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NRx: 신반동주의적 무정부-군주제를 옹호하는 논증

무정부-NRx: 신반동주의적 무정부-군주제를 옹호하는 논증


2021년 1월 31일, 국가없는 주권(Stateless Sovereign) 작성




대의민주주의


· 선거 결과를 강제로 받아들여야 함. 이기든 지든.

· 투표를 둘러싼 끝없는 말다툼. 구역질 남.

· 잔혹한 부족주의, 분열, 무력화.

· 인구 3억 2,500만 명.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거대함. 숨 막힘.

· 수십만 명에게 나뉘어 분산된 부패.

· 50명만이라도 떠나려고 하면 1993년 미국 텍사스주 웨이코 사건(Waco siege)처럼 국가가 무력으로 진압해버림.

· 모두에게 적용되는 하나의 평범하고 영감 없는 체제.

· 영혼 없는 기업적 ‘글로벌리스트 씹게이’ 미학.

· 살인적인 세금이 노괴들과 전쟁 범죄자들에게로 감.

· 우울한 교외 주택 단지에서 삶을 보냄.

----

무정부-군주주의


· 왕을 직접 선택하면, 그 왕을 갖게 됨.

· 선거 없음. 투표에 낭비되는 에너지 없음.

· 하나로 통합된, 권한을 부여받은 왕국.

· 어떤 인구 규모든 가능.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

· 부패는 한 사람에게 집중됨.

· 언제든지 떠날 수 있음. 친구 10명과 함께 직접 시작하라.

· 수천 개의 기괴하고 독특한 법체계.

· 사이키델릭한 테크노-봉건주의 미학.

· 낮은 세금은 거대한 미친 파티들로 흘러감.

· 존나 큰 성에서 산다.




내가 직접 만든 최초의 신반동주의적 무정부-군주주의 깃발이다. 다소 투박한 부분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다. 사람들이 이후에 나온 최신 버전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이 이미지는 계속 남겨두겠다. 이 블로그 글과 같은 날에 제작되었다.




신반동주의적 무정부-군주주의 깃발의 개선판이다. 원본보다 훨씬 더 낫다. 2021년 3월 15일에 제작되었다.


---
나의 정치적 여정은 상당히 기이한 편이다. 만약 2014년의 사회자유주의자였던 나에게, 훗날 내가 극우 성향의 신반동주의 재산권주의(Propertarian) 무정부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나는 웃어넘기며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은 이념적으로 변화하고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일부는 내가 어떻게 중도좌파 사회자유주의자에서 극우 무정부주의자로 이동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전체 정치적 여정은 언젠가 따로 이야기할 주제다. 지금은, 내가 한동안 숙고해 온 하나의 이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최근까지 스스로를 호페식 무정부-자본주의자(Hoppean Anarcho-Capitalist)로 인식해 왔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호페의 사상에 가까운 사람”이라 생각한다(즉, 그 이념에 공감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암흑계몽주의(Dark Enlightenment)와 무정부-군주주의(Anarcho-Monarchism)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나의 정치적 신념은 아주 미묘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자유시장 자본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절대군주제(Absolutist Monarchy)에 대해 훨씬 더 우호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다.

나는 위헌적 군주제를 보다 자발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형태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무정부-자본주의는 무정부 사회에서도 자발적 위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내가 해석하는 무정부-군주주의의 목표는, 이러한 논리를 전제군주제 사회 구조에 적용하는 데 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철학적 전환을 하게 된 계기였다. 무정부-자본주의가 자유지상주의 운동에 제시한 많은 통찰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나는 동시에 자비로운 통치자를 중심으로 한 사회를 선호했고, ‘계몽절대주의(Enlightenment Absolutism)’라는 개념이 보다 자유지상적 범국가주의(Panarchism) 사회에 적용된, 다른 형태의 무정부 사회 구조를 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모든 것이 터무니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철학을 세부적으로 설명해 나가다 보면, 점차 더 분명해질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자 오베론 허버트(Auberon Herbert)는 국가(State)가 아닌, 자발적으로 재원 조달되는 정부적 실체를 옹호했다. 이 이념은 ‘자발적 봉사주의(Voluntaryism)’로 알려져 있다. 허버트는 ‘아나키(Anarchy)’라는 용어를 거부했고 군주주의자도 아니었지만, 그의 사상은 내 철학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만약 그가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어떤 국가주의자보다도 무정부-자본주의자나 무정부-군주주의자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자발적 봉사주의를 무정부주의와 양립 가능한 철학으로 간주한다.

