fox News)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조잡함과 불쾌함으로 가득하다. 확인했다면 미련 없이 '뒤로 가기'를 누르자. 아니면 앤 콜터(Ann Coulter)의 칼럼 같은 것을 읽어보든가 말이다. 정말이지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수준이다.
나는 진보주의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수주의자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자코바이트(Jacobite)'에 가깝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에게는 미국의 보수 사상을 소화해 내는 능력이 생겼다. 물론 폭스 뉴스나 타운홀닷컴보다는 조금 더 수준 높은 성향의 글을 말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대단히 인위적으로 길러진 취향이며, 과연 이를 '취향'이라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다. 아마 버락 오바마가 제레미아 라이트(Jeremiah Wright) 목사의 선동적인 설교를 받아들이던 방식과 비슷할 것이다. 데이비드 마멧이 독자들을 타운홀닷컴 같은 곳으로 안내하는 행동은, 동성애에 거부감을 가진 삼촌에게 "이 훌륭한 영화를 보면 동성애자 인권의 가치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며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을 추천하는 꼴이다. 이는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그저 엿이나 먹으라는 식의 도발일 뿐이며, 그게 바로 마멧의 방식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정확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진보주의를 그만두면 보수주의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내 짐작에 대다수 진보주의자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심리적 동기는, 보수주의자들의 손에 세상이 망가지는 것을 막으려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공은 도랑으로 빠져버렸고, 당신은 다시 그 음험한 속박의 손길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셈이다.
진보 성향의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National Public Radio)가 틀렸다면 보수 성향의 폭스 뉴스가 반드시 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두 매체의 주장이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니 둘 다 맞을 수는 없다. 하지만 둘 다 완전히 틀릴 수는 없는 걸까? 여기서 틀렸다는 것은 약간의 오류가 있다거나, 둘 다 절반쯤은 맞고 절반쯤은 틀렸다거나, 혹은 진실이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두 매체 모두 현실과 그 어떤 일관된 연관성도 맺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잠시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 보자. 반드시 그렇게 믿어야만 하겠지만, 진보주의자라면 보수주의를 일종의 집단적 망상으로 여길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닌가! 1억 명이 넘는 사람들, 그중에는 아주 둔한 이들도 있지만 기가 막히게 똑똑한 이들도 포함된 그 거대한 무리가 모두 일종의 집단 최면 상태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우리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정말이지,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결국 보수주의자들이 체계적으로 왜곡된 정보에 속아왔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적어도 모두가 다 바보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악한 존재들도 아니다.
타운홀닷컴에서 밤낮으로 시간을 보낸다 한들, 세상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세상을 파괴하려는 사악한 계획을 세우며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골룸(Gollum)처럼 낄낄거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다. 그들 역시 당신과 똑같이 생각한다. 자신이 보수주의를 지지함으로써 이 세상의 아름답고 선하며 진실된 가치들을 수호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보수주의는 정부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신봉하는 하나의 정치 이론이다. 이들이 이 이론을 붙들고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폭스 뉴스나 타운홀닷컴, 혹은 지역 대형 교회처럼 자신들이 선택한 정보원으로부터 그 사상을 지지하고 강화하며 확증해 주는 사실들(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거짓들)을 끊임없이 주입받기 때문이다.
이런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수주의가 단순한 개인의 의견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보수주의를 정부가 아닌 농구에 관한 이론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보수주의'는 픽앤롤(Pick and Roll)이나 외곽 플레이, 삼각 수비 등 농구 선수와 감독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전술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 될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당신이 농구 감독이 아닌 이상 농구에 대한 개인적 의견은 아무런 영향력도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 농구는 민주주의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팬은 물론이고 선수조차 투표권이 없다.
반면 보수주의가 체계적인 망상의 틀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 팬들이 단순한 구경꾼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위 있는 보스정치인 또는 보스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지지자와 사업체들이 모여 유착한 거대한 정치기계의 지지자들이다. 이 기계는 신념을 가진 이들을 붙잡아두지 못하면 순식간에 소멸하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지층을 유지해야 할 강력한 유인을 가진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낸다. 참으로 기묘하면서도 정교한 작동 원리다.
따라서 진보주의자의 눈에 비친 미국 민주주의는 결국 선전 선동과 무지, 그리고 왜곡된 정보로 쌓아 올린 범죄 집단에 가까운 정치기계에 맞서, 진실과 이성(理性)이 사투를 벌이는 각축장이다. 다소 냉소적인 세계관일지 모른다. 하지만 진보주의가 옳다고 믿는 이상 보수주의는 틀릴 수밖에 없으며,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훨씬 더 비관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만약 미국의 민주주의가 '진실과 이성' 대 '범죄 집단에 가까운 정치기계'의 대결이 아니라, 단지 '두 개의 범죄적인 정치기계'들이 벌이는 주도권 싸움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만약 진보주의 역시 보수주의와 똑같은 속성을 지닌 존재라면 말이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당신에게 그 진실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보수주의를 일종의 정신 질환으로 생각해보자. 폭스 뉴스가 마치 모기처럼 바이러스 X를 퍼뜨려 미국 인구의 절반을 감염시켰고, 뇌를 잠식당한 이들은 조지 W. 부시(George W. Bush)를 '지극히 평범한 이웃'으로 여기게 되었다. 지구 온난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미군이 이라크의 사드르 시티(Sadr City)에 민주주의를 이식할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도 이 질환의 증상이다.
다행히 나머지 절반의 미국인들은 진보라는 항체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와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라는 건강한 모유를 매일 섭취하며 면역력을 유지하고, 덕분에 진실의 감미로운 빛 속에서 아무런 위협 없이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다.
