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主權), 책임, 소유: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 일치의 방법론에 관하여
주권(主權), 책임, 소유: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 일치의 방법론에 관하여 서문 빚은 눈에 보인다. 청구서가 오고, 이자가 붙고, 언젠가는 독촉장이 온다. 그런데 어떤 빚은 청구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안보를 빌리고, 시장을 빌리고, 심지어 자기 정권의 존속 가능성 자체를 빌린 나라들이 있다. 그 나라들은 이상하게도 채무자라는 자각이 없다. 청구서가 없으니 빚도 없다고 여긴다. 이 착각을 깨는 순간 한 문명의 골격이 드러난다. 국제금융자본이나 그림자 정부를 들먹이는 음모론은, 해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의 정치꾼들이 해외에 종속된 현실에서 오는 무기력함과 열등감을 털어내고 자주성을 과시하며 뽐내기 가장 좋은 배출구다. 반세계화라는 훌륭해 보이는 명분을 쥐고 정의로운 척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는 현실을 외면하는 눈속임일 뿐이다. 배후의 손을 탓하는 편리한 서사 속에서 정파적 인맥과 연고주의(緣故主義)로 점철된 자국 카르텔의 부실함을 진단할 기회는 사라진다. 문제는 서사가 아니라 태도다. 지원은 당연시하고, 대가는 회피한다. 이것이 일부 해외의존도가 높은 국가에서 흔히 보여지는 현상이다. 국제정치학은 이걸 오래전부터 무임승차(Free-riding)라 불러왔다. 가령, 안보는 미국에, 시장은 미국과 중국에 걸쳐놓고, 정작 그에 따르는 비용은 최소한만 낸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 때마다 반복되는 장면이다. '주권(主權)'과 '자주(自主)'라는 수사(修辭)가 화려할수록, 그 밑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눈앞의 청구서 액수를 줄여보려는 흥정이다. 하지만 이 진단에서 멈추면 절반짜리 분석에 불과하다. 무임승차라는 말은 도덕적 비난에 가깝고, 도덕적 비난은 구조를 설명하지 못한다. 왜 이 패턴이 반복되는가. 왜 정권이 바뀌어도 매번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가. 이 질문을 붙잡고 계속 내려가면, 국제정치의 표면 밑에서 전혀 다른 지형이 나온다. 회계의 문제, 소유의 문제, 그리고 마지막에는 통치라는 것 자체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 이 글은...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