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시우스 몰드버그, 정치적 자유에 반대하며
정치적 자유에 반대하며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Curtis Yarvin) · 2007년 8월 16일
아직도 내 블로그 독자들 가운데에는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이 꽤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다방면의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generalist)’이라 불리는 입장인데, 최근 내가 이 피냐타(piñata)의 특정 지점만 과도하게 두들기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이 부분은 단단해서 몇 번 더 내리쳐야 할지 모른다. 그러고 나면 더 재미있는 주제로 넘어갈 것이다. 만약 이미 설득되었다고 느낀다면, 창문을 열고 영화 ‘네트워크’의 피터 핀치(Peter Finch)처럼 고개를 내밀고 소리를 지를 준비가 되어 있다면(외칠 때는 반드시 전체 URL을 포함해 외쳐라. 그냥 “UR(Unqualified Reservations)!”이라고 하울링하면 알아듣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했으니 이 글은 건너뛰어도 된다.)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주주의자(demotist)라고 부르자. 민주주의자란 단지 데모스(demos)와 크라토스(kratos)의 합성어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는 민주주의 일반이—그 막연하고 고대적인 단어가 역사 속에서 적용된 모든 구체적 형태가 반드시 좋다고는 하지 않더라도—기본적으로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반(反)민주주의자(antidemotist)란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 사람, 민주주의 일반이 기본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어떤 반민주주의자는, 일부 민주주의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방식과 비슷하게, ‘민주주의자’라는 말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21세기의 탈(脫)민주주의 사회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동유럽이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뒤 스스로를 회복 중이라고 보듯이, 민주주의에서 벗어난 뒤 스스로를 회복하는 사회 말인가? 흠, 그걸 상상하는 사람은 우리 둘 중 하나뿐인 것 같다.
20세기를 설명해야 한다는 점은 어떤 ‘반(反)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넘어야 할 난관이다. 20세기에는 보편주의적 자유민주주의(Universalist liberal democracy)가 파시즘과 공산주의와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지난 글 참조). 당신이 나치나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상, “민주주의는 나쁜 것인데 왜 비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는 좋은 것이냐?”라는 문제를 설명해야 한다.
내 설명은 이렇다. 이 세 세력(보편주의, 파시즘, 공산주의)은 모두 19세기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커다란 가지에서 나온 곁가지들이었다는 것이다. 모두 ‘국민’을 숭배했고, 국가가 국민을 대표하거나 상징하거나 동일시된다는 교리를 만들었으며, 여론을 극도로 중시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생물 분류학에서 쓰는 분지학(分枝學, cladistics) 방식을 빌리자면, 인간·고릴라·침팬지가 비슷한 정도로 개코원숭이(baboon)과 연관되어 있듯이, 보편주의·파시즘·공산주의 역시 군주주의(monarchism)와 비슷한 정도로 연관되거나 또는 무관하다. 인간은 고릴라와 침팬지를 보며 어딘가 개코원숭이스러워 보인다고 느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보편주의자는 파시스트나 공산주의 독재가 어딘가 군주제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개코원숭이의 관점에서는 “유인원은 유인원일 뿐”이며, 생물학도 그 입장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개코원숭이는 유인원 전체를 하나의 계통군으로 묶어 일반화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 그는 유인원들이 개코원숭이를 학살하고, 토막 내고, 학대해온 일반적 경향을 관찰한다. 모든 유인원이 나쁜 유인원은 아니라는 정도는 스스럼없이 인정한다. 실제로 좋은 유인원과 나쁜 유인원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도 매우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유인원은 위험하고 무섭다”라는 일반적인 명제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코원숭이도 아니고 군주주의자도 아니다.¹ 그러나 민주주의 시대의 경악스러운 폭력을 보면, 그 사상 전체를 하나의 재앙으로 간주하고 버린 뒤, 군주제의 수많은 결함을 바로잡는 데 집중하는 것이 충분히 방어 가능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상상하기 어렵다—만약 스튜어트(Stuart), 부르봉(Bourbon), 호엔촐레른(Hohenzollern), 합스부르크(Habsburg), 로마노프(Romanov) 같은 왕조들이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다면, 미국 남북전쟁,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말이다. 구(舊)유럽의 왕가들도 서로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징병제, 총력전, 대량학살 같은 것은 그들의 행동 강령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형식주의(formalism)에 또 다른 이름을 붙이고, 이를 신관방주의(新官房主義, neocameralism)이라 부르려 한다. 이 단어를 고른 가장 큰 이유는 구글 검색 결과가 백지이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프리드리히 대왕(Frederick the Great)의 통치 철학인 관방주의(官房主義, cameralism)를 연상시키기 위한 의도도 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반마키아벨리론(Anti-Machiavel)』은 19세기와 20세기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궁금한 사람이 읽기에 좋은 책이다. (물론 당신이 민주주의자라면, 애초에 ‘잘못된 것’이라고 느끼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관방주의의 기본 통찰은 잘 통치된 국가가 번영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것은 중상주의(mercantilism) 같은 원시적 경제 이론들과도 결부되어 있었는데, 그런 이론들은 지금 관점에서는 버리는 편이 더 낫다.² 또한 관방주의는 당연히 군주제와 관련되었고, 군주제를 떠받치는 생물학적 변덕성(상속의 우연성)은 악명이 높다. ‘가족 사업’은 구멍가게나 자동차 정비소처럼 작은 규모라면 훌륭한 모델일 수 있지만, 대륙 전체를 운영해야 한다면 전문 경영인이 필요한 법이다.
