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티스 야빈의 암호화폐와 금본위제에 대한 생각
커티스 야빈의 암호화폐와 금본위제에 대한 생각
국가 통화에서 탈주하는 자본
화폐란 무엇일까? 경제학 교과서는 이를 교환수단, 가치척도, 저장수단의 세 가지로 정의함. 그러나 멘시우스라는 필명으로도 알려진 커티스 야빈은 이러한 전통적 정의를 정면으로 거부함. 야빈에게 화폐의 본질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탈주이며, 그 형태는 버블이고, 그 과정은 재표준화임.
야빈의 화폐 이론은 2011년부터 2025년까지 세 편의 핵심 텍스트를 통해 점진적으로 전개됨. 야빈의 사상은 추상적 이론에서 시작하여 비트코인이라는 구체적 실험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자신을 그 사상의 기원으로 자리매김하는 역사 서술로 완성됨. 이 과정에서 야빈은 암호화폐와 금본위제를 단순한 경제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 사이의 영원한 투쟁의 한 장면으로 재해석함.
이번 글은 야빈이 남긴 세 편의 글—2011년 〈On Monetary Restandardization〉, 2013년 〈Bitcoin is money, Bitcoin is a bubble〉, 그리고 2025년 〈US 60/735,250 and the roots of Bitcoin〉—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하면서, 야빈의 화폐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는지를 살펴보는 글임. 이를 통해 우리는 암호화폐와 금본위제에 대한 야빈의 독특한 입장이 단순한 지지나 반대가 아니라, 화폐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재사유임을 발견하게 될 것임.
2011년, 통화 재표준화 이론의 정립
야빈만의 화폐 사상의 출발점은 2011년에 작성된 〈On Monetary Restandardization〉임. 이 글에서 야빈은 현대 통화 위기의 근본 원인을 진단함. 금본위제가 붕괴한 이후, 통화는 더 이상 기술적·경제적 기준이 아니라 정치적 재량의 산물이 되었다는 것임. 이는 필연적으로 통화의 점진적 희석과 신뢰 상실로 이어짐.
그러나 야빈의 독창성은 이러한 진단에 있지 않음. 야빈의 핵심 질문은 "어떤 통화 기준이 옳은가?"가 아니라 "통화 기준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어떻게 교체되는가?"임. 그는 이 과정을 "재표준화(restandardization)"라 부르며, 이것이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탈주라고 주장함.
야빈에 따르면, 통화 재표준화는 정부가 설계하거나 선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 대신 시장은 항상 기존 통화보다 덜 나쁜 저장수단을 찾아 헤매고, 자본은 조용히 그러나 대규모로 기존 통화 체계에서 이탈함. 이것이 누적되면 어느 순간 사실상의 통화 교체가 발생함. 통화 질서는 혁명처럼 무너지지 않고, 서서히 무력화되다가 어느 순간 "이미 끝나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임.
이러한 관점의 핵심에는 화폐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놓여 있음. 야빈은 화폐의 본질이 교환수단이 아니라 저장수단이라고 주장함. 교환은 언제나 대체 가능하지만, 장기적인 저장에 실패하는 화폐는 반드시 뒤떨어지기 때문임. 따라서 통화 경쟁의 승패는 "누가 결제에 더 편한가"가 아니라 "누가 덜 썩는가"로 결정됨.
금본위제에 대한 야빈의 입장도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함. 야빈은 금본위제 복귀론자가 아님. 금은 단지 과거에 성공했던 통화 표준의 한 사례일 뿐임. 금이 선택된 이유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공급이 정치로부터 독립적이었기 때문임. 따라서 미래의 통화 기준은 반드시 금일 필요도 없고, 반드시 물리적일 필요도 없음. 오직 정치적 통제에서 벗어난 공급 구조만이 핵심임.
이 단계의 야빈은 아직 비트코인을 말하지 않음. 그러나 야빈은 "정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저장수단"이라는 이론적 빈자리를 정확히 만들어 둠. 이 빈자리가 2년 후 비트코인으로 채워지게 됨.
2013년, 비트코인이라는 실험의 해석
2013년, 야빈은 〈Bitcoin is money, Bitcoin is a bubble〉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작성함. 이 글에서 야빈은 2011년의 추상적 이론을 비트코인이라는 구체적 사례에 적용함. 그러나 야빈의 접근은 비트코인을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통화 이론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모습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것임.
야빈의 핵심 주장은 충격적임. 야빈은 화폐와 버블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함. 둘 다 내재적 효용은 약하거나 없으며, 저장수단으로 선택되고, 집단적 과대평가를 통해 유지된다는 것임. 이것이 바로 야빈이 제시하는 "화폐의 버블 이론(Bubble Theory of Money, BTM)"임.
그렇다면 화폐와 버블의 차이는 무엇일까? 야빈은 이 차이가 사후적으로만 판단 가능하다고 답함. 살아남으면 화폐이고, 붕괴하면 버블임. "만약 튀었다면 버블, 못 튀고 계속 쓰인다면 화폐"라는 구분은 단지 사후 판단일 뿐임.
