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번역]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제2장: 또 다른 역사적 이상(異常) 현상들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제2장: 또 다른 역사적 이상(異常) 현상들

 

멘시우스 몰드버그 · 2008년 4월 24일

 

1장에서는 진보 정치 사상에 나타나는 세 가지 이상(異常) 현상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독립이라는 단어에 담긴 뜻밖의 정의,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둘러싼 모순된 이중성, 그리고 인권 침해를 바라보는 비대칭적인 감수성이다.

 

이러한 이상 현상들은 비단 진보 진영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는 현대 사회 전체의 특징이기도 하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나타나며, 심지어 대부분의 자유지상주의자도 예외는 아니다. 독자적인 인식론적 딜레마에 빠진 아인 랜드(Ayn Rand) 추종자라면 모를까, 사실상 누구나 공유하는 보편적인 현상에 가깝다.

 

과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조금만 뒤를 돌아봐도 이러한 생각들이 등장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생각들은 아주 새롭다. 참으로 신선하기까지 하다. 진보주의자 눈에는 그저 당연한 '진보'로 보이겠지만, 진화생물학자라면 이를 생존에 유리한 유전형이 강한 성(性) 선택의 영향에 의해 집단 내에서 비율이 압도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뜻하는 '선택적 싹쓸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펴본 변칙들이 생존 경쟁에서 무언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우위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어쩌면 이 이상 현상들이 승리한 이유는 그것이 나름대로 선하고 달콤하며 진실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사람은 선하고 아름다우며 참된 생각을 품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친구들과 나누길 원한다. 너무나 자명하고 정교하며 널리 받아들여지는 주장이기에, 이를 일단 집단 간의 차이나 변수 간의 관계가 없다고 가정하는 귀무 가설(歸無假說)로 두기로 하자.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다른 길로 접어들까 한다. 어쨌든 지금은 21세기이니, 다양한 미디어를 곁들여 논의를 조금 더 생생하게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기 최근 케냐 사태 당시 시위 모습을 담은 유튜브 영상이 하나 있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80초 남짓한 이 영상에서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극적인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다. 차분한 대화로 시작해 충격적인 절정을 지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니 말이다.

 

어쨌든 나름의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다. 최소한 파란색 차는 무사히 빠져나갔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실 고백할 게 있다. '시위자'의 동선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가 있던 길모퉁이는 바로 이곳[1]이다. 그리고 '메트로'는 이것[2]을 뜻한다. 만약 속았다면(미안하다), 방금 말한 관점으로 영상을 다시 한번 살펴보길 바란다.

 

이 영상은 당신이 허가증 없이 몰래 강당에 숨어든 불청객인지, 아니면 정말로 진정한 진보주의자인지 판가름할 좋은 리트머스 시험지다.

 

진정한 진보주의자라면, 다소 연출되었을지도 모르는 이 영상과 거대한 인류사의 흐름을 연결 지을 때 히틀러(Hitler)나 무솔리니(Mussolini), 혹은 조지 W. 부시 같은 인물들을 떠올릴 것이다.

 

왜 그럴까? 영상 속 주인공이 정확히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부족적이고, 영역적이며, 약탈적이다. 위대한 벌컨(Vulcan) 족 사상가 중 한 명이 말했듯, "미국은 십 년에 한 번쯤은 어디 보잘것없는 나라 하나를 골라 벽에 메치며 우리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라크 침공을 결정한 이들에게는 수많은 목표가 있었을 테고, 스스로는 그 모두를 온전히 선의로 포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에 방금 말한 과시욕이 단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다고 보기는 참으로 어렵다.

 

만약 몰래 숨어든 이들이라면 무슨 생각을 할지 알 길이 없다. 아마 고약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들은 제발 이번 한 번만이라도 자신들의 음습한 굴 속으로 조용히 돌아가 주길 바란다. (모두를 위한 참고 사항: 혹시라도 여러분의 온화하고 깨끗한 진보 성향 토론방에 네오나치들이 판을 친다면, 유대인을 비하하는 소리를 흉내 내어 그들을 쫓아낼 수 있다. 모기 쫓는 소리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어쨌든 무조건적 유보 TV의 첫 번째 실험적 시도에 함께해 주어 고맙다. 다음 영상은 한동안 없을 테니 안심해도 좋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우리의 이상 현상들을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귀무가설에 대해 두 가지를 가정하고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첫째는 이 가설이 기본적으로 참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가설에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그것은 (a) 사소하고, (b) 우연한 결과이며, (c) 스스로 바로잡히거나 적어도 교정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진보주의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믿음이기에, 이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다만 이 귀무가설이 우리에게 기묘한 비대칭성을 남겨준다는 점은 아쉽다. 진보주의자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정신적 순응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은 쉽게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무엇이든 그럴듯하게 설명해 내는 신학이라는 장치가 진보 정치 사상에는 부재하기에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빨간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이들이 왜 악하냐는 질문에 신학은 바알(Baal) 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답하면 그만이다.

 

이처럼 우리가 살펴본 세 가지 변칙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진보주의자들은 이 모든 현상에 나름의 설명을 내놓지만, 그 논리는 평소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둘째, 이처럼 억지스러운 설명들을 진보주의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적인 '보수주의자들 역시 대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진보적 시각에 정면으로 맞서는 단 하나의 가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가설은 얼핏 보기에 분명히 틀렸거나 최소한 불완전해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교양 있는 사람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동석자에게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책 《의상철학(衣裳哲學, Sartor Resartus)》을 집어 던지며 분통을 터뜨릴 필요가 없을 만큼 이성적인 언어로 설명이 가능하다. 게다가 이 가설은 앞서 말한 세 가지 변칙을 아주 명쾌하게, 그러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충분히 설명해 낸다.

 

이 가설의 핵심은 우리가 평소 별생각 없이 입에 올리는 '국제사회'라는 실체가 사실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약탈을 일삼는 포식자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이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나의 아버지가 미국 외교관이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국제사회'라는 말에 실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 미국 국무부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초국가적 관료(혹은 초국가적 사회주의자)를 친위대(SS) 장교로 오해하거나, 그 반대로 생각하는 일은 단연코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만약 독일 제3제국이 국제적 포식자의 전형이라면 (안 될 이유가 있겠는가? 히틀러를 우리 논리에 써먹지 못할 것도 없다.) 국제사회에 '약탈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분명 잘못된 비유다.

 

진보주의자들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그들은 대개 성실하고 똑똑하며 선량한 이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정부 공직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정의상 성실하고 똑똑하며 선량한 사람들을 가리켜 포식자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명백히 진보적인 가치 위에 서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약탈적 포식자라는 앞선 가설은 거짓으로 판명 난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이 잘못된 가설을 지지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를 논증의 도구로 삼아 우리 앞에 놓인 기묘한 변칙들을 얼마나 명쾌하게 풀어내는지 살펴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세 가지 현상을 하나의 틀린 가정으로 대체하는 것이 과연 생산적인 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의 개수가 줄어드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이 이상 현상들을 하나씩 짚어보자.