정말 그럴까? 방금 우리는 바이러스와 항체, 모기와 모유라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개념을 설정했다.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고 하는 '오컴의 면도날'을 주장한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이라면 결코 이 구조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는 또 다른 바이러스 Y가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편이 훨씬 명쾌하지 않은가? 한쪽은 감염되었고 다른 한쪽은 면역력을 갖추었다고 보기보다,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른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단순하고 자연스럽다.
바이러스 X를 바이러스답게 만드는 본질은 영화 <죠스>에 나오는 상어와 같다. 이 바이러스의 삶의 목적은 오직 먹고, 헤엄치고, 복제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바이러스의 모든 특성은 철저히 생존과 적응이라는 관점으로 설명된다.
만약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면 바이러스는 기꺼이 그렇게 행동한다. 예를 들어 국제 유대인 음모론 같은 주제에 관해서라면, 우리나 바이러스 X나 '그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생각을 같이한다. 다행히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악성 바이러스 N의 생각과는 다르다. 이를 설명하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가장 단순한 이유는 명확하다. 폭스 뉴스가 로고에 하켄크로이츠를 박아 넣고 빌 오라일리(Bill O’Reilly)에게 시온 장로 의정서 음모론을 떠들라고 지시한다면, 시청률이 바닥을 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한 '현실과의 일관된 연관성이 없다'는 말의 진짜 의미다. 어떤 이유에서든 보수주의자의 뇌 속에서 진실보다 오류가 더 잘 복제된다면, 그들은 결국 그 오류를 믿게 된다. 반대로 진실의 생존 적응력이 더 높다면 그들은 진실을 믿을 것이다.
폭스 뉴스 같은 곳에서는 진실보다 오류가 훨씬 더 그럴싸하고 매력적인 이야깃거리가 되기 쉽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따라서 회의론(懷疑論)을 향한 첫걸음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진보주의자들이 굳게 신뢰하는 기관들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의심을 품어보는 것이다.
만약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 역시 폭스 뉴스처럼 오류를 복제해 퍼뜨릴 수 있다면, 우리는 실제로 바이러스 Y의 존재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이 바이러스 Y는 바이러스 X가 틀렸을 때 맞을 수도 있고, 바이러스 X가 맞았을 때 틀릴 수도 있으며, 둘 다 맞거나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결국 두 바이러스 모두 현실과 그 어떤 일관된 연관성도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도 아무런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이 이론에는 대단히 매혹적인 대칭성이 존재한다. 전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한 사회의 절반은 체계적인 망상에 빠져 있고, 나머지 절반은 지극히 온전한 정신을 유지한다는 이 모순적인 수수께끼를 단번에 풀어주기 때문이다. 그 답은 명쾌하다. 사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쪽 따윈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이론은 데이비드 마멧의 글에서 기가 막히게 드러나는 기이한 모순을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보수주의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대변하듯, 그는 글의 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부의 역할은 또 어떨까? 내 성장 배경이나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막연히 정부를 꽤 좋은 존재로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삶에 영향을 미친 일들과 주변에서 목격한 현상들을 하나씩 꼽아보면, 정부의 개입이 비극 외에 이렇다 할 결과를 낳은 사례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목에 앞서,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1960년대의 아이로 자라면서 나는 정부는 부패했고, 기업은 착취를 일삼으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일종의 신조처럼 받아들였다.”
그래, 데이브. 1960년대의 아이였던 시절에는 정부가 '악(惡)'이라는 것을 하나의 신조로 받아들였다면서, 이제 와서 새로 깨달은 믿음이라는 게 겨우… 정부가 '악'이라는 사실인가?
이쯤 되면 사도 바울처럼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회심(回心)을 한 게 아니라, 제자리에서 자동차 바퀴 자국이나 격렬하게 남기며 뱅뱅 돌고 있었던 꼴 아닌가?
오늘날 미국 정치에서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 자신이 속한 정부를 증오한다는 점이다. 다만 그들이 증오하는 정부 부처(部署)가 서로 다를 뿐이며, 상대가 증오하는 다른 정부 부처는 마치 내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예를 들어 외교 정책을 장악하려는 싸움에서, 진보주의자들은 국방부를 끔찍이 싫어하는 대신 국무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한다.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은 국무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국방부를 향해 무한한 애정과 지지를 보낸다.
이 구조가 앞서 우리가 세운 '바이러스 X와 Y의 이론'에 얼마나 절묘하게 들어맞는지 보라. 워싱턴이라는 거대한 성채 안에는 수많은 방이 존재하며, 그중 일부는 바이러스 X 기계의 영토이고, 다른 일부는 바이러스 Y에 영구적으로 감염된 상태다.
