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시게루의 외교와 그 계승자들
https://www.nids.mod.go.jp/event/proceedings/forum/pdf/2003/forum_j2003_09.pdf
패전국의 외교 전략 ―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외교와 그 계승자들 ―
나카니시 히로시(中西 寛)
서론
전략을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보유한 역량으로 달성하기 위한 합리적 수단의 선택이라 정의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만큼 전략 수립이 어려웠던 국가는 드물 것이다. 1945년 8월의 패전으로 일본은 국가 역량을 크게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일본은 군사력을 거의 완전히 잃었고, 경제적 타격도 심각했으며, 외교적으로도 패전국으로서 점령·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말하자면 일본은 국제정치에서 주체적 행동 능력을 상실하고 수동적 객체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략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패전 후 불과 수십 년 만에 일본이 세계 유수의 경제대국이 된 과정을 돌아본다면, 전후 일본이 전혀 전략 없이 운에만 기대어 그 위치에 올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 보고서에서는, 많은 갈등과 혼란을 겪었음에도 1945년부터 1970년 무렵까지의 전후 일본 외교가 거시적으로는 일정한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 상당히 일관된 전략을 갖고 있었다고 본다. 그 목표는 패전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서 정당한 일원으로서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고, 일본에 주어진 힘과 한계를 냉정하게 파악하며, 국제환경의 현실을 주시함으로써 전후 일본 외교전략의 기본 틀을 세운 인물은 패전 직후 약 10년 동안 외무대신·총리를 지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였다. 그의 외교노선은 1960년대 이후 일본에서 재평가되었고, 1980년대에는 “요시다 독트린”이라는 표현이 정착했다. 그러나 최근의 자료 공개와 연구자들의 재검토에 따르면, 종래의 요시다 외교론은 경제지향적 측면을 과도하게 강조해 왔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요시다가 일본의 경제 재건을 중시하고, 군사력 대신 경제적 상호이익 관계를 외교의 축으로 삼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목표는 그에 그치지 않는 보다 정치적이고 포괄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일본인의 감정과 국제환경 속에서 실현 가능한 방향이기도 했다. 바로 이 점이 요시다가 구축한 외교전략이 전후 일본 외교의 안정적 기반이 될 수 있었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본 보고서는 요시다가 골격을 세운 전후 일본 외교전략에 실제 살을 붙인 것은 그의 뒤를 이은 지도자들이었다는 점도 다룬다. 그 계보는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흐름: 경제 발전, 국제사회에 대한 비군사적 관여, 자유주의적 국내 조화를 중시한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 및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의 계통
두 번째 흐름: 반공주의, 국제사회에서의 위신·독립성 회복, 민족주의적 요소를 강조한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계통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는 이 두 계통을 융합한 입장이었으며, 미국의 점령 상태가 지속되던 오키나와의 시정권 반환을 최대 목표로 삼아 1972년 이를 실현한 뒤 퇴임했다. 두 흐름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패전국 탈피’라는 외교 전략 목표에서는 협력하여 그 성과를 이루어냈다.
1. ‘외교전략’의 의미
먼저 ‘외교전략(diplomatic strategy)’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자. 외교와 관련해서는, 해럴드 니콜슨(Harold Nicolson)이 제시한 유명한 구분 ― ‘대외정책(foreign policy)’과 ‘외교(diplomatic negotiation)’가 있다. 니콜슨에 따르면, 전자는 국내의 정치 과정과 절차에 따라 형성되는 정책결정 과정을 의미하는 반면, 후자는 타국과의 평화적 조정을 목표로 한 협상을 의미한다. 즉, 대외정책은 다양한 국내적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입법적’ 성격을 지니고, 외교(협상)는 교섭 기술에 밝고 상대국의 상황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집행적’ 업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니콜슨이 경험한 시대적 변화 ― 즉,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소수 엘리트가 대외관계를 독점하던 시대가 끝나고, 대외관계에 대한 국내 정치와 여론의 영향력이 커진 시대의 도래 ― 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니콜슨은 국가의 대외정책과 외교 교섭이 성공하기 위한 기반을 형성하는 보다 상위의 개념, 즉 외교전략(diplomatic strategy)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니콜슨의 정의에서 대외정책은 오직 국내 과정의 산물일 뿐이며, 그것이 그 국가가 처한 국제환경에 적합하고 실현 가능한지를 보장하지 않는다. 또한, 외교 교섭이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에 의해 수행되더라도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기적처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외정책과 외교 교섭이 성공하려면, 국가의 대외정책이 전체적으로 정합성을 갖추고, 그 국가가 처한 국제환경에서 실현 가능한 범위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특히 국내 체제의 민주화와 국제관계의 상호의존 심화는 국내에서 분출되는 대외적 요구를 끝없이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으므로, 다양한 요구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실현 불가능하거나 중요도가 낮은 요구보다 실현 가능하고 중요한 요구를 앞세우도록 여론과 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이러한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외교전략이다. 외교전략은 공식적으로는 외교 ‘독트린(Doctrine)’의 형태로 제시되며, 정부 내부에서는 다양한 대외정책과 외교 교섭을 통합하는 설계도 역할을 한다.
