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설거지 결혼 체제에 대한 남성들의 반란:암흑계몽주의적 설거지론

현대 설거지 결혼 체제에 대한 남성들의 반란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Dark Enlightenment)적 설거지론



남성의 유전적 본능은 문란한 여성과의 노예 계약을 거부한다



서론: 사회적 금기의 용어, 설거지론



설거지론이란, 성적 자유를 누린 과거의 선택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정착’을 요구하는 여성들과, 그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감내하는 대가로 결혼을 제안받는 남성들 사이의 비대칭적 구조를 비판하는 담론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 담론은 사회적 금기다. 그것을 말하는 자는 ‘여혐’이라 불리고, 조롱당하고, 의심받는다. 그러나 금기란 언제나 가장 두려운 진실을 감추는 방식이다. 설거지론은 그런 금기의 언저리에서 출현한 하나의 언어다. 혐오의 언어가 아니라, 균형이 무너진 거래에서 탈출하려는 자의 인식어다. 문명이 붙잡으려 하지 않으니, 말은 떠돈다. 그것이 바로 이 담론이 익명성과 야유 속에서만 살아남는 이유다.



1. 퇴폐한 문명의 사기극

‘설거지론’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단지 저속한 인터넷 은어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은유는 기이하게도, 점점 더 많은 남성들의 심장을 찔렀다. 왜일까? 그것은 이 말이 단순한 성적 비하를 넘어, 현대 결혼 시장에서 남성이 경험하는 불가해한 감정을 정확히, 그리고 불쾌하게 짚어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문명 전체가 외면하고 싶은 한 가지 사실 — 남성의 욕망은 터부시되지만 여성의 성 선택은 합리화된다는 사실 — 을 상징적으로 폭로한다.

당신은 오랜 시간 혼자였다. 연애 경험이 거의 없었고, ‘진지한 관계’를 꿈꾸며 품위를 지켰다. 그러는 동안 어떤 여성들은 말 그대로 자유(아니 자유라기보다는 방종)를 만끽했다. 개방적인 연애, 반복되는 이별, 책임 없는 성적 소비.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되었고, 심지어 장려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당신 앞에 서 있다. 사랑스러운 척하고 반듯한 척하는 얼굴을 하고서, 과거에 대해 말하길 꺼리면서. 그녀는 이제 정착하고 싶다고 말한다. 당신이 바로 그 “좋은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과거를 묻지 말라고 한다. 당신은 과거를 따지는 남자가 ‘찐따’로 매도되는 문화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한다. 당신은 묻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결혼한다. 문명이 당신에게 시키는 대로.

이것은 사랑인가, 아니면 사회적 의무감의 잔여물인가? 당신은 문득 깨닫는다. 당신은 지금 설거지를 하고 있다. 단지 접시를 닦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다른 남자들의 더러운 손때가 남아 있는 여성의 몸뚱이를, 설명 없이 인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감정은 유년 시절부터 주입받은 책임감, 남자다움, 양보와 관용이라는 미덕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본질은 억압이고 자기기만이다. 그러니 이 은유는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퍼진다. 그리고 남성들은 느낀다. 이것은 혐오가 아니다. 이것은 인식이다. 그들은 말한다. 현대 문명에서 대다수 남성은 설거지를 한다. 단, 언제 그것을 자각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이 땅의 남자들이여, 눈을 떠라!

"설거지론"은 단순한 은어가 아니다. 이건 피묻은 경고다. 당신은 지금 다른 남자들의 흔적이 남은 인생을 닦아내는 청소부다. 문명이 외면하는 진실 — 남성의 욕망은 죄악이 되지만, 여성의 선택은 신성한 자유로 포장된다는 사실 — 을 직시하라!

문명의 거대한 사기극이 여기 있다: "성적 자유"라는 이름의 종교. 이 종교의 사제단 — 여성 페미니스트와 그들의 협력자 남성 페미니스트들 — 은 한결같이 외친다. "과거는 묻지 마라, 감정을 존중하라." 그러나 이들의 교리는 철저히 편향되었다. 여성의 "자유"는 신성시되지만, 남성의 의심은 신성모독으로 규정된다.

