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과 만주족, 그 관계의 역사

한민족과 만주족, 그 관계의 역사


민족이라는 것은 언제나 지도보다 먼저 존재했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피가 먼저 흐르고, 그 피의 경계 위에 선이 그어진다고. 그러나 분자인류학이 동아시아의 게놈 데이터를 들이밀기 시작하면서, 이 믿음이 얼마나 취약한지가 조용히 드러났다.


한민족과 만주족이 동족에 가깝다는 감각은 어디서 오는가. 지리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수천 년을 마주 보았으니, 피가 섞였을 것이라는 직관은 자연스럽다. 역사책에도 여진족이 조선의 국경을 넘나들었다고 나와 있고, 귀화한 여진인이 조선 성씨를 하사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충분히 근거 있는 감각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염색체 전체 게놈 분석(PCA, ADMIXTURE)을 돌리면 그 감각은 뭉개진다.


현대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집단은 만주족이 아니다. 일본인이다. 정확히는 야요이계 성분이 주를 이루는 본토 일본인이고, 그 다음이 중국 북부 한족(Northern Han)이다[1][2]. 만주족은 이 서열에서 한국인의 유전적 이웃이 아니라, 중국 북부 한족과 사실상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수렴한 집단으로 나타난다[3][4].


왜 이렇게 되었는가. 만주족이 원래부터 한국인과 멀었던 것이 아니다. 만주족이 스스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청나라가 1644년 중원을 장악하면서 만주족의 핵심 인구는 베이징으로 대거 이주했다. 그리고 청나라 말기부터 이어진 창관둥(闖關東), 즉 중국 내륙 한족 농민들의 폭발적인 만주 유입이 그 빈자리를 메웠다. 인구 교체의 결과로, 현재 만주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상염색체는 수억 한족의 유전적 바다에 녹아든 결과물이다[5][6].


부계 Y염색체를 보면 구조가 좀 더 선명해진다.


한국인 남성의 70~80%는 하플로그룹 O(O2, O1b 등)에 속한다. 농경 문화의 확산과 함께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진 남방·동아시아계 계통이다. 만주족 역시 오랜 혼혈로 하플로 O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두 집단은 유사성을 보인다[7]. 얼핏 이것이 동족설의 근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하플로 C에 있다. 북방 시베리아·몽골계 유전자인 하플로 C3(C-M217), 그리고 특히 금나라와 청나라 황실(애신각라 씨족)의 핵심 부계로 추정되는 C3c(C-M48)는 한국인 남성에게서 사실상 전혀 검출되지 않는다[8]. 한국인에게서 나타나는 하플로 C 성분(약 10~15%)은 만주족 황실 계통과는 다른 갈래인 구아시아계(C2) 성분이다[8]. 이 차이는 작지 않다. 만주족 지배층의 핵심 부계가 한반도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무 접점도 없는가. 그것도 아니다.


고대 DNA 연구는 두 집단이 수천 년 전 단계에서 일부 조상을 공유했음을 보여준다. 신석기~청동기 시대 중국 동북부 서요하(西遼河) 유역에서 조·기장 농경을 하던 고대 인구 집단이 한반도로 이동하여 한민족의 주요 뿌리 중 하나를 형성했으며[9], 만주족의 조상 역시 이 지역 인근에서 발원했다. 뿌리 단계의 교집합은 실재한다.


그러나 이후 경로는 완전히 갈라진다. 한민족은 한반도라는 지리적으로 격리된 공간에서 독자적인 유전적 연속성을 유지했고, 만주족은 대륙 내부에서 거대한 한족 인구와 융합되면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9].


공유된 고대 조상을 현재의 동족성으로 환산하는 것은 계산 오류다. 수천 년의 분기를 무시하고 선사시대의 교집합만 꺼내드는 논리는, 현재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적 유사성을 근거로 두 민족이 동족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구조적으로 같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끼어든다. 금나라 황실의 시조 김함보(函普)가 신라 출신이라는 기록이다.


이것은 재야의 낭설이 아니다. 금나라의 정사(正史)인 《금사(金史)》 시조세기에 명시되어 있고, 송나라 기록인 《송막기문(松漠紀聞)》과 청나라 황실이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도 그가 신라 출신의 김씨라고 기록되어 있다(10)[11]. 역사학계가 정설로 받아들이는 사실이다.


신라 말기~고려 초기, 반도 북부의 혼란을 피해 만주로 망명한 신라계 인물이 여진족 추장이 되었다. 발해 멸망(926년) 이후 만주는 거대한 지배층 공백 지대였고, 당시 여진족은 아직 고도의 법률이나 제도가 없는 부족 사회였다. 김함보는 부족 간 살인 사건을 재물로 배상하는 법을 제정해 분쟁을 중재하며 추장으로 추대받았다. 문명국 출신의 지식인이 낙후된 주변 지역으로 이동해 지배층이 된 사례, 역사에서 드물지 않다.


