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랜드, 암흑계몽주의 전편 한국어 번역본 개정판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1부: 신반동주의자들(新反動主義者, Neo-reactionaries), 출구를 향해 나아가다
닉 랜드(Nick Land), 2012년 3월 2일
계몽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자 과정이다. 18세기 북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일컫는 계몽주의는 현대성의 '진정한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개념이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도 후보에 오르지만, 계몽주의만큼 현대의 기원과 핵심을 잘 포착하는 말은 없다. 사실 '계몽'과 '진보적 계몽'은 모호한 한 끗 차이다. 빛이 퍼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며, 계몽은 스스로를 증명하고 확산하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몽이 밝혀낸 진실은 그 자체로 명백하다. 그렇기에 시대를 거스르는 반동적인 '암흑 계몽주의'라는 말은 얼핏 모순처럼 들린다. 이 역사적 맥락에서 계몽된다는 것은 삶을 이끄는 빛을 인식하고, 그 빛을 향해 나아감을 의미한다.
어둠의 시대가 지나고 계몽의 시대가 왔다. 발전은 스스로 그 가치를 증명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아갈 모범을 제시했다. 게다가 계몽은 르네상스와 다르다. 잃어버린 과거를 기억해 낼 필요도 없고, 옛것으로의 회귀가 지닌 매력을 강조할 이유도 없다. 계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역사가 진보의 과정이라는 휘그주의 사관을 받아들이게 된다.
일단 계몽된 진실이 명백하다고 판단되면 다시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보수주의는 필연적으로 모순에 직면할 운명에 처한다.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 부르기를 거부했던 F. A. 하이에크가 '고전적 자유주의자'나 그보다 더 쓸쓸한 표현인 '남겨진 자들' 대신 '올드 휘그'라는 명칭을 선택한 일은 유명하다. 이는 진보가 예전 같지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선택이었다. 반동적 진보주의자가 아니라면 대체 올드 휘그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물론 상당수의 사람은 반동적 모더니즘이 어떤 모습인지 이미 잘 안다고 생각한다. 특히 1930년대와 같은 혼란으로 회귀하는 듯한 지금의 형국에서는 이러한 우려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진보 진영에서 흔히 쓰는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현상을 가리킨다. 현 상황에서 민주주의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는 대중의 예상과 너무나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그 특수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그저 시대착오적인 퇴행이나 불길한 역사의 반복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기존의 틀과는 분명 다른 구석이 있다. 하나의 기점이 된 것은 2009년 4월 자유지상주의 성향의 싱크탱크 '케이토 연구소'에서 열린 토론회였다. 당시 패트리 프리드먼(Patri Friedman)과 피터 틸(Peter Thiel)을 비롯한 자유지상주의 사상가들은 민주주의 정치의 방향과 가능성에 대한 실망감을 이례적일 만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특히 틸은 이러한 흐름을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요약했다. "이제 나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공존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2011년 8월, 마이클 린드(Michael Lind)는 <살롱(Salon)>에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반박하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꽤 지독하고 해묵은 치부를 들춰내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자유지상주의자들과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자유지상주의는 실제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대부분의 자유지상주의자는 두 가치 중 자신이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 이미 명백히 밝혔다. 이제 남은 유일한 문제는, 왜 우리가 더 이상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이다."
린드와 '신반동주의자들'[1]은 민주주의가 단순한 체제를 넘어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 하나의 벡터라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민주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실상 동의어이며, 이는 국가 권력의 비대화와 분리할 수 없다. 극우 성향의 정부가 아주 드물게 이 과정을 잠시 멈추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를 완전히 되돌리는 일은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선거에서 이기는 법은 결국 표를 사는 행위에 가깝고, 사회의 정보 기관인 교육계와 언론 역시 유권자만큼이나 이러한 매수에 취약하다. 따라서 예산을 아끼려는 정치인은 단지 무능한 정치인일 뿐이며, 민주주의식 다윈주의는 이런 부적격자들을 정치 생태계에서 빠르게 솎아낸다. 좌파는 이러한 현실에 환호하고, 기득권 우파는 불만스레 수용하며, 자유지상주의 우파는 무기력하게 반발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남들이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전혀 다른 출구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자유지상주의의 목소리가 묻히는 것은 구조적으로 필연적인 결과이며, 린드의 말대로 그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자유지상주의자가 이 의견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를 지배해 온 루소주의적 맥락에서 '목소리'는 민주주의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 관점은 국가를 대중 의사의 대변자로 보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결국 정치적 참견을 늘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정치적 권력을 쥔 대중의 집단적 자기표현인 투표가 온 세상을 집어삼키는 악몽이라면, 그 소란에 목소리를 보태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세상은 '평등 대 자유'를 넘어 '목소리 대 탈출'이라는 새로운 대립 구도로 나아가고 있으며,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목소리를 내는 대신 소리 없는 도피를 선택하고 있다. 패트리 프리드먼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자유로운 탈출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유일한 보편적 인권이라 부른다."
극렬한 신반동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단지 파멸할 운명에 처한 체제가 아니라, 파멸 그 자체다. 따라서 민주주의로부터의 탈출은 절대적인 명령에 가깝다. 이러한 반(反)정치의 저변에 흐르는 사상적 조류는 홉스주의와 궤를 같이한다. 이는 대중의 자기표현을 향한 루소식 열정을 처음부터 배제한, 일관되고 일탈 없는 암흑 계몽주의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대중을 본질적으로 울부짖는 비이성적 폭도로 규정하는 이 관점은, 민주화의 역학을 근본적인 퇴행 과정으로 이해한다. 즉 개인의 악덕과 원한, 결핍이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통해 조직적으로 공고해지고 악화되면서, 결국 집단적 범죄와 사회 전반의 부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인과 유권자는 서로를 자극하는 공생 관계다. 이들은 상대방을 부추기며 더 야만적이고 뻔뻔한 폭거로 치닫게 만들고, 끝내 그 소란에 동조해 소리를 지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상황만을 남겨놓는다.
진보적 계몽주의가 정치적 이상을 보는 곳에서 암흑 계몽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본다. 정부 역시 인간이 만드는 조직이며, 그들 또한 배불리 먹으려 들 것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낮춘 암흑 계몽주의의 유일한 목표는 문명이 광기 어린 파멸과 탐욕스러운 방탕으로 치닫는 것만큼은 막는 데 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부터 한스 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에 이르기까지 이 사상적 계보는 한결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바로 '사회를 집어삼키려는 주권(主權) 권력을 어떻게 저지하고 만류할 것인가'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민주주의식 '해법'을 마주할 때마다, 암흑 계몽주의는 그것이 잘해봐야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 유치한 발상임을 거듭 확인해 줄 뿐이다.
호페는 무정부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사법 사회'를 옹호하지만, 군주제와 민주주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는 주저 없이 군주제를 선택한다. 그의 논리는 철저히 홉스주의적 시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세습 독점권자인 왕은 자신의 통치 아래 있는 영토와 백성을 사유 재산으로 여기며, 이 '재산'을 독점적으로 착취한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도 이러한 독점과 독점적 착취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형태만 바뀔 뿐이다. 즉, 국가를 사유 재산으로 여기는 왕과 귀족 대신, 임기가 정해진 교체 가능한 관리인이 국가의 독점적 운영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 관리인은 국가를 소유하지는 않지만, 재임 기간 동안 자신과 추종자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이용할 권한을 갖는다. 그는 국가의 자산 그 자체가 아니라, 재임 중의 이용권, 즉 용익권(用益權)만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착취를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미래의 자산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분별한 착취를 낳는다. 결국 착취는 근시안적으로 변하고, 국가 자산의 고갈이 조직적으로 부추겨질 뿐이다."
다당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한시적인 권력을 쥔 정치 세력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에 직면한다. 바로 가능한 한 가장 빠르고 철저하게 사회를 약탈하려는 충동이다. 이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남겨둔 자산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정치적 후임자에게 고스란히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후임자는 물려받은 자원을 동원해 전임자를 공격하는 데 쓸 것이 분명하다. 결국 남겨진 모든 것은 적의 손에 쥐어질 무기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훔칠 수 없다면 차라리 파괴하는 편이 그들에게는 이롭다.
민주주의 정치인의 관점에서 볼 때, 직접 손에 넣을 수 없거나 자기 정파의 업적으로 포장할 수 없는 사회적 재화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낭비일 뿐이다. 반대로 심각한 사회적 재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 정권의 탓이거나 다음 정권으로 미룰 수만 있다면, 이들의 합리적 계산법 안에서는 명백한 호재로 둔갑한다. 과거 휘그주의적 의미에서 사회적 진보를 구성했던 장기적인 기술 경제적 발전이나 이에 따른 문화적 자산의 축적은, 이제 그 어떤 정치인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번성하는 순간, 문명이 쌓아 올린 이 모든 가치는 당장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나의 과정으로서 문명은 '낮은 시간선호', 즉 현재보다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나 역사적 사실로나 미래보다 현재를 극단적으로 우선시하게 만들며, 끝내 사회를 발작적인 폭식 경쟁으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문명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개념에 가장 가깝다. 당장 야만적인 살육전이나 좀비 아포칼립스 같은 파멸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 결국에는 그와 같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바이러스가 사회 전반을 태워버리면서, 인적·산업적 투자를 가능하게 했던 미래지향적이고 신중한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오직 무의미하고 말초적인 소비주의와 재정적 방종, 그리고 '리얼리티 TV 예능 프로그램' 수준으로 전락한 정치 쇼뿐이다. 내일은 다른 정파의 세상이 될지도 모르니,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편이 낫다는 식이다.
"평균적인 유권자와 5분만 대화를 나눠보면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신반동주의자나 할 법한 말을 남긴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사실 다른 발언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민주주의는 이미 시도된 다른 모든 체제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부 형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 민주주의는 형편없다.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하지만 대안이 없지 않느냐"라고 노골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속뜻은 명백하다.
이러한 정서는 현대 보수주의자들에게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끊임없이 몰락하는 문명을 씁쓸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의 환멸 섞인 태도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파멸적이거나 비현실적인 대안들을 모두 버리고 남은, 매력 없지만 지워버릴 수도 없는 최종적인 사회 제도로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지적 인식과도 공명한다. 이 관점에서 시장 경제는 정치적으로 황폐해진 세상의 폐허 속에서 가까스로 기워 맞춘, 자생적인 생존 전략에 불과하다. 세상은 아마도 영원히 나빠지기만 할 것이다. 원래 다 그런 법이다.
그렇다면 대체 대안은 무엇일까. 물론 그 대안을 찾겠다고 1930년대를 다시 뒤지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반동주의의 절대 권위자인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는 이렇게 반문한다. "21세기 포스트 민주주의 사회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동유럽이 공산주의라는 병에서 회복되었다고 여기듯, 민주주의라는 병으로부터 회복되었다고 자처하는 사회 말이다. 글쎄, 내 생각에 그런 상상을 하는 사람은 우리 중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몰드버그의 사상적 기반은 오스트리아학파 자유지상주의에 닿아 있지만, 이제는 그 단계를 완전히 넘어섰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또 그 승리가 온전히 유지되는 세상에 대한 현실적인 그림을 제시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국가라는 존재가 내리막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비대해지려는 세상을, 억지로 다시 산 위로 밀어 올릴 방법만 찾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전망은 시지프스의 형벌과도 같으며, 왜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그토록 적은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그가 신반동주의로 각성하게 된 계기는 주권이란 결코 제거되거나, 구속되거나, 통제될 수 없다는 (홉스주의적) 인식이었다. 무정부자본주의적 유토피아는 SF 소설 속에서나 존재할 뿐 결코 현실로 응고될 수 없고, 분립된 권력들은 마치 산산조각 났다가도 다시 합쳐지는 터미네이터처럼 결국 하나로 흘러들며, 헌법은 오직 주권을 쥔 해석 권력이 허용하는 만큼만 실제적인 권위를 가질 뿐이다.
국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를 운영하는 자들에게 그 가치는 포기하기엔 너무나도 막대하며, 사회 내에서 주권이 집중되어 발현된 실체인 국가에게 그 어떤 존재도 무언가를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몰드버그는 국가를 없앨 수 없다면, 적어도 민주주의(즉, 조직적이고 퇴행적인 악정)라는 질병만큼은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국가를 '공식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신관방주의(neo-cameralism, 新官房主義)'라 부르는 접근법이다.
"신관방주의자의 관점에서 국가란 한 나라를 소유한 하나의 기업이다. 따라서 국가는 다른 대기업들과 마찬가지로 합리적으로 경영되어야 한다. 즉, 국가의 논리적 소유권을 매매와 협상이 가능한 주식으로 분할하고, 각각의 주식에 국가가 창출하는 이윤의 정확한 지분만큼 배당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막대한 이윤을 남긴다.) 각 주식은 하나의 의결권을 가지며, 주주들은 이사회를 구성하여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거나 해고한다.
이 기업의 고객은 바로 그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이윤을 극대화하도록 경영되는 신관방주의 국가는 다른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고객에게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이 관점에서 정치의 부패와 실정(失政)은 곧 기업의 경영 부실과 정확히 같은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국가가 시민 전체의 '소유'라는 민주주의적 신화를 완전히 짓밟아버리는 것이 급선무다. 신관방주의의 핵심은 주권 권력의 실질적인 이해관계자들을 돈을 주고 매수하여 정리하는 것이지, 대중의 참정권이라는 감상적인 거짓말을 영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소유권이 실제 지배자들의 손으로 공식 이양되지 않는 한, 신관방주의으로의 전환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권력은 여전히 음지에 머물 것이며, 민주주의라는 저급한 코미디도 계속될 뿐이다.
따라서 두 번째 단계로, 실제 지배계급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식별해야 한다. 여기서 즉각 짚고 넘어갈 점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분석과 달리 이 지배계급이 결코 '자본가 부르주아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논리적으로도 그럴 수가 없다. 비즈니스 계급의 권력은 이미 화폐라는 형태로 명확히 공식화되어 있으므로, 자본을 정치 권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완전히 중복이자 불필요한 분석이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자본가들이 정치적 특혜를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 특혜의 잠재적 가치는 얼마나 되며, 이를 부여할 권한은 어떻게 분배되어 있는가?"
이를 파악하려면 도덕적 거부감을 최소화한 채, 정치적 뇌물 수수(이른바 '로비')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지형 전체를 정밀하게 지도로 그려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뇌물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행정·입법·사법·언론·학계의 특권들을 매매 가능한 주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유권자들 역시 뇌물을 줄 만한 가치(표값)가 있는 한 이 계산에서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들이 가진 주권의 지분은 그에 걸맞은 조롱과 함께 아주 미미하게 책정될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도출되는 최종 결론은 민주주의 정체(政體)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진짜 권력 기구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몰드버그는 이 지배적 실체를 '대성당(The Cathedral, 大聖堂)'[2]이라 부른다.
정치 권력의 공식화가 가져오는 세 번째 결과는, 비로소 효율적인 통치가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적 부패로 얼룩진 세계가 '정부-주식회사(gov-corp)'의 자유롭게 거래 가능한 주식 지분으로 전환되면, 국가의 소유주들은 최고경영자(CEO) 임명을 시작으로 합리적인 기업 지배구조를 가동할 수 있다. 다른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이제 국가의 이해관계는 '장기적인 주주 가치의 극대화'라는 명확한 목표로 공식화된다.
이 시점부터 주민(고객)들은 정치에 그 어떤 관심도 가질 필요가 없다. 아니, 사실 이 체제에서 정치에 관심을 두는 행위는 반쯤 범죄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정부 기업이 세금(주권 임대료)에 걸맞은 만족스러운 가치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주민들은 고객 서비스 부서에 민원을 제기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자산을 챙겨 다른 국가로 떠나면 된다.
정부-주식회사는 더 많은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효율적이고, 매력적이며, 활력 넘치고, 깨끗하고 안전한 나라를 운영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참정권(Voice)은 없다. 오직 자유로운 퇴거(Exit)만이 존재할 뿐이다.
"… 비록 완전한 형태의 신관방주의 접근법이 실제로 실행된 적은 없지만, 역사적으로 이와 가장 유사한 사례를 꼽자면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대표되는 18세기 계몽절대주의(啓蒙絕對主義) 전통, 그리고 홍콩, 싱가포르, 두바이 같은 대영제국의 잃어버린 파편들에서 볼 수 있는 21세기의 비민주주의적 전통이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의미 있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에게 매우 높은 수준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범죄율은 극도로 낮고,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자유의 수준은 매우 높다. 또한 이들은 대개 상당히 번영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이 취약한 부분은 오직 정치적 자유뿐인데, 정부가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기능할 때 정치적 자유란 정의상 아무런 중요성도 가지지 못한다."
고대 유럽의 고전기 그리스·로마 시대에 민주주의는 순환적인 정치 발전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한 단계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퇴행하고 부패하는 성격을 지녔으며, 궁극적으로는 독재와 폭정으로 미끄러지기 직전의 전조 단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고전적 이해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비판적 자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글로벌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는 신뢰할 만한 사회과학적 논증이나 대중의 자발적인 열망으로서 주장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명확히 식별 가능한, 특정한 형태의 종교적 신조로서 강요되고 있다.
"… 내가 '보편주의'라 부르는 이 기성 전통은 사실 신을 믿지 않는 비유신론적 형태의 기독교 파벌이다. 오늘날 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다른 명칭들로는 진보주의, 다문화주의, 자유주의, 인본주의, 좌익 사상, 정치적 올바름 등이 있다. … 보편주의는 칼뱅주의 계보에서 뻗어 나온 현대 기독교의 가장 지배적인 분파로, 영국의 비국교도나 청교도 전통에서 시작해 유니테리언, 초월주의, 그리고 진보주의 운동을 거치며 진화해 왔다.
그 뿌리 깊은 덤불 속에는 기독교적 혈통이 비교적 잘 숨겨져 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몇 가지 곁가지들도 포함되어 있다. 루소주의적 세속주의, 벤담주의적 공리주의, 개혁 유대교, 콩트주의적 실증주의, 독일 관념론, 마르크스주의적 과학적 사회주의, 사르트르주의적 실존주의, 하이데거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바로 그것이다. … 내가 보기에 보편주의는 권력을 숭배하는 신비주의 사이비 종교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 모기 없는 말라리아를 상상할 수 없듯, 국가 없는 보편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핵심은 당신이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이 실체의 역사가 적어도 200년, 길게 보면 500년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종교개혁 그 자체다. … 그러니 그저 이 거대한 존재 앞에 걸어가 '악마'라고 비난하는 짓이 통할 리 없다. 그것은 크툴루 신화의 외계 신인 슈브 니구라스(Shub-Niggurath)를 상대로 소액 재판소에 고소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은 어떤 모습인가. 끊임없이 비대해지는 국가 권력, 타인의 자원을 강제로 징발할 권리로 변질된 가짜 '기본권'의 난립, 정치화된 화폐,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명목 하에 자행되는 무모한 성전(聖戰), 보편주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 촘촘히 짜인 사상 통제, 그리고 정부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한 과학. 이 모든 현상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몰드버그가 던졌던 핵심적인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어떻게 미국 북동부 메사추세츠의 청교도적 진보주의가 전 세계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해가 갈수록 올바른 통치에 대한 국제적 이상은 뉴잉글랜드 대학들의 ‘불만 연구’ 학과들이 세운 기준에 더 가깝고 더 엄격하게 다가서고 있다. 이것은 과거 영국 혁명기 극단적 평등주의자들인 랜터파(Ranters)와 레벨러파(Levelers)가 부르짖던 '신성한 섭리'가 지구적 규모의 목적론으로 격상된 결과이며, '대성당'의 통치가 전 지구적으로 공고해졌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대성당'은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을 자신들의 복음으로 대체해 버렸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표명했던 우려들을 한번 살펴보자. (이 어록들은 한 블로그의 댓글에서 '리버티-클링어(Liberty-clinger)'라는 닉네임의 사용자가 정리해 놓은 것이다.)
"민주주의는 군중의 지배에 지나지 않는다. 51퍼센트가 나머지 49퍼센트의 권리를 빼앗아갈 수 있는 체제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민주주의란 늑대 두 마리와 양 한 마리가 점심 메뉴를 두고 투표하는 것이다. 자유는 양도 제대로 무장하고 그 투표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립한다!" —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민주주의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이내 스스로 닳아 없어지고, 기진맥진해지고, 끝내 파멸하고만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민주주의는 지금껏 단 하나도 없었다." — 존 애덤스(John Adams)
"우리는 공화정부(Republican Government)다. 진정한 자유는 전제정치에서도, 급진적인 민주주의에서도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순수한 민주주의가 실현 가능하다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정부가 될 것이라는 견해도 존재해 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틀린 주장도 없다는 것이 경험으로 입증되었다. 주민들이 직접 모여 국사를 논했던 고대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좋은 정부로서의 면모를 단 한 가지도 갖추지 못했다. 그 본질 자체가 바로 폭정이었다." —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발로 하는 투표(퇴거의 자유)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 그리고 몰드버그의 눈부신 천재성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글에서 계속 이어진다…
추가 주석 (3월 7일):
위에서 인용한 '벤자민 프랭클린'의 명언은 실제 그가 한 말이 아닐 수 있으니 맹신하지 말 것. 배리 포픽(Barry Popik, 미국의 어원·학술 연구가)에 따르면, 이 문구는 아마도 1992년 제임스 보바드(James Bovard)가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보바드는 다른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정치적 사고(思考)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동일시하는 것만큼 위험한 오류는 거의 없다.")
- 역주 -
[1]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 NRx): 2000년대 후반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필명: Mencius Moldbug)이 블로그 《무조건적 유보(Unqualified Reservations)》를 통해 초석을 다진 극우·반동주의 철학 및 정치 운동. 야빈은 2008년 6월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제 10부: 간단한 주권 파산 절차(An Open Letter to Open-Minded Progressives Chapter X: A Simple Sovereign Bankruptcy Procedure)》에서 ‘neoreactionary’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2012년 닉 랜드(Nick Land)가 《암흑 계몽주의》 에세이를 통해 운동을 대중화하고 가속주의적 요소를 결합해 정립했다.
이들은 평등주의와 민주주의를 인류의 진보가 아니라 ‘사회의 역동성을 마비시키고 쇠락으로 이끄는 재앙’으로 규정하며, 대안으로 건국 초기 미국의 제한적 공화정, 절대군주제, 또는 주식회사처럼 운영되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도시국가를 제시한다.
‘반동(Reactionary)’이라는 이름은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보편적 이성과 평등 가치에 대한 전면적 거부에서 비롯되며, ‘신(Neo-)’이 붙은 것은 단순한 과거 복고가 아니라,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신관방주의(Neocameralism)·가속주의·블록체인 등 현대적인 사상과 도구들을 활용해 민주주의 체제로부터의 탈출(Exit)과 포스트-자유주의적 미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기술관료주의자들과 피터 틸(Peter Thiel) 같은 투자자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 인사(JD Vance 등)에게 간접적인 지적 영향을 미치며, 미국 ‘신우파(New Right)’의 중요한 사상적 하류 중 하나로 평가된다.
[2] 대성당(The Cathedral): 신반동주의(NRx) 철학의 창시자 커티스 야빈(Curits Yarvin. 필명: Mencius Moldbug)이 정립하고 닉 랜드가 수용한 핵심 용어로,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실질적인 지적·도덕적 권력을 행사하는 ‘진보주의적 엘리트 지식인 카르텔’을 뜻한다. 주류 학계, 레거시 미디어, 그리고 관료제 집단 및 문화·연예계가 이에 포함된다.
이들이 명확히 중앙에서 조정하는 사람 없이도 자전거 경주의 펠로톤(Peloton)처럼 일제히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며 통합된 세계관인 ‘시놉시스(Synopsis)’를 생산·전파하는 현상을 비유한 것이다.
야빈이 굳이 '대성당'이라는 종교적 명칭을 선택한 이유는, 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세속주의와 평등주의를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세 유럽의 대성당처럼 ‘정통 교리를 생산하고 유포하며, 이단(보수·반동주의)을 심판하는 신권정치적 사제 계급’의 매커니즘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들이 정치적 이권을 사기 위해 로비하는 진짜 대상이자, 대중 선동을 통해 민주 국가의 이념적 정통성과 실제 정책 수립 권한을 독점한 ‘선출되지 않은 진정한 지배 계급’을 꼬집는 신랄한 은유다.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2부: 역사의 궤적은 길지만, 결국 좀비 아포칼립스로 흘러간다
닉 랜드(Nick Land), 2012년 3월 9일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 이 논의를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지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리나 시트린(Marina Sitrin):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민주주의가 존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
(존 J. 밀러(John J. Miller)의 기록에서 인용)
“역사의 문제는 늘 여기에 있다. 마치 모든 상황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민주주의’와 ‘자유’를 함께 검색해 보면 어두운 의미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적어도 사이버 공간에서는 두 개념이 긍정적으로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명백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글 검색엔진이 긁어모은 방대한 데이터로 여론을 판단해 보면, 두 단어는 서로 결합하기보다 대립하고 충돌하는 관계로 나타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민주주의가 자유를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인 위협이며, 결국에는 자유를 완전히 말살하고 말 것이라는 보수주의적 통찰과 궤를 같이한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계는 마치 '엄청난 식성과 거대한 체구를 가진 가르강튀아(Gargantua)'와 파이의 관계와 같다. “우리가 자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가. 속이 출출해 침이 고일 지경이다.”
스티브 행크(Steve H. Hanke)는 짧은 에세이 <민주주의 대 자유>에서 미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대다수 미국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1776년 독립선언서나 1789년 미국 헌법에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또한 미국의 건국 문서에 왜 이 단어가 빠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나면 더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대중이 그동안 선전 선동을 통해 믿어온 바와 달리,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았으며 몹시 우려했다. 다수의 폭정이 가져올 폐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 제정자들은 연방 정부가 다수의 의지에 휘둘리지 않도록, 즉 민주주의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헌법 제정자들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과연 무엇을 지키려 했을까? 이들은 정부의 목적이 존 로크가 주장한 생명, 자유, 재산이라는 세 가지 권리를 시민에게 보장하는 데 있다는 점에 모두 동의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 한다.
“헌법은 기본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주체와 그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명시한 구조적이고 절차적인 문서다. 특히 권력분립과 견제와 균형을 매우 강조한다. 이는 사회 공학을 목적으로 만든 가공의 설계나 공식이 아니라, 정부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였다. 한마디로 헌법은 국민이 아니라 정부를 다스리기 위해 고안된 법이다.