폭력의 독점을 수반하지 않는 모든 위계는 무정부적이며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순수하게 자발적인 위계가, 내가 곧 설명하겠지만, 무정부적 사회 질서들 간의 경쟁적 공존을 존중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Government) 대 국가(State)

자발적 봉사주의(Voluntaryism)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는 정부와 국가를 구분하는 것이다. 국가주의(Statism)란, 단일한 위계적 제도가 특정 영토나 국가 내에서 폭력 서비스(경찰과 군대)에 대한 독점은 물론, 입법(법의 지배)과 중재(법원과 분쟁 해결)에 대한 독점까지 행사하는 상태를 말한다. 국가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은 재원 조달 방식이다. 국가는 언제나 강제적 갈취, 즉 비자발적 과세를 통해 재정을 마련한다.

이론적으로는 통치 기구가 ‘자발적 세금’(비영리적 기부)이나 다른 방식들을 통해 자발적으로 재원을 조달할 수도 있다. 예컨대 하나의 통치 위계가 사유지를 매입하거나 개간(homesteading)한 뒤, 그 사유지에서 자신들이 정한 규칙을 준수하는 조건으로 세입자들에게 토지를 임대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는 통치 기구가 갈취가 아니라 자발적 거래를 통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아마도 “세금은 약탈이다”라는 표현에 익숙할 것이다. 이 문구는 자유지상주의자들과 자발적 봉사주의자들에 의해 대중화되었는데, 이들은 정부가 개인의 의사에 반해 소득의 일부를 빼앗는 행위가 개인이 자신의 소득을 소유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를 침해하는 갈취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깊이 다루지 않겠다. 본론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세금은 약탈이다”라는 표현은 이미 과도하게 사용되어 왔으며, 앞서 언급한 설명 이상의 추가적인 해설이 크게 필요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원한다면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될 것이다.

자발적 봉사주의의 목표는 자발적 계약 관계에 기반하고, 자발적으로 재원이 조달되는 통치 위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따라서 어떤 자발주의적 ‘정부’도 전통적인 의미의 국가는 아니다. 자발적 봉사주의자들은 국가주의와 통치(governance)를 서로 다른 실체이자 개념으로 구분한다.

왜 군주제인가?

군주주의는 시간 선호(time preference)를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시간 선호는 인간 삶에서 중요한 요소인데, 정치의 맥락에서는 정치인이 현재에만 집중하기보다 미래를 얼마나 고려하며 계획하는가를 의미한다. 시간 선호가 높을수록 정책은 장기적으로 준비가 부족하고 성급하게 마련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높은 시간 선호는 특히 민주적 대의제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의원내각제든 대통령제든, 대의민주주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임기 제한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대표자가 공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된다(국가에 따라 보통 4~6년). 이는 그들에게 장기적 계획보다는, 과거에 정치적 경쟁자들이 이뤄 놓은 성과를 되돌리는 데 집중하거나, 선거 공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덜 신경 쓰도록 만드는 유인을 제공한다.

또한 민주정 정치인은 자신이 소유하지도 않은 자산을 일시적으로 관리하는 관리자에 불과하다. 이는 일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데, 자산을 소유하지 않으면 그 자산이 훼손되거나 가치가 떨어지거나 오용되더라도 이를 진지하게 걱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군주제나 귀족제에서는 자산이 단일한 사적 소유자(귀족제의 경우에는 여러 명의 사적 소유자)에게 귀속된다. 이는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경제와 국가 자산의 운용에 관심을 가질 유인을 부여한다.

경제가 성장하면 자산의 가치 역시 상승하고, 그 결과로 통치자 자신도 더 부유해진다. 연방 자산이 낭비되지 않고 최상의 상태로 유지되면, 군사 장비나 국경 장벽과 같은 핵심 인프라를 수리하거나 교체하는 데 들어갔을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을 더 알고 싶다면, 한스 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의 해당 강연을 시청하거나 관련 자료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형식주의(Formalism, 사적 통치)

신반동주의 블로거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본명 커티스 야빈 (Curtis Yarvin))가 정의한 형식주의는 다음과 같다.