그의 후손 아골타가 1115년 여진족을 통일하고 세운 나라가 금(金)이다. 나라 이름을 '금'으로 정한 이유를 아골타는 직접 밝혔다. "우리 시조의 성씨가 김(金)씨이기 때문이다." 수백 년 뒤 금나라의 후예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 그리고 청나라의 황실 성씨 애신각라(愛新覺羅)에서 '아이신(Aisin)'은 만주어로 금(金)을 뜻한다[12]. 이들은 마지막까지 '김씨 황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문자 그대로 유지했다.


이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을 증명하는가.


지배층의 기원이 민족 전체의 기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진족의 혈통적·문화적 기반은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층이었던 말갈족(속말말갈, 흑수말갈)이다. 발해 멸망 후 파편화된 이 부족들을 통일하는 계기를 만든 왕가의 시조가 신라계 망명객이었을 뿐, 민족의 실체는 다른 곳에 있다[13].


비유는 이미 역사 안에 있다. 기원전 2세기, 위만이 연나라 지역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해 정권을 잡았다. 위만조선이라고 부르지만, 그 나라의 피지배층과 문화적 기반은 엄연히 고조선의 것이었다. 그래서 역사학계는 위만조선을 중국사가 아닌 한국사로 분류한다[14]. 같은 이치다. 김함보의 신라 기원이 사실이라도, 금나라를 한국사라고 부를 수는 없다. 만주족 전체가 한민족의 동족이라는 결론은 더더욱 나오지 않는다.


지배층의 혈통과 민족 전체의 혈통을 동일시하는 착시, 이것이 "만주족은 우리 동족"이라는 감각을 만들어내는 핵심 구조다.


유전학 데이터가 말하는 것과 역사 서술이 말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정보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민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 어느 시간 단면에서 경계를 긋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선사시대의 공유 조상을 근거로 삼으면 동아시아 민족 대부분은 어느 정도 친척이다. 왕실 계보를 근거로 삼으면 신라의 피가 청나라 황실에 흘렀다고도 말할 수 있다. 국경 지대의 혼혈사를 근거로 삼으면 4군 6진 일대의 여진족과 조선인은 실질적으로 피를 나눈 사이였다.


어느 것도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만주족은 한민족의 동족"이라는 단일한 명제를 지탱하지 못한다.


지도 위의 인접성은 피의 친연성과 다르다. 왕실의 계보는 민족의 계보와 다르다. 그리고 현재의 게놈은 과거의 접촉사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만주족은 지금 유전적으로 한족이다. 역사적으로 그 과정이 어땠든, 숫자는 그렇게 나온다.


이 불일치를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다만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피와 지도를 동시에 다루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둘 중 편리한 쪽만 골라 쓰는 구조라는 것도.


관계에는 언제나 비대칭이 있다. 동등한 두 집단이 서로를 마주보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한쪽이 다른 쪽을 위로 올려다보고 있다. 조선과 건주여진의 관계가 그랬다. 이 관계를 동족의 정서적 유대로 읽는 것은 구조를 놓치는 일이다.


조선 세종~성종 연간의 실록을 보면, 국경 인근 여진족 추장들이 조선 국왕을 향해 "우리는 대대로 조선의 은혜를 입어 살았으니 조선 국왕은 우리의 어버이와 같다"고 말하는 대목이 반복해서 등장한다[15]. 어버이. 이 단어를 동족 의식의 증거로 읽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족 의식이 아니라 신속(臣屬)의 언어다. 신하가 왕에게 하는 말이다.


건주여진은 조선의 관직을 구했다. 종성 첨지, 회령 만호 같은 직함을 받는 것을 가문의 엄청난 영광으로 여겼고, 명나라가 관직을 주어도 "우리는 조선의 관직을 더 귀하게 여긴다"며 조선의 지배 질서 안에 스스로 들어가기를 자처했다[15]. 이들이 원한 것은 혈통의 확인이 아니었다. 문명국의 보증이었다.


당시 만주 땅에서 사냥과 약탈을 하며 살던 여진족에게 조선은 화려한 의복, 따뜻한 온돌, 철제 농기구, 쌀과 소금이 풍부한 고도의 문명국이었다[16]. 이들이 가졌던 친밀감의 실체는 혈통적 동질감이 아니라 선진 문명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었다. 어버이라고 부른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위계 때문이다.


조선 역시 이들을 동족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단순한 적으로도 보지 않았다.


조선의 대여진 정책은 기미정책(羈縻政策)이라 불린다. 말 그대로 고삐와 굴레다. 국경 밖 여진족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도록 추장들에게 조선의 관직을 하사하고 무역 권리를 주며 서로 이간질했다. 조선에 우호적인 여진족, 이른바 번호(藩胡)를 키워 조선을 공격하는 적대적 여진족을 막아내는 완충지대로 삼은 것이다[17].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막는다.