 

첫째, '제3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가?

 

답은 아주 간단하다. 제3세계는 '국제사회'에 의해 정복당하고 황폐해졌다. 물론 '황폐해졌다'는 부분이 다소 끔찍하게 들릴 수는 있다. 하지만 포식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혀 정복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복하고 황폐화시키는 편이 훨씬 나은 장사 아니겠는가?

 

이제 '독립'이라는 개념을 한번 살펴보자. 다자간 합의로 이루어지는 독립 선언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독립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다자간 독립 선언이란 정부 관료들의 인종이나 민족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외국인 관료가 물러난 자리를 그 지역 출신 관료가 채우는 식이다. 예컨대 뼛속까지 미국인인 우리가 저 지저분하고 쓸모없는 멕시코인에게 지배받는다면 참을 수 없는 모욕일 것이다. 아, 잠시만. 우리는 진보주의자다.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니, 민족이나 출신 따위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니까 식민지에서 벗어난 정권들은 더 이상 해외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제 그들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이다!

 

물론 퍽이나 자유로울 것이다. 얼마나 자유로운지 1960년 이래로 무려 2조 6천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받았을 정도다. "돈을 주는 사람이 마음대로 결정한다"는 속담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다시 한번 짚어보자면, 적어도 영어에서 '독립(independence)'이라는 단어는 '~이 아니다'를 뜻하는 접두사 'in-'과 '의존적이다'를 뜻하는 'dependent'가 합쳐진 말이다.

 

도대체 정부가 자유롭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북한 정부는 자유로운가? 엑슨모빌(ExxonMobil)이나 민주당은 또 어떠한가? 인간이 자유롭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조직, 그것도 스스로 정부라고 주장하는 집단이 자유롭다는 게 무엇인지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한 국가가 진정으로 독립했는지 판가름할 수 있는 매우 결정적인 기준이 하나 있다. 진짜 독립국이라면 그 정부 구조가 식민 지배를 받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여야 한다. 우연히 '의존'하게 된 다른 나라의 정부 구조를 닮아갈 것이 아니라 말이다. 특히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다른 신생 독립국들과 정부 구조가 판박이처럼 닮아가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정상이다.

 

다시 말해, 1960년 이후 제3세계는 더 서구화되었는가, 아니면 덜 서구화되었는가? 부적합한 장기 이식을 거부하듯 외래 조직을 밀어내고 서구화 이전의 고유한 정치 체제로 회귀했는가? 아니면 갈수록 서구를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꼭두각시로 전락했는가?

 

서구화 이전의 체제로 회귀하는 전자의 현상이 일어난 지역은 단 한 곳, 바로 페르시아만 일대뿐이다. 걸프 지역 국가들이 서구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 체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서구색이 옅은 것만은 분명하다. 묘하게도 이 국가들은 옛 의미 그대로 경제적 자립을 이룬 '독립국'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도 두 가지 예외가 존재하는데, 감시망을 교묘히 벗어난 소말릴란드와 다이아몬드가 풍부한 보츠와나(Botswana)가 바로 그들이다.

 

(사람들은 종종 보츠와나를 아프리카 민주주의의 모범 사례라고 치켜세우곤 한다. 보츠와나 국민들이 참으로 현명하게도 자신들의 세습 군주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다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실상 그곳은 과거 유나이티드 프루트(United Fruit)사의 악명 높은 방식 그대로, 드비어스(De Beers)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곳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제3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이행 과정이다. 즉, 영국이나 프랑스, 로디지아 등이 간접통치 방식을 통해 지역 혹은 지방 수준에서 지원했던 전통적인 정부 형태와 부족 지도자들의 체제에서, 서구의 선교단, 학교, 대학교에서 선발되고 교육받은 새로운 엘리트 계층으로 권력이 이동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이들은 '와벤지(wa-Benzi)'라고 불린다. 여기서 '와(wa)'는 스와힐리어로 '부족'을 뜻하는 접두사이고, '벤지(Benzi)'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명백할 것이다.

 

게다가, 제3세계주의의 수사법은 예나 지금이나 어디를 가든 거의 똑같다. 만약 알제리(Algeria)와 베트남이 진정으로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며 자신들만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 것이라면, 알제리는 데이(Dey, 과거 알제리의 군주)가 통치하고 베트남은 황제와 관료들이 다스릴 것이라 기대하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 나라 모두 민족해방전선이라는 똑같은 이름의 조직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 누구라도 의아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존성이라는 개념에서 가장 미묘한 부분이 바로 '권력의 의존성'이다.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이 신임 대통령들, 의회들, 그리고 해방전선들은 도대체 누구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는가? 맥밀런이 말한 그 '변화의 바람'은 정확히 어디서부터 불어왔단 말인가?

 

그뿐만 아니라, 이제 와서 도대체 누가 이 인간들에게 관심을 주겠는가? 그런데 왜 유럽과 미국의 납세자들이 바친 거대한 현금 줄기는 여전히 위장복을 걸치고 보잉 선글라스를 낀 채 거들먹거리는 이 기괴한 폭력배들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용감한 해방전선이 뛰어난 군사력으로 권력을 장악했다는 이론이 있다. 아니면 외세의 지배에 더 이상 참지 못한 민중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거나, 노동자들의 뜨거운 의지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교육의 빛이 이 미개한 땅에 마침내 민주주의라는 꿈을 심어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해리 프랑크푸르트 (Harry Frankfurt) 교수에게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배웠다.

 