신관방주의자(新官房主義者)의 관점에서 국가는 나라를 소유한 하나의 기업이다. 국가는 다른 대규모 기업처럼 논리적 소유권을 주식처럼 양도 가능한 지분으로 나누어, 각 지분이 국가의 이익에서 정확한 지분 비율을 배당받도록 설계해야 한다. (잘 운영되는 국가는 매우 높은 이익을 낸다.) 각 지분은 한 표의 투표권을 가지며, 주주들은 이 표로 이사회(board)를 선출하고, 이사회는 경영진을 임명하거나 해임한다.
이 기업의 고객은 거주자이다. 수익을 잘 내는 신관방주의 국가는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고객에게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잘못된 통치는 곧 잘못된 경영이다.
예를 들어, 신관방주의 국가는 거주자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더 상위의 어떤 권력이 강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 매우 편안하고 안정적인 반면, 정부를 신뢰할 수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은 두렵고 끔찍하기 때문이다. 신뢰는 한 번 깨지면 다시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국가는 자기 스스로 법을 어기는 순간—즉 약속을 어기는 순간—자본 가치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 국가의 ‘주가’는 거의 확실하게 떨어진다.
예를 들어, 우리의 신관방주의 국가가 헨리 조지(Henry George)식으로 모든 세수를 단일한 재산세로 충당한다고 해 보자. 이런 재산세 체제를 운영하는 간단한 방법은 자가평가 등록제(self-assessment registry)다. 즉, 모든 부동산 소유자가 각 부동산에 대해 자신의 매도 예약 가격을 기입하고 수시로 갱신하며, 누구든 이 가격에 매수할 수 있게 만드는 방식이다. 소유자가 가격을 너무 높게 잡으면 세금을 과도하게 내야 하고, 너무 낮게 잡으면 부동산이 바로 매입당할 것이다. 이 제도는 행정적으로 매우 간단하고, 래퍼 곡선(역주: Laffer curve. 세율에 따라서 조세수입이 변화하게 되는 관계를 이론적으로 나타낸 곡선)도 쉽게 그릴 수 있으며, 그 정점은 상당히 높게 형성될 것이다.
이 단일세 국가를 기업처럼 평가하는 것은 쉽다. 이 기업(국가)의 가치는 세율과 부동산 총가치의 함수다. 세율이 계약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신관방주의 국가의 유인은 간단하다. 부동산 가격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거주하거나 일하기에 덜 쾌적해지는 어떤 정책도 명백히 채택되면 안 되는 정책이 된다.
이제 상상해 보자. 만약 호엔촐레른(Hohenzollern) 왕가의 프로이센이 준민주적 민족군국주의로 타락하지 않고, 대신 런던 증시에 자사 주식을 상장했다면? 혹은 21세기의 싱가포르, 두바이, 홍콩이 IPO(기업공개)를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가상의 신관방주의적 미래라는 안전한 관점에서 민주주의적 시대를 되돌아볼 수 있다.
민주주의적 체제 가운데 가장 나쁜 형태들—즉 정말 ‘나쁜 유인원’들—은 전체주의 체제, 곧 파시즘과 공산주의였다.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주요 차이는 작동 방식이 아니라 기원에서 나왔다. 파시스트 엘리트는 주로 군국주의자였고, 공산주의 엘리트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일당제 국가는 명백한 수렴진화의 사례다.
