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번역] 닉 랜드, 암흑계몽주의 제4d부: 기묘한 결합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 4d부: 기묘한 결합
닉 랜드(Nick Land), 2012년 6월 15일
‘크래커(Cracker)’라는 단어가 특정 인종을 비하하는 말로 쓰이게 된 기원은 아득하고 불분명하다. 이 말은 이미 18세기 중반, 주로 켈트족 혈통의 가난한 남부 백인을 겨냥한 멸칭으로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수수를 빻는 사람을 뜻하는 ‘콘크래커(corn-cracker)’나 농담을 뜻하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단어 ‘크랙(crack)’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종과 문화, 계급적 특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단어의 풍부한 의미적 맥락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흑인 비하 발언인 ‘N 단어(Nigger)’와 비교할 만하다. 두 단어 모두 누구나 알지만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금기된 진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단어는 사람들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더 자극받고 활기를 얻는다는 왜곡된 진실을 여실히 증명한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에 집착하며, 계몽주의적 인구 관리가 규정하는 보편적 범주에 완강히 저항한다. 진보라는 톱니바퀴의 회전을 가로막는 모래알, 그것이 바로 크래커다.
그러나 이 멸칭이 가진 가장 흥미로운 매력은 완전히 우연히, 혹은 신비로운 계시처럼 찾아왔다. 크래커, 즉 ‘깨부수는 자들’은 암호와 금고, 유기 화합물 등 굳게 닫히고 결합된 모든 시스템을 해체하며, 이는 결국 지정학적 균열로 이어진다. 이들은 파국과 분열, 혹은 연방 탈퇴를 예고하며 영어권 역사에서 저주받은 해체주의적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언어의 도약과 어긋남 속에서도 이 반항적인 크래커의 모습이 여전히 길들지 않은 남부, 즉 미국의 영토 확장이라는 ‘명백한 운명’에 복종하지 않는 남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단어의 의미는 지극히 복잡하고 다루기 힘든 본질로 순식간에 되돌아간다.
모순은 해결을 요구하지만, 균열은 그저 계속해서 넓어지고 깊어지며 번져나갈 뿐이다. 일이 어그러지고 무너져 내려도 상관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크래커의 정서다. 갈라서면 그만인데 굳이 합의에 도달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고집스러움이 극에 달하면 애팔래치아산맥 오솔길 끝자락, 허름한 판잣집이나 녹슨 트레일러에 사는 전형적인 시골뜨기의 모습이 된다. 모든 경제 거래는 현금이나 밀주로만 이루어지고, 공무원과의 소통은 장전된 산탄총 총구를 사이에 두고 진행되며, 시대를 초월한 반(反)정치적 지혜는 "내 땅에서 당장 나가"라는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요약되는 삶이다.
통합을 위한 논쟁이나 변증법을 이렇듯 냉소하는 태도는 영어권 중심의 세계사, 즉 ‘미국 북부 중심의 복음주의 청교도주의’의 주류 관점에서 볼 때 문화적 교양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지능마저 떨어지는 행위로 비친다. 사회 구성주의적 가치를 철저히 신봉하는 이들조차 크래커의 이 반항적인 난폭함 앞에서는 즉각 완고한 유전 결정론적 같은 지능 측정 기준으로 되돌아간다. 사회정치적 진보라는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그 진보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고함은 그저 지적 장애의 명백한 증거로 보일 뿐이다.
고정관념이 대개 높은 통계적 진실성을 지닌다는 점을 감안하면, 크래커 집단이 여러 세대에 걸친 역도태 압력으로 인해 백인 지능지수(IQ) 정규분포 곡선의 왼쪽에 치우쳐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찰스 머레이의 주장대로 미국 사회의 능력주의적 선별 기능이 꾸준히 정교해졌고, 여기에 재산, 사회적 지위, 계급, 직업, 가정 환경, 학벌 등 같은 계층끼리 끼리끼리 결혼하는 동질혼까지 결합해 계급 차이가 유전적 카스트로 고착화되었다면, 크래커 계층의 인지 능력이 눈에 띄게 높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 고정관념을 끈질기게 파고들다 보면 다소 당혹스럽고 흥미로운 의문이 생긴다. 동질혼이라니, 사촌끼리 결혼하는 크래커 사회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한단 말인가? 그렇다, 바로 그 점이다. 북서유럽의 하지날 선(Hajnal Line) 바깥쪽 인구 집단에서 유래한 전통적인 크래커의 친족 패턴은, 족외혼(族外婚)을 따르는 일반적인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WASP)의 규범에서 확연히 벗어나 있다.
