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번역] 닉 랜드, 암흑계몽주의 제4c부: 크래커 공장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 4c부: 크래커 공장
닉 랜드 (Nick Land), 2012년 5월 17일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나라의 수도에 수표를 바꾸러 왔다. 우리 공화국의 설계자들이 헌법과 독립선언서라는 그 장엄한 문구를 작성했을 때, 그들은 모든 미국인이 물려받을 약속어음에 서명한 셈이었다. 이 어음은 모든 사람, 즉 백인뿐만 아니라 흑인에게도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라는 불가침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이 유색인종 시민에 관한 한 이 약속어음을 이행하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이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대신, 미국은 흑인들에게 부도수표를 건넸다. '잔액 부족'이라는 도장이 찍혀 되돌아온 수표를 말이다.”
“보수주의는 몇몇 예외가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 백인 중심의 운동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동안 보수 성향의 모임이나 콘퍼런스, 크루즈 여행, 축제 등에 최소한 백 번은 참석해 보았지만, 그 무리 중 유색인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거의 없었다. 12년 동안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 잡지사를 드나들면서도, 흑인 정치인 허먼 케인(Herman Cain)이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면 그곳에서 마주친 흑인은 우편물실을 담당하는 알렉스뿐이었다. (잘 지내는가, 알렉스!)
그렇다고 보수주의가 흑인이나 메스티소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른바 '제도권 보수'의 경우는 더 심하다. 그들은 어쩌다 눈에 띄는 비백인 참석자에게 쩔쩔매며 비위를 맞추는데, 그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아서 지켜보기 민망할 정도다. (질문: 공화당원 1,000명이 모인 자리에서 단 한 명뿐인 흑인을 뭐라고 부를까? 정답: "의장님.")
보수주의가 강조하는 자립이나 정부 의존도 최소화 같은 가치는 낙후된 소수 집단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 뿐이다. 통계적인 일반론으로 볼 때, 이들은 현대 상업 국가에서 집단적 성공을 거두는 데 필요한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념을 받아들인들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지금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사회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훨씬 나은 전략이 있다. 동성애자, 페미니스트, 막다른 길에 다다른 노동조합 등 불만을 품은 백인이나 아시아계의 여러 소외 집단과 최대한 연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표 대결에서 과반을 차지한 뒤, 대규모적인 포퓰리즘 정부를 세워 자신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고 성공한 집단의 부를 이전받는 편이 훨씬 이롭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이성적이고 현명하게도, 바로 그 전략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연방 분리주의자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아늑한 이불이 이들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는 형국이다. 연방 정부의 의료개혁법을 따르느니 차라리 텍사스가 연방에서 탈퇴할 수도 있다고 넌지시 비친 릭 페리(Rick Perry), 알래스카 독립을 주장하는 정치단체에 몸담았던 토드 페일린(Todd Palin), 연방 당국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수정헌법 제2조(총기휴대 및 소지의 권리)에 따른 해결책'을 언급한 샤론 앵글(Sharron Angle)은 모두 현대 담론에 위험한 분리주의 수사가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언론은 남북전쟁 재현 행사나 남부연합기를 휘날리는 픽업트럭에만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둔다. 하지만 대중 정치인들 역시 가장 위험한 형태의 역사 수정주의를 영속시키려 애쓰는 학자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프랙티컬리 히스토리컬(Practically Historical)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우리 미국의 양심이다.”
— 월터 러셀 미드(Walter Russell Mead) 블로그 댓글 작성자 ‘surfed’ (오탈자 수정본)
미국의 인종적 ‘원죄’는 나라의 기틀이 놓이던 시기, 즉 미국이라는 국가가 탄생하기도 전인 유럽 정착민의 원주민 소탕과 그보다 더 결정적인 노예제 성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미국 흑백 관계의 '구약성서적 역사'로, 속박에서 벗어나는 섭리적 서사 속에 사실적 기록과 도덕적 권고가 결코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 ‘모세오경’의 양식을 따라 오랜 세월 자행된 극심한 사회적 학대, 그리고 서구 전통의 원초적인 도덕적·정치적 신화를 그대로 재현한 이 역사는 노예제와 해방의 서사를 미국 역사에서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불멸의 틀로 각인시켰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는 선언처럼 말이다.
