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딸, 수박, 엔츄파도스

개딸, 수박, 엔츄파도스


'수박'이라는 말. 이는 주로 친이재명(친명) 성향의 강성 지지층이 비이재명(비명) 또는 반이재명(반명) 성향의 당내 정치인들을 공격하거나 멸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왜 하필 수박인가? 수박을 보면 어떠한가. 겉은 푸르스름하고 속내는 빨갛다. 즉 겉과 속이 다르다. 이처럼 더불어민주당의 상징색인 파란색(겉)을 띠고 있으면서, 속내는 보수정당 국민의힘의 상징색 빨간색(속)을 하고 있다는 비유인 것이다.


그 말의 기원을 캐다 보면 결국 다른 시대 다른 대륙에 가닿는다. 바이마르 독일 말기, 나치 돌격대의 갈색 제복 안에 공산주의적 속내를 의심받던 자들을 사람들은 비프스테이크 나치라 불렀다. 겉은 갈색, 속은 빨강. 한 세기를 건너뛰어, 한국의 어느 정당 지지자들은 같은 구조의 비유를 과일에 옮겨 담았다. 수박. 겉은 민주당의 파랑, 속은 보수 진영의 빨강. 우연이라 부르기엔 구조가 너무 닮았다.


리버럴을 자처하는 집단이 파시즘 정당의 내부 검열 어휘를 무의식중에 재발명했다는 사실. 이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민주당 진영의 고질적인 사상의 빈곤을 증명한 것 뿐만이 아니다. 어휘의 기원은 이념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내부의 이단을 색출하는 충동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이념 이전의 메커니즘이다. 집단이 결속을 다지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외부의 적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의심스러운 자를 먼저 처단하는 것이다. 외부의 적은 멀고 흐릿하다. 내부의 배신자는 가깝고 선명하다. 처단의 쾌감도, 결속의 효과도 후자가 압도적이다.


과일과 고기. 비유의 재료는 다르지만 문법은 동일하다. 겉과 속이라는 이분법, 의심이라는 절차, 낙인이라는 처형. 이 문법을 발명한 것은 어느 정당도 어느 시대도 아니다. 부족이라는 단위가 존재하는 한 이 문법은 계속해서 재발명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 2026년의 좌표를 박아두지 않으면 이 모든 비유는 추상으로 흩어진다. 2025년에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고, 더불어민주당은 행정부와 입법부를 동시에 쥔 거대 여당이 되었다. 수박이라는 낙인이 처음 만들어진 맥락, 즉 대선 후보 경선과 체포동의안 표결이라는 당내 권력투쟁의 고비들은 이제 과거형이다. 지금은 집권 여당의 입법 드라이브와, 그것을 저지할 의석도 의지도 부족한 소수 야당인 국민의힘이라는 완전히 역전된 공수의 구도가 남아 있다.


바로 이 구도 안에서 비유는 방향을 튼다. 과반 의석을 쥔 정당이 법안을 주도적으로 통과시킬 때,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번번이 타협하거나 물러서는 국민의힘을 향해 보수 강성 지지층은 말한다. 국민의 힘은 당색만 빨갛고 속내는 푸르스름하다. 겉으로는 야당이나 반대 세력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정권 및 권력과 결탁해 특혜를 누리는 가짜 반대 세력, 프락치, 혹은 권력의 기득권 카르텔인 엔츄파도스(Enchufados)라고 말이다. 겉은 보수의 옷을 입었으나 야성은 죽었고, 사실상 민주당의 입법 독주를 묵인하는 2중대에 불과하다고. 웰빙 정당이라는 뜻을 함의하는 멸칭이 다시 소환되는 자리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종류의 비판의 화살표가 친명이냐 비명이냐 하는 당내 구도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비명계 정치인들이 보수적이어서 수박이라 불리는 게 아니듯, 국민의힘이 속이 파랗다 비판받는 것도 노선의 좌클릭 때문만이 아니다. 둘 다 정책의 본질이 아니라 자세의 문제다. 맞서 싸울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그 의지의 결여를 색깔의 배신으로 치환해버리는 동일한 수사 장치가 양쪽 모두에서 작동한다.