신관방주의자의 시선에서 전체주의란, 민주주의가 완전체로, 가장 악성 형태로 발현된 상태다. 물론 민주주의가 항상 전체주의로 붕괴하는 것은 아니다. 주유소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언제나 폭발 화염에 휩싸이는 것은 아닌 것처럼. 암 환자도 오랜 세월 생존하거나 다른 원인으로 죽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점심 전에 버지니아 담배 반 갑을 태워도 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정당은 정당일 뿐이다. 정당이란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기 위해 결집한 대규모 집단이다. 그 정당이 지지자들을 무장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무장한 지지자보다 비무장 지지자가 더 쓸모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뿐이다. 도덕적 양심 때문에 덜 효과적인 전략을 선택한다면, 그런 정당은 더 비도덕적이고 덜 원칙적인 다른 정당에게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어떤 정당이 국가를 완전히 장악하면, 거대한 수입원을 얻어 이를 지지자들에게 마음껏 흘려 보낼 수 있다. 그 결과는 전형적인 비공식적 관리구조가 되고, 이는 드라마 소프라노스(The Sopranos)를 몇 편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식적 소유 구조가 없는 기업에서—즉 전체 이익을 중앙에서 모아 분배하는 구조가 없는 곳에서는—돈과 온갖 이권이 사방에서 새어나가게 마련이다.
즉, 전체주의 국가는 갱스터 국가이며, 필연적으로 부패와 잘못된 관리로 기울게 된다. 독재자 개인을 둘러싼 개인숭배는 매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전체주의 독재자는 신관방주의적 CEO와도, 심지어 관방주의적 군주와도 거의 공통점이 없다.
차이는 관리 구조에 있다. CEO와 군주는 모두가 따를 수 있는 법 질서에 의해 그 자리에 있게 된다. 법을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법을 어기기로 선택한 사람들에 대한 승자들의 연합이 된다. 반면 독재자의 권력 기반은 범죄자들의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자신이 최상위에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런 구조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언제나 당신 자리를 노리는 다른 갱스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피아 두목이 대개 침대에서 편히 죽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내부적·외부적 폭력은, 본질적으로 이 내재적 인 잘못된 관리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독재자는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폭력적이다—그들은 폭력을 조직 원리로 사용한다. 전체주의 국가는 정통성이 없어서, 야심 있는 하급자가 쿠데타로 국가를 집어삼키는 것이 비현실적일 이유가 없다. 유럽의 군주들도 전쟁을 벌였고, 때때로 암살당했으며,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쿠데타는 매우 드물었다.
신관방주의 국가를 법에 충실하게 유지시키는 금융적 논리는 전체주의 국가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전체주의 국가는 주주(株主)가 통제하는 안정적 관리 구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법 상태는 국가 전체의 관점에서는 이익이 되지 않지만, 법을 어기기로 선택한 개별 세력에게는 상당한 이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도 ‘국가 전체’를 기준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신관방주의 국가만이 정부를 작고 효율적으로 유지할 유인을 갖는다. 반대로 전체주의 국가는 정부를 크고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유인을 갖는다. 왜냐하면 전체주의 국가에서 모든 관료는 자신의 부서를 키울 유인책을 갖고 있고,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재무 및 회계 전문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어떤 갱스터도 다른 갱스터로부터 영원히 안전하지 않다. 그 결과 권력을 가진 자는 지금 당장 가능한 만큼 챙길 수 있을 때 최대한 챙기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기나 자기 측근들이 이익을 얻지 못하는 자원을 학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러한 ‘갱스터 방식’의 경영 아래에서 전체주의 국가들은 종종 대량 학살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가장 경제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시민들을 대량 학살하기도 했다.
겉보기엔 양당제가 어째서 일당제보다 훨씬 나은지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은 매우 논리적이다.
두 정당 혹은 여러 정당이 존재하는 체제에서는 어느 정당도 국가의 수입을 노골적으로 자기 주머니로 집어넣을 수 없다.
이들은 타협할 유인책을 얻게 되고, 종종 전문적 관리체제와 비슷한 방향으로 타협한다. 그 결과, 여전히 파벌 간 긴장은 존재하지만, 이 체제는 법치에 상당히 근접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양당제 국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일당제 국가로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한 정당이 정부 권력을 이용해 경쟁 정당을 주변부로 밀어내고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재앙의 경로는 아니다.
가장 큰 위험은, 겉으로는 초당파적이라고 되어 있는 관료조직 안에 실제로는 정당 같은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구 언론인들을 하나의 정치 정당으로 간주해보면, 그들은 실제로 정당의 특징을 매우 잘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훈련 방식은 분명히 정파적 간부 교육과 매우 흡사하다.