비트코인은 이러한 이론의 순수한 실험 사례임. 비트코인은 거의 아무 효용도 없는 토큰이지만, 오직 희소성과 저장 기대만으로 가치를 형성함. 야빈에 따르면, 비트코인의 가치는 거래나 실제 사용과는 무관하게, 사람들이 저장수단으로 믿고 모으는 힘에 의해 생김.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남. 야빈은 더 이상 "화폐는 안정적이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음. 대신 야빈은 화폐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버블이며, 다만 어떤 버블은 오래 지속될 뿐이라고 주장함. 비트코인은 화폐이기도 하고 동시에 버블이기도 하며, 이것은 미래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 있음.
야빈은 비트코인만이 아니라 달러 같은 기존 통화도 본질적으로 버블적 속성을 갖는다고 생각함. 달러 역시 저장수단으로서의 수요 때문에 가치가 생긴 면이 있으며, 그 구조적 약점 때문에 경쟁 화폐에게 자리를 내줄 수 있음.
이 단계의 야빈은 비트코인을 지지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음. 야빈은 단지 자신의 이론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사례로 냉정하게 관찰할 뿐임. 비트코인은 전통적 의미의 안정적 화폐로 받아들여지면서도 동시에 투기적·거품적 성격을 강하게 띤 자산임. 그것이 독자적이며 완전한 대안 화폐로 자리 잡을지는 여전히 회의적임.
2025년, 사상의 기원으로서의 자기 정립
2025년, 야빈은 Gray Mirror에 〈US 60/735,250 and the roots of Bitcoin〉이라는 글을 작성함. 이 글에서 야빈의 초점은 다시 한번 이동함. 더 이상 "비트코인이 무엇인가?"가 중심이 아니라, "비트코인의 핵심 아이디어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서 왔는가?"가 핵심 질문이 됨.
야빈은 자신이 2005년에 출원한 임시 특허 문서 US 60/735,250을 복구했다고 밝힘. 이 문서는 블록체인 자체 특허가 아니라, 비트코인과 비슷한 '한정된 공급을 갖는 화폐 토큰' 개념의 초기 시도임. 야빈은 스스로가 사토시 나카모토가 아니라고 명확히 부인하면서도, 비트코인의 핵심 경제적 아이디어를 2005년에 이미 이해했었다고 주장함.
야빈은 비트코인을 두 개의 결합된 아이디어로 분해함. 첫째는 컴퓨터 과학적 아이디어로, 비잔티움 장애 허용(Byzantine Fault Tolerance) 문제 해결을 위한 작업증명(Proof-of-Work) 기반 블록체인 기술임. 그런데 여기서, 비잔티움 장애 허용 문제란 뭐고 작업증명은 또 뭘까? 비잔티움 장애 허용은 분산 시스템에서 일부 노드가 임의적으로 고장나거나 악의적으로 행동하는 상황에서도 전체 시스템이 올바른 합의에 도달해야 하는 문제임. 전통적 BFT 알고리즘(PBFT 등)은 3f+1개의 노드 중 최대 f개의 결함을 허용하며, 노드 간 동기화된 라운드 기반 투표를 통해 합의를 도출함. 비트코인은 이를 비동기 P2P 네트워크 환경으로 확장하여 해결함. 그리고 작업증명은 특정 계산 문제를 해결했음을 증명하여 블록 생성 권한을 획득하는 합의 메커니즘임. 비트코인에서는 블록 헤더의 SHA-256 해시값이 특정 난이도 이하가 되도록 하는 논스(nonce) 값을 찾는 문제임. (논스는 암호학 및 컴퓨터 보안에서 한 번만 사용되는 임의의 값 또는 숫자를 말함) 작업증명은 계산적으로 어렵지만 검증은 쉬우며, 특정 노드에게 합의 권한을 확률적으로 분배함. 가장 많은 누적 작업량을 가진 체인을 정규 상태로 인정하므로, 51% 공격을 위해서는 전체 네트워크 해시파워의 과반을 장기간 유지해야 하며 이는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임. 이를 통해 중앙 권한 없이도 분산 합의를 달성함. 다음으로 야빈이 제시한 비트코인에 대한 두 번째 아이디어는 경제적 아이디어로, 가치가 없는 토큰이 제한된 공급을 통해 시장에서 가격 상승을 일으키며 새로운 통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개념임.
야빈은 자신이 한정 공급 경제 이론까지는 이해했지만, 분산 합의 블록체인은 만들지 못했다고 고백했음. 그러나 야빈은 한정 공급 경제 이론이 사토시 나카모토의 천재적 발명의 산물이라면, 분산 합의 블록체인은 자신이 이미 2005~2011년에 이해한 아이디어라고 주장함.
