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F. 뵈텔, 초당파적 반역

성자의 진영(The Camp of the Saints)


2013/02/08, 칼 F. 뵈텔(Karl F. Boetel)


보트 피플의 침공! 걱정할 것 없다. 칼라일 클럽(Carlyle Club)이 그들이 성자의 진영을 점령하기 전에 저지할 것이다.




초당파적 반역


위: 메소아메리카의 식민화가 진행 중이다.


”이 영국의 토양은, 이 색슨인들(Saxon men)이 개간했고 경작 가능하고 비옥한 땅으로 만들었으며, 그들 자신의 보금자리로 삼아 왔다. 그것은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들이 이룬 성과였다. 하늘 아래, 무기를 손에 든 어떤 인간 집단도 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무기를 든 인간의 모든 힘은, 이 색슨인들이 그들의 냉혹한 방식으로 붙잡아(천상의 정의와 그들 특유의 색슨식 유머가 이를 거들어) 재빨리 바다로 내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보라, 누더기와 무지와 벌거벗음 외에는 아무것도 무장하지 않은 인간들의 힘이 나타난다. 그러자 이 땅의 주인이던 색슨인들은 종이 위의 공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마법에 마비되어, 멀리 도망쳐 대서양 건너 숲속에 숨어야만 한다.“


—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차티즘(Chartism)』(1839)


대역죄와 식민화, 다시 말해 사면과 이민(Radish 1.2)은 또다시 뉴스의 중심에 올라 있다. 양당의 진보 세력, 즉 지배계급 민주당과 가짜 야당 공화당이, 표면적인 차이를 제쳐두고 공식적으로 손을 맞잡아, 1965년 혐오스러운 배신자(이제는 다행히 썩어가는 시체가 된) 테드 케네디(Ted Kennedy)가 시작한 국가적 자살의 과정을 완수하려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천만 명의 외국 침입자들을 나라 안으로 쏟아붓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복지에 의존하고 있고, 새로 온 조국에 충성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며, 심지어 특별한 호감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마치 미국에 또 하나의 무능력하며 원한에 찬 하층계급이 더 필요하다는 듯이 말이다.


아니다, 블룸버그 시장(Mayor Bloomberg)이여, 또 하나의 혐오스러운 배신자여, “국가적 자살”이란 이민자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는 추가적인 대학생이 필요하지 않다. STEM 전공조차도 그렇다. 아니, STEM조차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STEM 인력이 과잉 상태이며, 말 그대로 넘쳐나고 있다. 그러므로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얻기 위해, 더구나 비숙련 노동자까지 얻기 위해 제3세계를 약탈할 필요는 없다. 그 과정에서 1960년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유럽계 미국인들이 2043년에는 자기 나라에서 소수자가 되도록 만들 이유도 없다.


멕시코는 자기들의 국민을 지키게 하라. 아이티는 자기들의 의사들을 지키게 하라. 제발, 아프리카는 자기들의 아인슈타인들을 지키게 하라.




2007년2013년의 초당파적 반역


분명히 말해 두자면, 내가 직접 겨냥하는 대상은 이미 어떤 희망이나 이성도 남아 있지 않은 지배계급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근본적으로는 괜찮은 사람들이지만 늘 혼란에 빠져 있는 ‘목가적(country-class)’인 미국인들(그리고 캐나다인, 스위스인, 호주인들…)이다. 이들은 나라가 너무나도 분명한 방식으로 처참하게 망가져 가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그러나 동시에 수십 년, 아니 수십 년에 걸친 진보주의의 터무니없는 거짓말 ― ‘명제적 국가(proposition nations)’, ‘인권’, ‘인종적 평등’ 같은 것들 ― 에 의해 점점 닳고 지쳐 왔다. 다시 말해, 토머스 칼라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종이 위의 공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마법에 마비된” 상태다. 그 마법은, 아무것도 보존해 내지 못하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어리석은 ‘보수주의’에 의해 전혀 견제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렇다, 국가는 반드시 국경을 통제해야 한다(참고로 이 일은 철조망 몇 줄과 무장한 애국자 몇 명만 있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둘 다 부족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당신네 무장한 애국자 대부분은 이유도 없이 무슬림 국가들을 돌아다니다가 총을 맞고 있는 듯하다). 아니다, 아이티인, 에티오피아인, 캄보디아인, 그리고 말라리아와 악어를 상대로 번식 경쟁을 벌이는 것을 사실상 유일한 적응 전략으로 삼아 온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을 먹여 입힐 책임은 당신에게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다, 자신의 문화적·생물학적 유산을 보존하고자 하는 데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가장 단순한 말로 하자면 이렇다. “평등”, “다양성”, “기회” 따위는 엿이나 먹어라. 이것은 우리의 나라다. 당신들은 그것을 가질 수 없다. “하늘 아래, 무기를 손에 쥔 어떤 인간 집단도 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무기를 든 인간의 모든 힘은, 이 색슨인들이 그들의 냉혹한 방식으로 붙잡아, 재빨리 바다로 내던져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칼라일이 『차티즘』에서 지적했듯이, 대서양 바닥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운운하며 불평하기는 꽤나 어렵기 때문이다.


“이 영국의 땅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그것은 그것을 만든 하느님의 것이었다. 그분의 것이었고,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하느님의 피조물 가운데 누가 그곳에서 살 권리를 가졌는가? 늑대와 들소였는가? 그렇다, 그들 역시 그랬다 ― 더 나은 권리를 지닌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러나 켈트인(Celts)이 나타났다. 어떤 신경질적인 골동품 연구가가 그를 “유럽의 토착 야만인”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이 더 나은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들소들에게 고통을 안기지 않은 채는 아니었지만, 그 주장을 관철시켰다. 그는 하느님의 그 땅 조각에 대해 더 나은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더 큰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그곳에 정착해, 그것을 어떤 용도로 쓸 수 있는지 시험해 볼 힘 말이다. 들소는 사라졌고, 켈트인은 그 땅을 차지해 경작했다. … 왜 저 담벼락 틈에 저 우슬초(hyssop)가 자라는가? 온 우주가 다른 일로 충분히 바쁜 나머지, 지금까지 그것이 자라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힘을 지녔고, 그 힘이 곧 권리다.“


이번 호 『래디쉬 매거진(Radish magazine)』에서는, 이 기초적인 원칙을 망각한 대가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하나하나 따져볼 것이다.




원문 링크: https://radishmag.wordpress.com/2013/02/08/the-camp-of-the-saints/#bipartisan-tr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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