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랜드, 공포주의
공포주의(Horrorism)
2013년 11월 3일, 닉 랜드(Nick Land)
신반동주의(neoreaction)는 ‘암흑계몽주의(Dark Enlightenment)’라는 벡터를 따라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익숙한 모든 행동주의적 요구를 좌절시킨다. 비록 노골적인 반(反)정치 노선이 여전히 소수의 태도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민주주의적 정치 가능성 계산법은 일관되게 전복되며, ‘동원’이 기대될 만한 인구학적 지반이 속속 비워져 간다. 신반동주의는—지극히 공들여 설명하듯—조류를 되돌릴 만한 대중정치를 구성할 수 있는 일관된 반동적 계급, 인종, 신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반동주의적 분석의 가장 온건한 버전조차도 정치적 환멸을 깊이 불러일으킨다.
과거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들이 겉보기에는 비슷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것은 ‘현실주의적 타협파’와 ‘테러리스트적 급진파’로 갈라져 왔다. 후자의 선택은, 대중적(확장적) 기반의 침식에 대응하여 정치적 의지를 폭력으로 증폭시키는 방식인데, 이는 민주주의가 일종의 관념론적 상태로 진입했다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이 상태에서는 그 이데올로기의 핵심적 속성이 기묘할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테러리스트란, 사회적 정체성의 퇴조로 인해 고립된 정치적 관념의 매개체로서, 대중적 실천 가능성으로부터 분리된 채 추상 속에서 자신을 완결해 나가는 자들이다. 혁명 운동이 인구학적으로 더 이상 그럴듯하지 않게 되는 순간, 테러리스트가 탄생한다.
반면 신반동주의적 ‘현실주의’는 민주주의적 지탱 기반의 후퇴와 정방향으로 결합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신반동주의는 자신만의 민주주의적 정치 행동을 드러냈을 텐데, 이는 자명한 부조리다. 분노가 좌절되어 테러리즘적 표현으로 기울어지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그것은 곧바로 심각한 혼란 혹은 위선을 폭로할 것이다. 본보기적 폭력을 통해 대중을 이념적 복종으로 몰아넣는다는 구상은, 신반동주의의 목표가 될 수 없다.
민주주의적 행동주의에 대응하는 엄밀한 신반동주의적 개념은 숙명론이다. 이는 섭리, 유전, 카탈락시(역주: catallaxy.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강조한 개념으로, 자본주의로의 자생적 질서를 뜻한다.)라는 세 갈래로 분류된다. 이 숙명의 흐름들은 대중적 정치 승인 없이도 제 갈 길을 따라가며, 조직적 보상 행위가 해체될수록 그 추진력은 더욱 커진다. 무엇인가를 ‘일으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결코 막을 수 없는 것의 귀환이 숙명이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공포주의’적 과업의 대략적 윤곽이 드러난다. 공포주의는 진보적 이상이 절망 속에서 현실 보상을 포기하는 지점까지 몰락하도록 돕지만, 그 적을 공포로 짓눌러 굴복시키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대신 미세하고 단일하며 촉매적인 개입을 통해 비동원화, 비대중화, 비민주화를 실현하며, 숙명의 실현 방향으로 작동한다. 대성당(The Cathedral)은 마비될 정도로 ‘공포’ 속에 빠져야 한다. 적들에게 전하는 공포주의자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당신들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효과가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행위자는 이미 진보를 향해 기운다. 이것만으로도 공포주의적 응답은 충분히 제시된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무엇을 하든 당신의 진보주의적 ‘행동’은 결국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할 것이다. 절망하라. 공포 속으로 가라앉아라. 당신은 ‘우리’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가장할 수는 있지만, 실상 당신의 진정한—그리고 치명적인—적은 ‘현실’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고함칠 필요가 없다. 단지 귀에 속삭일 뿐이다. “절망하라.” (공포.)
원문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131110191551/http://www.xenosystems.net/horro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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