그리고 그 미국 정계의 핵심지 벨트웨이(Beltway) 바깥에는 침을 흘리며 배회하는, 바이러스에 찌든 좀비 유권자 집단이 버티고 있다. X 좀비들은 Y 기관들을 증오하고, Y 좀비들은 X 기관들을 증오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워싱턴 '전체'를 증오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워싱턴을 무너뜨리기 위해 결코 하나로 뭉칠 수 없으며, 거대한 정치기계 전체는 아주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이 구조가 얼마나 절묘한지 보이지 않는가? 유권자들을 서로 경쟁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협력하는 두 개의 정당으로 갈라놓음으로써, 그리고 어느 한쪽도 상대방을 완전히 파멸시킬 수 없게 만듦으로써, 양당제는 영구히 살아남을 정부를 창조해 낸다. 설령 그 정부가 사라졌을 때 시민들이 훨씬 더 행복해질지라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쫓아온 수수께끼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진짜 보상이다. 보수주의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진보주의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당신은 마침내 이 거대한 정부라는 시스템에 '실질적으로' 대항할 방법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최소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그 어떤 정치인도, 정당 운동도, 제도권 기관도 당신의 지지를 받을 만한 가치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그것은 상상 이상으로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경험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진보주의를 본질적으로 의심해야 할 진짜 이유를 발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의 아주 사소한 팩트체크 실수 같은 자잘한 오류는 하등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 "진보주의는 기본적으로 옳고, 보수주의는 기본적으로 틀렸다"는 당신의 확고한 신념을 뒤흔들기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약간의 기이하고 사소한 결함이 있을지언정, 보수주의라는 질병을 치료하는 해독제로서 진보주의는 여전히 보존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설령 그것이 완벽한 항체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바이러스 Y가 보수주의를 막아내는 '백신' 역할 정도는 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우리는 진보주의 운동과 보수주의 운동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비대칭성들을 간과하고 있었다. 두 세력은 서로의 거울상인 '사악한 쌍둥이'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유기체다. 따라서 한쪽은 신뢰할 만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다는 가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그 모든 구조적 이점은 진보주의 진영에 쏠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진보주의 진영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오늘날 미국의 '블루 스테이트(민주당 우세 주)'와 '레드 스테이트(공화당 우세 주)'라는 표현이 직관적으로 보여주듯,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완전히 서로 다른 부족(部族)이다. 이들의 성향은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대단히 명확한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
몇 주 전 내 아내가 딸을 출산했을 때의 일이다. 아이가 퇴원하기 직전, 의사들은 가벼운 심장 문제를 발견했다.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지만, 확인 차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캠퍼스의 소아심장과 과장이 잠시 병실을 방문했다. 아주 성품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부모인 우리를 안심시키고 분위기를 띄우려고 건넨 첫마디는 다름 아닌 조지 W. 부시를 겨냥한 정치적 농담이었다. 만약 그가 우리를 저 내륙 지방의 시골뜨기로 보았다면, 과연 그런 소리를 했을까?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그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우리를 고학력, 중산층 이상의 리버럴 백인 풍자 웹사이트 '백인들이 좋아하는 것들(Stuff White People Like)'[1]에서의 풍자 대상과 같은 백인 부족의 일원으로 알아본 것이라 해야 맞다. 이 자그마한 풍자 사이트는 우리 블로그보다 10분의 1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100배에 달하는 방문자를 끌어모았는데, 이는 그곳이 무언가 본질적인 지점을 정확히 짚어냈다는 확실한 증거다. 작가인 크리스 랜더(Chris Lander)의 유머 코드는 사실 단 하나뿐이다. 스스로 규정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특정 집단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가장 원치 않을 법한 성(last name)을 임의로 부여해 버린 것이다.
랜더가 말하는 ‘백인’은 버닝맨(Burning Man) 축제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듯 실제로도 압도적인 다수가 백인이다. 하지만 이 부족 안에는 아시아계는 물론, 흑인이나 라틴계 ‘백인’도 수두룩하다. 사실 랜더가 지적했듯 이 ‘백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오히려 주변에 소수 인종을 두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들을 굳이 ‘백인’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일종의 반어법을 이용한 유머인 셈이다. 인종 통합 고등학교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랜더가 쓰는 ‘백인(white)’이라는 단어는 흑인들이 흔히 “참 백인스럽군”이라고 할 때의 어감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에 '빵(bread)'이라는 단어까지 덧붙여 지루하고 개성 없는 중산층 백인 문화를 뜻하는 '흰빵(white bread)'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그 뉘앙스가 완벽하게 살아난다.
이 이상한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짧게 말해 이들은 미국의 지배 계급이다. 우리 블로그에서는 이들을 '브라만(Brahmins)'이라 부른다. 브라만 부족은 세습되기보다는 후천적으로 영입되는 집단이다. 누구나 브라만이 될 수 있으며, 사실 기존의 '백인적' 배경이 옅을수록 더 유리하다. 그것은 오롯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취해 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원조 브라만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학자, 과학자, 예술가, 또는 공직자로서 거둔 성공으로 결정된다. 한마디로 브라만은 지식과 정신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브라만이 지배 계급인 이유는 문자 그대로 이들이 사회를 통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공공 정책은 대개 이 ‘백인들’이 모이기를 좋아하는 온갖 비정부기구에 포진한 브라만들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물론 모든 진보주의자가 브라만인 것도 아니고, 모든 브라만이 진보주의자인 것도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이 공식은 정확히 성립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브라만으로서의 정체성이 미국의 대학 시스템과 결코 떼려야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단단히 얽혀 있다는 사실이다. 브라만 계급의 지위는 학업적 성취를 통해 부여되거나, 책 집필 혹은 환경 보호 활동 같은 학술적 성격에 준하는 업적을 통해 공인된다. 그러니 대다수 브라만이 대단히 지적이고 세련된 면모를 보이는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야만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런 척이라도 흉내 내지 못하면 그들은 브라만이 될 수 없다.