청나라 황실의 직계 조상이자 건주여진의 대추장이었던 먼터무(맹가첩목아)는 이성계와 사적으로 매우 친밀한 관계였고, 조선으로부터 상장군이라는 정식 관직을 제수받아 함경도 회령 일대에서 부족을 이끌었다[17]. 조선은 이들을 부하이자 울타리로 부리고 있었다. 먼터무의 후손이 훗날 청나라 황실 애신각라 씨족이 된다는 사실은, 이 관계의 아이러니를 한층 짙게 만든다.


조선이 건주여진을 이용할 생각을 못했던 것이 아니다. 이미 충분히 이용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이용이 어느 순간 통제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16세기 말, 타이밍이 어긋났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하며 급성장한 시기는 정교하게도 조선이 임진왜란(1592~1598)을 겪으며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던 때였다[18]. 조선 북방 국경을 지키던 정예 병력이 임진왜란 초기에 전멸하면서, 조선은 북방 여진족을 통제할 힘을 잃었다. 남쪽에서 일본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는 사이, 북방의 감시 공백을 틈타 누르하치가 만주를 순식간에 통일해 버렸다[18].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을 제안하기도 했다. "우리가 군대를 보내 왜군을 쳐부수어 주겠다"는 것이었다[18]. 조선은 거절했다. 명분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보적 판단이기도 했다. 통제 불가능한 군사 집단을 한반도 내부로 불러들였다가는 왜군이 물러간 뒤 여진족이 조선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다[19]. 사냥개를 집 안으로 들일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명나라의 감시라는 구조적 제약도 있었다. 만주 지역의 종주권은 명나라에 있었고, 조선이 여진족과 독자적인 대규모 군사 동맹을 맺는 것은 명나라에 대한 반역이자 사대 조약 위반이었다[20]. 조선은 명나라의 허락 없이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구조 안에 있었다.


얼마 전까지 세금을 바치고 관직을 구걸하던 오랑캐가 어느새 명나라를 무너뜨릴 만큼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조선이 건주여진을 이용할 생각을 못한 것이 아니라, 늘 해왔던 대로 통제할 수 있는 하위 집단으로만 생각하다가, 임진왜란이라는 변수로 통제력을 상실한 채 그들이 거대 제국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21].


이제 명청교체기다. 조선 사대부들의 선택이 문제가 된다.


지리적으로, 혈통적으로, 역사적으로 훨씬 가까웠던 청나라(만주족) 대신, 저물어가는 명나라(한족)를 끝까지 붙잡다 국토가 유린당한 이 현상. 이 현상에는 사대부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구조가 있다.


첫 번째 구조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이다.


1592년 왜군의 침략으로 선조가 의주까지 피란 가고 국가가 멸망 직전에 몰렸을 때, 명나라는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고 막대한 식량을 원조해 조선을 구했다. 명나라 내부에서조차 국력을 탕진한다고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조선 파병을 강행한 만력제는 조선 사대부들에게 종교적 수준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22].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 이것을 배신하는 것은 짐승의 행위로 여겨졌다. 이 심리적 부채는 논리로 해소되지 않는다.


두 번째 구조는 성리학적 세계관이다.


명나라는 인류 문명의 정수인 유교 문화와 예법을 간직한 '중화(中華)'의 표준이었다. 청나라는 불과 얼마 전까지 조선의 국경을 넘나들며 구걸하거나 약탈을 일삼던 오랑캐(이적, 夷狄)였다. 아무리 청나라가 군사적으로 강해졌다 한들, "야만인이 힘이 세졌다고 해서 문명인이 야만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는 도덕적·문화적 우월감이 조선 사대부들의 눈을 가렸다[22].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세계관이었다.


세 번째 구조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이다.


명나라가 청나라의 압박으로 무너져가자, 조선 사대부들은 "이제 지구상에 순수한 유교 문명을 보존한 나라는 우리 조선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대한 책임감을 가졌다[22]. 청나라에 굴복하는 것은 자신들이 평생 공부해 온 학문과 정체성 전체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척화파(斥和派)의 목소리는 감정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문명론적 자존심이었다.


이 세 구조가 맞물리면, 조선 사대부들의 선택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내적 일관성을 가진 비극이 된다. 그들은 틀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관 안에서는 옳은 선택을 했다. 다만 그 세계관 자체가 현실과 어긋나 있었다.


광해군이 유일한 예외였다.


그는 만주족의 군사력이 명나라를 압도하는 것을 보고 실리적 양면외교를 택했다. 명나라의 파병 요구에 마지못해 응하면서도 장군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후금에 항복하고 조선은 싸울 뜻이 없음을 전하라"는 밀지를 내렸다(심하 전투)[23]. 구조를 읽은 사람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실리적 판단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던 사대부들에게 격렬한 분노를 샀다. 결국 광해군은 폐위당했다. 인조반정(1623년). 의리와 명분으로 정권을 잡은 사대부들은 이후 청나라를 대놓고 무시했다[23].


그 결과는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이었다. 왕이 오랑캐라 비웃던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삼궤구고두례를 행한 삼전도의 굴욕[23].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훨씬 가까웠던 쪽을 버리고 더 먼 쪽에 매달리다 치른 대가였다.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하다.


