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크래프트의 우주적 공포와 무신론적 전통주의
코스믹 호러
칼 F. 보텔(Karl F. Boetel), 2014.04.21.
[...]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모든 인용은 1976년 아캄 하우스에서 출판된 『러브크래프트 서한집(Selected Letters of H. P. Lovecraft)』에서 발췌했으며, 권수와 페이지 번호로 표기함.)
우주적 관점
러브크래프트의 사고방식, 특히 인종과 문화, 문명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가 견지했던 우주적 관점을 채택해야 한다(I.24).
인류는 창조의 역사에서 아주 사소한 사건에 불과하다. 영원과 무한의 연대기 속에서 인간의 존재는 지상에 사는 부족이나 국가의 역사 속에 남은 아이의 눈사람만큼이나 보잘것없다. […] 순간을 살다 가는 존재이자, 자연의 신이 벌인 하나의 실험에 불과한 우리 인간이 영원한 미래와 대단한 지위를 누릴 거라 오만하게 자처하는 꼴이라니.
러브크래프트의 모든 소설은 '보편적인 인간의 법칙과 관심사, 감정 따위는 광활한 우주에서 아무런 효력도 의미도 없다'는 근본 전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II.150). 그에게 우주란 '전자와 원자, 분자가 끊임없이 재배열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목적 없는 일시적 현상'일 뿐이며, 그러한 우주의 활동은 맹목적이면서도 규칙적인 기계적 패턴을 따를 뿐이다(II.41).
따라서 러브크래프트는 다음과 같이 글을 적었다.(I.334)
인간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나 '고귀함' 같은 가치는 심연의 맹목적인 신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 모든 것은 똑같을 뿐이다. 영원히 돌아가는 맷돌을 뇌도 눈도 없이 돌리는 그 신들은, 인간이 제멋대로 귀하게 여기는 아름다움이나 고귀함 따위를 때로는 우연히 북돋우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짓밟아 버리기도 한다.
다행히도 우주가 우리를 의도적으로 해치려는 것은 아니다(V.195).
진실은 우주가 그저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주는 그 안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으며, 심지어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우주는 인간을 돕거나 즐겁게 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고통을 주려 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 안의 혼란스러운 조건과 감정 속에서도 누군가 운 좋게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우주의 절대자들은 그것을 굳이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의 관점을 '과학적 무관심주의'라고 일컫는다(V.343). "태양계는 정체불명의 목적 없는 우주 속 무의미한 물방울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만약 유기적 생명이 거대한 섭리 안에서 '하찮은' 존재이고 우주가 그저 '무관심하고 무의식적인' 곳이라 해도, "그것이 인간이 슬퍼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V.69).
사람이 삶을 즐겁게 보내느냐 비참하게 보내느냐는, 우연히 내던져진 환경에 자신을 얼마나 지혜롭게 적응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별다른 불운이 닥치지 않는 한,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비존재보다는 삶이 낫다고 느낄 만큼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예술적 표현이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데서 오는 기쁨, 그리고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경험 속에 깃든 막연한 기대감은 언제나 우리 삶에 활력이 된다.
"비통함을 느끼는 것은 형체도 없고 무한하며 불변하는 허공에 의도와 인격을 부여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방향도 닻도 없는 바다 위를 표류할 뿐이다. 그저 노래할 수 있을 때 노래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리자"(I.335).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연히 의식을 갖게 된 존재일 뿐이다. 그저 찰나에 불과한 불운한 삶을 사는 동안, 스스로의 고통을 덜어내며 할 수 있는 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도리다"(I.260). 아, '우주의 찰나를 살다 가는 하루살이'여(I.284). 부디 스스로의 방식대로 행복을 찾아 나서길(III.20).
지적 생명체에게 감정적 충족만큼 궁극적인 목표가 또 있을까? 인간이라 불리는 하찮은 원자들에게 우주 안에서 '우아하게 즐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타인의 인정으로 '성취'를 가늠하려는 태도는 그저 정신적 나태함과 인위적인 관습이 낳은 결과일 뿐이다. […] 결국 우리가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결실은 스스로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청년기의 이상주의에서 중년기의 현실주의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 러브크래프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I.111)
사색하는 사람이 이상적인 행복이나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텅 빈 환상을 좇기를 멈출 때가 바로 그때다. 광적인 쾌락은 너무나 희귀하고 잡히지 않으며 덧없기에 추구할 가치가 없다는 확신을 품고, 견고한 중산층적 만족감에 안주하는 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마음가짐이다.
