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번역] 닉 랜드, 암흑계몽주의 제4f부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 4f부: 생명공학적 지평선에 다가서다


닉 랜드(Nick Land), 2012년 7월 20일


길었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이제 서둘러 결론을 향해 나아갈 때다. 지금까지의 핵심 주제는 마인드 컨트롤, 즉 생각의 억압이었다. 현대 서구 사회를 지배하며 멘시우스 몰드버그가 '대성당'이라 명명한 언론·학계 복합체가 바로 이를 주도해 왔다. 억눌린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그늘진 곳으로 숨어들어 때로는 괴물로 변하기도 한다. 오늘날 대성당의 억압적인 정통성이 다방면으로 흔들리면서, 마침내 괴물들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대성당의 핵심 교리는 '표준 사회과학 모델(SSSM)' 또는 '백지설(白紙說, theory of tabula rasa)'으로 정형화되어 왔다. 이는 인류에 관한 모든 합당한 질문은 문화의 영역으로 한정된다는 믿음으로,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의 인류학을 통해 그 기틀이 완성되었다. 이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허용할 뿐,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타고난 특성이나 집단 간의 생물학적 차이를 파고드는 질문은 그 자체가 문화적 왜곡이거나, 심지어 하나의 병리 현상으로 취급된다.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은 오직 '사회화'의 실패뿐이다.


대성당은 일관된 이념적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적을 걸러내기 때문에, 표준 사회과학 모델에 대한 객관적인 과학적 평가는 쉽게 날 선 적대감으로 변질되곤 한다. 사이먼 블랙번(Simon Blackburn)이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저서 《빈 서판》을 평론하며 지적했듯, "타고난 본성과 길러지는 사회화 사이의 이분법은 순식간에 정치적, 감정적 문제로 번진다. 거칠게 말해 우파는 유전자를 좋아하고 좌파는 문화를 좋아한다."


상호적인 증오가 극에 달하면 유전적 결정론과 사회구성주의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양측 모두 극단적으로 축소된 인과관계 모델에 갇혀 있다. 한쪽은 본성이 문화로 발현된다고 보고, 다른 쪽은 문화가 본성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구성물') 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입장 모두 미완성의 회로 속에서 서로 반대편에 갇힌 채, 세상을 기술-과학적이고 산업적으로 다루는 행위인 '실천적 자연주의의 문화'를 구조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


지식을 습득하고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의 역동적인 회로를 이룬다. 이는 기술-과학이라는 통합된 체계를 만들어내며, 이론과 실천의 영역으로 명확히 나눌 수 없다. 과학은 광범위한 산업 공정 속에서 실험 기술과 더욱 정교한 장비의 생산을 거치며 순환적으로 발전한다. 과학의 진보는 곧 기계의 개량이다. 이처럼 (현대) 과학이 본질적으로 지닌 기술적 성격은 문화가 복합적인 자연의 힘으로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과학은 이미 존재하는 자연적 상황을 그대로 대변하지도, 그저 사회적 표상을 만들어낼 뿐인 구성물도 아니다. 오히려 자연과 문화는 자연의 가장자리에서 역동적인 회로를 형성하며 운명을 결정짓는다.


현대화의 자기강화적 전제에 따르면,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변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물학과 의학이 함께 진화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몰려오는 과학적 발견의 파도로 표준 사회과학 모델을 철저히 무너뜨린 바로 그 역사적 역동성은, 동시에 생명공학을 통해 인간의 생물학적 정체성을 유동적으로 변화시킨다. 우리가 진정 어떤 존재인지 알아가는 과정과, 정밀하고 과학적인 정보에 기반해 변형 가능한 기술적 우연이자 '기술적 가소성(可塑性)'을 지닌 존재로 스스로를 재정의하는 과정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인류'는 기술의 영역에 흡수되면서 비로소 이해 가능한 대상이 되며, 예컨대 게놈의 정보 처리를 통해 유전 정보를 읽어내는 일과 편집하는 일은 완벽하게 하나로 맞물리게 된다.


인류를 삼켜버릴 듯 가속하는 이 회로를 묘사하는 것은, 곧 우리의 '생명공학적 지평선'을 정의하는 일이다. 이는 한 집단이 자신들의 기술과 더 이상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본성과 문화가 결정적으로 융합되는 임계점을 뜻한다. 이러한 현상은 유전적 결정론도 아니고 사회구성주의도 아니지만, 만약 두 이론이 실재하는 무언가를 가리키고자 했다면 바로 이를 일컬었을 것이다.


