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中 유교적 전체주의와 숨 막히는 신분장벽의 사회

 이성계의 군사 쿠데타는 정권교체에 그쳤을 뿐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개혁에는 다가갈 수 없었다. 나라의 지도원리를 유교에 고정시킨 이성계는 유교 진흥을 정책의 슬로건으로 내세워 국민교육에 활용했고 관직에 나가기 위한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그렇게 조선의 관직은 유교 지식인 출신이 차지했고, 이들은 지배층을 이루면서 실제 땅을 경작하는 농민을 착취하며 자신은 놀고먹는 지주가 되었다. 양반이라는 사회적 신분은 대대로 물려주고 또 물려받는 특권이었다. 이처럼 유교사상은 신분의 차별을 당연시하고 임금과 신하, 윗사람과 아랫사람,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를 합리화시켜 주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사회에 투영되었다.




이러한 유교적인 윤리를 밑받침하고 있는 사회적인 기둥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가족이나 종가(宗家)를 포함하는 혈연(血緣)이다. 둘은 지리적인 인연으로 맺어진 모임, 즉 지연(地緣)이다. 마지막이 군주나 농장을 소유하는 관인(官人)들의 모임이다. 이 세 파벌이 농촌사회의 지도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 세력들은 왕을 섬기고 그 왕의 지배를 당연시하며 봉건적인 가족제도를 지원하는 밑받침이 되었다. 그러니까 조선왕조는 유교라는 가족적이고도 윤리적인 성격을 띤 사상을 지배원리로 하는, 그 본질상 전체주의라 하겠다.




조선의 사회계급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맨 위에 임금이 있고, 그리고 왕의 가족, 그다음에 양반계급이 있었다. 그 밑으로 이들의 지배를 받는 평민과 노비가 있었으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 관청의 일을 맡아 보는 기술적인 사무원이 있었다. 이렇게 조선 사회의 계층은 양반, 관청의 사무원, 평민, 그리고 종의 네 계급으로 구분되었다.




이 네 계급은 저마다 신분에 따라 일거리가 달랐다. 중앙관서의 기술직 종사자들은 양반 이하의 사무원 취급밖에 받지 못했다. 기술직을 업신여기는 사조가 팽배해서 수공업에 종사하는 기술사무원이나 종들은 ‘~쟁이’라는 천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상공업이나 과학기술을 업신여기는 생각들은 후일 근대화를 가로막는 암(癌)과 같은 역할을 했다. 지방의 벼슬아치인 아전은 양반의 앞잡이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쥐꼬리만 한 권력을 사유화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기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 벼슬아치를 높이 여기고 백성은 업신여기는 소위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사상이 굳어진다. 벼슬이면 다라는 생각에 감투 쓰는 일에만 모두가 집중하는 어두운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근대민주주의의 바탕이 되는 지방자치의 성장을 방해하고 ‘나으리’에게 아부하는 근성을 길러 냈다. 나랏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던 백성은 나랏일을 자기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겼고, 그러다 보니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날 토양은 전혀 만들어지지못했다. 이렇게 무기력하고 새롭게 무엇을 해 보겠다는 의지도 없었던 조선시대 백성들의 모습과 생각은 우리 문학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있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왜라


이후론 배도 말도 말고 밭갈이나 하리라.




조선 중기의 문신인 장만(張晩)이 지은 시조다.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겪어 보니 자연에 순응해 농사나 지으며 사는 게 제일이라 노래하고 있다. 이 시조는 본래 벼슬살이의 어려움을 뜻하지만 장만이 은유로든 고기잡이나 소금장사를 직유법으로 읽어도 큰 무리는 없다. 그렇게 읽으면 어떤 뱃사공이 말 끌고 다니는 소금장사 등으로 직업을 바꾸려던 결심을 꺾고 ‘에라 내 주제에 무슨, 농사나 짓자’ 하는, 체념과 슬픔이 섞인 노래가 된다. 조선시대의 백성들이 얼마나 소극적이고 삶에 대한 의욕과 개척의 의지가 없었는지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대표작인 『춘향전』을 보자. 기생의 딸이라는 천한 신분에서 오는 슬픔을 줄거리로 해서 정조와 절개라는 봉건 사회의 도덕을 끝까지 지켜 나가는 열녀의 모습을 보여 준다. 물론 천한 기생의 딸인 춘향이가 수청을 들라는 변학도의 요구에 “예절은 양반의 가문에만 있고 기녀(妓女)의 천가(賤家)에는 안 되나이까?”라고 되묻는 것을 볼 때 그녀에게서 정조나 절개보다 인격이나 인간적인 평등을 요구하는 개성의 단초가 엿보이지 않는 바는 아니다. 반면 청년 이도령은 양반의 자식으로 그 신분과 관직을 위해 사랑도 버리는 비겁한 일면을 보여 주고 있으며, 암행어사라는 관권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아직 평민의 저항의식이 싹트지 못한 조선 사회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신분적인 장벽과 양반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사회체제는 백성들 사이에 허무주의를 조장하고 그때그때만 즐기면 그만이라는 쾌락주의와 방탕한 생활을 정당화시켰다. 향락주의는 손 하얀 양반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의 향락주의는 조선 사회가 무너질 때까지 곪아 갔다.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기파랑(2017),p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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