위에서 언급한 블로그 ‘프랙티컬리 히스토리컬’은 남북전쟁에 관한 링컨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하지만 신의 뜻이 그러하여, 노예가 250년 동안 대가 없이 흘린 땀방울로 쌓아 올린 모든 부가 바닥날 때까지, 그리고 채찍으로 흘리게 한 피 한 방울마다 칼로 흘린 피 한 방울로 되갚을 때까지 이 전쟁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3천 년 전 유대인들이 말했듯 "주님의 심판은 언제나 참되고 의로우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인종 문제에 관한 '신약성서'는 1960년대에 쓰였으며, 기존의 틀을 수정하고 구체화했다. 민권 운동과 1965년 이민법 개정, 그리고 구 남부연합 지역의 소외된 백인층을 공략한 공화당의 '남부 전략'이 맞물리면서 흑인 집단과 민주당 사이에 확고한 당파적 유대가 형성되었다. 이는 자유주의적·진보적 재탄생에 가까웠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되고 한층 더 공고해질 당파적 인종 양극화의 틀을 짰다. 체계적인 우생학적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진보 운동 진영과, 전통적으로 남부 백인의 고집 및 쿠 클럭스 클랜(KKK)과 결탁해 온 민주당에 이 민권 운동 시기는 속죄와 의례적 정화, 그리고 구원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반대로 미국의 보수주의와 갈수록 갈 길을 잃어가는 공화당에 이 일련의 과정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의미했다. 물론 그들은 왜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제 '미국'이라는 이념은 과거에 대한 격렬한 단절, 나아가 그 과거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한 현재마저도 거부하는 흐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오직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연방'만이 그 이념에 부합할 수 있었다.
가장 피상적인 수준에서 보더라도, 이 새로운 질서가 가져올 거대한 당파적 변화는 명확했다. 미국은 갈수록 공화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해 갔으며, 실질적인 국가 주권은 행정부로 집중되었다. 아울러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부의 도덕적 정당성은 일종의 교리(敎理)로 자리 잡았다. 이미 '구닥다리 우파'로 전락해 버린 이들에게는 빠져나갈 구멍도, 되돌아갈 길도 없었다. 과거로 향하는 길은 민권 운동이라는 사상의 지평선을 넘어야만 했고, 그 너머에는 결국 노예제라는 파멸적 의미만이 기다리는 정치적 불모지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좌파는 변증법을 먹고 자라나지만, 우파는 변증법으로 인해 파멸한다. 정치의 순수한 논리라는 게 존재한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 하나는, 멘시우스 몰드버그가 누차 강조했듯 진보주의에는 좌파 내부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진보주의의 눈에 좌파 내부의 이견은 그저 아직 때가 오지 않은 이상주의자들로 보일 뿐이다. 따라서 좌파의 파벌 갈등은 정치적 역동성을 낳으며, 오히려 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칭송받는다.
반면 보수주의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왼쪽에서는 헌법의 틀을 넘어선 거대 국가주의라는 폭주 기관차에 얻어맞고, '오른쪽'에서는 주류 정치에 흡수되지도 않고 서로 양립하기도 어려운 온갖 미성숙한 조류들에 흔들린다. 극단적인 오스트리아학파식 자유방임 자본주의 옹호론부터 신학에 기반한 완고한 전통주의, 극단적 내셔널리즘, 그리고 백인 정체성 정치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도 제각각이다.