외교전략·대외정책·외교교섭의 구분은 군사 분석에서 익숙한 전략(strategy)·전술(tactics)·전투(battle)의 구분과 유사하다. 외교 교섭이나 전투는 훈련된 외교관·병사들의 과업이고, 대외정책이나 전술은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관료·장교의 과업이다. 외교전략과 군사전략은 정부 지도자와 군사 지도자들의 역할에 해당한다.
군사사가 마이클 하워드(Michael Howard)는 20세기 대전략(grand strategy)의 역사를 다룬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군사) 전략은 항상 자국의 독립을 목표로 하고, 때로는 영향력의 확대, 때로는 지배권의 확장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군사력, 경제력, 동맹국, 여론을 제시한다. 외교전략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목표를 설정하며, 다만 사용되는 수단은 비폭력적·평화적 수단에 한정되어 군사전략보다 다양하고 정교한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이처럼 외교전략의 관점에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일본만큼 전략 수립이 어려운 조건에 놓였던 국가는 드물 것이다. 전략은 언제나 목표와 수단의 상관관계 속에서 설정되는데, 패전 직후 일본은 국가 역량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군사적으로 완전한 패배를 당했고, 포츠담 선언에 따라 철저한 비무장화를 강요받았다. 경제적으로는 국가 자산의 약 3분의 1을 전쟁 피해로 잃었고, 해외 식민지도 모두 상실했으며, 해외에서 600만 명의 일본인이 급속히 귀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외교적으로는 전쟁 말기에 이미 완전한 고립 상태였고, 전후에는 연합국이 조직하는 UN 체제 속에서 일본이 ‘구 적국’이라는 2등 국가의 지위에 놓일 것이 예상되었다. 국내 여론 역시 파국적 전쟁을 초래한 책임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전후 일본은 달성해야 할 목표를 제한하고, 한정된 역량을 현명하게 사용함으로써 외교전략을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사례가 되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과 달리, 전후 국제질서의 정당성 자체를 기본적으로 수용한 뒤 조속한 국제사회 복귀를 지향했고, 국제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삼아 1970년 전후에는 그 목표를 대부분 달성했다.
1950년대 일본은 독립을 회복했고, GATT·국제연합(UN) 같은 핵심 국제기구의 회원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OECD 가입을 통해 선진국의 지위를 확보했으며, 1970년대에는 선진국 정상회의(서방 선진 7개국 정상회의, 훗날 G7)의 구성국이 되는 등 국제질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부과되었던 여러 제한은 점차 철폐되었고, 일본 점령 당시 맥아더가 집요하게 고수했던 오키나와의 미국 보유조차 결국 일본에 시정권이 반환되는 형태로 종결되었다.
물론 이러한 외교적 성과가 일종의 ‘행운’에 의해 가능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실제로 뒤에서 보겠지만, 전후 국제환경은 독특한 방식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일본의 성공이 어떠한 외교전략도 없이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은 상식에 반하며, 오히려 어떤 형태로든 전략의 존재를 추정하게 한다. 그 전략은 일본이 패전국이라는 위치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그 지위를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다양한 수단을 종합적으로 동원한 결과였다.
일본인 스스로는 일본이 일관된 외교전략을 추구해 왔다는 점을 인정하기를 주저하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미국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독트린’이 강조되는 문화도 없다. ‘전략’이라는 개념으로 사고하는 정치인이나 전문가가 적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일본은 분명 외교전략이라 부를 만한 틀을 유지해 왔으며, 그 형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지도자도 지목할 수 있다. 전후 일본의 경우, 그 외교전략의 형성자로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를 들 수 있을 것이다.
2. 요시다 시게루의 전략 구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가 전후 일본 외교에서 갖는 중요성은 이제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리 지적되어 왔다. 패전 후 10년이라는 결정적 시기의 거의 대부분을 총리 또는 외무대신으로서 이끌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가 남긴 유산의 규모는 부정하기 어렵다. 특히 1960년대, 국제정치학자 코우사카 마사타카(高坂正堯)가 요시다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한 이후 요시다 외교의 중요성은 전후 일본 외교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정통 교설처럼 자리 잡았다. 영어권에서는, 코우사카 이후의 요시다 재평가 흐름에 비판적 입장을 취한 존 다워(John Dower)의 저작이 요시다 시게루에 대한 유일한 본격적 전기이며, 그의 연구는 일본의 진보적 좌파 견해와 대체로 일치하지만, 요시다를 긍정하든 비판하든 간에 그의 결정이 지닌 중요성 자체에는 이견이 없다.
