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일본의 작전 참여 역사
6·25 전쟁 당시 일본의 작전 참여 역사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은 전쟁 자체만큼 정치적이다.
어떤 사실이 역사가 되고, 어떤 사실이 망각이 되는지는 진실의 무게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가 그것을 기억할 이유가 있는지, 누가 그것을 잊을 이유가 있는지, 그 이해관계의 합산으로 결정된다. 역사책은 그 합산의 결과물이다. 사료는 살아남은 문서이고, 살아남은 문서는 누군가 보존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선택에는 늘 이유가 있다.
6·25 전쟁은 한국에서 '잊혀진 전쟁'이라는 말을 듣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그 말을 듣는다. 같은 전쟁이 한쪽에서는 민족의 비극으로, 다른 쪽에서는 기억할 필요가 없는 사건으로 분류된다. 전쟁의 규모나 사상자 수가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전쟁이 각자의 역사 서사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가 차이를 만든다.
일본에게 6·25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한국에서 통용되는 답은 대략 이렇다. 일본은 전쟁 특수로 경제를 살렸다. 미군의 군수물자 발주가 쏟아졌고, 달러가 유입됐으며, 그것이 전후 일본 경제 재건의 발판이 됐다. 한반도가 불타는 동안 일본은 돈을 벌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의 일부다.
일본이 6·25 전쟁 중에 한 것은 경제적 수혜를 입은 것만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한반도 앞바다에서 기뢰를 제거했다. 인천상륙작전의 함선을 몰았다. 낙동강 전선 근방까지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다. 부상병을 치료했고, 자신들의 피를 전선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서 죽었다. 공식 기록에 남지 않은 채로.
이 사실들이 한국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역사 교육의 공백이자 구조적으로 생산된 망각이다.
망각이 구조적으로 생산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떤 사실이 역사에서 지워질 때, 대개는 누군가 지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흔한 경우는, 여러 주체가 각자의 이유로 그것을 언급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그 선택들이 겹치면서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음모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수렴.
일본 특별소해대의 한반도 기뢰 제거 작전이 수십 년간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것은 세 나라가 동시에 그것을 침묵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평화헌법 위반을 숨겨야 했다. 미국은 점령 치하의 패전국 민간인을 전장에 동원한 법적 책임을 피해야 했다. 한국은 해방 5년 만에 과거 식민 지배국의 군사력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정치적으로 소화할 수 없었다.
세 겹의 침묵. 그것이 두꺼웠다. 그리고 오래 유지됐다.
이 글은 그 침묵 안에 있던 것들을 꺼내려는 시도다.
다만 꺼내는 방향이 중요하다. 숨겨진 사실을 폭로해 일본의 위선을 고발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역사를 특정한 감정의 논거로 소비하는 방식이다.
역사를 그렇게 쓰면 편하다. 독자가 원하는 결론을 향해 사실들을 배열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가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려는 것은 다르다. 구조를 보는 것. 어떤 이해관계들이 어떻게 맞물려서 이 전쟁이 이런 방식으로 기억되고 망각됐는지, 그 구조 자체를 드러내는 것. 판단은 그 다음의 일이다.
6·25 전쟁을 둘러싼 한일 관계의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일본은 한국의 생존에 기여했으면서 동시에 그 기여를 자국의 부활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재일동포 청년들이 조국을 위해 싸우는 동안, 일본 정부는 그들의 귀환을 막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모순들을 하나의 깔끔한 서사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리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언가를 지운다.
역사가 모순을 품고 있을 때, 그 모순을 그대로 들고 가는 것이 정직한 방식이다. 불편하지만. 그리고 그 불편함이, 단순화된 서사가 줄 수 없는 것을 준다.
2026년 기준 6·25 전쟁이 끝난 지 73년이다.
그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기억은 이제 증언이 아니라 기록에 의존한다. 기록은 살아남은 것들이고, 살아남은 것들은 선택된 것들이다. 선택되지 않은 것들, 즉 공식 문서에 오르지 않은 죽음들, 비밀로 분류된 작전들, 정치적으로 불편했던 사실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바깥에 있다.
그것들이 바깥에 있다고 해서 없었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
원산 앞바다에 수장된 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坂太郞)는 그 이름이 한국의 어떤 공식 기록에도 없지만, 죽었다. 낙동강 전선을 누빈 이름 없는 일본인 군속들은 한국 전쟁사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거기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한일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충분히 자리를 받지 못했지만, 싸웠다.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역사의 수면 아래에 있다. 이 글은 그 수면을 조금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짚어두고 시작하자.
이 글은 일본을 무작정 옹호하지 않는다. 동시에 일본을 무작정 비난하지도 않는다. 국가를 도덕적 단위로 놓고 옹호하거나 고발하는 방식 자체가, 역사를 보는 데 적합한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익을 추구한다. 동맹은 이해관계의 교환이다. 전쟁은 그 교환이 가장 날것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일본이 6·25 전쟁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 것은, 비난받아야 할 예외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미국도, 한국도, 16개 참전국도 모두 같은 언어 안에서 움직였다.
다만 그 언어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구조 안에서 소모된 개인들, 이해관계의 교환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 역사의 공식 언어 바깥에 놓인 죽음들.
이 글이 들고 가려는 것은 그 두 층위다. 구조의 언어와, 그 언어 바깥에 있는 것들.
수면(水面) 속과 기억 사이 어딘가에, 이 이야기가 있다.
- 일본 특별소해대와 기뢰 제거 작전
1950년 10월, 원산 앞바다.
미 제7함대는 멈춰 있었다. 북한군이 깔아놓은 소련제 감응기뢰 약 3,000발이 수면 아래에 촘촘히 박혀 있었고, 전함들은 항구 바깥에서 그 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었다. 상륙작전이 계획되어 있었다. 군함들이 접근해야 했다. 누군가 물속에 들어가야 했다.
미 해군은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경험이 없었다. 장비도 충분하지 않았다. 기뢰전의 노하우란 수십 년의 해전 경험과 수많은 실패 위에 쌓이는 것인데, 그것을 미군은 갖고 있지 않았다.
갖고 있는 쪽은 따로 있었다.
더글라스 맥아더의 극동군사령부(GHQ)가 일본 해상보안청에 요청을 넣은 것은 1950년 10월 초의 일이었다.[1] 요청이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당시 일본은 여전히 점령 치하였고, GHQ는 사실상 일본 국가의 상위 구조였다. 명령이 요청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위계가 감추어질 때 으레 그러하듯, 그저 외양의 문제였다.