권리장전은 국가의 침해로부터 국민이 지키는 권리를 규정한다. 권리장전에 따라 시민이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배심원 재판을 받을 권리뿐이다. 그 밖의 모든 시민 권리는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헌법 비준 후 약 100년 동안 미국의 사유재산과 계약, 국내 자유 무역은 절대적인 가치로 존중받았다. 이에 따라 정부의 권한과 규모도 극히 제한되었다. 이 모든 제도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자유'의 개념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반동의 정신이 시스(Sith)의 촉수처럼 뇌리를 파고들기 시작하면, 과거의 고전적(혹은 비공산주의계열) 진보주의 서사가 한때 어떻게 통용될 수 있었는지조차 기억하기 어려워진다. 도대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갈수록 막강한 권력을 쥐며 포퓰리즘에 빠져들던, 저 굶주린 괴물 같은 국가에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결국 마주하게 될 이 재앙은 너무도 뻔히 예견된 일이 아니었나? 과거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토록 태연히 휘그주의자, 즉 낙관적 진보주의자가 될 수 있었을까?
급진적 민주화가 지닌 이념적 파급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진보주의 성향의 월터 러셀 미드(Walter Russell Mead)부터 무신론적 반동주의자인 멘시우스 몰드버그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상가가 낱낱이 파헤쳤듯, 급진적 민주화는 극단적 개신교의 종교적 열광과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이것이 혁명가의 영혼을 뒤흔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마틴 루터가 교황청 체제에 도전장을 던진 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독일 전역에서는 농민 반란군들이 지배 계층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적 발전이 지닌 실증적 신뢰성은 훨씬 더 당혹스럽고 진정으로 복잡한 문제다. 이는 데이터에 기반한 치열한 논쟁이 필요한 영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혼란이 생기는 이유는 현대 민주주의 제도가 과학 기술, 경제, 사회, 정치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착시와 잘못된 인과관계가 만들어졌다.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의 주장대로 산업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관료주의 문화를 낳고 결국 정체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겉보기에는 민주주의가 물질적 풍요와 '동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특히 이념적 열망이 편견으로 작용하면, 후행 지표를 긍정적인 원인으로 오인하기 쉽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암은 살아 있는 생명체에만 생기는 병이므로, 암을 생명력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로빈 핸슨(Robin Hanson)은 다음과 같이 완곡하게 지적한다.
“그렇다. 수많은 지표가 지난 한 세기 동안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왔고, 앞으로 한 세기 동안도 계속 나아질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판 케네디의 정치적 여정에 동참하면 '빈곤, 질병, 독재,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두고, 이를 '유토피아적 환상'이라 비판하는 학생들의 생각이 실증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 이 분야에서 나타난 긍정적인 변화들은 결코 그러한 정치 운동 덕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대부분 산업혁명을 통해 인류가 풍요해진 결과물이며, 오히려 정치 운동은 평균적으로 이러한 발전을 가로막는 경향이 있었다.”
단순한 역사적 연대기만 보더라도 민주화는 산업화의 결과물일 뿐, 산업화를 이끈 원동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찰은 대중 사회과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이론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사회가 민주적인 방향으로 '성숙'하는 것은 부의 축적이나 중산층 형성과 같은 특정 임계점을 넘어서야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 깔린 엄격한 논리적 귀결, 즉 민주주의가 물질적 진보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대개 간과된다. 민주주의는 진보를 소비할 뿐이다. 암흑 계몽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라는 현상을 연구하는 데 가장 적합한 분석 틀은 다름 아닌 일반기생충학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식인 행위와 함께 사회가 붕괴해 갈 때, 준(準)자유지상주의적 대응은 이러한 현실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이 선호하는 대책은 격리다. 이때 중요한 것은 소통의 단절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를 기능적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피드백 루프를 긴밀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를 가장 강력한 형태로 직접 마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사회적 연대는 기생적 행위의 편이다. 급진적으로 민주화된 사회는 시장 신호와 같은 즉각적인 피드백 메커니즘을 모두 잘라낸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일반 의지’라는 중앙 집중화된 광장을 통과하는 느릿하고 불투명한 시스템으로 대체한다. 그 결과 사회는 기생 행위가 저지른 파괴적 결과로부터 기생 행위 자체를 안전하게 분리해 준다. 결국 개인의 차원에서 고통스럽고 역기능적이어서 당장 바로잡아야 했을 잘못된 행동 패턴들이, 사회 전체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만성적인 구조적 병리 현상으로 고착되고 만다.
남의 신체를 물어뜯으면 취업하기 힘들어진다. 시장 원리에 충실하고 피드백이 확실한 자유방임 사회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깨달을 법한 교훈이다. 그러나 인정 넘치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이를 두고 사상이 불온한 '좀비 혐오적 차별'이라며 맹비난할 것이 뻔하다.
그러면서 이들은 생체 기능 저하자들을 위한 정부 예산을 늘리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식인 충동을 느끼는 이들을 위해 인식 개선 캠페인을 벌일 것이다. 대학 교육과정에는 좀비 라이프스타일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집어넣으며, 비틀거리는 언데드들이 이윤만 추구하는 성과중심적인 기업이나 구시대적인 생명존중 사상을 지닌 고용주에게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일터에 대한 규제를 촘촘하게 강화할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기생충의 비호 아래 좀비에 대한 자비로운 관용이 판을 칠 때, 현실적인 보상 체계의 효과에 주목하는 소수의 반동주의자들은 으레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런 정책들이 결국 좀비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가?”
그러나 역사의 주류 흐름은 이러한 성가신 반론을 소외시키고 무시하며, 가능하면 사회적 매장을 통해 입을 막아버리는 쪽으로 흘러간다. 결국 이러한 주류 흐름에 반발하는 이들은 비상식량과 탄약, 은화를 챙겨 지하실을 요새화하거나, 제2국적 취득 절차를 서두르며 짐을 싸기 시작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역사적 실체 없는 막연한 소리로 들린다면, 아주 적절한 처방이 있다. 잠시 시선을 돌려 요즘 화제인 그리스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서구 몰락의 축소판으로서 그리스의 이야기는 눈을 떼기 힘들 만큼 흡인력이 있다. 초기 민주주의에서 시작해 완연한 좀비 아포칼립스에 이르기까지, 깔끔하진 않지만 지극히 극적인 2500년의 궤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례가 지닌 최고의 미덕은 극단에 치달은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대규모 중앙 집중식 재분배 시스템을 통해 개인과 지역 사회의 행동을 교란함으로써, 자신들이 내린 결정의 결과로부터 이들을 완전히 분리해 버린다. 개인이 할 행동은 스스로 결정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다 함께 투표로 책임을 지우는 식이다. 이런 달콤한 제안을 대체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한 후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여준 모습은 전혀 놀랍지 않다. 이들은 미시적인 사회적 신호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 피드백을 '유럽의 연대'라는 거창한 회로로 우회시키는 사회공학적 초거대 프로젝트에 열성적으로 동참해 왔다. 결과적으로 경제적으로 유의미한 모든 정보가 유럽중앙은행(ECB)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그리스가 '유럽'이라는 체제와 결탁하여 자국 금리에 담길 수 있었던 모든 시장 신호를 완전히 말살해 버렸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 정책 선택에 작동해야 할 금융 시장의 모든 자정 작용을 사실상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야말로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가장 극치에 달한 민주주의의 형태다. 현실을 법적으로 폐기해 버리는 것만큼 '일반 의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은 없으며, 독일의 낮은 금리를 그리스의 방만한 재정 지출에 결합하는 것만큼 현실 세계에 확실하게 독약을 들이붓는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처럼 살고, 돈은 독일인처럼 내라." 이 지극히 매력적인 슬로건을 내걸고도 정권을 잡지 못하는 정당이 있다면, 황량한 광야에서 독수리가 파먹다 남은 찌꺼기나 찾아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마땅할 것이다. 이 표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상상 가능한 의미 그대로, 그야말로 진정한 '뇌가 없는 자들'을 위한 궁극의 선택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될 수 있겠는가?
보다 정확히 말해,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멘시우스 몰드버그는 자신의 블로그 ‘무조건적 유보(Unqualified Reservations)’에 연재한 시리즈 《도킨스는 어떻게 몰락했는가(How Dawkins Got Pwned)》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염성을 지닌' 가상의 '최적화된 밈적인(memetic) 기생충'을 설계하기 위한 규칙들을 개괄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엄청난 전염성을 지닐 것이고, 극도로 병원성이 높을 것이며, 끈질기게 살아남을 것이다. 그야말로 매우 끔찍한 바이러스다."
이 이념적인 매우 강력한 흑사병에 비하면, 리처드 도킨스가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그토록 조롱했던 구시대의 유물 같은 일신교 신앙은 고작해야 조금 불쾌한 독감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밈(meme)의 개조 작업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암흑 계몽주의의 도식에 따라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을 관통하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내 생각에 도킨스 교수는 그저 '기독교적 무신론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개신교적 무신론자'다. 그리고 단순한 개신교적 무신론자도 아니다. 그는 '칼뱅주의적 무신론자'다. 더 나아가 그는 '영국-칼뱅주의적 무신론자'다.
다시 말해, 그를 '청교도적 무신론자', '비국교도적 무신론자', '반국교도적 무신론자', '복음주의적 무신론자' 등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생물학적 분지학(分枝學)에 기반한 계통 분류는 도킨스 교수의 지적 가계를 약 400년 전, 즉 영국 내전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다. 물론 무신론이라는 주제만 제외한다면, 도킨스의 핵심 사상은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에 번성했던 랜터(Ranter), 레벨러(Leveller), 디거(Digger), 퀘이커(Quaker), 제5왕국파(Fifth Monarchist), 혹은 그 외 극단적인 영국 비국교도 전통의 교리들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일치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 자들은 괴짜들이었다. 광적인 광신도들이었던 셈이다. 17, 18, 19세기의 평범한 영국 주류 사상가에게 이들의 전통(혹은 그 현대적 후손)이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지배적인 기독교 교파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면, 그는 이를 인류 종말이 임박했다는 징조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 주류 사상가들이 틀렸다고 확신한다면, 당신은 나보다 훨씬 더 강한 확신을 지닌 셈이다.
다행히도 크롬웰 본인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편이었다. 호국경 체제 치하에서 극단적인 초(超)-청교도 종파들이 권력을 완전히 틀어쥐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 다행스럽게도 크롬웰은 나이가 들어 사망했고, 크롬웰주의도 그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영국에는 합법적인 정부와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복원되었으며, 비국교도들은 다시 변두리의 비주류 밀려났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이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 시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쓸 만한 기생충을 그리 쉽게 잠재울 수는 없는 법이다. 청교도 집단은 미국으로 도망쳐 뉴잉글랜드에 신권정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미국 독립 혁명과 남북 전쟁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며, 미국 청교도주의는 세계를 제패하는 가도로 거침없이 진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에서의 승리는 이들의 전세계적인 패권을 확고히 다져놓았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정당성을 인정받는 모든 주류 사상은 결국 미국의 청교도들, 그리고 그들을 거쳐 영국의 비국교도들에게서 뻗어 나온 후손들이다.”
이 '매우 끔찍한 바이러스'가 세계를 제패하게 된 상황에서, 도킨스처럼 이러한 상황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난 인물을 굳이 물고 늘어지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몰드버그가 도킨스를 비판 대상으로 삼은 데에는 정교하게 계산된 전략적 이유가 있다.
몰드버그는 도킨스의 다윈주의, 아브라함계 유신론에 대한 지적 거부, 그리고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광범위한 헌신이라는 측면에서 그와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몰드버그가 포착한 핵심은 따로 있다. 도킨스의 비판적 사고 능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진보주의를 위협할 만한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지극히 갑작스럽고 종종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딱 멈춰 버린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도킨스는 매우 상징적인 지표다. 오늘날의 전투적 무신론 역시 아브라함계 메타 밈(meta-meme)이 현대적으로 변형된 하나의 변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영국-개신교 및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계통적 분파에 속해 있으며, 그들만의 고유한 전통은 다름 아닌 '반(反)전통주의'다.
따라서 《만들어진 신》에서 보여주는 요란한 무신론은 일종의 방어용 교란 작전이자 종교 개혁의 일관된 업그레이드 버전에 가깝다. 이는 경험주의와 이성을 압도하는 진보적 열망에 의해 작동되며, 초기 유신론 버전에서 발견되던 것 못지않게 신경질적인 교조주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도킨스는 그저 계몽된 현대 진보주의자나 암묵적인 급진적 민주주의자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화려한 경력을 지닌 과학자, 더 정확히는 생물학자이며, (따라서) 다윈주의 진화론자다. 그러므로 그가 이 밈적 슈퍼 바이러스가 규정한 '용납 가능한 사상의 한계'에 부딪히는 지점이 어디일지는 아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가 물려받은 저교회파(low-church) 초(超)-개신교 전통은 영적 투자의 대상을 '신'에서 '인간'으로 대체했다. 문제는 그 '인간'이라는 개념이 지난 1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윈주의적 연구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을 겪어왔다는 점이다.
(올바르고 품격 있는 당신이라면 몰드버그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읽었을 때, 아마 이미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발 인종 얘기는 하지 마세요, 인종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시대정신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맹신하는 저 달콤한 '진보'라는 신의 이름으로 제발 인종만큼은 언급하지 말아주세요...')
그러나 몰드버그는 이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를 인용한 도킨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물어뜯기가 아니라 사고력으로 겨루는 경쟁에서, 문명 위계질서의 가장 높은 자리는 확실히 우리의 어두운 피부를 가진 사촌들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킨스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틀에 가두어 논평한다.
"만약 헉슬리가 우리 시대에 태어나 교육받았더라면, 그의 빅토리아 시대적 감상과 번지르르한 어조에 우리와 함께 가장 먼저 몸서리쳤을 것이다. 내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오직 시대정신(Zeitgeist)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상황은 더 악화된다. 몰드버그는 헉슬리의 손을 잡고... (우웩!) 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듯한 기괴한 짓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건 확실히 기존의 평범하고 온건한 자유지상주의적 반동주의의 수준을 넘어섰다. 진정으로 어둡고 섬뜩해지는 지점이다.
"진지하게 묻건대, '인류는 평등하다는 사상'의 증거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도킨스 교수는 정확히 무슨 이유로 모든 신인류(新人類)가 신경학적 발달 측면에서 완전히 동일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가?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생물학적 다양성 혹은 균일성이 지닌 과학적 타당성에 대해 각자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든 간에, 오늘날 오직 후자의 가정(균일성)만이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설령 인간 본성에 대한 진보주의적·보편주의적 믿음들이 실제로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그 믿음을 고수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합리성의 기준을 통과할 만한 검증 과정을 거쳐 그 결론에 도달한 것도 결코 아니다.
이 믿음들은 종교적 교리로서 수용될 뿐이다. 신앙의 핵심 조항들이 으레 그러하듯, 격정적이고 강렬한 맹신을 동반한 채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과학적 오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정치적 올바름의 결여'라 부르고, 과거에는 '이단'이라 불렀던 바로 그 사상의 문제다.
인종주의에 대해 이처럼 초월적인 도덕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원죄’ 교리를 맹신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는 비합리적인 행위다. 사실 인종주의는 원죄 교리가 현대적으로 변형된 명백한 대체물에 불과하다.
물론 결정적인 차이는 있다. ‘원죄’는 고립된 사회적 집단이 고수하는 전통적 교리일 뿐이며, 대중 지식인이나 언론인들 사이에서 거의 대변되지 못하고, 주류 세계 문화에서도 철저히 유행에 뒤떨어진 취급을 받는다. 게다가 이 원죄 교리를 널리 비판하거나 조롱하더라도, 비판자가 살인, 절도, 간통을 옹호하고 있다고 곧바로 단정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 인종주의가 사회의 '최악이자 본질적인 죄악'이라는 지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사회 엘리트들로부터 전방위적인 비난을 사게 되며, 노예제 옹호론에서부터 제노사이드 망상에 이르는 온갖 사상범의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다. 이 체제 속에서 인종주의는 일상적인 시민 간의 상호작용이나 사회과학적 현실주의, 혹은 효율적이고 비례적인 법 집행의 영역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그것은 무한과 영원의 영역, 즉 초(超)-개신교도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타오르는 죄악의 심연에 속하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악'으로 군림한다.
과거의 이단과 이를 대체한 새로운 이단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감정의 불균형, 제재의 격차,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사회적 권력의 비대칭성은 한번 눈치채고 나면 계속해서 신경을 자극하는 지표가 된다. 새로운 종파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들은 딱히 자신들을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종 간에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인간 생물학적 다양성(HBD, Human Biodiversity)’을 지지하는 집단마저도, ‘주류 사회의 올바른 인종관을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신성화하는 현상 그 자체’만을 가지고 논해서는 몰드버그가 간파한 급진 민주주의의 그 깊은 병리성을 전부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그 병리의 핵심은, 국가에 대한 헌신적 신앙에 있다.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 3부
닉 랜드 (Nick Land), 2012년 3월 19일
이 시리즈의 지난 편은 주인공 멘시우스 몰드버그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지독한 늪에 깊숙이 빠진 채 결말을 맺었다. 몰드버그는 '도킨스는 어떻게 몰락했는가'라는 정치·종교적 사색의 어두운 핵심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몰드버그는 도킨스가 토마스 헉슬리의 인종차별적인 '빅토리아 시대적 정서'를 맹렬히 비난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이는 도킨스의 위선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킨스는 헉슬리의 말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면서도, 굳이 그 말을 인용하는 이유가 "단지 시대정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기묘한 선언으로 설교를 끝맺는다.
몰드버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그 '시대정신'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 참으로 대단한 포착이 아닐 수 없다. 생물학자이자 자연주의적 진화와 아브라함 계열 종교라는 상반된 두 주제에 유독 집착해 온 사상가(도킨스)가, 세계사적인 정신의 일방향적 발전 흐름을 마주한 셈이다. 하지만 그는 이 흐름이 과학의 발전이나 인간 생물학, 혹은 종교적 전통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단호히 부정한다. 정밀한 논리나 증거는 전혀 대지 못한 채 말이다. 그 결과로 나온 횡설수설은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몰드버그의 눈에는 그 모든 맥락이 명확히 보였다.
“사실 도킨스 교수가 말하는 시대정신은 과거 영국-칼뱅주의나 청교도가 믿었던 '섭리'의 개념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어쩌면 잘못 짚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개념은 기가 막힐 정도로 닮아 있다.
시대정신을 다른 말로 바꾸면 바로 '진보'다. 보편주의자들이 진보를 믿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실제로 정치적 맥락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 부르곤 한다. 보편주의는 헉슬리가 부끄러운 망언을 남겼던 1913년 이래로 분명 상당한 진보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편주의가 기생적인 전통이라는 주장이 반박되는 것은 아니다. 진드기에게 진보가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개에게도 진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 이 질문은 거듭 던질 만한 가치가 있다. 우선, 영국의 한 진화론자(리처드 도킨스)가 다른 진화론자(토마스 헉슬리)를 공격하기 위해 집어 든 가장 유용한 무기가 독일어 단어라는 사실부터가 놀랍지 않은가? 더욱이 이 단어는 국가를 숭상하는 난해한 관념론 철학의 계보와 닿아 있으며, 자연주의적 진화 과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역사적 시간관을 뚜렷이 담고 있다. 이는 물리학자들이 양자 불확정성을 두고 논쟁을 벌이다가 느닷없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외치는 상황만큼이나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사실 이 두 사례는 긴밀하게 얽혀 있다. 도킨스가 시대정신에 가지는 맹신은 '아인슈타인적 종교'의 교조적 진보주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몰드버그가 치밀하게 분석해 낸 바 있다.
파렴치함이 도를 넘었다. 과학적 이성의 규칙이 이러한 논쟁에서 적어도 원칙적으로나마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순진하게 믿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아이러니가 극에 달해 비명이 나올 지경이지만,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우주의 절대 법칙'이다. 판단의 기준은 오직 신(新)청교도적인 도덕적 결벽증에 따를 뿐, 검증 가능한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과학적 발언들은 진보적인 사회적 의제에 부합하는지 검열받으며, 이 의제의 권위는 과학적 진실성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도 끄떡없는 듯하다. 몰드버그가 이를 두고 리센코(Trofim Lysenko)를 떠올린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실이 이론과 맞지 않는다면, 사실이 잘못된 것이다." 헤겔의 단언이다. 이 관점에서는 국가를 통해 역사적으로 시각화된 시대정신이 곧 신이며, 하찮은 데이터쯤은 흙바닥에 짓밟아버려도 그만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태도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잘 알고 있다. 평등주의라는 도덕적 이상이 보편적 공리나 반박할 수 없는 교리로 굳어지면서,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적 관용의 한계를 재단하는 현대사 최고의 역설이 완성된다. 관용 없는 태도는 용납할 수 없다는 논리가 널리 받아들여질 때, 혹은 더 현실적으로 문화 권력을 쥔 모든 사회 세력의 지지를 얻을 때, 정치 권력은 자신들에게 편리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아무런 제약 없이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의 마법, 혹은 논리적 왜곡이 가진 힘이다. 오직 관용만이 용납되고, 영향력 있는 모든 이들이 이 명백히 터무니없는 공식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 신념의 보편적 원칙으로 받아들일 때, 남는 것은 오직 정치뿐이다. 완벽한 관용과 절대적인 불관용은 논리적으로 구별할 수 없게 되며, 어느 쪽이든 다른 쪽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A는 A가 아니다'라는 식의 모순이 성립하는 셈이다. 그 결과 펼쳐지는 노골적인 오웰적(Orwellian) 세상에서는 오직 권력만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할 수 있는 열쇠를 쥔다. 관용이 지나치게 진보한 나머지, 사회를 감시하는 경찰 기능으로 전락하고, 새로운 이단심문 기관이 존재할 수 있는 실존적 구실을 마련해 준 것이다. 몰드버그는 이를 두고 "불관용을 용인하는 자들은 관용 자체를 남용하는 것이며, 관용의 적은 곧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라며 비꼬았다.
정치를 제한하고 정부의 불관용을 억제했던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발적 관용은, 민주주의의 거센 파도 속에서 이른바 '관용받을 권리'라는 긍정적 권리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 권리는 갈수록 광범위하게 정의되며 일종의 거대한 권리 증서처럼 변해갔다. 존엄성에 대한 공적인 인정, 공공과 민간을 불문한 모든 영역에서의 평등한 대우, ‘물리적 폭력이 아닌’ 모욕이나 굴욕으로부터의 정부 보호, 경제적 보조금, 나아가 모든 고용과 성취, 사회적 인정 분야에서 통계적으로 균등한 비율을 보장받는 일까지 포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다다를 종말론적 결말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변증법의 세계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불가능성이 정치적 과정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정책적 포만감으로 정치가 멈추는 일이 없도록 영원한 불만의 연료를 계속해서 태워댄다. "내 마음의 싸움을 멈추지 않으리, 내 손에서 칼을 잠재우지 않으리, 영국의 푸르고 아름다운 땅에 예루살렘을 세울 때까지."
그들이 말하는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도 전에, 자유 사회가 품고 있던 조용하고 다양한 다원주의(多元主義)는 온건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공격적인 다문화주의로 어느새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유대인이나 18세기 런던의 위그노 교도들은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누렸고, 그 보답으로 자신들이 정착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반면, 민주주의의 힘을 등에 업은 현대의 피해의식을 지닌 집단들은 정치가들의 부추김을 받으며 목소리를 낼 권리를 요구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에 반하는 요구이며, 사회적으로도 해악이 훨씬 크다. 하지만 스스로를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이들의 목소리라 포장하며 이익을 챙기는 정치가들에게는, 이보다 더 확실한 이해관계도 없을 것이다.
한때 무관심을 전제로 했던 관용은 이제 무관심을 비난하며, 그 과정에서 관용의 반대말로 변질된다. 만약 이것이 어느 한 정당만의 움직임이었다면 민주주의적인 정당 정치를 통해 되돌릴 가능성이라도 있었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미국의 '온정적 보수주의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기득권 언론과 학계의 주류 흐름인 '대성당'을 무모하게 따라잡으려 하며 "누군가 고통받고 있다면 정부가 움직여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우파의 목소리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 우파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이며 썩은 내가 진동하는 상태나 다름없다. 이처럼 '진보'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쁜 일일까? 몰드버그는 이 질문에 엄격하게 접근한다.
“어떤 전통이 인간으로 하여금 개인의 목표를 그르치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면, 이는 '미제스적(Misesian) 병리성'을 띤다. 인간이 자신의 유전적 번식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면, 이는 '다윈적 병리성'을 띤다.
그 전통을 따르는 것이 개인에게는 이득이 되거나 최소한 해가 되지 않지만(이탈자가 보상을 받거나 최소한 처벌받지 않는 경우), 집단 전체에는 해를 끼친다면 그 전통은 '기생적'이다. 반대로 개인에게는 손해지만 집단 전체에 이롭다면 '이타적'이다.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이롭다면 '공생적'이며, 양쪽 모두에게 해롭다면 '악성'이다.
이러한 각각의 분류는 미제스적 병리성과 다윈적 병리성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비이성적이기는 하지만 미제스적 병리성이나 다윈적 병리성 중 그 어느 쪽도 띠지 않는 사상은 '사소한 병리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미제스적 체계와 다윈적 체계는 각각 재산 축적과 유전자 번식을 지향하는 '이기적' 동기들의 집합체다. 다윈주의자들이 미제스적 영역을 유전적 이익을 따르는 동기의 특수한 사례로 보는 반면, 매우 합리화된 신(新)칸트주의적 반(反)자연주의에 뿌리를 둔 오스트리아학파 전통은 이러한 환원주의에 저항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이 논쟁이 갖는 궁극적인 함의는 상당히 크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그리 시급하지 않은 말다툼일 뿐이다. 두 체계 모두 '증오' 안에서, 즉 부적응자에게 벌을 주는 인센티브 구조를 반동적으로 용인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증오'는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볼 만한 단어다. 이 단어는 '대성당'이 가진 종교적 정통성을 특히 명백하게 입증하며, 그 특이점들은 주의 깊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 신(新)청교도적 복음주의 열풍에 휩쓸리지 않고 법적·문화적 규범을 분석하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단어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철저한 중언부언이라는 점이다. '증오 범죄'는 결국 일반적인 범죄에 '증오'를 더한 것에 불과한데, 여기서 증오가 덧붙이는 유동적인 의미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잠시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범죄의 예로만 한정해서 질문을 던져보자. 범죄의 동기가 '증오' 탓으로 돌려질 때, 살인이나 폭행이 정확히 어떤 이유로 가중 처벌을 받게 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특히 두드러지는데, 둘 다 일반적인 법적 규범과는 명확한 연관성이 없다.