코우사카의 요시다 평가가 매우 포괄적이고 섬세하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시다는 일본이 군사적으로 완전히 패배했음을 인정한 뒤, ‘좋은 패자’로서 점령정책에 협력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패배를 외교적 책략을 통해 일정 부분 만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특히 요시다는 군사력이 대외관계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상대적·부차적 요소로 파악하고, 오히려 경제적 목표의 추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미·영 해양세력과의 우호 관계 구축, 개방적 국제경제체제에의 적극적 참여를 중시했다.
반대로 냉전으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일본의 재군비에는 소극적이었으며, 대신 미·일 안보체제 아래에서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는 길을 선택했다.
이러한 요시다 평가 방식은 1970~80년대 일본에서 정착되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요시다 독트린(Yoshida Doctrine)’이라는 표현이 요시다 외교전략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일본에서 이 용어를 처음 대중화한 인물은 국제정치학자 나가이 요우노스케(永井陽之助)로 알려져 있다. 나가이에 따르면, 요시다 독트린의 핵심은 경제 중심주의, 경무장, 미·일 안보체제라는 세 기둥이며, 이것이야말로 전후 일본 외교의 ‘정통 교의(orthodoxy)’로 지속되어야 할 전략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확립되던 바로 그 시기부터, 요시다의 외교전략이 전후 일본 외교의 정통 노선이라는 점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시각이 점차 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일본 전문가 케네스 파일(Kenneth Pyle)은 나가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Yoshida Doctrin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그 의미를 ‘일본형 중상주의(Japanese-style mercantilism)’로 규정하며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즉, 국제질서 유지나 국제안보 문제에 대한 부담을 회피하고, 경제적으로 규정된 자국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몰두하는 외교전략으로 요시다 독트린을 정의하고, 이를 문제시한 것이다. 요시다의 경제 중심주의가 곧 자기중심적 정책의 원천이라는 비판이었다.
더 나아가 1990년 전후로 냉전 종식과 걸프위기·걸프전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경험한 뒤, ‘요시다 독트린’은 일본 내부에서도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파는, 요시다가 헌법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한 채 자위대를 출범시키고, 점령군 및 미·일 안보체제에 의존함으로써 국민의 독립심을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좌파는, 요시다의 대미 배려가 지나치게 과도하여 결과적으로 일본을 미국에 종속적 외교 구조에 묶어 두고, 미군기지 등 각종 과도한 부담의 원인이 된 미·일 안보체제의 책임자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변화는 1990년대 이후 일본이 외교·경제적으로 좌절감을 경험하고, 일본의 자기 이미지가 이전보다 더 비판적으로 변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사료 공개와 연구의 진전은 요시다 외교에 대해 또 다른 관점에서의 재평가를 촉진하고 있다. 코우사카가 제시하고 이후 나가이 등이 정리해 온 ‘요시다 노선’ 혹은 ‘요시다 독트린’의 이미지가, 경제 중심주의와 재군비에 대한 주저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정작 요시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안보 문제에 대한 강한 관심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특히 새로 공개된 이른바 ‘니시무라 조서(西村調書)’는, 요시다 아래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 체결을 실무적으로 총괄한 외교관 니시무라 쿠마오(西村熊雄)가 외무성을 떠나기 전에 정리한 기록물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요시다 주변의 움직임과 관련 문서를 밝혀낸 자료이다. 이 사료에 따르면, 1950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강화 준비를 시작한 요시다는 안보 문제에서 직접 주도권을 잡고, 총리관저에 외교·군사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회의를 설치하여 검토를 의뢰했고, 그 결과를 외무성의 준비 작업에 반영시킨 것으로 나타난다.
요시다 외교의 정점은 1951년 1월~2월에 방일한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등과의 교섭이었다. 덜레스는 중국 공산화 등 동아시아 외교의 악화로 어려움을 겪던 트루먼 행정부가 공화당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국무성 고문으로 임명한 인물로, 대일 강화 문제 해결을 위임받고 있었다. 덜레스의 주요 관심사는, 한국전쟁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동아시아 냉전 상황 속에서, 일본이 강화 독립 후 미군 점령이 해제된 상태에서 서방 진영을 선택하고, 특히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을 의사가 있는지 여부였다.