해상보안청 장관 오쿠보 다케오(大久保武雄)는 구 일본 해군 소장 출신이었다. 그는 이 요청을 즉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에게 보고했다. 요시다는 승인했다. 평화헌법이 존재했고, 해외 군사 파병은 그 헌법이 명백히 금지한 행위였다. 요시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승인했다.[2]
이때 요시다가 한 가장 실질적인 조치는 작전의 극비 지정이었다.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아야 했다. 누구도 이야기해서는 안 됐다. 전사자가 나오더라도 그 원인을 숨기도록 지시했다.
구조가 언제나 먼저 숨기고 싶은 것을 보면, 그 구조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특별소해대(特別掃海隊)의 편성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구 일본 해군 출신들로 구성된 소해 인력, 54척의 소해정, 연인원 1,450여 명.[1] 이들이 투입된 해역은 원산,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였다. 전선의 서해와 동해를 망라했다. 작전 기간은 1950년 10월 2일부터 12월 12일까지.
소해(掃海)란 기뢰를 찾아 제거하는 작업이다. 물속 어딘가에 폭발물이 있고, 그것이 어디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잘못 건드리면 배가 산산조각 난다. 이것이 전쟁에서 가장 조용한 공포 중 하나인 이유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식별 가능한 총성도 없고 명확한 전선도 없다. 다만 수면이 있고, 수면 아래의 침묵이 있으며, 그 침묵 속에서 배가 나아간다.
1950년 10월 17일 오후 3시 15분.
원산항 인근 여도(麗島) 앞바다. 일본 소해정 MS-14호가 감응기뢰와 접촉했다. 폭발은 강했다. 배는 침몰했다. 선원 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坂太郎), 당시 21세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1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1]
나카타니의 시신은 원산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유족에게 통보가 간 것은 한참 후였다. 전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순직'으로 처리된 뒤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무엇을 하다 죽었는지, 공식적으로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다. 미국도 일본도 침묵했다. 한국은 그 존재 자체를 몰랐다.
수면 아래의 전쟁은 그렇게 수면 아래에 남았다.
작전 기간 동안 일본 특별소해대가 직접 제거한 기뢰는 27발이었다.[1] 숫자만 보면 적어 보인다. 원산 앞바다에 3,000발이 깔려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더 그렇다. 하지만 소해 작전의 논리는 전량 제거가 아니다. 군함이 통과할 수 있는 안전한 수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 수로가 열렸고, 미 해군은 상륙했다.
원산상륙작전이 가능해진 것은 안전해진 그 수로 때문이었다.
이 작전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단지 기뢰를 제거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작전이 드러내는 것은 전쟁의 논리, 더 정확히는 동맹의 논리다.
일본은 1945년에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했다. 군대가 해산됐고, 헌법이 바뀌었으며, 무력 행사는 금지됐다. 그로부터 고작 5년이 지난 1950년, 일본인들은 한반도 앞바다에서 기뢰를 제거하다 죽었다. 공식적으로 그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맹이 작동하는 방식이 본래 이렇다. 의무는 구체적이고, 형식은 모호하며, 기록은 선택적이다. 위계의 상단에 있는 쪽이 요청하고, 하단에 있는 쪽이 수행하며, 그 사실은 양측 모두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지워진다. 나카타니 사카타로의 이름이 어떤 공식 기록에도 남지 않은 것은 당시의 냉혹한 정치 논리에 의해서였다.
이 작전의 결과로 미 해군이 얻은 것은 수로였다. 일본이 얻은 것은 다른 층위에 있었다.
소해 부대의 기술력과 운용 능력은 미군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것이 단순한 감사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이후의 역사가 말해준다. 1952년 경비대, 1954년 일본 해상자위대(JMSDF)의 창설.[2] 그 핵심 인적 기반과 기술적 토대는 특별소해대에서 나왔다. 패전국이 군사력을 재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명분이고, 그 명분은 전장에서 만들어진다.
요시다 시게루는 나중에 6·25 전쟁을 두고 '천우(天佑)'라는 표현을 썼다.[3] 하늘이 내린 은혜. 그 표현이 한국 입장에서 무례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백만이 죽고 한반도 전체가 화마에 휩싸인 전쟁을 두고 '은혜'라고 말하는 것. 하지만 국가 지도자가 역사를 자국의 생존과 부활이라는 좌표계 위에서 읽는다면, 그 말은 비록 냉혹할지언정 정확하다.
누군가의 지옥이 다른 누군가의 기회가 되는 일은, 역사 속에서 예외가 아니라 원칙에 가깝다.
특별소해대의 파병이 비밀에 부쳐진 것은 일본만의 이유가 아니었다. 미국은 국제법적 책임을 피해야 했다. 당시 한국 정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지만 한국은 해방 5년 만에 일본 군사력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정치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다. 세 나라가 각자의 이유로 같은 침묵을 원했다.
침묵이 구조적으로 생산될 때, 그것은 오래 유지된다.
나카타니 사카타로가 원산 앞바다에 수장된 지 75년이 지났다. 그의 이름이 한국 땅에서 발화되는 일은 여전히 거의 없다.
- 일본인 선원·군속·소년병의 참전
1950년 9월 15일, 인천.
미군 전차양륙함(LST) 47척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했다. 그 안에 미 해병대 7만 명과 전차가 실려 있었다. 맥아더가 기획하고, 워싱턴이 반대했으며, 결국 감행된 작전이었다. 역사는 이것을 인천상륙작전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결정적 국면.
그런데 그 LST 47척 중 37척에서 39척을, 일본인 선원들이 몰았다.[4]
이 사실은 작전의 성격을 바꾸지 않는다. 작전은 미군의 것이었고, 지휘는 맥아더의 것이었으며, 공은 미국의 것으로 기록됐다. 다만 배를 몬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는, 기록의 가장자리에도 남지 않았다.
일본인 선원들이 동원된 이유는 단순했다.
숙련된 선원이 필요했는데, 미군에는 그 수가 부족했다. 일본에는 넘쳤다. 패전 후 실업자가 된 구 일본 해군 출신들, 상선 선원들. 게다가 이들은 한반도 해안의 수심과 조류, 항구의 구조를 미군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다. 식민지 지배 35년이 쌓아올린 지형 지식이었다.[4]
역사의 아이러니는 대개 이런 모양을 하고 있다. 어떤 구조가 만들어낸 부산물이, 그 구조가 붕괴된 이후에도 유용하게 쓰인다. 그것이 누구에게 유용한지는 그때그때 다르다.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일본인 선원과 항만 하역 노동자는 약 2,000명에서 3,000명으로 추산된다.[4] 이들은 미군으로부터 '민간인 청부업자' 명목으로 일당을 받았다. 법적 신분은 민간인. 실제 위치는 전장.
인천의 지형은 상륙작전에 적합하지 않았다.