대상은 다르지만 진단의 구조는 정확히 같다. 순도에 대한 집착. 진영 내부의 누구도 완전히 신뢰받지 못한다는 사실. 권력을 쥔 쪽이든 권력을 빼앗긴 쪽이든, 내부를 향한 의심의 칼날은 동일한 각도로 선다. 이것은 우연한 대칭이 아니라 필연적인 대칭이다. 모든 진영은 자신의 순도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내부를 솎아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외부의 적과 싸우는 시간보다 내부의 불순물을 가려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순간, 그 집단은 이미 정치 조직이 아니라 종교 조직의 형태로 넘어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빨강과 두 개의 파랑 사이에서, 정작 본질적인 질문은 비켜 가 있다. 친명이든 비명이든, 결국 같은 정당 안에서 같은 대북 노선(친북)과 같은 복지 포퓰리즘 강령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는 자들이라는 사실. 비명계가 친명계보다 더 보수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둘 다 같은 좌표 위의 좌파 리버럴이고, 차이는 노선이 아니라 인물이고 계파이고 자리다. 당권을 누가 잡느냐, 공천권을 누가 행사하느냐, 그 권력 투쟁에 정책적 색채라는 명분을 덧씌운 것이 수박이라는 낙인의 실제 작동 방식이다. 이념의 깃발을 흔들고 있지만 그 아래서 벌어지는 것은 순전히 권력의 배분 문제다. 도덕의 언어로 포장된 이익의 전쟁.


이 점에서 제3자의 시선, 즉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면 다른 사람들은 미처 보지 못하는 어두운 영역에 대해 깨닫게 된다. 당권과 대권의 주도권 다툼을 이념 차이로 포장하는 것은 주류가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해 동원하는 정략적 프레임에 가깝다는 진단이다. 그 진단이 정확하다면, 국민의힘을 향한 속이 파랗다는 비판 역시 같은 방식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 다수 의석의 입법 드라이브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는 것을 두고 정체성의 배신이라 부를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의석수의 산수와 정치적 기동력의 부재로 볼 것인지는 결국 관찰자가 어느 쪽에 동정적인가에 따라 갈린다. 같은 현상도 진영의 위치에 따라 색깔의 배신으로 읽히거나 구조적 무능으로 읽힌다.


정통 우파, 혹은 시장주의자의 시선으로 들어가 보면 이 비판은 훨씬 구체적인 항목들로 분해된다. 보수의 핵심 가치는 작은 정부, 규제 완화, 재정 건전성이라는 세 기둥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비판이다.


첫째는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부족한 이해다. 민주당이 대규모 재정 지출이나 현금성 복지 법안을 밀어붙일 때, 우파 정당이라면 국가 부채와 미래 세대의 부담을 명분으로 전면전을 벌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우리도 이만큼은 주겠다며 액수만 조금 깎는 어리숙한 포퓰리즘이다. 부동산 가격 통제나 기업 규제 법안 앞에서도 자유시장 원칙을 고수하기보다 여론의 눈치를 보며 어설픈 합의안에 도장을 찍는다. 


둘째는 가치와 신념의 부재, 이른바 웰빙 정당 체질이다. 영남권과 강남권이라는 안전한 텃밭에 기댄 의원들이 많다 보니, 정작 악법을 저지해야 할 결기의 순간에 몸을 사린다. 친일과 반일, 개혁과 수구라는 민주당이 짜놓은 프레임 안에 매번 갇혀 사과하고 철수하기 바쁠 뿐, 자신만의 당당한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n번방 방지법,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 등 플랫폼을 규제하고 사적 대화방이나 콘텐츠를 광범위하게 검열할 우려가 있는 법안들이 통과될 때, 국민의힘은 우파 정당으로서 '표현의 자유 침해'나 '과잉 규제'를 강하게 지적하지 않고 여론에 밀려 대거 찬성표를 던졌다.