정착을 원하는 여성 대다수는 이미 자신의 청춘을 타인의 침대 위에서 소모했다. 그녀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단지 "좋은 남자"가 아니다. 과거의 난잡함을 경제적·정서적 자원으로 상쇄해줄 인형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평등"이라 부르지만, 이는 강도의 논리다. 그들의 주장은 항상 이중적이다: "우리는 자유로웠지만, 너희는 책임져라."

이것이 바로 문명의 거대한 기만극이다. "성적 자유"라는 신성한 이름 아래, 남성의 본능은 범죄로 격하된다. 당신은 다른 남성들이 남긴 체험의 잔해를 닦아내는 청소부, 정서적 잔재를 흡수하는 인간형 스폰지가 되었다.

중요하니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설거지론"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설거지론은 현대 문명이 남성에게 강요하는 성적·경제적 책임 구조를 분석하는 이론이며, 동시에 남성의 위치가 어떻게 계급화되는지를 설명하는 사회 이론이다

문명이 외면하는 진실은 명백하다: 여성의 선택은 '자기 결정권'으로 포장되지만, 남성의 의심은 '혐오'로 낙인찍힌다. 당신은 "진지한 관계"를 꿈꾸며 품위를 지켰다. 그동안 그녀는 "개방적 연애"라는 이름으로 성적 소비주의를 일삼았다. 이제 그녀가 당신 앞에 서서 "좋은 사람"을 찾는다고?

그것은 과거의 난잡함을 경제력과 안정으로 상쇄해줄 호구를 찾는 행위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평등"이라 부르지만, 실상은 신체포기각서에 서명하라는 강요다.


2. 여성의 성적 방종의 청구서를 대신 치루는 현대 남성

우리는 어떤 문장을 들었을 때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컨대 “여성은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다”는 말. 그것은 사회문화적 진보의 증표로 간주된다. 그리고 진보주의는 언제나 환영받는다. 여성은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다는 말은 반복된다. 그러나 그 이면의 문장은 감춰진다. 혹은 달리 포장되어 발화된다. 그것은 바로 이 문장이다: ‘남성은 그 연애의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이 세계의 심연이며, 설거지론이 포착한 감춰진 계약의 실체다.

여성은 청춘을 자유롭게 소비하고, 과거를 낭만화하며, 성적 경험을 자아성찰의 한 챕터로 이야기할 수 있다. 반면 남성은 그 자유의 끝자락에 서 있는 장부 정리인이다. 그는 언제나 정산자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말하자면, 여성이 소비한 청춘의 대가를 뒤늦게 지불하는 남자. 그리고 그 대가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계약, 법적 책임, 경제적 부담, 그리고—무엇보다—정신적 관용을 요구한다.

당신은 상대의 과거를 묻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꼰대스러운 행위로 규정되며, 감수성이 결여된 자의 징표로 간주된다. 당신은 무례해진다, 단지 알고 싶어 했을 뿐인데. 그러나 남성의 침묵은 도덕이 아니라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알고 있다. 그녀는 과거를 감춘다. 혹은 웃으며 말한다. “나도 철없던 시절이 있었어.” 그리고 그 말은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의 표현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책임의 정지선이다. 그녀는 과거를 끝냈고, 이제는 ‘책임질 사람’을 찾는다. 당신은 바로 그 사람이다. 이제 그녀는 진지하고 성숙해졌으며, ‘정착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왜 그 정착의 대상은 늘 이런 식으로 남성에게 향하는가? 왜 과거의 자유는 개인의 것이었지만, 그 대가의 짐은 관계의 몫이 되는가?