조수간만의 차가 최대 10미터에 달했다. 안벽은 높았다. 상륙하는 병력이 그 벽을 넘어야 했다. 사다리가 필요했는데, 군 표준 장비로는 맞지 않았다. GHQ의 긴급 명령을 받은 일본알루미늄공업 등의 노동자들이 밤을 새워 특수 사다리 60여 개를 제작해 공급했다.[4]
사다리.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물건이다. 그러나 상륙 당일 아침, 미 해병대가 그 사다리를 타고 안벽을 넘었다. 교두보가 확보됐고, 작전은 성공으로 향했다.
전쟁에서 결정적인 것은 늘 이런 것들이다. 사다리, 수로, 기름, 빵. 그것을 공급한 손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동안, 앞면에는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진다.
전선은 인천에서 끝나지 않았다.
낙동강 방어선, 대전, 다부동. 전쟁 초기 미군이 밀리고 또 밀리던 전선들. 그 전선 한복판에 일본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미군 부대에 '하우스보이'나 기지 노무자로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주일미군 기지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이들이 1950년 7월, 전황이 급박해진 미군 부대를 따라 한반도로 들어왔다. 수송선에 실려서. 민간인 신분 그대로.[5]
보급로가 습격받으면 그들도 거기 있었다. 트럭이 불타면 그들도 거기 있었다. 미군 문서에는 이들 중 일부가 소총을 들고 북한 인민군과 직접 교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북한군 수십 명을 사살했다는 기록도 있다.[5]
군인이 아닌 사람들이 총을 쏘는 것. 전쟁은 그런 식으로 민간인과 군인 사이의 범주를 지운다.
미군 극비 문서에는 더 극단적인 사례가 있다.
당시 12세였던 일본인 소년이 전선에서 북한군 5명을 사살했다는 기록.[5]
이 소년은 어떻게 거기 있었는가. 패전 후 일본은 굶주렸다. 고아가 넘쳤다. 수많은 소년들이 주일미군 부대에 들어가 심부름을 하며 밥을 먹었다. 그 부대가 한반도로 출동할 때, 소년들도 함께 실렸다. 누구도 내리라고 하지 않았거나,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나.
12세. 한국식으로 따지면 초등학교 6학년이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방아쇠를 당겼는지, 어디서 잠을 잤는지, 전쟁이 끝난 뒤 어떻게 살았는지. 문서에는 없다. 문서는 그저 사살 숫자를 기록했다.
- 6·25 전쟁 당시 일본의 한반도 철도 수송 작전
전쟁은 물자를 먹고 산다. 그리고 그 물자는 핏줄처럼 뻗은 철도를 통해 움직인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황은 파죽지세로 무너져 내렸다. 밀려드는 적을 막아내기 위해 전선으로 물자와 피난민을 실어 나르던 국군과 철도청 소속 한국인 기관사들은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폭격과 총탄을 받아내야 했다. 개전 초기, 이들 숙련 기관사 중 2,000여 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6] 대한민국 철도 수송망이 통째로 마비될 위기였다.
당시 한반도의 핵심 철도망인 경부선과 호남선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기술진의 주도로 부설된 체계였다.[7] 복잡한 신호 가동법, 급경사와 터널이 반복되는 거친 지형, 그리고 노선의 미세한 구조적 특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과거 이 선로를 직접 운영했던 일본인 기관사와 철도 기술자들이었다.[7]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온 미 극동군사령부(GHQ) 내에는 한국의 철도를 완벽하게 숙지하고 제어할 대체 인력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부산항에는 미군의 M26 퍼싱 전차, 수백 톤의 포탄, 최전선에 투입될 증원 병력이 매일 같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7] 이 핵심 물자들을 최전선인 대구와 영천 등지로 신속하게 보내지 못한다면 낙동강 방어선은 그대로 붕괴할 판이었다.[8] 절박해진 미 GHQ는 극비리에 움직였다.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 정부와 일본국유철도(JNR)에 한반도 전선에 투입할 숙련된 철도 인력을 차출하라는 비밀 명령을 하달했다.[9]
그렇게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일본인 기관사, 철도 기술자, 항만 노동자들이 긴급 동원되었다.🔟 이들의 투입은 국제법적으로 심각한 결격 사유를 안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평화헌법 체제 아래 군대를 보유할 수 없었고, 타국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 또한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11] 무엇보다 강력한 반일 노선을 걷고 있던 이승만 정부가 일본인의 한반도 전선 진입을 알게 된다면, 동맹 전선 자체를 뒤흔들 정치적 폭풍이 불 것이 자명했다.[7]
미군은 이들의 신분을 철저히 은폐했다.[12] 일본인 기관사들에게 군복 대신 평범한 민간인 작업복을 입혔다. 철저한 민간인 위장 작전이었다.
이들이 운전대를 잡은 선로는 지옥이었다. 당시 경상도와 충청도 일대 산악지대에는 북한군 패잔병과 공산 게릴라들이 득실거렸다. 이들의 최우선 타격 목표는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보급 열차였다. 일본인 기관사들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저격과 선로 파괴, 기습 공격의 공포를 삼키며 조종간을 잡았다. 적의 공습과 유격대의 시야를 피하기 위해 밤이 되면 전조등을 모두 끈 채, 오직 어둠 속에서 과거의 기억과 감각만으로 기차를 모는 위험천만한 야간 무등화 운전을 감행했다.[7] 한반도의 철도 지형을 훤히 꿰고 있던 일본 국철 출신들이었기에 가능한 도박이었다.
위험을 뚫고 달린 기차들은 낙동강 전선 코앞인 대구역과 주변 간이역에 미군의 전차와 탄약을 제때 하차시켰다. 이 필사의 보급이 있었기에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 전세를 뒤집을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7] 당시 전선의 지휘관들에게 기관차 조종간을 잡은 손이 어느 나라 사람의 손인지는, 전차와 포탄이 제때 전선에 도착하는 것보다 훨씬 덜 중요한 문제였다.
이 거대한 작전은 전후 수십 년 동안 역사 속에 철저히 묻혀 있었다. 미·일 양국 정부가 국제법적 파장을 우려해 이 사실을 1급 기밀로 분류하고 함구했기 때문이다.[12] 작전 중 숨지거나 부상을 입은 일본인들의 희생조차 공식 기록에 남지 못했다.[13] 세월이 흘러 미군의 기밀문서가 해제되고, NHK 스페셜 다큐멘터리 팀의 추적 조사와 참전 생존자들의 증언을 담은 후지와라 가즈키(藤原和樹)의 저서 등이 세상에 나오면서 숨겨졌던 보급 작전의 실체는 비로소 역사의 표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14]
- 원산 앞바다의 화염과 잊혀진 죽음
1950년 11월 15일, 원산 앞바다.