사실 거의 모든 사례를 살펴보면, 심지어 전혀 예상치 못한 경우(이를 잘 보여주는 훌륭한 1차 사료가 있다)조차도 해방전선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우군은 때로 파리에, 때로 런던에, 때로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뉴욕과 워싱턴에 있었다. (이 주제를 다룬 훌륭한 신작 영화가 있다. 영화 <라스트 킹>에서 포리스트 휘터커가 연기한 독재자 이디 아민(Idi Amin)의 실제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냈던 바벳 슈로더 감독의 작품이다. 제목은 <공포의 변호인>인데, 꼭 한번 보기를 권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것을 독립이라 부른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영어에는 겉으로는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종속되어 있는 정권을 가리키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 있다. p로 시작하고 머펫(muppet)과 각운이 맞는 단어, 바로 괴뢰(puppet)다. 어쩌면 1945년 이후 들어선 탈식민주의 정권들을 향해 그냥 머펫 정권이라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머펫 국가는 괴뢰 국가와는 사뭇 다르다. 주체성을 지닌 독립된 존재라는 인상을 훨씬 더 실감 나게 풍기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받쳐주는 보이지 않는 손뿐만 아니라, 위에서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실까지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머펫 국가들은 종종 자신을 조종하는 상전(上典)에게 상당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상전 국가 내부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기도 하지만(이 부분은 곧 다시 다루겠다) 가장 단순한 이유는 그저 위장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샤를 드골이 보여준 그 유명한 유별난 반항기다. 드골은 영국과 미국을 끊임없이 골치 아프게 만들어야만 했다. 처칠이 사무실 하나 내어주고 앉힌 일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억압받는 프랑스의 진정한 정신을 대표한다는 명분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본질은 전자였을 뿐이다. 게다가 연합국 입장에서도 대놓고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정권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기에, 드골이 그렇게 엇나가는 연극을 해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사춘기 시절 한 번쯤 겪어보았을 '의존적 반항'이라는 현상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무가베(Robert Mugabe)나 카스트로(Fidel Castro), 심지어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같은 인물들이 누린 '독립'의 실체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이른바 '뉴욕타임스 덕분에 자리 하나 차지한' 이들의 모임이나 다름없다.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외세의 패권적 의지에 종속된 탈식민 머펫 국가들의 네트워크가 어떤 모습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아주 완벽한 선례가 있다. 바로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아프리카, 아시아에 포진해 있던 그 하수인들이다. (사실 마오주의자들이 자신들만의 세력을 따로 구축했으니,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사악한 머펫 제국은 두 개인 셈이다.) 이 마르크스-레닌주의 머펫 국가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해방되었고 독립적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들의 동맹은 대등한 동반자 관계이며, 독자적인 정치국까지 갖추고 있다고 열렬히 주장했다. 물론 이 모든 체제는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동지가 자신의 작은 응접실에 놓인 백색 전화기로 주무르고 있었을 뿐이다. 히틀러가 지배하던 신유럽의 부역자들조차 이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비시 프랑스가 독일 제3제국과 대등한 관계라고 허세를 부리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소련과 서방 진영이 종종 동일한 머펫들을 포섭하기 위해 경쟁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 패턴은 더욱 명확해진다. 나세르(Gamal Abdel Nasser)나 티토(Josip Broz Tito), 심지어 CIA 본부에서 줄곧 인기를 잃지 않았던 호찌민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결국 본질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셈이다.

 

결국 가상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제3세계의 비극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20세기 후반, 제3세계는 과거의 식민지 지배자였던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의 손을 떠나 새로운 상전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과거의 지배자들이 결코 천사는 아니었을지언정 최소한 이들만큼 파렴치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상전인 냉전의 강대국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전·선동 기술을 휘둘렀고, 이들이 길러낸 무장한 괴한들은 온 사방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해방독립이라는 감언이설을 핑계 삼아 비유럽권에 남아 있던 전통적인 통치 유산은 대부분 철저히 파괴되었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거대한 대륙들은 황량한 슬럼가로 전락했고, 외세와 줄이 닿은 부패한 권력자들은 그곳에 군림하며 배를 불렸다. 그리고 그들이 약탈한 자금의 대부분은 서방 납세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와 스위스 은행 계좌로 곧장 흘러 들어갔다.

 

우리가 한 걸음 물러서서 1500년 이후 비서방 세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특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20세기 들어서도 전혀 방향을 바꾸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다. 오히려 20세기는 기존의 흐름이 단절되기는커녕, 그 색채가 한층 더 짙어지고 심화한 과정에 가까웠다.

 

우리는 통치 구조의 네 가지 기본 구조를 보게 된다. 바로 서구의 민간 무역이 동반된 토착 통치, 동인도회사영국 남아프리카회사, 아나콘다 회사 같은 특허기업이나 독점기업의 보호 아래 놓인 토착 통치, 간접 통치가 결합된 고전적인 국유화 식민주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탈식민주의 머펫 국가다.

 

시간이 흐르며 이 모든 단계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뚜렷한 추세를 목격하게 된다.

 

첫째, 비유럽 세계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갈수록 서구화된다는 점이다. 둘째, 현지의 실질적인 통치 행위에 고용되는 서구인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난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국제 원조 활동가와 50년 전 식민지 행정관의 비율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차이가 어마어마할 것임은 분명하다.) 셋째, 이 모든 활동을 통해 서구가 얻는 이익은 갈수록 줄어들다 결국 막대한 손실로 바뀐다는 점이다. (구 식민지 시절의 특허기업과 오늘날의 머펫 국가를 비교하는 것은 마치 혼다 자동차 공장과 라다 자동차 공장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원조(援助)는 본질적으로 머펫 국가들에 쏟아붓는 보조금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세 속에서 과연 누가 이득을 보는가? 바로 '국제사회'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이 세계의 옆구리에 깊숙이 찔러 넣은 거대한 상처를 치료하겠다며 부지런히,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이 일하는 수많은 국제 행정 관료들이다. 반대로 손해를 보는 쪽은 누구인가? 그 외의 모든 이들이다. 서방의 납세자들은 늘 그렇듯 자신도 모르는 새 서서히,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으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민중들은 내전과 빈곤, 부패한 정부, 의료 체계의 붕괴라는 거대한 혁명적 대출혈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기록된 제3세계 지역의 여행기를 읽어보면(예를 들어, 최근 나는 에르나 퍼거슨(Erna Fergusson)이 쓴 《과테말라》를 흥미롭게 읽었다), 오늘날 도처에서 목격되는 비참함과 지저분함, 그리고 야만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퍼거슨은 당시 과테말라시티를 두고 깨끗하다고 묘사했다.) 대신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토착적이든 식민지적이든 서구 미국에 기원을 두지 않은 사회적·정치적 구조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들은 현대 미국의 기준은 물론, 1930년대 당시 미국의 기준으로 보아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결국 우리는 국제사회를 바라보는 두 가지 이론과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국제사회 스스로가 주장하는 논리로, 자신을 지구의 구원자이자 해방자로 묘사하며 본질적으로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라고 강변하는 식이다. 다른 하나는 방금 내가 전개한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국제사회는 아시아와 남미까지 제물로 삼아 제2의 아프리카 분할을 주도하는 굶주린 포식자에 불과하다. 본질적으로 워싱턴이 아테네 노릇을 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델로스 동맹인 셈이다.

 

그리고 두 가설 모두 완벽히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첫 번째 가설은 매우 희망적이고 안심을 주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신봉하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보면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기묘하고 모순적인 구석이 있다. 그렇다고 두 번째 가설 역시 사실에 부합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잘 안다. 그들은 결코 포식자가 아니다. 초국적 관료들이 진심으로 세계의 이익을 위해 헌신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들은 결코 미국의 민족주의자 같은 부류가 아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그들은 코너맨(Corner Man)[3]의 모습을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러니 이 수수께끼는 잠시 접어두고 두 번째 이상 현상인 민족주의로 넘어가 보자. 알고 보면 이 역시 결국 첫 번째 현상의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기를 바란다.

 

민족주의 정권과 민족주의 운동은 신의 사역을 수행할 때, 즉 국제사회의 고분고분하고 다자주의적인 일원이 되려 할 때는 선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반면 이들이 국제사회의 여론에 맞서며 자신들을 자애로운 자식처럼 사랑해주고 싶어 안달이 난 국제사회에 등을 돌릴 때는 악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한마디로 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다. 실로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식 포식자의 행태라 할 만하다.