물론 브라만의 천적은 레드 스테이트에 사는 미국인들이다. 예전에는 이 부족을 가리켜 또 다른 힌두 카스트 명칭인 '바이샤(Vaisyas)'로 부르곤 했지만, 이제는 지역 토박이 중산층·저소득층을 뜻하는 '타우니(Townies)'[2]라고 부르는 편이 훨씬 더 직관적일 듯하다. 만약 당신이 진보주의자라면 십중팔구 브라만 계급일 것이고, 이 타우니들을 잘 알면서도 대단히 싫어할 것이다. 그들은 뚱뚱하고, 예외 없이 백인이며, 교외나 그보다 더 외진 시골 구석에 살면서 참나무 가구와 뜨개질, 미니밴에 열광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대부분 공화당을 지지한다. 설령 대학을 나왔다 하더라도 신입생 필수 이수 과목인 다문화 교육 수업을 들으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을 인물들이다. 게다가 이들의 직업은 설령 화이트칼라일지라도 지적인 깊이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이처럼 부족주의(部族主義)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면 복잡하던 미국의 정치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는 제3세계 국가들에서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앙골라에는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과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이라는 정파가 존재한다. 양측 모두 자신들이야말로 앙골라 국민 전체의 미래를 위해 일한다고 입이 마르도록 주장한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측은 온통 오반보(Ovambo) 부족이고, 앙골라 민족해방전선 측은 전부 바콘고(Bakongo) 부족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브라만과 타우니의 계급 관계는 명확하다. 브라만이 상류층이고 타우니는 하류층이다. 브라만이 타우니를 혐오할 때의 감정이 '경멸'이라면, 타우니가 브라만을 증오할 때의 감정은 '적개심'이다. 이 둘은 결코 헷갈릴 수가 없다. 만약 두 부족이 계층화된 언어권을 공유한다면, 브라만은 상류층들이 쓰는 표준어를 구사하고 타우니는 중·하류층에서 쓰는 속어·은어를 쓸 것이다.
다시 말해, 브라만이 타우니보다 훨씬 세련됐다. 본질적으로 더 우월한 브라만의 취향은 시간이 흐르면서 아래에 있는 타우니에게로 흘러내려 간다. 20년 전만 해도 ‘유기농 건강식’은 극소수 브라만들만의 유별난 취향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오늘날 변두리 교외 주민들이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고, 홀푸드 마켓에서 장을 보며, 모던 록을 듣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진보주의가 보수주의보다 훨씬 더 세련된 문화로 통하는 이유다. 당장 진보 성향을 드러내는 유명인사는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보수 성향의 유명인사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수많은 진보 성향의 연예인들이 진심으로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냉정하게 계산기만 두드려봐도 답은 나온다. 보노(Bono)의 홍보 담당자들은 그가 에이즈 퇴치 목소리를 높일 때 기뻐하지만, 멜 깁슨(Mel Gibson)의 홍보 담당자들은 그가 유대인을 비난하는 발언을 할 때 가슴을 졸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수주의를 비판할 때, 그것은 우리 부족에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적을 공격하는 셈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적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진다. 사실 의심스러울 정도로 맥없이 넘어진다.
보수주의의 일대기를 온통 뜯어봐도 악취만 진동할 뿐이다. 보수주의라는 바이러스는 교육 수준이 낮고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복제되고 확산한다. 사실 타우니 부족은 본질적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낳았던 바로 그 집단과 궤를 같이한다. 그나마 지적인 연구소라고 내세우는 곳들도 괴짜 재벌들의 뒷돈으로 연명하는 변두리 삼류 신문사나 방송국, 기괴한 싱크탱크가 전부다. 게다가 정부 내에서 보수주의의 보루 역할을 하는 곳이라곤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인 군대, 그리고 기업 로비스트들이 환경을 파괴하는 대가로 검은 돈을 챙길 수 있는 온갖 이권 정부 부처들뿐이다.
과연 이를 ‘바이러스’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반면에 Y 바이러스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고결하고 저명한 집단 내부에서 복제되고 확산한다. 일류 대학교, 거대 언론사, 그리고 록펠러(Rockefeller)나 카네기(Carnegie), 포드(Ford) 재단 같은 유서 깊은 재단들 말이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침을 흘리는 좀비들은 다름 아닌 이 나라,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성공한 인물들이다. 정부 안에서 이들이 하는 일은 세계 평화를 구축하고, 환경을 보호하며,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이다.
본질적인 진실은 진보주의야말로 미국의 주류 전통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진보주의가 지난 200년, 혹은 지난 5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히 변했다. 하지만 이 나라가 존속하는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했던 사상과 이상들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단 한 번의 격렬한 반전이나 변곡점도 없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저 좋고 오래된 현대 진보주의로 매끄럽게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미국의 전통'이란 뉴잉글랜드의 전통을 의미한다. 만약 남북전쟁의 결과가 달랐다면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이미 150년 전에 히피 공동체에 관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말했듯, 왕을 치려거든 반드시 죽여야 한다.[3] 고작 50년 남짓한 역사에 온갖 초라한 뿌리를 둔 보수주의는 얼마든지 조롱하고 깎아내리며 경멸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것과 진보주의를 비판하는 것의 차이는, 몰몬교를 비판하는 것과 기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 진보주의는 수박 겉 핥기식으로 조금만 의심할 수 없다. 의심하려면 판을 완전히 뒤엎는 거대한 규모로 의심해야만 한다.
보수주의가 그저 ‘X 바이러스’에 불과한 부패하고 망상적인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미국의 옆구리에 붙은 진드기, 일종의 일탈이자 낙태된 태아, 혹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오류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교육의 실패, 리더십의 부재, 그리고 진보의 지체로 보는 것이다. 한 마디로, 참으로 보잘것없는 미미한 존재로 치부하는 셈이다.