첫째, 범죄의 형량은 순전히 관념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심지어 '영적(靈的)'이기까지 한 요소에 의해 가중된다. 이는 문명화된 행위를 위반했다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이단적인 의도를 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는 증오를 범죄 행위 자체로부터 완전히 분리해 내는 도구가 된다. 그 결과 증오는 '혐오 발언'이나 단순한 '증오'라는 독자적인 형태로 자리 잡는다. (물론 보호받지 못하는 집단이나 사회적 부류, 혹은 개인을 향해 비판, 논란, 심지어 단순한 욕설을 퍼부을 때 나타나는 격정, 격분, 의로운 '분노' 등과는 늘 철저히 구분된다.) 결국 '증오'란 대성당 체제 자체에 대한 모독이자 그 영적 인도(引導)를 거부하는 행위이며, 세상에 명백히 드러난 종교적 천명(天命)에 정신적으로 저항하는 몸짓이다.
둘째, 이와 맞물려 '증오'는 선진 민주주의 사회의 균형 잡힌 정치적 극성과 관련해 의도적이고 전략적인 비대칭성을 띤다. 끊임없이 나아가는 진보의 행진과 보수주의의 무력한 불평 사이에서, 이 기준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앞서 보았듯 오직 우파만이 '증오'를 저지를 수 있다. '증오' 억제라는 신학적인 면역 체계가 엘리트 교육과 언론 시스템 내에 공고해지면서, 고도로 선택적인 보호 조치들이 적용된다. 그 결과 담론, 특히 권력을 쥔 담론은 일관되게 좌측으로, 즉 갈수록 더 전면적이고 급진화되는 보편주의 방향으로만 톱니바퀴처럼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추세가 지닌 병리성은 극에 달해 있다.
피해자 지위는 경제적 무능에 대한 정치적 보상으로 부여되기 때문에, 그것은 사회적 파탄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자동적인 문화적 메커니즘을 구축한다. 불평등을 곧 불의로 조건반사식으로 동일시하는 보편주의적 신조는 '처지가 비참하고 지위가 낮을수록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더 강력해지며, 그들의 명분 또한 더 순수하고 고결해진다'라는 명제 외에는 그 어떤 대안도 상상하지 못한다. 세속적인 실패가 곧 영적 선민(選民)의 징표가 되는 셈이며(마르크스-칼뱅주의), 이 중 단 하나라도 반박하려 드는 행위는 명백한 '증오'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 냉혹한 신반동주의자마저 과거 빅토리아 시대 전성기의 고풍스러운 태도를 흉내 내며, 정치적 폭력, 범죄, 노숙, 파산, 복지 의존 등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불이익이 그저 개인의 도덕적 결함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처지는 상당 부분, 어쩌면 압도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순전한 불운을 반영한다. 학대 가정에서 무질서하게 자라나 범죄로 무너진 지역사회에 고립된, 인지 능력이 떨어지고 충동적이며 건강하지 못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탓하기 전에 신을 저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재앙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효과적인 인센티브 구조의 관점에서 볼 때, 앞서 말한 비참한 사정이나 불운 따위는 눈곱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현실 세계에서 통하는 철칙은 오직 하나뿐이다. 무언가에 혜택을 주기 시작하면, 그것은 반복되고 확산된다.
사회민주주의가 ‘고통을 겪는 개인이나 불운한 문화이든, 혹은 대기업이든 간에’ 나쁜 결과의 충격을 완화하려 할 때 상황이 더 악화된다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만큼이나 절대적인 필연이다. 이 공식을 우회하거나 뛰어넘을 방법은 없다. 오직 미련한 희망사항과 퇴행에 대한 공모가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반동주의의 핵심적인 통찰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운명이다. 왜냐하면 이는 '진보적'인 개선을 위한 모든 시도가 '역설적으로' 끔찍한 실패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대중에게 절대 환영받을 수 없는 궁극의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민주주의도 이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는 곧 모든 민주주의가 결국 실패할 것임을 의미한다.
미제스적-다윈적 퇴행이 빚어내는 폭주하는 소용돌이는, 주류 '대성당'의 대변지인 <더 애틀랜틱(The Atlantic)>에 기고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순하고 전형적인 제도권 자유지상주의자' 메건 맥아들(Megan McArdle)의 글에 아주 깔끔하게 담겨 있다.
“유럽의 인구 변화가 가져온 첫 번째 심각한 균열이 유럽의 복지 예산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다소 역설적이다. 연금 제도 그 자체가 유럽의 성장을 형성하고 제한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0세기에는 미래의 세금 수입으로 확정된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는 사회보장 제도가 전 세계적으로 도입되었다. 연금 전문가들은 이를 '청년들의 세금으로 노인들의 연금을 대주는 부과방식'이라 부르지만, 비판자들이 보기엔 다음 세대가 끊기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폰지 사기'에 불과했다.
이러한 제도들은 노후 빈곤에 대한 공포를 크게 덜어주었지만,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회보장 제도가 더 관대해질수록(그리고 노후가 더 보장될수록) 사람들은 아이를 더 적게 낳는다. 한 추정치에 따르면, 미국의 (대체 출산율 이상인) 출산율과 유럽의 출산율 차이 중 50~60%는 유럽의 더 관대한 연금 제도로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유럽의 연금 제도가 바로 그 연금 제도 자체와 일부 유럽 정부들을 파산 상태로 몰고 간 인구 감소의 불씨를 지핀 셈이다.”
미국이 유럽의 죽음으로 향하는 길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있다는 맥아들의 터무니없는 암시에도 불구하고, 진단의 전반적인 개요는 명확하며 갈수록 (애써 무시되기는 하지만)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날로 세를 얻고 있는 진보적 신조에 따르면, 자녀와 저축을 통해 확보하는 복지는 '보편적'이지 않기에 도덕적으로 미개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적 복지는 민주 시민에게 보편적으로 지급되는 보편적 수혜나 '실질적 권리'로 최대한 널리, 그리고 빠르게 대체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타적인 국가'를 거쳐야만 한다.
그 결과, 정치적 올바름을 전혀 봐주지 않는 냉혹한 현실 탓에 경제와 인구가 한꺼번에 붕괴한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적어도 우리의 영혼만큼은 더럽혀지지 않을 텐데 말이다.
오, 민주주의여! 감상에 젖으며 죽어가는 바보 같은 존재여, 저 좀비 무리가 네 영혼 따위에 눈길이나 줄 것 같은가?
몰드버그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내 생각에 보편주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권력을 숭배하는 신비주의 밀교(密敎)'다.
보편주의가 권력을 숭배하는 밀교인 이유는, 이 사상의 번식 주기에서 ‘국가’라는 존재가 핵심적인 숙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보편주의의 표면적 특징들을 살펴보면 그 대부분이 국가를 장악하고 유지하며, 국가의 힘을 빌려 자신들이 계속해서 번식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가 없는 보편주의는 모기가 없는 말라리아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렵다.
보편주의가 밀교인 이유는 유일신 신앙의 자리에 형이상학적 미신 대신 인간, 진보, 평등, 민주주의, 정의, 환경, 공동체, 평화 같은 철학적 신비주의를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정통 보편주의 교리가 정의하는 이러한 개념들은 단 하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 어떤 합리적인 사유도 이끌어내지 못한 채 무의미한 정신적 에너지만 끝없이 집어삼킬 뿐이다. 이런 점에선 플로티노스(Plotinus)의 형이상학적 관념이나 탈무드의 교리적 말장난, 혹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탁상공론이 가진 공허함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에 덤으로, 현대 정치 체제의 핵심 경로 가이드를 소개한다.
체제 (1) : 공산주의 폭정
평균 성장률 : 약 0%
발언권 / 이주 가능성 : 낮음 / 낮음
문화적 풍토 : 광기 어린 이상주의(理想主義)
삶의 모습 : 고되지만 ‘공평’함
다음 단계로의 이행 경로 : 경제 활동이 거의 멈춘 임계점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시장의 존재를 재발견함
체제 (2) :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평균 성장률 : 5 ~ 10%
발언권 / 이주 가능성 : 낮음 / 높음
문화적 풍토 : 냉혹한 현실주의
삶의 모습 : 고되지만 생산적임
다음 단계로의 이행 경로 : 주류 기득권 체제인 대성당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민주화의 길로 들어섬
체제 (3) : 사회민주주의
평균 성장률 : 0 ~ 3%
발언권 / 이주 가능성 : 높음 / 높음
문화적 풍토 : 위선적 도덕주의
삶의 모습 : 안락하지만 지속 불가능함
다음 단계로의 이행 경로 : 미봉책으로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름
체제 (4) : 좀비 아포칼립스
평균 성장률 : 해당 없음
발언권 / 이주 가능성 : 높음 (대부분 무의미한 절규에 불과함) / 높음 (연료, 탄약, 비상식량, 귀금속 화폐를 쥐고 있을 때만 가능)
문화적 풍토 : 생존주의
삶의 모습 : 버티기 고달프거나, 혹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함
다음 단계로의 이행 경로 : 미지수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4부: 다시 시작되는 파멸으로의 경쟁
닉 랜드 (Nick Land), 2012년 4월 1일
"자유주의자들은 빈곤층 백인들이 공화당에 투표하는 것에 당황하고 분노하지만, 부족 기반의 투표는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 레바논(Lebanon), 이라크(Iraq) 등 모든 다민족 민주주의의 특징이다.
다수파가 소수파로 전환될수록 투표 행태는 더욱 부족적이 되므로, 공화당은 점점 더 "백인 정당(white party)"이 되어가고 있다. 이 점을 미묘하지 못하게 제기한 팻 뷰캐넌(Pat Buchanan)은 직을 잃었지만, 많은 다른 인물들도 이를 지적한다. 영국(UK)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까? 패턴은 그리 다르지 않다.
2010년 선거에서 보수당은 소수민족 투표의 단 16%만 획득한 반면, 노동당은 방글라데시인(Bangladeshis)의 72%, 아프리카-카리브인(African-Caribbeans)의 78%, 아프리카인(Africans)의 87%의 지지를 얻었다. 보수당은 영국 힌두교도(British Hindus)와 시크교도(Sikhs) 사이에서 약간 더 강세를 보이는데, 이는 아시아계 미국인(Asian-Americans) 사이의 공화당 지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들은 주택 소유 전문직 종사자일 가능성이 더 높고 소외감을 덜 느낀다.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최근 보수당이 "인종 문제(race problem)"를 가지고 있는지 묻였지만, 민주주의 자체가 인종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 에드 웨스트(Ed West) (링크는 여기다.)
아이러니에 대한 취향이 없으면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Curtis Yarvin)는 거의 견딜 수 없으며 확실히 이해 불가능하다. 방대한 역사적 아이러니의 구조들이 그의 저작을 형성하며, 때로는 그것들을 완전히 삼켜버린다. 그 외에 어떻게 전통적인 사회 질서의 옹호자 – 자칭 자코바이트(역주: Jacobite, 제임스 2세의 복위를 지지한 영국의 왕당파. 몰드버그가 사용하는 경우, 종종 민주주의나 프로테스탄트 급진주의에 대비되는 전통적 질서의 상징으로 인용된다.) – 가 전복에 완고하게 헌신하는 저작물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아이러니는 몰드버그의 방법이자 동시에 그의 환경이다. 이는 가장 분명하게, 탈취된 계몽주의(enlightenment), 현대 세계의 지배적 신앙에 대해 그가 선택한 명칭인 '보편주의(Universalism)'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대문자로) 차용하는 단어로, 과도한 특수성의 폭로에 그 전체 힘이 놓여 있는 반동주의적 진단 내에서 사용된다.
몰드버그는 역사(혹은 보다 엄밀히 말해 계통분류학)로 계속 되돌아가, 보편적 의미를 자임하며 일반적 지배 상태로 상승해 보편에 접근하는 어떤 것을 정확히 규정하려 한다. 이러한 분석 아래에서, 근대성의 방향과 의미를 결정한다고 여겨지는 ‘보편 이성’이란 사실상 세밀하게 규정된 하나의 분파—즉, ‘랜터(역주: ranter, 17세기 영국 개신교 단체의 일원으로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고 종교적 관용과 민주주의 원칙을 옹호했다)’, ‘레벨러(역주: leveler, 영국 내전(1642~1649) 당시 군주제의 폐지, 사회 및 농업 개혁 , 종교의 자유를 요구한 급진적인 반대자 그룹의 한 구성원)’ 등의 이단적이고 극단적인 청교도적 광신에서 내려온 일종의 종교적 전통의 아종(亞種)—으로 드러나며, 논리학자들의 결론에는 거의 아무 빚도 지고 있지 않음이 밝혀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보편주의적 민주·평등 신앙은 사실 특정한, 혹은 기이한 일종의 사이비 종교로, 뚜렷이 식별 가능한 역사적·지리적 경로를 따라 퍼져 나가며, ‘진보주의적이고 세계화주의적인 계몽주의’라는 외양 아래 감춰진 광신적인 전염병과 같은 특성을 드러낸다. 그것이 밟아온 길—영국에서 뉴잉글랜드로, 종교개혁에서 혁명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아이러니의 재료, 혹은 보다 낮은 형태의 희극성을 풍부히 제공하는 특성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현대의 ‘자유주의자’ 지식인이나 ‘열려 있는 정신’을 자처하는 언론계의 ‘진실 규명자’가 사실상 창백하고 광신적이며 좁은 교리에 사로잡힌 청교도로, 마녀를 불태우던 광신자들의 직계 후손임이 드러날 때, 그 폭로는 언제나—그리고 거부할 수 없을 만큼—흥미롭다.
그러나 ‘대성당(역주: Cathedral, 진보주의 성향을 가진 비선출 권력기구들의 집합)’이 그 신적 사명을 따라 전 세계 모든 것 위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조여갈수록,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은 대체로 유머러스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겸손한 순응을 얻어내지 못할 때 그것이 맞닥뜨리는 것은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분노, 혹은 최소한 이해하지 못한 채 내면에서 타오르는 원한이다. 이는 특정하고 이질적인 계보의 외피를 여전히 두른 채, 자신을 ‘보편적 이성’이라 진지하게 고백하는 지극히 지역적인 문화적 교리가 강제로 주입될 때 자연스럽게 따르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미국 독립선언서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다음의 진리들을 자명한 것으로 믿는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 이른바 ‘자명한’ 진리들에 세심하고 진지하게 복종하는 것이, 종교적 재확인 혹은 개종 행위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정직하게 이해될 수 있을까? 또한 이 구절들 속에서 이성과 증거가 명시적으로 제쳐지고, 그 자리를 신앙의 원리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러한 선언보다 더 비(非)과학적이고, 진정한 보편적 이성의 기준에 더 무관심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이미 신봉자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이런 전제를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민주공화제 신조의 기초가 되는 선언문이 순수한(그리고 교리적으로 식별 가능한) 신앙의 진술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정보이긴 하지만, 아직 아이러니는 아니다. 아이러니는 오늘날 ‘대성당’의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러한 독립선언서의 문구들(그리고 그 밖의 많은 구절들)이 거의 보편적으로 — 많아야 고풍스럽고 암시적인 표현 정도로, 대체로는 다소 난처하고, 무엇보다 문자 그대로 동의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데서 비로소 시작된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보수파들조차도 ‘자연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그 종교적 기원까지 자신 있게 밀고 나가는 일은 드물다. 현대의 ‘자유주의자들’ — 즉 권리를 부여하는(혹은 ‘자격’을 정하는) 국가를 신봉하는 이들 — 에게 이러한 고풍스러운 관념은 터무니없이 시대에 뒤떨어졌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들은 이 개념들을 존경받는 선구자들의 유산이 아니라, 정치적 적대자들의 지체된 근본주의적 사고방식과 연관시킨다. ‘대성당’의 중심부에 있는 교양인들은 헤겔이 그랬듯, 신(神)이란 유아(幼兒)들이 인식하는 ‘그림자 정부’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에 쏟는 신앙은 낭비라고 이해한다 — 왜냐하면 그 믿음은 관료들이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성당’이 세계적 패권의 지위에 오른 이후, 그것은 더 이상 ‘건국의 아버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성당’의 지극히 지역적(편협한)인 기원을 어색하게 상기시키고, 초국가적 홍보 전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성당’은 그들을 폄하함으로써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활성화하려 한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신(新)무신론(New Atheism)’ 현상이다 — 그 노골적인 진보주의적 연관성은 이를 충분히 입증한다. 신(新)청교도주의(neo-puritanism)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구(舊)청교도주의(paleo-puritanism)가 조롱되어야 한다. 밈(meme)은 죽었다, 밈 만세!
자기풍자의 극한에서, 신(新)청교도주의적 존속살해는 우스꽝스러운 ‘크리스마스 전쟁’의 형태로 나타난다. ‘대성당’의 동맹들은, 전혀 위협받지 않고 있는 정교분리 원칙을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공적 표현’에 대한 귀찮은 시위와 선동을 통해 신성시하며, 그에 대한 ‘레드스테이트(역주: Red State, 미국 공화당의 텃밭)’의 속물적 추종자들은 케이블 TV 쇼에서 소화불량 같은 분노로 반응한다. 다른 모든 ‘모호한 명사들’을 상대로 한 전쟁들(‘빈곤’, ‘마약’, ‘테러’에 대한 전쟁 등)처럼, 그 결과는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왜곡되어 나타난다. ‘크리스마스 전쟁(역주: War on Christmas. 미국 보수 진영에서 제기해온 문화전쟁 논점으로, 공공 영역에서 ‘Merry Christmas’ 대신 ‘Happy Holidays’ 같은 종교색을 뺀 인사가 권장되는 현상을 기독교 전통에 대한 공격으로 보는 담론)’에 대한 저항이 아직까지 성탄절 축제의 확고한 중심 의례로 자리 잡지는 않았지만,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성당’의 목적은 성취된다. 이는 진보적 신앙을 그 종교적 기초로부터 분리시키는 인공적 세속주의를 조장하고, 그 중심에 있는 특정한 민족적·교리적 신조의 내용으로부터 관심을 돌려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반동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전통적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꽤 온순한 편으로 여겨진다. 정통 신(新)청교주의의 가장 열성적인 광신도조차도 그들에게 진심으로 흥분하기는 어렵다(물론 낙태운동가들은 예외에 가깝지만). 그러나 진짜 피비린내 나는 자극, 즉 노출된 신경이 전기 충격에 경련하듯 꿈틀대는 강렬한 반응을 원한다면, 진보주의적 계보에서 버려지고 의례적으로 저주받은 또 다른 잔재로 눈을 돌리는 편이 훨씬 더 그럴듯하다 — 바로 백인 정체성 정치(White Identity Politics), 혹은 몰드버그가 택한 표현으로는 ‘백인 민족주의(white nationalism)’다.
신(新)청교도주의적 사회민주주의의 일방적·점진적 진보가 그 신흥종교의 형태들이 조직적으로 공개 망신당함으로써 급격히 촉진되는 것처럼, 그 일관된 신(新)파시즘적 정치경제로의 경향 또한 ‘신나치’(혹은 원류 파시즘)적 위협을 집단적으로 부정함으로써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즉, 국가가 주도하는 유사 자본주의라는 점점 더 노골적인 기업주의적 혹은 ‘제3의 위치’ 구조를 구축할 때, 백인종적 피해망상의 분노 어린 표현들로 주의를 돌릴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편리하다. 특히 그것들이 어설프게 변형된 나치 상징, 뿔 달린 투구, 레니 리펜슈탈(역주: Leni Riefenstahl. 나치 선전영화 《의지의 승리》의 감독.)식 미학, 그리고 《나의 투쟁》에서 자유롭게 차용된 구호들로 장식되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미국(그리고 점차 짧아지는 시간차를 두고 전 세계적으로)에서는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의 상징들—흰 천, 준(準)프리메이슨식 칭호, 불타는 십자가, 교수형 밧줄 등—이 유사한 극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몰드버그(Moldbug)는 ‘정제된’ 백인 민족주의 블로그 독서 목록을 제시하는데, 그 목록의 필자들은—성공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으나—즉각적으로 원류 파시즘의 자기풍자적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어느 정도 피하고 있다. 공인된 의견의 경계를 넘어서는 첫 단계는 로렌스 오스터(Lawrence Auster)로 대표된다. 그는 기독교인이자 반(反)다윈주의자, 그리고 ‘전통주의적 보수주의자(Traditionalist Conservative)’로서, ‘실질적’(즉, 민족적·인종적) 국민 정체성을 옹호하고 자유주의의 핵심 원칙인 비차별(nondiscrimination)을 반대한다. 몰드버그가 신중히 잘라낸 스펙트럼의 가장 바깥쪽, 즉 ‘탄스타플(역주: Tanstaafl; There ain't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공짜 점심은 없다‘를 의미한다.)’에 이르면, 우리는 이미 붕괴 중인 궤도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은 현대 정치 가능성의 중심부, 그 한가운데 숨겨진 거대한 블랙홀로 나선형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같다.
탄스타플과 같은 인물들을 따라 빛이 사라지는 짓누르는 심연으로 들어가기 전에, 백인 민족주의적 관점과 그 함의에 대해 몇 가지 예비적 언급을 해둘 필요가 있다. 기독교 전통주의자들보다도 (그들은 냉혹한 시대를 겪고 있지만, 신의 가호라는 온기 속에 머물 수 있다), 백인 정체성 정치는 자신들이 포위당했다고 느낀다. 이 경계를 넘어 자신을 이런 용어로 규정하기 시작한 이들에게는 온건하거나 절제된 우려 따위로는 균형을 유지할 수 없다. 그 대신, 이러한 관여의 길은 급속한 가속을 요구한다 — 극도의 경계심 혹은 인종적 공포 상태로의 가속이다. 이는 악의적인 인구 대체가 정부의 손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과 결합한다. 그 정부는 자주 인용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역주: Bertolt Brecht. 독일의 극작가·시인·연출가로, 사회주의적 풍자극과 서사극 이론으로 유명하다. 본문 인용은 그의 시 「해결책(Die Lösung)」(1953)에서 따온 것이다.)의 말처럼 “국민을 해산시키고, 다른 국민을 임명하기로 결정한” 정부다. ‘백인적 특성(whiteness)’은—그것이 생물학적으로든 신비적으로든 혹은 양쪽으로든 이해되건 간에—취약함, 연약함, 박해받음과 연관되어 있다. 이 주제는 너무도 근본적이면서 동시에 다면적이어서 간단히 다루기 어렵다. 그 안에는 범죄적 침탈(특히 인종적 동기가 있는 살인, 강간, 구타), 경제적 착취와 역(逆)차별, 적대적인 학문·언론 체계에 의한 문화적 공격, 그리고 궁극적으로 ‘집단학살(genocide)’—즉 인종의 결정적 파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포괄된다.
보통 백인 인종의 멸종 위협은 그 자체의 체계적인 취약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원인은 전형적인 문화적 특성—지나친 이타심, 변질된 도덕에 대한 취약성, 과도한 환대, 신뢰, 보편적 상호성, 죄책감, 혹은 집단 정체성을 경시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에 있거나, 혹은 보다 직접적인 생물학적 요인—섬세한 ‘아리안’ 표현형을 지탱하는 열성 유전자—에 있다고 본다. 백인만의 독특한 위기감이 단순히 색채 공식 “백인 + 유색 = 유색”으로 환원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그와 유사하다. 즉, 상호적이지 않은 취약성의 추상적 묘사 속에서 이 담론은 ‘한 방울 원칙(역주: one drop rule. 과거 미국의 인종 구별 방법론으로, 부모가 백인일지라도 그들의 조상 중에 비백인계의 혈통이 있으면 비백인으로 보는 것이다.)’—그리고 멘델식 열성/우성 유전자 조합 개념—을 반영한다. 이 관점에서 혼혈(mixture)은 본질적으로 반(反)백인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백인적 특성”은 하나의 한계(즉, 색이 전혀 없는 순수한 부재)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사실로서의 코카서스 아종(Caucasian sub-species) 개념에서 형이상학적·신비주의적 사유로 매끄럽게 미끄러진다. 백인 인종은 유전적 변이를 축적하기보다는, 그 본질적인 ‘부정성’을 훼손하는 혼혈에 의해 오염되거나 타락한다고 여겨진다 — 즉, “하얀 것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 대체로 잠재의식적인 — 연상들의 신화적 밀도는 백인 정체성 정치에 일종의 탄력성을 부여하여, 계몽적 이성주의의 비판적 논박 시도를 좌절시키며, 동시에 그 자체의 편집증적 자기표상을 모순시킨다. 또한 이는 최근 백인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백인들이 전 세계의 토착민들이 직면한 것과 동일한 수준의 인종적 위협에 처해 있다”는 서사 — 즉, 백인을 ‘원주민’으로 묘사하며 멸종으로부터의 ‘동등한 보호’를 부당하게 박탈당했다는 주장 — 을 무너뜨린다. ‘부족적 순수성’이나 단순한 생물학적 다양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백인적 특성’은 이미 어떤 길을 택하더라도 이데올로기와 불가분하게 압축되어버렸다.
“흑인들이 그것을 가질 수 있고, 히스패닉들이 그것을 가질 수 있고, 유대인들이 그것을 가질 수 있다면, 왜 우리(백인)는 가질 수 없는가?” — 이것이 백인 민족주의적 원한의 최종 구성요소이며, 그것이란 결국 자신을 괴물로 만들 수밖에 없는 늑대인간의 저주이다. 박해받는 창백한 얼굴의 자들에게는 단 하나의 출구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곧장 블랙홀로 이어진다. 우리는 탄스타플에게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었고, 이제 여기 — 2007년 늦여름, 그가 ‘유대인 문제’를 깨달은 직후 — 에 이르렀다. 그의 ‘계시’에는 그다지 독창적인 것이 없다. 바로 그 점이 핵심이다. 그는 이렇게 인용한다:
"기독교나 WASP(역주: 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약자. 주로 미국 사회에서 전통적인 지배계층을 이뤘던 앵글로색슨계 백인 개신교도를 가리키는 말이다.)를 정치적 올바름의 등장과 그 파국적 결과의 원인으로 탓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일 아닌가? 사실 이것은 진실의 완전한 전도(顚倒)가 아닌가? 정치적 올바름의 부상과 확산이야말로 기독교, WASP, 그리고 일반적으로 백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켜 온 것이 아닌가?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결국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정치적 올바름의 세뇌에 빠진 기독교인, WASP, 그리고 백인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 오히려 그 확산과 보호를 위해 일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정치적 올바름의 본질이며, 그 목적이다 — 파괴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한 것. 좌파는 그 근본에서 결국 ‘파괴’를 위한 존재다.