“요컨대 인류사에서의 핵심 문제는 폭력이다. 목표는 놀라울 만큼 제한된 크기의 이 행성에서, 인간들이 폭력 없이—특히 조직된 폭력 없이—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식을 설계하는 데 있다. 조직화된 인간 상호 간 폭력에 비하면, 훌륭한 형식주의자가 보기에 다른 모든 문제들—빈곤, 지구온난화, 도덕적 타락 등등—은 기본적으로 사소하다. 어쩌면 폭력을 제거한 뒤에야 도덕적 타락을 조금쯤 걱정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 조직된 폭력이 수억 명을 죽인 반면, 도덕적 타락이 우리에게 준 것은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이었을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분명하다고 본다.”

「형식주의자 선언문(A Formalist Manifesto)」,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a.k.a. Mencius Moldbug)

몰드버그는 이어서 미국을 하나의 기업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바로 형식주의자 선언문이다. 즉, 미국은 그저 하나의 기업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대들로부터 우리에게 위탁된 신비로운 신탁도 아니고, 우리의 희망과 공포를 담는 그릇도 아니며, 양심의 목소리나 정의의 복수의 검도 아니다. 그저 막대한 자산 더미를 보유한 오래된 거대 기업일 뿐이다. 무엇을 하려는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도 없고, 다섯 갤런짜리 양동이에 갇힌 열 갤런짜리 상어처럼 난폭하게 몸부림치며, 수십억 개의 아가미마다에서 적자가 분출되고 있다.

형식주의자의 관점에서 미국을 고치는 방법은, 오래된 신비주의적 헛소리들, 기업식 기도전쟁 구호들을 치워버리고, 이 괴물을 실제로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를 규명한 뒤, 그들이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구조조정이나 청산을 포함해, 모든 선택지가 논의 테이블 위에 올라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터무니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이든, 볼티모어든, 혹은 당신의 지갑이든 간에, 형식주의자는 소유와 통제가 일치할 때에만 만족한다. 따라서 재(再)형식화(reformalize)를 위해서는, 미국에서 실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내고, 그 분포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재현하도록 주식을 배분해야 한다.”

— 「형식주의자 선언문」, 커티스 야빈

형식주의와 관련해 내가 동의하는 점은, 폭력을 줄이고 재산의 소유와 통제가 완전히 일치하는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자산의 사적 소유가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모든 공적 재산에 사실상의 소유자가 부여되면, 누가 해당 재산을 소유하고 관리할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무정부-군주주의자의 입장에서 나는 이것이 문명화된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본다. 국가가 사유화된 형태라면, 개인들은 자신의 사유지에 누가 들어올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지를 보다 쉽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동의하지 않는 점은, 어떤 실체가 “그 영토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갈취(과세)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논리의 문제는 국가에는 소유권을 주장할 정당한 권리가 없다는 점에 있다. 국가는 종종 소송이나 수용권(Eminent Domain)을 통해 무고한 토지 소유자들로부터 사유지를 강제로 빼앗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형식주의 철학의 내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폭력을 줄이기 위해 사적 소유를 중심으로 한 사회를 원하고, 재산의 소유와 통제를 일치시키고자 한다면서도, 동시에 국가가 언제든지 원하는 사유지를 국유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상태를 용인할 수는 없다. 이러한 모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포스트-형식주의(Post-Formalism)’라 부르는 나만의 변형된 형식주의를 제시하는 것이다.

포스트-형식주의와 포스트-자유지상주의(Post-Libertarianism)

포스트-포멀리즘(Post-Formalism)이라는 명칭은, 신반동주의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상인 포스트-자유지상주의(Post-Libertarianism)를 참조한 것이다. 포스트-자유지상주의자들은 법과 질서를 구현하는 가운데 개인의 자유를 보존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선이라고 믿는다. 이는 곧 포스트-자유지상주의자가 국가를 하나의 사회 제도로 전면 수용하며, 그 결과 더 이상 자유지상주의와는 동일한 입장에 서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비록 자유지상주의은 아니지만, 포스트-자유지상주의는 자유시장에 대한 지지, 국가의 정보 감시에 대한 회의, 비개입주의 등 다수의 자유지상주의적 요소를 여전히 채택한다. 포스트-자유지상주의자의 한 예로는 블로거 닉 랜드(Nick Land)를 들 수 있다. 나는 철학적으로는 포스트-자유지상주의자들과 의견을 달리하지만, 이들이 자유지상주의를 하나의 이념으로서는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자유지상주의적 이상을 상당 부분 수용한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나는 포스트-형식주의에서도 이와 유사한 시도를 하고자 한다. 포스트-형식주의자들은 사유화된 소유 구조를 기반으로 한 사회를 구축함으로써 사적 재산권과 개인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목적은 조직화된 폭력을 폐지하고, 개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혼란과 법적 분쟁의 수를 줄이는 데 있다. 재산의 사적 소유와 그에 대한 통제가 점점 더 밀접하게 일치할수록, 지역 공동체가 보유하는 개인적 주권은 더욱 강화되며, 이는 곧 공동체가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권한으로 이어진다.

