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번역] 닉 랜드, 암흑계몽주의 제4e부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 4e부: 상호적으로 교차된 역사 


닉 랜드(Nick Land), 2012년 7월 3일


“민주주의는 자유의 적이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자유를 확대하기보다 억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며, 애초에 고쳐 쓸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사회주의가 그렇듯 민주주의 역시 태생부터 고장 나 있다. 이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해체하는 것뿐이다.” — 프랑크 카르스텐(Frank Karsten)


“과학사학자인 더그 포스나우(Doug Fosnow)는 미국의 '레드 스테이트(공화당 우세 지역)' 카운티들이 '블루 스테이트(민주당 우세 지역)'로부터 분리 독립해 새로운 연방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중은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화당 우세 지역끼리만의 연방이 구성되면 해안선을 거의 차지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더그는 정말 이런 분리 독립이 실현 가능하다고 믿었을까? 그는 웃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조만간 터질 것 같은 인종 전쟁보다는 차라리 분리 독립이 백배 낫다고 덧붙였다. 끔찍한 비극보다 조금이라도 덜 끔찍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 존 더비셔(John Derbyshire)


“따라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자유지상주의적 사회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민주주의를 폐지하고 모든 세금과 법률을 없애기 위해 대중 과반수를 설득해 찬성표를 던지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중은 늘 우둔하고 나태한 데다, 앞서 설명했듯 민주주의가 도덕적·지적 타락을 부추긴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그저 허황된 상상에 불과해 보인다. 투표할 '권리'에 길들어 타인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약탈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그 기회를 포기하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보면 사회 혁명의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분리 독립을 아래로부터의 혁명 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요소로 바라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전히 벅찬 과제일지언정, 자유지상주의 혁명이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 한스 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


거시적 관점에서 근대성이란 하나의 유기적인 추세로 정의되는 사회적 조건이다. 이는 인구 증가율을 앞지르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으로 요약되며, 마이너스 성장과 빈곤이 반복되던 '맬서스 트랩'이라는 역사적 굴레를 마침내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이러한 양적 성장 패턴만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면, 근대성은 크게 정반대의 두 가지 요소로 나뉜다. 한편에는 과학과 상업을 바탕으로 성장을 가속하는 기술-산업적 기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민주적 권력을 쥐고 이권을 챙기려는 특수 이해관계자들이 경제적 성과를 가로채 성장을 가로막는 사회-정치적 역행, 즉 '민주주의 경화증(demosclerosis)'이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산업혁명을 통해 인류에게 선사한 풍요를, 성숙기 단계에 접어든 현대 자유주의가 비대해진 복지국가라는 암세포를 통해 다시 앗아가는 꼴이다. 이를 추상적인 기하학 그래프로 표현하면 폭발적으로 상승하다가 스스로 한계에 부딪혀 꺾이는 S자 곡선을 그리게 된다. 결국 해방의 드라마로 시작했던 근대성은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즉 하나의 고유하고 실재하는 현상으로 바라본 근대성은 수학적인 순수성을 흐리고 제한하는 민족적·지리적 특성을 지닌다. 근대성은 특정 지역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뻗어나갔으며, 지구상의 다양한 민족을 유례없이 새롭고 복잡한 관계 속으로 몰아넣었다. 기존의 맬서스적 한계를 넘어서고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하며 새로운 인구학적 추세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 관계들은 분명 '근대적'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결합한 것은 추상적인 경제적 기능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집단이었다. 따라서 겉보기에 근대성이란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 그들을 대상으로(혹은 그들에 맞서) 벌인 일이었다.


근대성이 성장의 한계에 부딪혀 S자 곡선의 하향선으로 접어든 20세기 초에 이르자, 근대성 자체의 보편적 속성(자본주의적 소외)에 대한 저항은 그 구체적인 특성(유럽 제국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반대와 사실상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로 뒤엉켰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 근대 문명을 주도했던 핵심 민족·지리적 집단의 자의식은 인종적 공포로 치달았고, 이 광기의 흐름은 제3제국(나치 독일)의 발흥과 파멸에 이르러서야 겨우 멈추게 되었다.


근대성이 태생적으로 타락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면, 앞으로 펼쳐질 앞날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집약된다. 이 세 갈래 길은 서로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완벽한 대안 관계라고 볼 수는 없지만, 도식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는 각기 독립된 시나리오로 제시하고자 한다.


(1) 근대성 2.0. 전세계적인 근대화가 서구 중심의 기존 체제가 지닌 퇴행적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족적·지리적 핵심부에서 다시금 활력을 얻는 시나리오다. 물론 이 새로운 중심지 역시 먼 미래에는 결국 파멸로 향하는 장기적 추세와 마주하겠지만 말이다. 근대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고무적이고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없다. 중국이 지금의 궤도를 어느 정도 유지하기만 해도 이 시나리오는 확실히 실현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도는 자국 고유의 민주주의 경화증이 너무 깊어져 경쟁 상대로 보기 어렵다.)