 또한 간행물윤리위원회나 게임물관리위원회 등이 남성향 웹툰, 웹소설, 게임에 대해 과도한 잣대로 검열하고 등급을 상향할 때도, 국민의힘은 청년층의 문화적 자율성을 대변하기보다 "유해 매체물 규제"라는 기성세대의 도덕주의적 관점에 갇혀 규제를 방조했다.


대선이나 총선 국면에서는 청년 남성들의 표를 얻기 위해 '여성가족부 폐지'나 '무고죄 처벌 강화' 같은 자극적인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선거가 끝나면 법안 통과를 위한 실질적인 입법 노력이나 정치적 투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나마 국민의힘을 변호하자면 친페미니즘 성향의 더불어민주당의 견제가 극심한 탓도 없잖아있긴하다.) 여성할당제나 페미니즘 성향의 시민단체 예산 지원 문제 등 기존의 제도적 기틀을 개혁해야 할 때도, "여성 표가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며 민주당이 깔아놓은 프레임을 그대로 수용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셋째는 무능한 전략이다. 날치기 입법이 진행될 때 정교한 필리버스터나 설득력 있는 대안 법안으로 중도층을 끌어오는 대신, 회의장을 보이콧하거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다 결국 법안이 통과되면 허무하게 수용하는 패턴을 반복한다. 넷째는 청년과 중도층을 향한 설득의 실패다. 공정과 기회와 자유와 법치라는, 본래 매력적일 수 있는 언어를 현대적으로 번역해내지 못한 채 과거의 수사에 갇혀 있거나, 아예 무색무취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 네 가지 비판을 한 줄로 묶으면 결론은 명확하다. 겉으로는 보수주의라는 이름의 옷을 입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외치지만, 실상은 저항할 용기도 없고 보수의 가치를 제대로 체화하지도 못한 채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하는 무늬만 보수 정당이라는 진단.


그런데 이 진단을 한 겹 더 벗겨보면 흥미로운 균열이 드러난다. 이 비판 전체가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국민의힘이, 혹은 그 전신들이 한때는 진짜 경제자유주의적 보수였다는 신화다. 그 신화는 사실 한국 정치사에서 거의 성립한 적이 없다. 권위주의 개발국가 시기부터 한국의 우파는 작은 정부가 아니라 국가 주도 경제개발, 규제 완화가 아니라 선별적 산업정책과 재벌 육성, 시장의 자율성이 아니라 정경유착을 통한 자원 배분으로 정체성을 채워왔다. 자유시장경제는 선거철 구호에 가까웠지, 실제 집권기에 일관되게 관철된 적은 드물다. 그러니 지금의 국민의힘이 잃어버렸다고 비판받는 그 순수한 보수적 특성은, 애초에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잃어버렸다고 탓하는 일에 가깝다. 박탈감의 대상이 환상이라는 사실은 박탈감의 강도를 줄이지 않는다. 오히려 환상일수록 더 격렬하게 그리워하는 법이다.


힘의 측면에서도 같은 균열이 보인다. 2026년의 국민의힘은 과반 의석을 쥔 여당에 맞서는 소수 야당이며, 거듭된 탄핵 정국과 인적 자원의 유출로 진영 자체가 얇아져 있다. 강성 지지층의 온라인 화력과 실제 정치적 동원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러므로 속이 파랗다는 낙인은 도덕적 배신의 서사를 빌려 오지만, 실제로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의석수 부족과 정당 조직력의 빈곤일 가능성도 크다. 