이 글에서 야빈은 자신의 "신오스트리아학파(neo-Austrian)" 화폐 이론을 정교화함. 야빈은 기존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아, 현대 자본시장과 게임이론을 통해 화폐의 본질을 설명함. 돈의 가치는 저장수단으로서의 초과 가치이며, 이는 시장 참여자들이 그 화폐를 선택하는 자기강화적 순환 때문에 발생함. 비트코인과 같이 초기에는 가치가 없던 토큰이 시장 참여자들이 '미래의 통화'로 믿기 시작하면 급격히 가치가 상승할 수 있다는 점이 현대적 화폐 표준화의 핵심임.
야빈은 화폐 경쟁을 게임이론의 내쉬 균형으로 설명함. 여러 후보 통화가 있을 때, 시장 참여자들이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안정적인 균형이라는 것임. 한정된 공급이 가장 중요한 속성이며, 이는 금과 비교되는 핵심 속성임. 블록체인 기술은 중요하지만, 진짜 핵심은 제한된 공급이라는 경제적 원칙이라고 강조함.
야빈은 현재의 미국 달러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희석되고 있는 통화로 보고, 그로 인해 자본이 달러를 떠나 금·비트코인 등 경쟁 통화로 이동하는 현상을 설명함. 이는 단순한 인플레이션이라기보다 자본 비행이며, 비트코인의 성장 동력은 달러의 상대적 약점에 있음.
그러나 야빈은 비트코인의 미래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임. 야빈은 정부 규제로 제거될 가능성, 에너지 기반이 약화될 가능성, 다른 화폐가 경쟁에서 우위에 설 가능성이라는 세 가지 주요 위험을 언급함. 현재까지 비트코인은 생존해 왔으며, 그 이유는 시장 참여자들이 내쉬 균형처럼 서로를 신뢰하며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임. 그러나 이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음.
이 단계의 야빈은 관찰자에서 이론가로, 그리고 '사상적 선구자'로 자기 위치를 재정의함. 야빈은 "자신이 곧 사토시 나카모토는 아니지만, 아이디어의 절반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함. 이는 단순한 자기 과시가 아니라, 자신의 화폐 이론이 비트코인이라는 현실을 예견했음을 입증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겠음.
정치로부터 이탈하는 화폐의 철학
세 편의 글을 관통하는 야빈의 화폐 이론은 다음 하나의 명제로 압축할 수 있음. 화폐란 정치로부터 도망친 저장수단이며, 그것이 선택되는 과정은 항상 버블의 형태를 띰. 재표준화는 설계되지 않고, 탈주를 통해 발생함.
야빈의 암호화폐와 금본위제에 대한 입장은 단순한 지지나 반대가 아님. 야빈은 금본위제를 과거에 대한 향수나 절대적 교리로 보지 않음. 금은 단지 과거에 정치로부터 공급이 독립되었기 때문에 성공했던 사례일 뿐임. 마찬가지로 비트코인도 그것이 기술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제한된 공급이라는 경제적 원칙을 구현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음.
야빈의 관점에서 통화 안정은 도덕적인 문제도, 민주정에 관한 문제도 아님. 그것은 순수하게 권력 회피 문제임. 통화 기준은 항상 국가로부터 도망치는 자본의 발명품이며, 좋은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환상임.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정치가 손댈 수 없는 통화 대상을 시장이 선택하는 것뿐임.
이러한 관점은 중앙집권적 권위와 통화 운영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드러냄. 야빈은 중앙은행과 통화 권력이 국가의 권위를 강화하는 체계의 일부라고 보며, 이는 금본위제를 포함한 모든 중앙집권적 화폐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짐. 야빈의 입장은 시장 기반의 질서를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반드시 안정적이거나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음.
결국 야빈은 암호화폐를 비판적·기술적 시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것이 전통적 정부 통화보다 유의미한 분산적 시스템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함. 그러나 야빈은 비트코인의 가치나 확장성을 회의적으로 평가하며, 그것이 독자적이며 완전한 대안 화폐로 자리 잡을지는 불확실하다고 봄. 금본위제에 대해서는 체계적 경제 분석을 남기지 않았지만, 중앙집권적 통화 체계에 대한 회의적 태도는 일관됨.
야빈의 화폐 사상은 2011년에 이론을 만들고, 2013년에 현실에서 그 이론을 시험하며, 2025년에 그 이론의 역사적 기원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과정으로 전개됨. 이 세 글은 서로 다른 글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적 궤적을 시간차로 기록한 동일한 텍스트라고 볼 수 있음.
야빈의 사상이 제기하는 근본적 질문은 여전히 유효함. 화폐는 정말 정치로부터 독립될 수 있을까? 버블과 화폐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통화 재표준화는 혁명인가, 아니면 서서히 진행되는 탈주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며, 비트코인의 운명도 여전히 불확실함.
그러나 야빈이 분명히 보여준 것은, 화폐의 역사가 단순히 기술이나 정책의 진보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 사이의 끝없는 투쟁이라는 점임. 금본위제의 붕괴, 법정통화의 지배, 그리고 암호화폐의 등장은 모두 이 투쟁의 한 장면임. 그리고 이 투쟁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름. 야빈은 단지 우리에게 이 투쟁을 바라보는 하나의 프레임을 제공했을 뿐임. 나머지는 역사가 답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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