진보주의를 의심한다는 것은 미국이라는 이념 그 자체를 의심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진보주의야말로 그 이념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종착지이기 때문이다. 만약 진보주의가 ‘Y 바이러스’라면,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이미 감염된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치료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이하고도 끔찍한 생각이며, 일종의 종말에 대한 예언과도 같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명확한 논리가 성립한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만약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려는 무서운 '생각의 바이러스'라면, 과연 어느 쪽 전통을 감염시키겠는가? 미국의 지성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주류의 흐름인가, 아니면 저 미개하고 낙후된 변두리의 시골 구석인가? 브라만인가, 아니면 타우니인가? 유행을 선도하는 세련된 이들인가, 아니면 유행에 뒤처진 이들인가?
당신의 DNA를 뉴욕 타임스에 복제해 두면, 그것은 앞으로 20년이나 30년에 걸쳐 서서히 폭스 뉴스로 흘러내려 갈 것이다. 반면 당신 자신을 폭스 뉴스에 복제한다면, 당장 다음 선거 한두 번쯤은 좌지우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조지 W. 부시라는 인물에게 지적으로 감화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에게 느낀 혐오감이나 반발심은 제외하고 말이다.)
당신이 소위 말하는 엘리트 계층(여기서는 편의상 지식인 계급인 '브라만'이라 부르겠다)이라면, 이미 Y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살아가는 셈이다. 당신 역시 그 좀비 중 한 명이다. 하버드 대학과 뉴욕 타임스, 그리고 과거 데이비드 마멧 시절에 이른바 '기득권층'이라 불리던 집단이 지금 당신의 세계관을 통틀어 형성했다. 정치와 역사, 과학과 사회에 대해 당신이 아는 모든 지식은 이 기관들이 촘촘히 쳐놓은 거름망을 거쳐 나온 것들이다. 물론 그들이 제공하는 이야기는 내부적으로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실일까?
사실 그 이야기는 대체로 앞뒤가 잘 맞는다. 워낙 정교하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군데군데 꿰맨 바늘자국이 한두 군데쯤 보이기 마련이다. 영화 《트루먼 쇼》의 짐 캐리(Jim Carrey)처럼 세상의 끝까지 배를 타고 나아갈 필요도 없다. 그저 잠들어 있던 의심의 세포를 깨우고 조금씩 꿈틀거리게 만드는 데는, 기존의 틀에 교묘하게 들어맞지 않는 몇 가지 사소한 단서만 있으면 충분하다.
세 가지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작은 게임을 하나 제안한다. 당신은 진보적인 답변을, 나는 보수적인 답변을 내놓는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을지 한번 지켜보자.
이 질문들에 진보적인 답변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진보적인 답변은 분명 존재한다. 보수적인 답변이 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일에는 진보적인 답변이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논리를 만들어낼 진보 인사도 차고 넘친다. 다만 이 질문들에 대해 진보 측이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판단은 여러분들이 가진 안목의 몫이다.
첫째, 제3세계는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
예를 들어 말라리아 퇴치 운동을 다룬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하나 살펴보자. 정치인이 늘 그렇듯 언론인 역시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진실을 털어놓곤 한다. 기사를 읽다 보면 나와 마찬가지로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기이한 문단을 하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다. 1960년대 이전에는 식민지 정부와 기업들이 앞장서서 말라리아와 싸웠다. 소속 관료들이 나이지리아의 고지대 기지나 베트남의 마블 마운틴(Marble Mountains) 같은 외딴 오지에서 직접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독립운동을 거쳐 자유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내전과 빈곤, 정부 부패와 의료 체계 붕괴가 뒤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문장에 주목해보자. 독립운동으로 자유를 얻었지만, 그 뒤에는 흔히 내전과 빈곤, 정부 부패와 의료 체계 붕괴가 뒤따랐다는 구절 말이다.
나는 종종 스스로를 목성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상상해 보곤 하는데, 이 방법이 꽤 유용할 때가 있다. 외계인의 시선으로 이 문장을 읽는다면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내전과 빈곤, 정부 부패가 판치는 상황에서 이 기자가 말하는 자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기자가 분명 좋은 일이라고 믿는 독립운동은 '자유'라는 기묘한 추상적 개념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비참한 결과들을 낳았다. 분명한 사실은, 이 맥락에서 자유가 무엇을 뜻하든 간에 그 가치가 워낙 엄청나서 내전과 빈곤, 정부 부패, 의료 체계 붕괴라는 혹독한 대가를 다 더하더라도 결국 남는 장사라는 점이다.
참 기이하지 않은가? 이 기묘한 셈법을 다시 한번 따져보고 싶지 않은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만약 자유가 없던 식민지 정부와 식민지 무역 회사에 의해 지배당하던 시절이 그 자유를 가져다준 독립운동 시절보다 차라리 나았다고 가정하는 순간(이 맥락에서 자유와 독립은 같은 뜻으로 쓰인 듯하다), 진보 진영의 성역을 건드리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진보 진영뿐만 아니라 보수 진영의 금기를 깨는 일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감히 이런 주장을 펼치지 못한다. 폭스뉴스나 타운홀닷컴은 물론이고, 아무리 극단적인 소수 매체라 할지라도 식민주의가 탈식민주의보다 나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자유가 없던 식민지 시절의 기묘할 정도로 효과적인 말라리아 통제(기자는 이 혜택이 오직 사악한 식민지 지배자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제공되었다는 뉘앙스를 은근히 풍긴다)가, 자유와 말라리아와 내전이 뒤섞인 탈식민지 시절보다 어떤 면에서든 우월했다는 주장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 '독립'이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는 또 무엇일까? '자유'와 같은 뜻으로 쓰인 듯하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어색하다. 예컨대 미국 외교협회(CFR)의 미셸 개빈(Michelle Gavin)이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에 기고한 칼럼의 도입부를 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1980년 짐바브웨(Zimbabwe)가 독립했을 때, 세계는 아프리카의 미래를 낙관하며 이곳을 주목했다. 하지만 오늘날 짐바브웨는 회생 불능의 파탄 국가로 전락했다.”