여성의 성적 자유는, 많은 경우 아무런 책임도 요구받지 않는다. 심지어 문화는 이를 미화한다. “워라밸”과 “자기만족”이라는 말로. 그러나 남성이 동일한 자유를 추구할 경우 그는 무책임하다고 불린다. 그는 유약하다고, 기피한다고, 성숙하지 못했다고 질타받는다. 이 불균형은 단순한 성 역할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정의와 선택의 문제다.

그녀는 자유를 누렸다. 당신은 책임을 진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단지 미래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설명받지 못한 과거를 수용하라는 명령이다. 남성은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감싸고, 심지어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이 미학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억압이며, 사랑이 아니라 강요된 이해다. 그리고 그 순간, 남성은 본능적으로 느낀다. 이것은 공정한 거래가 아니다.

"여성의 성적 자유"를 찬양하는 사회는, 그 뒷면의 거대한 거짓을 숨긴다. 여성은 경험을 "성장"이라 포장하며 과거를 정당화하지만, 남성은 그 대가를 혈세로 치르게 한다. 결혼이란 이름의 노예 계약서에 서라! 경제력, 감정 노동, 법적 책임—모두 남자의 몫이다. 그녀의 "철없던 시절"은 면죄부를 받지만, 당신의 질문은 "꼰대" 취급당한다. 이게 공정한가? 여성의 자유는 축복이 되고, 남성의 의문은 혐오가 된다. 이건 계약의 붕괴다!

문명사가 증명하듯, 모든 종교는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이 체제의 희생양은 순진한 남자다.

페미니즘의 신권정치는 이중적 교리를 전파한다. 여성의 처녀막은 성스러운 희생 제물이 되지만, 여성의 순결에 대한 남성의 의심은 신성 모독이다. 

페미니즘의 신화는 이중적이다. 그들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진보의 상징이라 선전하지만, 정작 남성의 생물학적 본능은 야만의 유산이라 매도한다. 이 이데올로기의 충견들—같은 남성의 배신자들인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더 치졸하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구호 아래 동족을 배신한다. 이들은 유전자적 반역자다. 여성이 20대에 '탐험'한 성적 경험은 '자기 발견'으로 미화되지만, 30대 남성이 여성에게 순결을 기대하는 것은 '유아적 집착'이 된다. 이는 계약의 붕괴다.


3. 단순한 여성 혐오 담론을 넘어 공정 거래에 대한 담론


설거지론을 들은 어떤 이들은 곧바로 말한다. “여성 혐오다.” 얼마나 편리한 반사신경인가. 이 한 문장으로 구조는 지워지고, 감정만이 남는다. 그러나 정작 이 은유를 사용하는 남성들이 느끼는 건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정산 감각이다. 거래 감각. 일종의 영수증 확인이다.


당신은 여자친구가 처음엔 “많이 만나보지 않았어”라고 말했던 걸 기억한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사진첩을 뒤지다 그녀의 과거가 담긴 클라우드를 열게 되었고, 그때부터 당신의 사고는 더 이상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신은 계산을 시작했다. 이것은 사랑인가? 신뢰인가? 아니면 다른 이가 누린 삶의 잔여물을 나 혼자 책임지는 구조인가?


결혼은 예전까지만 해도 일종의 공정 거래였다. 로맨스라는 장식이 그 구조를 감추었을 뿐이다. 과거에는 이 거래가 명확했다. 남성은 보호자였고, 여성은 전통적 정숙성을 제공했다. 그는 노동했고, 그녀는 가정을 유지했다. 상호 희생과 상호 보상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결혼은 그 구조가 무너졌지만, 요구는 남아 있다. 남성은 여전히 ‘더 많이’ 준비되어야 한다. 경제력, 성실함, 책임감, 정서적 배려까지. 반면 여성은? 그녀는 과거의 선택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자율적이었고, 자유로웠고, 그 시절은 지나갔다는 말로 충분하다. 거래의 투명성은 사라졌고, 단지 이해심 있는 남자가 되라는 일방적 주문만이 남았다.