포스트-형식주의자들은 국가 권위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혹은 폭력의 독점을 통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본질적 강제성 때문에 국가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이러한 점에서 포스트-형식주의는 사적 재산권을 중심에 둔 무정부주의 철학이며, 전통적인 형식주의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포스트-형식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권리 집행 기관이나 제3자 중재 사설 기업과 같은 사적 통치 제도들이 재산권을 보호하고, 법적 분쟁을 처리하며, 계약을 집행하는 지역주의적 재산권주의(Propertarian) 사회 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다.

이 모든 설명은 무정부-자본주의와 매우 유사하게 들릴 수 있다. 그렇게 느낀다면, 그것은 절반만 맞는 인식이다. 신반동주의적 무정부-군주주의(Neo-Reactionary Anarcho-Monarchism, Anarcho-NRx)는 호페식 무정부-자본주의와 전제군주주의의 장점들을 취하되, 최종적으로는 그 어느 쪽과도 동일하지 않은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상이다.

무정부-NRx 대 무정부-자본주의

이제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 운동이 나의 현재 이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설명했으니, 이제 내 새로운 철학이 무정부-자본주의(Anarcho-Capitalism)와 무엇이 다른지를 설명할 차례다. 우선 무정부-군주주의(Anarcho-Monarchism)가 무엇인지 정의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를 “자유지상주의적 반동주의자(Libertarian Reactionary)”라고 규정하는 인술라 퀴(Insula Qui)는 자신의 저서 『무정부-군주주의(Anarcho Monarchism)』에서 이를 매우 잘 설명한다. 그녀는 책의 초반부에서, 자신이 이해하는 무정부-군주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아나키즘은 사회적 위계를 폐지하고, 국가와 그 밖의 모든 계급 구분을 제거하는 평등주의적 사회 질서를 지향한다. 그러나 명칭부터 부정확한 무정부-자본주의는 영어권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한 분파에서 등장했다. 무정부-자본주의는 단지, 국가가 없는 상태로서의 아나키즘이 위계를 유지한 채로도 완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아나키즘 개념의 재정의는 부정확하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무정부-자본주의의 대중성 때문에 다시 재정의되지 않은 채 굳어졌다.

아나키즘을 국가가 없는 사회로 해석할 수 있다면, 아나키즘은 또한 자발적으로 따르기만 한다면 어떤 사회 체제와도 병존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어떤 사회 체제든 아나키즘적일 수 있다. 사회 질서가 상당한 정도의 위계를 유지하더라도, 아나키즘은 여전히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나키즘을 규정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역사적으로도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무정부-자본주의의 성공으로 인해, 여러 사상적 운동의 가장자리를 떠돌아다니던 급진적 주변부가 등장했다. 이들은 아무런 내적 모순 없이 스스로를 무정부-군주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무정부적 군주제라는 질서를 지지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나 역시 아나키즘과 군주제를 동시에 지지하는 급진적 주변부의 일원이다.

서구 사상사에서 이러한 이상은 언제나 어렴풋이 추구되어 왔지만, 거의 온전히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가 하나의 운동으로 성장하면서, 자유지상주의의 합리적 논증을 받아들일 성향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군주제의 사회적 논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군주가—그가 자비로운 통치자라면—사회 내의 덕성을 증진시키고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국가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파괴적이며, 국가를 고치거나 덜 파괴적으로 만드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겉보기에는 자본주의적 공산주의나 세계주의적 민족주의보다도 더 터무니없어 보이는 무정부-군주주의 교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무정부-군주주의의 결론은, 순전히 원칙적이고 질서정연한 접근을 통해 충분히 도출될 수 있다.

1. 예방적 성격이 아닌 한, 타인에 대한 모든 폭력은 파괴적이다. 정당방위가 요구되지 않는 상황에서 폭력은 본질적으로 도덕적·경제적·사회적 악이며, 회피되어야 한다.

2. 사회에서 폭력과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재산권을 수용하고, 그 재산권을 보편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폭력은 단지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재산을 둘러싼 사람들 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재산에 대한 폭력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며, 우리는 절도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그리고 재산이 어떻게 정당하게 소유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3. 재산을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그 재산이 폭력에 의해 취득되지 않았을 때뿐이다. 이는 재산의 소유가 자연으로부터의 점유(개간)나 평화로운 교환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자발적 교환과 자연자원만이 자원을 정당하게 획득하는 방식이다.