이러한 사상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지를 알아차리기 위해 굳이 반유대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어 “유대인들”이라고 말하려면, 정치적 올바름을 어겨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미로이며, 덫이다 — 한심할 정도로 제한되고 상투적인 순환 구조를 가진 함정. “왜 우리는 아마존의 원주민들처럼 ‘귀엽고 온순한 인종 보존주의자’가 될 수 없는가? 왜 우리는 언제나 네오나치로 변해버리는가? 이건 어떤 음모가 틀림없어, 그러니까 분명 유대인들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세계화된 세계의 정치적 열기는 거의 전적으로 제3제국의 폭발 잔해더미에서 흘러나왔다. 그 패턴을 파악하기 전에는, 왜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지가 신비하게 느껴진다. ‘백인 민족주의’라는 비교적 점잖은 범주에 속하는 몇몇 블로그들을 나열한 뒤, 몰드버그는 이렇게 경고한다:
"인터넷에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 블로그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 대부분은 읽을 가치조차 없지만, 그중에는 비교적 필력이 있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러한 인종차별적 블로그들에서는 인종 비하적 표현, 반유대주의(‘내가 반유대주의자가 아닌 이유’를 참고하라), 그리고 그와 유사한 내용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나는 이런 블로그들을 결코 추천할 수 없으며, 링크를 제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인종주의자의 사고방식에 관심이 있다면, 구글 검색만으로도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구글은 과하다고 할 수 있다. 조금만 링크를 따라가도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 이건 일종의 ‘6단계 분리 이론(역주: six degrees of separation. 세상의 모든 사람은 여섯 단계 이하의 인간관계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회학적 개념이다.)’ 문제인데, 실제로는 두 단계, 혹은 그보다도 적다. 실제로 존재하는 ‘반동적 온라인 커뮤니티(reactosphere)’를 파고들기 시작하면, 상황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추악해진다. 그곳에는 실제로 ‘증오’, 공황, 그리고 혐오가 있으며, 병적으로 중독성을 띠는 잔혹하고 독설적인 재치가 넘쳐난다. 게다가 놀라울 만큼 방대한 양의 ‘그럴듯한 사실들’(이 자들은 통계를 정말 미친 듯이 좋아한다)도 뒤따른다. 무엇보다, 지평선 바로 너머에는 블랙홀이 있다. 만약 ‘반동(reaction)’이 대중운동으로 발전한다면, 그 몇 안 되는 부르주아적(또는 몽환적으로 ‘귀족적’) 품격의 가는 실타래 따위로는 그 괴물을 오래 붙잡아 둘 수 없을 것이다.
자유주의적 품위가 지적 정직성(intellectual integrity)과 결별하고, 거친 진실들을 추방해버리자, 그 진실들은 새로운 동맹을 찾아 훨씬 더 가혹한 형태로 변모했다. 그 결과는 기계적으로, 그리고 단조롭게 예측 가능하다. 모든 자유민주주의적 “~에 대한 전쟁(cause war)”은 자신이 싸우는 대상을 강화하고 야만화시킨다. 빈곤에 대한 전쟁은 만성적으로 기능 불능 상태인 하층 계급을 만들어내고, 마약과의 전쟁은 결정화된 초강력 마약과 초거대 마피아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전쟁은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데이터로 무장하고, 인터넷으로 연결된 편집증적이고 다중 음모론적인 늑대인간들 — 즉, 자유민주주의가 곧 마주하게 될 파국적 현실의 만남을 가장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자들 — 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든(단, 불길한 역사적 추론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불쾌한 사태들의 폭발에 일조하게 된다. 인간 차이에 대한 이성적·실용적·사실 기반의 협상이 이데올로기적 명령에 의해 금지될 때, 그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은 ‘영원한 평화의 지배’가 아니다. 그 대신 점점 더 자의식적이고 전투적으로 반항하는 사상범죄(thoughtcrime)의 부패가 싹트며, 공공연히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들에 의해 양분되고, 강력하고 원초적이며, 뚜렷하게 이단적인 신화들에 의해 에너지를 얻게 된다. 이건 인터넷상에서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몰드버그는 백인 민족주의의 위험성이 과장되기도 하고 과소평가되기도 한다고 본다. 한편으로 ‘위협’이라는 것은 그저 터무니없는 것이며, 신청교도적(neo-puritan) 영적 교리가 가장 히스테릭하게 억압적이고 완고하게 무지한 형태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몰드버그는 “나는 백인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뒤, 백인 민족주의를 “인류 역사상 가장 소외되고 사회적으로 배척받은 신념 체계 … 문신한 스피드중독 오토바이 폭주족이 포함되지 않은 어떤 집단에서도 불쾌한 사회적 자극제”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그 위험은 여전히 존재하며,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백인 민족주의가 실제로 위험해질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을 나는 상상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안에 대해 백인 민족주의자들이 옳고, 다른 모든 이들이 틀렸다면, 그때 백인 민족주의는 위험해질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위험하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진실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등을 돌리는 것은 언제나 나쁜 생각이다. … 인간의 인지적 생물학적 다양성에 대한 증거는 확실히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민족주의자가 아닌 모든 이들은 지난 50년 동안 그것이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우리에게 말해왔다."
늘 그렇듯이, 몰드버그의 에세이에는 훨씬 더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그는 결국 기존의 자동적 반사 반응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유로 백인 민족주의를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 에세이를 단순한 탁월함의 수준을 넘어 거의 천재성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어두운 핵심은, 글의 초반부—마치 블랙홀의 가장자리에서—드러난다.
"왜 우리는 백인 민족주의를 사악하다고 느끼는가? 그 이유는 히틀러가 백인 민족주의자였고, 히틀러가 사악했기 때문이다. 이 두 명제 중 어느 것도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다. 백인 민족주의와 악 사이에는 단 하나의 연결고리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는 히틀러다. 다시 말하겠다: 히틀러.
그 논리는 빈틈없이 완벽해 보인다. (히틀러만큼 완벽한가?)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왜 우리는 사회주의를 사악하다고 느끼지 않는가? 그 이유는 스탈린이 사회주의자였고, 스탈린이 사악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히틀러보다 덜 사악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려는 사람은 아주 험난한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스탈린은 더 많은 살인을 명령했을 뿐 아니라, 그의 살인 기계는 평시(平時)에 전성기를 누렸다. 반면 히틀러의 살인은 적국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시 범죄로—적어도 그렇게—볼 수도 있다. 이 차이가 의미가 있느냐는 논쟁할 수 있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스탈린이 한층 더 위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사회주의에 대해 결코, 혹은 사회주의와 관련하여 본 적도 없는 “적기(red flags)” 반응—즉 “악이 존재한다는 감각”—을 느낀 적이 없다. 만약 내가 젊고 멋진 사람들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역주: Reinhard Heydrich. 나치 독일의 고위 관리이자 SS(친위대) 장교로, 홀로코스트의 주요 설계자 중 한 사람.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회의인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를 주도했다. 1942년 체코 프라하에서 체코 저항군에 의해 암살되었다.)에 대한 찬미적인 전기 영화의 매표소 앞에 줄을 서 있는 것을 본다면, 등골이 오싹해질 것이다. 그러나 에르네스토 게바라(역주: Ernesto “Che” Guevara.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로, 쿠바 혁명의 주역 중 한 명.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뒤, 사회주의 확산을 위해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67년 볼리비아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적 반응이 없다. 아마 나는 그것이 어리석고 슬프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소름이 끼치거나 섬뜩한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히틀러에 대한 도덕적 비판에서 미묘함이나 균형, 혹은 비례 감각을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 현상의 본질을 완전히 오해하는 일이다.
이 점은 예를 들어 아시아 사회에서 자주 관찰된다. 제3제국의 망령이 그들의 역사, 혹은 정확히 말해 그들의 종교적 중심에 자리 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곳—‘대성당’의 내실(內室)—을 차지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거의 성공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문화 간 오해와 상호적 맹점에 대한 짧은 곁길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서구인들이 동아시아 현대 전체주의에 수반된 ‘신황제(God-Emperor)’식 정치적 숭배 양식에 주목할 때, 그들이 흔히 내리는 결론은 이 정치 감정의 형태가 이국적으로 낯설고, 병적으로 기이하며, 궁극적으로는 오싹할 만큼 이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웃기도록 비(非)신성적인 서구 민주주의 지도자들과의 현대적 비교는 이러한 혼란을 한층 심화시키며, ‘봉건적 감수성’ 같은 어설픈 준(準)마르크스주의적 표현도 마찬가지다. (마치 절대군주제가 봉건제의 대안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고 절대군주들이 실제로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인물이 절대적 종교적 의미의 초월적 존엄성을 부여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터무니없게 들린다…
“이보세요, 내가 히틀러가 특별히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 이런 말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이 드러난다. 어쩌면 이런 질문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과연 (대성당이라 불리는) 세계화된 세계 안에서 아직도 아돌프 히틀러가 어둠의 군주(사탄)보다 덜 사악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사탄이 정말, 정말 나쁘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몇몇 구시대적 기독교인들(paleo-Christians), 그리고 히틀러가 ‘좀 멋있다’고 여기는 극소수의 네오나치 광신도들 정도일 것이다. 그 밖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히틀러는 악마적 괴물적 특성을 완벽히 구현한 존재로 여겨지며, 역사나 정치를 초월하여 일종의 형이상학적 절대 악의 지위에 오른다. 히틀러를 넘어선다는 것은, 혹은 그를 넘어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인데, 이는 역사 속에 ‘무한한 것’이 침입했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뒤집혀 있지만 구조적으로는 익숙한 아브라함계 종교적 계시의 형태로 말이다. (‘홀로코스트 신학’이라는 표현만 봐도 이미 그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히틀러를 사탄과 비교하기보다는, 그를 ‘적그리스도(Antichrist)’—즉 도덕적 극성이 반전된 ‘거울 속의 메시아’—와 비교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빈 무덤’까지 있었다. 따라서 ‘히틀러주의’를 중립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친나치적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아브라함계 종교의 주류 계열 내에서 분기된, ‘순수한 악의 지상 강림’을 인정하는 보편적 신앙에 가깝다. 히틀러는 (이미 언급한 극도로 불명예스러운 집단들 바깥에서는) 정확히 ‘숭배’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학적 ‘근원적 사태들’을 건드리는 방식의 성례(聖禮)로서(즉, 의례적 혐오의 대상으로) 혐오된다. 히틀러를 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심히 통탄할 정치-영적 혼란의 징표이지만, 그의 역사적 특수성과 ‘성스러운 의미’를 인정하는 것은 거의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건전한 신앙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 히틀러는 성육신한 신의 정확한 보완물(계시된 반(反)메시아, 혹은 적대자)로 확증되며, 이 동일시는 ‘자명한 진리’의 힘을 갖기 때문이다. (‘히틀러에 대한 귀류법(역주: reductio ad Hitlerum. 레오 슈트라우스(Leo Strauss)가 1951년에 처음 사용한 표현으로, 어떤 주장이나 사상을 단지 ‘히틀러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이유로 논리적으로 기각하려는 오류를 가리킨다. 즉, 논점의 타당성을 따지지 않고 히틀러나 나치와의 연관성을 근거로 상대를 악마화하거나 논쟁에서 배제하는 수사적 전략을 비판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이 왜 그렇게 잘 작동하는지 굳이 물을 필요가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편리하게도, 그것을 삼켜버린 세속화된 신청교도주의(neo-puritanism)와 마찬가지로, ‘히틀러 혐오주의’는 미국의 학교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높은 종교적 열정의 수준으로 안전하게 가르칠 수 있다. 진보적 혹은 계획된 역사가 계속되는 한, 이는 결국 ‘신성한 히틀러 혐오의 교회’가 아브라함계 종교의 선행 전통들을 대체하여, 세계의 승리한 보편 종교로 자리 잡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결국 이 신앙은 단순한 이신론(deism)과는 달리, 종교적 열광과 계몽된 여론을 완벽히 조화시키며, 대중 의례의 격정적 황홀경과 뉴욕 타임스 독자란의 문체 양쪽 모두에 절묘하게 적응할 수 있는 이중적 능숙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악이 한때 우리 가운데 걸었으며, 지금도 살아 있다…” — 이것이 이미 우리 시대의 핵심적인 종교적 메시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 미완인 것은 신화적 통합 작업뿐이며,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 중이다.
더 건전한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5부]의 재와 잔해 속에서 여전히 뼛조각 몇 개쯤은 더 추려내야 한다…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4a장: 인종적 공포에 관한 여러 겹의 작은 곁가지 논의
닉 랜드 (Nick Land), 2012년 4월 19일
"겉으로는 즐거운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실패한 사상과 죽은 이론들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나 같은 사람들에게 비명을 지르며 파문을 선언하는 그 모든 것 아래에는, 깊고 냉랭한 절망이 자리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인종 간 조화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분리로 향하는 흐름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서로 멀리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도덕주의적이고 낙관적인 미국인들에게 이런 절망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곳으로 밀쳐버린다. 누군가 억지로 그것을 직면하게 만들면, 우리는 분노로 반응한다. 안데르센 이야기에서 "임금님의 새 옷"에 대해 진실을 말한 그 어린 소년? 현실에 더 가깝게 결말을 바꾼다면, 그는 분노한 시민들의 울부짖는 군중에게 린치를 당했을 것이다." — 존 더비셔(John Derbyshire), Gawker 인터뷰 중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과, 어떤 사람이든 기본적으로 품위를 갖춘 존재로서 대해야 한다는 원칙을 믿는다 — 인종이 무엇이든, 비교 지능에 관한 과학이 무엇을 말하든, 범죄 통계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연구가 수행되는 것, 결론이 조작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우리가 자유롭게 솔직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별 인물이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우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선험적(a priori) 결론을 내리거나, 단순히 인종만을 기준으로 두려움이나 호감을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주장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다원적 사회의 와해를 처방하는 것이며, “여럿으로부터 하나로”(E Pluribus Unum)라는 이상을 훼손하는 행위다." — 앤드루 맥카시(Andrew McCarthy), National Review에서 존 더비셔의 제명 조치를 옹호하며
"흑인 미국인들과 진보 진영이 제시하는 ‘더 토크(The Talk)’—즉, 백인의 악의 때문에 불가피하다고 주장되는 그것—는 우스꽝스러운 모욕이다. 왜냐하면 (위의 바로(Barro)를 보라) 아무도 흑인 미국인들이 법과 충돌하고, 서로 충돌하고, 다른 사람들과 충돌하는 맥락을 지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올바른 맥락,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트레이보니쿠스(Trayvonicus)’라는 광기를 이해하기 위한 맥락은, 폭력에 대한 합리적 두려움이다. 이것이 여기서 가장 절박한 단일한 사실이다—그런데 당신들은 그것이 말해져서는 안 된다고 명령한다." — 데니스 데일(Dennis Dale), 조시 바로(Josh Barro)의 존 더비셔 ‘해고’ 요구에 대한 반응 중에서
“두려움 속에서 산다는 건 참 대단한 경험이지, 그렇지 않나? 그게 바로 노예라는 거다.”
— 블레이드러너
싱가포르, 홍콩, 타이베이, 상하이, 그리고 많은 다른 동아시아 도시들에는 늦은 밤에도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없는 지역이 사실상 없다. 여성들은—어리든 나이 들었든, 혼자든 어린아이와 함께든—적어도 폭행의 위협이라는 측면에서는 공간과 시간의 세부 사항을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편안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 문명사회를 완전히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 정의에 극도로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확실히 문명사회 정의에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그 반대의 경우는 야만이다.
서태평양 연안의 이 행운의 도시들은, 서구 국가들에서 지나치게 얌전하다고 여겨지는 ‘모범 소수집단(model minorities)’을 떠올리게 하는 지리적·인구학적 특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이 도시들은—불쾌감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유전적 요인, 깊은 문화적 전통, 혹은 그 둘의 풀 수 없는 결합 때문에 예의 바르고 신중하며 평화로운 사회적 상호작용을 상대적으로 손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인구에 의해 주도된다. 또한 중요한 점으로, 이곳은 배타적 광신이나 편집증적 민족주의 정서가 눈에 띄게 부족한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사회들이다. 그 시민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강조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적·집단적 특성과 성취에 대해 대체로 겸손하며, 실패나 부족함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민감하고, 개선의 기회를 끊임없이 찾는다. 안일함은 비행(非行)만큼이나 드물다. 이러한 도시들에서는 사회적 공포의 또 하나의—그리고 엄청나게 중대한—차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서구 세계의 상당 지역에서는 야만성이 이미 보편화되었다. 도시에는 단순히 가난한 수준을 넘어 외부인과 주민 모두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위험 지역’이 존재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방문객들은 그곳에 가지 말라는 경고를 듣고, 현지 주민들은 집을 요새처럼 바꾸고 해가 지면 거리로 나가는 일을 피하며, — 특히 젊은 남성일 경우 — 보호를 위해 범죄 조직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 결과 이는 모두의 안전을 더욱 악화시킨다. 포식자들이 공공 공간을 장악하고, 공원은 죽음의 함정이 되며, 공격적 위협은 ‘올바른 태도’라고 미화되고, 재산을 얻는 일은 바보나 혹은 강도나 하는 짓으로 여겨지고, 교육열은 조롱당하며, 비범죄적 경제 활동조차 문화 규범을 어기는 행위로 멸시된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전통과 또래 압력부터 정치적 수사와 경제적 유인까지, 사회·문화적 압력의 모든 주요 기제가 무기력한 타락을 심화시키고, 자기 향상의 충동을 무자비하게 뿌리 뽑는 쪽으로 정렬되어 있다. 분명히 이러한 곳들은 문명이 근본적으로 붕괴된 장소이며, 이런 지역을 포함한 사회는 상당한 측면에서 실패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영어권 세계의 주요국들에서, 도시 문명의 붕괴는 도시 구조와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수 사례에서, 고도 도시화와 상응하는 부동산 가치가 도심 핵에서 최대치를 보이는 '자연적' (현재는 '아시아적'이라 부를 만한) 패턴은 파괴되거나 최소한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도시 중심부의 사회적 해체는 (적어도 중간 정도의) 부유층이 교외 및 외곽 거주지로 이탈하는 현상을 유발했으며, 이는 도시가 이성적 존재들이 접근을 꺼리는, 폐허가 되고 부패한 내부를 묵인하거나 단순히 순응하는 '도넛' 형태의 기괴하고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개발 패턴을 낳았다. '도심'이라는 용어는 왜곡되지 않은 도시 발전 경로가 생산했을 결과와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으로 언급 회피 대상이면서도 우주에서 관측 가능한 서구—특히 미국—사회 문제의 지리적 발현인 것이다.
놀랍게도, 도시의 중심부가 사회적 및 경제적 문제로 인해 황폐화되고, 도시 자본과 인프라가 외곽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기형적인 도시 현상에는 현상을 개략적으로—적어도 그것의 부차적 특성들에 따라—그리고 합리적인 정도의 통계적 근사치로 포착하는, 놀랍도록 둔감하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름이 있다. 백인 이주 현상(White Flight)이다. 이 용어는 여러 이유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무엇보다도, 이 용어는 —필수적인 고풍(古風)으로서— 여러 차원에서 미국의 만성적인 사회 위기와 공명하는 인종적 양극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다양한 색채의 다문화 및 이민 문제가 있는 시대에는 표면적으로 구식인 듯하지만, 이 용어는 노예제와 인종분리로부터 물려받은, 포크너의 말("과거는 죽지 않았다.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과 죽지 않고 남아 영원히 연관되는 규범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인종적 솔직함이 담긴 이 이례적인 순간에도, 흑인적 특성은 생략되고, 암묵적으로 행위 주체와 단절된다. 흑인적 특성은 극도로 격앙된 백인의 공황이 걸러내는 작용을 거치면서 수동적이고 파생적인 '잔여물'로 농축될 뿐이며, 오직 암시를 통해서만 지칭된다. 언급될 수 없는 것은 언급되지 않는 순간에도 암시된다. 문명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공포와 적대감에 의해 추동되는 인종 분리주의의 침묵하는 흐름, 그 깊이와 상호 호혜적 구조가 드러내기 어려운 침묵이 깨지고 반쯤 표현된 것과 동반된다.
구세계에서 신세계로의 청교도들의 탈주가 영어를 사용하는 전 지구적 근대성의 토대였다면, 백인 탈주 현상은 그 근대성이 해체되고 쇠퇴하는 현상에 해당한다. 건국 이전의 이주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백인 이주 현상이 여기서 필연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그 하위정치적 특성, 즉 모든 것은 이탈(exit)되며 목소리(voice)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민주주의와 그 꿈의 미묘하고, 논쟁적이지 않으며, 요구하지 않는 '타자', 즉 암흑계몽주의가 자발적으로 일으키는 충동으로, 처음에는 환멸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완강하게 나타난다.
도심 붕괴 현상이 병든 도시 증후군의 유일한 모델은 아니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의 행성(Planet of Slums)』에서 강조된 판자촌 변두리 현상은 매우 다르다). 또한, 도심이 붕괴되고 외곽지역에 자본과 인프라가 집중되는 도시 붕괴 현상은 적어도 그 기원에 있어서는 인종 위기로만 환원될 수 없다. 기술적 요인들(가장 두드러지게는 자동차 지리학)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전혀 다른 오랜 문화적 전통들(예: 부르주아적 낙원으로서의 교외 지역 건설)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계보들은 매우 큰 정도로 물려받았고, 여전히 출현하고 있는 '인종 문제'에 의해 대체되었거나, 적어도 종속되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왜 미국 밖에 사는 사람들이 이에 대해 우려해야 하는가? 왜 지금(아니면 애초에) 이 주제를 꺼내야 하는가? — 만약 지금 이게 엄청 길고, 산만하고, 신경을 갉아먹고, 고문에 가까운 이야기가 될 거라는 음울한 예감에 마음이 가라앉고 있다면, 맞다. 우리는 앞으로 몇 주 동안 이 공포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지고, 동시에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답변은 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문제의 중요한 일부로서 고려될 만하다.
질문: 미국의 인종 문제란 무엇인가?
답변 1: 흑인들.
답변 2: 백인들.
이 두 가지 관점이 함께 인기를 얻는다면, 특히 서로의 진영이 상대방이 자신 쪽보다 더 우월한 입장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쪽까지 포함하면, 미국인의 대다수를 아우를 가능성이 크다. ‘흑인 깡패만 없애면 문제는 끝날 것이다 /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만 쫓아내면 된다’는 생각과, ‘저들은 우리를 깡패이자 제거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한다’는 인식이 정치 스펙트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방어적 투사(“우리는 깡패가 아니라 너희가 인종차별주의자다” 또는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너희가 깡패다”)까지 덧붙이면, 극도로 열기가 뜨겁지만 결코 화해로 나아가지 못하는 논쟁이 무한대로 확장될 여지가 생긴다.
이 ‘진영들’이 실제로 인종적이라는 뜻은 아니다(흑인 혹은 백인 내셔널리즘적 망상 속에서나 그렇다). 조잡한 고정관념을 이야기하려면, 인종보다 오히려 미국적 의미에서의 주요 정치적 축—즉 ‘진보’와 ‘보수’로 나뉘는 범주—가 훨씬 유용하다. 미국의 인종 문제를 백인 민족주의로 규정하는 것이 전형적인 진보 진영의 관점이라면, 이를 흑인의 사회적 기능 부전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에 정확히 대응하는 보수적 관점이다. 이 두 입장은 형식적으로는 대칭적이지만, 실제 정치적 비대칭성 때문에 미국의 인종 문제는 특유의 역사적 추진력과 세계적 의미를 갖게 된다.
매우 거칠게 통계적 집단으로 간주했을 때, 미 백인과 흑인이 상호적인 공포와 피해 의식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도시 개발과 이동 패턴, 학교 선택, 총기 소유, 치안과 수감 제도, 그리고 자발적 사회 분포와 안전과 관련된 모든 ‘드러난 선호’(표현된 선호와 대비되는)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객관적 공포의 균형이 지배하고 있지만, 이는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양립 불가능한 피해자 우월주의와 부정의 관점 때문에 가시성에서 지워져 있다. 그럼에도 인종을 바라보는 진보와 보수의 입장 사이에는 아무런 균형도 존재하지 않으며, 일방적 붕괴에 가깝다. 보수는 이 문제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반면, 진보에게 인종 문제는 인간의 이해 능력을 넘는 즐거움이 가득한 에덴의 정원과 같다. 정치적 논의가 인종 문제에 분명하고 확고하게 도달하는 순간, 승자는 항상 진보다. 이것이 ‘대성당(Cathedral)’의 향기로운 그늘 아래에서 작동하는 이념적 효과성의 기본 법칙이다. 어떤 면에서 이와 같은 역동적 정치 불균형은 논의해야 할 주요 현상 그 자체이며, 앞으로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보수가 인종 문제에서 정기적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처절하게 굴욕을 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결국 현대 정치에서 보수가 맡은 핵심적 역할은 바로 굴욕을 당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관제야당, 혹은 궁정 광대와도 같은 그런 존재 말이다. 신(新)-청교도적 영적 진리를 수호하고 설파하는 진보의 본질적 성격은, 변증법에 대한 절대적 우위—혹은 모순으로부터의 무적과도 같은 특성—을 부여한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종 문제와 관련된 모든 공적 논의, 학술적 표현, 입법적 조치를 통해 반복적으로 선포되는 진보 신념의 근본 교리, 즉 제1조를 보라. ‘인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착취하고 억압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 명제를 곱씹는 것만으로도 절대자의 위엄 앞에서 몸서리치게 된다. 모든 것이 동시에 자기 자신의 정반대가 되며, 이성(理性)은 장엄함의 벼랑 끝에서 황홀하게 증발한다.
세상이 이념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이 이야기는 이미 끝났거나 최소한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을 것이다. 겉보기에 변증법적 지그재그 패턴이 존재하더라도, 그 아래에는 단일하고 분명한 방향으로 향하는 지배적 흐름이 있다. 그러나 진보‧자유주의적 인종 문제 해법—끝없이 고조되고, 전면적으로 체계적이며, 역동적 모순을 품은 ‘반(反)인종주의’—은 보수의 태도·수사·이념 속에 부분적으로만 반영된 어떤 ‘현실적 장애물’과 마주하게 된다. 진짜 적은 얼음판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형태가 불분명하며, 논쟁조차 하지 않는 존재, 즉 ‘백인 이주 현상(white flight)’이다.