다만 이러한 진단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또 다른 종류의 도피처가 되어버린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의석수의 부족 문제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버리면, 정작 남아 있어야 할 비판의 날이 무뎌진다. 국민의힘이 보여주는 무기력함은 단지 머릿수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머릿수만큼의 선명한 언어조차 내놓지 못한다는 데서 더 본질적으로 드러난다. 정부 여당의 정책에 맞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자기 색깔의 대안을 내놓는 것과, 민주당이 던진 좌익 포퓰리즘 의제 위에서 액수만 조금 깎아 따라가는 것은 의석수와는 무관한 별개의 역량이다. 소수 야당이라 할지라도 날카로운 정책 비판과 또렷한 대안적 서사는 의석 없이도 가능하다. 오히려 의석이 적을수록 언어의 선명도로 존재감을 벌충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야당의 생리다. 그런데 국민의힘의 수사는 민주당의 문법을 빌려 와 정도만 조절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복지 확대에는 액수를 깎아 맞장구치고, 문화·역사 의제에는 보수적 역사관을 내세우기보다는 민주당의 역사관을 수용하고 사과로 대응하는 식이다. 이것은 머릿수의 결핍이 아니라 언어의 결핍이고, 자기 진영만의 세계관을 구축하지 못한 채 상대 진영이 짜놓은 운동장 위에서만 뛰는 데서 오는 결핍이다. 그러니 균열은 한 겹이 아니라 두 겹이다. 신화가 깨진 자리에는 구조적 빈곤이 있고, 구조적 빈곤을 인정한 자리에는 다시 진짜 이념적 빈곤이 남는다. 둘 중 어느 것으로도 다른 것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다.


한편으로 더불어민주당의 내부 검열이 그토록 격렬해 보이면서도, 정작 권력의 향배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비명계나 민주당 온건파(?) 지지층이 SNS와 커뮤니티에서 아무리 격렬하게 주류를 향해 수박 낙인찍기를 멈추라 항의해도, 그 항의가 공천이나 당론에 단 한 번도 실질적인 양보를 끌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선거일이 다가오면 결국 모두가 한 곳으로 모인다는 사실. 보수 정당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 혹은 야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명분 하나가 모든 내부의 불만을 무력화시킨다. 국회에서 법안과 당론과 공천권을 놓고 멱살잡이와 주먹질을 벌이던 국회선진화법 이전 때처럼 사생결단으로 싸울 것도 아니면서, 으르렁대는 시늉만 격렬하다.


권력자 입장에서 이것은 축복이다. 비주류의 표는 어차피 떠나지 않는 콘크리트다. 콘크리트는 달랠 필요가 없다. 달랠 필요가 없는 지지층의 의견은 들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공천권은, 당론은, 핵심 자원의 배분은 언제나 주류의 손에서만 움직인다. 비주류가 아무리 격렬하게 싸우는 척해도 그것은 권력 구조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는 의례적 소음에 불과하다. 정치학이 말하는 견제의 유일한 무기, 지지 철회 혹은 교차 투표라는 위협이 거세된 상태에서 모든 내부 투쟁은 연극으로 전락한다. 주류 계파가 비주류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것은 무신경해서가 아니라, 보지 않아도 손해 볼 일이 없다는 합리적 계산의 결과다.


여기서 국회선진화법 이후의 풍경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몸싸움이 전면 금지된 자리에 들어선 것은 숙고가 아니라 언어의 인플레이션이었다. 멱살을 잡지 않으니 더 격한 말을 쏟아낸다. 실제 위험은 사라졌는데 표현의 강도는 오히려 높아진다. 무대 위에서는 사생결단의 정치를 연기하고, 무대 뒤에서는 공천 지분이라는 실리를 나눈다. 겉으로는 대단한 이념과 가치의 차이로 밤낮없이 싸우는 듯 호들갑을 떨지만, 실상은 당직 배분과 공천 지분이라는 밥그릇 싸움에 가깝다. 지지자들만 감정적으로 몰입해 대리전을 치를 뿐, 정치인들은 무대 뒤에서 형님 동생 하며 실리를 챙기는 구조다. 이것은 위선이라기보다 진화의 결과에 가깝다. 물리적 비용이 사라진 자리에서 정치적 수사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도록 설계되어 있다.


조선 왕조의 선비들은 도끼를 지니고 상소를 올렸다. 지부상소(持斧上疏).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목을 치라는 뜻이었다. 왕권이 절대적이던 시절에도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거는 자들이 있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권력의 소재와 무관하게 작동했다는 뜻이다.