(2) 포스트모더니즘. 이는 사실상 맬서스적 한계가 다시 잔인하게 지배하는 새로운 암흑시대나 다름없다. 이 시나리오는 '근대성 1.0'이 지닌 병폐가 이미 전 세계로 너무 깊이 퍼진 나머지, 지구의 미래 전체가 그 병폐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만약 대성당 체제가 '승리'한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바로 이것이다.


(3) 서구의 르네상스. 다시 태어나려면 먼저 죽어야 하므로, '강제 초기화'는 강도가 세면 셀수록 좋다. 전면적인 위기와 해체야말로 부활을 위한 최선의 기회를 제공한다. (가장 현실적으로는 첫 번째 시나리오의 하위 흐름 속에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경쟁은 언제나 유익한 법이기에, 향후 세계사의 중심 도로가 '근대성 2.0'이 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하더라도 서구의 르네상스라는 양념이 약간은 곁들여져야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물론 그러려면 서구는 과학, 기술, 사업 혁신을 제외하고 지난 한 세기 넘게 지속해 온 거의 모든 행보를 멈추고 되돌려야만 한다. 하지만 이 중 그 어떤 것도 실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해 보이므로, 지금은 철저히 가상의 시나리오라는 전제하에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편이 현명하다.


(1) 대의 민주주의를 입헌 공화정(혹은 이보다 더 극단적인 반(反)정치적 통치 매커니즘)으로 대체하는 일.


(2) 정부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정부의 역할을 아무리 많아봐야 핵심 기능만 수행하도록 엄격히 제한하는 일.


(3) 금본위제와 같은 태환권(귀금속 주화 및 금괴 보관증) 제도를 부활시키고 중앙은행을 폐지하는 일.


(4) 국가의 자의적인 통화 및 재정 정책 권한을 박탈함으로써 실천적 의미의 거시경제를 폐지하고, 자율적인 시장 경제(혹은 '카탈락시(Catallaxy)'[1])를 해방하는 일. (이 조항은 앞선 2번과 3번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므로 중복에 가깝지만, 진정한 종착지라는 점에서 강조할 가치가 충분하다.)


여기에 덧붙일 제안은 더 많다. 정치의 영역을 줄이자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문명사적 대재앙이 닥치지 않는 한 이 중 어느 것도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은 이미 명백하다. 정치인에게 스스로 권력을 제한하라고 요구하는 것부터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그보다 온건한 방식으로는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조차 뗄 수 없다. 게다가 이것은 가장 넓거나 깊은 문제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정부 권력을 제한하는 정당한 절차적 장치로 시작할지 모르나, 머지않아 체계적인 약탈 문화라는 전혀 다른 괴물로 걷잡을 수 없이 변질된다. 정치인들이 나랏돈으로 표를 사는 법을 터득하고, 유권자들이 약탈과 뇌물 수수 체제에 길드는 순간, 민주주의 프로세스는 집단적 이익을 위해 함께 도둑질을 일삼는 이익 집단, 즉 맹커 올슨(Mancur Olson)이 말한 '분배 연합'을 형성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 심각한 점은 대중이 그리 똑똑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지배층 세력이 자행하는 약탈의 규모는 대중의 감시망에 걸려드는 어설픈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고, 빚을 쌓아가며, 성장을 가로막고, 기술과 산업 발전을 지체시키는 방식으로 미래를 약탈하는 짓은 교묘하게 감추기가 아주 쉽다. 그래서 늘 대중의 확실한 지지를 받는다.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비극인 이유는 대중에게 스스로를 파멸시킬 무기를 쥐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은 언제나 그 무기를 기꺼이 움켜쥐고 휘두른다. 세상에 공짜를 거절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공짜 점심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결국 철저한 문화적 파멸만이 민주주의가 마주할 필연적인 결말이다.


근대성 1.0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면, 미국의 역사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서사가 된다. 유대-기독교 전통의 거대한 문화적 동력은 워싱턴 D.C.에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며, 대성당 체제라는 세속화된 신(新) 청교도주의로 정점을 찍는다. 구세주적 혁명에 대한 사명으로 무장한 통치 기구는 복음주의적 국가 체제로 공고해진다. 이 국가는 평등과 인권, 사회 정의,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보편적 인류애에 기반한 신세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권한을 부여받는다. 대성당 체제가 지닌 절대적인 도덕적 확신은 억제되지 않는 중앙집권제 권력을 열렬히 추구하도록 정당성을 부여하며, 이 권력은 내적인 침투력과 외적인 확장력 모두에서 한계 없는 팽창을 지향한다.