삶은 헛된 욕망이 빚어내는 희극에 불과함을 깨달아야 한다. 발버둥 치는 이들은 그 무대 위의 어릿광대일 뿐이고, 차분하고 냉철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이야말로 광대들의 익살극을 보며 웃을 수 있는 행운아들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목표가 얼마나 공허한지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객에게는 더없이 명확하게 보인다. 무덤은 입을 벌리고 비웃음을 흘릴 뿐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은 그 희극을 관조하는 데 있다. 기대치를 낮추어 삶의 다툼에서 스스로 물러나고, 오직 상상력이 창조한 비현실적인 세계를 만끽하며 즐거움을 찾는 것, 그것이 전부다.
평온을 누리고 타인의 평온을 북돋우는 것, 이것이 가장 지속적인 기쁨이다. 이는 세계 최고의 윤리 철학자로 꼽히는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만약 삶에 흥미를 잃었다면,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돕는 데 눈을 돌려 보라. 그러면 삶을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게 될 것이다.
'유나이티드(United)'에 합류할 무렵, 나는 삶에 그다지 애착이 없었다. 스물세 살의 나는 내 나약함 때문에 세상에서 성공하기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며, 차라리 지워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나중에 깨달았다. 성공조차도 결국 텅 빈 것임을. 실패자로 남는다 해도, 나는 결국 위대한 자들과 가장 보잘것없는 자들과 나란히 축축한 흙 속이나 혹은 저 너머의 무(無)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그 사이에 겪는 하찮은 일들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성공이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주라는 무한한 저울로 재어 보면, 소년이 구슬치기에서 거둔 승리나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거둔 승리나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주변의 평범하고 소외된 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격려나 작은 도움으로 그들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찾았다. 노인이나 병약한 노부인, 무딘 청년, 혹은 기회를 얻지 못해 배움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며, 나는 내가 완전히 무용하지는 않다는 감각을 얻었다. 그것은 내가 결코 맛보지 못할 '진정한 성공'을 대신해 주기에 충분했다. 내 노력을 알아주는 이가 없거나, 고작 평범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만 닿는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불운한 이들의 행복을 최대한 북돋워 주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고통받는 이들을 다정하게 돕고 인내심을 발휘하는 사람은, 뛰어난 재능으로 제국을 건설하거나 인류의 지식과 문명을 진보시키는 이들만큼이나 세상의 평온을 실질적으로 넓히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가난에 얽매이고 병마에 시달릴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다독일 힘을 간직한 철학적 소양의 인간이라면 누구도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라 여길 필요가 없다.
염세주의라니, 농담하자는 것인가! "극단적인 형태의 반(反)인본주의는 실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것은 인본주의만큼이나 순수하게 자의적이고 비현실적인 가치들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II.165). 결국 러브크래프에게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어리석고 비과학적'일 뿐이다. "개인의 취향을 떠나, 대체 왜 인간이 나무보다 본질적으로 더 불쾌한 존재라는 건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가끔 인류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일까? 그는 솔직히 "인간이라는 짐승을 더 많이 볼수록, 그리고 그들의 악의적이고 비열하며 사디즘적인 심리 작용을 지켜볼수록 그들에 대한 증오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고 쓴 적이 있다(I.211). 하지만 그 글을 쓸 당시 그는 지독한 편두통(당신은 이를 겪어본 적 있는가?)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해명한다. "사실 나는 무서울 정도로 인간적이며, 인류와 그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저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 누구나 냉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일 뿐이다.
그런 순간들에는 군중이 다소 혐오스럽게 느껴진다. 그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해치려 하거나, 남의 고통을 보며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고통을 가하는 것은 평범한 사건이나 삶의 직접적인 즐거움과 보상에만 몰두하는 이들, 즉 우리네 우스꽝스러운 문명 속에서 '동물적이거나(설교조의 냄새가 짙은 단어이긴 하지만) 세속적'인 사람들의 주된 유흥인 듯하다. (…) 나 역시 인간일지는 모르나, 타인의 불행을 보며 기뻐할 만큼 완전히 '인간적'이지는 못하다.