이 증후군을 생생하게 예견한 인물이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Butler)다. 그녀의 《제노제네시스(Xenogenesis)》 3부작은 생명공학적 지평선을 넘어선 인류 이후의 집단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소설 속 '유전자 무역상'인 오안칼리족(Oankali)은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적용하는 생명공학 프로그램과 분리될 수 없는 정체성을 지닌다. 이들은 단일한 통합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집단을 상업적으로 획득하고, 산업적으로 생산하며, 성적(性的)으로 재생산한다. 오안칼리족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와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행동하는가 하는 문제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만들어가기에 그들의 본성이 곧 문화이고, 문화가 곧 본성이다. 그들의 존재는 정확히 그들의 행동 그 자체다.


서구의 전통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다가오는 생명공학적 지평선을 (부정적인 의미의) 신학적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은 온당한 진단이다. 기술-과학을 통한 자가-생산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지닌 고정되고 신성시된 본질을 정면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는 5억 년 전 진핵생물이 출현한 이래 자연계에서 일어난 가장 거대한 격변이다. 이는 단순한 진화적 사건을 넘어 진화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임계점이라 할 수 있다. 존 H. 캠벨(John H. Campbell)은 "사실 우리의 유전 체계보다 공학적 설계에 더 이상적인 시스템을 상상하기란 어렵다"라고 주장하며, '자가촉매적 인간(Homo autocatalyticus)'의 등장을 예고한다.


존 H. 캠벨? 괴물의 시대를 예고한 선지자이니, 그의 괴물 같은 문장을 인용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구실이 더 있겠는가. 


"생물학자들은 기존 종(種)의 변방에 있는 아주 작은 소집단(어쩌면 단 한 마리의 수정된 암컷. 마이어(Mayr), 1942년)으로부터 새로운 형태가 급격히 진화해 나온다고 본다. 도저히 살아가기 힘든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 고립된 가족 구성원 간의 강제적인 근친교배, 이웃 종(種)으로부터 유입된 외래 유전자의 '종 간의 침투', 경쟁할 다른 동종 개체의 부재 등 온갖 요인이 유전체 프로그램의 대대적인 재편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이때 유전자 구조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변형된 종의 파편들은 대부분 멸종하지만, 어쩌다 운 좋게 새로운 생태적 지위에 맞아떨어진 극소수는 살아남는다. 이들은 번성하여 새로운 종으로 확장된다. 이후 통계적으로 제한된 유전자 풀로 전환되면서, 이 신생 종은 더 이상의 진화적 변화를 멈추고 안정화된다. 기성 종은 변화보다 정체되어 있다는 점이 훨씬 더 두드러진다. 심지어 새로운 하위 종을 분가시키는 과정에서도 기존 종 자체는 별로 변하지 않는 듯하다. 종이 점진적으로 변형될 수 있으며 실제로 어느 정도 그렇게 변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소위 '점진적 진화'는 새로운 종이 탄생할 때 지질학적으로 급격하게 일어나는 거대한 '도약'에 비하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대부분의 진화적 변화는 새로운 종의 탄생과 맞물려 일어난다.


둘째, 여러 진화 방식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 이 경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전체 과정을 주도한다.


셋째, 종 전체가 아니라 극소수의 개체 집단이 진화의 대부분을 이끈다.


진화의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은 '자기 참조성'이다(캠벨, 1982). 자율성을 지닌 외부 '환경'이라는 쿠키 틀이 반죽 판에서 모양을 찍어내듯 종의 형태를 규정한다는 데카르트식의 도식적인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환경이 종을 '진화'시키는 것 못지않게, 종 역시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깊숙이 변화시킨다. 특히 생물은 자신들이 경쟁을 벌이는 환경의 제한 조건들을 직접 만들어낸다. 따라서 유전자는 진화에서 두 가지 역할을 맡는다. 자연선택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자신에게 작용할 선택압을 궁극적으로 유도하고 결정하는 역할이다. 이러한 순환적 인과관계는 진화가 지닌 기계적 성격을 완전히 뒤흔든다. 진화는 생물이 진화시킨 활동이 다시 그들의 진화로 되돌아오는 피드백에 의해 지배된다.