4. 국가는 폐지되어야 한다. 국가는 오직 부당한 취득을 통해서만 재산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소유한 재산은 비자발적 금전 이전, 즉 강제 과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람들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할 의무를 지며, 그 동의를 합리적으로 철회할 수도 없다. 따라서 국가는 어떤 재산도 정당하게 소유하지 못하며, 전적으로 부정적인 제도다.”

— 인술라 퀴, 『무정부-군주주의: 에세이 선집』, 12–13쪽

위 인용문에서 언급했듯이, 자발적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국가가 소유한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강제를 통해 획득된 것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이제 무정부-군주주의의 기본을 이해했으니, 그것이 무정부-자본주의의 원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인술라 퀴가 보여주었듯이, 무정부-자본주의자들은 불필요한 아나키즘 정의를 채택하고 있다. 불필요한 공격이 없고, 자발적 거래에 기반하며, 국가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는 그 자체로 아나키즘적이다. 자신의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나키즘을 재정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두 철학의 차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두 이념 모두 오베론 허버트의 자발적 봉사주의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음에도, 구현 방식과 개념 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다수의 무정부-자본주의자들은 인술라 퀴가 제시한 4단계 접근에 동의한다. 반면 무정부-군주주의자들은 여기에 몇 단계를 더해, 왜 자신들의 이념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정당화한다. 인술라 퀴는 이후 무정부-군주주의에 특유한 추가 단계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5. 국가의 폐지만으로는 사람들이 삶에서 겪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강제가 없는 사회는, 강제에 기반하지 않은 갈등이나 개인적 도덕성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대응 수단이 없다. 따라서 효과적인 무정부적·비폭력적 사회를 위해서는 통치(governance)를 도입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

6. 군주는 이러한 무정부 질서의 자연스러운 수장이다. 인간은 본래 군주제에 대한 자연스러운 성향을 지니며, 역사적으로 전제정치는 효과적인 통치 원리였다. 또한 민주주의나 중앙집권적 귀족정은 단일한 지도자보다 더 많은 사회적 갈등을 초래한다.

7. 앞선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전제적 통치와 자발주의를 결합한 이상적인 정치 철학에 도달하게 된다. 이때 왕은 통치할 ‘권리’를 갖지 않지만, 사회 전체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왕의 통치에 대한 유일한 근거는 자발성이며, 그가 통치하는 이유는 오직 공로뿐이다.

이러한 가정들로부터 추상적으로 볼 때, 로스바드(Murray Rothbard)가 정의한 무정부주의와 군주제를 결합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구성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공허한 이상처럼 보일 수도 있다. 군주를 단순한 하나의 기업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환원하거나, 국가가 폐지된 상황에서 정부를 만든다는 발상은 모두 비이성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무정부-군주주의 사회는 국가나 기업과는 전혀 다르다.

군주는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군주를 따르기를 선택할 것이다. 이는 군주들이 비폭력적 갈등을 해결하고 도덕성을 장려하는 서비스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공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계는 수천 개의 왕국으로 나뉘게 될 것이며, 각 왕국은 의무나 통치 없이 완전한 자유를 선호하는 급진적 개인들에게조차 맞춤형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군주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덕성을 스스로 증진시킬 책임을 전적으로 떠안아야 하며, 강제가 수반되지 않는 갈등이 발생할 경우 언제나 스스로 협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가능하긴 하지만 매우 불편한 방식이다.

국가 없는 상태에서 가능한 통치는 오직 순수하게 자비로운 통치뿐이며, 개인적으로 기여할 가치가 없는 어떤 형태의 통치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는 폭정, 과두정, 군중 지배가 성립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치 공동체의 규모는 극히 작을 가능성이 크며, 대개 수천 명을 넘지 않거나, 각 반자율 지역이 결코 거대해지지 않는 연합 구조를 이룰 것이다. 이러한 소규모 정부들은 강제나 파괴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거대 정부들이 수행하는 생산적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군주는 국민의 재산이나 영토에 대해 본질적인 권리를 갖지 않는다. 대신 그의 통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에 따라 지배권과 부가 부여된다. 이로써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분권적 군주제를 갖게 되지만, 그 경쟁은 고전적 군주제에서처럼 전쟁을 통한 경쟁이 아니다. 경쟁은 설득을 통해 이루어지며, 군주는 자신의 백성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만 더 큰 왕국을 얻을 수 있다. 군주는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면서 팽창을 추구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역량을 초과해 확장하려 할 경우, 그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각 군주가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만큼의 신민만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사람들이 순수한 군주제보다는 귀족적 혹은 민주적 결사를 형성하는 경향이 더 강할 가능성이 크다.”