내 주장으로는, 폴리곤(역주: Polygon. 몰드버그는 관료조직·언론·학계 등 서구의 비선출 엘리트 기관들이 형성하는 정치·문화적 네트워크를 가리킬 때 이 용어를 쓴다. ‘대성당(The Cathedral)’ 개념의 핵심 구성부로, 이들이 서로 인적·문화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다각형처럼 서로 면을 이루며 결합된 구조라고 표현한다.) 전체가 본질적으로 태아 단계의 일당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기존의 정치체제를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데 여전히 어느 정도 절제해야 하지만, 유럽에서는 이미 ‘탈정당’ 국가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있으며, 그 방향은 신관방주의와는 전혀 무관하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쉽게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민주주의는 가능한 모든 정부 형태 중 가장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자랐다. 이 깊숙한 애착이 흔들리기 시작하려면 정상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유가 산더미처럼 쌓여야 한다. 그래서 피냐타가 아직 흔들리고 있을 때 또 한 번 후려치려 한다—이번에는 ‘정치적 자유’라는 개념을 공격해보겠다.
정치적 자유란, 목적이 직접적 만족이 아니라, 정부 정책을 바꿔서 간접적 만족을 얻기 위한 행위에 참여하는 자유다. 투표, 시위, 찌라시를 인쇄하는 행위 등은 모두 정치적 자유의 범주다. 당신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오직 그것들이 정치적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반면 개인적 자유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직접적으로 당신을 만족시키는 모든 행위를 할 자유다. 며칠 전 나는 나브로조프(Navrozov)가 인용한 홉스(Hobbes)의 예시를 인용한 적이 있는데, 홉스는 다음의 행위들을 개인적 자유로 분류한다.
“서로 사고팔고, 그리고 그 밖의 계약을 체결할 자유; 자신이 원하는 거주지, 식단, 생업, 생활 방식을 선택할 자유; 그리고 자녀를 자신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교육하고 양육할 자유, 그 밖의 이와 유사한 것들.”
민주주의 국가들은 홉스가 말한 이러한 개인적 자유를 제대로 존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관례적으로 아직 존중되는 자유는 거주지 선택과 생업 선택 정도뿐이다. 적어도 보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은 시민에게 주거지나 직업을 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매매, 계약, 교환을 규제하는 데 집착하고, 거대한 공교육 시스템을 운영하며, 심지어 생활방식·식생활과 관련된 규제까지 적지 않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그 밖의 유사한 자유”에 해당하는 것들은 너무나 명확하다.
예를 들어, 의료의 자유(자신의 신체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 어떤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을지, 어떤 약물·기기·시술을 사용할지 전적으로 스스로 선택할 권리), 결사의 자유(누구와 일하고, 누구와 놀고, 언제/왜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절대적 선택권), 금융의 자유(자신의 재산을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에 따라 관리·처분할 권리) 등이 있다.
신관방주의 국가가 이러한 자유들을 침해할 그 어떤 합리적 이유도 나는 떠올릴 수 없다. 반면 우리의 민주주의 정부들은 공공 일자리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거의 상상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이러한 자유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있다.
물론 정치적 자유가 있다면, 이를 이용해 개인적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운동할 수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 교리는 정치적 자유야말로 가장 중요한 자유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자유가 있고,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충분히 많다면, 개인적 자유를 포함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국민’을 설득하지 못한다면—애초에 당신이 틀렸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게다가 정치적 자유는 그 밖의 다양한 ‘좋은 것들’을 얻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 예컨대 국가가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군침이 도는 수익 흐름의 일부를 챙긴다든지, 그 수익으로 구매한 각종 복지나 혜택을 누린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마 내가 정치적 자유를 변호하는 논리를 충분히 우아하게 제시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이런 주장들은 매우 설득력이 약하다고 느껴진다. 정치가 좋은 이유가 개인적 자유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면, 이는 정치가 다른 더 효과적인 방법들보다 우월하다는 논거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정치를 이용해 자신에게 이익을 얻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무법적 갈취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준(準)군사적 성격을 보게 된다. 어떤 희소 자원을 법률적 소유권 없이 권력으로 독점하려 할 때, 당신은 필연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다른 사람들과 투쟁하게 된다. 이것은 규모가 작은 전쟁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전쟁이다.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 사이의 경계에는 언론의 자유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러한 자유는 개인적 자유로 정의될 수 있지만, 사실상 비교적 적은 사람에게만, 비교적 작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대중을 상대로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전 세계에는 아마 윈드서핑을 즐기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윈드서핑을 금지한다면 윈드서핑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개인적 손해가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물론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면 읽는 사람들의 자유, 즉 더 큰 집단의 자유가 침해되긴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절대다수는 아니다. 그렇다면 만약 언론의 자유가 정치적 주제에 한해서만 침해된다면? 혹은 사소한 주제에 한해서만 침해된다면? 예를 들어 태국처럼 왕을 모독하는 발언이 불법인 경우를 생각해보자.