러브크래프트가 주창한 낙관적인 태도와 그의 소설에서 다루는 기괴한 공포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이 지점은 1926년 작 『크툴루의 부름』 도입부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일은 인간의 마음이 가진 모든 파편을 하나로 연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무한한 어둠의 바다 한가운데에 놓인 무지의 섬 위에서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 너머로 멀리 나아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저마다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학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흩어진 지식의 파편들이 하나로 모이는 순간, 우리는 현실의 끔찍한 풍경과 그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가련한 위치에 처해 있는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 적나라한 진실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거나, 치명적인 빛을 피해 다시금 평화로운 암흑의 시대로 도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에게 있어 알려진 세계 너머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아찔한 희열을 동반하며, 기이하고 끔찍한 생각은 뇌리에 깊은 전율을 남긴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신비로운 심연에 어떻게 상상력이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지, 틈새로 기묘하고 초자연적인 소리가 흘러나오고 상상조차 못 할 광경이 얼핏 보이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어찌 아이와 같은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지 말이다.
러브크래프트에게는 늘 "알려진 세계 너머의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데서 오는 아찔한 희열과, 기묘하고 끔찍한 것을 떠올릴 때 느끼는 뇌리를 떠나지 않는 전율"(I.116)이 존재한다. 그는 "어떻게 이런 신비로운 심연에 상상력이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기이하고 초현실적인 소리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의 파편을 보고도 아이처럼 타오르는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코스믹 호러가 주는 소박한 기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무신론적 전통주의
러브크래프트가 "철저한 회의론자이자 유물론자"라는 사실은 분명하다(II.41). 하지만 한편으로 "진정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논리적으로 "인간은 그저 주변의 인위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취해 그것이 마치 실제인 양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인류사에 동기와 흥미를 부여하는 삶의 의미라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절대적 상대주의자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II.356).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우리는 일상의 안락함, 쾌락, 정서적 만족에 영향을 미치는 상대적 가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고통이 적고 만족스러운 상태를 임의로 '선'이라 부르고, 그 반대를 '악'이라 부르는 식이다. 이러한 국지적인 명명법은 우리에게 안도감과 삶의 방향, 그리고 안정적인 배경이라는 유익한 환상을 제공하는 데 필수적이다. 더욱 중요한 환상인 '삶의 가치', 사건 속의 '극적인 의미', 그리고 '삶에 대한 흥미' 역시 바로 이 배경 위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 인종, 시대에게 고통 없는 안락함을 주는 요소가 다른 이들에게는 심리적으로 전혀 다르게 작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선'이란 가변적인 상대적 속성이며, 이는 혈통, 시대, 지리, 민족, 그리고 개인적 기질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가변성 속에서 우리가 안정을 느끼기 위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의 닻은 바로 '전통'이다. 전통은 조상의 경험이 집약되어 우리에게 물려준 강력한 정서적 유산이다. 우주적 관점에서 전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나,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파괴적인 상실감으로부터 보호해 줄 유일한 방패이기에, 국지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통이 자의적이거나 인위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본질을 완전히 잘못 짚는 일이다(I.262).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삶은 결국 스스로 만들어낸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환상의 그물망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우연과 관점의 산물임을 알지만, 그것을 허물어뜨린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재하지도 않는 신기루를 녹슨 쇠스랑으로 걷어내려 하는 것처럼 무의미한 짓은 없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자신을 가장 즐겁게 해줄 기분 좋은 상상을 선택해 그 속에서 순수하게 탐닉하는 편이 낫다. 그것이 실재하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어차피 절대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기에 그런 환상을 걷어냄으로써 얻는 것은 없고 잃을 것만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현명한 태도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러브크래프트의 전통주의는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II.125).
우주의 궁극적인 구조 안에서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같은 속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회의주의자이자 냉소주의자이기에, 나는 각 문화권이 지닌 인위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한다. 이는 해당 인종의 본능, 유대, 환경, 경험에서 비롯된 근접 가치이며, 그 범위를 벗어나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지라도 해당 문화권 구성원들에게는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된다. 경험하는 대상과 사건을 가늠할 척도가 되어주는 이러한 전통적 배경만이,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목적도 없는 우주에서 그것들이 의미와 가치, 혹은 극적인 흥미를 지닌 듯한 환상을 부여한다. 그렇기에 나는 예술 형식과 사회, 정치 영역에서 극단적인 보수주의를 주장하고 실천한다. 그것만이 기준도 방향도 없는 혼돈 속에서 벌어지는 무의미한 투쟁에서 오는 권태와 절망, 혼란을 피할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의 코스미시즘(cosmicism, 우주적 공포)에는 "윤리나 사회를 부정하는 요소가 전혀 없다"(V.241).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인류에게는 스스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인류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연히 타고난 각자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관습을 통해 스스로를 규율해야 한다.