이 시점에서 존 더비셔의 내셔널 리뷰에서의 해고 사건에 대한 명시적 언급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최근의 복잡한 역사적 맥락—특히 트레이본 마틴(Trayvon Martin) 사건과 관련된 문화적 격변—을 소개할 필요가 많지만, 그건 나중에 다룰 시간도 있을 것이다(아, 맞다, 반드시 다뤄야 한다). 더비셔의 개입과 그로 인해 폭발적으로 쏟아진 언어들은, 어느 정도는 이러한 맥락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더비셔의 이제는 악명 높은 짧은 기사와, 그에 대한 반응 속에서 드러나는 핵심적이지만 말하지 않은 용어가 바로 ‘백인 이주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라시아인) 자녀들에게 “흑인을 피하라”는, 완전히 무리한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적 조언을 공개함으로써, 백인 이주 현상을 단순히 안타깝지만 불가피한 사실에서 명시적 명령이자, 심지어 원인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논쟁하지 말고, 도망쳐라.
더비셔가 자신의 논평 속 미묘한 뉘앙스와 이전 글들에서 강조하는 단어는 ‘이주’나 ‘공포’가 아니라 ‘절망’이다. 블로거 복스 데이(Vox Day)가 그에게 지난 20년간 ‘인종 문제를 정치적·사회적 논쟁에서 상대방을 압박하거나 불리하게 만들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race card)’이 덜 위협적으로 되었는지 동의하느냐고 물었을 때, 더비셔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제가 여러 번 쓴 적이 있는 한 가지 요인은, 미국에서 말하자면, 바로 절망입니다. 저는 나이가 좀 있고, 50년 전쯤을 기억합니다. 신문을 읽고 세계 사건들을 따라가며 민권 운동을 기억합니다. 당시 저는 영국에 있었지만, 그 흐름을 주시했습니다. 저는 그때를 기억하고, 우리가 느낀 감정과 사람들이 쓴 글들을 기억합니다. 그때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두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부당한 법들을 철폐하고 모든 차별을 금지하면, 우리는 온전해질 것이다. 그러면 미국도 온전해질 것이다.” 몇 년, 혹은 어쩌면 20년 정도의 중간 기간이 지나고, 긍정적 차별 조치와 같은 도움을 받으면, 흑인 미국인은 일반 인구 속으로 완전히 합류하게 될 것이고, 결국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모두가 믿던 바였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 지금 우리가 50년이 지난 시점에 와 있지만, 범죄율이나 교육 성취도 등에서 여전히 엄청난 격차가 존재합니다. 겉으로는 격언 같은 말을 늘어놓고 있지만, 미국인들은 마음속 깊이 차가운 절망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토머스 제퍼슨이 아마 옳았을 것이며, 우리가 조화롭게 함께 살아갈 수 없다고 느낍니다. 아마 그래서 서서히 나타나는 민족적 분리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매우 분리된 학교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앉아 있는 곳에서 10마일 내의 학교들 중 어떤 학교는 98%가 소수민족입니다. 주거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회 전체의 마음속에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차갑고 어두운 절망이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거의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현실의 한 버전이다. 더비셔가 지적하듯, 미국인들은 대체로 기독교적이고 낙관적이며, ‘할 수 있다’는 정신을 가진 사람들로, 그들의 ‘집단적 정신’은 희망을 포기하는 데 매우 부적응적이다. 미국은 문화적으로 절망을 단순한 실수나 약점이 아니라 죄로 해석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나라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암울한 유전적 운명론이 단지 진보 진영뿐 아니라, 압도적 다수의 보수 진영에서도—대개 격렬한 적대감과 함께—거부되는 것을 보고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내셔널리뷰 온라인에서 앤드루 C. 맥카시(Andrew C. McCarthy)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했다.
"한편으로는 IQ와 수감 문제와 관련된 불편한 사실들을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본적인 기독교적 자비를 포기하는 근거로 인종을 내세우도록 촉구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더 나아간 사람들도 있었다. 이그재머너(Examiner)에서 제임스 깁슨(James Gibson)은 “존 더비셔의 혐오스러운 인종차별적 글”을 “기독교와 결별한 보수주의의 위험”을 가르칠 기회로 삼았다.
“…더비셔는 ‘나사렛 예수가 신성이 있었다… 부활이 실제 사건이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신성이 실제로 나사렛 예수의 인간 육체를 취하고, 타락한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써 인간을 타락 상태에서 구원한 강생(降生)의 위대한 신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적 신앙과 결합되지 않은 보수적 사회·정치 철학의 위험이 드러난다. 그것은 죽은 이데올로기가 되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유해하고 운명론적이며—더비셔가 충분히 증명하듯—자비 없는 시각으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진짜 폭발은 좌파 쪽에서 일어났다. 애틀랜틱 와이어(Atlantic Wire)의 엘스페스 리브(Elspeth Reeve)는 더비셔가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와의 관계를 유지한 이유가, 잡지의 “덜 계몽된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구식 인종 고정관념”을 제공한 것이다. 우파 진영의 깁슨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사람들이 더 넓은 교훈을 배우길 원했다. 즉, “이 문제가 더비셔로 끝난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녀의 글에 달린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협조적이지 않은 댓글 스레드도 주목할 만하다.)
고커(Gawker)에서 루이스 페이츠먼(Louis Peitzman)은 더비셔의 “끔찍한 장광설”을 “가능한 가장 인종차별적인 글”이라고 묘사하며(승인된 방향으로) 한계를 넘어섰다. 이 평가는 극단적인 역사적 무지, 보호받으며 살아온 삶, 특이한 순수함, 상상력 부족을 드러내며, 동시에 그 글을 실제보다 훨씬 흥미롭게 보이게 만든다. 페이츠먼의 댓글 작성자들은 흠잡을 데 없이 진보적이며, 물론 일관되게, 완전히, 충격적으로 경악한다(심지어 황홀감에 이를 정도다). 감정적 반응을 제외하면, 페이츠먼이 제공하는 내용은 많지 않으며, 다만 이번에는 약간의 만족감과 남아 있는 분노가 섞인 추가 감정 표현 정도만 있다. 즉, 더비셔가 내셔널 리뷰에서 해고된 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이라는 소식이다.
조안나 슈로더(Joanna Schroeder, Good Feed Blog라는 곳에서 글을 썼음)는 정화를 더비셔에 국한하지 않고, 아직 충분히 과장된 분노의 폭발을 보여주지 않은 사람들까지 포함시키려 했다. 그 시작은 Slate의 데이비드 와이겔(David Weigel)로, 그녀는 “실제 생활에서는 모르지만, 이 글을 읽어보니 너 혹시 인종차별주의자 아니냐, 친구?”라고 언급한다. 그녀는 이렇게 글을 적었다. “더비셔의 글에는 흑인에 대한 … 수많은 인종차별적이고 인간성을 부정하는 언급이 있어, 모든 내용을 한 점씩 열거하며 분노를 터뜨리기 전에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러나 페이츠먼과 달리 슈로더는 최소한 요점을 가지고 있다 — 인종적 공포의 변증법이다 — “…우리가 흑인 남성, 일반적으로 흑인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것은, 이 세상을 무고한 미국인들에게 위험하게 만든다.” 즉, “당신의 두려움이 당신을 무섭게 만든다”(단, 명백한 상호성은 없는 듯하다).
와이겔의 경우, 그는 공포를 제대로 겪는다. 몇 시간 만에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아, 이전의 태만함과, “결국 명백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 글은 정말 끔찍했습니다”는 사실에 대해 사과한다.
그렇다면 더비셔는 실제로 무엇을 말했으며,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미국 정치(그리고 그 너머)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하위 시리즈에서는 좌파에서 우파까지 스펙트럼을 샅샅이 살펴보며, 사회·지리적으로 드러나는 ‘백인’ 공포/절망을 하나의 안내 스레드로 삼아 여러 시사점을 탐구할 것이다.
다음 편: 리버럴적 황홀경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4b장: 불쾌한 관찰들
닉 랜드 (Nick Land), 2012년 5월 3일
"흑인 가정이나 아들 둔 부모만이 십대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틸먼과 브라운, 그리고 다른 부모들은 흑인 소년을 키우는 일은 부모 역할 중 가장 스트레스가 큰 부분이라고 말한다. 단지 피부색 때문에 사회가 그들을 두려워하고 적대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믿기 힘들다고요? 제 입장에서 하루만 살아보세요.” 브라운이 말했다.
브라운은 14세가 된 아들이 지금이 가장 위험한 나이라고 말한다. 인종 편견에 기반하여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일 때문에 늘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들을 겁주고 싶지도 않고, 사람들을 뭉뚱그려 보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우리 흑인 남성들은 범죄의 주범으로 낙인찍혀 왔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 늘 의심을 받습니다.” 브라운이 말했다.
그와 다른 부모들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지 않는 흑인 부모는 아들을 위험에 내몰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대화를 하지 않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모는 무책임한 겁니다.”
브라운은 말했다. “저는 이 모든 상황이 우리가 인종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라고 봅니다.”" — 그레이시 본즈 스테이플스(Gracie Bonds Staples), 스타-텔레그램(Star-Telegram)
"도심 지역에서 온 제8조 미국 저소득층 월세 지원 제도(주택 바우처) 수혜자의 유입에 지역사회가 저항할 때, 그 반응은 대부분 행동에 대한 것이다. 피부색은 그 행동에 대한 대리적인 지표일 뿐이다. 만약 도심의 흑인들이 아시아계처럼 — 아이들의 머릿속에 가능한 한 많은 지식을 밀어 넣으려 애쓰는 방식으로 — 행동한다면, 많은 미국인들이 분명히 품고 있는 저소득층 흑인들에 대해 남아있는 경계심은 사라질 것이다. 미국인들 가운데 구제불능의 인종차별주의자가 있느냐고? 물론 있다. 그들은 모든 인종에 존재하며, 우리는 모두 그런 인종차별을 비난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인종 문제는, 예의바른 대화에서는 보통 표현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 헤더 맥 도널드(Heather Mac Donald), 시티 저널(City Journal)
"“방 안에 코끼리가 있다는 얘기부터 합시다. 전 흑인이에요, 알겠죠?”
그 여성은 인종 문제로 인한 반발을 예상한다며 익명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여 기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근처에서 흑인 소년들이 집들을 털고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조지(George Zimmerman)가 트레이번 마틴(Trayvon Martin)을 의심한 것이죠.”" — 크리스 프란체스카니(Chris Francescani), 로이터(Reuters)
“요컨대 변증법은 대립물의 통일에 관한 학설로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이 변증법의 본질을 담고 있다.” 레닌은 이렇게 적고서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는 설명과 전개가 필요하다.” 즉, 더 논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레닌주의로 승화(Aufhebung)되는 과정은 거칠게 이해하는 편이 가장 잘 파악된다. 레닌은, 성숙한 물질적 조건이나 발전된 사회적 모순이 갖춰지기를 전제로 해왔던 기존 예상과 거의 완전히 결별하고, 광범위하게 적용 가능한 혁명적 공산주의 정치를 만들어냄으로써, 변증법적 긴장은 전면적으로 그 정치화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연의 변증법’에 대한 모든 언급은 과학의 영역을 정치적 모형에 사후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도 드러냈다.) 변증법은 그것이 실재하도록 만들어지는 만큼만 실재한다.
변증법은 정치적 선동에서 출발하며, 그 실천적·적대적·분파적·연합적 ‘논리’를 넘어 확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적 제약에 맞서,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상부구조’이며, 사회적 지배를 위한 발판으로서 가장 넓게 파악 가능한 정치 영역을 실질적으로 점유한다. 논쟁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통치의 기회가 있다.
대성당(역주: The Cathedral. 학계·언론·문화예술계·시민단체 등 진보주의 성향의 비선출 권력기구)은 이러한 교훈들을 구현한다. 그것은 레닌주의나 공산주의적 변증법을 표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부구조 가운데 변증법적 재구성(명시적 적대, 양극화, 이분법적 구조화, 전도(轉倒))을 피해 간 부분은 거의 없다. 학계, 언론, 심지어 순수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과포화가 지배해 왔으며, 가장 미세한 인식의 요소들조차 갈등적 ‘사회 비판’과 평등주의적 목적론과 동일시되었다. 공산주의는 그 보편적 귀결이다.
더 많은 변증법은 더 많은 정치화를 의미하고, 더 많은 정치화는 ‘진보’—즉 사회가 좌경화하는 것—를 뜻한다. 공적 합의의 형성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이어지며, 공적 불합의 속에도 이미 그 추진력은 배아(胚芽) 상태로 존재한다. 합의도 없고, 공개적으로 표현된 불합의도 없는 상태—다시 말해, 비변증법적(non-dialectical) 상태, 비(非)논쟁, 비정치적 다양성, 또는 정치적으로 조정되지 않은 자발적 행동 영역—에서만, 비로소 ‘경제’(그리고 더 넓게는 시민사회)라는 ‘우파적’ 피난처가 발견될 수 있다.
합의가 필요하지도 않고, 강제로 요구되지도 않을 때에는 부정적 자유(또는 ‘자유지상주의적’ 자유)가 여전히 가능하다. 그리고 변증법의 이 비-논쟁적 ‘타자’는 간단히 정식화될 수 있다(비록 자유 사회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더라도):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라.”
그러나 이 무책임하고 방임적인 명령은 정치적으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다. 그것은 좌파적 침체, 퇴행, 혹은 탈정치화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 태도야말로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정반대의 극단에는 연극적 정의의 변증법적 황홀경이 놓여 있다. 여기서는 법적 절차의 논쟁 구조가 언론을 통한 공개성과 결합한다. 변증법적 열광은, 변호사·기자·지역 활동가·그리고 혁명적 상부구조의 다른 행위자들이 함께 연출하는 공개 재판 속에서 그 결정적 표현을 찾는다. 사회적 모순이 무대 위에 올려지고, 적대적 입장이 명료하게 진술되며, 해결은 제도적으로 예정된다. 이는 헤겔식 변증법을 황금시간대 TV 쇼(그리고 이제는 인터넷)처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대성당이 대중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때때로, 성급한 진보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대성당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스스로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대성당의 행위자들이 끝없이 합리적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점점 분별력을 잃고,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무능하며, 실수를 저지르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국가가 신(神)이 될수록, 성스러운 바보(holy fool)와 같은 우매한 존재로 퇴화한다. 트레이번 마틴(Trayvon Martin) 사건을 둘러싼 미디어·정치적 쇼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국에서는, 다른 어떤 큰 나라와 마찬가지로, 매일 매우 많은 일이 벌어지며, 그 속에는 수없이 다양한—그리고 때로는 잘 보이지 않는—패턴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평균적인 하루 동안 대략 3,400건의 강력범죄가 발생한다. 그 안에는 40건의 살인, 230건의 강간, 1,000건의 강도범죄, 2,100건의 폭행이 포함되며, 여기에 더해 2만5천 건의 비(非)폭력 재산범죄(주거 침입·절도)가 일어난다. 이 가운데 널리 보도되거나, 교육적·전형적·대표적 사례로 삼아 선택되는 사건은 극히 적다. 설령 언론이 ‘좋은 이야기’라는 내러티브 중심의 선별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사건의 압도적 수량 자체가 그런 선택을 강제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거의 불가피하다. “왜 하필 이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지?”
트레이번 마틴의 죽음을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은 논쟁적이지만, 언론 보도의 동기만큼은 예외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다. 이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가 전하려 했던 의미 — 혹은 의도된 메시지 — 는 거의 너무나도 분명했다. 백인의 인종적 편집증 때문에 미국은 흑인들에게 위험한 나라가 된다. 이것은 인종적 공포의 변증법을 반복하려는 것이었다. 즉, “너희가 느끼는 두려움 자체가 무섭다”는 메시지를 통해, 미국 사회의 상호적 악몽을 일방적인 도덕 쟁탈전을 연기하는 극장으로 바꾸어버리고, 나라의 주요 인종적 분할선 중 한쪽만 정당한 공포를 품을 수 있는 존재로 설정하는 방식이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악의적으로 착각에 빠진 백인 자경단원이 무고한 흑인 아이를 사살한다. 이는 흑인들이 느끼는 공포(흔히 ‘그 대화(역주: the talk. 미국 흑인 사회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반드시 해주는 생존을 위한 특별한 교육 대화를 가리키는 표현. 경찰이나 백인 사회에서 오해받지 않고 위험을 피하기 위한 행동 수칙―예컨대 경찰이 제지하면 손을 보이게 할 것, 말대꾸하지 않을 것, 후드티를 입지 않을 것 등―을 알려주는 문화적 관행을 말한다.)’로 알려진)에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백인의 공포는 살인적 정신병으로 폭로하는 구조였다.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진보주의적 의미를 지닌 서사여서, 몇 번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사실일 리 없었다.
그러나 곧 드러난 것은, 유명 인사들과 ‘지역 활동가’들의 분노 장치가 보강된 언론의 선택 편향만으로는 이야기를 예정된 각본대로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두 주인공 모두 점점 할당된 역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진보 진영이 승인한 고정관념을 조금이라도 유지하려면, 강력한 편집(서사 조정)이 필요했다. 이 조치는 특히 절실했는데, 마이애미 헤럴드(Miami Herald)의 일부 사악하고, 인종차별적이며, 편견에 찌든 독자들이 ‘트레이번 마틴’과 ‘주거침입 도구’ 사이에 서사를 망가뜨릴 정신적 연결고리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해자인 조지 지머먼(George Zimmerman)의 경우, 그의 이름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되는 듯했다. 언론이 기대한 모습은 분명했다. 덩치 크고, 창백한 얼굴에, 나치 돌격대(storm-trooper)를 닮은 인물, 가능하다면 총기에 집착하는 기독교 극우이고, 정말 잘만 걸리면 동성애 혐오와 낙태 반대 운동 경력이 있는 민병대 성향 인물이면 완벽할 터였다. 그는 처음에 이유도 불분명하게 — 아마도 언론의 무능과 서사 기획의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 ‘백인(white)’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곧 ‘히스패닉계 백인(white Hispanic)’이라는, 거의 즉석에서 창조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분류로 재규정되었고, 그 뒤로는 현실과 조금이라도 더 맞추기 위한 점점 복잡한 민족적 설명들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아프리카계 페루인 (Afro-Peruvian)혈통의 증조부가 발견되는 데까지 나아갔다.
대성당의 심장부에서는 이미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할 시간이 한참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 위대한 ‘백인우월주의적 미국(역주: Amerikkka / Amerikkkan. 미국 극좌 진영이 미국은 KKK와 같은 백인 우월주의·인종차별 국가라는 비판을 할 때 쓰는 용어)’의 피고인이 쇼 재판을 위해 준비되고 있었고, 대통령까지 성스러운 희생자 편에 감정적으로 가세했으며, 현장 조직망도 인종 폭동 직전까지 조율되어 있었는데, 그 핵심 메시지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지루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흑인과 흑인 간의 폭력’ 사건으로 퇴락할 위험까지 생겼던 것이다. 문제는 단지 조지 지머먼에게 흑인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그 기준이라면, 좌파의 ‘사회구성주의적 인종 규정’에 따르면 그도 그냥 ‘흑인’이 된다.) 그는 흑인들과 우호적으로 섞여 자랐고, 오랫동안 집에 “식구나 다름없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녀 둘이 있었으며, 흑인 파트너와 공동 사업까지 했고,
정식으로 등록된 민주당원이었으며, 심지어 일종의 ‘공동체 조직가’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틴은 왜 죽었는가?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아이스티와 스키틀즈(Skittles)를 들고 있었다는 것 때문이었나(언론과 ‘지역 활동가’들이 승인한, “오바마 대통령의 아들이었다면 이랬을 것”이라는 버전), 혹은 절도를 할 곳을 물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나(KKK식 인종차별주의자 시각의 버전), 아니면 지머먼의 코를 부러뜨리고, 그를 넘어뜨리고, 위에 올라타서, 보도(步道)에 머리를 반복해서 내리쳤기 때문이었나(법정에서 판정될 버전)? 마틴은 인종차별의 희생자였는가, 작은 범죄들에 얽힌 문제아였는가, 아니면 미국 도시 붕괴 위기의 한 단면이었을까? 법적 절차가 시작되었을 때 한 가지 분명했던 점은 — 이 에피소드가 지닌 비루한 슬픔 말고는 —
이 사건이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지머먼이 2급 살인 혐의로 기소될 무렵, ‘승인된 교훈’이 얼마나 불안할 정도로 산산이 무너졌는지를 느끼고 싶다면, 인종 문제를 과격하게 다루는 우파의 변증법적 광란을 묘사한 HBD(역주: Human Biodiversity. 인간 생물학적 다양성. 인간 집단 간 유전적·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관점을 가지며 특히 지능, 성격, 범죄율, 행동 성향 등의 통계적 차이를 부분적으로 유전적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지적 흐름을 가진 집단) 블로거 oneSTDV의 이 글(역주: oneSTDV의 해당 글 링크는 https://onestdv.blogspot.com/2012/04/american-masses-and-why-i-stand-with.html 이지만 접속이 불가능한 상태다.)을 읽어보면 충분하다.
"지머먼에게 제기된 ‘혐의들’의 성격이 충격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안우파 인사들은 지머먼에게 어떤 동정도 보낼 생각이 없으며, 이 사건을 현대 좌파의 ‘무정부-폭정(역주: anarcho-tyranny. 보수주의 사상가 새뮤얼 T. 프랜시스(Samuel T. Francis)가 만든 개념으로, 국가는 정작 해야 할 기본적 치안·질서 유지 기능에는 무능하거나 손을 놓고, 시민에게는 불필요하게 과도한 규제·감시·통제를 가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즉 “무정부 상태와 폭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형적 상황”을 비판하는 용어이다.)’적 지배의 중대한 순간으로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들에 따르면, 스페인어를 쓰는, 민주당에 등록된 메스티소(역주: mestizo. 유럽계(대개 스페인·포르투갈) +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오) 혼혈인)인 지머먼은 자신이 초래한 일을 그대로 당하고 있을 뿐이다 — 즉 흑인 군중의 분노와, 지머먼 자신이 간접적으로 떠받친 엘리트 좌파의 공조적 압력 말이다. 그의 투표 성향, 다문화적 배경, 소수 인종 청소년 멘토링 경력 때문에, 이들은 지머먼을 미국 백인에 대한 좌파의 공격을 상징하는 인물, 즉 ‘미국의 백인적 특성’을 해체하려는 전선에서 활동하는 일종의 첨병으로 본다." (볼드체 표시는 원문 그대로)
대중적 PC(정치적 올바름) 경찰들은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거대한 쇼 재판이 서사적 혼란으로 무너져 내리자, 그들은 사실 따위는 (두 번 죽여서라도) 내던지고, 메시지에 다시 초점을 맞출 때라고 판단했다. ‘제제벨(Jezebel)’은 그러한 잔소리 섞인, 어딘가 히스테릭한 어조를 가장 잘 보여준다.
"흑인들이 여전히 억압받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냐고? 흑인들이 여전히 억압받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혹은 최소한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죽어라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 사실 그게 우리 모두가 약속할 수 있는 최선이지), 그렇다면 당신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조건을 모두 제거한 순수한 상황에서는 피부색 같은 요소가 누구의 성공에도 아무 영향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나? 그리고 따라서, 당신이 정말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믿는다면, 현실 세계에서 극적인 인종 간 불평등을 보게 될 때 당신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누군가를 가로막는 외부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예컨대… 인종주의. 맞나? 그러니 축하한다! 당신은 인종주의의 존재를 믿는 거다! 만약 당신이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고 믿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당신이 빌어먹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진짜로 믿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즉 문명적 상호작용을 위해 형식적 평등한 대우가 필요하다는 정도를 넘어, 현실에서 드러나는 성과의 실질적 불평등은 모두 억압의 명백하고도 일의적인 증거라고 믿는다는 뜻인가? 그게 정말 “당신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라는 말인가?
적어도 제제벨(Jezebel)은 진보적 신념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 신념은 어떤 증거에 대한 감수성도, 어떤 불확실성도 전혀 스며들지 않은 채, 관련 연구가 실제로 존재하든 혹은 존재할 수 있기만 하든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업신여기고,
자신의 도덕적 무적성에 절대적인 확신을 품고 있다. 만약 사실이 도덕적으로 틀렸다면, 그 사실이 더 나쁜 것일 뿐이다 — 그것이 곧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다. 설령 그 태도가 희망적 사고, 의도적 무지, 모욕적으로 유치한 거짓말이 뒤섞인 것이라 해도 말이다.
실질적 인간 평등에 대한 믿음을 미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미신에 대한 모욕이다. 레프리콘을 믿는 것이 근거 없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루 깨어 있는 모든 시간 동안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인간의 불평등, 그리고 그것의 풍부한 다양성은 항상 눈앞에 펼쳐져 있다. 사람들은 성별, 민족, 신체적 매력, 체격과 형태, 근력, 건강, 민첩성, 매력, 유머, 재치, 근면성, 사교성 등 수없이 많은 특성·능력·성향에서 서로 다르며, 이 중 일부는 즉각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일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드러난다. 이 모든 것 중 극히 일부분만이라도 받아들이고, 그 유일한 가능한 결론로서 그 차이가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혹은 단지 ‘사회적 구성물’이자 억압의 지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영지주의적 광기(Gnostic delirium)이다. 즉, 모든 증거를 넘어, 겉모습 뒤에 참되고 선한 세계가 감춰져 있다는 신념에 대한 집착이다.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그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으며, 그들의 목표와 성취도 평등하지 않으며, 어떤 것으로도 그들을 평등하게 만들 수 없다. 실질적 평등은 현실과 아무 관계가 없다. 있다면 그것은 현실의 체계적 부정으로서뿐이다. 실용적 평등주의 프로그램에 가깝게 접근하려면 집단학살 규모의 폭력이 필요하며, 그보다 덜 과격한 평등화 시도가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틀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 — 물론 어떤 이들은 유난히 기민하게 빠져나간다.