이 주제에 있어서는 지치지 않고 연구를 이어온 블로거 'hbdchick'의 글이 핵심적인 자료다. 그녀는 방대하고 기념비적인 일련의 포스팅을 통해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의 이론적 도구를 활용하며 본성과 문화가 교차하는 접경지대를 탐구한다. 친족 구조, 포괄 적응도 계산에서 요구되는 차별화,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이타주의 진화심리학의 독특한 민족적 특성이 그 탐구 대상이다.
그녀는 특히 사촌 간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함으로써 의무적 외혼제(外婚制)가 1,6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북서유럽 역사의 특이성에 주목한다. 외혼(外婚)을 향한 이러한 독특한 성향이 다양한 생물·문화적 특성을 매끄럽게 설명해 준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가족 중심의 이타주의보다 호혜적 이타주의가 독보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이다. 이는 강한 개인주의, 핵가족, 친족 관계가 배제된 '법인성(法人性)' 제도에 대한 선호, 낯선 이들 사이의 고도로 발달한 계약 관계,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족벌주의와 부패, 그리고 부족적 결속 없이도 유지되는 견고한 사회적 응집력 등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반면 근친혼은 부족주의적 집단주의와 대가족에 대한 충성, 명예를 중시하는 문화, 외지인 및 비인격적 제도에 대한 불신을 자극하는 선택 환경을 조성한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씨족적' 특성은 유럽 중심의 근대성이 지향하는 핵심 가치와 껄끄럽게 충돌하며, 그 결과 원시적인 '외국인 혐오'나 '부패'라는 비난을 받기 일쑤다.
씨족적 가치는 당연히 씨족 사회에서 길러진다. 사촌 간의 결혼이 지속되었던 영국 변방의 켈트족 거주지나 국경 지대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에서는 근친혼과 결합된 사회경제적, 문화적 양식, 특히 농업보다는 유목 중심의 생활 방식과 피의 복수극으로 치닫는 극단적인 폭력 성향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 분석은 ‘백인 정체성’이 품은 핵심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근대성의 도덕 질서를 형성하고, 부족주의에서 벗어나 호혜적 이타주의로 나아가게 한 유럽인 특유의 민족적 특성은 외혼이라는 독특한 유산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외혼이라는 유산은 본질적으로 자민족 중심적인 결속력을 좀먹는 성질을 지닌다. 다시 말해, 민족적 집단 성향이 거의 부재하다시피 한 취약함이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그 집단을 민족적으로 근대화하고 친족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대규모 제도를 구축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다. 결국 이러한 특성이 근대성의 역동적 흐름 속에서 객관적인 우위와 특권을 누리게 한 셈이다.
이러한 모순은 나치즘와 네오나치즘으로 대변되는 극단적인 형태의 유럽 자민족 중심 부흥 운동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며, 이는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를 혼란에 빠뜨린다. 유독 두드러지는 '동족 배반' 성향이야말로 자기 인종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 되는 순간, 독자적인 인종 우월주의 정치가 설 자리는 논리적 심연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물론 대규모 소요 사태를 일으킬 기회야 여전하겠지만 말이다.
나치는 정의상 인종적 순결이라는 제단 위에 근대성을 기꺼이, 그리고 열렬히 제물로 바치고자 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는 근대화 경쟁에서 뒤처져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결과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혹은 그 비극적 결말을 자처하는 꼴이다. 정체성 정치는 본질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패배자들의 전유물일 뿐이다. 오직 좌파적 관점에서만 작동하는 기생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근친혼은 근대적 권력을 획득하는 데 구조적으로 역행하므로, 인종적 '초인(超人)'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어쨌든 나치라는 존재가 아무리 흥미로울지라도, 이들이 크래커 문화의 역사나 방향성을 이해하는 신뢰할 만한 열쇠가 될 수는 없다. 그저 백인 정체성 정치의 체계적 구축과 활용이 지닌 논리적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이마에 하켄크로이츠 문신을 새긴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미국 남부의 악명 높은 가문 간 결투인 '햇필드(Hatfield) 가문과 맥코이(McCoy) 가문과의 싸움'은 게르만 전사들의 결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파슈툰 부족의 유혈 복수극에 가깝다.