'우파'에는 현재도, 앞으로도 결속력이라는 것이 없다. 따라서 좌파처럼 대칭적인 개념으로 우파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정치가 곧 변증법이라는 동의어적 반복이 성립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정치적 톱니바퀴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즉 국가의 확장과 갈수록 강제성이 더해지는 실질적 평등주의라는 이상을 향해서만 예측 가능하게 움직인다. 우파는 중도로 이동하고, 중도는 다시 좌파로 이동할 뿐이다.
주류 보수 진영의 환상과는 무관하게, 미국의 미래를 주도하는 자유주의·진보 진영의 패권은 이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어떠한 모순도 집어삼키는 인종적 변증법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논리 구조 안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하층 계급은 기존 사회 질서를 심판하는 살아 있는 비판자이자, 해방의 척도요, 집단적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추대된다.
이제 이 서사를 대체할 만한 다른 역사적 해석은 정치적으로 용납되지 않으며, 엄밀히 말해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이 지배적 서사에 저항하는 행위 자체가 반미국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물론 '인종차별적'인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서사를 부인하려는 상징적 폭력은 도리어 체계적인 인종 억압이 실제로 존재함을 증명하는 꼴이 될 뿐이다. 따라서 이 논리에 반박하는 것은 말로만 부인할 뿐, 자신들이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무지몽매한 세력임을 몸소 입증하여 도리어 상대의 논리가 옳음을 확인해 줄 따름이다. 조직적인 사회 재교육 요구에 끝까지 저항하는 완고한 보수층의 모습은, 진보 세력에게 여전히 청산해야 할 적폐가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될 뿐이다.
가장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 자유주의적·진보적인 인종 변증법은 외부의 비판을 원천 봉쇄하는 동시에 논리적 일관성의 가능성마저 스스로 말살한다. 이들은 인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조작된 그 가상의 존재가 인종 간 폭력의 도구로 쓰인다고 동시에 주장한다. 인종을 인지하는 행위는 의무인 동시에 금기가 된다.
사회적 구제책을 마련하고, 증오 범죄를 찾아내고, 결과의 불평등을 분석하기 위해 인종적 정체성은 정밀하게 분류된다. 그리하여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나 '다양성 증진'과 같은 정책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연합(UN) 같은 기구를 앞세워 인종이란 무의미한 개념일 뿐이며, 실체도 없는 악의적인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극단적인 인종적 민감성과 완벽한 인종적 무감각이 동시에 요구되는 셈이다. 인종은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 모순에서 빠져나갈 길은 어디에도 없다.
보수주의는 정의상 변증법적으로 무능하며, 너무나도 무지한 나머지 이러한 모순들, 혹은 그들이 망상적으로 표현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자들의 인지부조화'를 자신들이 역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이러한 불일치를 기고만장하게 지적하는 보수주의자들은 현대 인문학 학위 과정의 결과물들을 단 한 번도 훑어보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 학문의 세계에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들을 애지중지 엮어내어 내부적으로 충돌하는 거대한 피해자 서사의 뗏목을 만들어내며, 그 불협화음 가득한 비탄이 지닌 급진적·진보적 가능성을 찬양하기 바쁘다.
논리적 불일치는 오히려 '대성당'을 움직이게 하는 연료가 되며, 더 적극적인 논쟁과 한층 더 높은 차원의 통합을 요구하는 명분으로 작용할 뿐이다. 통합을 지향하는 대중적 토론은 언제나 모든 상황을 좌파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동시킨다. 이는 이해하기 그리 어려운 논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주류 보수주의가 본질적으로 무용하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꼴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폭로는 그 누구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하지 않기에, 앞으로도 결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보수주의는 변증법, 즉 '동시적 모순'을 다룰 능력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보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정반대다). 보수주의는 불일치가 지닌 힘을 찬양하기는커녕, 마치 화석 전시회나 훌륭한 대조군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압축이 풀린 모순들을 차례차례 통과하며 비틀거릴 뿐이다. 민권 운동 시기에 "역사의 길목을 가로막고 서서 '멈춰라!'라고 외치던" 탓에 영원한 인종적 파멸의 형벌을 선고받았던 주류 보수(그리고 공화당)는 이후 방향을 급선회했다. 그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자신들의 정전(正典)을 구성하는 핵심 인물로 받아들였으며, "아메리칸드림에 깊이 뿌리내린 하나의 꿈"과 자신들을 조화시키고자 애쓰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일어서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는 자명한 진리라고 믿는다"라는 그 나라의 신조가 지닌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며 살아가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 위에서, 예전 노예들의 자손들과 예전 노예 주인들의 자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을 수 있으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불의의 열기로 가득 차고, 억압의 열기로 숨 막히는 미시시피주조차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모하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언젠가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의 본질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아가리라는 꿈입니다.”