가장 분명한 예시 하나만 들어도 충분하다. 아이를 둘 이상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일란성 쌍둥이나 클론 정도는 예외로 둘 수 있겠지만). 사실, 모든 사람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서로 다르게 태어난다. 그 차이가 실제 삶의 결과에 어떤 영향을 줄지—대부분의 경우처럼—확신 있게 예측하기 어렵다 해도, 그 차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최소한 성실하게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성실함이나 최소한의 인지적 일관성 따위는 전혀 논점이 아니다. 제제벨의 입장은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로 보면 흠잡을 데 없을지 모르지만, 사실적으로는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희극적으로 우스꽝스럽고, 엄밀히 말해 ‘광기’에 가깝다. 그 입장은 현실에 대한 부정을 극단적 교리로 만들고 있으며,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진심으로 유지할 수도, 심지어 상상할 수도 없고, 더더욱 그럴듯하게 설명하거나 변호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이해될 수 있는 신념이 아니라, 그저 선언되거나, 강요되거나, 법으로 만든 광기 혹은 권위주의적 종교처럼 복종을 요구하는 신념일 뿐이다.
이 종교의 정치적 계율은 아주 분명하다. “불평등이라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진보주의적 사회 정책을 받아들여라.” 이 계율은 일종의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어서, 어떠한 사실도 이를 약화시키거나, 복잡하게 만들거나, 수정할 수 없다. 만약 진보주의적 사회 정책이 실제로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해도, 그 책임은 ‘타락한’ 현실에 있다. 그것은 사회적 병폐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뜻이며, 따라서 같은 방향으로 더 강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신앙의 문제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 결국 체계적 사회 붕괴만이, 지속적 실패와 점진적 악화가 결코 전해줄 수 없던 교훈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바로 초간단 버전의 거시적 사회 다윈주의이며, 문명이 종말을 맞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성과의 큰 차이와 매우 강하게 상관하는 특성 때문에, 인간 생물학적 다양성(HBD) 가운데 가장 골칫거리인 것은 지능 또는 일반적인 문제 해결 능력이며, 이는 스피어만의 g 요인(역주: 영국 심리학자 찰스 스피어만(Charles Spearman)이 제안한 개념으로, 모든 인지 과제에서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일반 지능을 뜻한다. IQ 검사는 여러 하위 능력을 측정하지만, 최종 점수는 대부분 이 g 요인(g factor)과 높은 상관을 갖는다. 현대 지능 연구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핵심 개념이다.)을 측정하는 IQ로 수량화된다. 그런데 ‘통계적 상식’이나 프로파일링을 인간 생물학적 다양성의 옹호자들에게 적용하면 또 다른 중요한 특성이 즉각 드러난다. 바로 놀라울 정도로 일관된 비사회성이다. 사실 이 저주받은 ‘공동체’ 내부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는 사실은, 인간 생물학적 변이를 스스로 공부할 만큼 고집스럽고 까다로운 사람들이 대체로 상당히 ‘사회성이 뒤떨어져’있다는 점이다. 즉 언어적 억제력 부족, 공감 능력 부족, 사회적 통합의 결여 등으로 인해 집단의 기대에 만성적으로 적응하지 못한다. 이들의 전형적인 EQ는 IQ의 제곱근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집단에는 경미한 자폐 성향이 흔하며, 덕분에 다른 사람들을 냉정하고 자연과학적인 호기심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이지만, 그 성향이 너무 심해져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될 정도는 아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 그들 스스로 풍부한 기술적 문헌을 근거로 상당히 유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 눈에 띄는 사회적 결과를 낳는다. 즉 고용 기회의 축소, 소득 감소, 심지어 번식 가능성의 감소 같은 결과들이다. 진보주의적 환경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풍부한 치료적 조언에도 불구하고, 이 주류 사회의 금기를 깨는 데에서 오는 불쾌함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제벨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듯, 이런 현상은 구조적 억압의 신호일 수밖에 없다. 왜 주류 사회의 금기를 깨는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 걸까?
역사는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주류사회의 담론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주류사회의 금기를 깨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왔다. 그들과 결혼하거나 사업하려 하지 않았고, 각종 모임과 정치적 자리에서 배제했으며, 비하적 낙인을 붙이고 따돌리거나 회피했다. ‘주류 사회의 담론에의 반항’은 극도로 부정적인 용어로 낙인찍히고 고정 관념화되어,
많은 불쾌한 이들이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문제를 겪고있는 사람’, 혹은 ‘사회적 능력이 다르게 발달한 사람’ 같은 좀 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부르려 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저 상대가 극도로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언어적, 심지어는 신체적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주류 담론에 맞서는 이들이 서로 마음을 맞추지 못한 탓에, 자신들이 겪는 구조적 억압에 함께 대응할 수도 없었고, 또 그들과 비슷한 처지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동맹— 이를테면 냉소주의자들, 허구를 파헤치는 사람들, 주류에 늘 반기를 드는 이들, 혹은 투렛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과 손을 잡을 기회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주류 담론에 대한 도전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이 그 ‘해방’에 일정한 도움을 줄 가능성은 커 보인다…
존 더비셔(John Derbyshire)의 악명 높은 에세이 「그 대화: 비(非)흑인 버전(The Talk: Nonblack Version)」을 떠올려 보라. 우선 그 글이 보여주는 지칠 줄 모르는 ‘비사회성)’에 주목하고, 사회성과 객관적 이성(reason) 사이의 부적 상관관계에 유의해보라. 더비셔가 다른 곳에서 지적하듯,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을 집단 정체성과 분리해서 보지 못하며, 집단에 대한 통계적 일반화를 개별 사례—심지어 자기 자신—에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다. 이성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는 피할 수 없는, 즉 집단 정체성을 실체화하는 경향은 심리적으로 지극히 정상적이며—어쩌면 ‘인간적’이기도 하다. 그 결과, 구체적 정보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고 특정하지 않은 통계 정보가 자기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잘못 수용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사회성이 뒤떨어지고, EQ가 낮고, 순수 이성 중심의 분석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고는 단순히 잘못된 것이다. 어떤 개인이 특정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평균적으로 어떤 특성을 가진 집단에 속해 있느냐는 사실은 그 개인에게 아무런 관련성도 없다. 개인에 대한 직접적이고 확정적인 정보는 그 개인이 속한 집단들에 대한 간접적이고 확정적이지 않은(확률적) 정보에 의해 전혀 보강되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검사 결과를 알고 있다면, 그가 속한 집단의 평균치나 그에 기반한 통계적 추정은 그 개인에 대해 추가적인 통찰을 전혀 제공하지 못한다. 아슈케나지 유대인(Ashkenazi Jewish)임에도 멍청하다면, 그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이기 때문에 덜 멍청한 것이 아니다. 노년의 중국계 수녀들은 보통 살인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만약 살인을 저지른 어떤 사람이 우연히 노년의 중국계 수녀라 해도, 그녀는 그렇지 않은 살인자보다 더 살인자답지도, 덜 살인자답지도 않다. 이 모든 것은 — 적어도 주류 사회가 기피하는 ‘문제적 인물들’에게는 지극히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전혀 자명하지 않다. 부분적으로는 이성적 지능 자체가 인간에게 드문 비정상적 특성이기 때문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지능’이라는 것이 곧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맞추는 능력, 즉 비이성적 집단 감정, 제한된 정보, 편견, 고정관념, 자기 주변에서 본 몇 가지 사례만으로 세상을 설명하려 드는 습관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성적 사고를 하기 귀찮아해서 지름길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반화를 들었을 때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적이다. 그 일반화가 실체화되거나 구체적 인식을 무시하거나 대체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신이 특정 집단의 정체성으로 미리 규정될 것을 예상하면, 그 집단과 그것이 어떻게 인지되는지에 대해 더 강한 심리적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어떤 일반적 평가가 아무리 객관적 절차를 거쳐 내려졌다 해도, 보통 상황에서는—심지어 아주 약한 연관성만 있어도— 그 평가는 즉각적으로 개인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사회적 공감 따위 없는 차가운 이성’은 “평균값이라는 것은 애초에 당신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고 완강하게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 메시지가 대체로 받아들여질 일은 없다. 인간의 사회적 ‘지능’은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교양 있어 보이는 논객들조차 기초적인 통계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가장 충격적인 오류를 반복해서 드러내곤 한다. 그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은 애초에 그런 용도로 설계된 감정이 아니며, 오히려 거의 정반대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과학적·확률적 의미에서 고정관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성의 기능적 전제 조건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서 우둔함의 유일한 대안은 곧 사회적으로 기피되는 ‘주류 담론에 맞서는 것에서 기인한 불쾌함’이기 때문이다.
더비셔의 글이 주목할 만한 이유는, 그 글이 누가 보아도 ‘사회적으로 기피될 만큼’ 반사회적이라는 점을 명확히 드러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반박문들이 횡설수설에 가까운 혼란을 보였음에도, 그렇게 평가받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흑인 가정의 그 대화(The Talk)’와 이에 대한 ‘존 더비셔의 흑인이 아닌 이들을 위한 그 대화 (Counter-Talk)’가 공유하는 특징 중 하나는 은밀한 사적 대화를 가장하면서도, 사실은 사람들이 듣도록 꾸며진 연극적 구조이다. 두 경우 모두, 부모가 아이에게 어쩔 수 없이 들려줘야 한다고 설정된 메시지를 더 넓은 사회적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그 교훈은, 아이들에게 위험한 세계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 행동을 통해서든, 행동하지 않음으로써든 — 누구인지 겨냥하고 있다.
이 형식 자체가 본질적으로 조작하기 쉽기 때문에, ‘원본’인 흑인 가정에서의 그 대화(The Talk)조차도 패러디하기 쉬운 표적이 된다. 그러나 원본에서는, 고의적으로 순진함(또는 무지)을 연기함으로써 괴로움과 진정성이 섞인 어조를 만들어낸다. “아들아, 이건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말이야…” (“왜, 도대체 왜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반면 존 더비셔의 그 대화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 그 작은 가족 드라마에 ‘인류학의 체계적 조사’라는 임상적으로 반사회적 담론이 결합된다. 여기서 인구집단은 더 이상 법적·정치적 소통 주체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특성을 지닌 생물학적·지리적 집단처럼 다뤄진다. 이 담론은 ‘순진함’을 조롱하고, 그에 따라 사회성이라는 기준 자체를 비웃는다. 합의도, 상냥함도 아무 의미가 없다. 정밀하게, 때로는 과도하게 집적된 통계는 그저 말해야 할 것을 말할 뿐이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문제가 있는 쪽은 우리일 뿐이다.
그러나 더비셔의 글은, 상당히 호의적으로 읽든 혹은 더비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독자가, 그의 글에서 비판할 거리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읽든, 비판의 여지를 분명히 제공한다. 예를 들어, 글의 첫머리부터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비(非)흑인 미국인(nonblack Americans)”의 인종적 대응어는 원래 ‘흑인 미국인(black Americans)’이어야 한다. 그러나 더비셔는 이 표현 대신 “미국의 흑인들(American blacks)”이라는 명사-형용사의 역순 배열을 선택한다. 이 어순 바꾸기는 금세 일관된 패턴으로 굳어진다. 그렇다면 더비셔가 “흑인 개인들(black individuals)”이 아니라 “단일 흑인(individual black)”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말한 점은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분명히 그렇다. 누군가를 “흑인(black)”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속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누군가를 “(한 명의 흑인(a black)”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을 어떤 집단적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것, 즉 그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방식이다. 그 효과는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위협적이며, 논리적 사고가 뛰어난 더비셔가 이를 모르고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같은 방식으로 “존 더비셔는 ‘한 명의 백인’이다(John Derbyshire is a white)”라고 말해보면 똑같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고, 불편하게 들린다. 즉, 이런 표현은 개인을 특정 집단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해버려서 그저 그 부류를 대표하는 예시 정도로 취급해 버린다는 뜻이다.
이번 사안에서 불필요한 무례함으로까지 뻗어나간 과잉된 주장의 좀 더 지적으로 본질적인 측면은 윌리엄 살리턴(William Saletan)과 노아 밀먼(Noah Millman)에 의해 검토된 바 있다. 두 사람은 자유주의·보수주의라는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음에도, 거의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다. 두 논평가 모두 더비셔의 글에서 거시적 통계 일반화를 미시적 사회 상황에 적용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균열, 혹은 방법론적 부조화를 지적한다. 아무리 철저하게 검증된 고정관념이라 해도, 구체적 사회적 상황에서는 특정한 개인에 대한 직접적 지식보다 항상 열등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은 결코 ‘집단 전체’를 직접 겪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적 위치에 놓인 자유주의자로서, 살리턴(Saletan)은 더비셔의 “속이 뒤틀릴 정도로 역겨운 결론들”에 마치 큰 비극이라도 겪은 듯 과장되게 몸서리치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물러서는 이유가 그 감정적으로 위장한 반응에 모두 잠식된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통계적 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건 특정 개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때 차선으로 기대어볼 수 있는 확률적 추정치일 뿐이다. 즉, ‘무지한 사람이 진짜 지식을 대신해 쓰는 허약한 대체물’이다.” 더비셔는, 흑인 필즈상 수상자가 없다는 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 스타일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어서, 살리턴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적 지능 대신 통계적 지능을 쓰는 수학에 빠진 괴짜”이며, “눈앞에 있는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는 수고를 들이기보다 집단 평균 계산으로 대체하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밀먼(Millman)은, (반사회적 성향의) 사회과학적 지식이 결국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말아야 할 것’으로 뒤바꾸는 아이러니한 주객전도를 강조한다.
“‘인종 현실주의자들(race realist)’은 자신들이야말로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많고, ‘정치적 올바름’ 유형은 추한 현실을 외면한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더비셔가 자기 자녀에게 주는 조언은, 다칠 우려가 있으니 주변 세계에 너무 호기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 그것은 아이들에게는 형편없는 조언이며, 더비셔 자신의 삶에서도 결코 따르지 않았던 조언이다.”
밀먼의 결론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왜 내가 더비셔를 상대로 굳이 논쟁을 벌이는가? 음, 우선 그는 내 친구다. 그리고 게으르고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발언이라도 단순히 규탄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반박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비셔의 글이 인종차별적이냐고? 물론 그렇다. 그의 요지는, 자기 아이들이 흑인을 백인과 명백히 다르게 대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이성적이며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종차별적’이라는 말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기술적(descriptive) 용어다. ‘인종 현실주의자’ 진영의 사람들은 더비셔의 주요 전제가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그런 믿음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비난받는다고 해서 그들이 설득될 일은 없다 —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그게 설득의 방식이 되어서도 안 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더비셔의 결론이 그의 전제로부터 자동적으로 도출되지 않으며, 논의를 위해 전제를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도덕적으로 잘못된 결론임을 논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잠시 휴재…]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 4c부: 크래커 공장
닉 랜드 (Nick Land), 2012년 5월 17일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나라의 수도에 수표를 바꾸러 왔다. 우리 공화국의 설계자들이 헌법과 독립선언서라는 그 장엄한 문구를 작성했을 때, 그들은 모든 미국인이 물려받을 약속어음에 서명한 셈이었다. 이 어음은 모든 사람, 즉 백인뿐만 아니라 흑인에게도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라는 불가침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이 유색인종 시민에 관한 한 이 약속어음을 이행하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이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대신, 미국은 흑인들에게 부도수표를 건넸다. '잔액 부족'이라는 도장이 찍혀 되돌아온 수표를 말이다.”
“보수주의는 몇몇 예외가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 백인 중심의 운동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동안 보수 성향의 모임이나 콘퍼런스, 크루즈 여행, 축제 등에 최소한 백 번은 참석해 보았지만, 그 무리 중 유색인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거의 없었다. 12년 동안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 잡지사를 드나들면서도, 흑인 정치인 허먼 케인(Herman Cain)이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면 그곳에서 마주친 흑인은 우편물실을 담당하는 알렉스뿐이었다. (잘 지내는가, 알렉스!)
그렇다고 보수주의가 흑인이나 메스티소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른바 '제도권 보수'의 경우는 더 심하다. 그들은 어쩌다 눈에 띄는 비백인 참석자에게 쩔쩔매며 비위를 맞추는데, 그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아서 지켜보기 민망할 정도다. (질문: 공화당원 1,000명이 모인 자리에서 단 한 명뿐인 흑인을 뭐라고 부를까? 정답: "의장님.")
보수주의가 강조하는 자립이나 정부 의존도 최소화 같은 가치는 낙후된 소수 집단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 뿐이다. 통계적인 일반론으로 볼 때, 이들은 현대 상업 국가에서 집단적 성공을 거두는 데 필요한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념을 받아들인들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지금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사회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훨씬 나은 전략이 있다. 동성애자, 페미니스트, 막다른 길에 다다른 노동조합 등 불만을 품은 백인이나 아시아계의 여러 소외 집단과 최대한 연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표 대결에서 과반을 차지한 뒤, 대규모적인 포퓰리즘 정부를 세워 자신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고 성공한 집단의 부를 이전받는 편이 훨씬 이롭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이성적이고 현명하게도, 바로 그 전략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연방 분리주의자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아늑한 이불이 이들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는 형국이다. 연방 정부의 의료개혁법을 따르느니 차라리 텍사스가 연방에서 탈퇴할 수도 있다고 넌지시 비친 릭 페리(Rick Perry), 알래스카 독립을 주장하는 정치단체에 몸담았던 토드 페일린(Todd Palin), 연방 당국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수정헌법 제2조(총기휴대 및 소지의 권리)에 따른 해결책'을 언급한 샤론 앵글(Sharron Angle)은 모두 현대 담론에 위험한 분리주의 수사가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언론은 남북전쟁 재현 행사나 남부연합기를 휘날리는 픽업트럭에만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둔다. 하지만 대중 정치인들 역시 가장 위험한 형태의 역사 수정주의를 영속시키려 애쓰는 학자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프랙티컬리 히스토리컬(Practically Historical)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우리 미국의 양심이다.”
— 월터 러셀 미드(Walter Russell Mead) 블로그 댓글 작성자 ‘surfed’ (오탈자 수정본)
미국의 인종적 ‘원죄’는 나라의 기틀이 놓이던 시기, 즉 미국이라는 국가가 탄생하기도 전인 유럽 정착민의 원주민 소탕과 그보다 더 결정적인 노예제 성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미국 흑백 관계의 '구약성서적 역사'로, 속박에서 벗어나는 섭리적 서사 속에 사실적 기록과 도덕적 권고가 결코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 ‘모세오경’의 양식을 따라 오랜 세월 자행된 극심한 사회적 학대, 그리고 서구 전통의 원초적인 도덕적·정치적 신화를 그대로 재현한 이 역사는 노예제와 해방의 서사를 미국 역사에서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불멸의 틀로 각인시켰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는 선언처럼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블로그 ‘프랙티컬리 히스토리컬’은 남북전쟁에 관한 링컨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하지만 신의 뜻이 그러하여, 노예가 250년 동안 대가 없이 흘린 땀방울로 쌓아 올린 모든 부가 바닥날 때까지, 그리고 채찍으로 흘리게 한 피 한 방울마다 칼로 흘린 피 한 방울로 되갚을 때까지 이 전쟁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3천 년 전 유대인들이 말했듯 "주님의 심판은 언제나 참되고 의로우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인종 문제에 관한 '신약성서'는 1960년대에 쓰였으며, 기존의 틀을 수정하고 구체화했다. 민권 운동과 1965년 이민법 개정, 그리고 구 남부연합 지역의 소외된 백인층을 공략한 공화당의 '남부 전략'이 맞물리면서 흑인 집단과 민주당 사이에 확고한 당파적 유대가 형성되었다. 이는 자유주의적·진보적 재탄생에 가까웠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되고 한층 더 공고해질 당파적 인종 양극화의 틀을 짰다. 체계적인 우생학적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진보 운동 진영과, 전통적으로 남부 백인의 고집 및 쿠 클럭스 클랜(KKK)과 결탁해 온 민주당에 이 민권 운동 시기는 속죄와 의례적 정화, 그리고 구원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반대로 미국의 보수주의와 갈수록 갈 길을 잃어가는 공화당에 이 일련의 과정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의미했다. 물론 그들은 왜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제 '미국'이라는 이념은 과거에 대한 격렬한 단절, 나아가 그 과거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한 현재마저도 거부하는 흐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오직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연방'만이 그 이념에 부합할 수 있었다.
가장 피상적인 수준에서 보더라도, 이 새로운 질서가 가져올 거대한 당파적 변화는 명확했다. 미국은 갈수록 공화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해 갔으며, 실질적인 국가 주권은 행정부로 집중되었다. 아울러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부의 도덕적 정당성은 일종의 교리(敎理)로 자리 잡았다. 이미 '구닥다리 우파'로 전락해 버린 이들에게는 빠져나갈 구멍도, 되돌아갈 길도 없었다. 과거로 향하는 길은 민권 운동이라는 사상의 지평선을 넘어야만 했고, 그 너머에는 결국 노예제라는 파멸적 의미만이 기다리는 정치적 불모지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좌파는 변증법을 먹고 자라나지만, 우파는 변증법으로 인해 파멸한다. 정치의 순수한 논리라는 게 존재한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 하나는, 멘시우스 몰드버그가 누차 강조했듯 진보주의에는 좌파 내부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진보주의의 눈에 좌파 내부의 이견은 그저 아직 때가 오지 않은 이상주의자들로 보일 뿐이다. 따라서 좌파의 파벌 갈등은 정치적 역동성을 낳으며, 오히려 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칭송받는다.
반면 보수주의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왼쪽에서는 헌법의 틀을 넘어선 거대 국가주의라는 폭주 기관차에 얻어맞고, '오른쪽'에서는 주류 정치에 흡수되지도 않고 서로 양립하기도 어려운 온갖 미성숙한 조류들에 흔들린다. 극단적인 오스트리아학파식 자유방임 자본주의 옹호론부터 신학에 기반한 완고한 전통주의, 극단적 내셔널리즘, 그리고 백인 정체성 정치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도 제각각이다.
'우파'에는 현재도, 앞으로도 결속력이라는 것이 없다. 따라서 좌파처럼 대칭적인 개념으로 우파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정치가 곧 변증법이라는 동의어적 반복이 성립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정치적 톱니바퀴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즉 국가의 확장과 갈수록 강제성이 더해지는 실질적 평등주의라는 이상을 향해서만 예측 가능하게 움직인다. 우파는 중도로 이동하고, 중도는 다시 좌파로 이동할 뿐이다.
주류 보수 진영의 환상과는 무관하게, 미국의 미래를 주도하는 자유주의·진보 진영의 패권은 이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어떠한 모순도 집어삼키는 인종적 변증법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논리 구조 안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하층 계급은 기존 사회 질서를 심판하는 살아 있는 비판자이자, 해방의 척도요, 집단적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추대된다.
이제 이 서사를 대체할 만한 다른 역사적 해석은 정치적으로 용납되지 않으며, 엄밀히 말해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이 지배적 서사에 저항하는 행위 자체가 반미국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물론 '인종차별적'인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서사를 부인하려는 상징적 폭력은 도리어 체계적인 인종 억압이 실제로 존재함을 증명하는 꼴이 될 뿐이다. 따라서 이 논리에 반박하는 것은 말로만 부인할 뿐, 자신들이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무지몽매한 세력임을 몸소 입증하여 도리어 상대의 논리가 옳음을 확인해 줄 따름이다. 조직적인 사회 재교육 요구에 끝까지 저항하는 완고한 보수층의 모습은, 진보 세력에게 여전히 청산해야 할 적폐가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될 뿐이다.
가장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 자유주의적·진보적인 인종 변증법은 외부의 비판을 원천 봉쇄하는 동시에 논리적 일관성의 가능성마저 스스로 말살한다. 이들은 인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조작된 그 가상의 존재가 인종 간 폭력의 도구로 쓰인다고 동시에 주장한다. 인종을 인지하는 행위는 의무인 동시에 금기가 된다.
사회적 구제책을 마련하고, 증오 범죄를 찾아내고, 결과의 불평등을 분석하기 위해 인종적 정체성은 정밀하게 분류된다. 그리하여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나 '다양성 증진'과 같은 정책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연합(UN) 같은 기구를 앞세워 인종이란 무의미한 개념일 뿐이며, 실체도 없는 악의적인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극단적인 인종적 민감성과 완벽한 인종적 무감각이 동시에 요구되는 셈이다. 인종은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 모순에서 빠져나갈 길은 어디에도 없다.
보수주의는 정의상 변증법적으로 무능하며, 너무나도 무지한 나머지 이러한 모순들, 혹은 그들이 망상적으로 표현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자들의 인지부조화'를 자신들이 역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이러한 불일치를 기고만장하게 지적하는 보수주의자들은 현대 인문학 학위 과정의 결과물들을 단 한 번도 훑어보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 학문의 세계에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들을 애지중지 엮어내어 내부적으로 충돌하는 거대한 피해자 서사의 뗏목을 만들어내며, 그 불협화음 가득한 비탄이 지닌 급진적·진보적 가능성을 찬양하기 바쁘다.
논리적 불일치는 오히려 '대성당'을 움직이게 하는 연료가 되며, 더 적극적인 논쟁과 한층 더 높은 차원의 통합을 요구하는 명분으로 작용할 뿐이다. 통합을 지향하는 대중적 토론은 언제나 모든 상황을 좌파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동시킨다. 이는 이해하기 그리 어려운 논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주류 보수주의가 본질적으로 무용하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꼴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폭로는 그 누구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하지 않기에, 앞으로도 결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보수주의는 변증법, 즉 '동시적 모순'을 다룰 능력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보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정반대다). 보수주의는 불일치가 지닌 힘을 찬양하기는커녕, 마치 화석 전시회나 훌륭한 대조군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압축이 풀린 모순들을 차례차례 통과하며 비틀거릴 뿐이다. 민권 운동 시기에 "역사의 길목을 가로막고 서서 '멈춰라!'라고 외치던" 탓에 영원한 인종적 파멸의 형벌을 선고받았던 주류 보수(그리고 공화당)는 이후 방향을 급선회했다. 그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자신들의 정전(正典)을 구성하는 핵심 인물로 받아들였으며, "아메리칸드림에 깊이 뿌리내린 하나의 꿈"과 자신들을 조화시키고자 애쓰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일어서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는 자명한 진리라고 믿는다"라는 그 나라의 신조가 지닌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며 살아가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 위에서, 예전 노예들의 자손들과 예전 노예 주인들의 자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을 수 있으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불의의 열기로 가득 차고, 억압의 열기로 숨 막히는 미시시피주조차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모하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언젠가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의 본질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아가리라는 꿈입니다.”
헌법적·성서적 전통주의에 대한 킹 목사의 호소, 정치적 폭력에 대한 거부, 그리고 자유에 대한 거침없는 찬가에 매료된 미국의 보수주의는 점차 인종적 화합과 '피부색에 대한 편견 없이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그의 꿈을 자신들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자신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문서들의 진정한, 섭리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비록 이것이 주류, 대중, 그리고 보수 진영의 새로운 정통 교리로 자리 잡기는 했으나,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선을 잠재우기에는 너무나 늦게 공고화된 처방이었다. 결국 이 전략은 흑인 유권자층의 마음을 돌리는 데 거의 완전히 실패했으며, 알맹이 없는 형식주의에 불과하다는 좌파의 한층 더 거세진 조롱거리로 남게 되었다.