 

황량하고 기만적인 20세기를 벗어나, 지도자들의 야심은 그 못지않았을지언정 훨씬 더 멋진 옷을 입었던 19세기로 돌아가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19세기에도 엄연히 국제사회가 존재했으며, 최소한 구대륙에서만큼은 그 중심지가 단 한 곳, 바로 런던이었다.

 

간단한 연상(聯想) 퀴즈를 하나 내보겠다. 이탈리아의 통일은 좋은 일이었을까, 나쁜 일이었을까? 십중팔구 "좋은 일"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자, 여기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몇 년 전 내 아내와 나는 이탈리아에서 3주를 보냈다. 첫 주에는 친구들과 함께 치렌토(Cilento)에 있는 빌라를 빌려 묵었는데, 벌레가 조금 많기는 했지만 리몬첼로(limoncello)를 엄청나게 들이켜며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다음에는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며 여기저기 돌아다녀 볼 생각이었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바로 나폴리(Naples)였다.

 

북부 이탈리아인들이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는 이탈리아를 통일한 게 아니라, 아프리카를 분할한 것뿐이다"라고 말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당연히 이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며 내가 용인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심지어 여행 가이드북 출판사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

)》 조차 여행객들에게 "카이로나 탕헤르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지도 모른다"라며 경고할 정도다. 나는 카이로나 탕헤르에 가본 적은 없지만, 만약 그곳들이 나폴리와 조금이라도 비슷하다면 신의 가호가 필요할 것이다.

 

30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 나폴리는 악취와 쓰레기로 가득한 하수구 같다. 올해는 실제로 쓰레기 수거업체의 파업까지 겹쳤지만, 사실 이 문제는 해묵은 골칫거리다. 가이드북이 추천한 숙소 바로 맞은편에도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거대한 산처럼 쌓여 있었다. 거리에는 밤낮 할 것 없이 범죄자처럼 보이는 사람들만 가득하다. 특히 어둠이 내리면 분위기는 더 험악해진다. 가로등도 없는 황량한 거리에는 오토바이를 탄 소매치기들이 활개를 친다. 한 번은 오토바이를 탄 괴한이 장바구니를 든 할머니 앞에 멈춰 서더니, 훔칠 만한 물건이 있는지 대놓고 가방 안을 뒤적이다가 그냥 가버리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이곳 불량배들은 여성의 귀걸이를 귀에서 날로 낚아채 가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나폴리에서 폼페이로 가려면 '트란스 베수비아노(Trans-Vesuviano)'라는 기차를 타면 된다. 이름은 낭만적이지만, 이 기차의 주된 목적은 스탈린식 독재 국가를 연상시키는 삭막한 외곽 변두리 지역의 범죄자들을 도심의 범죄 현장으로 실어 나르는 것 같다. 기차 안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세상의 모든 언어로 도배되어 있다. 차체는 철판이 그대로 드러날 만큼 낡았고, 라틴어와는 거리가 먼 기괴한 낙서들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역에 기차가 멈추었을 때는 경찰들이 플랫폼에서 시신 운반 부대를 들고 나가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다음 날 밤, 우리는 야외 카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나폴리 역사 지구를 배회했다. 마침내 카페를 한 곳 찾아냈지만, 토요일 밤인데도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발걸음을 옮기던 중 우리는 나폴리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곳을 발견했다. 바로 유럽연합의 지원을 받아 새로 지은 지하철이었다. 몇 정거장을 더 가보았지만, 역 바깥의 풍경은 어디나 마찬가지로 쓸쓸하고 험악했다.

 

드디어 가이드북에 실린 '부르주아'라는 냉소적인 표현이 떠올라 아내를 데리고 케이블카에 올랐다. 높은 언덕 위 공중 정원 같은 마을, 보메로(Vomero)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절벽을 따라 고작 100미터쯤 올라왔을 뿐인데, 마치 카이로에서 밀라노로 순간 이동을 한 것만 같았다. 우리는 곧바로 영어가 통하는 와인 바를 찾아내, 향긋한 와인을 몇 잔씩 비우며 멋진 시간을 보냈다.

 

갑자기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앙역 근처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지하철 막차 시간이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주위에 물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종업원도, 바에 있던 그 누구도 몰랐다. 세련된 옷차림의 이 젊은이들은 정작 자기 동네 지하철 운행 시간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종업원은 우리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거긴 왜 가려고 하세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덕분에 간신히 막차를 탈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음 날, 나보다 안목이 훨씬 높고 가리발디에 대한 험담 따위는 입에도 담지 않을 내 아내는 "그냥 유로스타(Eurostar)를 타고 스톡홀름까지 쭉 가버렸으면 좋겠다"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결국 우리가 도착한 곳은 페루자(Perugia)였는데, 과연 소문대로 무척이나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렇게 나폴리를 겪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나폴리가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아마 그 말은 옆구리에 칼이 꽂혀 죽는 상황을 뜻한 모양이다. 트란스 베수비아노 기차에서 보았던 그 가여운 이도 나폴리를 본 뒤 죽음을 맞이했다.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였을까?

 

그러다 영국 역사학자 데스몬드 스튜어드(Desmond Seward)의 저서 《나폴리: 여행자의 동반자(Naples: A Travellers Companion)》를 읽고, 내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역사적 진실을 마주하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규모와 인구 면에서 유럽의 세 번째 도시이며, 천혜의 입지와 빼어난 위용을 자랑하니 가히 메디테리안의 여왕(Queen of the Mediterranean)이라 불릴 만하다." 1813년 존 쳇우드 유스터스(John Chetwode Eustace)는 나폴리를 이렇게 기록했다. 1860년까지만 해도 나폴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인 '양시칠리아 왕국(Kingdom of the Two Sicilies)'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였다.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섬으로 이루어진 이 왕국은 포르투갈과 맞먹는 영토를 가졌으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1734년부터 1860년까지 5대에 걸쳐 프랑스와 스페인 왕가의 혈통인 부르본 가문이 이곳을 다스렸고, 그들은 도시 곳곳에 자신들의 통치를 기념하는 수많은 건축물과 기념비를 남겼다.

 

백성들이 '볼보니(Borboni)'라 불렀던 이 왕가의 군주들은 나폴리 토박이나 다름없었다. 완전히 현지화된 이들은 나폴리 방언으로 생각하고 말했으며, 궁정 전체가 나폴리 말을 썼다. 1860년까지 나폴리의 일상에는 화려한 궁정 무도회와 산 카를로 극장의 갈라 행사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 눈부신 풍요로움과 장엄함은 외국인들의 넋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1839년, 깐깐한 휘그당 정치가였던 토머스 매콜리 경(Thomas Babington Macaulay)은 이 도시에 머물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들었던 나폴리에 대한 소문은 영 엉터리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마보다 부랑자가 훨씬 적고, 다들 훨씬 부지런히 일한다. 지금으로선 나폴리에 아주 좋은 인상을 받고 있다. 영국의 거대한 항구와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활기가 느껴지는 곳은 이탈리아에서 여기뿐이다. 로마와 피사는 이미 숨이 다했고, 피렌체는 죽진 않았으나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반면 나폴리는 생명력으로 차고 넘친다.