관계의 친밀도와 정치적 선택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연결이 없다. 더 가까운 쪽이 동맹이 되는 것도 아니고, 피가 섞인 쪽이 우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세계관이 관계를 규정한다. 그리고 세계관이 현실과 어긋날 때, 그 대가는 언제나 현실이 청구한다.


조선 사대부들은 문명의 서열을 믿었다. 그 서열 안에서 만주족은 아무리 강해도 오랑캐였고, 명나라는 아무리 쇠락해도 중화였다. 이 믿음이 삼전도 벌판의 눈 위에 왕의 이마를 찍었다.


건주여진이 조선을 어버이의 나라라 불렀던 것, 조선이 건주여진을 기미정책으로 다뤘던 것, 그리고 조선이 결국 청나라에 무릎을 꿇은 것. 이 세 장면은 하나의 연속된 구조다. 비대칭적 관계가 역전되는 순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쪽이 치르는 비용.


어버이의 나라가 무릎을 꿇었다. 사냥개가 호랑이가 되어 있었다.


제국은 정복자를 소멸시킨다.


이것은 역설처럼 들리지만 역설이 아니다. 정복자가 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국이 정복자를 집어삼키는 것이다. 청나라가 그 가장 선명한 사례다. 1644년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으로 진입한 만주족은 중원을 얻었고, 그 대신 자신들을 잃었다.


숫자부터 보자. 당시 만주족 전체 인구는 많아야 100만 명 안팎이었다. 그들이 지배해야 하는 한족 인구는 1억 명이 넘었다[24]. 100 대 1이 넘는 비율. 이 숫자 앞에서 문화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의 문제였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할 때,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의 문명이 지배자를 서서히 흡수한다. 만주족은 베이징의 화려한 도시 생활에 길들여지며 급격하게 한족화(漢化)되었다[24].


그런데 이 과정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 아니었다. 청나라 황실 스스로가 설계하고 집행한 것이었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한 방식부터 보아야 한다.


초기 통일 과정은 피비린내 났다. 누르하치는 같은 건주여진 내에서 복종하지 않거나 반대파를 지원한 부족들을 철저하게 도륙했다. 친동생 슈르하치가 독자 세력을 구축하려 하자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였고, 친아들 장남 츄옌도 반역 혐의로 처형했다[25]. 부족을 이이제이로 다루던 조선의 방식을 누르하치는 자기 가족에게도 적용했다.


복속을 거부하는 부족은 추장뿐 아니라 가문 전체를 멸족시키고, 살아남은 부족민들은 강제로 군사나 노비로 재배치했다. 초기 건주여진 내부의 충성은 진심이 아니었다. "순종하지 않으면 나뿐 아니라 내 부족 전체가 지상에서 사라진다"는 극도의 공포가 만든 결과물이었다[25].


그러나 누르하치가 위대한 정복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공포로 누른 부족들을 팔기제(八旗制)라는 시스템 안으로 흡수했기 때문이다[26].


팔기제의 핵심은 해체와 재조립이다. 누르하치는 정복한 여진 부족들의 기존 족보와 지배 구조를 완전히 파괴했다. 이들을 300명 단위의 군사·행정 조직 니루(Niru)로 쪼갠 뒤, 8개의 색깔 깃발 아래 무작위로 섞어 배치했다[26]. 이제 여진족들은 "나는 OO부족 사람이다"가 아니라 "나는 정황기(正黃旗) 사람이다"라는 새로운 군사적 정체성을 강요받았다.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면 부족 차별 없이 토지와 노비를 보상받았고, 패배하면 연대 책임을 지고 처벌받았다.


부족 정체성을 지우고 기(旗) 정체성을 심었다. 이것이 팔기제의 본질이다.


1635년, 홍타이지(청 태종)는 공식 선언을 했다.


"우리 종족의 본래 이름은 주신(Jushen, 여진)이었으나, 이제부터는 만주(Manju)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대대로 이를 기억하고 여진이라는 옛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지한다."[27]


이듬해 나라 이름도 후금에서 대청(大淸)으로 바꿨다.


왜 굳이 이름을 지웠는가. 여진족 내부에는 건주여진 외에도 군사력이 막강했던 해서여진(海西女眞), 북방의 야인여진(野人女眞) 등 수많은 라이벌 파벌이 있었다[27]. 누르하치 가문이 제국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건주여진이다"라고 주장하는 대신, 모든 여진 부족을 아우르는 '만주'라는 가상의 거대 통합 정체성을 내세워야만 했다. 게다가 당시 홍타이지의 세력 안에는 순수 여진족뿐 아니라 이미 포섭한 몽골인과 귀화한 한족들도 대거 섞여 있었다. '여진족'이라는 틀에 이들을 넣으면 반발이 생긴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상위 정체성이 필요했다[27].


만주라는 이름은 발명품이었다. 건주여진이라는 구체적인 집단의 정체성은 이 발명의 과정에서 첫 번째로 지워졌다.