미국의 신조에 대한 킹 목사의 재진술은 너무나 설득력이 강했기에, 되돌아보면 정치적 주류 사회를 집어삼킨 그의 승리는 그저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보수주의가 건국의국의 신조에 대한 킹 목사의 재진술은 너무나 설득력이 강했기에, 되돌아보면 정치적 주류 사회를 집어삼킨 그의 승리는 그저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보수주의가 건국의 아버지들의 프리메이슨적 합리주의에서 벗어나 성서적 종교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그들의 신앙은 출애굽기라는 신화적 틀로 표현되는 흑인 미국인들의 경험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갔다. 그 경험 속에서 역사의 기본 골격은 예속으로부터의 탈출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모든 신의 자녀들인 흑인과 백인, 유대인과 이방인,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들이 함께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의 노랫말을 부를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마침내 자유를 얻었도다! 마침내 자유를 얻었도다!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를 얻었도다!'"
킹 목사 메시지의 천재성은 그 비범한 통합의 힘에 있었다.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 미국의 독립 전쟁, 남북 전쟁 직후 이루어진 가속 가택 노예제의 폐지, 그리고 민권 운동 시기의 열망들이 하나의 신화적 원형(原型) 속으로 압축되었다. 이는 미국의 신조와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저항할 수 없는 도덕적 힘뿐만 아니라 신의 섭리에 의해서도 추동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적 천재성의 진정한 척도는 그것이 통제하고 다스리는 복잡성에 있다. 노예 해방이라는 "기쁨의 새벽"이 찾아온 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킹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흑인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의 삶은 여전히 격리와 차별이라는 수갑과 사슬에 묶여 처참하게 불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은 물질적 풍요라는 광활한 대양의 한가운데에 홀로 떠 있는 빈곤이라는 외딴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시들어 가고 있으며, 자신의 조국에서 망명객 신세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핵심은 탈출이며, 독립 전쟁도 탈출이고, 지하철도나 자기해방, 도피, 망명의 모델이 보여주듯 노예제로부터의 해방 역시 탈출이다. 반면, ‘마법 같은 은유가 발휘하는 효과를 제외하면’ 격리라는 '수갑'에 채이고, 차별이라는 '사슬'에 묶이며, '빈곤이라는 외딴섬'에 갇히거나 '자신의 조국에서 망명객 신세'가 된다는 것은 탈출과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회적 통합과 수용, 공평하게 분배되는 풍요, 공적 참여, 혹은 동화(同化)로 향하는 탈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직 엄연한 현실과 운명에 인질로 잡힌 하나의 열망, 즉 꿈이 있을 뿐이다. 좌파와 반동적 우파가 똑같이 빠르게 간파했듯, 이 꿈이 형식적 평등에 대한 권리를 넘어 실질적인 정치적 구제의 영역으로 조금이라도 발을 들이는 순간, 그것은 보수주의 우파가 감히 넘볼 수도 없고 감당할 권리도 없는 꿈이 되어버린다.
존 더비셔가 내셔널 리뷰에서 해고당한 사건 직후, 《더 네이션(The Nation)》 블로그의 제시카 발렌티(Jessica Valenti)는 이 점을 명확히 짚어낸다.
“… 이것은 단순히 누가 어떤 글을 썼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수주의 노선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격렬하게 인종차별적인 정책들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인종차별이란 그저 겉으로 쉽게 식별할 수 있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표현되는 차별과 증오일 뿐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외국인 혐오적인 정책을 밀어붙이고 체제적 불평등을 지지하는 것 역시 엄연한 인종차별입니다.
결국 무엇이 더 큰 파급력을 가집니까? 더비셔 같은 일개 인종차별주의자입니까, 아니면 애리조나 주의 이민법입니까? 칼럼 한 편입니까, 아니면 투표권 억압입니까? 한 매체에서 인종차별주의자 한 명을 쫓아낸다고 해서, 유색인종을 불균형하게 처벌하고 차별하는 보수 진영의 핵심 의제라는 본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당신들은 구조적 불평등을 지지해 놓고선, 겉으로 인종차별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등을 두드리며 자축할 자격이 없습니다.”
'보수 진영의 핵심 의제'는 인종차별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몽상적(희망차면서도 논리적으로 불일치하는)일 수가 없다. 이는 인종 변증법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에 내재된 속성이다. 낮은 시간선호에 보상을 제공하고 충동성을 처벌하는, 즉 자본주의적 발전에 광범위하게 부합하는 정책들은 경제적으로 가장 기능하지 못하는 사회적 집단에 필연적으로 '결과적 불평등'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물론 변증법은 이러한 결과적 불평등이 지닌 인종적 측면을 강력히 강조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인적 자본 형성을 유도하는 인센티브를 인종차별적이라고 규탄하기 위해), 바로 그와 똑같은 관찰을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라 비난하며 격렬하게 부인할 것을 요구한다. 보수주의자들이 이러한 이중적인 구속을 정치적 기민함과 우아함으로 헤쳐 나갈 것이라 기대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20세기 후반의 역사를 통째로 까먹은 게 틀림없다. 예컨대, 《워싱턴 이그제미너(Washington Examiner)》의 파멸이 예정된 패배자이자 얼간이 보수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공포에 질린 채 목격하고 있었다.
“민주당 하원의원들은 정부 프로그램을 방어하기 위해 인종 문제를 다루는 법에 대한 교육을 이번 주에 받았습니다... 화요일 하원 민주당 의원 총회와 보좌진을 대상으로 진행된 발표 자료에 따르면, 민주당은 표면적으로는 가치 중립적으로 보이는 자유시장적 수사(修辭)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 찬 것으로 묘사하려 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더욱더 완벽한 연방에 대한 대안적 버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연방 자체가 대안들에 대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한때 그러한 대안들이 존재했을지도 모를 곳, 즉 자유가 여전히 '탈출'을 의미하고 변증법이 공간 속으로 해체되던 곳을 찾아 나서다 보면, ‘대성당’의 그림자 혹은 대성당의 중요한 타자(他者)로서 급조된 광대들의 공포의 집으로 빠져들게 된다. 우파는 결코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통일성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외부로부터 하나의 통일성을 부여받았다. 이를 반동적 백인의 정신병원이자 양성소인 ‘크래커 공장(Cracker Factory)’[1]이라 부르자.
제임스 C. 베넷(James C. Bennett)이 그의 저서 《영어권의 도전(The Anglosphere Challenge)》에서 영어권 세계의 주요한 문화적 특성들을 규명하고자 했을 때, 그 결과로 도출된 목록은 대체로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영어라는 언어 자체를 비롯해 관습법 전통, 개인주의, 비교적 높은 수준의 경제적·기술적 개방성, 그리고 중앙집권화된 정치 권력에 대한 유별나고도 단호한 경계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통합된 영토 내부에서 혁명적 전환을 꾀하기보다는 영토적 분열, 분리주의, 독립, 그리고 도피를 선택함으로써 의견 불일치를 '시간'이 아닌 '공간' 속에서 해결하려는 뚜렷한 문화적 경향일 것이다. 영어권 사람들은 의견이 충돌할 때 공간적으로 분리되는 길을 택하곤 했다. 그들은 정권 교체와 같은 식의 통합적인 해결 대신 정부 권한을 쪼개어 어느 한쪽도 독점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저마다 제각각 살아가는 방식을 추구하며, 독립된 자치정부들을 증식시키고 권력을 지방에 분산하며 정부 형태를 다양화했다. 오늘날 매우 약화된 형태일지라도, 사회적 분해를 지향하는 이러한 반(反)변증법적이고 탈(脫)통합적인 성향은 세계화주의(Globalism) 정치 프로젝트에 대한 완고하고도 속삭이는 듯한 적대감, 그리고 (분열적 의미에서의) 연방주의에 대한 흔적 기관 같은 끌림을 통해 여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쪼개지거나 도망치는 것, 이것은 모두 탈출이며 (회복 불가능한) 반(反)변증법이다. 이는 영어권 전통 내에서 자유를 길러낸 근본적인 원천이다. 만약 '크래커 공장'의 기능이 모든 탈출구를 차단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지을 수 있는 장소는 단 한 곳뿐이다. 바로 여기다.
지옥이나 아우슈비츠가 그러하듯, '크래커 공장'의 정문에도 단순한 슬로건 하나가 새겨져 있다. "탈출은 인종차별이다."
정확히 같은 맥락을 말해주는 ‘다인종 지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백인들의 이주 현상’을 뜻하는 '화이트 플라이트(White flight)'라는 표현이 그토록 빈번히 사용되면서도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단 한 번도 규탄받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표현은 다른 경우였다면 격렬한 분노의 발작을 일으켰을 법한 '인종적 통계의 일반화'를 노골적으로 담고 있음에도 말이다.
'낮은 시간선호'가 결코 특정 인종만의 전유물이 아니듯 '화이트 플라이트' 역시 본질적으로 '백인'만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친 일반화의 둔감함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이유는, 그것이 크래커 공장의 구조를 지탱해 주기 때문이며, 고전적(혹은 소극적) 자유를 원죄(인종적 죄책감)와 혼동하도록 만드는 필수불가결한 장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곳에 절대로, 결단코 가서는 안 된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갈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역주 -
[1] Cracker Factory: 닉 랜드가 주류 진보 엘리트 체제('대성당')에 의해 규정된 우파의 생태계를 냉소적으로 풍자하기 위해 사용한 중의적 슬랭이다. 미국에서 '크래커(Cracker)'는 남부의 가난하고 거친 백인 하층민을 비하하는 멸칭이며, '크래커 팩토리(Cracker Factory)'는 영어 속어로 '정신병원'을 뜻한다. 즉, 좌파 기득권이 우파를 '못 배우고 폭력적인 미치광이 집단'으로 낙인찍어 결속시켰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 압박 속에서 역설적으로 탄생한 반동적 우파 세력을 기득권이 조롱하는 복합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 4d부: 기묘한 결합
닉 랜드(Nick Land), 2012년 6월 15일
‘크래커(Cracker)’라는 단어가 특정 인종을 비하하는 말로 쓰이게 된 기원은 아득하고 불분명하다. 이 말은 이미 18세기 중반, 주로 켈트족 혈통의 가난한 남부 백인을 겨냥한 멸칭으로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수수를 빻는 사람을 뜻하는 ‘콘크래커(corn-cracker)’나 농담을 뜻하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단어 ‘크랙(crack)’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종과 문화, 계급적 특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단어의 풍부한 의미적 맥락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흑인 비하 발언인 ‘N 단어(Nigger)’와 비교할 만하다. 두 단어 모두 누구나 알지만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금기된 진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단어는 사람들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더 자극받고 활기를 얻는다는 왜곡된 진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에 집착하며, 계몽주의적 인구 관리가 규정하는 보편적 범주에 완강히 저항한다. 진보라는 톱니바퀴의 회전을 가로막는 모래알, 그것이 바로 크래커다.
그러나 이 멸칭이 가진 가장 흥미로운 매력은 완전히 우연히, 혹은 신비로운 계시처럼 찾아왔다. 크래커, 즉 ‘깨부수는 자들’은 암호와 금고, 유기 화합물 등 굳게 닫히고 결합된 모든 시스템을 해체하며, 이는 결국 지정학적 균열로 이어진다. 이들은 파국과 분열, 혹은 연방 탈퇴를 예고하며 영어권 역사에서 저주받은 해체주의적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언어의 도약과 어긋남 속에서도 이 반항적인 크래커의 모습이 여전히 길들지 않은 남부, 즉 미국의 영토 확장이라는 ‘명백한 운명’에 복종하지 않는 남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단어의 의미는 지극히 복잡하고 다루기 힘든 본질로 순식간에 되돌아간다.
모순은 해결을 요구하지만, 균열은 그저 계속해서 넓어지고 깊어지며 번져나갈 뿐이다. 일이 어그러지고 무너져 내려도 상관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크래커의 정서다. 갈라서면 그만인데 굳이 합의에 도달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고집스러움이 극에 달하면 애팔래치아산맥 오솔길 끝자락, 허름한 판잣집이나 녹슨 트레일러에 사는 전형적인 시골뜨기의 모습이 된다. 모든 경제 거래는 현금이나 밀주로만 이루어지고, 공무원과의 소통은 장전된 산탄총 총구를 사이에 두고 진행되며, 시대를 초월한 반(反)정치적 지혜는 "내 땅에서 당장 나가"라는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요약되는 삶이다.
통합을 위한 논쟁이나 변증법을 이렇듯 냉소하는 태도는 영어권 중심의 세계사, 즉 ‘미국 북부 중심의 복음주의 청교도주의’의 주류 관점에서 볼 때 문화적 교양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지능마저 떨어지는 행위로 비친다. 사회 구성주의적 가치를 철저히 신봉하는 이들조차 크래커의 이 반항적인 난폭함 앞에서는 즉각 완고한 유전 결정론적 같은 지능 측정 기준으로 되돌아간다. 사회정치적 진보라는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그 진보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고함은 그저 지적 장애의 명백한 증거로 보일 뿐이다.
고정관념이 대개 높은 통계적 진실성을 지닌다는 점을 감안하면, 크래커 집단이 여러 세대에 걸친 역도태 압력으로 인해 백인 지능지수(IQ) 정규분포 곡선의 왼쪽에 치우쳐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찰스 머레이의 주장대로 미국 사회의 능력주의적 선별 기능이 꾸준히 정교해졌고, 여기에 재산, 사회적 지위, 계급, 직업, 가정 환경, 학벌 등 같은 계층끼리 끼리끼리 결혼하는 동질혼까지 결합해 계급 차이가 유전적 카스트로 고착화되었다면, 크래커 계층의 인지 능력이 눈에 띄게 높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 고정관념을 끈질기게 파고들다 보면 다소 당혹스럽고 흥미로운 의문이 생긴다. 동질혼이라니, 사촌끼리 결혼하는 크래커 사회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한단 말인가? 그렇다, 바로 그 점이다. 북서유럽의 하지날 선(Hajnal Line) 바깥쪽 인구 집단에서 유래한 전통적인 크래커의 친족 패턴은, 족외혼(族外婚)을 따르는 일반적인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WASP)의 규범에서 확연히 벗어나 있다.
이 주제에 있어서는 지치지 않고 연구를 이어온 블로거 'hbdchick'의 글이 핵심적인 자료다. 그녀는 방대하고 기념비적인 일련의 포스팅을 통해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의 이론적 도구를 활용하며 본성과 문화가 교차하는 접경지대를 탐구한다. 친족 구조, 포괄 적응도 계산에서 요구되는 차별화,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이타주의 진화심리학의 독특한 민족적 특성이 그 탐구 대상이다.
그녀는 특히 사촌 간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함으로써 의무적 외혼제(外婚制)가 1,6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북서유럽 역사의 특이성에 주목한다. 외혼(外婚)을 향한 이러한 독특한 성향이 다양한 생물·문화적 특성을 매끄럽게 설명해 준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가족 중심의 이타주의보다 호혜적 이타주의가 독보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이다. 이는 강한 개인주의, 핵가족, 친족 관계가 배제된 '법인성(法人性)' 제도에 대한 선호, 낯선 이들 사이의 고도로 발달한 계약 관계,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족벌주의와 부패, 그리고 부족적 결속 없이도 유지되는 견고한 사회적 응집력 등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반면 근친혼은 부족주의적 집단주의와 대가족에 대한 충성, 명예를 중시하는 문화, 외지인 및 비인격적 제도에 대한 불신을 자극하는 선택 환경을 조성한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씨족적' 특성은 유럽 중심의 근대성이 지향하는 핵심 가치와 껄끄럽게 충돌하며, 그 결과 원시적인 '외국인 혐오'나 '부패'라는 비난을 받기 일쑤다.
씨족적 가치는 당연히 씨족 사회에서 길러진다. 사촌 간의 결혼이 지속되었던 영국 변방의 켈트족 거주지나 국경 지대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에서는 근친혼과 결합된 사회경제적, 문화적 양식, 특히 농업보다는 유목 중심의 생활 방식과 피의 복수극으로 치닫는 극단적인 폭력 성향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 분석은 ‘백인 정체성’이 품은 핵심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근대성의 도덕 질서를 형성하고, 부족주의에서 벗어나 호혜적 이타주의로 나아가게 한 유럽인 특유의 민족적 특성은 외혼이라는 독특한 유산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외혼이라는 유산은 본질적으로 자민족 중심적인 결속력을 좀먹는 성질을 지닌다. 다시 말해, 민족적 집단 성향이 거의 부재하다시피 한 취약함이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그 집단을 민족적으로 근대화하고 친족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대규모 제도를 구축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다. 결국 이러한 특성이 근대성의 역동적 흐름 속에서 객관적인 우위와 특권을 누리게 한 셈이다.
이러한 모순은 나치즘와 네오나치즘으로 대변되는 극단적인 형태의 유럽 자민족 중심 부흥 운동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며, 이는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다. 유독 두드러지는 '동족 배반' 성향이야말로 자기 인종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 되는 순간, 독자적인 인종 우월주의 정치가 설 자리는 논리적 심연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물론 대규모 소요 사태를 일으킬 기회야 여전하겠지만 말이다.
나치는 정의상 인종적 순결이라는 제단 위에 근대성을 기꺼이, 그리고 열렬히 제물로 바치고자 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는 근대화 경쟁에서 뒤처져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결과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혹은 그 비극적 결말을 자처하는 꼴이다. 정체성 정치는 본질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패배자들의 전유물일 뿐이다. 오직 좌파적 관점에서만 작동하는 기생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근친혼은 근대적 권력을 획득하는 데 구조적으로 역행하므로, 인종적 '초인(超人)'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어쨌든 나치라는 존재가 아무리 흥미로울지라도, 이들이 크래커 문화의 역사나 방향성을 이해하는 신뢰할 만한 열쇠가 될 수는 없다. 그저 백인 정체성 정치의 체계적 구축과 활용이 지닌 논리적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이마에 하켄크로이츠 문신을 새긴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미국 남부의 악명 높은 가문 간 결투인 '햇필드(Hatfield) 가문과 맥코이(McCoy) 가문과의 싸움'은 게르만 전사들의 결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파슈툰 부족의 유혈 복수극에 가깝다.
반동적 백인의 정신병원이자 양성소인 크래커 공장(Cracker Factory)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결합은 완전히 결이 다르며, 훨씬 더 당혹스럽다. 초(超)계약주의적 시장화를 옹호하는 세련된 세계시민주의자들과 낭만적 전통주의자, 배타적 민족주의자, 그리고 남부 연합의 ‘잃어버린 대의’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한데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 교훈을 탐구하기에 앞서, 이 얽힘이 지닌 온전하고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기괴함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핵심만 추려낸 무작위적인 데이터 몇 가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미제스 연구소(Mises Institute)는 앨라배마주 오번에서 설립되었다.
· 1980년대 발행된 론 폴(Ron Paul)의 뉴스레터에는 존 더비셔(John Derbyshire) 풍의 뉘앙스가 짙게 풍기는 언급들이 담겨 있다.
· 존 더비셔는 론 폴을 열렬히 지지한다.
· 머레이 로스바드(Murray Rothbard)는 인간 생물학적 다양성(HBD) 이론을 옹호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 루 록웰 닷컴(lewrockwell.com)의 주요 기고가 중에는 토머스 J. 디로렌조( Thomas J. DiLorenzo)와 토머스 우즈(Thomas Woods)가 있다.
· 톰 파머(Tom Palmer)는 루 록웰과 한스 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를 혐오한다. 그들이 "지옥의 문을 열어젖혀 가장 극단적인 우익 인종주의자, 민족주의자, 그리고 온갖 괴짜들을 환대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 남부빈곤법률센터(SPLC)가 지정한 ‘급진 우파’ 감시 명단의 20%는 자유지상주의자와 헌법주의자(척 볼드윈(Chuck Baldwin), 마이클 볼딘(Michael Boldin), 톰 드위스(Tom DeWeese), 알렉스 존스(Alex Jones), 클리프 킨케이드(Cliff Kincaid), 엘머 스튜어트 로즈(Elmer Stewart Rhodes) 등)가 차지하고 있다.
이 정도면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겠지만) 논의를 이어가기에 충분할 듯하다. 다소 의도적이고 거칠며 편견이 섞인 방식으로 추려낸 이 사실들은, 단 하나의 근본적인 논지를 직관적으로 뒷받침한다. 그것은 바로 근본적인 사회·역사적 동력들이 자유지상주의를 ‘크래커‘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hbdchick‘의 잠정적인 연구 결론을 틀로 삼아 받아들인다면, 자유지상주의와 신(新)남부연합주의라는 이 기묘한 결합의 어색함이 즉각 수면 위로 드러난다. 외혼의 정도에 따라 정의되는 생물-문화적 축 위에 두 사상을 올려놓으면, 양자 사이의 공통분모나 근접성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한쪽 극단에는 철저히 경제적 형태의 자발적 교환 네트워크에만 초점을 맞추는 극단적 개인주의 교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협상 불가능한 사회적 유대의 존재 자체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으로 악명 높다. 반면 다른 쪽 극단 근처에는 지역에 대한 애착과 대가족, 명예, 상업적 가치에 대한 경멸, 외지인을 향한 불신이 가득한 풍요로운 문화가 놓여 있다. 유동적인 자본주의의 정제된 합리주의가 전통적인 위계질서 및 양도 불가능한 가치와 나란히 배치되는 셈이다. 이탈을 절대적인 최우선 과제로 삼는 사상이, 이탈이라는 개념 자체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민속적 관습들과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하지만 이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갈수록 거부하기 힘든 명확한 결론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연방 탈퇴라는 전망을 제외하면, 영어권 세계에서 자유의 미래는 없다는 사실이다. 다가올 파국과 분열만이 유일한 탈출구다.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 4e부: 상호적으로 교차된 역사
닉 랜드(Nick Land), 2012년 7월 3일
“민주주의는 자유의 적이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자유를 확대하기보다 억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며, 애초에 고쳐 쓸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사회주의가 그렇듯 민주주의 역시 태생부터 고장 나 있다. 이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해체하는 것뿐이다.” — 프랑크 카르스텐(Frank Karsten)
“과학사학자인 더그 포스나우(Doug Fosnow)는 미국의 '레드 스테이트(공화당 우세 지역)' 카운티들이 '블루 스테이트(민주당 우세 지역)'로부터 분리 독립해 새로운 연방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중은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화당 우세 지역끼리만의 연방이 구성되면 해안선을 거의 차지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더그는 정말 이런 분리 독립이 실현 가능하다고 믿었을까? 그는 웃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조만간 터질 것 같은 인종 전쟁보다는 차라리 분리 독립이 백배 낫다고 덧붙였다. 끔찍한 비극보다 조금이라도 덜 끔찍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 존 더비셔(John Derbyshire)
“따라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자유지상주의적 사회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민주주의를 폐지하고 모든 세금과 법률을 없애기 위해 대중 과반수를 설득해 찬성표를 던지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중은 늘 우둔하고 나태한 데다, 앞서 설명했듯 민주주의가 도덕적·지적 타락을 부추긴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그저 허황된 상상에 불과해 보인다. 투표할 '권리'에 길들어 타인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약탈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그 기회를 포기하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보면 사회 혁명의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분리 독립을 아래로부터의 혁명 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요소로 바라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전히 벅찬 과제일지언정, 자유지상주의 혁명이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 한스 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
거시적 관점에서 근대성이란 하나의 유기적인 추세로 정의되는 사회적 조건이다. 이는 인구 증가율을 앞지르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으로 요약되며, 마이너스 성장과 빈곤이 반복되던 '맬서스 트랩'이라는 역사적 굴레를 마침내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이러한 양적 성장 패턴만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면, 근대성은 크게 정반대의 두 가지 요소로 나뉜다. 한편에는 과학과 상업을 바탕으로 성장을 가속하는 기술-산업적 기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민주적 권력을 쥐고 이권을 챙기려는 특수 이해관계자들이 경제적 성과를 가로채 성장을 가로막는 사회-정치적 역행, 즉 '민주주의 경화증(demosclerosis)'이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산업혁명을 통해 인류에게 선사한 풍요를, 성숙기 단계에 접어든 현대 자유주의가 비대해진 복지국가라는 암세포를 통해 다시 앗아가는 꼴이다. 이를 추상적인 기하학 그래프로 표현하면 폭발적으로 상승하다가 스스로 한계에 부딪혀 꺾이는 S자 곡선을 그리게 된다. 결국 해방의 드라마로 시작했던 근대성은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즉 하나의 고유하고 실재하는 현상으로 바라본 근대성은 수학적인 순수성을 흐리고 제한하는 민족적·지리적 특성을 지닌다. 근대성은 특정 지역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뻗어나갔으며, 지구상의 다양한 민족을 유례없이 새롭고 복잡한 관계 속으로 몰아넣었다. 기존의 맬서스적 한계를 넘어서고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하며 새로운 인구학적 추세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 관계들은 분명 '근대적'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결합한 것은 추상적인 경제적 기능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집단이었다. 따라서 겉보기에 근대성이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 그들을 대상으로(혹은 그들에 맞서) 벌인 일이었다.
근대성이 성장의 한계에 부딪혀 S자 곡선의 하향선으로 접어든 20세기 초에 이르자, 근대성 자체의 보편적 속성(자본주의적 소외)에 대한 저항은 그 구체적인 특성(유럽 제국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반대와 사실상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로 뒤엉켰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 근대 문명을 주도했던 핵심 민족·지리적 집단의 자의식은 인종적 공포로 치달았고, 이 광기의 흐름은 제3제국(나치 독일)의 발흥과 파멸에 이르러서야 겨우 멈추게 되었다.
근대성이 태생적으로 타락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면, 앞으로 펼쳐질 앞날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집약된다. 이 세 갈래 길은 서로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완벽한 대안 관계라고 볼 수는 없지만, 도식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는 각기 독립된 시나리오로 제시하고자 한다.
(1) 근대성 2.0. 전세계적인 근대화가 서구 중심의 기존 체제가 지닌 퇴행적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족적·지리적 핵심부에서 다시금 활력을 얻는 시나리오다. 물론 이 새로운 중심지 역시 먼 미래에는 결국 파멸로 향하는 장기적 추세와 마주하겠지만 말이다. 근대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고무적이고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없다. 중국이 지금의 궤도를 어느 정도 유지하기만 해도 이 시나리오는 확실히 실현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도는 자국 고유의 민주주의 경화증이 너무 깊어져 경쟁 상대로 보기 어렵다.)