 

'볼보니' 왕가의 명예는 그들을 몰아내고 들어선 권력의 추종자들과 이탈리아 통일 운동(리소르지멘토, Risorgimento)의 찬미자들에 의해 철저히 가려지고 왜곡되었다. 특히 영어권 세상에서 이들은 가혹한 평가를 받았다. 19세기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이 왕가의 전제 정치와 친가톨릭 성향, 교황청에 대한 충성, 그리고 당시 시대적 흐름이었던 이탈리아 통일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혐오했다. 윌리엄 벤팅크(William Bentinck) 경부터 파머스턴(Palmerston) 경, 글래드스턴(Gladstone)에 이르는 정치가들은 물론 브라우닝(Browning)과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같은 문인들까지 한마음으로 이 '폭군들'을 증오했다. 심지어 글래드스턴은 이들의 정권을 '신의 부정'이라 확신하기까지 했다. 정보도 부족한 채 편견에 사로잡혔던 비판가들은 이 왕가가 이룩한 경제적 성과나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웠던 왕국의 번영을 철저히 외면했다. 대다수 백성이 삶에 안주하며 평화롭게 살았고, 정부에 반대하는 남부 이탈리아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무시했다.

 

양시칠리아 왕국은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백성들이 법을 존중하고 잘 이해하는 나라로 이름이 높았다. 그 법적 전통이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의 판사들과 유능한 변호사들은 대부분 이 남부 출신들이 꽉 잡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여전히 맹목적인 편견이 팽배하다. 수많은 가이드북이 볼보니 왕가를 도시를 망치고 방치한 부패한 독재자로 치부해 버린다. 거대한 비방의 장막이 1860년 이전의 옛 나폴리를 통째로 가리고 있는 셈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악의적인 모함은 무지로 이어졌고, 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이라는 자명한 진실조차 잊히기 십상이었다. 다행히 해럴드 액턴(Harold Acton) 경이 볼보니 왕가를 다룬 두 편의 뛰어난 연구서를 통해 어느 정도 균형을 잡아주었고, 그의 역사적 재해석은 최근 나폴리를 중심으로 점점 더 많은 지지와 공감을 얻고 있다.

 

과거의 왕정에도 분명 심각한 결함은 있었다. 경제와 산업 측면에서는 창의적이었을지 몰라도, 전제군주제를 고집하고 빗장을 걸어 잠근 고립주의 정책을 펼치며 이탈리아 전체의 하나 됨을 열망하던 흐름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왕가 역시 생존을 건 투쟁을 벌이던 터라 보르본(Bourbons) 왕정 치하에서 정치적 탄압이 존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역시 실제보다 지나치게 부풀려진 감이 있다. 당시 교도소 환경은 감옥선(Prison ship)이 여전히 떠다니던 동시대 영국보다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실제로 글래드스턴을 격분하게 만든 진짜 이유는, 왕정에 반대하던 이들이 귀족이나 부르주아지 같은 소수의 낭만적 자유주의자였던 탓에 자신과 사회적 지위가 같은 이들이 일반 노동자 계층의 잡범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나폴리를 비롯한 남부 전체에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1860년 이전까지만 해도 남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제국령을 제외하면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으나, 통일 이후 순식간에 가장 가난한 동네로 전락했다.

 

수치만 보아도 진실은 명백히 드러난다. 1859년 당시 양시칠리아 왕국에 유통되던 통화량은 이탈리아의 다른 모든 독립국을 합친 것보다 많았고, 나폴리 은행의 금 보유고는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의 보유고를 모두 합친 것의 두 배인 4억 4,300만 골드리라에 달했다. 하지만 이 막대한 금은 통일 직후 피에몬테 왕국에 고스란히 몰수되어 투린으로 옮겨졌다. 참고로 당시 피에몬테의 금 보유고는 고작 2,700만 리라에 불과했다. 북부의 질 낮은 물건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며 나폴리 시 재정의 5분의 4를 책임지던 남부의 관세 제도도 전면 폐지되었다. 그러고는 북부인들의 입맛에 맞춘 가혹한 세금이 새로 부과되었다.

 

해방군을 자처하며 내려온 피에몬테의 관료들은 실상 통일 후 미 남부 주(州)를 짓밟았던 미 북군과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이들은 양시칠리아 왕국을 점령국처럼 대하며 남부의 제도와 산업을 조직적으로 파괴해 나갔다. 페르디난도(Ferdinand) 국왕이 세운 나폴리의 신식 조선소는 북부 제노바와의 경쟁을 막기 위해 강제로 해체되기도 했다(현재는 산업 고고학자들에 의해 복원 중이다). 학교 교과서에는 볼보니 왕가를 비방하는 내용이 버젓이 실렸다.

 

양시칠리아 왕국이 새로운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로 편입된 직후, 마달로니 공작(Duke of Maddaloni)은 통합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격렬히 항의했다. "이것은 합병도, 통일도 아닌 침략이다. 우리는 지금 점령지처럼 약탈당하고 있다." 실제로 '해방'이 정치적 구호로 끝난 뒤에도, 나폴리인들은 오랫동안 북부에서 내려온 뜨내기 관료와 지배자들의 손아귀에서 고통받아야 했다.

 

오늘날 북부 이탈리아인들이 나폴리에 대해 품고 있는 어리석은 편견은 영미권 사람들의 편견 못지않다. 이들은 "로마 남쪽부터는 아프리카"라며 인종주의에 가까운 우월감을 드러내고, 북부 공업지대에 남부 노동자들이 너무 많다며 투덜대곤 한다. (물론 남부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나폴리인들은 로마의 상징인 'SPQR'을 "로마 놈들은 전부 돼지 새끼들이다"라는 뜻으로 바꾸어 부르며 맞받아친다.) 결국 1860년대 내내 북부 정권이 이 남부 지역을 억누르고 통치하기 위해 배치해야 했던 군대만 무려 15만 명에 달했다.

 

흐름을 짚어보면 결국 하나의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이탈리아의 통일을 가능하게 했을까? 4억 4,300만 골드리라를 쥐고 있던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국왕은 왜 고작 2,700만 리라밖에 없던 피에몬테(Piedmont)의 카를로 알베르토(Charles Albert) 왕에게 그토록 허망하게 무릎을 꿇었을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영국의 팔머스턴 자작과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뒤를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니(Mazzini)가리발디 같은 망명객들이 혁명의 자금을 조달하고 세력을 키운 배후가 어디였겠는가. 적어도 폼페이의 잿더미 속은 아니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탈리아 통일은 19세기 자유주의와 반동주의 세력이 격돌한 거대한 투쟁의 한 단면이었다. 1848년 독일 혁명가에서 1861년 미국 남북전쟁의 장군으로 변신한 카를 슈르츠(Carl Schurz) 같은 인물이 활약했던 20세기의 국제 자유주의 운동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국제사회'의 명백한 전신이었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 이 국제사회라는 세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해방과 독립이라는 그럴듯한 기치 아래, 과거와 다름없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파괴하는 포식자 노릇을 여실히 되풀이하고 있다.