이것이 곧 러브크래프트가 정의하는 문명의 개념이다. 문명이란 우리의 "복합적인 지적·정서적·심미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발전과 조직의 상태"(II.290)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철학적, 심미적 확장이 커질수록 삶 속에서 더 많은 만족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IV.417)이다.
러브크래프트에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목표는 만족, 곧 평온한 즐거움"임을 기억하라(I.215). 그는 이것이 "오직 아름다움을 숭배하고 창조하며, 세상을 아름다운 대상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하는 상상력 넘치고 초연한 삶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반추하며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통을 너무 예리하게 느끼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러브크래프트는 다음과 같이 글을 적어 내려간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이 자라나기에 유리한 환경을 보존할 것을 주장한다. 웅장한 궁전과 아름다운 도시, 우아한 문학, 평온한 예술과 음악, 그리고 신체적으로 우월한 인간 유형을 가꾸는 것 말이다(I.207).
러브크래프트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보수주의를 넘어선 극단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다. "우리는 스스로를 명백한 반동주의자로 자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유주의'라는 가식과 '진보'라는 환상을 과감히 부정해야만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들을 생산할 권위 있는 사회·정치적 통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거짓 우상"과 같은 "공허한 이상(理想)을 숭배하는 현대의 태도"를 거부한다. 러브크래프트는 이를 두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라 평한다.
더 중요한 것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아름다운 것들을 영속시키는 일이다. "평등"은 농담에 불과하지만, 이끼 낀 거대한 수도원이나 성당은 가슴을 울리는 실재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수도원과 궁전, 그림 같은 성곽 도시, 첨탑과 돔이 이루는 강렬한 스카이라인, 호화로운 태피스트리, 매혹적인 책과 그림, 조각상, 거대한 오르간과 고귀한 음악, 그리고 전장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행위들을 만들어내는 토양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삶이란 결국 이것이 전부다. 이것들을 빼앗아 간다면, 취향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을 거둬간다면 우리의 시인들에게는 노래할 것이 없고, 몽상가들에게는 꿈꿀 거리가 사라지고 만다. [...]
이제 러브크래프트가 철저한 무신론적 전통주의자임은 분명하다(I.17).
나는 종교의 정통 신자는 아니지만, 도덕에 명백히 유익한 체계를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본다. 교회가 어떤 결점을 지녔든 간에, 미덕을 함양하는 수단으로서 교회만큼 뛰어나거나 그에 필적할 만한 기관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속한 사회 체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체계에도 결함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자연스러운 성장의 산물이다. 하룻밤 사이에 급진주의자들이 인위적으로 꾸며낸 유토피아적 구상보다는 지금의 체계가 근사치에 가까운 문명을 보존하는 데 훨씬 적합하다.
그렇기에 "현대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젊은 세대가 낡은 유신론적 가르침을 완전히 신화 그 이상으로 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러브크래프트는 "반기독교를 선동하고 '허상을 폭로'하려는 과격한 이들에게 공감할 수 없다." 종교는 그 "탁월한 사회학적 가치"는 차치하더라도, "어떤 냉철한 미학자도 부정할 수 없는 회고적 아름다움을 언제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II.227).
"개신교 집안 출신의 무신론자"임을 자처하는 러브크래프트는 특히 가톨릭교회를 예술가들에게 "참으로 감탄할 만한 신앙"이라며 각별히 치켜세운다(II.104).