반동적 백인의 정신병원이자 양성소인 크래커 공장(Cracker Factory)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결합은 완전히 결이 다르며, 훨씬 더 당혹스럽다. 초(超)계약주의적 시장화를 옹호하는 세련된 세계시민주의자들과 낭만적 전통주의자, 배타적 민족주의자, 그리고 남부 연합의 ‘잃어버린 대의’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한데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 교훈을 탐구하기에 앞서, 이 얽힘이 지닌 온전하고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기괴함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핵심만 추려낸 무작위적인 데이터 몇 가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 미제스 연구소(Mises Institute)는 앨라배마주 오번에서 설립되었다.
· 1980년대 발행된 론 폴(Ron Paul)의 뉴스레터에는 존 더비셔(John Derbyshire) 풍의 뉘앙스가 짙게 풍기는 언급들이 담겨 있다.
· 존 더비셔는 론 폴을 열렬히 지지한다.
· 머레이 로스바드(Murray Rothbard)는 인간 생물학적 다양성(HBD) 이론을 옹호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 루 록웰 닷컴(lewrockwell.com)의 주요 기고가 중에는 토머스 J. 디로렌조( Thomas J. DiLorenzo)와 토머스 우즈(Thomas Woods)가 있다.
· 톰 파머(Tom Palmer)는 루 록웰과 한스 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를 혐오한다. 그들이 "지옥의 문을 열어젖혀 가장 극단적인 우익 인종주의자, 민족주의자, 그리고 온갖 괴짜들을 환대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 남부빈곤법률센터(SPLC)가 지정한 ‘급진 우파’ 감시 명단의 20%는 자유지상주의자와 헌법주의자(척 볼드윈(Chuck Baldwin), 마이클 볼딘(Michael Boldin), 톰 드위스(Tom DeWeese), 알렉스 존스(Alex Jones), 클리프 킨케이드(Cliff Kincaid), 엘머 스튜어트 로즈(Elmer Stewart Rhodes) 등)가 차지하고 있다.
이 정도면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겠지만) 논의를 이어가기에 충분할 듯하다. 다소 의도적이고 거칠며 편견이 섞인 방식으로 추려낸 이 사실들은, 단 하나의 근본적인 논지를 직관적으로 뒷받침한다. 그것은 바로 근본적인 사회·역사적 동력들이 자유지상주의를 ‘크래커‘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hbdchick‘의 잠정적인 연구 결론을 틀로 삼아 받아들인다면, 자유지상주의와 신(新)남부연합주의라는 이 기묘한 결합의 어색함이 즉각 수면 위로 드러난다. 외혼의 정도에 따라 정의되는 생물-문화적 축 위에 두 사상을 올려놓으면, 양자 사이의 공통분모나 근접성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한쪽 극단에는 철저히 경제적 형태의 자발적 교환 네트워크에만 초점을 맞추는 극단적 개인주의 교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협상 불가능한 사회적 유대의 존재 자체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으로 악명 높다. 반면 다른 쪽 극단 근처에는 지역에 대한 애착과 대가족, 명예, 상업적 가치에 대한 경멸, 외지인을 향한 불신이 가득한 풍요로운 문화가 놓여 있다. 유동적인 자본주의의 정제된 합리주의가 전통적인 위계질서 및 양도 불가능한 가치와 나란히 배치되는 셈이다. 이탈을 절대적인 최우선 과제로 삼는 사상이, 이탈이라는 개념 자체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민속적 관습들과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하지만 이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갈수록 거부하기 힘든 명확한 결론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연방 탈퇴라는 전망을 제외하면, 영어권 세계에서 자유의 미래는 없다는 사실이다. 다가올 파국과 분열만이 유일한 탈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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