조선과 가장 오랜 역사적 교류를 가졌던 것은 건주여진이었다. 압록강·두만강 접경지에서 수백 년간 조선인들과 국경을 맞대고 혼혈을 이루며 성장한 집단, 조선 관직을 받고 조선을 어버이의 나라라 불렀던 집단, 4군 6진 일대에서 조선인과 통혼하며 살았던 집단.


그 집단이 팔기제 안으로 해체·흡수되면서 '건주여진'이라는 정체성은 공중분해되었다[28]. 청나라 성립 이후 지배층들은 자신을 "건주여진 출신"이 아니라 "양황기(鑲黃旗) 소속 만주인"으로 정의했다. 조선과의 접경지에서 쌓인 수백 년의 기억, 혼혈의 역사, 문화적 교류의 흔적은 기(旗)라는 새로운 분류 단위 안에서 행정적으로 소멸했다.


그리고 1644년 입관(入關).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으로 대이동했을 때, 건주여진 계열의 핵심 인구는 압록강 변을 떠났다. 고향 땅을 비워버렸다. 조선인들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민간 차원의 핏줄과 정서의 교류를 청 황실이 먼저 원천 차단한 셈이었다[29].


이것은 한족의 음모가 아니었다. 만주족 황실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베이징에 도착한 만주족을 기다린 것은 1억 한족의 문명이었다.


수억 명의 한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청 황실은 점차 유교적 중화사상을 받아들였다. 과거 조선을 어버이나 상국으로 섬기며 문명을 배우던 변방 여진족 시절의 역사는 황실의 권위에 방해가 되는 요소였다. 스스로 그 기억을 흐리게 만들고 망각하는 길을 택했다[29].


청나라 중기인 건륭제(18세기 후반) 시절에 이르면, 황실과 고위 귀족들조차 조상들의 언어인 만주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황제가 "조상의 언어를 잊지 말라"고 다그치는 지경이었다[30]. 압록강 변에서 조선인들과 교류하며 사냥을 하고 농사를 짓던 건주여진의 고유한 삶의 방식과 기억은 베이징의 관료·지주 생활 속에서 완전히 증발했다.


언어가 사라지면 기억이 사라진다. 기억이 사라지면 정체성이 사라진다. 건주여진은 만주족이 되었고, 만주족은 한족화된 청나라 귀족이 되었으며, 청나라 귀족은 1912년 청나라가 망하면서 한족 사회 속으로 성씨를 바꾸고 숨어들었다[31].


성공이 지운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어보면 이렇다.


건주여진이라는 부족 정체성. 여진(주신)이라는 민족 이름. 만주어라는 언어. 만주의 고향 땅. 조선과 나누었던 수백 년의 접경 기억. 그리고 마지막으로, 애신각라라는 성씨.


청나라가 망한 뒤, 분노한 한족들의 보복을 피해 만주족들은 대거 한족 성씨로 세탁하고 한족 사회로 숨어들었다. 청나라 황실 애신각라 씨족은 金씨로 성을 바꿨다[31]. 아이러니다. 1편에서 살폈듯, 금나라 황실이 '금'이라는 나라 이름을 쓴 것은 신라계 시조 김함보의 성씨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 마지막 후예들이 쫓기듯 돌아온 곳이 金씨라는 한자 성씨였다.


역사는 종종 이런 방식으로 돌아온다. 직선이 아니라 나선으로.


앞서 살펴봤듯이 조선 사대부들은 현실과 어긋난 세계관을 붙잡다 삼궤구고두례를 한 굴욕의 역사가 있다. 청나라의 경우는 달랐다. 청나라 황실은 현실을 너무 잘 읽었다. 중원을 지배하려면 중화 문명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 소수 지배층이 다수 피지배층 위에 서려면 그 다수의 문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그 판단이 옳았기 때문에 건주여진은 소멸했다. 성공의 대가로 정체성을 치른 것이다. 조선 사대부들은 세계관을 붙잡다 나라를 잃을 뻔했고, 청나라 황실은 현실을 선택하다 자기 자신을 잃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결말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두 경우 모두, 문명의 압력 앞에서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비용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준다.


제국은 정복자를 소멸시킨다. 만주족은 중원을 얻었고, 건주여진은 사라졌다. 그것이 같은 사건이었다.


땅은 비어 있었다.


만주족의 땅이라고 불렸던 그 광활한 공간이, 정작 만주족이 없는 땅이 되어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종종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소유권과 점유가 분리되고, 이름과 실체가 어긋나고, 주인이 떠난 자리를 낯선 사람이 채운다.


청나라가 봉금령(封禁令)을 내린 것은 만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만주족의 발상지이자 황실의 성지인 그 땅에 한족이 들어오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금지령은 만주족도 함께 묶어버렸다. 1644년 입관 이후 핵심 인구를 베이징으로 이동시킨 청나라는, 자신들이 신성시한 고향 땅을 스스로 비워놓은 채 봉금령이라는 울타리로 그 공백을 감추었다[32].


법이 비워둔 공간을 현실이 채운다. 언제나 그래왔다.