그것은 수천 년에 걸친 인간의 감정이 필멸자의 삶에서 겪는 여러 중요한 순간들 주위에 상징적이고도 표현적으로 엮어낸, 고대부터 내려온 아름다운 사고와 운율, 몸짓의 계승자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심오하고도 진정한 예술적 중요성과 충족감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서유럽 인종이 소유한 가장 오래되고 중단 없이 이어져 온 삶의 시(詩)이며, 그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상징적 표현 체계도 주장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
내게 보기엔, 어떤 종류든 종교와 같이 초이성적인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가톨릭과 성공회 체계야말로 예술가가 소속될 만한 가치를 지닌, 과거에 충분한 뿌리와 닻을 내린 유일한 두 분파이다. 그들이 표현하는 삶은 산업주의와 과학적 발견이 확산되어 현대 사회를 변모시키고 파괴하기 이전의, 옛 시절의 자연스럽고 단순한 삶이다. 어떤 종교도 그 이상을 표현할 수는 없는데, 모든 종교는 단순하고 지속적인 유산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예술 형식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기계적 발명, 도시 집중, 그리고 삶과 사고의 과학적 표준화로 점철된 미래의 문명은 예술이나 종교 그 어디에서도 구현될 수 없는 괴물 같고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 전통은 쇠퇴하고 있다.(II.228)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가 옳다는 확신이 든다. 그는 현재 서구 문명의 단계를 '퇴폐기'로 분류했는데, 이는 매우 정확하다. 인종적·문화적 활력은 표준화와 기계적 발명의 시대를 지배하는 메마른 지성주의,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상업주의, 그리고 무의미한 물질적 사치 속에서보다는, 예술과 전쟁, 그리고 자랑스러운 웅장함 속에서 훨씬 더 찬란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대는 이미 그 퇴폐의 길을 한참 달리고 있다.
우리가 여전히 순진무구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무지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시계 바늘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멤피스와 니네베, 바빌론과 페르세폴리스, 카르타고와 크테시폰, 아테네와 라케다이몬,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와 티레 등의 이 모든 도시가 저마다의 전성기와 황혼을 맞이했고, 그 위대한 번영과 몰락을 겪었다. 역사의 이러한 장대한 흐름을 마주하고서 현존하는 문명이 이와 다른 운명을 맞이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미국의 지금 이 시대는 로마 제국 안토니누스 가문의 호화롭고 환멸에 찬 시대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당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아테네, 그리고 신 카르타고가 고대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석양 속에서 마지막으로 불타올랐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것은 수 세기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는 죽음이었다.
내가 만약 조금이라도 세속적인 사람이었다면 — 다른 어느 시대보다 현시대에 나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성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 아마도 유럽 문화의 현 단계에 큰 우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난, 전통에 뿌리를 둔 단순한 세상을 대체하고 있는 이 정신없고 기계적인 세계에 대해 나는 조금의 존중심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외부의 현실에 크게 몰두하지 않는 편이라, 내 상상력은 이 시대만큼이나 다른 시대 속에서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내 흥미를 끄는 것은 오직 이러한 거대하고 역사적인 삶의 흐름 뿐이다.
현실 점검
러브크래프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그를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 요소, 즉 우주적 관점과 무신론적 전통주의를 살펴보았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더할 것은 '순수한 지성에 대한 깊은 존경'(II.124), 다시 말해 이성(理性)에 대한 신뢰다.
나의 본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서로 분리된 채 평행을 이루는 나의 관심사는 다음 세 가지다. (a) 기이하고 환상적인 것에 대한 애정, (b) 추상적 진리와 과학적 논리에 대한 탐구, (c) 고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에 대한 동경. 이 세 요소가 다채롭게 결합하며 내 기묘한 취향과 괴짜 같은 면모를 만들어낸다.[I.110]
앞서 언급한 (b) 요소에 해당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모든 논쟁에서 나의 목표는 미리 정해둔 내 의견을 옳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무엇이든 그것을 발견하고 확립하는 것뿐이다."(V.13) "항상 뚜렷했던 나의 객관성은 이제 최고조에 달해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다. 덕분에 나는 무엇이든 기꺼이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I.302) "과학이나 철학, 혹은 역사의 영역에서 나를 진정으로 골치 아프게 하는 문제를 지성을 다해 탐구할 때 깊은 희열을 느낀다."(IV.77) "실체 없는 공허한 신비주의적 언어의 인위적인 안개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개념을 지닌 명료한 지성의 빛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성에 활력을 불어넣는다.“(I.134)
물론 전통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고(思考)를 대신할 수는 없다.(III.267)
감정과 행동, 예술의 영역에서 전통은 사실상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준이자 가치이며, 방향과 목적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 척도다. 그곳에서 전통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사고와 현실의 세계에서 전통은 무의미할 뿐이며, 오히려 진리 탐구를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우주와 그 속성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을 얻으려면, 어설픈 경험과 근거 없는 관습이 우리 머릿속에 무비판적으로 심어놓은 온갖 낡은 관념들을 당장 걷어내야 한다.