헌법적·성서적 전통주의에 대한 킹 목사의 호소, 정치적 폭력에 대한 거부, 그리고 자유에 대한 거침없는 찬가에 매료된 미국의 보수주의는 점차 인종적 화합과 '피부색에 대한 편견 없이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그의 꿈을 자신들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자신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문서들의 진정한, 섭리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비록 이것이 주류, 대중, 그리고 보수 진영의 새로운 정통 교리로 자리 잡기는 했으나,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선을 잠재우기에는 너무나 늦게 공고화된 처방이었다. 결국 이 전략은 흑인 유권자층의 마음을 돌리는 데 거의 완전히 실패했으며, 알맹이 없는 형식주의에 불과하다는 좌파의 한층 더 거세진 조롱거리로 남게 되었다.
미국의 신조에 대한 킹 목사의 재진술은 너무나 설득력이 강했기에, 되돌아보면 정치적 주류 사회를 집어삼킨 그의 승리는 그저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보수주의가 건국의국의 신조에 대한 킹 목사의 재진술은 너무나 설득력이 강했기에, 되돌아보면 정치적 주류 사회를 집어삼킨 그의 승리는 그저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보수주의가 건국의 아버지들의 프리메이슨적 합리주의에서 벗어나 성서적 종교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그들의 신앙은 출애굽기라는 신화적 틀로 표현되는 흑인 미국인들의 경험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갔다. 그 경험 속에서 역사의 기본 골격은 예속으로부터의 탈출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모든 신의 자녀들인 흑인과 백인, 유대인과 이방인,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들이 함께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의 노랫말을 부를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마침내 자유를 얻었도다! 마침내 자유를 얻었도다!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를 얻었도다!'"
킹 목사 메시지의 천재성은 그 비범한 통합의 힘에 있었다.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 미국의 독립 전쟁, 남북 전쟁 직후 이루어진 가속 가택 노예제의 폐지, 그리고 민권 운동 시기의 열망들이 하나의 신화적 원형(原型) 속으로 압축되었다. 이는 미국의 신조와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저항할 수 없는 도덕적 힘뿐만 아니라 신의 섭리에 의해서도 추동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적 천재성의 진정한 척도는 그것이 통제하고 다스리는 복잡성에 있다. 노예 해방이라는 "기쁨의 새벽"이 찾아온 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킹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흑인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의 삶은 여전히 격리와 차별이라는 수갑과 사슬에 묶여 처참하게 불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은 물질적 풍요라는 광활한 대양의 한가운데에 홀로 떠 있는 빈곤이라는 외딴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시들어 가고 있으며, 자신의 조국에서 망명객 신세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핵심은 탈출이며, 독립 전쟁도 탈출이고, 지하철도나 자기해방, 도피, 망명의 모델이 보여주듯 노예제로부터의 해방 역시 탈출이다. 반면, ‘마법 같은 은유가 발휘하는 효과를 제외하면’ 격리라는 '수갑'에 채이고, 차별이라는 '사슬'에 묶이며, '빈곤이라는 외딴섬'에 갇히거나 '자신의 조국에서 망명객 신세'가 된다는 것은 탈출과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회적 통합과 수용, 공평하게 분배되는 풍요, 공적 참여, 혹은 동화(同化)로 향하는 탈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직 엄연한 현실과 운명에 인질로 잡힌 하나의 열망, 즉 꿈이 있을 뿐이다. 좌파와 반동적 우파가 똑같이 빠르게 간파했듯, 이 꿈이 형식적 평등에 대한 권리를 넘어 실질적인 정치적 구제의 영역으로 조금이라도 발을 들이는 순간, 그것은 보수주의 우파가 감히 넘볼 수도 없고 감당할 권리도 없는 꿈이 되어버린다.