덜레스가 대표하는 미국의 의도에 대해, 요시다의 외교전략이 어떻게 정교하게 구축되어 대외정책과 외교교섭이 집행되었는가는 여기서 상세히 다룰 여유가 없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요시다의 외교전략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 패전에 이르게 한 일본의 정치체제를 전통적·보수적 요소와 개혁적·진보적 요소를 혼합하여 재구축할 것. 구체적으로는, 국민 다수의 존경을 받는 천황제는 ‘상징천황제’라는 형태로 비정치화하여 유지·정착시키는 한편, 국민주권·평화주의 등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급진적 국내여론과 점령군의 요구에 부응하고, 연합국의 대일 불신을 완화하는 것.
2. 전전(戰前) 일본이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으로서 세계 주요국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러한 지위를 되찾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주권을 회복할 것. 장기적으로는 패전국 지위를 벗어나 국제사회에서 일본국헌법 전문이 말하는 ‘명예 있는 지위’를 차지하는 국가로 복귀하는 것.
3. 전전 일본이 군국주의화하고 무모한 확장주의를 택하게 된 배경에는 국내 경제의 취약성이 있었다고 보고, 미국·영국이 주도하는 브레턴우즈 체제에 조속히 참여하여 자유무역의 혜택을 활용함으로써 전후 복구를 추진하고 경제 발전의 기초를 확립할 것.
4. 일본이 독자적 군사력을 보유하여 대외적 기능을 갖추는 일은 국내 정치적 대립을 심화시키고, 아시아·오세아니아·유럽 각국의 경계심을 높이며,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이 될 뿐 아니라 전전 군부와의 인적 연속성을 남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한국전쟁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크지 않으며, 특히 미국이 일본 방위에 확실히 관여하고 있다면 대외적 안전보장은 당분간 확보될 수 있다.
5. 공산주의의 위협은 심각하며 명확히 대결해야 한다. 그러나 그 위협의 본질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의 것으로, 사회·경제적 문제, 테러에 의한 불안 조성, 선전을 통한 정치적 침투가 핵심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치안력 강화, 자본주의적 정치·경제 체제의 안정과 번영, 대항 선전(프로파간다) 등이 주된 수단이 되어야 하며, 군사적 대응은 오히려 부정적 효과가 크다.
요컨대 요시다는 다음의 세 가지를 일본 외교의 기본 목표로 삼았다.
(1) 일본이 패전국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
(2) 경제적 번영의 추구와 비군사적 수단을 중심으로 한 대외관계의 구축,
(3)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위협에 대해 대칭적(동종) 수단을 통해 봉쇄하는 것.
이러한 목표들은 당시 일본 국민 다수, 특히 보수적 지도층에게 환영받는 것이었으며, 또한 당시 일본이 처한 국제환경 속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동시에 추구 가능한 목표들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추진하는 데 있어 요시다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환경적 요인이 요시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첫째, 일본의 지리적·인적 자원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마주하며, 유라시아 대륙의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소련·한반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접해 있는 일본은 전략적 요충지였고, 특히 미국에게는 반드시 우군으로 붙잡아 둘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더욱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산업화를 시작한 일본은 천연자원이 거의 없었음에도 높은 수준의 인적·지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둘째, 말할 필요도 없이 냉전의 발발,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냉전 격화였다. 이는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더욱 높였다. 일본은 군사적으로 소련·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억제하고, 한반도·소련 극동·중국을 향한 작전 기반으로 중요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비서구권에서 드문 반공 국가로서 아시아 국가들을 서방에 끌어들이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안정된 일본의 존재는 자본주의의 보편적 효용을 공산주의에 맞서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되었다.
더욱이 요시다에게는 냉전기의 국제환경에서 군사력이 특수한 성격을 갖게 된 점도 운이 따랐다. 즉, 냉전이 진행될수록 군사력의 역할은 잠재적 적국의 군사행동을 억지·제한하는 기능에 집중되었다. 한국전쟁이 결국 38선 분단 상태를 그대로 둔 채 휴전으로 끝난 사실은 군사력의 ‘귀납적 제한성’을 결정짓는 사건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전후 일본이 대외적으로 행사 가능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다는 조건은, 외교전략 실행에 있어 장애가 되더라도 그 정도가 제한적이었다.
1) 미·일 안보관계의 구축
요시다에게 미·영과의 협조는 전후 일본 외교의 기본 노선이었다. 특히 냉전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는 것은 일본의 안보에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는 한편으로 일본 외교에 구속 요인이 될 수 있었고, 미군 주둔이나 재군비 요구는 국내적으로 큰 부담이 될 위험도 있었다.