나는 예컨대 의료의 자유와 정치적 출판의 자유를 비교하면, 솔직히 전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미친 것인가? 어쩌면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 진짜 그렇다고 말해주길 바란다.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싱가포르나 두바이처럼 부분적으로 신관방주의에 가까운 국가들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서 내가 링크한, 아주 정통적인 보편주의자(Universalist) 블로그 Unfogged의 싱가포르 관련 논의가 좋은 예다—보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장소에 실제로 살면서도 그 신념을 유지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모순은 오히려 신앙의 또 다른 증거가 된다. 로렌스 오스터(Lawrence Auster)의 말대로라면 또 하나의 원칙 없는 예외 사례인 셈이다.
싱가포르와 두바이는 신관방주의적 낙원이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측면에서 매우 잘 관리된 나라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극도로 의식하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는 매우 거친 탈식민지적 아스팔트 정치에서 출발했다—집권당의 이름이 아직도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일 정도다. 나는 솔직히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이름을 떠올리기 어렵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특히 정치와 정치적 자유를 억누르는 데 매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나라로 유명하다. 내가 이해하기로는—혹시 틀렸다면 누군가 고쳐주기 바란다—싱가포르 사람 대부분은 반정부적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사람들은 정말로 자신의 삶에만 집중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반정부적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미국에서 인종주의나 극단주의 정치에 관여하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 싱가포르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위이며, 이는 미국에서 보호받는 소수자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는 것과 비슷하다. 최소한 사회적 실수이고, 심하면 직업을 잃을 수도 있다.
물론 나로서는 정치적 올바름을 옹호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지식인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식 정치적 올바름조차 감당하기 벅찰 때가 많다.
하지만 나는 홉스의 한 가지 주장에는 동의한다. 정부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정부가 아니다. 침략군의 모든 병사를 체포하고 기소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국내의 군사적 정치운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정치 조직을 금지할 권력을 갖지 못한 국가는, 신페인(Sinn Féin)과 IRA(Irish Republican Army) 같은 정치-군사 연계 조직에게 문을 활짝 열어놓는 셈이며, 이는 모든 정당에게 준군사 조직을 붙일 명분을 제공하는 꼴이 된다. 바이마르 독일에서도 심지어 사민당(SPD)조차도 돌격대(Sturmabteilung, SA)에 해당하는 자신들만의 조직을 갖고 있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정치적 자유의 정지는 싱가포르가 그저 민주주의가 초래하는 참변—그리고 최근 역사에서 실제로 크게 겪었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조치일 뿐이다. 이 점을 인민행동당(PAP)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비스마르크의 언론 관련 격언인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라는 이 문구를 현대에서 더 잘 구현한 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구상하는 이상적 신관방주의 국가에서는, 정치가 없으므로 정치적 자유도 없다. 정부가 의견을 남길 수 있는 소원수리함을 운영할 수도 있고,
고객 만족도 조사나 여론조사 정도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 조직이 존재하지 않고, 그럴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거주민 집단도 강압을 통해 국가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안정성 덕분에,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무엇을 쓰든 상관없다. 국가가 그것을 신경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당신의 사상·언론·표현의 자유는 더 이상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오직 개인적 자유가 된다.
1. 몰드버그는 스스로에게 “군주주의자(monarchist)”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을 거부하지만, 이는 주로 그 용어의 현대적 의미—즉 입헌군주제(상징적 군주제를 지지하는 사람)— 때문이다.
그러나 「미제스에서 칼라일까지(From Mises to Carlyle)」에서 몰드버그는 자신을 “왕당파(royalist)”, 즉 절대군주제 혹은 ‘신권적(divine-right)’ 군주제의 지지자로 묘사한다.
자세한 내용은 「현대 세속 지식인을 위한 신권적 군주제(Divine-right monarchy for the modern secular intellectual)」, 그리고 「패치워크: 21세기형 정치 체제(Patchwork: A Political System for the 21st Century)」를 참조하라.
2. 몰드버그는 이후 중상주의(mercantilism)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수정했다. 그가 「샘 알트만은 횡설수설대는 바보가 아니다(Sam Altman is not a blithering idiot)」에서 말하길,
“사실 나는 중상주의자다. 내가 경제학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를 읽으며 배웠다. 뭐, 리스트와 미제스(Mises)에게서 말이다. 묘한 한 쌍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나는 예전 용어로 말하자면 ‘정치경제’라고 불리던 분야에서, 이 두 훌륭한 튜튼족(Teutonic) 신사—서로 반대편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의 철학 바깥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정말로 믿는다.”
원문 링크: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07/08/against-political-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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