다시 한번 목성에서 온 외계인의 시선으로 돌아가 '1980년 짐바브웨가 독립 국가가 되었을 때'라는 구절을 곰곰이 짚어보자.
우리가 흔히 쓰는 영어에서 '독립적(independent)'이라는 말은 '~이 아니다'를 뜻하는 접두사 'in-'과 '의존적'을 뜻하는 접미사 'dependent'가 합쳐진 단어다. 예컨대 미국이 독립했다는 것은 그 어떤 외부 세력도 미국 정부에 자금을 대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내 딸이 독립한다는 것 역시 스스로 결정을 내리며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이지, 내가 세 시간마다 분유를 먹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짐바브웨의 경우, 이 단어는 기이하게 변질되어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띠게 된 듯하다. 위키백과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965년 11월 11일, 이언 스미스(Ian Smith) 정권의 로디지아 전선(Rhodesian Front)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 지역에서 흑인 다수 정부가 들어서는 것에 반대하며 일방적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비록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긴 했으나 여왕 엘리자베스 2세(Queen Elizabeth II)에 대한 충성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에 영국 정부와 영연방, 그리고 국제연합은 이 조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비난했다. 결국 로디지아(Rhodesia)는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잠시 '남로디지아(Southern Rhodesia)'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실질적·법적 통치 하에 복귀했다가, 1980년에 이르러서야 짐바브웨라는 이름으로 다시 독립을 맞이했다.”
참 묘한 노릇이다. 현재 짐바브웨라 불리는 이 나라는 미국이 1776년에 그랬던 것처럼 이미 1965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의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불법 독립'으로 치부되었다. 진정하고도 합법적인 독립을 얻기 위해 짐바브웨는 우선 영국의 통치 하로 복귀해야 했다. 즉, 자신들이 선언했던 불법 독립을 먼저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슬슬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는가? 하지만 진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1980년 짐바브웨가 독립 국가가 되었을 때, 세계는 아프리카의 미래를 낙관하며 이곳을 주목했다. 하지만 오늘날 짐바브웨는 회생 불능의 실패 국가로 전락했다. 지난 10년 동안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권력에 대항하는 그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은 짐바브웨의 효율적인 경제·정치 시스템을 조직적으로 망가뜨렸고, 그 자리를 부패와 노골적인 정경유착, 그리고 탄압의 구조로 채워버렸다.”
그러니까 새로이 자유를 찾은 독립 국가 짐바브웨의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 바람에 1980년 당시 세상 물정을 몰라 돌봄이 필요했을지 모를 개빈 여사와 그 무리가 품었던 장밋빛 낙관론은 비관론으로 바뀌었고, 결국 이 나라는 실패국가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가베 대통령의 권력에 도전했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아마도 짐바브웨의 효율적인 경제·정치 시스템을 망가뜨릴 생각이 없었던 이들이자, 개빈 여사와 그 막강한 동료들의 지지를 받던 이들이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이들이 말하는 독립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온전히 제 힘으로 살아가며 젖병 따위는 필요 없다고 당당히 외치는 나라가 이 세상에 딱 하나 있다. 바로 소말릴란드(Somaliland)다. 하지만 이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그 누구에게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다. 소말릴란드의 수도 하르게이사(Hargeisa)를 다룬 위키백과 페이지를 보면, 의도치 않게 피어난 서글픈 코미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외국 정부의 원조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해외 원조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나라는 아프리카에서 매우 보기 드문 사례다. 소말릴란드는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국제법상으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바람에 소말릴란드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의 금융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이 참으로 기묘하지 않은가? 짐 캐리가 요트를 몰고 가다 세상의 끝을 가로막은 거대한 세트장 벽면에 쿵 하고 부딪히던 그 영화 속 장면이 아주 조금이라도 떠오르지 않는가?
둘째, 민족주의(nationalism)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나쁜 것인가?
이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다소 비슷하다. 평소 깊이 존경하던 한 진보 성향의 블로거가 "호찌민(Ho Chi Minh)은 민족주의자였다"라고 무심코 던진 말이 발단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 팻 뷰캐넌(Pat Buchanan)도 마찬가지고'라는 생각이 스쳤다. 당시에는 미처 꺼내지 못하고 뒤늦게 떠오른 이 한마디를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결국 지금에야 상한 음식처럼 다시 끄집어내고 만다.
독립이라는 개념과 달리, 민족주의의 정의에 대해서는 대개 의견이 일치한다. 민족주의(어원은 '태어남'을 뜻하는 라틴어 natus)란 언어, 민족, 인종적 유산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로서 함께 행동할 필요성을 느낄 때 나타난다. 독일인이 그렇게 하면 독일 민족주의고, 베트남인이 그렇게 하면 베트남 민족주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집단행동에 나서면 흑인 민족주의가 되며, 팻 뷰캐넌 같은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미국 민족주의가 된다.