요시다는 덜레스와의 협상을 통해 미·일 안보관계 설정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강화 후 미군 주둔의 지속, 강화 후 점진적 방위력 정비 등 미국 측 요구에 일정 부분 양보하며 타협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요시다는 대미 협상에만 집중하거나, ‘값싼 안보’를 얻는 데만 목표를 둔 것이 아니었다. 일본과 미국의 국력 차는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그는 동맹 안정의 조건으로서 ‘상호성의 감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덜레스와의 협상에서 요시다는 일본의 산업력 제공을 통한 공헌을 제안하며 일본이 동맹에 기여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이는 한동안 ‘미·일 경제협력’ 구상으로 추진되었으나, 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면서 보류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요시다가 단순히 미국 의존만을 생각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2) 대(對)중국 정책에서의 적극적 태도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의용군)과 전투가 벌어진 뒤, 미국은 극단적으로 반중(反中) 노선을 강화했다. 그러나 요시다는 중·소 관계가 일체화된 ‘단단한 블록’이 아니라고 꿰뚫어 보고, 자본주의 국가가 조기에 중국과 접촉해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처럼 독자노선화를 유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일본의 실업가들을 ‘민주주의의 제5열(第五列)’로 삼아, 중국이 자본주의에 접근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미국 측을 설득했다. 이는 물론 일본 경제에도 이익이 되는 방향이었지만, 요시다는 이를 공산주의에 대한 ‘역(逆)침투 작전’으로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요시다의 제안은 미국이 수용하지 않았다. 미국 여론, 특히 의회는 강경한 반중 감정이 지배적이었고, 덜레스 등 미국 측 인사들은 “일본과 중국의 접촉은 중국을 서방에 가깝게 만들기보다 일본을 동쪽(공산권)에 가까워지게 할 위험이 더 크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요시다의 제안은 그가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대해 독자적 인식과 판단을 갖고 있었으며, 그 인식에 기반해 정책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요시다의 외교전략은 1951년 9월에 체결되어 이듬해 4월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는 형태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조약은 완전히 고립되고, 참패한 국가에 대한 강화조약로서는 매우 관대한 것이었으며, 배상 범위도 제한적이었고, 오키나와를 비롯한 주변 여러 섬들에 대한 일본의 주권도 부정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조약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냉전과 특히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으나, 동시에 요시다가 외교의 큰 흐름을 읽는 능력과 기민한 판단력을 발휘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요시다는 강화·독립 이후 자신이 구상한 외교전략을 충분히 추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관료 출신이었던 요시다는 국내 정치에서 강한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고, 특히 보수 정치인들이 정치 전면에 복귀하자 주도권을 잃기 시작했다. 게다가 재군비에 대한 그의 모호한 태도, 일본국헌법의 비무장 조항과 미·일 안보조약이라는 동맹 관계 속에서의 미군 주둔 문제, 이 두 요소의 모순은 요시다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키웠다. 특히 미군 기지 문제는 우익에게는 일본의 독립을 훼손하는 굴욕적 태도, 좌익에게는 대미 종속의 상징으로 비난받았다.
또한 요시다는 미국과도 갈등을 안고 있었다. 미국, 특히 미군부는 강화·독립 이후 일본이 조속히 군비를 증강하여, 특히 30만 명 규모의 육상 전력을 갖추고, 미국 지상군이 일본 방위 의무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다는 그러한 대규모 재군비는 경제적 부담이 크고, 국내 정치적 분쟁을 유발하며, 옛 군부 세력의 부활을 허용하고, 국제적 경계심을 높일 것이라고 보며 반대했다.
요시다는 헌법을 이유로 직접적인 재군비를 거부하고, 경찰예비대 → 보안대 → 자위대로 병력과 임무를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길을 택했다. 또한 육·해·공군의 병종을 갖추되, 육군 중심의 체제를 만들지 않았다. 육상 전력은 편제상 18만 명을 목표로 했으며, 이후 상향 조정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요시다는 전쟁 시기부터 전후에 걸쳐 일어난 국제정치의 거대한 변화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이 시기 한반도,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여러 국가들이 독립했으나, 요시다의 세계 인식은 여전히 유럽·미국·중국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한국·필리핀·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과 국교 수립을 추진했으나, 큰 혼란 끝에 필리핀과 배상협정을 체결한 것 외에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1954년, 요시다 정권은 내부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한계에 봉착했고, 요시다는 총리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시다의 외교전략은 요시다를 축출했던 세력을 포함해,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실천되어 나가게 된다.