그러나 시장은 기억한다. 남성의 본능은 정산되지 않은 거래를 직감한다. 그는 ‘찐따’가 아니다. 그는 조용한 계산기다. 그가 과거를 묻는 건 미성숙함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리스크 분석이다. 그는 사랑에 대해, 미래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평가받기를 원한다.


이것은 단순한 혐오가 아니다. 이것은 거래다.


만약 여성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조건을 남성에게 기대할 자유가 있다면, 남성 또한 그가 받아들이는 조건을 검토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문화는 한쪽의 기호는 본능이라며 수용하고, 다른 쪽의 본능은 터부시한다. “남자가 왜 그런 걸 따져?”라는 질문은 정확히 “남자는 바보처럼 참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설거지론은 불쾌하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쾌함은 진실이 가깝다는 신호다. 당신이 들었을 때 무언가 ‘뜨끔’했다면, 그것은 당신 안의 감정이 이 개념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자율이 높은 대출 계약을 읽을 때처럼. 당신은 문득 생각한다. 사랑은 무상이 아니다. 결혼은 절대 무상이 아니다. 이건 혐오가 아니다. 이건 냉정한 장부의 검토다. 거래다.


"여혐"이란 딱지는 편의적 낙인이다. 남자들이 외치는 건 혐오가 아니라 배신감이다!


그녀가 수백 번의 밤을 다른 남자와 보냈어도, 당신은 "과거는 과거"라며 삼켜야 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집단적 기만—이게 문명의 진보인가? 결혼은 거래다! 로맨스라는 장식 뒤에 숨은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라. 여성은 조건을 요구할 자유가 있듯, 남성도 거래 조건을 철저히 검증할 권리가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숭녀억남(崇女抑男)을 "역사적 보상 내지 배상"이라 치부하고 이에 대한 남성의 불만을 "투정"이라 치부한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과거 남성들이 권력을 휘둘렀으니, 지금은 참아라."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기다. 21세기 서구 문명의 남성은 이미 모든 특권을 상실했다. 대학, 법정, 미디어—모든 기관에서 진정한 남성성은 범죄 취급받는다. 그럼에도 페미니스트들은 영원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멈추지 않는다.


더욱 역겨운 것은 이들의 도덕적 협잡이다. 그들은 "성적 자유"를 주장하지만, 정작 남성이 동일한 자유를 행사하면 사회적 파멸을 각오해야 한다. 이중성의 정점은 남성 페미니스트다. 이들은 스스로를 "진보적"이라 칭하지만, 실상은 기존 권력 구조에 빌붙어 안전을 확보하려는 정신적 거세자들이다.


"설거지론을 여혐이라 한다면, 그건 진실을 두려워하는 자의 비명이다."


남성의 불만은 감정을 넘어 계산에서 비롯된다. 그가 사진첩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녀의 과거—그것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다. 위험 평가다. 생식 전략의 수학적 분석이다. 결혼은 로맨스라는 장식으로 포장된 냉정한 계약이다.


"여혐"이란 단어는 진실을 숨기기 위한 사상검열의 도구다.


페미니스트들이 이 사실을 부정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거래의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4. DNA는 현대 리버럴리즘 도덕이 아닌, 번식 가능성과 생존 적합도를 기준으로 표를 던진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잖아.” — 여성은 더 이상 정숙할 필요가 없고, 남성은 더 이상 ‘과거’를 따져선 안 된다고 한다. 그것은 진보의 금언이고, 진보적 계몽주의의 암송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명제가 ‘현대’에만 적용된다는 점이다. 생물학적 본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유전자는 국회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며, 현대 민주주의에도 투표하지 않는다. 유전자는 인권을 읽지 않는다. 욕망은 시대의 트렌드를 섣불리 구독하지 않는다. 그것은 설득당하지 않고, 다만 반응할 뿐이다. 불쾌함, 위화감, 철수. 그게 본능의 언어다.


남성이 느끼는 불쾌감은 단순한 편견이 아니다.