 

미국 독립 혁명을 예외로 둔다면, '다자간 협력을 통한 독립'이라는 이 기이한 현상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사례는 아마 그리스 독립 전쟁일 것이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길고 피비린내 나는 투쟁 끝에, 그리고 열강들의 지원 힘입어, 마침내 1832년 7월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을 통해 독립이 승인되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그리고 그리스에 '독립'을 선물한 당시 열강의 시민들, 특히 영국의 주역들을 살펴보면 묘하게도 낯익은 얼굴들을 보게 된다. 마치니와 슈르츠의 배후에 있었고, 오늘날의 '국제사회'로 고스란히 이어진 이들은 바로 자유주의자, 급진주의자, 사상가, 예술가, 즉 진보주의자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바이런 경(Lord Byron)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가장 선량하고 고결한 지성인들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어진 이들이 가는 길목마다 '길고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라는 참혹한 단어가 언제나 한 세트처럼 따라다니는 것일까?

 

이로써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기묘한 모순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문제를 앞서 살펴본 첫 번째 모순과 같은 선상에 놓음으로써 실마리는 잡은 셈이다. 그렇다면 제3세계는 왜 저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해방을 부르짖던 그곳은 결국 포식자처럼 탐욕스럽고, 냉소적이며, 껍데기만 남은 가짜 민족주의에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도대체 왜 배울 만큼 배웠고, 세계관이 넓으며, 교양을 갖춘 지성인들이 이토록 파괴적이고 위선적인 가짜 민족주의를 지지했던 것일까? 우리는 또다시 거대한 의문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이제 우리의 세 번째 문제인 히틀러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물론 내가 유대인 비하 용어를 외치며 히틀러를 옹호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모순은, 오늘날 히틀러가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증오받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홀로코스트라는 '인권 침해'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연합군은 그 히틀러를 무찌른 정의의 사도로 숭배되며,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아주 깔끔하고 도덕적인 권선징악의 결말로 포장된다.

 

하지만 이 '인권 수호 프레임'으로 2차 세계대전을 바라볼 때 생기는 유일한 문제는, 그것이 당시의 실제 현실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우선, 연합군 진영에는 인권 유린 기록 면에서 히틀러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끔찍한 인물(스탈린)이 버젓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둘째, 루스벨트와 처칠은 유대인들을 구출할 기회가 수없이 많았음에도 유대인 절멸 작전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이 대목은 홀로코스트가 연합군의 전쟁 프로파간다였다고 주장하는 네오나치들의 헛소리를 참으로 기괴하고 헛웃음 나오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셋째, 연합군은 대규모 무차별 폭격을 통해 최대한 많은 적국의 민간인들을 통구이로 만드는 데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인권 수호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카이사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의 축구 경기를 보려고 브리튼섬을 침공했다는 주장만큼이나 황당하다. 그렇다면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유럽 전쟁이 터진 명목상의 이유는 영국이 폴란드의 독립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정말 핵심 목표였다면, 어떻게든 전쟁이 끝난 뒤에 폴란드의 독립을 지켜낼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그것도 전쟁에서 승리까지 거두었으니 말이다. 이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두고도 똑같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여기서 관심을 두어야 할 대상은 히틀러나 무솔리니,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범행 동기가 아니다. 이들은 이제 세상을 떠났고 그들이 이끌던 운동도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이들을 무너뜨린 움직임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국제사회'와 당시의 '연합국'이 결국 같은 뿌리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왜 국제사회가 유독 나치 독일에 그토록 가혹하게 반응했는가 하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잔인하고 침략적이었던 소련을 대할 때와는 왜 그토록 태도가 달랐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반사실적 가정을 이어가면, 한 가지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다. 파시즘 세력은 결국 밥그릇을 두고 싸우던 경쟁자였다는 사실이다. 연합국이 나치를 짓밟은 이유는 사자가 기회만 나면 표범을 물어 죽이는 이유와 같다. 표범 고기가 맛있어서가 아니라, 잡아먹을 영양(羚羊)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는 조나 골드버그(Jonah Goldberg)가 쓴 어설픈 베스트셀러 때문에 최근 다시 미궁에 빠졌다. 파시즘이 사실은 좌파 운동이었다는 그의 주장 말이다. 사실 훨씬 뛰어난 문필가인 에릭 폰 퀴넬트레딘(Erik von Kuehnelt-Leddihn)이 이미 오래전, 이보다 훨씬 박학다식하게 같은 주장을 펼친 바 있다. 물론 그 역시 틀렸지만 말이다.

 

 

나 역시 반동주의적 자코바이트로서, 파시즘 운동의 본질이 사실은 반동적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본다. 파시즘과 나치즘은 분명 민주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19세기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물론 이들은 자유주의자와 볼셰비키 모두에게서 통치 기법을 차용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경험이란, 그 체제가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혹은 불교나 사이언톨로지 국가라 할지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 해도 골드버그의 주장은 틀렸다. 분명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는 파시즘 운동이 극우냐 극좌냐를 두고 그 어떤 혼선도 없었다. 모두의 생각이 일치했다. 그들은 명백한 우파 정당이었다. 대중 영합주의적인 성격이 짙었을 뿐, 우파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때만큼은 세간의 상식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셈이다.

 

예를 들어 1930년 프란체스코 니티(Francesco Nitti. 동명의 자유주의 성향 전 이탈리아 총리의 조카)는 이탈리아 섬의 유배지에서 탈출한 경험을 바탕으로 《탈출》이라는 책을 펴냈다. (미리 말해두지만, 그곳은 소련의 굴라그 같은 수용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의 삼촌인 니티 전 총리는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무솔리니 체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겪고 있는 일종의 중세식 모험을 대변한다.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그는 국왕 시해와 무정부주의 범죄, 정치적 암살을 옹호했다. 개인의 폭동을 부추기는 글을 썼고,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 예언하기도 했다. 자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는 늘 모든 종교를 민중을 잠재우는 아편으로 여겼다. 20년 동안 글과 연설을 통해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심연은 자본가들의 목으로 채워야 한다고 외쳤다. 심지어 1920년에도 노동자들에게 공장을 점거하고 약탈하라고 선동했다. 1914년에는 벨기에가 점령당한 처지를 비웃으며, 이탈리아인들을 전쟁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세력에 맞서 폭동을 일으키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골드버그(Goldberg)의 주장으로서는 참으로 그럴듯한 이야기다. 하지만 잠깐,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그는 적색 혁명에 실패하자 전후의 불만을 이용해 백색 반동을 꾀했다. 반동을 원하던 일부 장군과 군부의 도움으로 그는 뜻을 이루었다. 독재자가 된 무솔리니는 자신의 과거를 모두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끔찍한 반동 정치를 펼쳤다.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모든 자유가 억압되었다. 국회의원은 사실상 정부가 지명하는 인물이 되었고, 모든 정치 결사는 해산당했다.