3. 요시다 시게루의 후계자들 ― 두 가지 계보
요시다가 정계를 은퇴한 뒤, 보수정당들은 재편되었고 1955년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출범했다. 자민당에는 요시다의 직계였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그룹도 합류했지만, 초기에는 반(反)요시다를 내세운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등이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요시다의 정책이 국가의 독립과 자위력 정비라는 기본 정책을 등한시하고 미국 의존적 외교를 했다고 비판했다.
그들의 외교는 특히 국제사회 복귀라는 측면에서 성공적이었다. 1955년, 일본은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가입에 성공했다. (다만 여러 국가로부터 제한적 조건을 부과받았다.) 하토야마 이치로는 요시다와의 경쟁심도 작용하여 소련과의 전쟁 상태 종결을 추진했다. 그리고 스탈린 사후 ‘해빙 정책’을 보이던 소련과 1956년 일소 국교 회복 선언을 성사시켰다. 북방영토 문제가 보류되었기 때문에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못했지만, 일본은 소련과도 공식 외교 채널을 구축했다. 그 성과 중 하나가 바로 1956년 일본의 유엔 가입이었다. 또한 이들은 동남아시아·반공적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에도 능했다. 기시는 총리로서 대만·동남아·오세아니아를 순방하고, 인도네시아와의 배상 협상을 타결했다. 이들에게 반공 민족주의는 친화적인 주제였다.
독립과 국가 자존을 중시한 그들에게 아이러니하게도 대미관계와 방위력 문제는 어려운 과제였다. 외상 시게미츠 마모루는 1955년 여름 방미하여 일본의 방위력 정비 계획, 주일 미군의 장래 철수, 미·일 안보조약을 ‘대등조약’으로 개정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이런 요구를 인정하지 않았고, 시게미츠를 호되게 꾸짖었다고 한다.
시게미츠뿐 아니라, 독립을 내세운 민족주의자들에게 냉전기 일본이 어떤 군사력을 갖추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본질적인 난제를 안겼다. 냉전 체제에서는 핵을 대량 보유한 미국·소련 이외의 국가가 군사력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시 내각은 출범 초기에 ‘국방의 기본방침’을 각의에서 결정하고 방위력 장기 정비 계획을 추진했지만, 미국이 핵억지력 중심 체제로 전환하고 일본의 재군비를 기다리지 않은 채 지상군을 일본 본토에서 철수하자, 일본의 방위력은 명확한 군사 목표 없이 축적되는 구조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국내 정치에서도 지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토야마는 장기 집권한 요시다 정권에 대한 국민적 반발 덕분에 일시적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예상만큼 의석을 늘리지 못했다. 특히 그들이 내세운 자주헌법 제정 슬로건은 대중적 매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기시 노부스케도 중소기업과 농업 보호 확대, ‘미·일 대등’을 내세워 대중적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기시는 잇따라 국내 치안 강화 정책을 내놓았고, 그 강권적 성향이 비판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기시를 비롯한 지도자들의 반공주의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어렵게 만들었다. 1957년 6월 기시가 대만을 방문해 장제스(蒋介石)의 대륙 반공(反攻) 노선을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중국은 기시 총리를 강하게 비난하며 그때까지 진행되고 있던 정치와 경제의 분리, 즉 정치적 대립을 유지하되 경제관계를 강화하는 노선을 중단시켰다. 일본 여론에서는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지 못하는 것은 자민당 정권의 대미 종속 노선의 결과라는 시각이 강해졌고, 기시는 위신을 손상당했다. 한편 기시는 미국의 지지를 얻어 일·미 안보조약 개정을 통해 ‘일미 대등(対等)’의 이미지를 내세웠으나, 당시 일·미 간의 힘의 차이를 고려하면 일본은 압도적인 주니어 파트너(Junior Partner)일 수밖에 없었다. 기시의 안보 개정 결정은 특히 아이젠하워의 방일에 맞추어 조기 비준을 강행한 방식이 큰 비판을 불러일으켜, 전후 최대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번졌다. 안보 개정은 실현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기시는 과거의 정적이던 요시다 시게루의 지원까지 필요로 했고, 마지막에는 국내 혼란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결국 그들은 요시다가 외교전략의 목표로 설정한, 즉 일본 국내의 정치·경제적 안정의 실현, 그리고 일본의 국제적 정위(定位) 확립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이시바시 탄잔(石橋湛山)과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정권은 요시다의 경제 중시, 중국 중시, 일미 우호관계를 대외정책의 축으로 삼는 노선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시바시는 병으로 인해 단기간에 퇴진해야 했지만, 적극적 재정정책을 통해 고도경제성장의 기초를 놓았다.