연합군의 원산상륙작전이 남긴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차가운 바다 위로, 미 육군 수송사령부 소속의 대형 예인·인양선 LT-636호가 항해하고 있었다. 이 배의 임무는 최전방 해역에서 미군의 군사 활동을 지원하고, 파괴된 선박을 인양하며, 한반도 전선으로 이어지는 군수 물자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배의 키를 잡고 엔진을 돌리며 거친 파도와 싸우던 이들은 미군 군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 적국이었던, 그러나 이제는 생계를 위해 미군에 고용된 27명의 일본인 민간 선원들이었다.[15]
그때, 고요하던 바다를 찢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이 솟구쳤다. 북한군이 깔아놓은 소련제 계류기뢰 중 강한 조류를 타고 흘러나온 잔존 부유기뢰가 LT-636호의 선체를 정면으로 타격한 것이다. 대형 인양선은 단 몇 초 만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고, 차가운 바닷물이 선실로 들이닥쳤다. 배에 타고 있던 일본인 선원 27명 중 22명이 그 자리에서 폭사하거나 심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실종되었다. 시신조차 제대로 건지지 못한 참혹한 몰살이었다.[15]
이 비극은 불과 한 달 전, 같은 바다에서 발생했던 소해정 MS-14호의 침몰 사고와는 궤를 달리하는 사건이었다. 10월 17일, 나카타니 사카타로 선원을 앗아간 MS-14호 사건은 일본 정부가 GHQ의 요구를 수용하여 공식 파견한 군사 조직의 사고였기에 일본 정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평화헌법 제9조를 위반하고 자위 세력을 해외 전장에 투입했다는 여론의 포화가 쏟아지자, 코너에 몰린 요시다 시게루 내각은 소해정 부대를 전면 철수시키기 시작했다.[1]
하지만 한반도 전선의 미군은 당장 바다를 누빌 베테랑 선원과 인양선이 절실했다. 미군 극동군사령부는 묘책을 냈다. 정식 군함이나 소해정이 아니라, 미군이 직접 관리하는 일반 군용 수송선이나 예인선에 일본인 민간 선원들을 '개인 고용' 형태로 태워 전선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LT-636호의 선원들은 그렇게 법적 보호막도 없는 민간인 신분의 군속이 되어 사선으로 향했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16]
22명의 목숨이 한순간에 증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그 어떤 공식 전쟁 기록에도 등재되지 못했다. 패전국 일본의 국민이 미군의 군사 작전에 동원되어 타국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 GHQ는 물론이고 일본 내 가열되던 반전 운동과 평화헌법 논란으로 동아시아 반공 전선 전체가 흔들릴 판이었다.[15]
그날 이후, 미군 정보장교들과 일본 외무성 관료들은 비밀리에 움직였다. 이들은 22명 선원들의 유족을 찾아가 은밀하고 고압적인 공작을 펼쳤다. 유족들에게 "전사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단 한 푼의 연금이나 보상금도 받을 수 없다"고 협박했다. 그러고는 사망 진단서와 행정 서류를 조작했다. 이들이 북한 원산 바다에서 폭사한 것이 아니라, 일본 본토 앞바다인 세토내해에서 전후 잔류 기뢰를 제거하다 순직한 것으로 죽음의 장소를 세탁해 버린 것이다.[1]
조직적인 은폐 속에서 유족들은 피눈물을 삼키며 입을 닫아야 했다. 미군은 입막음용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액수의 위로금을 일시불로 지급했고, 일본 정부는 서류상 '국내 순직'으로 처리된 연금을 입금했다. 수십 년이 지난 1970년대 말, 일본 정부는 이들에게 슬그머니 훈장을 추서했으나, '6·25 전쟁 참전'이라는 역사의 진실은 철저히 도려낸 채 '해상 업무 중 순직'이라는 모호한 껍데기만 씌운 기만이었다.[3]
1950년 11월 원산에서 사라진 22명의 영혼. MS-14호의 나카타니 사카타로를 포함해 기록되지 못한 채 스러져간 수십 명의 일본인 선원들. 이들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연인원 8,000명에서 많게는 1만 명 이상 동원되어 인천상륙작전의 LST를 몰고, 흥남 철수의 피난민을 나르고, 전선의 물자를 하역했던 일본인 군속들의 참혹한 단면이었다.[1]
역사는 이들의 죽음을 지웠고, 유족들이 받은 통보와 보상의 실체 역시 오랜 세월 극비 문서 속에 묻혀 있었다. 평화헌법의 그늘 아래서 전쟁 특수로 경제적 부흥을 탐닉하던 일본 정부와, 전술적 이익을 위해 타국의 민간인을 소모품처럼 징발했던 미군 GHQ의 야합. 그 거대한 침묵 속에서 원산 앞바다의 붉은 피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끝내 말하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 일본의 의료 작전 참여와 731부대의 유산
한반도 전선에서 사지가 찢기거나 포탄 파편에 몸이 망가진 병사들이 헬기와 수송선에 실려 현해탄을 건넜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사세보, 고쿠라에 구축된 미군 야전병원들이었다.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백, 수천 명의 중상자들이 밀려들었다. 미군 의료진만으로는 이 거대한 피의 행렬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수술실에서 밤새 비명 소리를 들으며 붕대를 갈고 피를 닦아낸 이들은 수천 명의 일본인 종군 간호사들이었다. 패전 직후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일본의 젊은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미군 병원의 고용직으로 뛰어들었다.[5]
몸을 타고 흐르는 피 역시 일본에서 왔다.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면서 최전방에서는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미국 본토에서 태평양을 건너오는 수혈용 혈장만으로는 공급 속도를 맞출 수 없었다. 공급 부족으로 전선이 마비될 위기에 처하자, 미군은 일본 현지에서 혈액을 직접 조달하는 방안을 세웠다.[5]
그렇게 도쿄, 오사카 등 일본 대도시의 슬럼가와 여인숙 거리에 거대한 매혈 시장이 형성되었다. 하루 한 끼를 걱정하던 가난한 일본인 실업자와 부랑자, 노숙들이 단돈 몇 푼을 쥐기 위해 헌혈소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몸에서 짜내진 피는 동결 건조 혈장으로 가공되어 즉각 한반도 전선으로 공수되었다. 전선의 위생병들이 흙먼지 날리는 참호 속에서 증류수에 이 가루를 타 부상병들의 혈관에 주입했다. 그 혈장을 수혈받고 살아난 미군과 국군 병사가 얼마나 되는지, 역사는 단 한 번도 제대로 계산한 적이 없다. 몸 안으로 들어간 피는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기 때문이다.[5]
그러나 이 생명 구호의 역사 뒤편에는, 차마 마주하기 두려운 어둠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한반도로 공수된 대량의 건조 혈장을 생산하고 공급한 핵심 주체, 그 정점에는 다름 아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을 떨친 731부대(관동군 방역급수부) 출신의 의학 전범들이 있었다.[17]