마녀사냥꾼들의 후예인 그 자신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험악한 표정으로 도덕을 부르짖는 이 광신도 무리가 유례없는 세계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는 순간, 대중 민주주의는 탐욕스러운 부패의 심연으로 끝없이 추락한다. 5년마다 미국은 스스로를 약탈하고, 그 장물을 표와 맞바꾸며 울타리를 새로 친다. 민주주의라는 것 참 쉽다. 그저 나에게 가장 많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이에게 표를 던지면 그만이다. 바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바보들을 좋아하며,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하는 척하면서 더 많은 바보를 양산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퇴행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반동주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은밀한 근거가 된다. 사회정치적 '진보'의 중대한 고비마다 서구 문명이 전면적인 파멸을 향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나아갔음을 감안할 때, 지나온 발자국을 되짚어간다는 것은 곧 약탈의 사회로부터 자립과 정직한 노동 및 교환, 선동 정치 이전의 학문, 그리고 시민의 자율적 조직화가 살아 숨 쉬던 옛 질서로의 복고(復古)를 의미한다.


이러한 반동주의적 비전이 지닌 매력은 미국 정치사가 재앙의 행로를 걷고 있음을 똑똑히 목도한 상당수 소수파(티파티(Tea Party)[2] 운동가들) 사이에서 18세기의 복식과 상징, 그리고 헌법 문서들이 다시 유행하는 현상을 통해 분명하게 증명된다.


머릿속에서 '인종'이라는 경고음이 벌써 울리기 시작했는가? 만약 울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상상 속에서 발걸음을 2008년 이전으로 돌려보라. 양심의 가책이라는 집요한 속삭임은 케냐 출신 혁명가들이나 흑인 마르크스주의 교수들을 향한 당신의 편견을 이미 다그치고 있을 것이다. 후진 기어를 더 넣어 '위대한 사회'와 민권 운동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경고음은 비명에 가까운 고음으로 치솟는다.


이쯤 되면 미국 정치사가 국가의 '역량'과 '정당성'이라는, 서로 맞물린 두 개의 궤도를 따라 전진해 왔음이 아주 명백해진다. 국가의 규모와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곧 국가가 품은 목적의 신성함에 도전하는 일이다. 동시에 그 신성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 어떤 자원이든 지배하고, 그 어떤 법적 규제든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도덕적·정신적 필연성을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는 이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국가의 거대한 덩치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대물림된 ‘사실상 무한한’ 인종적 죄책감의 막대함에 무감각하다는 증거로 취급된다. 아울러 쇠락해 가는 근대성이 남긴 유일한 정언명령, 즉 '정부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신조(信條)를 거스르는 꼴이 된다.


만성적인 국가 개입주의가 낳은 병리적 결과들이, 애초에 해결하려던 원래의 문제들을 대체해 버린 지 오래라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민주주의라는 종교가 지배하는 시대와는 도저히 불화할 수밖에 없기에, 현실 세계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갖지 못할 뿐이다.


좌파 진영에서조차 진지하게 깊이 고민한 끝에, 정부의 비대화와 중앙집권화를 추동한 핵심 원동력이 '선행을 베풀겠다는 불타는 열망'이었다고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애당초 의도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과 정당성이 교차하는 순간, 과거 흑인들이 겪은 고난을 성역화함으로써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거대한 정부’를 향해 도덕적 정당성과 면죄부를 부여하게 된다. 그 순간 대중의 합리적인 의구심은 완전히 마비된 채, 위대한 진보주의 신화가 그 자리를 독점하고 만다.


정부가 더 가혹하게 개입하여 더 많은 일을 해나가는 것 외의 유일한 대안은, 저들이 또 다른 흑인을 사적 제재하도록 방관하며 무책임하게 서 있는 것뿐이라는 식이다. 이 터무니없는 명제야말로 미국 진보주의 교육이 가진 핵심 내용의 전부다.


국가의 역량과 목적이라는 두 개의 역사적 궤도는 일종의 '정치적 프레임 해석에 대한 규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규약 안에서는 정부 권력을 제한하자는 그 어떤 제안도 인종적 정의(正義)를 악의적으로 방해하는 행위로 해석된다.


이러한 프레임 해석 시스템은 너무나도 매끄럽게 작동한 나머지, ‘복지’, ‘결사의 자유’, ‘주(州)의 권리’ 같은 지극히 평범한 정치 용어들을 초당파적으로 통용되는 ‘인종차별적 의도를 숨겨둔 암호이자 정치적 은어’로 둔갑시킨다. 그 결과, 주요 정치적 차원(좌우 대립)에서 이뤄지는 뜻이 통하는 모든 발언은 인종이라는 프레임에 반쯤 절여진 채 공식적인 의미와 ‘인종주의’라는 낙인이라는 ‘두 가지 잣대’로 평가받으며 이중적으로 해석된다.