— 인술라 퀴, 『무정부-군주주의: 에세이 선집』, 15–17쪽

나와 같은 무정부-군주주의자들은 도덕 규범의 문제에서도 무정부-자본주의자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무정부-자본주의자들과 달리, 나는 비침해성의 공리(Non-Aggression Principle, NAP)를 믿지 않는다.

비침해성의 공리(NAP)의 문제점들

비침해성의 공리를 비판하기에 앞서, 먼저 비침해성의 공리가 무엇인지 정의할 필요가 있다. 비침해성의 공리는 모든 선제적 폭력의 행사는 본질적으로 악이며, 개인이나 개인의 재산을 침해하는 공격자로부터 이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형태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 도덕 철학으로 가장 잘 정의된다. 정당방위에서 어느 정도의 폭력이 허용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비침해성의 공리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나는 일부 자유지상주의자들이 태아는 생명체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들어 낙태를 옹호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반대로, 나처럼 보다 ‘생명 존중(Pro-Life)’ 입장을 취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낙태를 태아가 삶을 살고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할 기회조차 갖기 전에 저지르는 무고한 생명에 대한 살인으로 본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폭력이 정당화되는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더 나아가, 서로 경쟁하는 두 개의 사설 법원이 비침해성의 공리 자체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비침해성의 공리는 한계를 드러낸다. 비침해성의 공리는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이상적이며, 해석의 여지가 너무 커서, 고도로 발전하고 문명화된 사회의 실질적인 도덕 규범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비침해성의 공리에는 이 밖에도 다른 문제들이 존재한다. 비침해성의 공리는 앞서 언급된 이유들 때문에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이는 곧 야생동물 학대나 수간과 같은 혐오스럽고 비도덕적인 행위들조차, 비침해성의 공리 위반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허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다행히도 자유지상주의자들 가운데 비침해성의 공리 하나만을 유일한 도덕 기준으로 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자유지상주의자들은 법적 분쟁을 처리하기 위해 공적 법원을 지지하거나(이른바 최소국가주의(Minarchism)), 혹은 지역 공동체의 범위 내에서 어떤 행위가 정당한지 부당한지를 판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간 중재 제도를 지지한다.

분쟁 해결과 사법의 사유화

이제 무정부 사회에서 민간 중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사설 법원의 기본 구조는 상당히 단순하며,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게리 바움가드너(Gary Baumgardner)가 무정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설 법원이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 기본적인 해설은, 이 인터뷰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클립은 무정부-자본주의와 동의 연령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두 이념 모두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과 자발적 봉사주의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그 논의는 무정부-군주주의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사적 법(private law)에 관해서는, 미제스 연구소(Mises Institute)에 이 주제를 다룬 비교적 충실한 글 두 편이 있다.


또한 기업 독점에 관한 반론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이 주제를 다룬 다음 영상을 시청하는 것을 권한다.

또한 기업들이 통제를 벗어나 폭주할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은, 여기에서 언급된 이유들 때문에 매우 낮다. 비트버터(Bitbutter)의 「DRO가 ‘폭주’하지 않도록 하는 유인들」라는 영상은, 자발적 봉사주의 사회에서 민간 보안 기업들이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왜 낮은지를 설명한다. 이 영상에서 사용되는 DRO라는 용어는 분쟁 해결 기구(Dispute Resolution Organization)를 뜻하며, 이는 기본적으로 사설 보안 회사와 보험 회사를 결합한 개념이다. 중재 기관(Arbitration organization)은 본질적으로 사설 법원에 해당한다. 원본 유튜브 영상의 링크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능하다면 비트버터를 후원하는 것도 권하고 싶다.

무정부 자본주의 사회(Ancapistan)에서 『사이버펑크 2077』식의 기업 전쟁이 곧 벌어질 것이라 기대하지는 말라. 이것이 사적 기업들이 폭력을 전혀 행사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예컨대 과거의 철도 전쟁(Railroad Wars) 같은 사례가 있다). 다만 나의 주장은, 그러한 전쟁이 극히 드물 것이며, 발생하더라도 결국에는 당사자들 간의 타협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사적 기업은 전통적인 국가가 아니며, 비자발적 과세를 통해 수익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전투를 장기간 감당할 여력이 없다.