 

19세기 유럽의 색채에 대한 상징주의를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빨간색이 혁명을 상징하듯 흰색은 반동을 상징한다. 니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의 사회주의자 무솔리니와 달리 새로운 파시스트 무솔리니는 부르봉 왕조와 다를 바 없는 반동주의자라고 말이다.

 

앞서 살펴봤듯 '국제 사회'를 포식자로 본다면 반동주의자들은 그 먹잇감에 해당한다. 소련이 경쟁 관계의 포식자로 비칠 수는 있어도, 파시즘은 그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존재다. 파시즘은 (부르봉 왕조와 달리) 포식자에게 맞서기로 결심한 먹잇감의 일종이다. 더구나 파시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파시즘은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의 가장 나쁜 사상, 민주주의의 가장 나쁜 정치, 그리고 볼셰비키의 가장 나쁜 폭정을 결합한 반동주의 운동이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부르봉 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듯, 파시즘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반동주의자들에게 파시즘은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가르쳐 주는 짧은 교훈일 뿐이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파시즘과 나치즘을 향한 우리의 감정적 반응은 이 개념들을 객관적으로 다루기 어렵게 만든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유대계 공산주의자였던 내 할아버지는 나치를 처단하겠다며 미군에 자원입대했고, 몇 명을 사살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런 감정적 굴레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은 독일 제3제국이 아닌 독일 제2제국, 즉 카이저 빌헬름(Kaiser Bill)의 기묘한 체제와 그가 일으킨 전쟁을 살펴보는 것이다.

 

파시즘을 달리 부른다면 '신군국주의'라는 명칭이 덜 자극적일 수 있다. 빌헬름 시대 독일의 이데올로기는 흔히 군국주의로 묘사되는데,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표현이다. 군주국 치고는 꽤나 대중주의적이었고, 분명한 반동 성향을 띠었다. (모든 나라가 그랬듯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에서도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카이저 체제에서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는 군 계급에서 나왔다. 아무리 저명한 물리학 교수라도 예비역 장교 계급이 낮거나 아예 없다면 파티에서 아무도 그와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진정한 군국주의 사회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군대를 어느 정도 아는 미국인이라 해도 상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구체제의 마지막 생존자들은 왜 그토록 공격적이고 호전적으로 변했을까? 예컨대 왜 독일 군부는 1914년 전쟁을 시작할 기회를 그토록 반겼을까? 그 이유는 그들 역시 '국제 사회'라는 포식자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반사실적인 가정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1914년 당시 독일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동맹이 자국을 '포위'하려는 의도라고 보았다. 지도만 봐도 아주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영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동주의자들을 가차 없이 처리해 왔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 참모본부는 포위당한 상태에서 서서히 질식해 죽느니 차라리 선제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39년에 나온 다음과 같은 나치 선전물은 현대사를 바라보는 독일 군국주의자들의 시각을 아주 잘 설명해 준다.

 

이번 전쟁의 근본 원인은 세계, 특히 유럽을 지배하겠다는 영국의 오랜 야욕에 있다. 비록 본토는 작지만, 영국은 타국을 교묘하게 이용해 영토를 확장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영국은 바다와 주요 해상 요충지,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들을 장악해 왔다. 영국 본토와 해외 식민지의 불균형은 기괴할 정도여서, 영국은 대륙 유럽에 대해 항상 일종의 열등감을 느껴왔다. 유럽의 강대국이 어느 정도 힘을 기를 때마다 영국은 자신과 제국이 위협받는다고 여겼다. 대륙의 국가들이 꽃을 피우려 하거나, 제자리를 찾기 위해 성장을 도모할 때마다 영국은 어김없이 경찰관을 자처하며 간섭했다.

 

비스마르크(Bismarck)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대(對)독일 정책을 이해하려면 이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영국은 1870~1871년 전쟁의 결과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영국은 이미 프랑스 편을 들고 있었는데, 지난 100년간 독일만큼 프랑스를 두려워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식민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했고, 인구 감소로 인해 자국 영토 안에서 성장을 꾀할 여력이 있었다. 하지만 독일의 상황은 달랐다. 영국은 독일 국민이 유능한 지도자를 만나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독일은 자연환경이 척박하고 자원도 부족한 데다 해안선마저 짧은 나라였음에도 말이다. 영국은 독일이 조금이라도 힘을 드러낼 때마다, 그 방식이 아무리 자연스러운 것일지라도 끊임없이 경계했다. 독일 제2제국은 영국의 이른바 '세력 균형' 정책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사실 영국이 원한 것은 진정한 세력 균형이 아니었다. 영국은 동맹국을 앞세워 자신감 넘치고 팽창하는 소수 국가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상황을 원했을 뿐이다.

 

물론 이는 선전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위 '포위 전략'이라는 문제의 맞은편에 서 있던 인물, 폴로던의 그레이 경(Lord Grey of Fallodon)이 가진 시각만큼은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유럽 전역의 등불이 꺼지고 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 다시 켜지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이 바로 그레이 경이다. 그의 회고록은 매우 읽기 편할 뿐 아니라, 왜 우리가 그 등불이 다시 켜지는 것을 보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보여준다. 오늘날의 정치판에는 그레이 경 정도의 식견을 갖춘 정치인이나 관료를 찾아보기 어렵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전후에 집필한 그레이 경의 관점에서 독일을 포위하려 했다는 생각은 그 누구도 감히 꿈꿀 수 없는 상상이었다. 오히려 그는 독일 군국주의자들이 편집증적이고 맹목적인 애국주의에 사로잡혀, 유럽의 위기를 조장함으로써 국내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했다고 보았다. 실제로 사라예보에서 터진 화약고가 결코 최초의 위기는 아니었다. 아가디르 위기(Agadir Crisis)만 봐도 그렇다. 반면 영국은 그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결국 평화는 무너졌고, 독일이 아무런 도발 없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나는 그레이 경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의 진정성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기회주의적인 면이 다분해 뱀과 같았던 파머스턴(Palmerston)에 비해 훨씬 믿음직한 인물로 보인다. 특히 그가 정리한 전쟁의 원인은 가히 독보적이다.