이케다는 요시다의 제자였으며, 1953년 방위력 정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방미해 여러 이유를 들어 방위력은 급속히 강화할 수 없다고 설명했던 경험이 있었다. 1960년, 기시를 이어 총리가 된 이케다는 일·미 안보조약의 반공 동맹적 색채를 약화시키고 협조적·조정적 성격을 강화하려 했다. 또한 이케다는 유명한 ‘소득배증(所得倍増) 정책’을 제시해 국민의 관심을 안보투쟁이나 노사 대립에서 경제성장으로 전환시켰다. 헌법 문제에서도, 자민당 주도의 개헌 추진을 일단 중단시키고 전후 체제의 정당성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케다는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뿐 아니라 유럽도 방문하여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를 널리 인식시키려 했다. 특히 GATT 11조국, IMF 8조국 지위를 획득해 선진국으로서의 의무를 완전히 부담하였고, OECD에 가입함으로써 비(非)서구권 국가 중 유일한 경제 선진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케다 정권하에서 일본 경제는 순조롭게 성장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자 일본 사회는 뜨겁게 들떴다. 올림픽에 맞추어 도쿄–오사카 간 신칸센이 개통되었고, 일본의 철도 기술이 세계 최고라는 이미지가 국내외에 강하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패전으로 인해 열등감에 시달리던 일본 국민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 부여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964년, 이케다가 병으로 퇴진하고 그 자리를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에게 넘겼다. 사토는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이자 이케다의 정적이었지만, 요시다에게 발탁되어 정계에 입문한 관료 출신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요시다를 깊이 존경했다. 사토는 형(기시)이 대표했던 민족주의적 노선과, 이케다가 성공시킨 경제성장 노선을 결합해 정착시켰다고 할 수 있다. 사토 자신은 경제성장 그 자체를 강하게 추구하기보다는 사회적 조화를 중시하고, ‘나라를 지킬 기개’의 함양을 강조하는 정치인이었지만, 일본 경제는 사토 정권 시기에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사토 정권은 7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일본 역사상 최장기 정권이 되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고도성장 덕분이었다.
사토 에이사쿠는 결코 말을 많이 하는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정권을 잡은 초창기부터 오키나와의 시정권(施政権) 반환을 목표로 내걸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이 격렬한 지상전을 거쳐 오키나와를 점령한 이후, 그곳에서는 미군이 광범위한 기지를 건설하고 주민 통치를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오키나와 주민들 사이에서 반미 감정과 독립 의식이 고조되었고, 그 운동은 일본 본토에도 확산되어 자민당을 공격하는 정치적 소재가 되었다. 더구나 사토에게 오키나와 반환은 일본이 패전국 지위를 벗어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목표이기도 했다. 1965년, 사토는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오키나와를 방문한 자리에서 “오키나와가 돌아오기 전까지 전후는 끝나지 않는다”고 명확히 말했다.
그러나 오키나와가 미국에 매우 높은 군사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은 분명했으며, 어떻게 미국으로부터 시정권 반환을 인정받을지가 최대 난제였다. 사토는 경제성장으로 확대된 일본의 경제력을 군사력으로 전환하는 대신, 오히려 그 반대 방향—군사화하지 않는 것—을 외교적 자산으로 활용했다. 즉 일본은 군사대국이 되지 않을 것, 특히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을 것을 명확히 함으로써, 당시 미국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핵확산금지 체제(NPT) 실현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한편 사토는 경제력을 활용해 서방의 아시아 내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은 이케다 내각 때부터 진행되고 있었으나, 사토 정권은 한국에 5억 달러의 경제협력을 제공함으로써, 식민지 지배 청산 문제나 북한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우회하여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성사시켰다. 또한 사토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분쟁 당사국에는 무기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무기수출 3원칙’을 제시하는 한편, 베트남 주변국에는 적극적으로 경제 지원을 실시하여 1967년 ASEAN 결성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문화대혁명의 혼란기에 들어선 중국과의 관계는 정체되었지만, 일본은 아시아에서 일정한 안정적 지위를 구축했다.
이와 더불어 사토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신이 역할을 다할 의지를 보임으로써, 오키나와 시정권 반환을 이루려 했다. 미국 역시 오키나와의 군사적 역할을 재검토하는 한편, 닉슨 행정부 출범과 함께 동맹국들에게 부담 분담을 요구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오키나와의 군사적 기능 중 가장 민감한 부분, 즉 핵무기 배치와 한국전 유사시의 긴급 전개(reactive deployment)였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 당시, 미군의 기지 사용 및 핵 반입은 일본과의 사전협의 대상이 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일본은 유일한 피폭국이라는 여론 때문에 모든 핵 반입을 거부한다는 태도를 공적으로 표명했고, 한국전 유사시 역시 사전협의 대상이 된다고 설명해 왔다.