(2) 포스트모더니즘. 이는 사실상 맬서스적 한계가 다시 잔인하게 지배하는 새로운 암흑시대나 다름없다. 이 시나리오는 '근대성 1.0'이 지닌 병폐가 이미 전 세계로 너무 깊이 퍼진 나머지, 지구의 미래 전체가 그 병폐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만약 대성당 체제가 '승리'한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바로 이것이다.
(3) 서구의 르네상스. 다시 태어나려면 먼저 죽어야 하므로, '강제 초기화'는 강도가 세면 셀수록 좋다. 전면적인 위기와 해체야말로 부활을 위한 최선의 기회를 제공한다. (가장 현실적으로는 첫 번째 시나리오의 하위 흐름 속에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경쟁은 언제나 유익한 법이기에, 향후 세계사의 중심 도로가 '근대성 2.0'이 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하더라도 서구의 르네상스라는 양념이 약간은 곁들여져야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서구는 과학, 기술, 사업 혁신을 제외하고 지난 한 세기 넘게 지속해 온 거의 모든 행보를 멈추고 되돌려야만 한다. 하지만 이 중 그 어떤 것도 실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해 보이므로, 지금은 철저히 가상의 시나리오라는 전제하에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편이 현명하다.
(1) 대의 민주주의를 입헌 공화정(혹은 이보다 더 극단적인 반(反)정치적 통치 매커니즘)으로 대체하는 일.
(2) 정부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정부의 역할을 아무리 많아봐야 핵심 기능만 수행하도록 엄격히 제한하는 일.
(3) 금본위제와 같은 태환권(귀금속 주화 및 금괴 보관증) 제도를 부활시키고 중앙은행을 폐지하는 일.
(4) 국가의 자의적인 통화 및 재정 정책 권한을 박탈함으로써 실천적 의미의 거시경제를 폐지하고, 자율적인 시장 경제(혹은 '카탈락시(Catallaxy)'[1])를 해방하는 일. (이 조항은 앞선 2번과 3번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므로 중복에 가깝지만, 진정한 종착지라는 점에서 강조할 가치가 충분하다.)
여기에 덧붙일 제안은 더 많다. 정치의 영역을 줄이자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문명사적 대재앙이 닥치지 않는 한 이 중 어느 것도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은 이미 명백하다. 정치인에게 스스로 권력을 제한하라고 요구하는 것부터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그보다 온건한 방식으로는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조차 뗄 수 없다. 게다가 이것은 가장 넓거나 깊은 문제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정부 권력을 제한하는 정당한 절차적 장치로 시작할지 모르나, 머지않아 체계적인 약탈 문화라는 전혀 다른 괴물로 걷잡을 수 없이 변질된다. 정치인들이 나랏돈으로 표를 사는 법을 터득하고, 유권자들이 약탈과 뇌물 수수 체제에 길드는 순간, 민주주의 프로세스는 집단적 이익을 위해 함께 도둑질을 일삼는 이익 집단, 즉 맹커 올슨(Mancur Olson)이 말한 '분배 연합'을 형성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 심각한 점은 대중이 그리 똑똑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지배층 세력이 자행하는 약탈의 규모는 대중의 감시망에 걸려드는 어설픈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고, 빚을 쌓아가며, 성장을 가로막고, 기술과 산업 발전을 지체시키는 방식으로 미래를 약탈하는 짓은 교묘하게 감추기가 아주 쉽다. 그래서 늘 대중의 확실한 지지를 받는다.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비극인 이유는 대중에게 스스로를 파멸시킬 무기를 쥐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은 언제나 그 무기를 기꺼이 움켜쥐고 휘두른다. 세상에 공짜를 거절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공짜 점심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결국 철저한 문화적 파멸만이 민주주의가 마주할 필연적인 결말이다.
근대성 1.0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면, 미국의 역사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서사가 된다. 유대-기독교 전통의 거대한 문화적 동력은 워싱턴 D.C.에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며, 대성당 체제라는 세속화된 신(新) 청교도주의로 정점을 찍는다. 구세주적 혁명에 대한 사명으로 무장한 통치 기구는 복음주의적 국가 체제로 공고해진다. 이 국가는 평등과 인권, 사회 정의,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보편적 인류애에 기반한 신세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권한을 부여받는다. 대성당 체제가 지닌 절대적인 도덕적 확신은 억제되지 않는 중앙집권제 권력을 열렬히 추구하도록 정당성을 부여하며, 이 권력은 내적인 침투력과 외적인 확장력 모두에서 한계 없는 팽창을 지향한다.
마녀사냥꾼들의 후예인 그 자신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험악한 표정으로 도덕을 부르짖는 이 광신도 무리가 유례없는 세계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는 순간, 대중 민주주의는 탐욕스러운 부패의 심연으로 끝없이 추락한다. 5년마다 미국은 스스로를 약탈하고, 그 장물을 표와 맞바꾸며 울타리를 새로 친다. 민주주의라는 것 참 쉽다. 그저 나에게 가장 많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이에게 표를 던지면 그만이다. 바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바보들을 좋아하며,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하는 척하면서 더 많은 바보를 양산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퇴행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반동주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은밀한 근거가 된다. 사회정치적 '진보'의 중대한 고비마다 서구 문명이 전면적인 파멸을 향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나아갔음을 감안할 때, 지나온 발자국을 되짚어간다는 것은 곧 약탈의 사회로부터 자립과 정직한 노동 및 교환, 선동 정치 이전의 학문, 그리고 시민의 자율적 조직화가 살아 숨 쉬던 옛 질서로의 복고(復古)를 의미한다.
이러한 반동주의적 비전이 지닌 매력은 미국 정치사가 재앙의 행로를 걷고 있음을 똑똑히 목도한 상당수 소수파(티파티(Tea Party)[2] 운동가들) 사이에서 18세기의 복식과 상징, 그리고 헌법 문서들이 다시 유행하는 현상을 통해 분명하게 증명된다.
머릿속에서 '인종'이라는 경고음이 벌써 울리기 시작했는가? 만약 울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상상 속에서 발걸음을 2008년 이전으로 돌려보라. 양심의 가책이라는 집요한 속삭임은 케냐 출신 혁명가들이나 흑인 마르크스주의 교수들을 향한 당신의 편견을 이미 다그치고 있을 것이다. 후진 기어를 더 넣어 '위대한 사회'와 민권 운동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경고음은 비명에 가까운 고음으로 치솟는다.
이쯤 되면 미국 정치사가 국가의 '역량'과 '정당성'이라는, 서로 맞물린 두 개의 궤도를 따라 전진해 왔음이 아주 명백해진다. 국가의 규모와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곧 국가가 품은 목적의 신성함에 도전하는 일이다. 동시에 그 신성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 어떤 자원이든 지배하고, 그 어떤 법적 규제든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도덕적·정신적 필연성을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는 이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국가의 거대한 덩치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대물림된 ‘사실상 무한한’ 인종적 죄책감의 막대함에 무감각하다는 증거로 취급된다. 아울러 쇠락해 가는 근대성이 남긴 유일한 정언명령, 즉 '정부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신조(信條)를 거스르는 꼴이 된다.
만성적인 국가 개입주의가 낳은 병리적 결과들이, 애초에 해결하려던 원래의 문제들을 대체해 버린 지 오래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민주주의라는 종교가 지배하는 시대와는 도저히 불화할 수밖에 없기에, 현실 세계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갖지 못할 뿐이다.
좌파 진영에서조차 진지하게 깊이 고민한 끝에, 정부의 비대화와 중앙집권화를 추동한 핵심 원동력이 '선행을 베풀겠다는 불타는 열망'이었다고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애당초 의도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과 정당성이 교차하는 순간, 과거 흑인들이 겪은 고난을 성역화함으로써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거대한 정부’를 향해 도덕적 정당성과 면죄부를 부여하게 된다. 그 순간 대중의 합리적인 의구심은 완전히 마비된 채, 위대한 진보주의 신화가 그 자리를 독점하고 만다.
정부가 더 가혹하게 개입하여 더 많은 일을 해나가는 것 외의 유일한 대안은, 저들이 또 다른 흑인을 사적 제재하도록 방관하며 무책임하게 서 있는 것뿐이라는 식이다. 이 터무니없는 명제야말로 미국 진보주의 교육이 가진 핵심 내용의 전부다.
국가의 역량과 목적이라는 두 개의 역사적 궤도는 일종의 '정치적 프레임 해석에 대한 규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규약 안에서는 정부 권력을 제한하자는 그 어떤 제안도 인종적 정의(正義)를 악의적으로 방해하는 행위로 해석된다.
이러한 프레임 해석 시스템은 너무나도 매끄럽게 작동한 나머지, ‘복지’, ‘결사의 자유’, ‘주(州)의 권리’ 같은 지극히 평범한 정치 용어들을 초당파적으로 통용되는 ‘인종차별적 의도를 숨겨둔 암호이자 정치적 은어’로 둔갑시킨다. 그 결과, 주요 정치적 차원(좌우 대립)에서 이뤄지는 뜻이 통하는 모든 발언은 인종이라는 프레임에 반쯤 절여진 채 공식적인 의미와 ‘인종주의’라는 낙인이라는 ‘두 가지 잣대’로 평가받으며 이중적으로 해석된다.
그렇기에 (진보파들의 눈에) 과거로 회귀하자는 반동주의적 주장은, 마치 끔찍한 인종차별 시절로 돌아가자는 듯한 고약한 악취를 풍기기 마련이다.
…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파멸적인 20세기에서 발을 빼기도 전에 이미 벌어진 일이다. 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국가에 관한 실무적 문제를 (백인·흑인 간의) 인종적 변증법과 뗄레야 뗄 수 없게 상호적으로 결합시키고, 이후 모든 정치적 적대감과 정치적 수사(修辭)의 중심 교차로를 깔아놓은 것은 민권 운동 시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승자의 용어로는 '미국 남북내전', 패자의 용어로는 '주(州)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 치명적인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첫걸음은, 주류 국가주의자들의 설명과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설명 사이의 어색한 대각선을 따라 구불구불 나아가는 것이다. 1860년대 초 미국이라는 국가를 집어삼킨 그 거대한 불길은 '노예 해방'에 관한 것이자 '주(州)의 권리'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적으로 그러했으나 배타적으로 그러하진 않았다. 두 가지 '명분' 중 그 어떤 것도 다른 하나로 환원될 수 없으며, 전쟁이 남긴 영속적인 모호함을 완전히 지워버릴 만큼 결정적이지도 않았다.
승리한 북부 연방의 중앙집권적 국가 권력 공고화를 기꺼이 찬양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수없이 많고, 대칭적으로 남부 주들의 노예제를 옹호하는 (훨씬 소수의) 신(新)남부연합주의(Neo-Confederate) 변절자들이 존재하지만, 이처럼 갈등 없는 확신에 찬 태도들은 북부의 명분(노예 해방)과 남부의 명분(주의 권리)이라는 두 가지 명분이 복잡하게 뒤엉켰던 전쟁이 남긴 역동적인 문화적 유산을 결코 포착하지 못한다.
그 전쟁은 하나의 거대한 매듭이다. 해방과 독립이라는 두 갈래로 자유의 개념을 사실상 분리해 버린 뒤, 푸른 제복과 회색 제복의 군대를 동원해 5년간의 대학살 속에서 서로를 향해 돌진하게 함으로써,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자유라는 가치는 전장에서 산산조각이 나도록 운명 지어졌다.
북부 연방의 승리는 '해방'으로서의 자유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지배할 것임을 결정지었고, 향후 대성당 체제가 도래할 것임을 확실히 보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두 번째 분리독립 전쟁을 무력으로 짓밟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치렀던 첫 번째 독립전쟁(1776년의 미국 독립혁명)을 스스로 조롱거리로 만드는 꼴이었다. 만약 노예제라는 악습이 남부의 독립전쟁이 지닌 정당성을 박탈해 버린 것이라면, 1776년의 혁명 정신에서 과연 무엇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결국 북부 연방이 내세운 명분의 도덕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국의 아버지들을 '정치적으로 불법적인, 백인 가부장제 노예주'로 재규정해야만 했다. 이 시점을 계기로 미국의 역사는 진보주의 교육과 문화 전쟁이라는 거대한 불길 속으로 태워져 들어갔다.
만약 독립이 노예주들의 이데올로기라면, 해방은 독립의 체계적인 파괴를 요구한다. 이렇듯 두 가지 명분이 교차된 역사 속에서, 자유의 실현은 자유의 폐지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 역주 -
[1] 카탈락시(Catallaxy):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 등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이 제시한 개념으로, 그리스어 '카탈라테인(Katallattein, 교환하다·원수를 친구로 만들다)'에서 유래했다. 정부가 인위적인 목표(물가 안정, 고용 창출 등)를 정해 통제하는 '계획 경제'와 달리, 구체적인 공통 목표 없이도 시장 참여자들이 자발적인 교환과 가격 기구를 통해 스스로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자생적 시장 질서’를 뜻한다.
[2] 티파티(Tea Party): 2009년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큰 정부 정책(대규모 경기부양책, 건강보험 개혁안 등)과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대하며 분출한 미국 보수·우파 진영의 대중적 풀뿌리 정치 운동. 명칭은 1773년 영국의 부당한 과세에 저항해 미국 독립 혁명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에서 따왔다. 이들은 미국 건국 초기의 '작은 정부', '철저한 재정 보수주의', '자유시장 경제', '헌법주의(원래 취지대로의 헌법 수호)'를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 4f부: 생명공학적 지평선에 다가서다
닉 랜드(Nick Land), 2012년 7월 20일
길었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이제 서둘러 결론을 향해 나아갈 때다. 지금까지의 핵심 주제는 마인드 컨트롤, 즉 생각의 억압이었다. 현대 서구 사회를 지배하며 멘시우스 몰드버그가 '대성당'이라 명명한 언론·학계 복합체가 바로 이를 주도해 왔다. 억눌린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그늘진 곳으로 숨어들어 때로는 괴물로 변하기도 한다. 오늘날 대성당의 억압적인 정통성이 다방면으로 흔들리면서, 마침내 괴물들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대성당의 핵심 교리는 '표준 사회과학 모델(SSSM)' 또는 '백지설(白紙說, theory of tabula rasa)'으로 정형화되어 왔다. 이는 인류에 관한 모든 합당한 질문은 문화의 영역으로 한정된다는 믿음으로,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의 인류학을 통해 그 기틀이 완성되었다. 이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허용할 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타고난 특성이나 집단 간의 생물학적 차이를 파고드는 질문은 그 자체가 문화적 왜곡이거나, 심지어 하나의 병리 현상으로 취급된다.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은 오직 '사회화'의 실패뿐이다.
대성당은 일관된 이념적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적을 걸러내기 때문에, 표준 사회과학 모델에 대한 객관적인 과학적 평가는 쉽게 날 선 적대감으로 변질되곤 한다. 사이먼 블랙번(Simon Blackburn)이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저서 《빈 서판》을 평론하며 지적했듯, "타고난 본성과 길러지는 사회화 사이의 이분법은 순식간에 정치적, 감정적 문제로 번진다. 거칠게 말해 우파는 유전자를 좋아하고 좌파는 문화를 좋아한다."
상호적인 증오가 극에 달하면 유전적 결정론과 사회구성주의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양측 모두 극단적으로 축소된 인과관계 모델에 갇혀 있다. 한쪽은 본성이 문화로 발현된다고 보고, 다른 쪽은 문화가 본성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구성물') 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입장 모두 미완성의 회로 속에서 서로 반대편에 갇힌 채, 세상을 기술-과학적이고 산업적으로 다루는 행위인 '실천적 자연주의의 문화'를 구조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
지식을 습득하고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의 역동적인 회로를 이룬다. 이는 기술-과학이라는 통합된 체계를 만들어내며, 이론과 실천의 영역으로 명확히 나눌 수 없다. 과학은 광범위한 산업 공정 속에서 실험 기술과 더욱 정교한 장비의 생산을 거치며 순환적으로 발전한다. 과학의 진보는 곧 기계의 개량이다. 이처럼 (현대) 과학이 본질적으로 지닌 기술적 성격은 문화가 복합적인 자연의 힘으로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과학은 이미 존재하는 자연적 상황을 그대로 대변하지도, 그저 사회적 표상을 만들어낼 뿐인 구성물도 아니다. 오히려 자연과 문화는 자연의 가장자리에서 역동적인 회로를 형성하며 운명을 결정짓는다.
현대화의 자기강화적 전제에 따르면,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변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물학과 의학이 함께 진화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몰려오는 과학적 발견의 파도로 표준 사회과학 모델을 철저히 무너뜨린 바로 그 역사적 역동성은, 동시에 생명공학을 통해 인간의 생물학적 정체성을 유동적으로 변화시킨다. 우리가 진정 어떤 존재인지 알아가는 과정과, 정밀하고 과학적인 정보에 기반해 변형 가능한 기술적 우연이자 '기술적 가소성(可塑性)'을 지닌 존재로 스스로를 재정의하는 과정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인류'는 기술의 영역에 흡수되면서 비로소 이해 가능한 대상이 되며, 예컨대 게놈의 정보 처리를 통해 유전 정보를 읽어내는 일과 편집하는 일은 완벽하게 하나로 맞물리게 된다.
인류를 삼켜버릴 듯 가속하는 이 회로를 묘사하는 것은, 곧 우리의 '생명공학적 지평선'을 정의하는 일이다. 이는 한 집단이 자신들의 기술과 더 이상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본성과 문화가 결정적으로 융합되는 임계점을 뜻한다. 이러한 현상은 유전적 결정론도 아니고 사회구성주의도 아니지만, 만약 두 이론이 실재하는 무언가를 가리키고자 했다면 바로 이를 일컬었을 것이다.
이 증후군을 생생하게 예견한 인물이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Butler)다. 그녀의 《제노제네시스(Xenogenesis)》 3부작은 생명공학적 지평선을 넘어선 인류 이후의 집단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소설 속 '유전자 무역상'인 오안칼리족(Oankali)은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적용하는 생명공학 프로그램과 분리될 수 없는 정체성을 지닌다. 이들은 단일한 통합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집단을 상업적으로 획득하고, 산업적으로 생산하며, 성적(性的)으로 재생산한다. 오안칼리족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와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행동하는가 하는 문제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만들어가기에 그들의 본성이 곧 문화이고, 문화가 곧 본성이다. 그들의 존재는 정확히 그들의 행동 그 자체다.
서구의 전통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다가오는 생명공학적 지평선을 (부정적인 의미의) 신학적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은 온당한 진단이다. 기술-과학을 통한 자가-생산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지닌 고정되고 신성시된 본질을 정면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는 5억 년 전 진핵생물이 출현한 이래 자연계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격변이다. 이는 단순한 진화적 사건을 넘어 진화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임계점이라 할 수 있다. 존 H. 캠벨(John H. Campbell)은 "사실 우리의 유전 체계보다 공학적 설계에 더 이상적인 시스템을 상상하기란 어렵다"라고 주장하며, '자가촉매적 인간(Homo autocatalyticus)'의 등장을 예고한다.
존 H. 캠벨? 괴물의 시대를 예고한 선지자이니, 그의 괴물 같은 문장을 인용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구실이 더 있겠는가.
"생물학자들은 기존 종(種)의 변방에 있는 아주 작은 소집단(어쩌면 단 한 마리의 수정된 암컷. 마이어(Mayr), 1942년)으로부터 새로운 형태가 급격히 진화해 나온다고 본다. 도저히 살아가기 힘든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 고립된 가족 구성원 간의 강제적인 근친교배, 이웃 종(種)으로부터 유입된 외래 유전자의 '종 간의 침투', 경쟁할 다른 동종 개체의 부재 등 온갖 요인이 유전체 프로그램의 대대적인 재편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이때 유전자 구조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변형된 종의 파편들은 대부분 멸종하지만, 어쩌다 운 좋게 새로운 생태적 지위에 맞아떨어진 극소수는 살아남는다. 이들은 번성하여 새로운 종으로 확장된다. 이후 통계적으로 제한된 유전자 풀로 전환되면서, 이 신생 종은 더 이상의 진화적 변화를 멈추고 안정화된다. 기성 종은 변화보다 정체되어 있다는 점이 훨씬 더 두드러진다. 심지어 새로운 하위 종을 분가시키는 과정에서도 기존 종 자체는 별로 변하지 않는 듯하다. 종이 점진적으로 변형될 수 있으며 실제로 어느 정도 그렇게 변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소위 '점진적 진화'는 새로운 종이 탄생할 때 지질학적으로 급격하게 일어나는 거대한 '도약'에 비하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대부분의 진화적 변화는 새로운 종의 탄생과 맞물려 일어난다.
둘째, 여러 진화 방식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 이 경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전체 과정을 주도한다.
셋째, 종 전체가 아니라 극소수의 개체 집단이 진화의 대부분을 이끈다.
진화의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은 '자기 참조성'이다(캠벨, 1982). 자율성을 지닌 외부 '환경'이라는 쿠키 틀이 반죽 판에서 모양을 찍어내듯 종의 형태를 규정한다는 데카르트식의 도식적인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환경이 종을 '진화'시키는 것 못지않게, 종 역시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깊숙이 변화시킨다. 특히 생물은 자신들이 경쟁을 벌이는 환경의 제한 조건들을 직접 만들어낸다. 따라서 유전자는 진화에서 두 가지 역할을 맡는다. 자연선택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자신에게 작용할 선택압을 궁극적으로 유도하고 결정하는 역할이다. 이러한 순환적 인과관계는 진화가 지닌 기계적 성격을 완전히 뒤흔든다. 진화는 생물이 진화시킨 활동이 다시 그들의 진화로 되돌아오는 피드백에 의해 지배된다.
세 번째로 중요한 깨달음은, 진화가 그 결과물인 생물의 변화를 넘어 진화 과정 자체의 변화로까지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즉, 진화는 진화한다. 진화학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다윈주의의 틀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을 부여하지 않았다. 다윈주의자들, 특히 현대 신(新)다윈주의자들은 진화를 생물학보다 앞서는 하나의 단순한 논리적 원칙의 작동과 동일시한다. 그들에게 진화란 그저 다윈식 자연선택 원리가 실제로 구현된 것에 불과하며, 진화학이라는 학문 역시 이것을 다룰 뿐이다. 원칙이라는 것은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없으므로, 그들이 보는 진화는 본질적으로 정체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실제 생물학적 진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진화는 고정된 원칙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실제 과정이다. 진화가 일어나는 방식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실제로 변해왔다는 점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진화 과정은 전개될수록 스스로 고도화된다는 점에서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지구의 원시 수프 속에 있던 생명 이전의 물질은 다윈주의 이전의 '화학적' 메커니즘을 통해서만 겨우 진화할 수 있었다. 이 보잘것없는 과정이 마침내 스스로를 복제할 정보가 담긴 유전자 분자를 만들어내자, 진화는 비로소 자연선택이라는 엔진을 가동했다. 그 후 진화는 스스로 복제하는 유전체를 역시 스스로 복제하는 생명체 속에 담아냈고, 이를 통해 환경의 선택압이라는 바람에 생명이 대응하는 방식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다세포 생물이 탄생하면서, 진화는 느리고 다양성이 떨어지는 생화학적 진화 대신 신체 구조의 변화라는 대안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효소 촉매의 변화 대신 발달 프로그램 속 지침의 변화가 그 자리를 채웠다. 신경계의 등장은 이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한 행동적, 사회적, 문화적 진화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고차원적 방식들이 결합하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지성인 인류가 이끌고 추진하는 합리적이고 목적이 분명한 진화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 각각의 단계는 진화 능력이 새로운 차원으로 한 단계씩 도약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진화는 서로 구별되면서도 긴밀히 얽힌 두 가지 과정으로 나뉜다. 나는 이를 '적응적 진화'와 '생성적 진화'라 부른다. 전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윈식 진화로, 생명체가 생존과 번식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반면 생성적 진화는 이와 전혀 다르다. 구조가 아니라 과정 자체의 변화를 뜻하며, 더욱이 그 과정은 존재론적이다. 진화(evolution)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펼쳐내다'이며, 여기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진화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다. 고등 동물은 진화하는 능력 면에서 갈수록 노련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조상이나 가장 하등한 미생물보다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적합하게 진화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종의 생존 기록은 완벽하게 동일하다. 1억 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고등 생물은 평균적으로 단 두 마리의 후손만을 남기며, 현대의 종들 역시 과거의 종들만큼이나 멸종할 확률이 높다. 번식의 성공은 누적되는 수치가 아니기에, 종이 갈수록 세상에 더 적합한 방향으로만 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후손이 자신과 닮기를 바라는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자들에게 캠벨의 주장은 그야말로 심연이나 다름없다. 이들에게는 인종 간의 혼혈 같은 문제조차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얼굴에 촉수가 돋아난 모습을 상상해 보면 이해가 쉽다.
캠벨은 분리주의자이기도 하지만, 정체성 정치(인종적 순혈주의)나 전통적인 지능적 엘리트주의(우생학)의 문제의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생명공학적 지평선에 다다를수록, 분리주의는 완전히 더 거칠고 괴물 같은 방향, 즉 새로운 종의 분화를 향해 나아간다. '유볼루션(euvolution)'의 필진들은 이러한 시나리오를 다음과 같이 잘 포착하고 있다.
”인류의 대다수가 질적인 인구 관리 정책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캠벨은 인류 전체의 IQ를 높이려는 그 어떤 시도도 지루하리만치 느릴 것이라고 지적한다. 더욱이 초기 우생학의 전반적인 취지는 종의 개선이라기보다는 퇴보를 막는 것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따라서 캠벨의 우생학은 호모 사피엔스를 '유물'이나 '살아 있는 화석'으로 취급하며 포기할 것을 권한다. 대신 유전공학 기술을 동원해 인간의 유전체에 개입하고, 나아가 DNA 합성기를 이용해 완전히 새로운 유전자를 무(無)에서부터 써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우생학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실천될 것이며, 이들의 성취는 통상적인 진화의 속도를 너무나 빠르고 근본적으로 앞지른 나머지, 불과 열 세대 안에 이 새로운 집단이 오늘날 우리가 유인원을 초월한 것과 같은 수준으로 현재의 인류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생명공학적 지평선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인종적 공포와 갈등의 변증법 속에서 도출되는 그 어떤 논의도 결국 사소하고 부차적인 한계에 갇혀 있을 뿐이다.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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