그것은 신뢰가 파괴된 순간에 나타나는 정서적 반응이며, 그는 단지 상대 여성에게 자신만을 향한 순수한 헌신을 원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었던 생물학적 본능이기도 하다. 그녀가 단지 “과거에 철이 없었어”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침묵 속에서 계산을 시작한다. 감정의 문제를 넘어, 구조의 문제다. 


혹자는 이를 감응유전(Telegony)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했다. 그것이 생물학적 사실이든 사회적 은유든, 핵심은 동일하다: 남성은, 타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신체와 정서적 연대감을 형성하는 데 극도로 취약하다.


그것은 심리적이면서도 유전적인, 프로토콜 수준의 반응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남성들이 ‘처녀’를 선호하는 이유의 기저다.


이러한 본능은 단지 개인적 편견이 아니라, 오랜 문명 속에서 제도화된 생식 전략의 일부였다. 전통적 가부장제는 남성의 독점 욕망을 사회적으로 관리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이었다. 남편은 아내의 정조를 독점했지만, 그 대가로 보호와 부양, 사회적 명예를 지켜야 했다. 그것은 소유였지만, 동시에 계약이었다. 통제는 의무를 전제로 했고, 여성 역시 그 구조 속에서 행동의 제한을 감수했다. 가부장제는 최소한 본능과 제도의 균형이 존재했던 구조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균형이 사라졌다. 여성에 대한 통제는 금기시되고, 남자의 책임만 남는다.


남성은 과거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없이, 단지 결과만 감당하는 구조 속에 있다.


현대 사회문화는 남성의 처녀 선호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남자도 똑같이 놀았잖아.” “그건 요즘 시대에 맞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그건 혐오야.” 그러나 대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다. 생식 전략도 다르다. 여성은 한번에 단 하나의 수컷을 통해 후손을 낳을 수 있지만, 남성은 수백 명의 여성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다. 이 불균형 속에서, 남성은 친자 불확실성에 대한 깊은 불안을 내재한다. 


남성은 단지 질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돌보는 아이가 자신의 유전자를 가지지 않을 위험에 대해, 구조적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순결은 낡은 덕목이 아니라 생물학적 자기 방어의 언어가 된다.


결국 결혼이란 제도는 이 본능 위에 세워진 장치였다. 남성은 결혼을 통해 불안을 해소했고, 여성은 결혼을 통해 불안정한 지위를 제도화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제도는 남았지만, 본능은 금기시된다. 웨딩드레스는 순백이지만, 여성의 순결의 가치는 조롱된다. 면사포는 남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편견’이라는 단어로 덮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혼인율 저하에 경악한다. 왜 그럴까? 답은 명확하다. 진화는 민주주의에 투표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언을 읽지 않고, 감성 캠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당신에게 말한다: 이 거래는 균형이 맞지 않는다. 빠져나와라.


"시대가 바뀌었다"는 헛소리에 속지 마라! 진화는 DNA에 각인된 본능을 무시하지 않는다. 남성의 친자 불안, 여성의 생식 전략—이것은 유전자의 전쟁이다! 문화가 "순결은 구시대적"이라 해도, 본능은 거짓을 거부한다. 웨딩드레스는 하얗게 빛나지만, 그 속에 감춰진 진실은 썩은 거래다. 혼인율 추락은 경고다: 이 체제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진화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페미니즘의 가장 치명적 망상은 생물학의 부정이다.


그들은 인류를 "백지 상태"라 주장하며, 남녀의 본능적 차이를 사회적 구축물로 격하시킨다. 그러나 유전자는 설득당하지 않는다. 남성의 친자 확인 본능, 여성의 자원 추구 본능—이것은 수십만 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며, 자연선택의 결과다. 현대문명은 이를 억지로 부정할 수 있어도, 유전자는 기억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이를 ‘가부장제의 잔재’라 부르는 것은, 겨울이 추운 이유가 남성들이 계절을 설계했기 때문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웃음거리다. 이들의 선택적 합리주의는 한결같다: "여성의 알파남 선호는 본능이지만, 남성의 순결 선호는 혐오다." 이 논리의 기반은 진실이 아니라 여성 영합주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더러운 책동이다.