기업 간 무력 충돌은 소비자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이는 지속적인 이윤 창출을 어렵게 만든다. 특히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질 경우 그 부담은 더욱 커진다. 사람들은 종종 사적 기업의 권력을 과도하게 부풀려 평가한다. 기업이 완벽하지도 않고,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국가 사회에서 기업이 즉각적으로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구조와 위계

무정부-군주주의 사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다. 군주의 역할은 자발적인 사적 방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주택 소유자 협회(Homeowners Association, HOA)의 회장과 매우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무정부-군주주의는 주로 계약에 따른 월 회비기타 서비스 제공을 통해 재원을 마련한다. 무정부-군주주의가 전통적인 국가주의적 군주제와 구별되는 핵심은, 불필요한 폭력이나 갈취가 아니라 자발적 결사와 사적 계약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원한다면 정실(crony) 군주를 다른 사적 기업과 마찬가지로 보이콧할 수도 있다. 이러한 수준의 개인적 자유는, 실질적인 정치 권력이 언제나 개인 사적 소유자들의 손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무정부 사회에서 형성될 수 있는 잠재적 사적 통치 산업에 진입하려는 어떤 개인이라도, 자신의 신민(고객·세입자)의 이해관계를 존중하지 않으면 파산하거나, 소비자 기반을 공격할 경우 폭력적으로 축출될 위험을 감수해야 함을 뜻한다.

당신은 왕을 선택할 수도 있고,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 수도 있으며, 혹은 무정부-군주주의 공동체를 떠나 자신의 선호에 맞는 다른 비군주적 사회 질서를 선택하거나 새로 창출할 수도 있다. 단, 그 모든 것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이는 무정부-군주주의가, 자발성만 유지된다면 다른 아나키즘 철학들의 존재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군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는, 군주가 선을 넘을 경우 이를 파괴하기가 매우 쉽다는 점이다. 민주 사회에서는 선출직 공직자가 다수 존재하고, 이들을 지지하며 선출한 다수의 유권자가 함께 얽혀 있다. 그 결과 민주 사회는 다수의 의지가 폭주하여 소수의 자유를 박탈하는 정책을 옹호할 때, 그 체제를 해체하기가 훨씬 어렵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는 민주주의를 그 순수한 형태에서는 다름 아닌 군중에 의한 지배로 본다.



민주주의


“민주주의란, 51%의 사람들이 나머지 49%의 권리를 박탈할 수 있는 군중에 의한 지배에 지나지 않는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

3계층(The Three Estates)

3계층은 신반동주의 운동을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인구 집단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 주요 집단은 전통주의자들(성직자 계급(Clergy)), 기술 자본가들(귀족 계급 또는 기술-상업주의자, (Nobles/Techno-Commercialists)), 그리고 민족국가주의자들(평민 계급(Commoners))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본가 계층과 가장 강하게 동일시하며, 동시에 전통주의 계층과 국가적 정체성에 대해서도 일정한 공감을 가지고 있다. 이 세 계층은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서구 문명에 균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상호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추가적인 맥락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반동주의의 삼분할 구조(Trichotomy). 이는 세 가지 계층을 시각적으로 나타내고, 신반동주의 운동이 이들 사이의 타협으로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도식이다. 서로 급진적으로 다른 이 세 집단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같은 진보주의 엘리트 집단으로부터 공격받고 있다는 인식에 있다.

----

다음은 무정부-군주주의 사회에서 이 세 가지 계층이 어떻게 함께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상이다.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s)의 역할은, 공동체 내의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돌봄으로써 전통을 보존하고 그 실천을 장려하는 것이다. 그 목표는 공동체 내부에 일관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다. 지나치게 포괄적인 공동체는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며, 결국 붕괴로 이어진다.


자본가(Capitalists)의 역할은 재화를 생산하고, 해당 지역 전반에 존재하는 모든 사적 사업을 관리하는 것이다. 이들은 CEO들이며, 심지어 무정부-군주 자신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은 공동체 내의 사적 서비스와 기업 활동이 체계적이고 생산적으로 유지되도록 관리한다.