패전 후,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 四郎)를 비롯한 핵심 군의관들은 도쿄전범재판의 단두대에 서지 않았다. 미군이 이들이 만주에서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자행했던 잔혹한 인체실험 데이터를 통째로 넘겨받는 조건으로 사법 면책 특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미군의 묵인 아래 생존한 이들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면에 등장했다.[18]
1951년, 한반도 전선의 혈장 수요가 폭발하자 731부대의 핵심 인물이었던 나이토 료이치와 부대장 이시이 시로는 민간 회사인 일본혈액은행(훗날의 가부시키가이샤 미도리주지(株式会社ミドリ十字)을 공동 설립했다. 이들이 가난한 일본인들의 피를 헐값에 사들여 대량의 건조 혈장으로 전환할 때 사용한 혈액 동결 건조 기술은, 다름 아닌 만주 벌판의 731부대 실험실에서 수감자들을 강제로 눕혀놓고 피를 뽑으며 완성한 기술의 유산이었다. 만주의 실험실에서 터득한 살인의 기술이, 한반도 전선에서는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는 비즈니스로 변모한 역사의 가혹한 아이러니였다.[5]
이들의 역할은 혈액 공급에만 그치지 않았다. 전쟁 기간 중 한반도 전선과 후방에 유행성 출혈열, 장티푸스, 콜레라 같은 원인 모를 전염병이 창궐해 군사 작전에 차질이 생기자, 미군은 세균학과 방역 분야의 전문가가 된 731부대 출신들을 방역 전술 자문 고문단으로 위촉했다. 이시이 시로를 포함한 옛 731부대의 간부들은 미군의 지원과 보안 속에 한국 전선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이들은 전선의 위생 상태를 점검하고 전염병 통제 대책을 자문하며 미군 수뇌부의 신임을 받았다. 뒤편에서는 이들이 미군의 생화학전 작전을 은밀히 도왔다는 어두운 의혹의 연기가 피어올랐다.[18]
그렇게 6·25 전쟁은 최전방의 총칼뿐만 아니라, 후방의 야전병원과 슬럼가의 헌혈소, 그리고 전범들의 실험실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전쟁이었다. 가난한 일본인들의 붉은 피와 전범들이 남긴 잔혹한 유산이 결합하여 움직였던 또 다른 전선. 그 메커니즘 속에서 흘러간 피는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으나, 그 대가로 역사의 거대한 죄책감과 비밀을 품은 채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5]
- 기적의 항로를 연 숨은 조역: 흥남 철수 작전과 일본인 군속들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 부두는 처절한 지옥도이자 동시에 위대한 인류애의 현장이었다. 밀려드는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서 군인과 피난민을 통틀어 20만 명에 달하는 인파를 안전하게 철수시켜야 했던 흥남 철수 작전은 오늘날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기억된다. 미 해군의 전함들과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신화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거대한 구출 작전의 톱니바퀴 속에서 묵묵히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또 다른 군상이 있었다. 바로 미군 통제하에 목숨을 걸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던 일본인 선원들과 민간 수송 선박들이었다.[19]
6·25 전쟁 발발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일본은 평화헌법 체제 아래 군대를 보유할 수 없었고 해외 파병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한반도 전선에서 극심한 병참 및 수송 부족에 직면한 연합군 총사령부는 일본에 남아 있던 숙련된 해상 인프라에 주목했다. 미군은 연합국 점령하의 일본 선박과 해원을 통제하던 SCAJAP(재일점령군해운통제청)을 전면 가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해군이 사용하던 상륙함과 민간 화물선들을 대거 수용했고, 이 배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일본인 선원들을 군속 신분으로 모집했다. 이들은 정식 군인은 아니었지만, 미군의 지휘와 급여를 받으며 사실상 전쟁의 최전선 병참망을 책임지는 핵심 인력이 되었다.
12월 중순의 흥남 부두는 중공군의 포격 소리와 영하 20도에 이르는 칼바람으로 가득 찬 한계 상황이었다.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단의 병력, 그리고 이들을 따라 나선 수많은 피난민을 실어 나르기 위해 총 130여 척이 넘는 선단이 흥남항으로 진입했다. 미 해군 공식 병참 기록에 따르면, 이 선단의 상당수가 일본인 승조원들이 운항하던 SCAJAP 소속의 LST와 일본 국적 민간 화물선들이었다.[19]
피난민을 품은 일본 화물선들의 활약이 있었다. 흥남 철수 작전 당시 '마다케츠호'는 6,400명, '토바츠마루호'는 6,000명, '요나야마마루호'는 3,000명의 피난민을 선창 가득 채웠다. 화물과 군수물자를 싣기 위해 설계된 민간 화물선이었지만, 일본인 선원들은 몰려드는 한국인 피난민들을 거부하지 않고 한 명이라도 더 배에 태우기 위해 갑판과 화물칸을 개방했다. 해안가에 배를 대고 직접 병력과 차량을 탑재해야 하는 LST 작전은 고도의 숙련도가 필요했다. 미군 소유의 LST 중 다수가 일본인 선원들에 의해 운항되었으며, 이들은 중공군의 포탄이 유효 사거리까지 좁혀오는 상황 속에서도 키를 놓지 않고 하역과 승선 작업을 도왔다.
흥남 철수 작전이 완벽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거대 수송선들이 기뢰에 폭발하지 않고 안전하게 항구에 진입할 수 있도록 목숨을 바친 일본 특별소해대의 사전 헌신이 있었다. 원산과 흥남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는 북한군이 소련으로부터 조달받은 감응 기뢰와 계류 기뢰 수천 발을 촘촘하게 매설해 놓은 죽음의 바다였다. 미 해군조차 소해 전력이 부족해 난항을 겪자, 1950년 10월부터 구 일본 해군 출신의 베테랑들로 구성된 특별소해대가 비밀리에 투입되었다. 기뢰와 부딪쳐 배가 폭발하는 사고로 일본인 대원이 사망하고 실종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이들이 열어놓은 안전한 바닷길이 있었기에 흥남 철수 작전은 단 한 척의 대형 수송선 유실도 없이 완벽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19]
흥남 철수 작전에서 일본인들이 남긴 족적은 오랫동안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못했다. 미군은 한국 국민들의 대일 감정과 국제법적 마찰을 우려해 이들의 활동을 군사 기밀로 부쳤고, 요시다 시게루 내각 역시 평화헌법 위반 논란을 회피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묵인했다. 이 때문에 흥남 부두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던 수천 명의 일본인 선원들은 역사책의 각주로만 남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미 해군의 기밀문서가 해제되고 당시 해상자위대가 보관해오던 '조선동란특별소해사(掃海史)'가 처음 공개되면서, 이들의 기여는 명백한 사실로 역사의 평가를 받고 있다.