하지만 합의는 딱 여기까지다. 위키백과의 도입부는 본질을 흐리는 모호한 서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민족주의는 보통 민족이나 문화로 정의되는 하나의 집단이 공유된 역사와 공동의 운명을 바탕으로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정치 공동체를 구성할 권리가 있다고 보는 교리나 정치 운동을 뜻한다. 대다수 민족주의자는 국가의 국경과 민족의 경계가 일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최근의 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일치성'의 개념을 상호적인 가치로 바꾸어 받아들인다. 오늘날의 민족주의자들은 하나의 국가가 단일한 민족으로만 통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 하나의 민족이 단일한 정부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논한다.
때로 민족주의적 활동은 맹목적 애국주의나 제국주의로 변질되기도 한다. 20세기 파시즘 운동이 퍼뜨린 변형된 민족주의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여전히 국적이 개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고수하면서도, 그 민족을 인종이나 유전학적 관점으로 잘못 정의하려 했다. 다행히 오늘날의 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집단의 인종주의적 성향을 거부하며, 민족적 정체성이 특정 인종에 대한 생물학적 애착보다 앞선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다.”
이 사이에 적힌 내용은 온통 헛소리에 불과해 보이지만,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국가적 정체성이 민족에 대한 생물학적 애착보다 앞선다고 믿는다면, 설령 그것이 오늘날의 민족주의라 한들 어떻게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인종주의적 성향이 빠져 버린 민족주의라면, 그것을 대체 무슨 의미에서 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사는 체코인이라면 나만의 나라를 세울 권리가 있을까? 그 권리를 얻을 때까지 폭력과 테러를 저지르고 폭탄을 터뜨려야 할까? 반대로 내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사는 독일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도 폭력과 테러를 일으키고 폭탄을 터뜨려야 마땅한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수많은 독일인이 바로 이 기이한 모순을 눈치챘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민족자결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유독 독일인에게만큼은 예외를 둔다는 사실을 말이다. 체코인의 민족주의는 착한 민족주의였고, 독일인의 민족주의는 나쁜 민족주의였다.
이런 식의 이중 잣대를 한 번 눈여겨보기 시작하면,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흑인 민족주의는 아주 좋은 것으로 대접받는다. 이른바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 사건'에서 우리는 진보주의와 흑인 민족주의의 긴밀한 유착을 목격했으며, 이는 작가 톰 울프(Tom Wolfe)가 잘 묘사한 바 있다. 실제로 미국의 명문 대학치고 학생들이 사실상 흑인 민족주의를 전공할 수 있는 학과를 두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반면 남부 민족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주 나쁜 일로 치부된다. 남부 민족주의와 조금이라도 얽히면 그 즉시 사회부적응자 낙인이 찍힌다. 물론 남부 민족주의자들이 과오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흑인 민족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흑표당이나 네이션 오브 이슬람(Nation of Islam), 혹은 그 훌륭하신 라이트 목사의 활동 덕분에 흑인이든 백인이든 미국인들의 삶이 진정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베트남 민족주의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로 여겨진다. 반면 독일이나 영국, 혹은 프랑스의 민족주의자가 되는 것은 여전히 나쁜 일이다. 독일인, 영국인, 프랑스인은 전세계 인류의 운명공동체를 믿어 마땅하지만, 베트남인이나 멕시코인, 체코인은 자국민만의 운명공동체만 믿어도 무방하다. (사실 체코인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런지 확실하지 않다. 상황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과연 말이 되는 소리인가? 도대체 눈곱만큼이라도 앞뒤가 맞는 구석이 있단 말인가?
이 주제가 워낙 민감한 만큼 내 솔직한 심정도 슬쩍 털어놓을까 한다. 나는 그 어떤 종류의 민족주의도 믿지 않는다. 물론 내가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자코바이트에 가까운 인물인 데다 스트래포드 백작(Thomas Wentworth, 1st Earl of Strafford)의 '절대주의 정책'까지 옹호하는 처지이니, 헌법에 관한 조언을 구하기에 그리 적절한 상대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셋째, 나치의 진짜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렇다, 그들은 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그것은 명백한 악이다. 무고한 민간인 수백만 명을 아무런 이유 없이 학살한 행위는 그 어떤 이유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한편으로는, 니콜슨 베이커(Nicholson Baker)의 저서 『인간의 연기(Human Smoke)』를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책의 소개 글에 따르면, 이 책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촉발한 정치·사회적 풍경을 광범위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신선한 시각으로 조명"한다. 저자인 베이커는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이력을 지닌 진보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다. (그의 전작은 부시 대통령 암살에 대한 공상소설이었다.) 『인간의 연기』가 독자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주입하는 것은 어떤 특정 메시지가 아니다. 내가 줄곧 강조해 온 사실, 즉 전체 그림의 조각들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얼핏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딱 떨어지지 않는다. 베이커가 보여준 천재성은 이처럼 그림이 어긋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줄 뿐, 분석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데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나치가 홀로코스트라는 대량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에 악마였다고 배운다. 하지만 다른 한편을 보면 모순이 드러난다. 첫째, 우리를 포함해 나치와 맞서 싸운 연합국 진영 중 그 누구도 유대인의 처지나 홀로코스트에 그리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둘째, 우리 편에 섰던 소련 역시 대량 학살을 저지른 전력이 있었으며, 그 잔혹함은 당대에도 이미 잘 알려진 데다 나치 못지않게 끔찍했다.
게다가 셋째, 연합국은 독일과 일본의 민간인을 하늘에서 대량으로 불태워 죽이는 잔혹한 폭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학살된 이들이 600만 명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100만에서 200만 명은 족히 넘었다. 물론 군사적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으나 무척이나 구차한 핑계였다. 유대인을 적국의 민간인으로 간주해 학살한 나치의 변명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그 아비규환의 희생자 수는 여전히 소름 끼치는 수준이었다.