그렇기에 (진보파들의 눈에) 과거로 회귀하자는 반동주의적 주장은, 마치 끔찍한 인종차별 시절로 돌아가자는 듯한 고약한 악취를 풍기기 마련이다.


…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파멸적인 20세기에서 발을 빼기도 전에 이미 벌어진 일이다. 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국가에 관한 실무적 문제를 (백인·흑인 간의) 인종적 변증법과 뗄레야 뗄 수 없게 상호적으로 결합시키고, 이후 모든 정치적 적대감과 정치적 수사(修辭)의 중심 교차로를 깔아놓은 것은 민권 운동 시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승자의 용어로는 '미국 남북내전', 패자의 용어로는 '주(州)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 치명적인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첫걸음은, 주류 국가주의자들의 설명과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설명 사이의 어색한 대각선을 따라 구불구불 나아가는 것이다. 1860년대 초 미국이라는 국가를 집어삼킨 그 거대한 불길은 '노예 해방'에 관한 것이자 '주(州)의 권리'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적으로 그러했으나 배타적으로 그러하진 않았다. 두 가지 '명분' 중 그 어떤 것도 다른 하나로 환원될 수 없으며, 전쟁이 남긴 영속적인 모호함을 완전히 지워버릴 만큼 결정적이지도 않았다.


승리한 북부 연방의 중앙집권적 국가 권력 공고화를 기꺼이 찬양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수없이 많고, 대칭적으로 남부 주들의 노예제를 옹호하는 (훨씬 소수의) 신(新)남부연합주의(Neo-Confederate) 변절자들이 존재하지만, 이처럼 갈등 없는 확신에 찬 태도들은 북부의 명분(노예 해방)과 남부의 명분(주의 권리)이라는 두 가지 명분이 복잡하게 뒤엉켰던 전쟁이 남긴 역동적인 문화적 유산을 결코 포착하지 못한다.


그 전쟁은 하나의 거대한 매듭이다. 해방과 독립이라는 두 갈래로 자유의 개념을 사실상 분리해 버린 뒤, 푸른 제복과 회색 제복의 군대를 동원해 5년간의 대학살 속에서 서로를 향해 돌진하게 함으로써,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자유라는 가치는 전장에서 산산조각이 나도록 운명 지어졌다.


북부 연방의 승리는 '해방'으로서의 자유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지배할 것임을 결정지었고, 향후 대성당 체제가 도래할 것임을 확실히 보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두 번째 분리독립 전쟁을 무력으로 짓밟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치렀던 첫 번째 독립전쟁(1776년의 미국 독립혁명)을 스스로 조롱거리로 만드는 꼴이었다. 만약 노예제라는 악습이 남부의 독립전쟁이 지닌 정당성을 박탈해 버린 것이라면, 1776년의 혁명 정신에서 과연 무엇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결국 북부 연방이 내세운 명분의 도덕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국의 아버지들을 '정치적으로 불법적인, 백인 가부장제 노예주'로 재규정해야만 했다. 이 시점을 계기로 미국의 역사는 진보주의 교육과 문화 전쟁이라는 거대한 불길 속으로 태워져 들어갔다.


만약 독립이 노예주들의 이데올로기라면, 해방은 독립의 체계적인 파괴를 요구한다. 이렇듯 두 가지 명분이 교차된 역사 속에서, 자유의 실현은 자유의 폐지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 역주 -

[1] 카탈락시(Catallaxy):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 등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이 제시한 개념으로, 그리스어 '카탈라테인(Katallattein, 교환하다·원수를 친구로 만들다)'에서 유래했다. 정부가 인위적인 목표(물가 안정, 고용 창출 등)를 정해 통제하는 '계획 경제'와 달리, 구체적인 공통 목표 없이도 시장 참여자들이 자발적인 교환과 가격 기구를 통해 스스로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자생적 시장 질서’를 뜻한다.


[2] 티파티(Tea Party): 2009년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큰 정부 정책(대규모 경기부양책, 건강보험 개혁안 등)과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대하며 분출한 미국 보수·우파 진영의 대중적 풀뿌리 정치 운동. 명칭은 1773년 영국의 부당한 과세에 저항해 미국 독립 혁명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에서 따왔다. 이들은 미국 건국 초기의 '작은 정부', '철저한 재정 보수주의', '자유시장 경제', '헌법주의(원래 취지대로의 헌법 수호)'를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 


- 원문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120715121311/http://www.thatsmags.com/shanghai/article/2412/the-dark-enlightenment-part-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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