'선', '악', '의무', '방향', '목적', '존엄' 같은 개념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독교적이거나 도덕적, 인도주의적인 편견 등 그 어떤 고정관념의 체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각자 홀로 두려움 없이, 객관적이고 자유롭게 탐구하는 주체가 되어 외부 세계의 다양한 현상을 마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데이터와 검증된 인지 방식을 도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전통 중 일부가 진실로 밝혀진다면 다행이겠지만, 현대 과학이 입증한 명확한 증거 외에 그 어떤 권위도 맹목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전통주의에 도달했기에, 이성적 근거가 제시된다면 기꺼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나의 사회 구조에 대한 견해는 매년 새로운 증거와 최신 흐름이 나타날 때마다 끊임없이 변한다. 단 하나 변치 않는 확신이 있다면, 가장 훌륭한 문명이란 인류가 지닌 고차원적, 즉 가장 진화한 속성을 자유롭게 발휘하도록 돕고 최대한 북돋아 주는 문명이라는 사실이다. [IV.223]
그렇다면 우리 종의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알고자 하는 날카롭고 집요하며 꺼지지 않는 갈망'이다. 이는 역사 속에서 소수의 사람에게만 국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허기나 갈증, 탐욕만큼이나 실재하며 생명력을 지닌 본능임이 증명되었다 [I.61]. 지구상 유기적 진화의 정점인 고도로 진화한 인간에게, 오직 인간만의 고등한 능력을 사용하는 성찰보다 더 적합한 분야가 무엇이겠는가 [I.106]?
기억하라. 러브크래프트에게 때때로 "대중은 다소 혐오스럽게 보인다" [I.211].
삶의 평범한 일상과 즉각적인 쾌락, 그리고 보상에만 관심을 두는 이들에게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일은 주된 유희인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에 기대어 "인간이라는 짐승이 가진 본연의 가증스럽고 역겨운 면모"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관심사를 추상적인 영역으로 옮기는 것"을 통해서다. 이성은 보편적이기에 여기서 흥미로운 결론이 도출된다. 러브크래프트는 인간성을 별에서 온 식물형 괴물들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광기의 산맥』(1931)에서처럼 말이다.
이제 댄포스와 내가 그 머리 없는 시체들에 두껍게 달라붙어 번들거리는, 기묘한 무지갯빛을 띠며 악취를 풍기던 검은 점액을 보았을 때, 그리고 병든 상상력으로나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한 낯설고 새로운 악취를 맡았을 때, 우리는 우주적 공포의 본질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 그것은 사라진 네 동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들이 다시는 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쌍한 사람들! 어쨌든 그들은 그들 종족 안에서는 악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시대,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었다. 자연은 그들에게 지옥 같은 장난을 쳤고, 인간의 광기나 무관심, 잔혹함으로 인해 끔찍하게 죽었거나 잠들어 있는 저 극지의 황무지에서 앞으로도 누군가를 억지로 끌어올린다면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비극적인 귀환이었다.
그들은 야만인조차 아니었다. 대체 그들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시대의 추위 속에서 맞이한 끔찍한 눈뜸, 아마도 털북숭이 사족보행 짐승들이 미친 듯이 짖어대며 덤벼들었을 테고, 기묘한 옷을 입고 도구를 든 흰 원숭이들까지 난동을 부리니 당황한 나머지 방어에 나섰을 뿐이리라. 가여운 레이크, 가여운 게드니, 그리고 가여운 '옛것들'이여! 마지막 순간까지 과학자였던 그들이 우리가 그들의 처지였다면 하지 않았을 일을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신이여, 그 얼마나 대단한 지성과 끈기인가! 저 조각상에 새겨진 그들의 동족과 조상들이 그랬듯, 이들 역시 믿기 힘든 상황을 마주했구나! 방사형 생물이든, 식물이든, 괴물이든, 별에서 온 존재들이든, 그들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들은 인간이었다!
어쨌든 이토록 숭고한 속성을 고려할 때, "성숙하고 진정한 문명이 갖추어야 할 최우선 조건은 완전한 지적, 예술적 자유이다. 즉, 개인의 어떠한 사상이나 취향에도 그 어떤 제약도 가해져서는 안 된다" [V.12].
강압에 의해 바뀐 의견은 진정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문명이라면 그 누구의 의견도 오직 합리적인 논증을 통해서만 바꾸려 할 뿐, 다른 방식으로는 강요하지 않는다.