베이커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우리의 영웅인 연합국은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 피난민 100만 명을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로 수용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수십만 명의 독일군 포로를 소련에 노예로 넘겨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인권 수호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허구에 불과하다.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나치의 인권 유린이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어낸 그 거대한 전쟁의 진짜 도화선이 아니었다면, 과연 무엇이 전쟁을 일으킨 진짜 원인이었을까?
나아가 오늘날 미국의 대외 정책을 매섭게 비판하는 베이커는, 이라크와 독일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려 할 때 오직 모순만을 마주한다. 만약 아부그라이브(Abu Ghraib) 교도소의 가혹 행위가 이라크에 무력으로 민주주의를 이식하려던 시도의 용납할 수 없는 결격 사유라면, 과거 드레스덴과 함부르크에서 저지른 참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상한 모자를 씌우고 가짜 전선을 연결한 채 상자 위에 세워두는 모욕보다는, 수만 명의 인간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폭격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비극이다. 아니면 이라크와 독일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렇게 선을 긋는 것 역시 또 다른 인종주의에 불과하다.
그 너머에는 파시즘의 대량 학살과 마르크스주의의 대량 학살을 대하는 기묘한 불균형이 자리 잡고 있다. 두 이데올로기 모두 대량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은 명백하다. 만약 희생자의 숫자가 중요하고 또 중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 마르크스주의는 파시즘보다 한 자릿수 이상 앞서 있다. 그럼에도 어찌 된 일인지 오늘날 파시즘이나 이를 연상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치명적인 독극물이자 금기어로 취급받는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기껏해야 가벼운 과오 정도로 여겨진다. 존 즈미락(John Zmirak)은 이러한 현실을 멋지게 풍자한 바 있으며, 나는 아직 로베르토 볼라뇨(Roberto Bolaño)의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볼라뇨에 대한 평가는 찬사 일색이다.
소련도 독일 제3제국도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가장 최근의 역사적 사례로 북한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들 수 있다. 북한은 명백히 스탈린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남아공은 다소 느슨할지언정 나치즘과 분명한 연관성을 보였다. 국경 철책을 세워 이민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던 남아공이, 나라 전체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어 버린 북한보다 더 심각한 인권 유린 국가였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동일한 불균형을 목격한다. 북한에는 '포용과 관여'를 말하면서도, 남아공을 향해서는 순수한 적대감만을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두 나라 사이의 신뢰를 쌓겠다며 남아공의 수도 프리토리아(Pretoria)를 방문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볼라뇨의 기괴한 소설 속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민족주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별 사례들은 저마다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조각을 한데 모아놓고 보면 온통 이중잣대 투성이다. 더욱이 이러한 모순들은 결코 무작위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치에게는 있지만 소련에게는 없는, 혹은 남아공에게는 존재하지만 북한에는 결여된 정체불명의 'X 인자(因子)'가 작동하는 듯하다.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오직 이 X 인자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고 X 인자에 인권 문제가 결합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결코 인권 자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인 설명 어디에서도 이 X 인자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 수수께끼의 'X 인자'는 나치가 '우익'이고 소련이 '좌익'이라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프랑스인들의 오랜 격언대로 "좌익에는 적이 없고, 우익에는 친구가 없다(pas d’ennemis à gauche, pas d’amis à droite)"[4]는 식이다.
하지만 대체 왜 그런 걸까? 애초에 '우익'과 '좌익'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와 나치의 파시즘 체제 모두 본질적으로는 전체주의 독재 국가가 아니었나. 공산주의를 지나치게 뜨거운 수프로, 파시즘을 너무 차가운 수프로,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먹기에 딱 적당한 수프로 비유한다면,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똑같이 반대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실제로 1945년 이후 성적표만 놓고 보면 공산주의가 훨씬 더 성공 가두를 달렸으니, 상식적으로는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더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맞을 것이다.
또다시 우리는 깊은 혼란 속에 멈춰 서게 된다. 수평선이 캔버스 천으로 만들어졌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탄 배는 그 수평선에 정면으로 부딪쳤고, 그 자리에는 지금 커다란 찢어진 틈이 남았다.
- 주석 -
[1] 오늘날 이 '백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부족을 가리켜 그 머리글자를 딴 ‘스위플(SWPL)’이라는 약어로 부르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2] 몰드버그는 훗날 이 집단(타우니)을 가리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프리카너(Afrikaners)에 비유한 더 기발한 용어인 '아메리카너(Amerikaners)'를 만들어냈다. 그가 작성한 「외국 영토를 점령하고 통치하는 방법」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단어의 어원이 된 아프리카너들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너들 역시 유럽계 혈통의 문화적 집단이다. 하지만 이들의 현대적 전통은 오늘날 유럽의 그 어떤 집단과도 쉽게 연결 지을 수 없다.”
[3] 이 공식은 원래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말로 알려져 있으며,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에 의해 널리 퍼졌다. 이 문장에 영감을 준 원문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인간이란 잘 대접해 주거나 아니면 아예 짓밟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가벼운 모욕에 대해서는 보복하려 들지만, 치명적인 상처에 대해서는 감히 보복할 엄두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에게 피해를 입혀야 할 때는, 보복당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확실하게 피해를 입혀야 한다.”
[4] 영어권에서는 보통 이를 “No enemies to the left, no friends to the right(좌측에는 적이 없고, 우측에는 친구가 없다)”로 번역한다.
- 원문 링크: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08/04/open-letter-to-open-minded-progress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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