지금의 풍경은 이상하게 뒤집혀 있다. 시민이 주권자라고 선언된 민주정에서, 2025년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정책이 이재명 지지자들의 입장에서 탐탁지 않게 여길 만한 모습을 보여도 제대로 된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다. 비판은 곧 내부 총질로 규정되고, 정부를 흔들지 말라는 함성 아래 묻힌다. 권력에 대한 비판이 권력의 소재에 따라 작동을 멈추는 현상. 왕조 시대에도 존재했던 견제의 기능이, 시민이 주인이라 자처하는 시대에 와서 오히려 마비된다는 역설이다.


이것을 단순히 팬덤 정치의 폐해라 부르는 것은 손쉽지만 충분하지 않다. 더 깊은 층위에는 동일시의 메커니즘이 있다. 지지자는 정치인을 감시하는 자가 아니라 정치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로 변모한다. 그의 실패는 나의 실패가 되고, 그를 향한 비판은 나를 향한 공격으로 체감된다. 이 동일시가 완성되는 순간 비판적 거리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유권자가 권력을 감시하는 자리에서 권력을 옹호하는 자리로 미끄러진다. 권력은 그 미끄러짐을 굳이 강제할 필요도 없다. 동일시는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이 동일시의 메커니즘은 친명이라는 계파 명칭 자체에 이미 새겨져 있다. 친이재명. 누구를 따르는가가 노선의 이름이 되어버린 정당에서, 그 누구를 향한 비판은 노선의 배신이 아니라 인격의 배신으로 읽힌다. 정책에 대한 이견을 낼 자리가 애초에 설계되어 있지 않은 구조다. 상소문은 적어도 임금이라는 한 사람을 향한 비판이되, 유교적 대의명분이라는 그보다 더 높은 기준에 호소할 수 있었다. 지금의 진영 정치에는 그 더 높은 기준 자체가 인물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물이 곧 기준이 되어버린 자리에서, 기준에 대한 비판은 발화될 문법조차 갖지 못한다.


인물중심주의에 대해 알고싶다면 두 용어를 알 필요가 있다. 바로 개딸과 뉴이재명이다. 


개딸이란 무엇인가? 2022년 대선 정국 전후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오는 '개성 있고 말 잘 듣는 딸(개딸)'이라는 표현에서 유래했으며 당시 20~30대 여성 지지자들이 이재명 후보를 '잼파파'라 불렀던(오글거리는)  강성 이재명 팬덤을 일컫는 용어이다.


이후 이들이 당내 비명계 의원들에게 문자 폭탄을 보내고, 팩스 테러를 하거나, '수박'이라며 온갖 멸칭을 퍼붓는 등 공격적인 집단행동을 일삼으면서 의미는 오염, 아니 '개새끼'라는 욕설을 연상시키는 '개딸'의 어감의 이미지대로  현재는 비민주당 지지층이나 당내 비명계 사이에서 '눈먼 이념으로 무장한 극성 추종자'를 비하하는 강력한 멸칭으로 쓰이고 있다.


2025년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가볍고 폭력적인 이미지의 '개딸'이라는 슬랭 대신, 훨씬 정제되고 무게감 있어보이는 듯한 '뉴 이재명'이라는 용어가 전면에 등장했다. '뉴 이재명'은 야당 시절의 날 서고 거친 이미지를 벗고, 행정부와 과반 의석을 모두 쥔 집권 여당으로서의 '주류 이재명 체제'를 공고히 하겠다는 정치적 선언으로 읽혀진다. 다만 '뉴이재명(New Lee)'이라는 세련된 척 하는 라벨의 등장은 한국 정치가 마주한 가장 우스꽝스럽고도 비극적인 퇴행을 보여준다.


과거 '개딸'이 야당 외곽에서 문자 폭탄을 돌리고 '수박'을 감별하며 으르렁대던 거친 행동대장이었다면, 집권 여당의 옷을 입고 등장한 '뉴이재명'은 훨씬 음습하고 기만적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계엄이라는 헌정 위기 속에서 흘러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중도층이라 자처하지만, 실상은 권력자의 실책에 자발적으로 눈을 감은 '맹종의 카르텔'에 불과하다.