세 번째로 중요한 깨달음은, 진화가 그 결과물인 생물의 변화를 넘어 진화 과정 자체의 변화로까지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즉, 진화는 진화한다. 진화학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다윈주의의 틀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을 부여하지 않았다. 다윈주의자들, 특히 현대 신(新)다윈주의자들은 진화를 생물학보다 앞서는 하나의 단순한 논리적 원칙의 작동과 동일시한다. 그들에게 진화란 그저 다윈식 자연선택 원리가 실제로 구현된 것에 불과하며, 진화학이라는 학문 역시 이것을 다룰 뿐이다. 원칙이라는 것은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없으므로, 그들이 보는 진화는 본질적으로 정체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실제 생물학적 진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진화는 고정된 원칙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실제 과정이다. 진화가 일어나는 방식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실제로 변해왔다는 점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진화 과정은 전개될수록 스스로 고도화된다는 점에서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지구의 원시 수프 속에 있던 생명 이전의 물질은 다윈주의 이전의 '화학적' 메커니즘을 통해서만 겨우 진화할 수 있었다. 이 보잘것없는 과정이 마침내 스스로를 복제할 정보가 담긴 유전자 분자를 만들어내자, 진화는 비로소 자연선택이라는 엔진을 가동했다. 그 후 진화는 스스로 복제하는 유전체를 역시 스스로 복제하는 생명체 속에 담아냈고, 이를 통해 환경의 선택압이라는 바람에 생명이 대응하는 방식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다세포 생물이 탄생하면서, 진화는 느리고 다양성이 떨어지는 생화학적 진화 대신 신체 구조의 변화라는 대안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효소 촉매의 변화 대신 발달 프로그램 속 지침의 변화가 그 자리를 채웠다. 신경계의 등장은 이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한 행동적, 사회적, 문화적 진화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고차원적 방식들이 결합하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지성인 인류가 이끌고 추진하는 합리적이고 목적이 분명한 진화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 각각의 단계는 진화 능력이 새로운 차원으로 한 단계씩 도약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진화는 서로 구별되면서도 긴밀히 얽힌 두 가지 과정으로 나뉜다. 나는 이를 '적응적 진화'와 '생성적 진화'라 부른다. 전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윈식 진화로, 생명체가 생존과 번식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반면 생성적 진화는 이와 전혀 다르다. 구조가 아니라 과정 자체의 변화를 뜻하며, 더욱이 그 과정은 존재론적이다. 진화(evolution)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펼쳐내다'이며, 여기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진화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다. 고등 동물은 진화하는 능력 면에서 갈수록 노련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조상이나 가장 하등한 미생물보다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적합하게 진화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종의 생존 기록은 완벽하게 동일하다. 1억 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고등 생물은 평균적으로 단 두 마리의 후손만을 남기며, 현대의 종들 역시 과거의 종들만큼이나 멸종할 확률이 높다. 번식의 성공은 누적되는 수치가 아니기에, 종이 갈수록 세상에 더 적합한 방향으로만 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후손이 자신과 닮기를 바라는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자들에게 캠벨의 주장은 그야말로 심연이나 다름없다. 이들에게는 인종 간의 혼혈 같은 문제조차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얼굴에 촉수가 돋아난 모습을 상상해 보면 이해가 쉽다.


캠벨은 분리주의자이기도 하지만, 정체성 정치(인종적 순혈주의)나 전통적인 지능적 엘리트주의(우생학)의 문제의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생명공학적 지평선에 다다를수록, 분리주의는 완전히 더 거칠고 괴물 같은 방향, 즉 새로운 종의 분화를 향해 나아간다. '유볼루션(euvolution)'의 필진들은 이러한 시나리오를 다음과 같이 잘 포착하고 있다.


”인류의 대다수가 질적인 인구 관리 정책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캠벨은 인류 전체의 IQ를 높이려는 그 어떤 시도도 지루하리만치 느릴 것이라고 지적한다. 더욱이 초기 우생학의 전반적인 취지는 종의 개선이라기보다는 퇴보를 막는 것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따라서 캠벨의 우생학은 호모 사피엔스를 '유물'이나 '살아 있는 화석'으로 취급하며 포기할 것을 권한다. 대신 유전공학 기술을 동원해 인간의 유전체에 개입하고, 나아가 DNA 합성기를 이용해 완전히 새로운 유전자를 무(無)에서부터 써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우생학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실천될 것이며, 이들의 성취는 통상적인 진화의 속도를 너무나 빠르고 근본적으로 앞지른 나머지, 불과 열 세대 안에 이 새로운 집단이 오늘날 우리가 유인원을 초월한 것과 같은 수준으로 현재의 인류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생명공학적 지평선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인종적 공포와 갈등의 변증법 속에서 도출되는 그 어떤 논의도 결국 사소하고 부차적인 한계에 갇혀 있을 뿐이다.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 원문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120726012138/http://www.thatsmags.com/shanghai/article/2497/the-dark-enlightenment-part-4fina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주권(主權), 책임, 소유: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 일치의 방법론에 관하여

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의 버퍼(Buffer)

일본천황 황위 계승권 개정안 통과, 여성 천황 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