19세기 조선 내부는 무너지고 있었다.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면서 삼정의 문란(三政의 紊亂)이 농민들의 고혈을 짜냈다. 어린아이에게 군포를 매기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죽은 사람에게 세금을 걷는 백골징포(白骨徵布), 환곡의 이자를 수십 배로 불려 받는 부패가 전국을 뒤덮었다[33]. 여기에 대기근과 전염병이 겹쳤다.


조선 땅에 살면 세금으로 죽고, 강을 건너다 걸리면 목이 달아나지만, 건너가서 농사라도 지으면 살 수 있다. 생존의 산술은 간단했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농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기 시작했다. 조선 당국도, 청나라 관리도 이 흐름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33].


이들이 건너간 땅에는 아무도 없었다. 만주족은 베이징에 있었고, 한족은 아직 오지 않았다. 봉금 지대의 울창한 숲과 넓은 평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농민들은 그 황무지를 개간하고 마을을 이루었다. 이것을 역사는 모금잠입(冒禁潛入)이라 부른다[33]. 금령을 무릅쓰고 몰래 들어간다는 뜻이다.


당시 서북 지방 백성들 사이에서는 《정감록》 사상과 맞물려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세금도 없고 기름진 이상향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돌았다[33]. 소문은 과장이었지만, 실제로 그 땅은 비어 있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기록을 보면 간도 지역 전체 인구 중 조선인의 비중은 80%를 상회했다[34]. 연길, 훈춘, 화룡 일대의 북간도는 땅의 주권은 청나라에 있었지만, 실제로 그 황무지를 피땀 흘려 논밭으로 일구고 마을을 이루어 살던 주류 주민은 조선인이었다. 당대에도 이곳은 '조선인의 간도'라 불렸다[34].


만주족은 거기 없었다. 조선 농민들이 간도를 개간할 때 마주쳤던 사람들은 청나라 정부가 파견한 소수의 한족 관료와, 자신들처럼 산둥성과 허베이성에서 밀려온 가난한 한족 농민들이었다[34].


만주족이 왜 없었는가. 3편에서 살폈다. 청나라 성립과 함께 핵심 인구가 베이징으로 이동했고, 만주에 극소수 남아있던 이들은 전통적인 수렵과 채집 중심의 생활을 유지하며 농경 정착민 사회를 형성하지 못했다[35]. 반면 한반도에서 건너간 조선 농민들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만주 평야에 최초로 벼농사를 도입하며 정착성 농경 공동체를 촘촘하게 형성했다[35].


만주족의 땅을 조선인이 일구었다. 역사의 소유권과 현실의 점유가 이렇게 어긋났다.


청나라 조정도 이 상황을 오래 방치할 수 없었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가 연해주를 집어삼키고 만주 국경까지 군대를 들이밀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만주를 계속 텅 빈 봉금 지대로 놔두었다가는 러시아에 통째로 빼앗길 위기였다. 결국 1881년, 약 200년간 유지해온 봉금령을 공식 해제했다[36].


봉금이 풀리자 중국 내륙에서 굶주리던 수천만 명의 한족 농민들이 만주로 폭발적으로 유입되었다. 이것이 창관둥(闖關東)이다[36]. 산해관을 뚫고 들어간다는 뜻. 그런데 이들이 정착하려고 보니, 이미 남만주와 간도 일대의 비옥한 땅은 조선 말기에 목숨 걸고 건너온 조선 농민들이 다 개간해 놓은 상태였다.


청나라가 만주족 지배층을 베이징으로 데려가며 만주에 봉금령을 내렸고, 그 공백을 조선 서민들이 목숨을 걸고 채웠으며, 뒤늦게 봉금을 풀었을 때는 이미 거대한 조선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법과 제도가 만든 공백을, 생존을 향한 민초들의 몸부림이 메워버린 것이다.


그 조선인들은 이후 어디로 갔는가.


그 갈래가 둘이었다.


만주에 남은 이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조선족(朝鮮族)'이라는 별개의 소수민족으로 공인받았다[37]. 이들은 자신들이 한국인(조선인)이라는 뚜렷한 자의식, 언어,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족이 아닌 독립된 소수민족 범주를 부여받았다. 만주족은 이미 외형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중국 한족과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다. 조선인들이 굳이 자신들의 민족적 뿌리를 버리고 이미 한족화된 만주족의 신분을 선택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37].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 중 일부는 청나라의 압박과 일제의 침략을 피해 두만강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더 멀리 이동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독자적인 한인 공동체를 이루고 살다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오늘날의 고려인이다[38].


조선족과 고려인. 이 두 갈래는 만주족과는 완벽하게 분리된 경로를 걸었다. 만주족의 땅을 일군 조선 농민들이 만주족과 동화되거나 합류한 사례는 사실상 없다. 조선인은 조선인으로 남았다. 만주족은 이미 거기 없었고, 있었다 해도 그들은 이미 한족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현대에 이르러 또 다른 정체성의 분화를 낳았다. 당대에는 만주족과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민족적 뿌리를 지켜냈던 이들이지만, 오늘날 조선족은 중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고려인은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해졌다. 만주족에게 흡수되지 않았던 조선인의 후예들이, 각자가 처한 대륙의 정치 체제와 생존의 기로 속에서 결국 현지의 주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정리해보자.