이 현상의 가장 큰 비극은 민주정의 유권자가 스스로를 왕조 시대의 가신(臣下)으로 격하시켰다는 점에 있다. 과거 조선시대 선비들은 왕권이 절대적이던 시절에도 목숨을 걸고 "아니되옵니다"를 외치며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뉴이재명'의 세계관 속에는 그 최소한의 소신조차 실종되었다. 


이제 명확히 드러난 이재명 정부의 실정들로는 무엇이 있는가? 고물가·고금리 위기 속에서도 정부의 미온적인 거시경제 대책으로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돌파하며 고착화되었다. 수입 물가 폭등으로 서민 경제가 파탄 나고 있음에도 실효성 있는 환율 방어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야당 시절부터 주장하던 포퓰리즘성 현금 살포 정책을 '민생회복쿠폰'이라는 이름으로 강행했다. 이미 고물가로 신음하는 시장에 막대한 유동성을 추가로 공급하여 인플레이션을 더욱 자극하고, 국가 재정 건전성을 치명적으로 악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금성 복지 예산을 무리하게 편성하다 정작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 있는 군 장병들과 초급 간부들의 국방비(봉급, 수당)가 미지급되거나 지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애국심과 희생만을 강요하는 군인 홀대의 정점이다.


불법물 차단을 명분으로 전 세계 수많은 웹사이트가 사용하는 CDN 서비스인 'Cloudflare' 기반 사이트들을 무차별적으로 차단·검열하는 시스템을 도입하여 개인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했다.


대기업 통신사(KT)의 과실로 수많은 고객의 소액결제 권리가 침해당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정부와 방통위 등 관계 부처는 철저한 원인 규명과 징계 대신 부실한 검증과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며 대기업의 횡포를 사실상 방관했다.


2026년 6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일부 지역에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발을 돌리는 헌정 사상 유례없는 선관위의 관리 부실 사태가 터졌다. 선관위의 정치적 편향성(친민주당) 의혹과 관리 실패가 제기되었음에도 여당인 민주당과 정부는 이를 철저히 방관했다. 심지어 투표권 박탈에 분노한 시민들이 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오자, 과거 '공권력 과잉 진압'을 그토록 비판하던 민주당 정부가 경찰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며 이중잣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북한의 군사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전방 군인들에게 실효성 있는 무기 체계 강화 대신 '삼단봉 휴대'라는 어처구니없는 지침을 내렸다.


윤석열 정부 시절 해병대 제1사단 일병 사망 사고에 대해서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이재명이었으나, 이재명 집권 이후 발생한 제73보병사단 예비군 사망 사건에 대해서 정부는 거의 무관심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급진적인 대북 유화 정책과 안보 보안 불신으로 인해, 동맹국인 미국이 한국 정부에 대한 고위급 대북 핵심 정보 공유를 전면 중지하는 안보 참사가 발생했다. 한미동맹이 사실상 형해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또한 국익이라는 명분 아래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이나 영토 도발, 경제적 압박에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굴종적인 저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국내 핵심 산업 기술의 중국 유출 방치 등 친중 노선으로의 급격한 선회는 대한민국의 장기적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뉴이재명 집단은 "왕의 깊은 뜻이 있겠지"라며 무비판적인 순종을 선택한다. "정부를 흔들지 말라"는 정파적 이기주의는 합리적인 비판을 '내부 총질'이자 '분탕'으로 몰아세우는 거대한 재갈이 되었다.