결국 공식적으로는 사전협의제도(事前協議制)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비공개로 미·일 간 특별한 합의가 존재했다는 견해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반적이다. 어찌 되었든 사토는 1969년 방미하여 3년 이내 오키나와 시정권을 일본에 반환한다는 합의를 닉슨 행정부와 성립시켰다.
요시다는 그보다 2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사토가 오키나와 반환 합의 직후 일기에 기록한 것은 바로 요시다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방미 직후 실시된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역사상 최다인 300석을 획득했으며, 용공적인 좌익 세력은 완전히 소수파로 전락했다. 일본의 국내체제를 안정시키고, 국제적으로 유력한 주요국의 지위를 회복하며, 공산주의의 위협을 봉쇄하고, 경제적 번영을 달성한다는 요시다 시게루의 외교전략은, 1972년 오키나와의 시정권 반환이 실현됨으로써 일단락된 형태의 완성을 보았다.
결론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일본의 외교전략을 규정한 인물이다. 그는 패전 후 일본이 가진 힘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일본에 남은 자원과 국제환경을 신중히 분석하여 실현 가능한 목표와 그 수단을 명확히 설정하였다. 그것은 흔히 말해지는 것처럼 경제주의 일변도로 정치·군사적 측면을 간과한 노선이 아니었다. 요시다에게는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지위 회복,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 경제적 번영에 의한 시민 생활의 안정이 분리될 수 없는 목표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목표에 배치되는 외교수단—예를 들어 냉전기 중립주의 추구나, 대규모 군비를 급속히 정비하는 등의 방식—을 요시다는 과감하게 부정했고, 내외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관철하였다.
그러나 요시다가 뛰어난 외교 감각과 정치적 통찰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뛰어난 정치 지도자라 보기는 어려웠다. 적어도 민주화된 정치체제의 지도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었다. 일본이 강화·독립을 달성하고 국제사회 복귀의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모호한 표현으로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지 않는 요시다식 정치 스타일은 자산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결국 요시다 자신이 물러나고 그가 설계한 외교전략의 실현을 후계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필요했다.
요시다 정권 시기에 요시다를 공격한 이들조차도, 그리고 그를 지지했던 이들조차도, 넓은 의미에서 요시다의 외교전략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요시다가 인식한 전후 일본의 힘의 한계가 바로 요시다 전략을 후계자들이 계승하게 만든 것이다. 하토야마·시게미츠·기시 등은 요시다 외교를 비판하고, 보다 국가주의적이며 독립과 대등성을 중시하는 외교를 추구하려 했지만 내외적 제약에 부딪혀 결국 요시다와 화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시바시와 이케다는 요시다의 경제 중시 측면을 계승·발전시켜 경제성장에서는 빼어난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지도력이 부족해 국민에게 명확한 정치적 이미지를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사토는 두 계보를 계승해 축적된 경제력을 기반으로 오키나와 시정권 반환이라는 상징적 목표를 내걸고 그 실현에 성공했다. 이는 요시다가 제시한 외교전략이 본질적으로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러나 물론, 요시다 외교전략의 성공이 요시다나 그의 후계자들의 역량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역량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일본을 둘러싼 국제환경이었다. 냉전이라는 특수한 군사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대결 상황에서,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 반공주의의 정착, 경제적 번영은 미국을 지도국으로 하는 서방 진영의 전반적 목표와 일치하고 있었다. 한국전쟁과 동아시아에서의 동서 대립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상실한 대의명분과 전쟁책임 문제를 뒤로 미루게 했으며, 혁명 상황에 있던 아시아 여러 국가와의 관계도 제한하여 일본의 외교적 혼란을 억제했다. 더욱이, 열강이 스스로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나라가 군사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대신 군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해진 특수한 환경은, 대외적으로 행사 가능한 군사력이 거의 없었던 일본의 국력상의 결함을 전체적으로 가려 주었을 뿐 아니라, 경제력을 군사력으로 전환하지 않는 것 자체가 외교적 수단이 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은 사토 정권 말기에는 급속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냉전은 데탕트(détente)와 다극화의 시대로 변화하며, 일본은 국제사회와 서방 진영에 대해 더 적극적인 기여를 요구받게 되었다. 일본의 방위력과 미·일 안보체제의 존재 의의가 다시금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일본의 경제력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고, 이에 따라 국제질서에 어떻게 관여할 것인가가 본격적으로 묻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 국내에서도, 오키나와 반환의 성과로 고무된 이후, 일본이 앞으로 어떤 외교목표를 설정해야 하는지 모색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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