한민족과 만주족의 관계는 단층이 아니다. 시간과 지리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진 여러 겹의 층위가 있다. 고대 서요하 문명에서 공유된 선사시대의 뿌리가 있고, 발해라는 공동의 역사적 공간이 있으며, 4군 6진 접경지에서 수백 년간 이루어진 실질적인 혼혈과 문화 교류가 있다. 이것들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들이 "만주족은 한민족의 동족"이라는 단일한 명제로 수렴하지는 않는다.


건주여진과 조선의 관계는 동족 간의 우애가 아니라 문명국과 주변부 부족 사이의 비대칭적 종속 관계였다. 청나라 황실은 중원 정복에 성공하면서 스스로 그 관계를 단절하고 정체성을 소멸시켰다. 조선 사대부들은 그 단절을 이해하지 못한 채 명분론에 갇혀 삼전도의 굴욕을 맞았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만주로 건너간 한민족은 이미 만주족이 떠나버린 빈 땅을 채웠고, 이후 조선족과 고려인으로 분기하며 만주족과는 완전히 다른 경로를 걸었다.


각 층위는 제각각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것들을 하나의 감정적 서사로 묶으려 할 때 왜곡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기묘한 위치에 있는 것은 만주족이다. 조선과 가장 가까웠던 건주여진은 청나라의 성공으로 소멸했다. 청나라가 망한 뒤에는 한족에게 쫓겨 성씨를 바꾸고 숨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시절 문화대혁명 때는 '제국주의 지배층의 후예'라는 낙인 때문에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39]. 1980년대 소수민족 우대 정책이 시행되면서야 숨어 지내던 수백만 명이 만주족 신분을 다시 등록했다[39].


현재 중국의 공식 통계상 만주족 인구는 약 1,000만 명이다. 그 절반 이상이 요령성에 집중되어 있다[40]. 그러나 이들 중 만주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만주족 고유의 풍습을 유지하는 사람도 드물다. 유전적으로는 북방 한족과 구분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름만 남은 민족. 성씨를 바꾸었다가 돌려받은 정체성. 자신들의 언어를 잃어버린 채 소수민족 우대 정책의 수혜자로 등록된 집단.


조선족은 중국 땅에서 한국어를 유지하고 있고,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에서 한국어를 지켜왔다. 만주족은 자기 땅에서 자기 언어를 잃었다.


땅은 있었다. 성공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체성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빈 땅은 언제나 누군가가 채운다. 그리고 그것을 채운 사람이 그 땅의 역사를 이어간다. 만주족의 땅을 일군 것은 조선 농민들이었고, 그 조선 농민들의 후손이 지금 연변에서 한국어를 쓰고 있다. 만주족이 비운 땅에서, 만주족이 아닌 사람들이 만주의 역사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소유권 뿐 아니라 점유로서 쓰여진다.


- 주석 -

[1]: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적 유사성에 관한 분석 — https://www.youtube.com/watch?v=W-Tisztg9R8

[2]: 만주족과 한국인의 유전적 관계에 관한 Quora 논의 — https://www.quora.com/What-is-the-closest-genetic-relative-to-the-Manchu-people-Koreans-or-Japanese

[3]: 만주족과 한국인의 유전적 구조 및 혼합에 관한 연구 —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368686955_The_genetic_structure_and_admixture_of_Manchus_and_Koreans_in_northeast_China

[4]: PubMed — 만주족 및 동북아시아 집단의 유전체 분석 — https://pubmed.ncbi.nlm.nih.gov/36809229/

[5]: Frontiers in Genetics — 만주족의 유전적 구조와 한족화 — https://www.frontiersin.org/journals/genetics/articles/10.3389/fgene.2021.754492/full

[6]: Annals of Human Biology — 만주족의 유전적 동화 — https://www.tandfonline.com/doi/full/10.1080/03014460.2023.2182912

[7]: 인사이트코리아 — 한국인과 만주족의 Y염색체 하플로그룹 비교 — https://www.insight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51

[8]: 다음 카페 — 하플로그룹 C3c 분포와 한국인 — https://m.cafe.daum.net/kphpi21/7BIY/523?listURI=%2Fkphpi21%2F7BIY

[9]: PubMed — 서요하 문명과 동아시아 인구 이동 — https://pubmed.ncbi.nlm.nih.gov/36809229/

(10): 네이버 블로그 — 흠정만주원류고와 금사의 김함보 기록 — https://blog.naver.com/baram379/60201172645?viewType=pc

[11]: 다음 카페 — 금나라 시조 김함보의 신라 기원 — https://m.cafe.daum.net/kyongkim/2Mjj/234?listURI=%2Fkyongkim%2F2Mjj