결국 이들이 증명하는 것은 '충성의 표류'이자 민주주의의 외주화다. 정당의 가치나 정책, 이념적 강령은 사라지고 오직 한 사람의 평판과 권력 유지라는 '인물 중심의 과두제'가 그 자리를 채웠다. 낮에는 대중 앞에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유치한 극장 정치를 연기하고, 밤에는 기득권을 공유하는 정치 계급의 독주를 지지자들이 스스로 공고히 해주고 있는 셈이다.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 가에타노 모스카(Gaetano Mosca), 그리고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 이후로 알려진 주장이 있다. 어떤 조직이든 규모가 커지면 소수의 핵심이 자원과 정보와 결정권을 독점하게 된다는 것. 파레토는 이것을 엘리트의 순환이라 불렀고, 모스카는 지배계급이라 불렀으며, 미헬스는 여기에 과두제의 철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장 평등을 표방하는 조직, 가장 대중에 기반한 조직일수록 오히려 더 빠르게 소수 지도부의 과두제로 수렴한다는 것이 미헬스가 독일 사회민주당을 관찰하며 끌어낸 결론이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조차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언어를 쓰는 조직일수록 과두제의 실체를 가리는 데 더 능숙하다. 도덕의 언어, 진보의 언어, 정의의 언어로 위장된 권력 다툼은 적나라한 권력 다툼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명분이 있으면 지지자가 자발적으로 싸워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모든 풍경의 밑바닥에는 의심스러운 가설 하나가 깔려 있다. 어쩌면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일정한 규모를 넘어서면 구조적으로 과두제를 향해 수렴하도록 설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가설. 선거라는 절차는 정당성을 부여할 뿐 권력의 집중을 막지는 못한다. 대중의 역할은 점점 정책의 공동 결정자에서 진영의 응원단으로 축소된다. 응원단의 충성도가 높을수록 무대 위의 배우들은 더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런데도 이 구조가 완전히 안정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핵심 인물들 사이의 공천 다툼, 자리 다툼은 진짜로 격렬하다. 모든 것이 연극은 아니다. 도덕의 언어로 위장된 것은 대중을 향한 부분이고, 자원 배분을 둘러싼 부분은 진짜 전쟁이다. 위장된 것과 진짜인 것이 한 몸에 공존한다는 사실, 이것이 현대 정당 정치의 가장 정직한 묘사일 것이다.


흥미로운 비교가 하나 더 있다. 명예 결투의 시대. 모욕을 당하면 목숨을 걸고 결투를 신청하던 시절에는 적어도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 입을 함부로 놀린 자는 그 대가를 몸으로 치를 각오를 해야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 위험을 동반하는 의무였던 시절이다.


지금의 정치인들은 면책특권이라는 안전망 아래서 거친 말을 쏟아낸다. 위험은 0에 수렴하는데 정치적 수사(修辭)의 강도는 최대치를 향한다. 위험과 발언의 격렬함이 반비례하는 구조. 이 불균형이 정치를 점점 더 유치한 드라마로 만든다. 진짜 위험을 감수하는 자는 사라지고, 위험을 감수하는 시늉만 하는 자가 그 자리를 채운다. 드라마 시청자는 이 시늉을 진짜 투쟁으로 착각하고 박수를 보낸다. 박수가 곧 다음 선거의 자원이 된다는 사실을 정치인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이 모든 관찰을 한 줄로 정리하고 싶은 유혹이 있지만, 그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편이 정직하다. 수박이라는 낙인과 비프스테이크 나치라는 낙인 사이의 평행은 진영을 가리지 않는 인간 집단의 항상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 평행을 누가 먼저 지적하느냐는 결국 또 다른 진영 논리의 연장이기도 하다. 국민의힘의 무기력을 속이 파랗다고 부르는 것과(물론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의 편견과 달리 정말로 힘이 없고 딱히 보수적이지도 않다) 비명계를 수박이라 부르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둘 다 순도에 대한 강박이고, 둘 다 내부의 적을 향한 사냥이다.


문명은 이 모순을 해소하지 못한 채로 계속 굴러간다. 정치는 정책의 경연장이라는 자기서사를 유지하면서, 실제로는 부족의 결속을 다지는 의례로 기능한다. 시민은 감시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응원단의 역할을 수행한다. 권력은 민주주의의 언어로 말하면서, 실제로는 과두제의 문법으로 움직인다. 이 어긋남을 직시하는 것과, 이 어긋남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후자를 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야말로 이 모든 허황되고 파멸적인 구조가 무너지지 않고 계속 재생산되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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