존 더비셔가 내셔널 리뷰에서 해고당한 사건 직후, 《더 네이션(The Nation)》 블로그의 제시카 발렌티(Jessica Valenti)는 이 점을 명확히 짚어낸다.
“… 이것은 단순히 누가 어떤 글을 썼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수주의 노선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격렬하게 인종차별적인 정책들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인종차별이란 그저 겉으로 쉽게 식별할 수 있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표현되는 차별과 증오일 뿐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외국인 혐오적인 정책을 밀어붙이고 체제적 불평등을 지지하는 것 역시 엄연한 인종차별입니다.
결국 무엇이 더 큰 파급력을 가집니까? 더비셔 같은 일개 인종차별주의자입니까, 아니면 애리조나 주의 이민법입니까? 칼럼 한 편입니까, 아니면 투표권 억압입니까? 한 매체에서 인종차별주의자 한 명을 쫓아낸다고 해서, 유색인종을 불균형하게 처벌하고 차별하는 보수 진영의 핵심 의제라는 본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당신들은 구조적 불평등을 지지해 놓고선, 겉으로 인종차별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등을 두드리며 자축할 자격이 없습니다.”
'보수 진영의 핵심 의제'는 인종차별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몽상적(희망차면서도 논리적으로 불일치하는)일 수가 없다. 이는 인종 변증법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에 내재된 속성이다. 낮은 시간선호에 보상을 제공하고 충동성을 처벌하는, 즉 자본주의적 발전에 광범위하게 부합하는 정책들은 경제적으로 가장 기능하지 못하는 사회적 집단에 필연적으로 '결과적 불평등'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물론 변증법은 이러한 결과적 불평등이 지닌 인종적 측면을 강력히 강조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인적 자본 형성을 유도하는 인센티브를 인종차별적이라고 규탄하기 위해), 바로 그와 똑같은 관찰을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이라 비난하며 격렬하게 부인할 것을 요구한다. 보수주의자들이 이러한 이중적인 구속을 정치적 기민함과 우아함으로 헤쳐 나갈 것이라 기대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20세기 후반의 역사를 통째로 까먹은 게 틀림없다. 예컨대, 《워싱턴 이그제미너(Washington Examiner)》의 파멸이 예정된 패배자이자 얼간이 보수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공포에 질린 채 목격하고 있었다.
“민주당 하원의원들은 정부 프로그램을 방어하기 위해 인종 문제를 다루는 법에 대한 교육을 이번 주에 받았습니다... 화요일 하원 민주당 의원 총회와 보좌진을 대상으로 진행된 발표 자료에 따르면, 민주당은 표면적으로는 가치 중립적으로 보이는 자유시장적 수사(修辭)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 찬 것으로 묘사하려 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더욱더 완벽한 연방에 대한 대안적 버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연방 자체가 대안들에 대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한때 그러한 대안들이 존재했을지도 모를 곳, 즉 자유가 여전히 '탈출'을 의미하고 변증법이 공간 속으로 해체되던 곳을 찾아 나서다 보면, ‘대성당’의 그림자 혹은 대성당의 중요한 타자(他者)로서 급조된 광대들의 공포의 집으로 빠져들게 된다. 우파는 결코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통일성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외부로부터 하나의 통일성을 부여받았다. 이를 반동적 백인의 정신병원이자 양성소인 ‘크래커 공장(Cracker Factory)’[1]이라 부르자.
