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남한의 편에서 싸운 화교들

6·25 전쟁 당시 남한의 편에서 싸운 화교들


마오쩌둥이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명분으로 한반도에 수십만 병력을 밀어 넣은 1950년 10월, 그 최전선에서 총알을 받아내던 병사들 중 상당수는 마오쩌둥의 이념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불과 1~2년 전, 그들은 장제스 휘하의 국민당 군복을 입고 있었다. 국공내전에서 패하거나 포위당해 투항한 후, 중공군 군복으로 갈아입혀진 채 한반도 전선으로 끌려온 것이다. 그들에게 이 전쟁은 처음부터 자신의 전쟁이 아니었다 [1].


역사는 이런 세부사항을 잘 기억하지 않는다.


한국 교과서는 반공포로 석방을 이승만이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벌인 정치적 사건으로 서술한다. 몇 줄, 길어야 한 단락. 그 간략한 서술 속에서 사라진 것들이 있다. 누가 그 수용소 안에 있었는지, 왜 그들이 거기 있었는지, 그들이 이후 어디로 갔는지. 교과서가 생략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구조가 숨어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전선의 축소판이었다. 중공군 포로 약 2만 명 중 70%가 넘는 1만 4천여 명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 수용소 안은 매일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는 같은 철조망 안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반공포로들은 자신이 공산당 첩자가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증명했다. 살갗에 '반공항소(反共抗蘇)'를 새겼다. 불타는 대만행 의지를 증명하기 위한 물리적 각인.


1953년 6월 18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몰래 헌병대를 동원해 전국 수용소의 반공포로 2만 7천여 명을 전격 석방했다 [3]. 이 행위의 정치적 의미—휴전 반대, 미국 압박, 협상력 강화—는 많이 논의되었다. 덜 논의된 것은 그 숫자의 내부 구성이다.


석방된 포로는 크게 두 갈래였다. 약 2만 3천~2만 5천 명의 한국인 반공포로가 있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집된 남한 청년들, 김일성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투항한 북한 출신 병사들. 이들은 석방된 후 국군에 자원입대하거나 남한 사회에 흡수되었다 [4]. 그리고 그 옆에, 약 1만 4천 명의 중공군 반공포로들이 있었다. 전체의 3분의 1 이상. 그들이 바로 국민당 출신 한족들이었다.


이들의 이후 행로는 단순하지 않다. 정전협정의 자원송환 원칙과 이승만의 석방 조치가 겹쳐지면서, 최종적으로 14,235명의 중공군 반공포로가 1954년 1월 배를 타고 대만으로 건너갔다 [5]. 장제스는 이들을 '반공의사(反共義士)'라 명명하고 국가적으로 환영했다. 대만 정부는 이들이 도착한 1월 23일을 '1·23 자유의 날'로 지정했다.


국민당 군인으로 태어나,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에 포위당하고, 중공군 군복을 입혀진 채 한반도에서 싸우다 포로가 되고, 거제도 수용소에서 이념 전쟁을 다시 치르다가, 마침내 이승만의 새벽 작전과 정전협정의 틈새를 통해 대만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이 행로의 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냉전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체스 말처럼 움직였는지가 보인다.


1992년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이 반공포로들의 역사는 외교적으로 미묘한 위치에 놓였다 [6]. 교과서에서 세부가 사라진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역사의 생략은 종종 무지가 아니라 선택이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또 다른 흐름이 있었다. 중공군 내부에서 포로로 잡혀 대만으로 탈출한 이들과 달리, 처음부터 총을 들고 자발적으로 싸운 이들.


SC지대(Seoul Chinese, 육군 제4863부대 SC지대)는 1951년 봄 창설되었다 [7]. 국공내전 시기 국민당 군관학교 출신의 화교 류궈화(劉國華)가 한국군 정보 수뇌부를 직접 찾아가 "화교 청년들을 모아 국군을 돕겠다"고 제안한 것이 시작이었다. 한국 육군 첩보부대(HID) 산하에 정식으로 편성된 이 부대의 대원 200여 명은 모두 반공 성향의 재한 화교 청년들이었다. 장교가 부족하자 대만 정부에서 정식 군사 장교를 파견해 교육과 작전을 맡겼다 [8].


이들의 전술적 무기는 외모와 언어였다. 중공군과 구분되지 않는 얼굴, 같은 말. 중공군 복장으로 적진에 침투해 첩보를 수집하고 포로를 심문했다. 부대가 해체될 때 생존한 무장공작원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9].