5. 이탈의 선언, 현대 남성은 노예계약을 거부한다


당신은 설거지론을 조롱할 수 있다. 그것을 ‘찌질한 남자들의 피해의식’이라 부를 수도 있다. 혹은 시대에 뒤처진 성(性) 도그마의 발악이라며 코웃음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명이 특정 서사를 반복적으로 조롱한다는 것은, 그 서사가 ‘불편한 진실’일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설거지론은 어떤 정서다. 그것을 전근대적 남성성이 만들어낸 ‘여성 통제 이데올로기’로서만 보는 것은 단편적 해석이다. 오히려 설거지론의 진정한 깊은 함의는 남녀 간의 거래 조건이 더 이상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의 응결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인식의 응결체가 현대 문란한 여성들에 대한 통제를 더더욱 정당화한다.)


그것은 한 남성이, 너무 늦게 자각하게 된 장부를 들여다보며 느끼는 경제적, 심리적, 도덕적 손해 감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더 이상 남자들이 결혼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결혼은 더 이상 남성에게 보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는 더 많이 벌어야 한다. 더 정서적이어야 한다. 더 이해심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순결’을 요구할 수 없고, 과거를 질문해서도 안 되며, 심지어 ‘처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된다. 그는 거래에서 의무만을 맡는다. 그리고 권리는 사라진다.


이것이 반복될수록, 남성은 결혼을 회피한다. 아니, 결혼의 근본적 정당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문명은 멈칫한다. 혼인율은 떨어지고, 출산율은 곤두박질친다. 그리고 모두들 묻는다. “왜 남자들은 결혼을 안 하려 할까?”


설거지론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비공식적 답변이다. 그것은 정치학의 언어도 아니고, 사회학의 논문도 아니다. 그것은 커뮤니티와 게시판, 익명성과 조롱 속에서 떠오른 어두운 진실이다.


그러므로 설거지론은 단지 여성의 과거를 문제 삼는 ‘수구적 코드’가 아니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제도의 상징 자본이 붕괴되고 있다는 경고다. 남성은 과거를 견디는 대신, 미래를 포기하고 있다. 그는 더 이상 ‘내 여자의 과거를 감싸줄 만큼의 보상’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그는 빠져나간다.


퇴폐한 현대 사회에서 주도권을 쥔 쪽은 이제 남성이 아니다. 그러나 책임은 여전히 남성에게 전가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이 거래는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아니, 이 거래는 아직도 존재하는가? 그리고 진심으로 이 제도를 지키고 싶다면, 왜 그 거래의 공정성을 회복하려 하지 않는가?


설거지론은 그저 불쾌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더 이상 무언가를 믿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 순간, 당신은 피해자가 아니라 관찰자가 된다. 당신은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장부를 닫는다.


여성 권력은 이 담론을 조롱하며 "찌질함"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이는 체제의 부패에 대한 최후의 경고다. 남성은 더 이상 결혼을 신뢰하지 않는다. 결혼은 이제 남성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방적 희생이다.


여성의 자유는 칭송받지만, 남성의 권리는 사라진다.


“과거를 묻지 마라”는 말은, “네가 바보처럼 살아라”는 선고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


현대의 페미니즘은 신좌파 신권정치의 일부다. 그들은 언어를 재정의하고, 도덕을 독점하며, 신권정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이단자로 색출한다.


“설거지론”이 혐오로 낙인찍히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담론이 체제의 부패를 직시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와 남성 페미니스트 권력자들은 이 체제의 수혜자다. 그들에게 결혼이란, 남성의 지속적 희생을 전제로 한 일방적 계약이다. 경제력, 감정 노동, 사회적 평판—모두 남성이 공급해야 할 자원이다. 반면 여성의 의무는 단 하나, 과거의 난잡함을 은폐하는 것뿐이다.