제임스 C. 베넷(James C. Bennett)이 그의 저서 《영어권의 도전(The Anglosphere Challenge)》에서 영어권 세계의 주요한 문화적 특성들을 규명하고자 했을 때, 그 결과로 도출된 목록은 대체로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영어라는 언어 자체를 비롯해 관습법 전통, 개인주의, 비교적 높은 수준의 경제적·기술적 개방성, 그리고 중앙집권화된 정치 권력에 대한 유별나고도 단호한 경계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통합된 영토 내부에서 혁명적 전환을 꾀하기보다는 영토적 분열, 분리주의, 독립, 그리고 도피를 선택함으로써 의견 불일치를 '시간'이 아닌 '공간' 속에서 해결하려는 뚜렷한 문화적 경향일 것이다. 영어권 사람들은 의견이 충돌할 때 공간적으로 분리되는 길을 택하곤 했다. 그들은 정권 교체와 같은 식의 통합적인 해결 대신 정부 권한을 쪼개어 어느 한쪽도 독점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저마다 제각각 살아가는 방식을 추구하며, 독립된 자치정부들을 증식시키고 권력을 지방에 분산하며 정부 형태를 다양화했다. 오늘날 매우 약화된 형태일지라도, 사회적 분해를 지향하는 이러한 반(反)변증법적이고 탈(脫)통합적인 성향은 세계화주의(Globalism) 정치 프로젝트에 대한 완고하고도 속삭이는 듯한 적대감, 그리고 (분열적 의미에서의) 연방주의에 대한 흔적 기관 같은 끌림을 통해 여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쪼개지거나 도망치는 것, 이것은 모두 탈출이며 (회복 불가능한) 반(反)변증법이다. 이는 영어권 전통 내에서 자유를 길러낸 근본적인 원천이다. 만약 '크래커 공장'의 기능이 모든 탈출구를 차단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지을 수 있는 장소는 단 한 곳뿐이다. 바로 여기다.
지옥이나 아우슈비츠가 그러하듯, '크래커 공장'의 정문에도 단순한 슬로건 하나가 새겨져 있다. "탈출은 인종차별이다."
정확히 같은 맥락을 말해주는 ‘다인종 지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백인들의 이주 현상’을 뜻하는 '화이트 플라이트(White flight)'라는 표현이 그토록 빈번히 사용되면서도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단 한 번도 규탄받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표현은 다른 경우였다면 격렬한 분노의 발작을 일으켰을 법한 '인종적 통계의 일반화'를 노골적으로 담고 있음에도 말이다.
'낮은 시간선호'가 결코 특정 인종만의 전유물이 아니듯 '화이트 플라이트' 역시 본질적으로 '백인'만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친 일반화의 둔감함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이유는, 그것이 크래커 공장의 구조를 지탱해 주기 때문이며, 고전적(혹은 소극적) 자유를 원죄(인종적 죄책감)와 혼동하도록 만드는 필수불가결한 장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곳에 절대로, 결단코 가서는 안 된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갈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 역주 -
[1] Cracker Factory: 닉 랜드가 주류 진보 엘리트 체제('대성당')에 의해 규정된 우파의 생태계를 냉소적으로 풍자하기 위해 사용한 중의적 슬랭이다. 미국에서 '크래커(Cracker)'는 남부의 가난하고 거친 백인 하층민을 비하하는 멸칭이며, '크래커 팩토리(Cracker Factory)'는 영어 속어로 '정신병원'을 뜻한다. 즉, 좌파 기득권이 우파를 '못 배우고 폭력적인 미치광이 집단'으로 낙인찍어 결속시켰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 압박 속에서 역설적으로 탄생한 반동적 우파 세력을 기득권이 조롱하는 복합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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