흥남 철수 작전은 단순히 미군의 군사적 후퇴 작전이 아니라, 인류사에서 손에 꼽히는 대규모 인도주의적 구출극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의 이면에는 적의 포화와 혹한의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키를 잡았던 일본인 군속들의 숙련된 기술과 숨은 헌신이 단단한 버팀목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 요시다 시게루와 전략적 협력의 해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처한 지정학적 환경을 봐야 한다.
1950년의 일본은 주권국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상태였다. 주권이 없었다. 군대가 없었다. 외교권은 제한됐고, 경제는 패전의 잔해 위에 겨우 서 있었다. GHQ가 사실상의 통치자였고, 요시다는 그 위계 안에서 일본의 행정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었다. 총리라는 직함이 있었지만, 그 직함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점령 구조 안에서의 재량이었다. 재량의 폭은 좁았다.
그 좁은 폭 안에서 요시다는 움직였다.
1950년 10월 초, 미 제7함대 사령관 스트러블(Arthur Struble)이 해상보안청장 오쿠보 다케오에게 기뢰 제거를 요청했다. 오쿠보는 즉시 요시다에게 보고했다. 요시다의 답은 빨랐다. 승인하겠다는 것이었다.[3]
평화헌법 제9조는 전력의 보유와 교전권을 금지한다. 해외에서 군사 작전에 준하는 활동을 하는 것은 그 조항을 정면으로 위반한다. 요시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결정하는지는 명확했다.
승인과 함께 내린 두 번째 지시가 더 핵심에 가깝다. 이 작전은 절대 극비여야 한다. 국회에 알려서는 안 된다. 언론에 유출돼서도 안 된다. 전사자가 나오더라도 사인을 숨겨라.[3]
법을 어기는 것보다 그것이 알려지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판단. 이것은 정치가의 언어다.
요시다가 단순한 친미 협력자였다면 이야기는 단순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미국, 구체적으로는 맥아더와 국무부는 6·25 전쟁 발발 직후부터 일본에게 재무장을 압박했다. 정식 군대를 만들어 한반도에 파병하라는 요구였다. 미군이 일본 기지를 비우고 한반도로 출동하면서 생긴 치안 공백을 메우고, 나아가 한국 전선에 일본군을 직접 투입하라는 것이었다.
요시다는 거부했다.
이유를 공개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설명했다. 일본은 재무장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군비 지출이 늘어나면 경제 재건이 불가능해진다. 경무장, 미국 안보 의존, 경제 우선. 이것이 이른바 '요시다 독트린'의 골격이다.[20]
하지만 그 뒤에 있는 것은 더 정교한 계산이었다. 대규모 재무장은 일본 내 좌익 세력과 반전 여론의 격렬한 반발을 부른다. 그것은 정권의 불안정을 의미한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일본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추는 것은 미국의 동의를 전제로 하는데, 그 동의는 미국이 일본을 통제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조건 안에서만 가능하다. 정식 재무장보다 준군사적 기여를 통해 미국의 신뢰를 쌓고 주권 회복을 앞당기는 것이 더 실리적이었다.
요시다가 제안한 것은 그래서 절충이었다. 정식 군대 파병은 어렵다. 대신 소해 작전, 수송, 노무, 의료 인력을 전폭적으로 제공하겠다.[3]
이것은 굴복이 아니었다. 협상이었다.
1950년 7월, 전쟁 발발 한 달 만에 요시다는 GHQ의 명령을 받아 경찰예비대를 창설했다. 7만 5천 명 규모. 이름은 경찰이었지만 실질은 군사 조직이었다.[20]
경찰예비대는 1952년 보안대를 거쳐 1954년 자위대로 발전한다. 현재 일본 자위대의 직접적 기원이다. 맥아더의 명령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이후의 경로를 설계한 것은 요시다의 정치적 의도였다.
자위대는 헌법상 군대가 아니다. 하지만 군대다. 이 모순을 요시다는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지했다. 모순의 유지가 재량의 공간을 만든다. 명확히 군대라고 선언하는 순간, 헌법 개정이 필요해지고, 그것은 정치적 전쟁을 의미한다. 모호함이 안정적이다.
일본 정치의 특수한 체질 중 하나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법적 명확성을 피하면서 실질적 역량을 키우는 방식. 이것은 요시다가 발명한 것이 아니지만, 그가 구조화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은 연합국 군정에서 벗어나 주권을 회복했다. 1952년 4월 발효.[20]
패전 후 7년 만이었다. 다른 추축국들과 비교하면 빠른 편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한반도에서 아직 총성이 울리고 있는 동안, 일본은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이 일본을 서둘러 독립시킨 것은 동아시아 반공 전선의 안정적인 후방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기여, 즉 소해 작전, 수송, 병참 지원이 그 독립의 배경 조건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래였지만, 거래는 거래였다.
강화조약과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됐다.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는 대신 미국의 핵우산이 일본을 덮었다. 안보를 미국에 위탁하고, 경제에 집중한다. 요시다 독트린의 완성이었다.[20]
'천우(天佑)'.
요시다가 6·25 전쟁을 두고 남긴 표현이다. 하늘이 내린 은혜.[3]
이 말이 한국인 입장에서 불쾌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마냥 이상한 반응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불쾌함의 정체를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다. 요시다가 한국의 고통에 무감각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 지도자의 시각으로 역사를 읽었기 때문인가.
국가 지도자에게 역사는 자국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좌표 위에서 읽힌다. 그 좌표 위에서 6·25 전쟁은 패전 후 폐허 상태의 일본에게 주권 회복, 경제 재건, 군사력 재창설의 계기를 동시에 제공한 사건이었다. 그것을 '천우'라고 부르는 것은, 도덕적으로 둔감한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의 언어로 완벽하게 정확한 것이다.
국제정치는 고통의 도덕적 위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재앙이 다른 누군가의 기회가 되는 것을 막는 규칙 같은 것은 없다. 요시다가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그 문제는 국제정치 자체의 문제다.
요시다의 계산이 성공했다는 것은 사후에 명확해진다.
경제적으로는 전쟁 특수가 일본 경제를 소생시켰다. 미군의 군수물자 발주가 쏟아졌다. 철강, 섬유, 차량, 식량. 달러가 유입됐다. 이것이 1950년대 일본 경제 재건의 물적 기반이 됐고, 훗날 '일본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의 출발점이 됐다.[21]
군사적으로는 자위대가 창설됐다. 특별소해대의 인적·기술적 유산이 해상자위대의 기반이 됐다. 패전 후 해산된 군사력이, 6·25 전쟁을 경유해 합법적 형식을 갖추며 재건됐다.
외교적으로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주권이 회복됐고, 미일안보조약으로 안보가 보장됐다. 냉전 구도 안에서 일본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아시아 파트너가 됐다.