 

1870년 이후 독일은 딱히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지만, 혹시 모를 미래의 불안을 잠재우고자 군비 증강과 삼국 동맹에 매달렸다. 1870년의 패배로 겁을 먹은 프랑스는 당연한 수순으로 군사 대비를 강화하고 러시아와 이중 동맹을 맺었다. 육군은 보잘것없었지만 거대한 제국을 거느렸던 영국은 처음엔 불편함을 느끼다가, 독일이 대규모 함대 건설에 착수하자 고립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은 영일 동맹을 맺고 프랑스 및 러시아와 맺혔던 갈등을 풀며 협상국 체제로 들어섰다. 마침내 독일은 미래에 닥쳐올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가 무적이라 믿던 그 순간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인류사 전체의 진실은 오직 하늘만이 알겠지만, 나는 이 요약이 범상한 지능으로 몇 문장 안에 풀어낼 수 있는 전쟁의 원인에 가장 가까운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독일, 더 정확히는 호엔촐레른(Hohenzollern) 왕가는 정말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을까? 부르봉 왕가가 방심하다 몰락했던 사례를 떠올리면 결코 그렇지 않다. 독일이 영국의 해상 패권에 도전하던 당시, 강자는 여전히 영국이었고 독일은 도전자였다. 과연 누가 누구를 더 두려워할 처지였을까? 그레이 경은 민주주의와 반동주의의 대결에 관해 파머스턴과 같은 식의 호전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1914년 당시 우리는 언젠가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라고 예상해서 참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전쟁 자체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 우리가 처음부터 그 대열에 합류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배후의 잠재적인 힘들이 서서히 드러났고,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들은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잊혔다. 그것은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문화'와 자유롭고 비군사적인 민주주의 이상 사이의 거대한 투쟁이었다. 미국이 참전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사실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들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전체적으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전쟁이 전개되면서 이 근본적인 대립의 실체가 드러났고, 비로소 우리는 영국과 자치령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 그 삶의 본질을 위해 싸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14년 8월, 우리가 전쟁을 외면했다고 해서 군국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그 투쟁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등을 돌리고 회피하는 사이 그 위협은 더 강해졌을 것이고, 결국 우리는 더욱 약해지고 고립된 상태에서 그 실체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도대체 누가 편집증적인 것일까? 당시 대영제국은 전 지구를 뒤덮고 있었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반면 반동적 군국주의는 사면초가에 몰린 형국이었다. 과연 그 시점에, 즉각적으로, 완전히 짓밟아 버려야만 했던 것일까?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현상 유지에 기반한 평화를 원했던 쪽은 독일이었고, 독일의 패배와 군국주의의 근절을 고집했던 것은 연합군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쩌면 히틀러는 자신의 전쟁을 민주주의를 영원히 말살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으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카이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적들은 그런 식의 주저함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그레이 경은 1914년 9월 당시 독일의 기본 입장을 요약한 주미 독일 대사의 메모를 회고록에 옮겨 적고 있다.

 

주미 독일 대사는 언론을 통해 독일은 현상 유지에 기반한 평화를 간절히 원하며 새로운 영토를 요구하지도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영국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기에, 이후 발생하는 모든 유혈 사태의 책임은 영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그레이 경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독일은 이번 전쟁을 계획했고, 유럽에 강요할 시기를 스스로 선택했다. 독일만큼 전쟁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던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미래에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

 

트라이치케(Treitschke)를 비롯하여 독일에서 명망 높고 대중적인 작가들은 영국을 굴복시키고 대영제국을 파괴하는 것이 독일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선언해 왔다.

 

우리는 독일이 이러한 야욕을 완전히 버렸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싶다. 벨기에에는 잔혹한 불의가 저질러졌다. 아무런 도발도 없었던 공격은 물론, 루뱅 대학 도서관을 비롯한 문화유산의 파괴와 무차별적인 반달리즘으로 인해 그 죄악은 더욱 악화되었다. 과연 독일은 벨기에에 대해 어떠한 배상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레이 경의 진정한 관심사가 (사실상 영국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던)벨기에에 대한 배상이었을까? 분명히 아니다. 그의 목표는 독일을 굴복시키고 독일 제국을 파괴하는 것이었기에, 독일 군국주의자들이 체면을 구기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거는 것이 그의 전략적 핵심이었다. 1916년 초 그가 쓴 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독일의 패배 외에 이 전쟁을 만족스럽게 끝내고 미래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길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우리의 결의를 밝힐 때, 우리의 목적이 동맹국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원하는 데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독일의 선전은 우리와 동맹국들 사이를 이간질하며 점점 더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 이 선전의 핵심은 이번 전쟁이 대영제국과 독일 사이의 라이벌 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묘사하는 것이다. 즉, 프랑스, 러시아, 벨기에는 지금이라도 만족스러운 평화 협상을 맺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영국의 이익을 위해 독일을 파멸시키려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고 호도하는 것이다. 이는 동맹국의 안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직 영국만을 만족시키기 위한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비록 거짓일지라도 이러한 교묘한 왜곡이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벨기에 내에서 우리에게 적대적인 위험한 평화 운동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 장관들과 언론인들 할 것 없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장 혹독한 피해를 입은 동맹국들을 돕겠다는 결의, 그들의 영토를 해방하고 저질러진 불의에 대한 배상을 받아내며, 그들의 미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이점을 확보하겠다는 결의 말이다. 우리는 동맹국들이 안전해질 때까지 평화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수치스러운 일임을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평화를 논할 적절한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영토를 점령당하고 주민들이 극심한 학대를 받아왔으며 지금도 받고 있는 동맹국들의 몫이라는 점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 시기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공동의 대의를 위해 적을 패퇴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모든 희생을 감수할 것이며, 오직 이 생각 외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내용을 지어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동맹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 평화를 원한다면 그것은 동맹국이 직접 꺼낼 문제이지, 우리가 나설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평화를 고려하는 것조차 허용해서는 안 된다. 독일은 반드시 패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의 교묘한 평화 공세를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오직 독일을 패배시켜야만 영국이 만족한다'는 식의 헛소리를 퍼뜨려 우리와 동맹국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오직 동맹국이 당한 부당한 처사를 바로잡는 것뿐이다.

 

이 발췌문들이 그레이 경의 사상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물론 내가 제시한 방식이 그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그레이 경에게 일종의 친밀감을 느낀다. 예컨대 루덴도르프(Ludendorff) 같은 인물에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다. 그를 포식자로 상상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레이 경의 본심을 떠올리면, 감춰둔 이빨을 보지 않기가 어렵다. 전쟁터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상대를 침략자로 낙인찍기 마련이다. 독일이 영국을 짓밟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영국이 독일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두 나라 모두 전쟁의 불을 지핀 공격자였던 것일까?

 

또다시 막다른 길이다. 모든 모순을 명쾌하게 설명해 줄 매혹적인 이론이 있지만, 그 이론이 진실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를 거부하면 모순들이 다시 고개를 들 뿐만 아니라, 그 모순들은 또 다른 의문이라는 친구들까지 대동하고 나타난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 역주 -

 

[1] 사실 이 영상이 보여주는 것은 케냐의 시위가 아니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어느 길모퉁이를 폭력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한 노숙자의 모습이다.

 

[2] '메트로(Metro)'는 라스베이거스 경찰청을 뜻하는 현지 은어다.

 

[3] 즉, 앞서 언급한 영상 속에 나오는 그 폭력적인 부랑자 말이다.

 

- 원문 링크: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08/04/open-letter-pt-2-more-histor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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