[12]: 나무위키 — 여진족 신라인설 — https://namu.wiki/w/%EC%97%AC%EC%A7%84%EC%A1%B1%20%EC%8B%A0%EB%9D%BC%EC%9D%B8%EC%84%A4?uuid=1ee0064a-3732-45d8-aa5e-8e26b7d4c051

[13]: Razib Khan — Korean identity: a story of genetic continuity — https://www.razibkhan.com/p/korean-identity-a-story-of-genetic

[14]: 국민뉴스 — 위만조선의 역사적 귀속 문제 — https://www.kookminnews.com/1803

[15]: 조선 실록에 기록된 건주여진 추장들의 대조선 언사 — https://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8%B0%EB%AF%B8%EC%A0%95%EC%B1%85(%E7%BE%88%E7%B8%BB%E6%94%BF%E7%AD%96)

[16]: 건주여진의 조선 문명 선망에 관한 논의 — https://www.quora.com/What-was-the-relationship-between-Jurchens-and-Korean-kingdoms-Were-they-strategic-rivals

[17]: 조선의 기미정책과 먼터무(맹가첩목아)의 관계 — https://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8%B0%EB%AF%B8%EC%A0%95%EC%B1%85(%E7%BE%88%E7%B8%BB%E6%94%BF%E7%AD%96)

[18]: 임진왜란과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 — 시대적 중첩에 관하여 — https://contents.nahf.or.kr/id/NAHF.edeah.d_0004_0010_0050_0010

[19]: 조선의 누르하치 파병 제안 거절 배경 — https://www.quora.com/When-Japan-invaded-Korea-the-Jurchens-asked-the-Ming-Dynasty-for-permission-to-lead-troops-to-rescue-Korea-Why-did-Korea-insist-on-refusing-the-Jurchens-reinforcements-Why-did-it-insist-on-asking-for-reinforcements

[20]: 명나라의 대여진 조선 견제와 종속 구조 —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22_0030_0030_0020_0020

[21]: 조선 북방 외교의 구조적 한계 분석 — https://m.blog.naver.com/correctasia/223533058676

[22]: 재조지은·소중화 의식과 척화파의 세계관 — https://www.nahf.or.kr/web/portal/webzine/774/101415

[23]: 광해군의 실리외교와 인조반정, 병자호란의 연쇄 — https://namu.wiki/w/%EC%A1%B0%EC%84%A0-%EC%97%AC%EC%A7%84%20%EA%B4%80%EA%B3%84

[24]: 입관 이후 만주족의 한족화 과정 — https://en.wikipedia.org/wiki/Qing_dynasty

[25]: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 과정과 내부 숙청 — https://en.wikipedia.org/wiki/Jurchen_unification

[26]: 팔기제의 구조와 부족 정체성 해체 — https://ko.wikipedia.org/wiki/%ED%8C%94%EA%B8%B0%EC%A0%9C

[27]: 홍타이지의 '만주' 개명 선언과 정치적 배경 — https://en.wikipedia.org/wiki/Jurchen_people

[28]: 건주여진의 팔기제 편입과 정체성 소멸 — https://grokipedia.com/page/Jurchen_unification

[29]: 청 황실의 봉금 정책과 대조선 관계 단절 구조 — https://sites.google.com/site/monarchyrevival/history-of-qing-dynasty

[30]: 건륭제 시대 만주어 소멸과 황제의 경고 — https://en.wikipedia.org/wiki/Later_Jin_(1616%E2%80%931636)

[31]: 청나라 멸망 후 만주족의 성씨 세탁과 한족 사회 편입 — https://www.reddit.com/r/AskHistorians/comments/1ccjqmh/what_happened_to_all_the_ethnic_manchu_population/

[32]: 청나라 봉금 정책의 배경과 만주족 이주 — https://namu.wiki/w/%EB%B4%89%EA%B8%88%EB%A0%B9

[33]: 삼정의 문란과 조선 말기 만주 이주 — 모금잠입의 배경 — https://namu.wiki/w/%EC%82%BC%EC%A0%95%EC%9D%98%20%EB%AC%B8%EB%9E%80

[34]: 간도 지역 조선인 인구 비중과 '조선인의 간도' — https://hangyo.com/news/article.html?no=16446

[35]: 만주족의 수렵 생활과 조선인의 만주 벼농사 도입 —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4_0040_0010_0020_0010

[36]: 봉금 해제와 창관둥 — 한족의 만주 대규모 유입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044435

[37]: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조선족의 소수민족 공인 과정 —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1169452

[38]: 고려인의 형성 — 연해주 이주와 스탈린의 강제 이주 — https://m.blog.naver.com/nonepapa/222106866774

[39]: 문화대혁명 시기 만주족 정체성 억압과 1980년대 소수민족 우대 정책 — https://www.reddit.com/r/AskHistorians/comments/1ccjqmh/what_happened_to_all_the_ethnic_manchu_population/

[40]: 현대 만주족 인구 분포와 요령성 집중 — https://www.yunnanexploration.com/manchu-ethnic-minorit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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