세 가지가 동시에. 한 사람의 재임 기간 안에.
하지만 요시다의 계산이 닿지 않은 곳이 있었다.
재일학도의용군.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동포 청년 642명이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원입대했다. 군번도 없이.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135명이 전사했다.[21]
전쟁이 끝났다. 살아남은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오려 했다. 요시다 내각은 거부했다. 법무성을 통해 이들을 '허가 없이 출국하여 외국 군대에 복무한 자', 즉 밀입국자로 규정했다. 재입국을 원천 봉쇄했다.[21]
부모 형제가 일본에 있었다. 삶의 터전이 일본에 있었다. 연고 없는 한국 땅에 남겨진 수백 명의 청년들이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다.
요시다가 이 결정을 내린 이유는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 재일동포 사회는 당시 이념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좌익 세력이 상당수였다. 전쟁을 경험한 청년들이 대거 귀환하는 것은 안보 면에서 리스크로 판단됐을 것이다. 냉정하게, 정치적으로, 국익의 관점에서.
이 대목에서 요시다의 계산은 국익의 경계를 넘어 인도주의적 파국으로 들어간다. 국가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자국을 위해 피를 흘린 사람을 버리는 것 사이에는 층위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요시다는 지우거나 무시했다.
요시다 시게루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탁월한 현실주의 정치가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패전국 지도자가 처한 구조적 제약 안에서, 가능한 최선의 실리를 끌어냈다. 미국의 압박을 우회하면서도 동맹의 신뢰를 유지했고, 재무장의 명분을 만들면서도 정치적 폭풍을 피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동시에 그 성공의 구조 안에는 지워진 것들이 있다. 나카타니 사카타로의 시신이 수장된 원산 앞바다. 이름 없이 전선을 누빈 군속들. 돌아오지 못한 재일의용군들. 이들은 요시다의 계산 안에서 수단이었다.
정치가를 도덕적 기준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그 정치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정치적 기준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지워진 것들을 또 한 번 지우는 일이다.
두 판단이 동시에 가능하다. 요시다는 유능했다. 그리고 그 유능함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지는, 별도로 기록되어야 한다.
역사는 늘 그 두 개의 층위를 동시에 들고 있어야 한다. 하나만 들면, 나머지 하나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 국제정치의 언어로 다시 읽는 일본의 참전
국제정치에 순수한 선의는 없다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특정 국가의 특정 행동을 그 원칙으로 읽으려 하면, 갑자기 다른 기준이 등장한다. 그 국가가 어느 나라냐에 따라.
일본의 6·25 전쟁 참여가 한국 사회에서 소화되는 방식이 그렇다.
전쟁 특수로 경제를 살렸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기뢰를 제거하고, 배를 몰고, 총을 쏘았다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의 비대칭이 이 정도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구조가 선택적으로 기억을 생산한 것이다.
왜 전쟁 특수만 남았는가.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돈을 벌었다'는 서사는 일본을 수혜자로, 한국을 피해자로 위치시킨다. 이 구도는 한국의 반일 감정 구조와 맞아 떨어진다. 일본은 항상 이득을 취하는 쪽이고, 한국은 항상 그 이득의 배경이 되는 쪽이라는 구도.
반면 '일본인이 기뢰를 제거하다 죽었다'는 서사는 그 구도를 복잡하게 만든다. 수혜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흐려진다. 일본이 기여한 측면이 생긴다. 이것을 수용하면, 반일 감정의 좌표가 흔들린다.
반일 감정의 좌표가 흔들리는 것을 피하고 싶을 때, 한국의 정치 구조는 특정한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고 다른 사실을 후면으로 밀어낸다. 이것이 집단 기억이 형성되는 방식이다. 의도적인 음모를 넘어 심리적 항상성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러면 일본의 기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언어로는 명확하다. 일본은 동맹 구조 안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움직였다. 소해 작전과 수송 지원은 미국의 요구에 응하는 동시에 주권 회복과 재무장의 명분을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경제 특수는 그 부산물이었다. 모든 것이 합리적인 국익 추구의 범주 안에 있다.
이 언어는 정확하다. 그러나 이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다.
나카타니 사카타로는 21세에 원산 앞바다에서 죽었다. 그는 자국의 주권 회복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었다. 요시다 독트린의 실현을 위해 희생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소해정을 몰다가 기뢰에 맞아 죽었다. 구조의 언어가 개인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왜 거기 있었는가까지다. 거기서 죽은 것의 무게는 구조의 언어 바깥에 있다.
한국이 일본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속담을 떠오르게 한다.
실질적 기여가 있었는데 그것이 감정적 필터에 의해 삭제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뢰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원산상륙작전이 가능했을지 불분명하다. 일본인 선원들이 없었다면 인천의 LST가 제대로 운용됐을지 불확실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기여는 실재했다. 그리고 그 기여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역사적 맥락도 실재했다.
한국이 일본의 기여를 도덕적으로 불순하다고 보는 근거, 즉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는 것은 사실 모든 국가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미국은 왜 한국전쟁에 참전했는가. 미국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 중 한국인만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고 태평양에서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16개 참전국 중 순수한 인도주의적 동기만으로 파병을 결정한 나라가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보면 대답은 회의적이다.
한국 자신은 어떠한가. 1960년대 베트남 파병은 한국군의 전투력을 미국에 증명하고, 군사 원조와 경제적 실리를 확보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한 해외인력 수출의 일환으로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가 한독근로자채용협정 등을 통해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 등을 서독에 파견하기도 했다. 현대 한국의 해외 원조와 평화유지군 파병 역시, 외교적 영향력 확대와 방산 수출이라는 국익 계산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을 '한국도 나쁘다'는 식의 상쇄 논리로 읽으면 안 된다. 요점은 다른 데 있다. 국가 행동을 평가할 때 어떤 나라에는 '국익 추구'라는 보편적 기준을 적용하고, 다른 나라에는 '순수한 선의'라는 예외적 기준을 요구한다면, 그 이중성 자체가 분석의 오류다.
사실들은 이렇다. 일본 특별소해대는 한반도 해역에서 기뢰를 제거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인이 죽었다. 일본인 선원들은 인천상륙작전의 LST를 몰았다. 일본인 군속들은 최전방까지 들어갔고, 일부는 총을 쏘았다. 일본인 간호사들은 부상병을 치료했고, 일본인의 혈액이 전선으로 공수됐다. 이 모든 것은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 결과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 움직임이 한국의 생존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두 문장이 모순처럼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여와 동기를 같은 층위에서 읽는 습관 때문이다. 동기가 순수하지 않으면 기여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 그 논리를 일관되게 적용하면, 역사 속 어떤 국제 협력도 온전히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재일학도의용군의 이야기가 이 모든 것의 가장 예리한 지점에 있다.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이 자원입대했다. 135명이 죽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일본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결정이었고, 그 결정은 국익의 언어로 설명 가능하다. 동시에 그 결정은 자국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버린 것이었다. 국익과 배신이 같은 결정 안에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한일 어느 쪽에서도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재일동포라는 정체성이 복잡하고, 일본에서는 이들의 참전 자체가 불편하다. 양쪽의 불편함이 겹쳐서, 이들은 어느 역사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유령 전선에서 싸운 사람들이 역사에서도 유령이 됐다.