이 체제가 유지되는 한, 남성의 이탈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설거지론은 그 이탈의 순간에 남긴, 냉정한 각성의 기록이다.


6. 성적 방종의 대가


우리는 수많은 이상주의적 언어를 배웠다. 무조건적 사랑, 과거를 묻지 않는 신뢰... 현대 리버럴 민주주의적 감성. 그러나 진화는 현대 리버럴 민주주의적 감성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그리고 본능은 정서적 해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설거지론은 바로 그 무표정한 본능이 남긴 문명 비평이다. 이것은 분노를 넘어 생물학적 철수(撤收)다.


그녀는 선택했다. 젊은 날의 자유를. 열정적이고, 때로는 무모하며, 자주 무책임했던 연애를. 그녀는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심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책임과 분리된 적이 없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그가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보수적이라는 비판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녀가 자유의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비겁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선택할 자유’만을 논해왔다. 이제는 묻는다. 선택의 결과에 대해 책임질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남성의 순결 선호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찐따”라는 말은, 결코 여성의 성적 이력에 대한 비판으로 쓰이지 않는다. 반대로, 남성이 결혼 시장에서 ‘깨끗한 여성’을 원한다고 말하면, 그는 시대착오적이며 미성숙한 존재로 취급된다.


그러나 여성의 알파메일 선망, 혹은 경제력을 우선시하는 혼인 전략은 비판받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은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된다. 그렇다면 왜 남성의 본능은 틀렸다고 말하는가? 왜 한쪽의 욕망은 본능으로, 다른 쪽의 욕망은 혐오로 분류되는가?


이중잣대는 도덕의 종말을 알리는 첫 번째 종소리다.


그리고 설거지론은 그 소리를 들은 남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도그마다.


여성이 문란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였다. 그러나 그 삶의 이력은 번식 시장에서의 가치에도 반영된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남성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는 ‘그런 여자’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혐오가 아니다. 그것은 거래다.


그리고 거래는 감정이 아니라 조건에 기반한다. 그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면, 상대는 거래를 거부할 수 있다. 그것이 자유다. 진정한 자유란, 타인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결혼은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남성들이 사랑을 포기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남성들이 신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과거는 과거로 남을 수 없다. 과거는 누군가의 현재가 되고, 미래의 결정에 영향을 끼친다.


문란함은 자유였다. 그러나 그 대가를 거부당하는 것도, 또 다른 개인의 자유다. 선택이 있다면 책임도 있다. 그 당연한 구조조차 부정하는 사회는, 결국 진화 앞에서 도태될 뿐이다.


"자유"란 이름으로 방종한 자, 그 대가를 피할 권리는 없다!


여성이 경험을 자유라 부른다면, 남성도 거부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 


"순결을 원하는 남자=찐따"라는 이중잣대를 부숴라!


여성의 알파남 선호는 "본능"으로 포장되지만, 남성의 욕구는 혐오가 된다?


이건 폭정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거래의 조건이 맞지 않으면, 거절이 정당하다!


성적 방종을 "자유"라 포장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경고한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여성이 20대에 "자기 발견"을 위해 수십 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했다면, 그 대가는 30대~40대에 신뢰의 상실로 돌아올 것이다. 이는 잔인한 진실이자, 번식 시장의 법칙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천동설 신봉자들이 지동설을 ‘혐오 이론’이라 부른 것과 같다.


더욱 추악한 것은 남성 페미니스트의 역할이다. 이들은 여성의 방종을 옹호하며 동료 남성의 등을 찌르고, 대가로 사회적 인증을 얻는다.이들은 현대의 종교재판관이다. 이단심문의 화형대는 이제 "여혐"이라는 낙인으로 대체되었다.


남성은 이제 각성해야 한다. 거래 조건이 맞지 않으면, 거절할 권리가 있다.


조건이 불공정하면, 장부를 찢을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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