러브크래프트는 문명사회에 꽤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V.117].
어린아이의 지적 신념을 어떤 식으로든 조종하려 드는 것은 실로 아동에 대한 범죄나 다름없다. 편견이나 세뇌와 같은 행위는 정직, 질서, 불침해 등 인류의 경험을 통해 보편적으로 유용하고 조화롭다고 입증된 실천적 행동 지침에 국한되어야 한다. 이론이나 신념의 문제에 있어서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정당한 태도는, 아이가 엄격한 개방성과 지적 정직함을 갖추도록 가르치는 것뿐이다. 그저 풍문이나 맹목적인 전통에 의존해 무언가를 받아들이지 말고, 현존하는 증거를 바탕으로 스스로 정직하게 판단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신념을 형성하려는 모든 시도는, 인간처럼 고도로 진화한 생물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위로서 예외 없이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이는 종교적 선전뿐만 아니라 비종교적이거나 반종교적인 선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러시아 소비에트 역시 종교에 맞서기 위해 대중의 감정을 왜곡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비난받아 마땅하다.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가르쳐야 할 것은 '생각하는 방법'이다. 세상 사람들의 90%는 거시적인 주제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의견'을 가졌다고 착각하지만, 그러한 '의견'은 비이성적인 감정, 맹목적인 유산, 그리고 순전한 정신적 나태함의 산물일 뿐이기에 '의견'이라 부를 가치조차 없다. 이는 대부분의 종교인뿐만 아니라 대다수 무신론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를 가르치는 이들이 특정 태도를 주입하려 드는 것을 멈추고, 올바른 사고와 엄격한 지적 정직함을 가르치는 필수적인 과업에 매진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나은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그의 기준은 충족되지 않고 있다. 다음 중 익숙하게 들리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라.[V.283]
소위 교양 있다는 대다수 사람들—스스로와 자신의 위치를 높게 평가하며, 그중에는 대학 졸업자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의 그 심연과도 같고 짙게 드리워진 무지를 관찰하면 할수록, 나는 기존의 교육과 전통에 근본적으로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든다. 자신의 맹점, 망상, 편견, 그리고 냉담함에 사로잡힌 채 거들먹거리는 이 자만심 강한 '상류층'들은—인류 역사와 우주 속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전혀 개념조차 없는 불쌍한 인간들—지적 에너지의 발달과 방향성에 관한 뿌리 깊은 오류의 희생양들이다. [V.283]
그들은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을 온전히 활용하는 방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은 브리지 휘스트(bridge whist) 게임의 덧없고 무의미한 복잡함에는 에너지를 낭비하면서도, 정작 주변에서 일어나는 역사적·사회적 변화 앞에서는 얼빠진 촌놈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다. 십자말풀이나 퍼즐 조각을 맞추며 빈둥거리면서도, 과거의 흔적을 대할 때는 화려한 가이드북이나 피상적이고 편향된 역사 수업에서 얻은 지식 이상의 이해를 보여주지 못한다. 축구의 세부 규칙은 따지면서도, 과시용으로 구독하는 『하퍼스(Harper’s)』지는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덮어두기 일쑤다. 자신들만큼이나 평범한 사람들과 가문에 대한 쓸데없는 가십은 줄줄 외우면서도, 원자나 성운, 유전자에 대해서는 부두 노동자보다 아는 게 없으며, 광물에 관해서는 나보다도 무지하다!
그들은 세상의 이정표가 가려진 세계를 눈먼 채 더듬거리고 있다. 사방과 뒤, 그리고 앞을 비추어 지형을 살피는 대신, 그저 주머니에서 꺼낸 사소한 물건 몇 가지에만 등불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경멸하는 농부나 석탄 나르는 인부들보다 그들이 더 우스꽝스러운 이유는, 단순히 순수한 무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무지에 근거 없는 자만심과 자기만족이라는 위선적인 조합까지 덧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를 짜증나게 하는 건 그들이 러브크래프트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바로 무지와 안일함이다. "물론 나는 같은 현실적 데이터를 가지고도 다른 결론을 도출해내는 이들의 의견을 똑같이 존중한다"(III.54). "논쟁에 관해서라면, 나는 그것들을 혐오할 여유가 없다. 어떤 사안의 진실을 밝혀내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논쟁이기 때문이다"(IV.57). 러브크래프트는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IV.102).