숫자가 말하는 것이 있다. 200명 중 생존자 20명. 90%의 소멸. 이들은 군번도 없었고, 계급도 없었고, 대한민국 국적도 없었다.


SC지대 외에도 자발적으로 전선에 뛰어든 화교들이 있었다. 백선엽 장군의 국군 제1사단 산하에 화교들이 주축이 된 중국인 특별수색대가 편성되어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 세력의 최전방까지 함께 싸웠다 [10].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군인 출신으로 평양에 살던 위서방(웨이시팡)과 강혜림(장후이린)은 전쟁이 터지자 1,000여 명 규모의 반공 게릴라 조직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결성해 후방 교란 작전을 폈고, 이후 국군에 정식 종군했다 [11].


강혜림은 백병전 중 전사했다. 위서방은 박격포탄에 중상을 입으면서도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은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 묘역에 잠든 단 세 명의 외국인 중 둘이다. 나머지 한 명은 제암리 학살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 박사다 [12].


외국인 묘역에 잠든 세 사람의 계보가 이것이다. 식민지 학살을 고발한 캐나다 선교사, 국공내전에서 밀려난 국민당 출신 화교 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특정한 방식으로 기억하기로 한 외국인들의 목록.


1950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의 성격을 단일하게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무리다. 그것은 남북한 간의 전쟁이었고,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었고, 동시에 중국 국공내전의 연장이었다. 마오쩌둥이 내전의 패잔병들을 다시 전선에 밀어 넣었을 때, 그 병사들은 또 다른 전쟁 속에서 자신의 전쟁을 치렀다. 거제도 수용소 안에서, 살갗에 새긴 문신으로. 한반도에 정착해 살던 화교들은 자신들의 전쟁을 들고 와 이 땅의 전쟁에 얹었다.


이 겹겹의 구조를 한국 교과서의 한두 줄이 담아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담으려 시도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그 빈자리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생략된 자리는 투명하지 않다. 거기에는 형태가 있다.


대만과의 단교 이후 이 역사가 외교적으로 민감해졌다는 사실은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보여준다. 역사의 기억은 현재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정된다. 이것을 음모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그냥 국제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국가가 기억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은 대부분 의식적이지 않다. 관성이 선택을 대신한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가장 먼저 소진된 것은 언제나 국적이 불분명한 자들이었다. 국민당 군인이었다가 중공군이 된 이들,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채로 총을 든 화교 청년들. 이들은 어떤 국가의 정식 자산도 아니었고, 어떤 전쟁의 공식 주체도 아니었다. 그래서 쓸모가 있었다.


SC지대의 대원들이 중공군 복장으로 적진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 복장과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중성이 전술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중성은 처음부터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역사가 그들에게 부여한 것이었다.


1954년 1월 대만에 도착한 14,235명의 반공의사들은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그 영웅 서사의 이면에는, 그들이 왜 거기 있었는지에 대한 더 불편한 이야기가 있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군대의 병사들이 승리한 쪽의 총알받이로 한반도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포로가 되고, 석방되고, 다시 자신의 원래 진영으로 돌아간 것이다. 영웅이라는 호칭은 이 구조를 덮는다.


역사에서 영웅 서사가 등장할 때, 그 아래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를 보는 것이 역사 분석의 기본이다.


거제도에서 대만으로, 평양에서 현충원으로. 이 이동들의 지도를 한 장에 겹쳐 놓으면 냉전 동아시아의 단면이 드러난다. 그것은 국가 대 국가의 질서가 아니라, 그 국가들 사이의 틈새에서 살아남거나 죽어간 인간들의 이동 경로다. 이념은 그들에게 목적지를 부여했지만, 그 목적지까지 가는 길의 형태를 결정한 것은 냉혹한 국제정치였다.


이 냉혹한 국제정치는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 주석 - 


[1] https://m.joongdo.co.kr/view.php?key=20180218010006967  

[2] https://theworldview.co.kr/archives/13983  

[3] https://www.jayu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18  

[4] https://v.daum.net/v/65rg3G8B1o  

[5]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667594  

[6] https://shindonga.donga.com/inter/article/all/13/1023905/1  

[7] https://namu.wiki/w/SC%EC%A7%80%EB%8C%80  

[8]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3052515230003222  

[9] https://month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2437  

[10] https://ko.wikipedia.org/wiki/6.25_%EC%A0%84%EC%9F%81%EC%9D%98_%ED%99%94%EA%B5%90_%EC%B0%B8%EC%A0%84_%EC%9A%A9%EC%82%AC  

[11] https://month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30  

[12] https://www.asiae.co.kr/article/2023071713563329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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