민족주의자(Nationalists)의 역할은 방위를 담당하는 것이다. 무정부 사회에서는 개인 방위가 기본적으로 각 사적 재산 소유자의 책임이 된다. 자본가 계층은 사설 보안 서비스를 통해 이 부분을 보조할 수 있지만, 무정부-군주주의 사회에서의 주된 방위 수단은 공동체 구성원들(평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크라우드펀딩 방식의 민병대가 될 것이다(추가 설명은 여기 참조).


평민 계층은 또한 사회적 배제와 사적 경계 설정을 통해 공동체의 경계를 형성한다. 공동체가 얼마나 민족 중심적인지, 혹은 얼마나 포괄적인지는 각 공동체의 선택에 달려 있으며, 이는 머레이 로스바드(Murray Rothbard)가 그의 글 「합의에 의한 민족들(Nations by Consent)」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개방 국경, 혹은 자유 이민의 문제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에게 점점 더 심각한 문제가 되어 왔다. 첫째 이유는 복지국가가 이민자들의 유입과 지속적인 지원을 점점 더 보조하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문화적 경계가 점점 더 잠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소련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슬라브 러시아인들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로 대거 이주하도록 장려되어 이들 민족의 문화와 언어를 파괴하려 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때, 이민에 대한 나의 견해를 재고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장 라스파유(Jean Raspail)의 반이민 소설 『성자들의 진영(The Camp of the Saints)』을 비현실적인 허구로 쉽게 치부할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는 인도 인구 전체가 소형 보트를 타고 프랑스로 이동하려 하고, 자유주의 이념에 감염된 프랑스인들이 경제적·문화적 민족 파괴를 막아낼 의지를 상실한 채 이를 방관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문화적 문제와 복지국가의 부담이 심화되면서, 라스파유의 우려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무정부-자본주의 모델을 바탕으로 이민 문제를 다시 검토해 보니, 완전히 사유화된 국가는 결코 ‘개방 국경’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만약 한 국가의 모든 토지가 개인, 집단, 혹은 기업의 소유라면, 어떠한 이민자도 초대를 받지 않거나 토지를 임대·구매할 허가를 받지 않는 한 그곳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완전히 사유화된 국가는 그곳의 주민들과 재산 소유자들이 원하는 만큼만 ‘닫힌’ 사회가 된다. 따라서 오늘날 미국에서 사실상 존재하는 개방 국경 체제는, 모든 거리와 공공 토지를 관리하는 중앙국가에 의해 강제로 개방된 결과일 뿐이며, 실제 소유자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 아니다.


전면적인 사유화가 이루어진다면, 이민 문제뿐 아니라 수많은 지역적 갈등과 외부효과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각 지역과 이웃이 사적 기업, 법인, 혹은 계약 공동체의 소유가 된다면, 각 공동체의 선호에 따라 진정한 다양성이 구현될 것이다. 어떤 지역은 민족적·경제적으로 다양할 것이고, 다른 지역은 동질적일 것이다. 어떤 공동체는 포르노, 매춘, 마약, 낙태를 허용할 것이며, 다른 공동체는 이들 전부 혹은 일부를 금지할 것이다. 이러한 금지는 국가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이나 공동체의 토지에 거주하거나 이용하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고 싶어 하는 국가주의자들은 실망하겠지만, 각 집단은 최소한 자신과 가치와 선호를 공유하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지역 소유 체계가 유토피아나 모든 갈등의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차선의 해법’은 될 수 있다.”


— 머레이 로스바드, 「합의에 의한 민족들(Nations by Consent)」


머레이 로스바드는 무정부-자본주의를 염두에 두고 이를 논의했지만, 그 논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정부-군주주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무정부-군주주의는 무정부-자본주의와 동일하지 않으며, 두 사상은 서로 다른 구조와 위계를 지닌 별개의 자발적 봉사주의 철학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이념 사이에 겹치는 지점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이 블로그 전반에서 보았듯이, 양자는 여러 측면에서 공통된 요소를 공유한다.


궁극적으로 무정부-군주주의의 핵심 목표는, 전제적 통치(절대주의)와 개인주의(자유지상주의)를 종합하여, 자유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와 민족적 유산까지 함께 보존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정부-군주주의는, 가장 잘 표현하자면 군주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의 일종의 ‘동맹’으로 설명할 수 있다.


원문 링크: https://statelesssovereignty.com/2021/01/31/anarcho-nrx-a-case-for-neo-reactionary-anarcho-monarchis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주권(主權), 책임, 소유: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 일치의 방법론에 관하여

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의 버퍼(Buffer)

일본천황 황위 계승권 개정안 통과, 여성 천황 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