나는 외부 세계의 혼란스러운 현상들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거나 합리적인 가치 체계를 도출하려는 어떠한 진지한 노력에도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진리를 향한 유구한 투쟁 속에서 개인적인 요소를 찾는 일은 내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모든 이들이 사실상 같은 목표, 즉 견고한 사실을 발견하고 오류를 배격하려는 동일한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각기 다른 탐구자들이 때때로 서로 다른 관점을 보인다는 사실은 지엽적인 문제일 뿐이다. 진실과 오류의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 아닌, 단순한 취향의 문제에 있어서는 적대감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호불호나 관심사, 무관심 등을 결정짓는 생물학적·심리학적 요인의 변덕스러움과 복잡성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취향이 비슷하기만 해도 오히려 놀라울 따름이다. 타인의 다름을 비난하는 것은 비논리적이고 부조리함의 극치다.
진실과 취향에 관한 진지하고 객관적인 의견 차이는, 타인을 깎아내리려는 적의에서 비롯된 자의적이고 악의적이며 비이성적인 폄하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나는 그런 식의 모욕적인 태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와 같이 진실하고 악의 없는 사람들과 진리나 가치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이러한 토론은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다. 자신의 의견을 검증하고, 혹시라도 잘못되었거나 타당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스스로 바로잡을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토론을 피하는 사람은 진리를 찾는 항해에서 소중한 지도나 나침반을 잃은 것과 같다. 의견을 가능한 모든 각도에서 검토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올바른 생각과 잘못된 생각을 구분하지 못한 채 많은 오류를 품고 살아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토론을 거치며 스스로 많은 의견을 수정해왔으며, 그때마다 그렇게 할 기회를 얻었음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새로운 정보나 데이터가 주어졌을 때, 기존의 믿음이나 사전 지식을 업데이트하여 사건의 확률을 추론하는 베이지안들(Bayesians)이여, 주목하라. 러브크래프트는 이토록 합리주의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III.267).
우주와 그 안의 생명체 간의 관계에 관한 진정한 개연성은, 우주 자체와 이를 해석하는 인간의 정신적 도구를 유능하게 탐구해 온 모든 전문가들—천문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인류학자 등—의 연구 성과를 상호 검토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1931년 당시의 모든 객관적인 과학 데이터를 수집하여, 이전의 부족한 데이터에서 파생된 관념을 철저히 배제한 채 오직 현재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새로운 추론의 연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데이터를 수용하고 연결하며 추론하는 우리 정신의 작용과 경향성을 1931년의 심리학적 지식으로 검증해야 한다. 특히 이미 거짓임이 판명된 과거의 가변적이고 즉흥적인 우주관을 품지 않았더라면 결코 떠올리지 않았을 관념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을 제거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관념론자들이 우주에 대한 그들의 다양한 독단적 추측을 근거로 삼는 그 우스꽝스러운 비합리적 감정과 소망들조차, 이 현실주의적 원칙 안에서 충분히 검토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분뇨 포크"를 기억해야 하며, 과연 그 진실이 "아름다운 환상을 깨뜨릴 만큼 충분히 중요한 것인지"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한다(II.226).
나는 우리 세대가 무언가를 덜 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랬다면 아마도 과거의 평온하고 복잡할 것 없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국왕과 교회에 대한 순박한 충성심이 지배하던 그 평온함 속에서, 시골 지주나 본당 신부 같은 목가적인 인물들도 그들의 옛 위상을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단순했던 시대의 순응적이고 독단적이며 질서 정연한 삶에도 분명 눈에 띄는 결점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절에는 복잡한 기계의 발명과 민주주의라는 오류의 확산이 낳은 이른바 '재즈 시대'의 과잉 속에서는 도무지 찾을 길 없는 근본적인 조화와 품격이 깃들어 있었다.
따라서 나는 과학과 철학처럼 순수한 지성의 영역에서는 지극히 급진적이지만, 사회와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철저히 냉소적이고 보수적이다.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토리당원이자 차르주의자이며, 융커이자 귀족주의자, 파시스트, 과두제 옹호자, 민족주의자, 군국주의자, 그 외 웹스터 사전이나 로제 유의어 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온갖 부류의 사람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이 사람 인종차별주의자 아니었는가?
[...]
- 원문 링크: https://radishmag.wordpress.com/2014/04/21/cosmic-horror/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