한미일 삼각 안보 체제는 6·25 전쟁을 경유해 형성됐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일본의 병참 가치를 확인했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주권과 재무장의 경로를 열었다. 한국은 전쟁을 통해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세 나라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 결과가 현재의 동아시아 안보 구조다.
이 구조 안에서 한일 관계는 지금도 불안정하다. 협력의 필요성과 역사적 경계심이 공존한다. 독도, 위안부, 징용공과 같은 의제들이 반복적으로 한일 관계를 흔드는 것은, 6·25 전쟁 당시의 이중성, 즉 협력하면서도 경계했던 그 구조가 해소되지 않고 누적됐기 때문이다.
해결되지 않은 구조는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를 바꾸면서 다시 나타난다.
역사를 균형 있게 보자는 말은 쉽다. 그런데 균형이란 무게를 같게 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사실에 그 사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무게를 주는 것이다.
일본의 기여가 있었다. 그것은 기억돼야 한다. 그 기여가 자국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도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기록돼야 한다. 그 기여가 재일의용군에 대한 배신과 공존했다. 그것도 지워져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을 동시에 들고 있는 것이 역사를 보는 일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가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
수면 아래에 있는 것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기뢰처럼, 거기 있다.
공식 참전국이 아닌 나라의 민간인들이 수만 명 동원되어 수십 명이 죽는 일이, 역사 속에서 아무 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 지나갔다.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전쟁 지원에 순수한 선의만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일본은 자국의 생존과 부활을 위해 움직였다. 미국은 동맹의 비용을 하위 파트너에게 전가했다. 그 구조 안에서 실제로 기뢰를 제거하고, 배를 몰고, 총을 쏘고, 죽은 것은 이름 없는 개인들이었다.
국가가 국민들을 소모하는 방식은 전시와 평시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전시에는 그 속도가 빠르고, 소모의 흔적이 더 쉽게 지워진다.
유령 전선이란 그래서 붙인 이름이 아니다. 이들이 싸운 전선이 유령처럼 존재했다는 뜻이 아니라, 전선에서 싸운 이들이 유령처럼 처리됐다는 뜻이다.
기록되지 않은 죽음은 죽지 않는다. 애도받지 못한 채 떠돌 뿐이다.
- 주석 -
[1] 일본 특별소해대의 편성·규모·작전 해역·MS-14호 침몰 사건 관련 상세 / LT-636호 원산 침몰 사건, 22명 사망, 유족 협박 및 서류 조작 경위.
아시아엔(The AsiaN), "6·25전쟁에 일본군 '참전'했다". https://kor.theasian.asia/archives/84286
[2] 인천상륙작전에서 일본인 선원 동원 규모(LST 60% 운용), 전직 일본군 장교 출신 정보 지원, 해상자위대 창설과의 연관성.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6.25. 인천상륙작전, 일본군이 성공시켜". https://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38
[3] 요시다 시게루의 파병 승인 경위, 극비 지정 지시, '천우(天佑)' 발언.
중앙일보 관련 보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043425
[4] 인천상륙작전 LST 운용 비율(37~39척), 일본인 선원 동원 규모(2,000~3,000명), 인천 지형 문제와 특수 사다리 제작, 지형·수로 정보 제공.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6.25. 인천상륙작전, 일본군이 성공시켜". https://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38
[5] 최전방 군속(하우스보이) 교전 기록, 12세 소년병 사살 기록, 일본인 기관사 철도 수송 작전, 종군 간호사·혈액 공급, 인양선 침몰 22명 사망, 전체 동원 규모 추산(8,000~1만 명 이상).
서울경제, "6.25 당시 인민군 수십명 사살한 일본인 있었다…美극비문서 기록". https://www.sedaily.com/article/12735078
[6] 주일미군기지 일본인 노무자의 6·25전쟁 종군 활동과 귀환.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2472670
[7] 한반도 철도 수송 일본인 기관사 관련 기록.
코리아히티뉴스. https://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38
[8] 낙동강 전선 보급 위기 관련 기록.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slcosung/71016898
[9] 일본인 철도 인력 동원 명령 관련 기록.
사락(YES24 블로그), 후지와라 가즈키 저서 리뷰. https://sarak.yes24.com/blog/tneld0188/review-view/18629298
🔟 일본인 철도 기술자·항만 노동자 동원 규모.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quixcha/222214860090
[11] 평화헌법과 일본의 전쟁 참여 문제.
오마이뉴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4766
[12] 미·일 양국의 철도 수송 작전 기밀 분류 및 은폐.
교보문고, 후지와라 가즈키 저, 『한국전쟁에서 싸운 일본인』(소명출판).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2007311
[13] 작전 중 희생된 일본인 관련 기록.
크리스천메시지. https://www.ccmessage.kr/news/articleView.html?idxno=32285
[14] 후지와라 가즈키 저서 및 NHK 다큐멘터리를 통한 작전 사실 공개.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simpan112/223350537546
[15] 수송선 LT-636호의 원산 앞바다 기뢰 접촉 침몰 사고 및 일본인 선원 22명 사망 사실.
오마이뉴스, "6.25, 일본 참전의 비밀".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4766
[16] 일본인 민간 선원의 법적 신분 및 동원 방식.
네이버 블로그, 한국전쟁에 참가한 일본 함정. https://m.blog.naver.com/ds1jxm/221671098011
[17] 731부대 출신의 혈장 공급 관여.
팝콘뉴스, 녹십자와 731부대 수뇌부의 관계 의혹. http://www.popcorn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9336
[18] 이시이 시로의 전후 활동 및 한국 전선 자문 관여.
Wikipedia, Shirō Ishii. https://en.wikipedia.org/wiki/Shir%C5%8D_Ishii
[19] 흥남 철수 작전에서 SCAJAP 소속 선박 및 일본인 선원 활동.
코리아히티뉴스.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3842
[20] 경찰예비대 창설(1950), 보안대(1952), 자위대(1954) 창설 경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 및 미일안보조약 체결, 요시다 독트린의 구조.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https://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38
[21] 재일학도의용군 규모(642명), 전사자(135명), 요시다 내각의 재입국 거부 결정 및 정치적 배경, 일본 전쟁 특수의 경제적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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